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도道는 늘 그러하게 무위하는데, 따라서 일삼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道常無爲, 而無不爲.
(만물의) 위에 자리하는 하늘이 만물을 싣는 모습은 (비유컨대 일부러 일삼은) 소리를 가지는 바가 없고, (일부러 일삼은) 냄새를 가지는 바가 없는데, 따라서 (하늘의 아래에 자리하는) 만물이 살아가는 모습은 (하늘의 그러한 모습) 이것을 가득 채우게 되고, 이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천하의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하고, 일부러 일삼는 바(爲; 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하며, (유위有爲를) 조용하게 해야 하고, (유위有爲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일삼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천하에 이르게 되고, 천하와 (더불어) 아우러지게 되기 때문이다.
上天之載, 無聲無臭, 而萬物之生, 實夲於斯. 在人, 則無思無爲. 寂然不動感, 而遂通天下之故也.
여기까지가 제3장이다. 또한, 앞 (제1)장(의 내용)을 잇는다. “도道는 무위(無爲;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에게 나아가고, 무위無爲를 (자신의) 몸으로 삼는데, 따라서 (도道는 유위有爲가) 어렴풋하게 일삼게 되고, (따라서) 일삼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른바, ‘천하의 위에 자리하는 사람은 무위無爲에게 나아가고, 무위無爲를 자신의 몸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노자가 쓴) 이 한 권의 책이 일삼는 큰 요지이다.
右第三章. 亦承上章. 而言道之, 夲體無爲, 而玅用, 無不爲. 是, 一篇之大旨也.
해 설
율곡栗谷이 설명한 “무위無爲에게 나아가고 무위無爲를 (자신의) 몸으로 삼는 모습夲體無爲”과 “(무위無爲로써) 천하에 이르고 천하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모습遂通天下”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방법론으로서의 무위無爲를 의미한다. 따라서 율곡栗谷은 노자의 무위無爲를 수용함으로써, 당시의 유학적 수기치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을 『순언醇言』의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