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마무리를 하는 날
이른아침 집근처 정류장에서 광역버스4104번을 이용
양재-고속버스터미날-3호터널을 지나 명동앞에서
급히 하차
명동지하상가에서 잠시
화장실
을지로입구-을지로3가-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1020버스로 자하문고개앞 하차
본격적인 오늘 일정을 시작한다.
창의문 입구
최규식경무관동상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일당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등 정부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기습하였다.
사건 당일
무장공비 일당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위장하여
종로구 신영동 168-6번지 세검정을 거쳐 청운동 산1-1번지 창의문을 지나다가
형사 2명에게 검문을 당했다.
최규식 서장은 형사들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해 무장공비들에게 직접 수하를 하며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으나
무장공비들이 먼저 총격을 가하여
제일 앞에 있던 최 서장은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5]
당시 자하문검문소를 지키던 정종수 경사 역시 총격으로 중상을 입고 입원 가료(치료) 중 순직하였다.
사후 이튿날 경무관으로 특진했으며,
1월 25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받은 뒤 당일 국립서울현충원 제3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공비들 중 유일한 생포자
김신조는 이후 최규식 서장의 순직을 두고
“전혀 죽을 필요가 없었다”며 “그저 자기 목숨을 그냥 갖다 바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권총 한 자루 차고 유격대와 맞대결하려 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솔직히 말해 무모한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규식 서장의 제지가 없었다면 청와대는 더 큰 위험에 빠졌을 것이니
최 서장과 정 순경의 죽음은
‘가치있는 죽음’이라는 평을
들을 만한 일이다.#
뒤쪽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의 기차바위다.
모처럼 찾은 북악산은
오르는 길이 전에는 석축이였는데
데크길로 단장이 되여
한결 보기가 좋고 편하다
도성길을 옆에 두고 오르다 보면
전망 또한 일풉아다.
백악산
사진인증을 하는곳
원래에는 청운대이나
그곳이 공사중이라 이곳에서 인증이
이루어 지는 곳이다.
1.21사태때에
총상을입은 소나무
총탄자국이 선명하다.
청운대
공사이전
이곳이 도성길 산행
인증하는 곳이다.
공사가 마무리 되여 가까운 시일에
개방을 할 것 같다.
이곳까지 오르는 계담이 1432대
누군가 친절하게 계단에 표시를....
숙정문
원래는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의 '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으나
이후 중종 때에 '청(淸)'을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靖)'자로 바꾸어 '숙정문'이 되었다.
1523년(중종 18년) 처음으로 '숙정문'이라는 표기가 쓰인 후 혼용되다가
'숙정문'으로 굳은 듯하다.
한양도성 사대문의 이름에는
음양오행사상이 강하게 영향을 주었으며,
5대 덕목 '인의예지신'과 동서남북이 서로가 서로에게 대응하도록 작명했다.
인(仁)의 경우 어질다는 의미에 걸맞게 사계절 중 온화한 봄(春)에 대응하며,
이는 오행사상에 따라 목(木)에 해당하는 동(東)문의 이름 (흥인지문)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의(義)는 엄정해야 하기에 계절로서는 가을(秋)에 대응하며,
오행 중 금(金)에 해당하는 서(西)문의 이름(돈의문)으로 사용되었다.
예(禮)는 화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여 여름(夏)에 대응했으며,
오행 중에서는 화(火)에 해당하는 남(南)문의 이름(숭례문)이 되었다.
지(智)는 공자의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행 중 수(水)에 대응하며, 계절로는 겨울(冬)이 된다.
그래서 원래는 '지(智)'가 이름에 들어가야 했지만
유독 여기만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숙정문의 원래 이름인 '숙청문(肅淸門)'의 '청(淸)'에 이미 물(水)이 있어 '지(智)'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의견과 원래 이름을 '숙청문'이 아니라
'소지문(昭智門)'으로 하려 했다는 의견이 있으나
증거는 부족해 뭐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숙정문을 지나 말바위안내소(폐쇄중)을 자나
도성 외부길을 지나
와룡공원으로 연결이 되는데
알바다.
이정표가 없어
삼청공원까지 내려가
다시 와룡공원까지 오르니
약 40분을을 소비했다.
와룡공원은
삼청근린공원, 창경근린공원, 북악산 도시자연공원이 연접해 있다.
토심이 얕아 수목생육이 어렵고, 아카시나무 등으로 산림이 조성되었으나
주민들이 생명의 나무 천만 그루 심기 행사에 스스로 참여하여
수목을 심고 가꾸어 푸르름과 계절별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공원으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봄에는 산수유, 매화, 진달래, 개나리 등이 피어나
가족단위의 나들이 코스로 좋다.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하여
낙산 또는 낙타산(駱駝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려 시대에 우유를 담당하는 우유소(牛乳所)라는 기관이 조선 시대에 타락색(駝酪色)으로 바뀌었는데,
낙산 일대에 궁중에 우유를 보급하던
왕실 직영 목장이 있어
타락산(駝酪山)으로도 불렸다.
낙산의 서쪽 동네는 동숭동이다.
조선 시대에는 낙산 자락에서 잣나무를 많이 길렀다 하여 본래 ‘백동’(栢洞)이라고 불렸는데,
1914년에 일제의 경성부가 동명을 만들면서
‘숭교방 동쪽에 있는 동네’라고 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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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풍수지리상 명당이라 하여 한양에 수도가 입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낙산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내사산(內四山)을 이루며,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고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과 마주본다.
한양도성이 능선에 축성되었다.
조선 시대
도성 5대 명승지에 이름을 올린
낙산은 조선시대 때 문인들이 별장을 짓고 살 만큼 풍광이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에는 삼청(三淸)·인왕(仁王)·쌍계(雙鷄)·백운(白雲)·청학(淸鶴)을
도성 안의 5대 명승지로 손꼽았는데,
이 중 현재의 이화동에 있던 쌍계동이 기묘한 암석과 울창한 수림에
두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있다 하여
세 번째로 꼽혔다.(펌글)
성북동쪽으로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와룡공원방향으로
석문이 있어 통과 지나보면
별천지다.
조망터가 앞뒤로 있어
서울 야경을 만끽 할수 있을 것 같다.
혜화문을 지나
좌측은 삼선동이다.
전에 없던 계단길을 조금은 가파른 길을 지나면
날머리
흥인지문이
높은 빌딩 숲에서 돋보인다.
흥인지문 인증지에서
사대문을 한 뱃지를 받고
1호선으로 남산 봉수대 행이다.
이곳은 문화탐방 블랙약
인증하는 곳
이곳을 지나
남산 팔각정까지는 약1.5키로
왕복3키로다.
발이 천근이다.
마지막 봉수대 사진으 담고
남산 인증센타에서
사계절 중 가을용 인증을 하고
뱃지와
인증사를 바았다.
(참고로 한양도성길은 계절마다 인증 후
사계절 4개의 인증 후 별개의 인증서를 주는
독특하게 운영을 하고 있다)
봉수대
첫번째 걷기를 할때
정확한 인증 사진이 별로여서
새로히 찍은 사진
한양도성 남산 인증사무소
09:00~17:00 근무
매주 월요일 휴무
35000보
걸었다.
실제 지도상에는창의문-숙정문 2키로
숙정문-말바위안냇 0.2키로
말바위안내소-혜화문 2.6키로
혜화문-흥인지문 2.5키로
말바위안내소에서 삼청공원을 지나 우회로 와룡공원으로
걸어 4키로다.
(약11키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