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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구경무아究竟無我
마침내 나도 없으니, 마침내 나는 없다.
Ultimately No-I [무아(無我)]’
궁극의 가르침 무아(無我)
<17> 究竟無我
No One Attains Transcendental Wisdom
At that time Subhuti addressed Buddha,saying: World-honoured One, if good men and good women seek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by what criteria should they abide and how should they control their thoughts? Buddha replied to Subhuti: Good men and good women seeking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must create this resolved attitude of mind: I must liberate all living beings, yet when all have been liberated, verily not any one is liberated. Wherefore? If a Bodhisattva cherishes the idea of an ego-entity, a personality, a being, or a separated individuality, he is consequently not a Bodhisattva, Subhuti. This is because in reality there is no formula which gives rise to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Subhuti, what do you think? When the Tathagata was with Dipankara Buddha was there any formula for the attainment of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No, World-honoured One, as I understand Buddha`s meaning, there was no formula by which the Tathagata attained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Buddha said: You are right, Subhuti! Verily there was no formula by which the Tathagata attained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Subhuti, had there been any such formula, Dipankara Buddha would not have predicted concerning me: "In the ages of the future you will come to be a Buddha called Shakyamuni"; but Dipankara Buddha made that prediction concerning me because there is actually no formula for the attainment of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The reason herein is that Tathagata is a signification implying all formulas. In case anyone says that the Tathagata attained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I tell you truly, Subhuti,that there is no Formula by which the Buddha attained it. Subhuti, the basis of Tathagata`s attainment of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is wholly beyond; it is neither real nor unreal. Hence I say that the whole realm of formulations is not really such, therefore it is called "Realm of formulations." Subhuti, a comparison may be made with 〔the idea of〕 a gigantic human frame. Then Subhuti said: The World-honoured One has declared that such is not a great body; "a great body" is just the name given to it. Subhuti, it is the same concerning Bodhisattvas. If a Bodhisattva announces: I will liberate all living creatures, he is not rightly called a Bodhisattva. Wherefore? Because, Subhuti, there is really no such condition as that called Bodhisattvaship, because Buddha teaches that all things are devoid of selfhood, devoid of personality, devoid of entity, and devoid of separate individuality. Subhuti, if a Bodhi sattva announces: I will set forth majestic Buddha-lands one does not call him a Bodhisattva, because the Tathagata has declared that the setting forth of majestic Buddha-lands is not really such: "a majestic setting forth" is just the name given to it. Subhuti, Bodhisattvas who are wholly devoid of any conception of separate selfhood are truthfully called Bodhisattvas.
금강경 전해설, 금강경 오가해 무비스님 금강경 강좌 -
구경무아(究竟無我)란 ‘끝까지 무아다’ 라는 뜻입니다. 무아(無我)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무아란 모든 존재의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연필 한 자루가 눈 앞에 있어도 이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육신을 두고 이야기 해도 마찬가지이고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체적이거나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자동차, 컴퓨터, 비행기, 산하대지 만물이 전부 주체적인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라고 합니다. 어째서 무아인가를 설명할 때 가유(假有)라는 개념을 이야기 합니다. 자동차를 예로 든다면 바퀴나 운전대 타이어 등등 이만 여 개의 부품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그런데 낱낱이 떼어 바퀴를 자동차라고 할 수 없고, 운전대를 자동차라고 할 수가 없지요. 이만 여 개의 부품이 모두 있어야 할 자리에잘 조립되어 있을 때만 자동차는 자동차입니다. 우리들의 육신도 크게는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이루어졌지만 그 하나하나 떼어내서 우리 육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음도 아(我)와 아소(我所)로 이루어졌고, 세분하여 오위백법(五位百法)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잠깐 인연에 의해서 존재하는 까닭에 거짓으로 존재한다고 하고, 실체가 없는 무아라고 합니다. 어디까지 무아이고, 그 다음은 유아다 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무아라는 의미에서 구경무아다라고 표현합니다.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云何應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이시에 수보리가 백불언 하사대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니는 운하응주며 운하항복기심하리잇고
제2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가 물었던 내용을 다시 이야기 합니다.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어떻게 응당히 머물러야 하며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하고 수보리가 재확인을 하는 입장에서 묻고 있습니다.
佛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當生如是心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하대 滅度一切衆生已나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불고수보리하사대 약선남자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당생여시심이니 아응멸도일체중생하대 멸도일체중생이나 이무유일중생도 실멸도자니라
부처님도 ‘선남자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야한다’라고 재차 설명하지요. 어떤 마음을 내야하는가 하면 ‘내가 응당히 일체중생들을 제도하리라’는 마음입니다. 아응멸도(我應滅度)라고 할 때 멸도(滅度)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서 ‘제도한다’‘교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체중생을 제도하였지만 ‘한 중생도 실로 제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제3 대승정종분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있었지요. 중생들을 다 제도했는데 왜 한 중생도 제도한 적이 없다고 하는가, 그것은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은 우리가 편의상 붙여놓은 이름이고 사실 우리들은 현재 그대로 완전무결한 존재입니다. 설사 제도를 하거나, 교화를 하거나, 어떤 상태로 끌어올려 놓았다 하더라도 역시 출발했을 때의 그 사람입니다. 달리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본래로 우리는 완전무결한 존재인 까닭에 ‘완전무결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이해하는 것’ 그것 밖에 없어요. 본래로 우리 인간은 누구나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제도라면 제도이고 교화라면 교화입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고 표현하였습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則非菩薩이니라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니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약보살이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즉비보살이니라.
소이자하오 수보리야 실무유법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니라
제3 대승정종분에서는 바로 이 점이 대승정종이라고 이름 붙일만 하다고 했습니다. 가장 큰 가르침 중에서도 으뜸되는 가르침이라고 했어요. 보살이 설사 제도했다 하더라도 기존의 것을 이해시킨 것을 불과한데 그것을 가지고 아상을 낸다든가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낸다고 하면 그것은 보살도 아니고 부처는 물론이요 어른도 못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안 사람 같으면, 사람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공경하고 이해해주고 받들어 섬길 뿐입니다. 그 사람을 제도했느니, 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었느니 하는 생각이 있을 수가 없고 그런 생각이야말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지요. 세속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하면 공로가 있고, 생색내고 자랑할만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또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것은 전혀 생색내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지요. 그 까닭은 발심했다고 하지만 보리심을 발했다고 할만한 고정된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자들은 인연이 되어서 불교에 귀의했고 불법에 발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런 흔적이 없지요. 불자이면서도 교회에 들어가서 교인이라고 해도 아무도 모릅니다. 교인이 불교의 법석에 와서 불자라고 해도 아무도 모르지요. 마음을 내는 것은 흔적이 없고 실체도 없습니다. 심지어 보리심을 발하는 문제까지도 실체가 없는데 여타 다른 어떤 일이야 무슨 실체가 있겠습니까. 철저히 무아지요. 끝까지 내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於燃燈佛所에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佛이 於燃燈佛所에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어연등불소에 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아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여아해불소설의컨댄 불이 어연등불소에 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다
앞서도 연등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이 대목은 과거생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계신 곳에서 발심을 하고 가르침을 받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기정사실화된 상식으로 보고서 수보리와 이야기 하는 입장입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여래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어떤 고정된 법, 그 법의 실체가 있어서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보리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답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해 볼 때 부처님은 방편상 그런 이야기를 하셨고 설사 그런 사실이 있었어도 고정된 어떤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서 부처님 스스로가 한 말이 아니고 수보리가 한 말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부처님이 과거생에 수기 받은 사실에 대해 수보리는 부정하고 나선 것이지요. 이것이 금강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강경은 벼락을 치는 가르침입니다. 강력한 지혜의 힘을 가진 사람이 그에 걸맞는 강한 표현으로써 상없는 것을 으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자인 수보리가 ‘제가 부처님께 공부한 바로는 부처님이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깨달음 얻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표현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금강경의 매력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힘이 넘치는 가르침입니다.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니라 須菩提야 實無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불언하사대 여시여시하니라 수보리야 실무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여시여시’는 ‘이와 같고 이와 같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 그렇다 네 말이 맞다’라는 뜻이지요. 경전에 이런 표현이 있어서 조사스님 어록에도 깨달음을 인가하고 인가받을 때 ‘여시여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렇다’라고 수긍해 주는 것은 그 사람의 깨달음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수보리야. 실로 법이 없다.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없다.’부처님도 수보리의 말을 긍정합니다. 수보리가 과거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부처님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을 겁 없이 부정하였지만, 고정된 법이 있어서 ‘이것이다’ 라고 지창할 만한 것은 없기 때문에 그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과거 연등부처님 아래서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금생에 보리수하에서 깨달으신 문제까지도 사정없이 부정하는 면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댄 燃燈佛이 卽不與我授記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대 號釋迦牟尼어니와 以實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새 是故로 燃燈佛이 與我授記하사 作是言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야 號釋迦牟尼라하시니라
수보리야 약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인댄 연등불이 즉불여아수기하사대 여어래세에 당득작불하대 호석가모니어니와 이실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새 시고로 연등불이 여아수기하사 작시언하사대 여어래세에 당득작불하야 호석가모니라하시니라
‘만약에 어떤 법이 있어서’하는 것은 ‘고정된 어떤 실체가 있어서’하는 말입니다.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여기고 여래가 그것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 때는 연등불이 곧 나에게 수기를 주시기를 그대는 마땅히 부처를 짓되 호를 석가모니라 한다고 안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최상의 깨달음이라는 거이 없었기 때문에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를 주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부처님이 전생에 연등부처님에게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얻었다는 것을 상식으로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설화나 이야기속에는 부처님의 전생이 그렇게 전해내려오지만 그렇다고 어떤 고정된 깨달음에 대한 법이 꼭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뭔가를 한보따리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이무소득고’라는 구절이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얻을 바가 없다’라는 무소득이야말로 불법의 특징이지요. 아무리 얻었어도 얻을 바가 없는 이치가 불법의 매력이고 위대한 점입니다.
그러므로 연등부처님이 나에게 진짜 수기를 해서 이런 말을 하되 ‘그대는 마땅히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지어서 호를 석가모니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등불이 수기를 진짜로 준 것이지요. 깨달아도 깨달음의 흔적이 있거나 자취가 있으면 무효라는 것입니다. 자취가 없어야 되는 것이고 흔적이 없어야 어떤 궁극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조사스님들의 오도송을 감정 할 때도, 당신의 깨달음과 당신의 얻음에 대해 흔적이 남아있는 표현인가 아니면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표현인가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제대로 도를 깨달았다, 도를 깨닫지 못했다고 감정합니다. 여기 금강경의 이 이치와 딱 맞는 감정이지요.
何以故오 如來者는 卽諸法如義니라
하이고오 여래자는 즉제법여의니라
여래라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눈이 있는 사람이고, 곧 진리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진리화 된 것을 여래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사 세간해 등등 해서 부처님의 이름을 열 가지로 표현합니다. 여래십호라고 하는데 그 첫째가 여래(如來)예요. 여(如)는 진리입니다. 여래는 진리에서 온 사람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곳 제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여(如如)는 있는 그대로를 말합니다. 전혀 조작이 없는 것, 조금도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는 그 자리를 말하지요. 모든 존재의 실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은 있는 그대로다, 제법여의(諸法如義)라는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若有人이 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면 須菩提야 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약유인이 언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면 수보리야 실무유법불득아뇩다삼먁삼보리니라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한다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부처님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편의상 우리들은 여래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여래가 깨달음을 얻었다’라는 표현을 안 할 수는 없지요. 불자들이 성도재일 법회를 지내는 것도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於是中에 無實無虛니라 是故로 如來가 說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하니라 수보리야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시중에 무실무허니라 시고로 여래가 설일체법이 개시불법이라하니라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 가운데 깨달음이라고 하는 그 사실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실무허(無實無虛)라는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있다고 하려니 실체가 없고 없다고 하려니 틀림없이 부처님은 6년 고행 끝에 보리수에 앉아서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또 과거로 치면 연등불 처소에서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 이후 부처님은 진리의 말씀을 폭포수처럼 쏟아 부으며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깨달음이 없었다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없다고, 허망하다고 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고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하자니 그럴 수도 없습니다. 무실무허라고 하는 이 말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두고 하는 이야기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은 부처님의 일입니다. 이말이 중요한 것은 모든 존재의 실상이 다 그렇기 때문이지요. 모든 존재의 실상이 무실무허라는 것을 잘 알고, 그 사실을 나에게 이끌어 생각해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있다고 하고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얽혀서 살지만 사실은 얼마나 있어주겠습니까. 난들 얼마나 있어주며 상대인들 얼마나 지금처럼 있어주겠습니까.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살림을 다 폐기하고 안 살자는 뜻도 아니지요. 무실무허이니까 안살아도 안되고 살아도 안되는 거예요. 있는 것에 목을 매고 살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등한시 하며 아무렇게나 살아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중도(中道)라는 말이 나오지요. 실다운 것도 수용하고 허망한 것도 수용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허망한 것도 이해하고 때로는 실다운 것도 이해하면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대자유인이 되어서 사는 길이 여기에 나옵니다. 자기가 이룬 사회적 성공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그동안 애써서 이룬 사회적 성공도 역시 실다운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는 무실무허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래가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불법이다’라고 하는 이 말은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탐진치 삼독 그대로 불법이요 팔만사천번뇌 그대로 불법입니다. 금강경 차원은 그렇기 때문에 수준이 높습니다. 사람들을 편안하게 합니다. 탐진치 삼독을 끊어야 되고 망상을 없애야 되고 번뇌업장를 소멸해야 된다고 소승불교에서 가르쳐왔고, 오늘날 곳곳에서 일반불교는 그렇게만 말하는데, 금강경 차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번뇌망상 탐진치 내지 팔만사천 번뇌 그대로가 불법이라는 이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탐진치 삼독을 끊으려고 하지 마세요.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탐진치 그대로 불법이예요. 진흙없이 연꽃이 존재하지가 않지요. 진흙 그대로가 연꽃입니다.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일체법개시불법(一切法皆是佛法)이라고 하는 이 한 구절만 우리가 마음에 새겨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안심법문이지요.
須菩提야 所言一切法者는 卽非一切法일새 是故로 名一切法이니라
수보리야 즉비일체법일새 시고로 명일체법이니라.
그런데 또 일체법이라고 하니까 일체법이 어떤 고정된 것이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되지요. 그래서 앞서 많이 나왔던 즉비의 논리가 다시 나왔습니다. ‘곧 일체법이 아니다 우리가 이름하자니 일체이다’라고 하였지요. 금강경의 입장에서 보면 이 즉비의 논리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남자가 남자가 아니라 그 이름이 남자고 여자가 여자가 아니라 그 이름이 여자다.’ ‘부처가 부처가 아니고 그 이름이 부처다.’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이치도 참 대단한 것이지요.
須菩提야 譬如人身長大하니라 須菩提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如來가 說人身長大가 卽爲非大身일새 是名大身이니다
수보리야 비여인신장대하니라.수보리언하사대 세존이시여 여래가 설인신장대가 즉위비대신일새 시명대신이니다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어느 정도 장대한가, 수미산만치 장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몸은 없지요. 없는 것을 그냥 말을 만들어서 한 것입니다. 일체법이라는 것도 그와 같다는 뜻이지요. 경에서는 수미산이라고 했습니다만, 이해하기 쉽게 서울 남산만한 몸이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비유를 들려니 남산만큼 큰 몸이지 그런 것은 없지요.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일체법이나, 장대한 몸의 이야기나, 중생이나 부처나, 남자나 여자나 이 세상 모든 명제를 다 갖다 붙여서 이야기해도 됩니다. 그런 것은 모두 그 이름이 그러할 뿐입니다. 이 즉비의 논리는 중요합니다. 이것만 제대로 꿰뚫어도 금강경을 거의 다 안다고 할 수 있을만한 내용입니다.
須菩提야 菩薩도 亦如是하야 若作是言하대 我當滅度無量衆生이라하면 卽不名菩薩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實無有法名爲菩薩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도 역여시하야 약작시언하대 아당멸도무량중생이라하면 즉불명보살이니 하이고오 수보리야 실무유법명위보살이니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할 것 같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고정된 어떤 법이 있어서 무엇을 하면 보살이다 라고 말할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본래로 부처인데 제도해도 제도하는 바가 없는 것이지요. 설사 보살이 중생을 제도했다고 해도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관념에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보살이 아니지요. 또 ‘그 사람은 육바라밀을 잘 닦는다’‘그 사람은 봉사활동을 잘한다’ 등등 실로 어떤 고정된 명제를 붙여놓고 그것을 가지고 이름을 보살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어떤 법이 있어서 그 이름을 보살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是故로 佛說一切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라하노라
시고로 불설일체법이 무아인무중생무수자라하노라
그러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일체법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若菩薩이 作是言호대 我當莊嚴佛土라하면 是不名菩薩이니
수보리야 약보살이 작시언호대 아당장엄불토라하면 시불명보살이니
장엄불토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장엄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지방이 빛나고, 사찰이 빛나고, 법회가 빛나는 것 모두가 다 장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보살이 ‘내가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보살이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상내는 사람은 보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있는 자리가 빛나고, 자기에게 공로가 많고, 대한민국 국민이 다 그 사람 덕에 산다고 하더라도 생색내는 그 순간 이미 그 공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何以故오 如來가 說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라
하이고오 여래가 설장엄불토자는 즉비장엄일새 시명장엄이니라
여래가 설한 세상을 장엄한다고 하는 것은 즉비장엄일새 시명장엄이다 하였습니다. 같은 논리지요. 불토는 세상입니다. 표현은 ‘여래가 세상을 장엄한다’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고정된 무언가가 없습니다. 또 언제 그 공로자가 정반대의 사람이 되고, 원수가 될 지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須菩提야 若菩薩이 通達無我法者는 如來가 說名眞是菩薩이니라
수보리야 약보살이 통달무아법자는 여래가 설명진시보살이니라
무아법(無我法)이란 아(我)가 없는 법입니다. 통달무아법자는 철저히 아(我)가 없는 구경무아에 통달한 사람이지요. 여래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참보살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아(無我)가 되어야 참보살이라는 거예요. 무아가 안 되고는 참보살이 아닙니다. 보시를 안 해도 좋고 자선사업이나 봉사활동을 안해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지만, 단 무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봉사활동 잘하고 보시 잘하고 세상에 공헌이 많아도 생색을 내면 보살은 고사하고 중생도 안 된다는 표현입니다. 중생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병은 상병(相病)이라고 하지요. 아주 지독한 병이고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이 상병하나를 고치기 위해서 장황하게 설법하게 된 것이다’ 라고 결론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제15강 구경무아분 제17
究竟無我分 第十七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云何應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佛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當生如是心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하대 滅度一切衆生已나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則非菩薩이니라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於燃燈佛所에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佛이 於燃燈佛所에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다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니라 須菩提야 實無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須菩提야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인댄 燃燈佛이 卽不與我授記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대 號釋迦牟尼어니와 以實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일새 是故로 燃燈佛이 與我授記하사 作是言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야 號釋迦牟尼라하시니라 何以故오 如來者는 卽諸法如義니라 若有人이 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면 須菩提야 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須菩提야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於是中에 無實無虛니라 是故로 如來가 說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하니라 須菩提야 所言一切法者는 卽非一切法일새 是故로 名一切法이니라 須菩提야 譬如人身長大하니라 須菩提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如來가 說人身長大가 卽爲非大身일새 是名大身이니다 須菩提야 菩薩도 亦如是하야 若作是言하대 我當滅度無量衆生이라하면 卽不名菩薩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實無有法名爲菩薩이니라 是故로 佛說一切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라하노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作是言호대 我當莊嚴佛土라하면 是不名菩薩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通達無我法者는 如來가 說名眞是菩薩이니라
제17, 철저히 아(我)가 없다[究竟無我分,구경무아분]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머물며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한다. ‘나는 반드시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노라. 그리고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 하였으나 한 중생도 실은 제도한 것이 없노라.’라고 해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상과 남이라는 상과 중생이라는 상과 수명에 대한 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실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면, 연등부처님께서는 결코 나에게 ‘그대는 다음 세상에 반듯이 부처를 이루고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라는 수기(授記)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실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수기를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이다음 세상에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라고 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如來)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여여(如如)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말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고정된 법이 있어서 부처님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최상의 깨달음은 여기에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無實無虛,무실무허] 그러므로 여래가 말하기를 ‘일체법이 모두 다 불법(佛法)이다.[一切法 皆是佛法 일체법 개시불법]’라고 하느니라.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는 것은 곧 일체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일체법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사람의 몸이 아주 큰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곧 큰 몸이 아니고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이와 같아야 하나니, 만약 ‘나는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노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보살이라고 이름 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이를 보살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말하기를 ‘일체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세상을 장엄하노라.’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고 이름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세상을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無我)의 이치를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정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