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2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하늘에는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타이론 기업이라 적혀진 거대한 건물이 화면을 채운다. 길거리로 내려가 보면 영어, 일어, 중국어 등이 융합된, 국제 공용어로 길거리가 시끌벅적하다. 전광판에는 우주 식민지 이주 광고가 흘러나오고,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가 노점 식당에서 국수를 먹는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는 타이론 기업에서 노동을 위해 제작된 인조인간 일당의 자유를 위한 몸부림을 관찰자적 시점에서 전개해 나간다. 감독은 인조인간과 인간의 모습을 대조하며 신선한 충격을 준다. 대표적으로, 동료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인조 인간 일당들은 분노, 슬픔, 허탈함 등 상당히 인간적은 감정 표현을 보이는 반면에 동료 블레이드 러너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상사나 이를 전해 듣는 데커드는 너무나도 무뚝뚝하다. 이를 통해 인조인간의 인간적 면모를 강조하고 색을 잃어가는 자연 인간들의 인간적 면모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자유를 위해 발버둥치는 인조인간과, 자연 인간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을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 사이의 추격전, 결투, 액션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시청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요 서사 요소는 전투와 액션이 아니다. 이 영화는 20대의 해리슨 포드의 빼어난 미모와 함께, 자연인간과 인조인간의 욕망, 인간 사회의 타락, 자연인간의 비 인간적 면모를 동시대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인 상징성과 암시를 통해 전달한다. 이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배경이다. 1980년대 로스앤젤레스는 미국의 부촌 중, 부촌이다. 물론 빈이 모여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 거대한 건물과, 고급 주택이 모여 있고, 고급 차들이 거리를 돌아다닌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약 50년 후의 미래를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가 예상하는 파란만장한 유토피아적 미래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하늘에는 누런 안개가 끼여 있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굴러 다니고, 노숙자, 범죄, 암시장 등 사회적으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문제가 만연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영화의 중반부에 넌지시 이야기되는데, 돈이 있는 사람들은 우주 식민지 정착지로 떠났고, 돈이 있더라도, 유전병을 앓거나, 장애가 있거나,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우주 식민지로 가지 못하고 지구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구는 사회적 약자와 범죄자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이러한 모습으로 황금 도시 LA가 폐허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춰진다. 이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 발버둥치는 인조인간의 이야기를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와 인조인간 로이, 이 두 시점에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난해한 것은 인조인간 일당의 목표이다. 이들은 자유를 위해 지구로 탈출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지구로 온 것도 아니다. 이들은 그저 살고 싶어서 지구를 찾은 것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이 신에게 기도하듯, 이들의 유전자를 제작한 타이론을 찾아가기 위해서 지구에 온 것이었다. 지구에 오면 블레이드 러너가 자신을 제거하러 올 것이라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지구 온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운명을 바꾸지 못한 로이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사랑하는 프리스와 함께하기 위해 돌아간다. 그저 그가 예상치 못한 것은, 데커드의 실력이었다. 살 수 있는 시간, 사랑하는 이, 함께 싸우던 동료들을 모두 잃은 로이는 복수를 작정한다. 하지만 데커드를 죽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로이는 데커드가 자신의 아픔과 두려움을 느끼게끔 하고 싶어한다. 죽음이 임박한 분위기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정말 이상한 방법으로 호소한다.
흥미롭지, 두려움 속에 산다는 것. 노예로 사는 것이 그래. 난 너가 상상치도 못할 만한 것들을 봤어…(중략)… 그 모든
순간들이 시간이 지남에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이제 (나는) 죽을 시간이야.
로이는 건물에 매달려 있는 데커드를 끌어 올려 살린 후 자신이 죽기 전에 마지막에 남긴 독백이다. 그가 원한 것은 단 하나. 넥서스6가 아닌 로이로서 살아가고 기억되기를 원했다.
이 영화의 B 플롯은 A플롯보다 더 A 플롯 같은 인상을 준다. 데커드는 인조인간 레이첼을 만나고, 사랑을 갈등한다. 그는 레이첼을 통하여 인조인간의 심리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시청자에게도 인조인간의 경험과 사고 그리고 감정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결국 데커드는 로이와의 마지막 대면을 한 후, 도망자 신세가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레이첼과 함께하는 것을 선택한다. 단 크레딧이 돌아가기 전에 예술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암시를 감독은 남긴다. 종이로 접은 유니콘. 종이 접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관 중 하나인 개프. 유니콘은 영화 중반부에 데커드가 공상에 빠질 때 등장한다. 만약 배경의 한국이었다면 검찰의 민간 사찰을 의심해 보겠지만, “블레이드 러너”에서 누군가의 개인적인 기억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기억이 인위적이다, 즉 그이가 인조인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남기고 끝난다. 인조인간은 인간인가? 인류는 누구와 전쟁을 하는가? 약자는 지구에 버리고, 인조인간은 노예처럼 쓰이는 이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은 누구의 책임일까? 이 중 하나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인조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아니다. 동물과 비교하자면 노새에 가까울 것 같다. 당나귀보다 크고 말보다 내성이 강한 노새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타래를 풀어보면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유전과 대물림이다. 노새는 인간의 수요가 줄어들면, 줄어들듯 넥서스와 같은 인조인간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일 뿐이다. 이 질문에서 더 알 있는 논의를 기대한다면, “이들이 인간 답게 대해져야 하는가?” 이 질문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본다. 이들은 인간과 구별이 어려운 물리적 특성을 갖고 있고, 인간의 사고를 하고, 인간의 스펙트럼 내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로 당연히 이들을 생물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이 진정한 인간다움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를 가져야 한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인간인 나는 궁극적 목표를 위해 살아간다. 안타깝게도, 블레이드 러너의 넥서스 인조인간은 ‘자신은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다움을 기대한다.’ 이러한 사고를 산출하지 못했다. 생물로서 존중을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지만, 이들이 결코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비슷한 예로, 인도에 한 마을에 코끼리가 여성을 덮쳤다. 그리고 그 여성의 장례식에 그 코끼리가 다시 나타나 쑥대밭이 되었다. 코끼리는 앙심을 품을 수 있는 동물이다. 매우 인간적인 감정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 코끼리는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타고 나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손으로 유전을 대물림 받은 생물학적 부 혹은 모가 존재해하고, 생물학적으로는 유전자의 대물림을 통하여 인간 종의 진화를,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을, 사회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조인간 간의 관계를 꾸리며 자기를 발전해 나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를 가져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허들을 뛰어넘는 듯한 수많은 질문의 연속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출산과 임신이 이를 결정짓는가? 수정과 번식이 이를 결정짓는가? 인간의 모습과 생김새가 이를 결정짓는가? 처음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인간의 내외적인 유사점이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출산의 여부, 부모의 여부, 유전자의 무작위성의 여부,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무엇이든 인간이 되고 싶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영감을 받아 이용하여 통념을 의심하고 분해하다 보니 모든 것의 부정되었고 예외가 허용되었다. 이에 문제를 느끼고 조사해 본 결과, 데카르트는 절대자 등과 같은 몇 가지 불변의 진리를 찾아 규정하고 이를 통해 의문을 설명했다. 결국 생물의 본질에 대한 고찰에서 진리를 찾았다. 첫째, 생물은 유전적 차이를 나타내는 종으로 구별한다. 둘째, 생물의 궁극적 목표는 유전자 대물림을 통한 그 생물의 존속과 진화이다. 셋째,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것은 자기의 유무이고, 확장적으로 자와 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셋을 바탕으로 다음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의 자손으로 유전을 대물림 받은 생물학적 부 혹은 모가 존재해하고,
생물학적으로는 유전자의 대물림을 통하여 인간 종의 진화를,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조인간 간의 관계를 꾸리며
자기를 발전해 나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를 가져야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