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터 우화] 담장 너머 구경하기 3 : 소년
정진명
1
담장 너머 세상을 구경하는 안마당이 담장의 높이를 두고 저절로 두 패로 갈라졌습니다. 마당 안쪽 툇마루에는 낮은 담장파가 앉았고, 대문쪽 툇마루에는 높은담장파가 앉았습니다.
지나가다 잠시 들르는 나그네는 문안으로 들어서면서 저절로 가까운 곳에 있는 높은 담장파와 인사를 나누게 되고, 대부분 거기서 앉았다가 자리를 뜰 뿐, 낮은 담장파가 앉은 곳까지 들어오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하루는 높담파가 제안을 합니다.
"담장의 페인트가 낡았으니, 색을 새로 칠해야겠다."
어차피 담장은 보지 않는 낮담파는 그러라고 합니다. 담벼락의 페인트가 환하게 달라집니다. 하루는 담장 위에 장식을 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울긋불긋한 장식이 달리고, 뽀죡한 유리조각도 박힙니다. 가끔 넘어가는 햇살에 담장 위에 꽂힌 유리조각이 하얀 빛을 쏩니다.
겨울이 옵니다. 바람이 차가우니, 바람막이를 치겠다고 합니다. 다음날로 바람막이가 들어와 하늘을 가립니다.
이렇게 되자 높담파는 날로 사람이 늘어가고 낮담파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처지가 되어 갑니다.
2
높아진 담으로 하늘의 절반이 가려졌는데, 그 뒤 갖가지 장식으로 또 다시 하늘이 가려지기 시작합니다.
툇마루에 앉아서 보면 담장 너머 하늘이 빠꼼히 보입니다.
구름이 그 틈으로 재빨리 지나갑니다. 영사막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담장에 구름을 그려진 반쪽에서는 하늘을 가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높담파에게는 하늘이란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높담파에게는 담벼락에 그려진 하늘이 진짜 하늘이고, 하나뿐인 하늘입니다.
담장 너머의 하늘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었습니다.
3
낮담파가 하늘을 거의 다 빼앗겼을 무렵에 뜻밖의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어느날 집주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임자 없는 집 마당 툇마루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더니, 두 패로 나뉘어 시끌시끌해지자, 그 풍문이 바람을 타고 집주인의 귀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 나타난 집주인이 한 마디 했습니다.
"지금 여기 마당과 담벼락에 덕지덕지 붙은 모든 장식을 다 걷어내고 원상복구해주십시오. 다만, 원래 비워둔 집이니 담장 너머 세상을 구경하는 일은 막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일체 꾸미거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높담파가 그 동안 꾸며놓은 모든 것이 철거되고, 담장도 원래의 낮은 높이로 돌아갔습니다.
담장이 사라지자 높담파를 찾던 사람들도 시들해져서 툇마루는 처음처럼 고요해졌습니다.
4
그리고 돌림병이 돌았습니다.
높담파도 낮담파도 모두 떠난 빈 자리에 툇마루만 달랑 남았습니다.
보는 이 없어도 하늘은 파랗고, 뭉게구름은 두둥실 떠갑니다.
몇 달이 지나고 겨울이 왔습니다.
툇마루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 집 안마당에 처음 와서 툇마루에 앉았던 낮담파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아무도 없는 이 썰렁한 툇마루에 혼자 앉아서 높담파가 그려놓은 뭉게구름 위로 떠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혼자서 흐믓해합니다.
5
어느날 그 집에 소년이 나타납니다.
낮담파 노인이 혼자서 담장 너머의 뭉게구름을 넋놓고 바라볼 때쯤이었습니다.
소년이 다가가서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응, 그런데 너는 나를 아니? 나도 낯이 좀 익은데.........."
"몇 달 전에 뵌 적이 있어요."
"몇 달 전에?"
"예. 우리 아버지가 여기 담장에 쳐놓은 장식 모두 없애달라고 했을 때 저도 같이 왔어요."
"아! 네가 그 아이로구나?"
"예."
"이리 와서 좀 앉아라. 툇마루에."
"네, 고맙습니다."
"하하하하."
"할아버지, 왜 웃으세요?"
"이게 정말 웃기지 않니? 얘야!"
"뭐가요?"
"이 집이 너희 소유인데, 내가 너더러 이리 와서 앉으라며 주인 행세 하잖니? 그게 웃기잖아?"
"그런가요?"
"너 혹시 주객전도라는 말 아니?"
"네. 배웠어요."
"지금이 그 상황이다. 하하하."
"아, 네. 하하하. 재미있어요. 할아버지."
“저기 담벼력에 그려진 뭉게구름 좀 봐라. 정말 뭉게구름 같지?”
“네.”
“하늘의 구름을 봐라. 저게 진짜지. 벽에 있는 게 가짜야.”
“네.”
“사람들은 뭉게구름을 보고서 저 그림을 그린 건데, 나중에는 저 그림이 진짜 뭉게그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지난번에 그래서 여기가 시끄러웠던 거야. 네 아버지가 간단하게 그 상황을 정리했지. 그림을 구름이라고 생각하는 게 주객전도야. 우리도 주객전도고.”
“아하! 그런데 이 집은 제 게 아니라 우리 아빠 거예요.”
“주객전도가 아니라는 말이구나?”
“네. 할아버지가 주인 같아요.”
“오호, 이 당돌한 녀석을 봤나! 네가 소유를 알아?”
“이 집이 우리 아빠 거라는 건 알아요.”
“소유는 불완전한 약속이야.”
“불완전요?”
“그렇지, 불완전! 네 아빠의 소유는 뒷담부터 앞담까지 그려놓은 경계선의 안쪽이야. 그 경계선의 안쪽에 있는 모든 것이 네 아빠의 것은 아니라는 얘기지.”
“네?”
“생각해봐. 지금 너와 내가 마시는 공기도 아빠 거냐? 우리 머리 위에 있는 하늘도 아빠 거야?”
“아항!”
“소유는 완전할 수 없어. 그리고 처음부터 있지도 않던 것인데, 사람들끼리 약속한 것에 불과하지. 그런데 마치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생각한단 말이지. 진정한 소유는 쓰는 사람의 것이고, 가장 큰 소유는 무소유야. 진짜 부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지. 소유를 버리면 온 세상이 내 것이 되니까.”
“너무 어려워요. 할아버지.”
“미안!”
노인이 꽥 하고 지르는 소리에 아이가 깜짝 놀랍니다.
“아이쿠, 놀래라! 할아버지 적반하장이예요. 잘못한 사람이 이렇게 큰소리치다니!”
“적반하장? 으하하하. 요놈 봐라. 똑똑하네!”
6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있고, 그걸 사람들이 저 담장에 그렸지.
하늘의 뭉게구름은 금새 사라지지만, 저 담장의 뭉게구름은 사시사철 똑같아.
뭉게구름을 가르쳐주려면 금세 사라지는 하늘의 구름보다 저 담벼락의 그림이 더 좋지.
그래서 사람들은 저 그림을 보고 뭉게구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뭉게구름이라고 굳게 믿는 거야.
뭉게구름은 저 그림을 닮아야 하는 거지.
꼬마야, 네 생각은 어때?
잘 모르겠다고?
부끄러워할 거 없어. 당연한 거니까.
하늘은 무슨 색? 파란 색! 구름은 무슨 색? 하얀 색. 그래서 담벼락을 온통 파란 페인트로 칠하고, 거기 한 귀퉁이에 흰 구름을 그려놓은 거지.
하지만 단 한 순간도 하늘은 담벼락의 저 파란색과 똑같은 파랑인 적이 없어.
구름도 저 담벼락의 흰 색과 똑같은 하양인 적이 없어.
하지만 사람들이 말을 할 때는 하늘의 구름과 담벼락의 구름이 구별되지 않지.
그래서 말해진 구름이 진짜 구름을 대신하는 거야.
대신하는 구름이 진짜 구름이 되는 거지.
네 이름이 뭐라고? 철수. 네 이름과 똑같은 거야.
너는 날마다 다른 사람인데, 늘 철수잖아? 오히려 철수라는 이름으로 가두어지지 않은 네가 너일 수도 있지.
사람들은 말속에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봐.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거란다.
7
“그럼, 할아버지는 여기서 담벼락의 구름을 보신 게 아니라, 담장 너머의 하늘을 보신 거예요?”
“그렇지. 똑똑하네. 이놈.”
“그러면 할아버지가 본 하늘은 저한테 뭐라고 말하실 거예요?”
“어허, 이런 당돌한 놈 보게! 어허 좋다. 세상에 내가 이런 질문을 다 받다니! ‘하늘은 푸르고 뭉게구름은 흐른다.’고 해야지.”
“그게 뭐예요?”
“‘푸른 하늘’과 ‘하늘은 푸르다.’는 같지 않다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지금 내가 본 것을 지금 너에게 하는 말이야. 네가 집에 가서 아빠한테 내 말을 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지.”
“어려워요. 할아버지.”
“저 하늘은 무슨 색이냐?”
“파란 색이요.”
“네가 본 파란 하늘과 내가 본 파란 하늘은 같은 색이야. 그치?”
“네.”
“그런데 네가 집에 가서 아빠한테 오늘 본 파란 하늘을 말하면, 아빠의 머릿속에 있는 파란 하늘이 오늘 네가 본 파란 하늘과 같은 색이겠냐? 다른 색이겠냐?”
“달라요. 아하! 그 얘기예요? 알았어요. 할아버지.”
“하늘은 푸르고, 뭉게구름은 흐른다!”
“맞아요. 맞아요. 하늘을 푸르고 구름은 흘러요. 저는 어제의 철수가 아니라 지금의 철수예요. 철수는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이, 지금에만 있어요. 오, 예!”
“담벼락의 구름은 그림이고, 하늘의 구름이 구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가 쉬워. 자칫하면 자신에게 깜빡 속지.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것이 진리를 아는 첫걸음이란다.”
“어렵지만,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아요. 할아버지.”
“기특하기도 하지!”
“할아버지, 저 가야 해요. 저기, 저 여기 가끔 놀러와도 돼요?”
“하하하. 네가 주인 아들인데, 그거야 네 맘이지.”
“알았어요. 할아버지 또 놀러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8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응, 철수 왔구나! 여기 앉아라.”
뭉게구름이 흘러갑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동안 말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은 꼭 죽어야 하나요?”
“그럼. 태어났는데, 안 죽으면 어떡해? 죽는 게 자연스러운 거지.”
“무서워요.”
“철수가 사춘기가 되었구나. 삶을 걱정하는 걸 보니.”
“사춘기가 뭐예요?”
“어른 되기 연습이지.”
“어른이 뭐예요?”
“책임을 아는 거지.”
“책임이 뭐예요?”
“이 거대한 사회를 떠받치는 약속 같은 거야.”
“그 약속이 없으면 안 돼요? 저 어른 되기 싫어요.”
“그 약속이 없으면 싸움이 일어나고, 전쟁이 터져. 오히려 더 빨리, 그리고 더 괴롭게 죽고 죽이지.”
“무서워요.”
“삶이 꼭 무서운 것만은 아니야. 재미도 있어. 즐거움도 있고. 실은, 그게 사는 목적이지.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살다 보면 또 살아져. 그러다 보면 재미도 있지. 그걸 알게 되는 게 사춘기야.”
“그래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두려워요.”
“그걸 찾은 사람이 어른이야. 그걸 찾는 기간이 사춘기고. 그러니 너도 곧 찾을 거야.”
“...........”
“철수야. 나는 살 만큼 살아서 그런지, 사는 게 재미없다. 만약에 나더러 앞으로 너만큼 더 살라고 하면 괴로울 거 같아. 적당히 살다 죽어야지, 너무 오래 사는 것도 힘겨운 일이야.”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두려워요.”
“답을 알려줄까?”
“네.”
“너랑 나랑 인생을 바꾸면 어떨까? 그러면 너는 네가 두려워하는 어른의 삶을 건너뛰고 지금의 늙은 나가 되는 거야. 늙은 나의 나머지 인생을 네가 살고 이번 인생을 끝내는 거지. 나는 네게 주어진 남은 삶을 살고. 얏호!”
“에이! 말도 안 돼요.”
“이런 놈 보게? 생각해봐라. 정말 그러면 너는 인생을 살지도 않고 재미없는 삶을 끝내는 거지. 반대로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은 보물상자 같아서 무엇이 들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 거기엔 네가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것이 가득하지. 나와 인생을 바꾸면 그 보물상자를 버리는 거야. 너는 너의 것을 꺼내야 해. 두려워 말고.”
“알겠어요.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9
돌림병이 뜸해질 무렵, 노인 혼자 앉았는 툇마루 마당에 소년이 어른 하나와 나타납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어서 와라.”
동행한 어른은 소년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안마당 집의 주인이죠.
“우리 아이가 어르신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다고 해서 감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늙은이가 시간이 남아서 주절주절 떠든 건데, 감사 인사는 무슨!”
“아닙니다! 우리 아들이 여기 오는 걸 많이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오히려 이런 좋은 곳에서 쉴 수 있게 해주셔서 제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저도 가끔 와서 쉬어도 되겠지요?”
“아니, 집주인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연하지요. 언제든지 오십시오.”
이렇게 해서 집주인도 툇마루의 손님이 되었습니다.
며칠 뒤 툇마루에는 여섯이 앉았습니다. 낮담파 노인 2명과 집주인과 그의 아들, 그리고 높담파 2명.
담장은 그대로 서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3파가 된 것입니다.
낮담파는 담장 너머 하늘을 보고, 높담파는 담장의 구름을 보고, 주인파는 다시 둘로 나뉘어 아들은 담장 너머 하늘을 보고, 아버지는 담장에 그려진 구름을 구경합니다.
“날씨 참 좋네. 하늘을 파랗고, 구름은 흐르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입니다만, 흔들리는 머리통 속의 생각은 모두 다릅니다.
10
어느 날, 높담파 사람이 집주인에게 말합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근래에 여러 경로당에서 주관하는 벽화 그리기 대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규정이 있어요. 그림의 크기가 일정하게 정해졌어요. 정해진 크기가 여기 벽보다 조금 더 큽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저 벽의 높이를 1미터만 더 올리면 안 될까요? 전체 다 올리기 불편하면 우리가 앉은 쪽의 벽만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래서 잘하면 우리가 상금을 타올 수 있고 그것으로 우리가 여기서 커피라도 맛나게 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주인이 낮담파의 양해를 얻어서 허락했고, 다음날 담장의 절반이 1미터를 올라가서 그럴듯한 그림판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높담파 사람들은 구름을 다시 그리고 구름 위로 비행기 하나를 더 그렸습니다.
며칠 뒤 그들은 대회에 응모하여 상을 탔고, 의기양양하여 커피와 과자를 사들고 안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공짜 커피를 마시며 모든 사람이 즐거웠습니다.
머지않아 높담 벼락에는 그림이 자주 갈렸습니다. 어떤 때는 꽃그림이 그려졌다가, 어떤 때는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는 시원한 잔디밭이 그려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안마당 툇마루에는 커피와 과자가 늘어났습니다.
집주인은 높담파가 가져오는 행복한 결말에 한껏 도취되었고, 소년은 과자맛에 점점 길들여져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노인 하나는 얼마 전에 죽고, 남은 노인 하나가 낮은 담장 너머로 떠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