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조선비사] 양녕대군의 은밀한 스캔들 (단편 하편)
2부: "팔의(八議)냐, 십악(十惡)이냐" - 세종과 신하들의 불꽃 튀는 대립
다음 날부터 조정은 벌집을 건드린 듯 들끓었다.
의정부 찬성 권진, 형조판서 노한, 좌의정 황희, 호조판서 안순 등이 연이어 상소를 올렸다.
"양녕대군이 주상을 속이고(欺罔), 임금을 원망하며 패악한 언사를 썼으니 이는 신하로서 가장 큰 죄입니다! 당장 유사에 내려 엄히 국문하시고 대의로써 죄를 물으소서!“
그러나 세종의 의지는 단단했다.
"형제 사이에 이런 작은 일로 어찌 국문을 하겠는가. 양녕은 본래 글재주가 부족한 데다, 윤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사형에 처해질까 두려워 구해주려고 중구난방으로 글을 쓰다 그리된 것뿐이다. 내 어찌 형제간의 일로 급작스레 죄를 논하겠는가.“
세종의 감싸기에도 조정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1월 16일, 좌사간 김효정과 집의 김종서가 대전 뜰 아래 엎드렸다.
"전하! 양녕은 과거에도 '소신과 전하의 사이가 이제 소원해질 것입니다'라며 무례를 범했습니다. 신하로서 군신의 분의가 전혀 없으니 추국하여 훗날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종이 중형을 거부하며 법조문을 들고 나왔다.
"형제간의 작은 일이다. 하물며 왕족과 공신을 배려하는 율법의 팔의(八議)가 있지 않은가?"
그러자 신진 기개 넘치는 김종서가 물러서지 않고 응수했다.
"전하! 임금을 속이고 불경한 마음을 품은 것은 십악(十惡)에 해당합니다! 십악의 죄는 팔의를 적용하지 않는 법입니다! 부왕이신 태종께서 온갖 방법으로 가르쳤으나 순종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이 강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당장 먼 곳으로 귀양 보내소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팽팽한 정적이 흘렀다. 세종은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양녕이 나를 속인 것은 욕심을 이루려 한 것일 뿐, 어찌 역심(逆心)이 있어 그랬겠느냐. 윤이와 김불로를 죄주는 것으로 끝내라.“
"전하! 그리하시면 양녕은 더욱 원망을 더할 것입니다. 법대로 하소서!“
"거짓을 말한 것이 죄는 될지언정, 십악은 아니다. 내가 간언을 거절한다는 비평을 들을지언정, 단지 하나뿐인 형님을 위한 것인데 후일의 비판을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세종은 대간들이 올린 양녕 처벌 관련 상소를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명하기까지 했다.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상소를 태우는 것만큼은 면했다.)
판결, 그리고 남겨진 잔향
결국 타협점이 모색되었다. 왕족인 양녕대군에게는 차마 형벌을 내리지 못하는 대신, 사건의 수족이 되었던 이들에게 엄벌이 내려졌다.
의금부의 조사 결과, 세자 시절부터 만났다는 양녕의 말은 완전한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중재자 역할을 한 김불로는 가을이 지난 후 처형(사형)하기로 결정되었고, 윤이는 장 100대에 유형 3,000리에 처해졌으나 속전을 내고 풀려났다.
그러나 윤이의 아비 김천용이 양녕이 선물로 준 여종 2명을 계속 거느리며 "훗날 다시 사통할 계책"을 세우다 적발되자, 대간들의 반발은 다시 폭발했다.
1428년 2월 8일, 세종은 결국 윤이와 그 어머니 기매를 '변방 먼 지방의 관비(官婢)'로 영구히 보내버리는 교지를 내렸다.
2년 뒤인 1430년, 세종이 석방되어 양지(陽智)에 머물던 윤이 모녀를 불쌍히 여겨 노역을 면제해주자, 좌사간 신포시 등 대간들이 다시 격렬히 상소를 올렸다.
"양지는 이천과 가까워 또 다시 양녕과 접촉할지 모릅니다! 영구히 변방 관비로 묶어두소서!"
세종은 끝내 이를 윤허하지 않고, 양녕에 관한 상소를 아예 올리지 말라 명하며 사건의 문을 닫았다.
권력의 최고봉에 있었으나 사랑과 욕망 앞에서는 시골 사제에 갇혀 거짓 상서를 올렸던 폐세자 양녕대군, 그 형을 끝까지 품고 감싸 안으려 했던 성군 세종, 그리고 국법과 군신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물러서지 않았던 김종서와 대간들. 조선 초기를 흔들었던 '윤이 간통 사건'은 우애와 법치 사이에서 갈등했던 세종 시대의 인간적인 단면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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