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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강씨 역사 바로잡기 시리즈 01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본향(本鄕)과 외향(外鄕)
글쓴이 : 강훈기
1392년 7월 17일(음)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국하는데, 가장 가까이서 뛰어난 지략으로 물심양면 내조한 분이 바로 신덕왕후(神德王后)이십니다. 신덕왕후가 고려 후기에 권문세가로 이름을 날리고, 두꺼운 인맥과 탄탄한 재력을 가진 신천강씨 집안을 배경으로, 태조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을 개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리하여 개국 직후인 8월 7일에 조선(朝鮮) 최초의 왕비인 현비(顯妃)로 책봉(冊封)되어, 조선 최초의 국모(國母)가 되었고, 이어서 8월 20일에는 왕비의 둘째 소생인 의안군(宜安君) 방석(芳碩)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국가통치의 기본이 될 틀을 짜는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의 배려 아래 건국주체세력이 “재상중심정치(宰相中心政治)”를 구현하여 백성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원모심려(遠謀深慮)의 뜻이 합하여 이루어진 정당한 통치행위(統治行爲)였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는데 신덕왕후의 내조와 공이 얼마나 컸고, 현비(顯妃)로 책봉되어서도 나라의 여러 가지 중요한 정무를 처리할 때 곁에서 충고하고 돕기를 부지런히 한 사실이, 권근(權近)의 정릉원당 조계종본사 흥천사 조성기(貞陵願堂曹溪宗本社興天寺造成記)에서, 태조 임금이 권근에게 지시한 말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9월 정축일에 임금이 신 권근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에 있을 당시 중외에서 근로할 때나 화가위국(化家爲國: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움)하는 날에도 신덕왕후의 내조가 실로 많았다. 여러 가지 중요한 정무에 임할 때에도 충고하고 돕기를 부지런히 하였는데, 이제 뜻밖에 세상을 떠나니 경계(옳지 않은 일이나 잘못된 일들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시킴)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어진 정승을 잃은 것 같아서 내가 매우 슬프다. 저승길의 복록을 바라면서 이 절을 창립하고 또 그 은택을 미루어 나라를 복되고 만물을 이롭게 하여 길이길이 다함이 없게 하려 한다. 이 뜻을 밝혀서 후세에 전해 보여야 하겠으니, 네가 그 글을 지으라.” 하셨다.]
나아가 임금의 명(命)을 받아 권근이 지은 글에도 신덕왕후의 자질과 성품 및 법도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 권근이 손을 들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옛날부터 군왕이 되는 이가 천명을 받아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는 역시 어진 배필이 있어 그 덕을 보조하지 않음이 없었기 때문에, 왕화(王化: 임금의 덕행에 의한 감화)의 행하는 것이 모두 안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하(夏) 나라의 도산(塗山), 상(商) 나라의 유신(有莘), 주(周) 나라의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는 역사책에서 찬미하여 천고에 빛나는 분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신덕왕태후는 아름다운 자질로 몸소 절검을 실천하였습니다. 일찍이 곤도(坤道: 여자의 도리)의 순함을 빛내고 건도(乾道: 하늘의 도)의 강건함을 짝하였으며, 효도하고 공경함은 종묘 제사에 극진하고 예의범절은 규문(閨門: 부녀자의 거처) 안에서 뛰어났습니다. 올바르게 시작하기를 관저(關雎: 흐트러지지 않음)의 교화(敎化)에서 기초하고 아랫사람들에게 규목(樛木: 늘어진 나뭇가지)의 인처럼 마음을 썼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게으르지 말라는 경계를 어기지 않아 놀고 편안한 데에 빠짐이 없으며 사사로운 청탁을 듣지 않고, 왕업을 도우며 세자를 낳아서 일대의 왕업을 돕고, 만세의 근본을 세웠으니 그 맑은 덕과 아름다운 모범이 참으로 옛날 어진 왕후에게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 복을 누려야 마땅한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아름다운 모습이 영영 감추어지니 향혼(香魂: 향기로운 넋)을 추모할 길이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내조가 없음을 슬퍼하고 신하와 백성들은 국모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을 탄식하여 왕후의 제복에 빛이 없고 산능에는 햇빛이 가리어져서 구름이 수심에 가득하고 달이 슬퍼하는 듯 눈에 가득한 것이 슬픔뿐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그러나 어진 덕이 널리 퍼지고 알려져 멀리 상국(上國: 명나라)에까지 들렸으며 천자(天子: 명 태조 주원장)도 슬퍼하여 칙명(勅命)을 하사하여 조상하고 위로하시니 슬퍼하고 영화롭게 하는 법전이 갖추어졌다고 할 만합니다. 죽백(竹帛: 역사책)의 기록과 금석의 새김이 사실 도산ㆍ유신ㆍ태임ㆍ태사의 공렬(功烈: 드높고 큰 공적)과 어짊을 견주고 덕이 같아 무궁하게 전하여 빛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신이 문장이 졸렬하여 만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으므로, 명을 받으니 마음이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개 부처를 숭배하고 절을 세우면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원하는 대로 감응하지 않음이 없으며 널리 인간 세계를 복되게 하여 넉넉하며 유익함이 한이 없이 한다는 부처의 말이 어찌 신의 언어와 문장으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대하여는 더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조선을 개국하는데 신덕왕후의 내조가 실로 컸고, 현비로 책봉되어서도 아름다운 자질로 몸소 절검을 실천하고, 효의 도를 다하고,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고, 부지런하고, 사사로운 청탁을 듣지 않고, 왕업을 도와 만세의 근본을 세우신 분이셨습니다. 그렇기에 명(明)나라의 천자(天子)도 조선국 중궁의 고명(誥命: 중국의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내려 주었고, 승하하였을 때에는 칙명(勅命)을 내리어 조상하고 위로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이 오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탐욕으로 국왕의 정당한 통치행위를 부정하고, 저지른 “제1차 왕자의 난” 때문에 우리 신천강씨 문중이 참화를 당했고, 또한, 권력을 틀어쥔 자의 탄압으로 서모(庶母)로 폄하된 신덕왕후의 신원(身元)이 260여 년이 지난 후에야 회복되는 수난을 당했으며, 강압으로 편찬한 왜곡된 역사서인 태조실록에는, 마치 신덕왕후의 지나친 욕심으로 최고의 공로자인 정안군 이방원을 제치고 공로가 없고 자격없는 서출이 세자로 책봉된 것처럼 기록해 놓아, 오늘날에도 이를 읽는 우리 후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잘못 기록된 역사서를 지금에 와서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못 기록된 부분을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정사(正史)라고 해서 100%가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기록은 권력을 쥔 자들의 몫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불의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자가 자신이 일으킨 부당한 사건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지요. 그래서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저지른 “제1차 왕자의 난”을 기술(記述)해야 하는 “태조실록(太祖實錄)”을 당대에 바로 편찬하도록 그 난(亂)의 주모자(主謀者)였던 하륜(河崙)에게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대(當代)에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부당함을 들어 사관(史官)들이 극력(極力) 반대했음에도 이를 물리치고 강행(强行)한 것은 오직 자신이 일으킨 떳떳지 못한 난(亂)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는 신천강씨 문중과 관련하여 잘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우선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찾아내어 바로잡아가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그리하여 우리가 찾아낸 기록과 바로잡은 자료들을 근거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제가 먼저 신덕왕후의 본향(本鄕)과 외향(外鄕)에 관해 잘못 기록된 역사서와 지리서(地理書), 그리고 유물(遺物)에 대해 검토해보고 그 진위(眞僞)를 여기에서 밝혀 보고자 합니다.
일국(一國)의 왕비로 책봉되면 이어지는 여러 후속조치 중에 하나로 왕비의 본향(本鄕)을 승격(昇格)시켜줍니다. 조선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의 본향은 황해도(黃海道) 곡산(谷山)이므로, 1393년(태조 2년) 9월 21일에 황해도 곡주(谷州)를 현비(顯妃)의 본향(本鄕)이라 하여 이름을 고쳐 곡산부(谷山府)로 승격시켰습니다. 그 당시 곡산의 행정단위인 주(州)를 한 단계 높여 부(部)로 올려준 것이지요.
“황해도 곡주(谷州)를 현비(顯妃)의 본향(本鄕)이라 하여 이름을 고쳐 곡산부(谷山府)로 승격시키다.” [태조실록 1393년(태조 2년) 9 월 21일]
■ 잘못된 기록된 역사서와 지리지 및 유물
그런데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晋州牧) 편을 보면, 신덕왕후의 본향인 곡산을 곡산부로 승격시킨 것보다 앞선, 1392년(태조 원년)에 경상도 진주목을 신덕왕후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이름을 고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올렸는데, 1402년(태종 2년)에 도로 진주목으로 내렸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 임신에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인 까닭으로 올려서 진양대도호부로 삼았고, 태종 2년 임오에 도로 진주목(晉州牧)으로 하였다.” [세종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올렸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경상도 진주목]
그리고 태종실록 1402년(태종 2년) 12월 16일의 기사에는 신덕왕후의 내향인 진양대도호부를 진주목으로, 본향인 곡산부를 곡산군으로 도로 격하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덕왕후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승격시켰던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를 진주목(晋州牧)으로, 본향(本鄕)이라 하여 승격시켰던 곡산부(谷山府)를 곡산군(谷山郡)으로 격하시키다.” [태종실록 1402년(태종 2년) 12월 16일]
그러니까 태종 이방원이 1402년(태종 2년)에 신덕왕후 언니의 사위인 안변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가 일으킨 난(亂)을 진압(鎭壓)하자마자, 왕후에 대한 보복조치로 내려지는 여러 탄압(彈壓)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왕비 책봉 후 승격되었던 내향과 본향을 도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 주: 태종실록에 보면 “조사의 난”을 조사의가 신덕왕후와 세자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으킨 난으로 축소시키고, 부왕(父王)이 개입한 사실을 숨기려 했으나, 조사의 난에 관련된 실록 기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태조 이성계가 이 난을 막후에서 개입한 사실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여러 흔적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이 난은 안변부사 조사의가 단독으로 일으킨 난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진주를 신덕왕후의 내향이라 했으며, 어째서 본향인 곡산보다 앞서 진주를 승격시켰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본향(本鄕)은 관향(貫鄕), 본관(本貫), 성향(姓鄕), 또는 본디의 고향(故鄕)을 가리키고, 내향(內鄕)은 왕비의 친정(親庭)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신덕왕후의 내향은 분명히 황해도 곡산입니다. 그러니까 신덕왕후의 외가(外家)가 있는 외향(外鄕)인 진주목을 진양대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내향으로 잘못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덕왕후의 모친이 진주강씨(晋州姜氏) 강은(姜誾)의 딸로 진주가 관향이라서 착오를 일으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강탈당했던 진주(晋州) 청곡사(靑谷寺)의 향완(香垸: 향로)이 몇 년 전에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그 향완에 새겨진 99자의 글자 중에는 진양대도호부가 신덕왕후의 본향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주 청곡사의 향완[사진출처 및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이 청곡사 향완은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신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왕생극락을 기원하기 위해 왕후의 원찰(願刹)인 청곡사의 비구(比丘) 상총(尙聰)에게 명(命)하여 주조케 했고, 1397년에 완성되어 청곡사 보광전에 안치되었던 향로(香爐)입니다. 이 향완은 청동 바탕 위에 무늬대로 새긴 자리에 은선(銀線)을 끼워 넣어 마무리한 국보급 작품으로 범자(梵字), 연꽃넝쿨무늬 등이 그려져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작품입니다. 더욱이 주조목적, 제작년대, 주조자와 발원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녔는데, 진양대도호부를 신덕왕후의 본향이라고 잘못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30년 정축(丁丑: 1397년, 태조 6년)에 조선국(朝鮮國) 개국성조(開國聖祖) 성조(聖朝)의 중궁(中宮)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본향(本鄕)인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의 비보선찰(裨補禪刹) 청곡사(靑谷社) 보광전(普光殿) 향완(香垸)은 청곡사(靑谷社)를 중창한 비구(比丘) 상총(尙聰)이 공경스럽게 받들어 조성했다. 온전히 온갖 일을 분별하여 승려들이 상주하는 승당(僧堂)에 잘 간직하고, 언제나 법륜(法輪)을 펼쳐 중생(衆生)을 널리 구제할 것이다. 함께 발원한 사람: 가락부원군 김사행, 찬성사 김주, 입사: 김신강 [大明洪武三十年丁丑 朝鮮國開國祖 聖朝中宮神德王后 本鄕晉陽大都護府裨補禪刹靑谷社 普光殿香垸 敬造 靑谷重刱比丘尙聰 全爲百分常住僧堂所大藏印 成常轉法輪度衆生 同願駕洛府院君金師幸 贊成事金溱 入絲金信剛 靑銅夫金]”
이처럼 외향인 진주를 내향 또는 본향이라고 한 것은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진주는 신덕왕후의 외가가 있는 고장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분명히 보다 더 깊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신덕왕후가 현비로 책봉된 해에 진주를 본향인 곡산보다 앞서 승격 조치한 데에는 그 어떤 사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 신덕왕후의 불심과 청곡사 전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진주목 편을 보면, 진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 주(州)를 설치했고, 그 후 강주(康州) 또는 정주(菁州)라 불렀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太祖) 왕건이 다시 강주(康州)라 했는데, 성종(成宗)이 진주목(晋州牧)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킨 것을 태종(太宗)이 도로 진주목으로 내렸습니다. 진주에 사는 성씨(姓氏)는 정(鄭), 하(河), 강(姜), 유(柳), 소(蘇), 임(任), 강(康), 김(金), 박(朴)인데 모두가 내성(來姓)이라고 나옵니다.
진주시(晋州市) 금산면(琴山面) 갈전리(葛田里) 월아산(月牙山) 자락에는 청곡사(靑谷寺)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천년고찰로 872년(신라 헌강왕 5년)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고, 청학이 깃드는 골짜기라 해서 청곡사라 했답니다. 이 청곡사는 신덕왕후의 원당사찰로 왕후의 생존 때에는 대대적인 불사를 했는데, 대웅전 불상 후불탱화, 업경전 지장보살, 시왕 등 국보급 성상도 돈독한 불심으로 발원했습니다. 왕후가 승하한 다음 해인 1397년에는 태조 이성계가 비구 상총을 시켜 절을 중창했으며, 향완도 만들어 왕후의 명복과 왕생극락을 기원토록 했습니다.
이처럼 왕후와 태조 임금의 정성이 깃든 청곡사에는 아름다운 신덕왕후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후가 어릴 때 청곡사 아랫마을에 살았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로, 청곡사 아랫마을에는 학영지(鶴影池)란 연못이 있는 데, 왕후가 달밤이면 연못에 와서 맑고 깨끗한 물을 거울삼아 비춰보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자기 미모를 고고한 학(鶴)으로 비유하고 자기 얼굴을 학의 그림자처럼 비추었다고 해서 학영지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다리는 학이 날아든다고 해서 방학교(訪鶴橋), 절 앞에 있는 누각은 학을 맞아들인다고 해서 환학루(歡鶴樓)라고 했는데, 이 모두가 신덕왕후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참조: 청곡사 Web-Site)
■ 외향에서 보낸 신덕왕후의 소녀 시절
조선왕조실록 선원계보도(璿源系譜圖)나 왕실계보를 기록한 선원보감(璿源寶鑑) 등에 의하면 신덕왕후는 1356년 6월 14일(음)에 탄강(誕降)했습니다. 왕후 탄강 당시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주요 관직임명 기록을 살펴보면 부친 강윤성(康允成)은 판삼사사(判三司事: 종1품)로, 오빠 강순룡(康舜龍)은 찬성사(贊成事: 정2품)로, 오빠 강득룡(康得龍)은 삼사우사(三司右使: 정3품)였습니다. 그런데 왕후가 탄강한 바로 다음 해인 1357년 8월에 부친이 채하중(蔡河中)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숙부 판도판서 강윤휘(康允暉), 형부 밀직사 신귀(辛貴) 등과 함께 고문과 곤장을 맞고 원지로 유배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1354년에 판삼사사를 지냈던 숙부 강윤충(康允忠)도 역모 사건에 휘말려 1356년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었는데 1358년에 그곳에서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왕후가 집안이 고려조정에 현달하여 권문세가로 명성이 높을 때 탄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나이에 집안에 불어닥친 화(禍)로 어려움을 겪는 처지가 된 것이지요.
그 후 부친은 1358년 4월에 서울과 지방에 있는 참형(斬刑)과 교형(絞刑)이하의 죄수를 모두 다 용서해줄 때, 8개월만에 유배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신천강씨 곡산파보(1979년판)에 의하면 부친이 함경도(咸鏡道) 덕원(德源)에서 1359년 1월 13일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졸(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 덕원으로 갈 때, 모친이 어린 나이의 왕후와 함께 동행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왕후의 어릴 적 행적은 끊어집니다. 안타깝게도 왕후가 어린 시절을 어디에서 보냈는지 알 수 있는 역사의 기록이나 자료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가정은 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부친의 묘소가 있는 함경도 덕원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둘째 부친의 세거지였고 고향인 황해도 곡산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셋째 모친의 친정이 있는 경상도 진주로 가서 살았을 것입니다.
왕후는 오빠들이나 언니와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났습니다. 오빠들의 생몰년에 대한 자료가 없어 출생년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목은시고(牧隱詩藁)에 보면 이색(李穡)이 55세 때에 오빠 강순룡(康舜龍)이 60에 가까웠다고 했으니까, 1328년생인 이색보다 4살 많은 것으로 보면, 오빠 강순룡은 1324년생이 됩니다. 그리고 형부인 신귀(辛貴)가 1335년생이고, 언니의 장남인 신극공(辛克恭)이 1353년생이므로 언니는 1338년생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빠들과 언니와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났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빠들과 언니는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지만, 왕후는 부친과 오빠들이 현달하여 고려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있을 때인 1356년에 늦둥이 막내로 개경에서 탄강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 주: 우리 신천강씨 세보 중에는 신귀 처 강씨가 왕후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는 간행본도 있는데, 이는 언니를 동생으로 잘못 기록한 것입니다.
고려시대 말기의 사회풍습은 조선시대보다 대체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합니다. 원의 풍습이 많이 들어온 까닭에 일부다처제도가 확산했지만, 장기간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속도 남녀 모두 균등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사별하면 친정으로 돌아가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교문화를 가진 조선시대의 사회풍습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거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가지 정황 및 그 당시의 사회풍습으로 보아 왕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는 덕원이나 곡산보다는 진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남편을 여윈 모친이 4살인 왕후를 데리고 친정이 있는 진주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왕후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모친이 억울한 누명에 의한 고문으로 천수를 다하지 못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청곡사를 찾을 때마다, 어린 왕후가 따라갔을 것이고, 독실한 불교도가 되고 불심을 돈독하게 해준 청곡사에 대한 애착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후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고장, 진주목을 먼저 승격시켜 진양대도호부로 삼았고, 청곡사를 왕후의 원찰로 삼아 많은 공양과 시주를 했고, 왕후가 숭하하자 태조 임금은 사랑했던 왕후를 위해 비구 상총을 시켜 청곡사를 중창케 했으며, 항완도 조성케 했습니다. 비구 상총은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를 지을 때도 감주를 맡았던 인물입니다. 거기에다 조정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가락부원군 김사행과 찬성사 김주를 시켜 청곡사의 중창과 향완 조성에 참여시킨 것을 보면, 태조 이성계도 왕후의 심중을 잘 헤아려 지극정성을 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사행은 경복궁을 설계한 천재 건축가였고, 김주는 감독을 맡았으며, 모두가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의 건축에도 관여했던 인물들입니다.
또한, 청곡사의 아랫마을(갈전리)에는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에 대한 버들잎 설화도 있지만, 이 설화는 두 분이 이미 결혼했을 때인 1380년의 이야기라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 본향에서 보낸 신덕왕후의 처녀시절
왕후의 처녀 시절은 본향인 황해도 곡산에서 보낸 것으로 역사의 기록과 야사에 나타납니다. 모친이 왕후와 함께 진주로 피난을 가게 한 하나의 원인으로도 여겨지는 난리가 왕후의 부친이 작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홍건적이 1359년에 1차로 고려를 침입했고, 1361년에는 20만의 대군으로 고려에 다시 침입해 와 황해도를 거쳐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이때 공민왕은 이 난으로 인해 복주(지금의 경북 안동)로 피난을 갔습니다. 1363년 2월에 홍건적이 점령한 개경의 수복작전에서 공을 세운 사촌오빠 상호군 강영(康永)은 1363년 2월에 수복경성 2등 공신이 되었고, 다시 11월에 기해격주홍적 2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개경을 수복하고, 홍건적의 잔당을 압록강 밖으로 쫓아내어 나라가 안정된 이후에야, 왕후는 모친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진주를 떠나 본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옮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왕후의 부군(夫君)이 되는 이성계 장군도 1362년에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홍건적의 격퇴에 참가했고, 함경도 지방에서 벌어지는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공을 세운 탓에 1364년에는 밀직부사로 승진되었고, 단성양절익대공신에 책록되어 공민왕으로부터 금대를 하사받기도 했습니다. 1369년 12월에는 동북면 원수 겸 지문하성사가 되어 1370년 1월에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여 요동 일대를 평정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370년 2월에 요동의 귀순자 300여 호를 데리고 개경에 올라와 왕에게 바칩니다. 그러므로 동북면 원수 겸 지문하성사로 재직할 때에 이 장군이 함흥과 개경을 오가면서 길목의 황해도 곡산 가람산(岢嵐山) 아래에 있는 용연(龍淵)의 우물가에서 왕후를 만났고, 저 유명한 버들잎 설화가 탄생한 것으로 사료(思料)됩니다.
1387년에 목은 이색이 쓴 태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신도비명에는 신덕왕후의 장녀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이제(李濟)와 결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풍습에는 여자가 보통 14~16가 되면 결혼을 했습니다. 왕후가 1356년에 탄강했으니까 15세에 결혼한 것으로 보면 1370년이 결혼한 해가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371년에 경순공주가 출생한 것으로 가정하면 공주가 15~16세 때에 이제와 결혼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1381년에 왕후의 장남 무안대군 이방번이 태어났고, 다음 해인 1382년에 세자 이방석이 태어났습니다.
1669년(현종 10년)에 송시열 등의 주청으로 신덕왕후의 부묘론이 임금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왕후가 복권되어 종묘에 배향된 후, 격하되었던 본향인 곡산군을 다시 곡산부로 승격시켜 주고 왕후의 부모를 추증하는 과정에서 모친의 본향이 진주임이 확인됩니다.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부친 고(故)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으로 추증하고, 신덕왕후의 성향(聖鄕)인 곡산군(谷山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다.” [현종실록 1669년(현종 10년) 10월 13일]
“이조(吏曹)가 아뢰기를, 신덕왕후 모친의 성씨와 관향(貫鄕)을 상고해 볼 곳이 없어서 추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9대 손 강천익(康天翊)이 함경도 덕원에 살고 있다는 것을 듣고 찾아가 묻게 했습니다. 방금 회답 공문을 보니, 강천익에게 물은 결과 강윤성의 부인은 곧 진주강씨(晋州姜氏)로서 강은(姜誾)의 딸이며 묘소는 안변(安邊)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추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이에 강씨를 진산부부인(晋山府夫人)으로 봉하였다.” [현종실록 1670년(현종 11년) 1월 25일]
정조실록(正祖實錄)에 의하면 예조에서 곡산부사 조윤대의 장계를 보고 곡산부(谷山府) 운중방(雲中坊) 임계리(林溪里)에 있는 신덕왕후의 옛 집터에 관해 보고 하자, 정조 임금이 다음과 같이 전교합니다.
“왕후의 본가 관진(觀津)은 관향이 상산이고 상산은 바로 곡산이다. 지금 그 집터에 주춧돌이 우뚝하게 있는데 그 길이가 21척이 넘으니 분명히 대대로 살다가 드디어 본관이 된 것이다. 돌기둥도 필시 결혼을 한 뒤에 집을 지으면서 세운 것일 것이다. 대체로 고을의 보고가 매우 소루하나 옛 집터라는 것은 믿을 수가 있다. 더구나 버들잎을 뛰워 올린 훌륭한 사적이 야사에 널리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달 글피는 바로 우리 왕후의 생신날이다. 이러한 때에 이러한 글이 올라온 것이 마치 서로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듯하다. 그 옛 터에다가 비석을 세우되 비석에 새길 글을 직접 써서 경건하게 옛 사적을 기록해야 하겠다. 비석의 모양은 선왕조 때의 문소전(文昭殿)의 옛 터와 추모동(追慕洞)에 있는 왕후가 탄생한 옛 터에 있는 비석의 척도대로 하여 해당 도에 내려 보내어 가을에 세우도록 하라. 비각의 규모도 옛 전례대로 짓도록 하라….중략” [정조실록 1799년(정조 23년) 6월 10일]
그리고 신덕왕후 생가의 옛 집터에 세울 비석의 앞면에 새길 글에 대해서 임금이 다음과 같이 전교하고, 이틀 후에 편전에 나가 직접 글을 써줍니다.
“상산부(象山府)에 있는 신덕 왕후(神德王后) 생가의 옛터에 세울 비석의 앞면에 새길 글은 황해 감사가 부임할 때 가지고 가게 해야겠으므로 오늘 내가 직접 써서 내일 감사에게 내려주겠다. 비석 음기(陰記)는 대제학 홍양호 (洪良浩)가 써서 올리고 초도서 전자(草圖書篆字)는 원임 직각 김조순(金祖淳)이 써서 올릴 것이며 가지고 가는 것은 용정(龍亭)에 넣어 교외에 까지 가서 감사에게 넘겨주도록 하라. 글씨를 처음 새길 날짜는 내각으로 하여금 길일을 잡아 초기(草記)로 아뢰고 비각을 세우는 공사는 좌향을 정한 다음 나중에 길일을 잡아 착수하도록 하라.” [정조실록 1799년(정조 23년) 8월 8일]
“신덕왕후의 생가 옛터에 세울 비석에 새길 글씨를 정조 임금이 편전에 나가 직접 써주다. [성후사제구기 (聖后私第舊基)]” [정조실록 1799년(정조 23년) 8월 10일]
▲신덕왕후의 옛집터라고 쓴 정조임금의 친필
지금까지 종합적으로 신덕왕후의 본향과 외향에 관해 살펴보고 조명하여 보았듯이, 왕후의 본향은 황해도 곡산부 운중면 임계리이고, 외향은 경상도 진주목 금산면 갈전리입니다. 1669년(현종 10년)에 왕후가 복권되어 종묘에 배향되고, 부친이 영돈녕부사 상산부원군으로 추증이 되면서, 태종이 격하시켰던 신덕왕후의 성향(聖鄕: 왕비의 본향을 높인 말)인 곡산군을 다시 곡산부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러나 진주목은 왕후가 아니라, 왕후 모친의 본향이므로 모친을 진산부부인으로만 추증하고, 진주목은 승격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태종실록에 진주를 왕후의 내향이라고 하고, 청곡사 향완에는 진주를 본향이라고 한 잘못된 기록이 260여 년 만에 바로잡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는 왕후의 외향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어릴 적에 왕후가 진주에서 살았고, 그러한 사실이 청곡사의 전설을 통해 밝혀진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어릴 적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 추억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누구나 그 추억을 잊지 않고,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지요. 이 글을 쓰면서 내내 느꼈던 점은 왕후가 모친을 따라 절에 다니면서 불심을 돈독하게 키운 것이 가장 인상적인 소녀 시절의 추억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러한 추억이 왕후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주의 청곡사에 대한 왕후의 애착심이 남달리 강했고, 그렇게 해서 돈독하게 다져진 불심으로, 부군(夫君)이 왕업(王業)을 이룩하는 데도, 현비로 책봉되어서도, 훌륭하게 내조했으며, 권근의 글처럼 아름다운 자질(資質)로 몸소 절검(節儉)을 실천하고, 효(孝)의 도(道)를 다하고,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고, 부지런하고, 사사로운 청탁을 듣지 않고, 왕업을 도와 만세의 근본을 세우는 데, 조선 최초의 국모로써 그 본분을 다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실제로 왕후는 자신의 돈독한 불심을 이성계 장군에게 심어 주었고,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도 두 분은 유명 사찰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공양하고 발원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두 분이 발원하고, 봉안한 사리구(舍利具)와 사리기(舍利器) 등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두 분이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원한 사리구는 조선개국 약 1년 전에 봉안한 것으로 발원자인 이성계 장군의 직위와 이름, 왕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거기에는 “분충정난 광복섭리 좌명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문하시중 이성계(奮忠定難 匡復燮理 佐命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그리고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함께 발굴된 팔각형 사리기에는 왕후의 부친, 강윤성(康允成)의 이름도 들어가 있는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지요. 이것은 왕후가 소녀 시절 진주 청곡사에서 모친과 함께 부친의 명복(冥福)을 빌던 불사(佛事)를 중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계속하였음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 돈독한 불심을 가지고 부친을 위해 끊임없이 명복을 빌어주던 왕후의 지극한 정성은 조상을 위하는 고귀한 정신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랬기에 국모가 되어서는 종묘(宗廟)에 효의 도를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떤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각자의 입장에서 신덕왕후가 몸소 실천한 조상을 위하는 고귀한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이어나갈 때, 비록 세월이 흘러, 강산이 변하고, 시대가 변한다 해도, 우리의 신천강씨 문중은 영원히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