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고 옳다는 말이 듣기 좋다. 정의도 좋은 말이다. 공정과 공평이란 말은 민주주의 정체 제도를 채택하는 국민이라면 당연하다고 여긴다. 타인에게 일어난 것에 관해 정의가 실행돼야 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정의를 적용하려면 움츠린다. 이 현상은 진리가 무엇인지 묻고, 그것에 궁금하고, 호기심을 가지지만 막상 자신에게 적용하는 경우 누구든 뒷걸음친다. 이것은 예외가 없다. 진리를 듣는 것도 일반적이라면 그럴듯하게 고개를 끄덕여도 자신을 향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타인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 누구든 그렇고, 누구든 하고, 누구든 같은 말을 하니 부정이나 거절할 수 없다. 대중의 심리에 개인의 심리는 안중에도 없기에 대중의 쓰나미가 자신의 것이 된다. 개인만을 추켜세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내 입이 포도청인데 누구의 입에 음식을 제공할까?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인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 중 몇 퍼센트나 이것에 따라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실정이다. 겉으론 자선하면서 사니까. 그럴듯하게 보여서 많은 퍼센트일 것이라고 무심코 생각하지만 막상 그렇지 않다. 게다가 이웃을 위해서만 살 수 없다. 자신의 시간, 재물, 이익, 존재감, 여유는 누구에게든 필요하다.
이기주의와 개성은 개인주의와 인격과 다르다. 영어로는 Egoism과 Individuality는 Individualism과 Person과 다르다. 전자는 자신만을 위하지만, 후자는 누구든 동일한 입장이고 구별 나다는 것을 인정한다. 전자는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만, 후자는 목적으로 삼는다. 정자는 이웃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지만, 후자는 그들 중 자신을 늘 고려한다. 전자를 중심 하는 자는 유별나거나 특이한 행동, 옷차림, 생활양식을 취하고, 후자를 중심 하는 자는 외식이 아니라 톡 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전자는 교만과 거만이지만, 후자는 겸손과 겸허하다. 누구든 전자보다 후자가 옳고 바르다고 인지하지만 삶에서 인정하는 경우는 서로 다르다. 알지만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과 헷갈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리스도인 그분 안에서 선택됐을 뿐만 아니라 새 사람이 됐다. 새 사람이란 기준의 가능성을 두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옛 습성이 남아 있어 벗어나는 삶은 훈련받지 않거나 다른 습관이 자연스러울 때까지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데서 일어난다. 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새 습성을 지닌 채로 사는 자도 간혹 있다. 정말 드물지만 신기하게도 위선적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 있다. 내적 갈등에 관해 알 순 없어도 새 사람으로 사는 자를 만나면 그저 반갑고 좋다. 누구든 새 사람이 되지 않는다. 누구든 새 습성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 새 사람에 관한 정체성을 밝혀지지 않으면 인생이 고달파진다.
새 사람을 중생 된 자를 의미한다. 교회당을 찾는 자가 중생된 자이거나 새 사람처럼 여기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 그런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아니, 자신을 살펴도 좋다. 자신이 과연 새 사람인지 물어보면, 뭐라 대답하 수 있을는지. 새 사람이 되려면 중생 돼야 하겠지만 새 사람은 창조 때 만들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기에 성령 하나님의 갱생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결국 영원에서 선택된 자만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니 얼마나 적을지 생각하면 염려도 된다. 선택된 자만 새 사람이 된다면, 구원받는 자도 그만할 것이라고 여긴다. 타인의 심정과 행위를 쉽게 판단하기 어렵기에 자신의 인간 됨에 관해선 늘 관심을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 자체가 꼬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