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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 ,고양이 등 동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천해수욕장에 근무 와 보면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데리고 여행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예쁜 옷을 입힌 온갗 멋을 부린 반려견들과 유모차같은 개모차에 태우거나 베낭같은 가방에 넣어 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는 그런 모습이 어찌나 꼴불견이던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마땅찮아했으며 요즘 심각해진 저출산 문제가 그런
사람들 때문일거란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나는 반려견과 반려묘를 더욱 싫어 했던 거 같다
그러나 요즘은 어디가나 반려견 반려묘와 함께 사는 세상이 되어 버린 거 같다
보령에서도 이번여름 대천해수욕장 개장 기간에 팻비치라는 걸 운영했는데 많은 반려견 동반 관광객들이 왔다
팻비치에는 반려견들이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이 관리감독 해주어서 반려건들
과 함께 놀 수 있어서그런지 인기 좋은 관광지로 이름을 날렸다
근래에는 팻비치 뿐 만 아니라 반려견과 함께하는 축제 등 이벤트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거 같다
애견동반 까페 애견동반 팬션 애견동반 공연장 등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안내문구이다
1인 가구와 노인가구 아이없이 사는 가구 등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라 반려견은 이제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며 특히 공원이나 아파트놀이터 천변길에서 반려견과 함께 운동하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가족 만나기도 어려워지고 친구 사귀기도 힘들어진 바쁜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반려견과 반려묘는 밀벗이
되어 우울증 과 건강에도 좋다 하니 어쩌겠는가~
이제는 어디서든 반려견 에티켓을 잘 지키며 함께 살아 가야 할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아이들 어렸을 적 체육사와 나이키 대리점을 경영 했었는데 가게는 대천역과 버스터미날이 있는 시내
최고 번화가에 있어 장사가 꽤 잘 되었으며 종업원도 여러명 있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매일매일 이었다
매장은 학생들 등 하교 시간이나 직장인 퇴근 시간이면 나이키 신발과 나이키 쟘바를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으며
그 시기 중,고등학교 교복자율화로 나이키 쟘바와 나이키 신발은 학생들 최고의 패션이어서 더욱 그랬다
거기다가 광산에서 돈 잘 벌던 광부들과 일반인들도 츄리닝패션이 유행하던때라 야간작업 해가며 츄레닝을 만들었다
가을이면 학교마다 전교생이 체육복 입고 운동회 하고 각 읍 면 동 마을마다 체육대회 와 도민체전 직장 단합대회
등 체육 행사가 많아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매일 저녁이면 교장 선생님이셨던 할아버지 퇴근시간에 맟춰서 아이 두명을 유모차에 태우고
할아버지댁으로 가서 손주들도 보여 드리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돌아왔다
할아버지댁은 시내 영업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천여중 앞 도로가 주택이었는데 80세 넘으신 애들 증조할머니도
계셨고 시어머니께서는 관절염으로 많이 편찮으셔서 그 일과는 내가 매일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이었다
지금 생각헤 보면 할아버지댁 가는길은 위험 천만 찻길에 고행길 이었다
그래도 매일 년년생 아이들 두 명을 유모차에 태우고 비포장 도로도 많았던 그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엔 최고급 AFRICA 유모차 이었는데도 360도 바퀴 회전이 안되어서 내 팔뚝이 고생을 많이 하였다
요즘 쌍동이를 키우는 딸이 쌍둥이유모차 밀다가 어깨 팔뚝 온 몸 골병 들었다며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차마고도 같았던 고행길 이었지만 행복했던 나의 젊은엄마 시절이었다
요즘 쓰는 말로 "라때는 말야" 라고 며느리에게 말했단 큰일 날 소리라는 것 도 잘 알고 있다 ㅎ
그 아이가 커서 아빠가 된 아들은 주말이면 손주들 3명을 데리고 자주 오고 못 올 때면 화상통화로라도
손주들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제 세살 된 쌍동이 외손녀 두명도 화상통화로 매일 만나지만 그래도 자꾸 보고 싶고 궁금한 것도 많다
남편과 나는 그런 시간이 가장 재미 있고 기다려지며 손주들 5명이 언제나 화제 거리다
큰아이는 세발 자전거를 타고 동네 구경 사람 구경하며 할아버지댁 다녔는데 초등학교 입학 하기 전부터
할아버지댁 가는길에 있는 상가 간판을 보고 한글을 깨우치고 상점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고 해서 천재인가
하고 놀란 적 도 있다 ㅎ
그 후 큰아이 4 학년 때 할아버지께서는 대전 교육청으로 전근 가시게 되었고 그 길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어쩌다 요즘 차로 그 길을 지나다 보면 할아버지댁 대문이 있었던 곳과 개를 키우던 마당은 상가가 되었지만
그 뒤로 집이 있었던 곳을 보면서 애들 어릴 적 추억과 돌아가신 인자하셨던 시부모님 생각을 하며 지난다
아들과 딸이 몇년 후 보령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전 가수원아파트 할아버지댁으로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이제는 대천 장에서 꽃게며 주꾸미 간재미 잔뜩 사서 대전 무정차 버스타고 나혼자 다니는 버스길이 시작 되었다
아이들 어릴적엔 할아버지댁에 가면 항상 마당개와 고양이가 있었고 가족 모두 동물을 좋아 했었는데 대전 아파트에
사실 적에도 베란다에서 앵무새와 개를 키우셨고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에도 자주 가셨던 거 같다
어른이 된 지금도 아들과 딸은 할아버지댁 마당개 와 고양이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고 했다
딸은 초등학교 다닐적에 장래희망을 애견미용사 수의사라고 해서 엄마한테 야단 맟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 당시 대천은 동물원도 박물관도 없는 시골살이라 아이들 데리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장날이면 동물 파는 곳에 자주
갔었는데 아이들은 책에서만 보던 개 고양이 닭 병아리 토끼를 보는것을 아주 좋아했다
장구경 다니다 유독 사 달라고 조르고 떼 쓰는 날엔 병아리 강아지 토끼를 사 와서 여러번 키워 보기도 했다
가을이 겨울이 봄이 메리 해피 누렁이 꺼먹이.....
그 때 우리가족은 시장통 시내 상가 2층집에 살았는데 아이들도 강아지도 키우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래서 키우던 강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적도 있었고 잃어버린 적도 있어서 한동안 강아지를 키우지 않고 살았던 거 같다
가을이가 차에 치어 죽어 가면서 밤새 끙끙대며 울던 모습은 우리 가족에게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성인이 된 딸아이가 사귀던 남자친구가 반려견 보리를 선물로 주었다며 키우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반대를 했어도 이미 보리는 딸과 사는 가족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보리도 보리를 준 남자친구도 못 마땅 해 했는데 의견 충돌도 많았지만 인연이라선지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얼마 후 나는 딸의 결혼식장에서 너무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이보리색 털옷을 입은 보리는 생김새도 참 예뻤지만 훈련을 잘 받은 개 라서 시키는 말도 잘 따랐다
보리는 결혼식장에서 신부처럼 꾸미고 화동 손주들과 함께 예물바구니를 물고 가 딸에게 전달 하는 것 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 했는데 더욱 놀라운건 보리는 결혼식 내내 짗지도 않고 앞자리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많은 하객들이 좋아하고 사진찍고 예쁘다고 난리가 났다
심지어 사둔까지도 좋아라 하니 나와 남편만 참으면 됐다
둘을 맻어준 인연으로 보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예쁨 받으며 잘 살아갔다
그 후 몇 년 동안을 딸과 사위는 명절 때나 집에 올 때 마다 손주 대신 보리만 데리고 왔고 그러면서 보리 때문에
딸과 사위와 서운한 일들이 많이 쌓여만 갔다
나는 손주를 데리고 오던가 보리만 데리고 오려거든 집에 오지도 말라고 심하게 말했다
심지어 보리 때문에 아이가 안 생긴다고 말해 버렸고 그래서 보리는 집에 들이는 것도 싫어 했다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줄도 몰랐었는데 몇 년 후 딸이 어렵게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힘들었던 9개월을
보리와 함께 보리가 있어서 잘 견디며 지냈다고 했다
딸은 서울 한복판 복잡한 충무로 좁은집에서 살았는데 보리랑 함께 남산 산책하고 카페가고 운동하면서 ...
쌍동이가 태어나면서 딸네 집은 쌍동이 육아로 그야말로 전쟁통 초 비상사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예쁨 받던 보리는 움직일 공간도 없는 살림살이 늘어난 좁아진 아파트에서 꼼짝 못하고 지내야만 했다
그렇다보니 운동도 산책도 하기 어려워져 안하던 대소변 실수도 자주 하고 온통 애기용품 늘어 놓은 거실에서
지낼수 없어서 현관 신발장 앞에서 꼼짝 못하고 잠만 자며 지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노견인 보리는 백내장이 와서 시력도 청력도 잃어 가고 있었다
보리는 쌍둥이 유모차에 실려 드물게 외출은 하지만 살 거 많아져 매일 이마트와 식당 갈 때 마다 저지당하고
까페도 못 가고 해서 쌍둥이네는 보리 때문에 더 힘들어 하고 있었다
나는 쌍동이는 키워 줄 수 없고 할 수없이 남편은 반대 했지만 보리를 우리집으로 데려 오게 되었다
이제 보리는 열두살 사람 나이로 육십대 후반 이라고 한다
우리집에 올 때가 초봄 이었으니 9 개월이 지나간다
이제는 나랑 노년기를 같이 보내는 친구가 되었다
백내장이 와서 눈동자가 하얘진 보리를 보면 쌍동이네 집이 그리워 울고 있는 것 처럼 보여 슬프다
거의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데도 우리집 안 과 앞마당 동선 다 파악 했고 앞집 옆집 다니며 귀염둥이가 됐다
나는 보리가 익힌 집 안 물건의 위치를 되도록 바꾸지 않으려 한다
동물은 잘 보이지 않아도 별 불편함 없이 사는걸 보면 모든게 자연의 순리인 거 같다
백내장 수술하려 했을때 괜찮을 거라고 말해 준 수의사가 여간 고맙다
언제까지 나랑 남편이랑 지낼지 또 어찌 이별을 해야 할지 걱정도 되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순리 일 것이다
이제는 내가 좋다고 따라 다니고 꼬리 치고 집에 늧게라도 오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 떠나고 아이들이 키우던 늙은 반려견만 남는다고 하더니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여럿 이다
천안 시누이도 아들이 키우던 노견 탁구 때문에 우리집에 와도 저녁 늦게라도 간다
여기저기 여행 다니는 것도 힘들어지는 극노년기가 와도 보리가 있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함께 지내는 보리가 있어 참 좋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리를 안고 나가면 나이든 할머니가 꼴불견 이라고 흉보는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선입견으로만 나의 잣대로만 판단하며 꼰대 처럼 살았던
지난 날 들이 부끄럽다
백내장으로 시력도 청력도 잃어 가고 있는 보리이지만 제 이름 처럼 깨달은 건 가--- ㅎ
보리는 저를 그렇게 싫어 했던 나를 좋아하고 새 세상을 받아 들여서 나랑 가족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꼰대로 보이겠지만 나는 늙어 가면서 편견을 버리고 포용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 가려 한다
좋았던 과거를 회상 하면서 여전히 행복한 지금을 잘 살고 싶다
보리야 그동안 미안 했다
오래도록 좋은 친구로 함께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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