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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밀린다왕문경에서의 무아無我와 윤회輪廻
1. 경의 소개
밀린다왕문경의 본디 이름은 밀린다판하Milindapanha이다. 팔리어본 한역본 두 가지가 있다. 한역본의 명칭은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다. 여기에서 경經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경이 아니다. 내용과 형식에서 경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리어본에서는 이것을 경, 곧 ‘Sutra’ 라고 하지 않고 ‘Panha’, 곧 ‘물음’ 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이 경은 서력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서북 인도를 지배했던 인도, 그리스계 왕인 메난드로즈Menandros가 그 시대의 고명한 학승인 나가세나Naga-sena 비구를 만나 불교 교리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토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대부분 이 경이 실제로 있었던 토론을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메난드로스가 그리스계왕이기 때문에 이 경에 그리스적인 것이 들어있다고 보기도 하고, 동양 사상과 서양사상의 만남을 볼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 경을 한 이방의 왕이 그리스적인 사고 방식과 토론 형식으로 불교인과 논쟁을 벌인 하나의 대론서對論書라고도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이 경은 역사적으로 행해진 토론 내용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도 이 경의 주인공 가운데에 한 사람인 나가세나 비구가 역사성이 없는 허구적인 인물에라는 점이다 그리고 밀린다왕도 역시적인 인물인 메난드로스에게 그 이름만 빌린 신화화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경의 내용상으로도 그리스적인 면이나 대론서적인 면은 찾을 수 없다. 필지에게는 이 경의 저자가 이것을 쓸 당시에 교단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던, 그리고 앞으로 제기될 수 있는 교리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한 곳으로 정리해서 해답을 주려고 의도적으로 만든 하나의 교리 문답서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한역본과 팔리어본을 비교해 보면 그 형식과 내용에서 큰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한역본은 세권으로 되어 있는데 팔리어본은 일곱 권이다. 대조해보면 한역본은 팔리어본의 첫 세 권에 해당되고, 양 본에서 이 부분은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에 따르면 팔리어본의 네번째 권에서 일곱번째 권까지는 후기에 다른 곳에서 성립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한역본과 팔리어본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는 부분이 고층古層이다. 이 글에서는 이 고층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이 고층 부분의 내용은 나가세나와 밀린다가 이틀 동안 문답을 주고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문답의 수는 모두 일흔 아홉 개이지만 그 가운데는 중복된 내용도 있다. 그리고 백 개의 비유가나 오고 있다. 이것도 중복되는 것이 몇 개 있다. 밀린다왕문경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양하다. 무아無我 문제, 윤회와 업 문제, 연기법, 열반과 해탈의 문제, 불타론佛陀論, 재가와 출가의 문제 등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 전반에 걸치고 있다.
밀린다왕문경에서 하고 있는 설명들은 난잡하지 않아서 누구든지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비유들을 사용해서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남방불교권에서는 옛부터 이 경이 널리 읽혀지고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이 경에서 주고 있는 설명 가운데서 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무아와 윤회 문제에 대한 것이다. 멀리로는 5세기경에 활약했던 바수반두(世觀)나 붓다고샤와 같은 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사論師들을 비롯해서, 현대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위해서는 거의 한결같이 밀린다왕문경에 의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문제에 대해서 밀린다왕문경이 하고 있는 설명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아와 윤회 문제는 초기 불교에서부터 현재까지도 불교인들에게는 매우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2. 무아無我 이론
밀린다왕은 불교 교리에 대해서 토론하려고 나가세나 비구를 왕궁으로 초청했다. 그는 나가세나가 자리에 앉자 마자 질문했다. “존자여 그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가세나는 그에게 답했다. “사림들은 나를 나가세나라고 부릅니다. 내 동료들도 나를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나 왕이여, 부모들이 그들의 자식에게 나가세나라든지, 수라세나라든지, 비라세나라든지, 시하세나리든지 하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호칭이나 통속적인 개념, 일상적인 표현, 단순한 이름일 뿐입니다. 거기에 인격적인 개체는 없습니다.”
나가세나가 한 말들 가운데서 밀린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바로 이 “인격적 개체는 없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밀린다는 나가세나에게 “인격적 개체가 없다면 누가 그대에게 옷과 음식과 거처할 곳과 약과 그릇들을 줍니까. 그리고 누가 그것들을 사용합니까. 누가 덕을 닦으며, 누가 수행을 합니까. 누가 도와 과보와 열반을 성취합니까. 누가 살생, 도둑질, 부정한 짓, 거짓말, 음주를 합니까. 누가 오역죄를 범합니까…’ 하고 반문 했다. 밀린다가 제기한 이 모든 문제들은 불교가 무아 이론과 더불어 언제나 부딪치는 근본적인 것들이다. 밀린다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한 질문들을 모아서, 우리들이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그러면 그것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밀린다는 나가세나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계속했다. “ 내 동료들이 나를 나가세나라고 부른다 하고 그대가 말할 때 그대가 말하는 이 나가세나란 무엇입니까. 머리털이 나가세나입니까” “그것은 몸에 난 털, 손톱들,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 진피眞皮, 비장牌臟을 허파, 장... 뇌수입니까” 밀린다는 먼저 인격적 개체 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육체의 서른두 가지 부분을 하나하나 들면서 질문했다. 거기서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하자, 이번에는 인간 존재 전체를 분석하면서 “그것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입니까 하고 질문했다. 나가세나가 그에게 계속해서 ‘아니’라고 답하자, “그렇다면 오온五蘊의 집합입니까”, “오온과 다른 것입니까” 하고 질문했다. 이들 질문에서도 나가세나는 역시 ‘아니’라고 답했다.
‘인격적 개채’ 가 존재한다는 답을 얻으려고 가능한 모든 질문을 하고 나서 밀린다는 마침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해 보았지만, 나는 나가세나-인격적 개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나가세나란 무엇입니까. 하나의 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존자여, 그대의 말은 잘못된 것이고 거짓입니다. 나가세나는 없습니다.” 밀린다의 이런 공격에 대해서 나가세나는 밀린다가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응수했다. 먼저 그는 밀린다에게 그가 타고 온 수레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이 수레하고 부르는 것, 그 수레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굴대들이 수레입니까.” 그러자 밀린다는 굴해 들어 수레가 아니라고 답했다. 나가세나는 계속해서 수레 바퀴테, 바퀴살, 바퀴통... 수레 지붕, 덮개들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질문했고, 밀린다도 역시 계속 같은 답을 했다. 나가세나는 밀린다에게 ‘이 모든 재목材木들을 모아서 한구석에 놓아 둔 것, 그것이 수레입니까’ 하고 물었다. 밀린다는 역시 ‘아니’ 하고 답했다. 나가세나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이 모든 재목들을 모아 놓지 않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수레입니까?” 밀린다의 답은 물론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가세나는 다시 물었다. ‘수레’의 소리가 수레입니까? “수레의 소리가 수레일 수 없다.”나가세나는 마지막으로 밀린다에게 “수레란 무엇입니까” 하고 말했다. 밀린다는 마침내 침묵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밀린다에게 “나는 대왕에게 수레에 대해 물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물어 보았지만 수레는 볼 수 없습니다. 수레란 무엇입니까. 하나의 말,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대왕이여, 당신의 말은 잘못된 것이고 거짓입니다. 수레는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나가세나는 짓궂게 밀린다에게, “왕은 인도의 왕들 가운데서 첫째입니다. 그런데 누가 겁이 나서 그렇게 거짓말을 합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밀린다는 “존자여,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수레채 따위에 의해서 수레라는 호칭과 공통적인 개념, 일상적인 표현, 나가세나라는 이름이 형성됩니다” 하고 대답 했다.
밀린다왕문경에서의 무아無我와 윤회輪廻
나가세나가 밀린다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대답은 바로 그것이었다. 밀린다는 본의 아니게도 나가세나가 유도한대로 따라와 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말한다. “좋습니다. 대왕이여, 왕은 수레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머리털 등등에 의해서 호칭과 공통적인 개념, 일상적인 표현, 나가세나라는 이름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기에 인격적인 개체는 없습니다.” 그런 뒤 나가세나는 “여러 부품들이 결합하면 수레라는 말이 생기듯이, 여러 온蘊(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이 모이면 살아있는‘존재’라는 말이 생긴다” 하고 한 경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을 끝낸다. 밀린다는 나가세나가 한 이 모든 설명에 만족하면서 그에게“그대는 나의 모든 어려운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여기에 계신다 해도 그대를 칭찬할 것입니다. 참 잘했습니다. 나가세나여 !”하고 말한다. 그러나 밀린다는 영혼과 같은 인격적 개체가 없다는 나가세나의 설명에 대해서 이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다른 기회에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영혼과 같은 존재인 베다구Vedagu라는 것이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밀린다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영혼입니다. 곧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물체를 만지고, 내부의 감각 기관으로 현상들을 아는 영혼입니다. 우리들이 이 궁전에 앉아서 우리가 택하고 싶은 창문으로 동쪽, 서쪽, 북쪽, 남쪽을 볼수 있는 것처럼, 이 영혼 또한 그가 좋아하는 문(六根)으로 볼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무아이론을 말하고 있는 나가세나의 입장에서의 이와 같은 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만일 밀린다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베다구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것이 형상을 볼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이 베다구는 단지 눈으로서만이 아니고 다른 기관들로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런 존재가 우리 내부에 있다면 우리의 기관들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잘 보고, 잘 듣고, 냄새를 잘 맡기 위해서는 기관들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베다구를 방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 비유하고 눈을 그 방의 창문이라고 한다면, 눈알을 빼어 버린다면 바깥을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창문을 뜯어내 버리면 방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이 바깥을 더 잘 볼 수 있을 것과 같이. 나가세나는 이런 식으로 설명을 계속한다.
“예를 들면 나와 왕이 함께 전상殿上에 앉아 있는데, 사방에 창문들을 부수어 버린다면 우리들의 시야는 멀어지고 넓어지겠지요” 밀린다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나가세나는 계속한다.“눈알을 빼버린다면 시야가 넓어지고 멀어지겠습니까. 귀를 파서 귓구멍을 확장한다면 청각 능력이 더 좋아지겠습니까. 만약 코를 파서 콧구멍을 확장한다면 후각 능력이 더 좋아지겠습니까. 만약 입을 파서 입을 확장한다면 맛을 더 잘 알수 있겠습니까...”밀린다의 대답은 물론 “아니”라는 것이었다. 눈이나 귀를 제거해 버린다면 더 멀리 보고 더 잘 들을 수 있기는 커녕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도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감각기관으로부터 독립된 베다구와 같은 어떤 정신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해 주는 구체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가세나의 추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하나의 실험적인 보기를 사용해서 밀린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좋은 술을 사서 그것을 통에 붓고 어떤 사람의 입을 틀어막은 뒤, 그에게 그 술을 맛보도록 하려고 그 큰 술통속에 머리를 거꾸로 처박았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그 술 맛을 알 수 있겠는가. 물론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술이 그 사람의 입 속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고, 혀 위에 닿지 않았기 때문아다.” 그 술이 눈이나 귓 속에 들어갔다 하더라고 그렇게 해서는 술맛을 알 수 없다. 오직 술이 혀에 닿아야만 그 맛을 알 수 있게 된다.
밀린다의 대답은 나가세나가 기대했던 방향으로 나온다. 그리고 끝내 그는 나가세나의 추궁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대와 같은 논객과는 토론할 수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게 된다. 나가세나의 설명은 초기 경전에서처럼 모든 정신 작용은 고정 불변적인 영혼과 같은 어떤 존재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여섯 개 감각기관(六根)과 거기에 대응하는 대상(六境)에 의해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밀린다도 끝내는 나가세나의 설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
3. 윤회이론輪廻理論
밀린다는 나가세나에게 윤회에 대해 질문한다. “나가세나(존자)께서는 윤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윤회란 무엇입니까.” 나가세나는 “어떤 존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여기서 죽고 여기서 죽어 다른 곳에 다시 태어나서 거기서 죽습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하고 답한다. 그러고는 밀린다를 좀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망고 열매의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망고를 먹고 씨를 심으면 그 씨에서 망고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열립니다. 다시 어떤 시람이 이 열매를 먹고 그 씨를 심으면 망고나무가 자랍니다.” 하고 설명한다. 윤회란 이와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회의 의미가 ‘어떤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기서 죽고, 여기서 죽어 다른곳에 다시 태어나서 거기서 죽습니다’ 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죽어 저기로 태어나는’ ‘영혼과 같은 어떤 존재’ , 즉 망고의 비유에서 본 망고의 씨와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무아이론을 주장하는 나가세나에 의하면 그런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또는 ’어떻게’ ,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난다는 것인가.
밀린다는 이 문제에 대해 나가세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 가는 존재가 있습니까.“ 나가세나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없습니다.” 나가세나는 윤회를 설명하면서 어떤 존재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간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여기서 죽어 다른 곳에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그것을 나가세나는 ‘현재의 존재(名色)가 선악업을 짓고 이 업의 결과에 따라서 다른 명색이 다시 태어난다’ 하고 표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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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세나는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곧 그것은 “우유가 버터로 되고, 버터가 치즈로 되는것”과 같은 것이다.
우유가 버터로 되고 버터가 치즈로 될 때, 우유의 상태에서 버터의 상태로 변하지 않고 옮겨가는 어떤 존재는 없다. 단지 변화가 있을 뿐이다. ‘변화’ 하면서 ‘계속’이 있는 것이다. 나가세나는 다른 비유를 든다. 밤에 등불을 켜 두면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탄다. 이럴 경우“새벽 등불은 밤중 등불과 같고 밤중 등불은 초저녁 등불과 같습니까’‘아닙니다’ 등불은 계속해서 타고 있으므로 한 찰라도 같을 리 없다. 그렇다면 ‘새벽, 밤중, 초저녁의 등불은 각각 다른 등불입니까’ ‘아닙니다. 온 밤을 같은 등불이 탑니다’ 그 등잔에 그 등불인 것이다. 초저녁 등불에서 새벽 등불까지 계속되는 고정 불변의 존재가 없으면서도 둥불은 계속되는 것이다.
윤회를 할 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것도 옮겨가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죽는 존재와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별개가 되고 만다. 그러나 나가세나의 주장은 한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것 없이 윤회한다고 해서, 죽는 존재와 다시 태어나는 존재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두 존재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처음의 존재가 없다면 그 다음의 존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가세나는 이것을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관계라고 표현한다. 그것을 나가세나는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곧 “대왕이여 대왕께서 어머니 등에 엎힌 어린 아기였을때. 어른이 된 현재와 같았습니까.” “아닙니다.”
‘어린 아기 밀린다’ 와 ‘어른 밀린다‘ 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다르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별개의 존재라고 할 수도 없다. 어릴 때의 밀린다와 어른이 된 밀린다는 비록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는 같지 않지만, 동일한 밀린다임에는 틀림없다. 이처럼 윤회의 경우에도 죽는 존재와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다르지만, 두 존재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무아윤회 이론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다. 곧 고정 불변하는 영혼 같은 존재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그 업에 그 과보’ 라는 윤회의 근본 원칙이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윤회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은 사람이 지은대로 받는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그런데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영혼과 같은 존재가 없다고 한다면, 업을 짓는 존재와 그 과보를 받는 존재가 동일하지 않게 되고, 어떤 존재가 지은 업에 대해 그 과보는 다른 존재가 받게 된다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곧 ‘지은 사람이 지은대로 받는다’는 원칙이 성립되지 않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밀린다는 나가세나와의 토론의 시작에서 이미 의문을 제기했다. 나가세나가 영혼과 같은 존재가 없다고 말하자, 밀린다는 “그렇다면 선업과 악업도 없고 선업과 악업을 짓는 사람도 없고, 선악업의 과보도 없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나가세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도 마련하고 있다.
이번에도 비유로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망고를 홈치다가 망고 나무 주인에게 붙잡혀 왕에게 끌려와서, ‘내가 가지고 간 망고는 이 사람의 망고는 아닙니다. 이 사람이 심은 망고와 내가 가지고 간 망고는 다른 것입니다’하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이 다. 망고 도둑의 논리는 망고 주인이 심은 망고는 이미 썩어 버렸고 자기가 가지고 간 망고는, 망고주인이 심은 망고에서 썩어 나와 그것이 자라 망고 나무가 되어 거기에서 열린 망고이므로 망고 주인이 심은 망고와 자기가 따간 망고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절도죄竊盜罪’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망고 도둑의 논리는 그럴 듯하지만 정당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둑이 홈친 망고는 망고 주인이 심은 망고에서 나온 것이므로 망고 주인의 망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회에서도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 가는 영혼 같은 존재가 없고, 죽는 존재와 다시 태어나는 존재가 동일하지 않지만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죽은 존재가 지은 업에 의해 재생했으므로 앞 존재가 지은 업은 뒷 존재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나가세나의 표현을 빌린다면 “다시 태어나는 존재와 죽은 존재와는 다르지만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죽은 존재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전에 지은 죄(業)에서 해방된다고는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