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원
노종순
옛날 어느 시골에서 한 무지랭이 농부 내외가 밭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중에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조선 팔도 사람이 다 합하면 아마 천 명은 되겄지요?"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아, 이런 멍청이 여편네야 천 명만 되겠어? 삼백 명도 더 되지."
이 얘기를 들으면 대개는 대게 허허 웃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예전에 그 얘기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다. 어머니와 이웃 아주머니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맷돌을 돌리고 아주머니는 맷돌 주둥이에 삶은 콩을 연실 주워 담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돈이 백만 원만 있으면 동네서 부자 소리를 들으며 살텐데'
나는 그때뿐 아니라 그전부터 어른들이 “백만 원만 있으면 집안이 훤히 피어날 텐데” 하고 아쉬워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래서 백만 원이라는 금액은 무지무지하게 큰돈이고 온 동네 땅을 다 살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천만 원 얘기가 나왔다. 백만 원이 열 번 모여야 천만 원이 되는데 나는 거꾸로 천만 원보다 백만 원이 크게 느겨졌다.
‘천만 원보다 백만 원이 크다.’
그게 어린 나의 논리였다.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백이 크냐 천이 크냐”
“천이 크지요”
“그러면 백만 원이 크냐 천만 원이 크냐”
“ 만 원이 크지요”
어머니는 기가 막히는지 아니면 한심스러운지 얼른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랬다. 그게 나의 언어 감각이었다. 천 이 백보다 크다. 그러나 백만 원은 천만 원보다 크다.
그 당시 국민학교 3학년 어린아이의 머릿속에는 그리고 마음속에는 거금 백만 원이 엄청난 보화처럼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국어는 잘했지만, 산수는 못했다. 국어는 항상 90점 이상인데 산수는 늘 낙제점이었다. 선천적으로 수리(數理)에 어두운 구조였던 것이다.
당시 국민 학생 참고서로 『동아전과』와 『동아입시문제집』이 유명해서 그걸로 과외공부를 했었다. 그때 어쩌다가 6학년 언니들이 공부하는 철지난 『동아입시문제집』을 한 권 얻었다. 그 책에 실려있는 문제집에서 다른 건 통 모르겠는데 국어 문제는 6학년 언니들이 어려워하는 문맥 연결 문제라던가 낱말 풀이, 요점정리, 그런 것들을 어지간히 해 놓을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머리는 숫자는 젬병이요 언어에는 제법 밝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나는 숫자에 어둡다. 아마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진다면 그때의 백만 원은 과연 얼마쯤 될까. 숫자에 어두운 나로서는 여전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옛날이야기 속 농사꾼 부부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
백만원
어린 시절에는 온 동네의 땅을 다 사고도 남을 것 같았던 돈이다. 그러나 이제는 명함만 한 카드 한 장으로 그보다 훨씬 큰돈도 쓰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꿈은 백만 원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곳곳에서 백억 원을 말한다.
돈의 자릿수는 끝없이 커졌는데,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넉넉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