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n the Road to Damascus
* 스크롤 압박 느낀다고 바로 뒤로 가기 누르지 마시고 한번 읽기라도 시작해보세요.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힐 거에요.
* 5막 모델과 각 막의 범위는 N.T 라이트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의 내용을 따랐습니다. 각 구간의 제목은 제가 붙였습니다.
* 성경책 안에 막이 다섯 가지로 나눠져 있는 건 아닙니다. 자의적인 구분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래요.
1. N.T 라이트라는 신약학자가 있어요. 신약성경의 권위자인데, 그는 성경의 이야기를 5막으로 구성된 연극으로 비유했어요. 재미있죠. 역사가 연극이라니. 그런데 이 연극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바로 우리가 5막의 주인공들로서 참여 중인 거에요. 따라서 우리가 1막, 2막, 3막, 4막에 이르는 거대한 스토리의 연속 상에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허무맹랑한 말이 정당화될 수 있겠어?" 자, 한번 차근차근 알아볼게요. 중간중간에 제가 넣는 성경 구절도 잘 읽어주세요.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해요. 대신 쉬운 표준새번역을 사용할게요.
[제1막: 창조] 창세기 1-2장
2. 제1막을봅시다. 1막은 창조에요. 이 타이틀은 편의상 제가 붙이는 겁니다. 어쨌든 1막은 성경의 범위로 따지면 창세기 1-2장이에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자 여기서 중요한 건 성경의 1막과 2막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과학적 사실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거에요. 정말로 지구가 24시간 7일 만에 창조되었는가는 성경의 관심사가 아니란 거에요.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아담에게 배꼽이 있었을까? 가인은 누구랑 결혼한 거지? 이런 질문들이 별 의미가 없다는 거에요.창세기의 초반부는 하나님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만드셨는지에 대한 과학적 메커니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따라서 현대과학의 발견과 기독교는 싸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창조과학처럼 교회에서만 통하는 유사과학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는 겁니다. 널리 퍼진 오해와 달리, 과학과 신학은 서로 연구범위가 너무 달라서 신을 입증하지도 반증하지도 못해요. 우리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하지만, 문자적이란 말은 저자가 의도한 대로의 의미를 읽는다는 말이에요. 장르와 문학의 형태를 고려해야만 한다는 거죠. 장르 고려의 필요성은 창세기의 초반부나 시편, 혹은 예언서 등의 책에서 두드러져요. 만약 누군가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서 "뭐야, 여우가 어떻게 말을 해? 이건 말도 안 되는 책이야." 하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진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겠죠? 편협한 판단 기준 때문에 그 안에 숨겨진 보물을 못 보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 대해 철학적인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예를 들어볼게요. (다중 우주론 등은 일단 제외하고) 빅뱅 우주론을 통해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는 것이 현재 물리학계의 정설인데요. 그렇다면 빅뱅을 일으킨 존재는 누구일까요? 빅뱅으로부터 모든 시간, 공간, 물질, 물리법칙이 만들어졌는데, 그렇다면 빅뱅을 일으킨 것은 물질이나 물리법칙은 아닐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주의 시작점엔 시간, 공간, 물질, 물리법칙을 넘어서있는 매우 강력한 트리거가 필요하겠죠. 저는 그 존재가 하나님이라 믿습니다. 물론 이걸로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증명한 건 아니에요. 사실 하나님이 그렇게 허용하시지도 않고요. 다만 하나의 단서 정도는 될 수 있어요. 점점 뒤로 갈수록 이 단서의 퍼즐이 맞춰질 거에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장 3절)
3. 이야기의 1막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 존재했던 다양한 창조설화들에 대한 카운터 펀치가 목적이에요. 바벨론신화, 수메르신화, 이집트신화 등. 창세기를 제외한 대부분 창조신화들의 공통점이 뭐죠? 바로 전투와 폭력이에요. 더 나아가 신들이 인간을 부려먹으려고 창조한 경우가 대다수라는 거에요. 어릴 때 읽은 그리스 로마신화 생각해보시면 이해하기 쉬울 거에요. 성경의 제1막은 이런 신화들에 대해 반대하기 위한 내용입니다. 다른 신이 아닌 바로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전투와 폭력, 싸움, 부려먹기 등의 이유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창조하셨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왜 창조가 사랑이냐고요? 하나님은 그 본성 자체가 완벽히 100% 사랑이신 분이에요. 뒤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세 가지 인격이 그분 안에 있어서 혼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신비한 분이거든요. 그런데 자신 안에 세상과 인간을 사랑할 공간을 비워내신 거에요. 이제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에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분이 되셨어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 때문에 기뻐하시기도, 슬퍼하시기도 하는 장면이 정말 많이 나와요. 하나님이 인간이 없으면 만족을 못 하는 연약한 노인이라 그런 게 아니에요. 자신을 비울 필요가 없음에도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신 거에요. 그 이유는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제가 아는 건 하나님이 자기 피조물들을 정말로 사랑하셨단 거에요. 자신을 비워낼 만큼이나 말이에요.
[제2막: 타락] 창세기 2-11장
4. 제2막을 볼게요. 2막은 타락이에요. 하나님은 세상에서도 특히 인간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외모가 닮아서 '하나님도 눈코입 있다' 이런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가지를 뜻할 수 있어요. 첫째로 우리 안에는 선에 대한 갈망, 즉 도덕성이란 게 있어요.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는 단순히 취향이나 다수결의 합의에 불과하겠죠? 이렇게 따지면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 나치당과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은 적어도 독일에선 선이었다고 봐야 할거에요.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겁니다.
그 다음으론 하나님을 찾는 마음, 그리고 영원에 대한 갈망을 주셨어요. 우리 안에서 이따금 발견할 수 있는 종교성이죠. 아름다운 예술과 자연을 사모하는 마음. 이게 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그림자들이거든요. 이러한 미학까지도 주셨어요. 그런데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바로 자유에요. 자유의지. 이 자유의지를 얼마나 많이 주셨냐면, 자신을 만든 존재를 배신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선악과는 인간을 넘어뜨리려는 함정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만든 하나님을 배반까지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자유를 뜻하는 상징인 거에요. 어쩌면 자유의 여신상은 선악과를 들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기 2장 16-17절)
5. 19곰 테드 아시나요? 코미디 영환데요. 주인공이 왕따라 친구가 없어요. 테디베어가 유일한 친구인 거에요. 근데 이 곰은 그냥 누르면 알라뷰~ 하는 인형에 불과해요. 그런 자동기계 반응에서 누가 진짜 사랑을 느끼겠어요. 그래서 자기 인형이 마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요. 근데 그 기도가 이루어졌어요. 이루어졌는데, 이 곰인형이 잠깐 인기를 얻더니 음주가무와 여자꼬시기에 빠진 양아치로 전락하는 거예요. 자유가 없었다면 우린 19곰 테드처럼 그저 알라뷰~ 하는 인형에 불과할거에요. 1번 누르면 찬양, 2번 누르면 예배, 3번 누르면 기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로보트를 원하지 않으셨어요.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생명체를 원하신 거에요.
그런데 19곰 테드가 탈선하는 모습은 정확히 우리를 비유하고 있어요. 사랑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그 자유의지로 배신하고 양아치짓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배신한다는 게 뭘까요? 하나님은 완전한 선이시기 때문에, 모든 악한 행동이 곧 하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살인, 강간, 도둑질, 강도질, 증오, 경멸, 착취, 미움, 교만. 그리고 혼자 있을 때나 하다 못해 마음속으로 저지르는 못된 일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자유의지에서 나왔어요.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완벽하게 정의롭고 공정한 판사라 이런 엄청난 잘못들을 그냥 없던 일로 해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건 그 분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고, 권선징악의 법칙을 무너뜨리는 일이거든요. 권선징악이 무너진 세상이란 법이 없어진 국가와도 같아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로마서 2장 6-8절)
6.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거에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정확히 어디에서 어떤 시간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포인트가 아니에요. 여기서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배신하여 죄를 지었고, 그 죄와 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연결고리가 끊겼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바로 생명력의 근원인데 그분과 연결고리가 끊겼다는 건 곧 사망이에요. 죽는 거예요 그냥.
법정 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 불에 던져 버리는 당신들의 신들을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들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
이 말은 실제로 법정 스님이 한 말은 아니라고 해요. 논란이 일어나자 길상사 홈페이지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공지했거든요. 하지만 유명한 스님을 이용해 이런 말을 지어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지옥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릴 집어서 지옥에 던지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하나님과 등을 돌린 채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없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로움을 침해하고 싶어하지 않으시기에 이를 강제로 막지 않아요. 방황하고 가출하는 사춘기 자식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만, 집에다 강제로 꽁꽁 묶어서 감금하기는 원하지 않는 부모님의 마음인 거에요.
감금하면 문제가 해결되나요?
그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요. 하나님과 원수지간에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천국에 가겠어요?
그곳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가득할텐데 말이에요.
천국이 더는 천국이 아니게 되는 거죠.
따라서 하나님이 곧 생명의 근원이라면,
하나님 없는 곳이 바로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인 거에요. 우린 그곳으로 자발적으로 걸어가고 있고요.
유명한 작가인
C.S 루이스의 말에 따르면, 지옥의 문은 밖에서 걸어잠그는 게 아니라 안에서 자발적으로 잠그는 거라고 합니다. 전 이말에 동의해요. 어쨌든 바벨탑 사건,
노아의 홍수 등등 타락의 결과들이 이어지면서 2막이 마치게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장 23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제3막: 언약 (약속)] 창세기 12장- 구약성경 전체
7. 제3막은 언약입니다. 쉽게 말하면 약속이죠, 구원에 대한 약속. 창세기 12장부터 구약성경 끝까지가 3막이에요. 3막부터는 장르가 바뀌어서 디테일한 역사적 기록으로서 읽어야 해요. 3막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주세요. 죄로 인해서 망가지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겠단 거에요. 아브라함 부르셔서 약속하고, 모세 불러서 약속하고, 다윗 불러서 약속하고..., 그 와중에 구원의 복선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다음장인 4막에 대한 복선으로 가득한 거에요. 이삭을 바치려했다가 다른 제물이 마련되어 있는 걸 본 아브라함, 바닥 끝까지 내려갔으나 그것이 곧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걸 깨달은 요셉. 명백히 십자가에 대한 복선이죠. 이집트로부터의 출애굽? 복선이죠. 사사를 보내서 회복하시는 사사기? 복선이죠. 왕을 부르셔서 회복하시려는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의 이야기들? 복선이죠. 선지자들을보내서 메시아를 예언하게 한 것? 복선이죠.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4막의 그림자들을 보여주시는 거에요.
3막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복선들이 더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율법, 안식일, 성전이에요.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했던 하나님의 규칙들이었어요. 이 중에는 제사도 포함되는데 자기 죄를 대신 짐승에 지워서 태워보내면 하나님이 깨끗해짐을 인정해주셨던 거죠. 이러한 제사는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서 계속 반복해야만 했어요.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곱 번째 날 쉬신 것처럼 일을 하지 않고 안식을 누리며 거룩하게 지켜야 할 날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한 시간으로 생각했고, 이를 지키는 일에 실제로 목숨을 걸었죠. 성전은 예루살렘에 위치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였어요. 안식일이 거룩한 시간이라면 성전은 거룩한 장소로서, 유대인들은 성전 또한 목숨만큼 중요시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게 전부 4막에 대한 복선이었어요. 4막에 등장하는 메시아는 여러 급진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내가 바로 성전이다. 내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곧 안식일이다) 제사와 율법은 모두 내가 할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목숨을 바쳐 수 천 년간 지키려던 이 모든 것들이 4막에 등장할 메시아를 나타내는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거죠. 메시아가 이것들을 모두 폐기하려고 온 게 아니라, 이젠 그림자를 걷어내고 실체를 드러내려고 온 거에요. 완성작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유대인들로선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 오만한 자를 용서할 수 없었던 거에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누가복음 24장 44절)
[제4막: 구속 (구원)]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서
8. 제4막으로 갑니다. 4막이 바로 이 웅장한 서사시의 클라이맥스에요. 3막에서 계속 복선 깔았잖아요. 궁금하잖아요. 아무리 당근과 채찍을 써봐도 도저히 인간은 돌이킬 마음이 없었어요. 그렇게 2천년 이상이 흘러버렸단 말이에요. 이렇게 답이 없는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회복하시려나. 그런데 아무도 상상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을 사용하셨어요. 당시 모든 유대인이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도대체 어떤 훌륭한 인물일까? 아마 다윗 왕처럼 위대한 전사일 거야."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하나님이 직접 지구에 내려와버리신 거에요. 창조주가 피조물인 인간의 자궁에 들어가서 세포분열을 하고 탯줄을 달고 태어나셨어요.
와, 이건 곤충학자가 개미를 사랑해서 개미가 되겠다는 것보다 더 미친 짓으로 보이는데요. 그만큼 사랑하신 거에요, 우리를. 이 모든 사태를 벌여놓은 장본인인 우리를 말입니다. 근데 더 반전이 있어요. 세상의 창조주가 세상에 행차하시는데 말입니다. 레드카펫 깔고 왕궁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말구유에 오셨어요.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미천한 자리로 오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세상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만드실 수 있었어요.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시는 거에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오셔서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시려 했습니다. 약자와 억눌린 자들을 공감하시려고 왕궁이 아니라 미천한 자리로 행차하신거에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33년간 모든 고통과 유혹들을 직접 당하셨단 사실은 우리에겐 정말로 큰 위로입니다. 그냥 저 멀리서 팔짱 끼고 잘해보라 하는 매정한 신이 아니란 소리거든요.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마치 흰 수염이 자신을 찌른 부하를 껴안으며 했던 대사처럼, "못난 자식이라도 사랑하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9. 이 땅에 오신 약속된 메시아,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반전이죠. 예수님은 때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자 곧 하나님이신 거에요. 삼위일체에 대해선 뒤에서 더 설명해볼게요. 어찌 됐건 요즘 사람들은 "예수는 그냥 훌륭한 도덕 선생이었다!" 라고 말하길 좋아합니다. 이 말이 제일 어리석은 거에요. 예수는 훌륭한 도덕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병자이거나 진짜 하나님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무슨 위대한 도덕 선생이 자길 신이라고 주장합니까? 소크라테스가, 공자가, 부처가 그러덥니까?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고발당한 죄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바로 신성모독이었어요.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멀쩡한 랍비를 왜 신성모독으로 고발해요.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직접 주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인류의 위대한 도덕 스승이란 말은 넌센스에요. 또다른 반론이 있는데, 예수님은 도덕 선생이 맞았지만 제자들이 무언가 이득을 위해 예수에게 신성을 부여했다는 거에요. 근데 제자들이 그로 인해 무슨 이득을 보았죠? 아..., 목이 잘리고, 톱으로 썰리고, 가죽이 벗겨지고, 사자한테 물어뜯겨 죽는 거요?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자고요.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4:9-10절)
10. 예수 그리스도께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가 어떤 형벌인 줄 아세요? 성화나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되게 낭만적인 것처럼 보여요. 근데 현실은 처절하고 잔인한 처벌이거든요. 손목과 발목의 뼈 사이에 못을 박아서 십자가에 고정하면 사람이 축 처져서 횡격막이 올라갑니다. 그러면 숨을 못 쉬어요. 뼈 사이에 박힌 못에 의지해서 본능적으로 숨 쉬러 올라갑니다. 숨 한번 쉬고 다시 떨어지는 거에요. 도저히 힘이 없어서 못 올라갈 때까지 반복되요. 이 과정에서 온몸의 피와 물이 거의 다 빠져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마르다 하신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뼈가 아파서 기절도 못 합니다. 밤에는 까마귀나 벌레들이 와서 살을 파먹어요. 생생한 정신으로 죽기 직전까지의 고통을 남김없이 겪는 이런 사악한 처벌이 바로 십자가였어요. 따라서 로마시민은 아무리 잘못해도 십자가형은 받지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예우였던 거죠.
이런 심판을 창조주와 동급이신 예수께서 받으셨습니다. 대체 왜요? 정의에는 반드시 심판이 필요하니까요. 이건 세일러문도 아는 사실이에요.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법이란 게 뭔가요? 악한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 처벌을 내리는 게 법입니다. 정의와 법 그리고 처벌은 언제나 맞닿아있어요. 처벌 없는 법은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대표로서 모든 죄를 짊어진 한 사람이 죽어야만 했던 거에요. 이를 위해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이신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십자가로서 궁극의 정의를 보여주신 거에요. 그런데 십자가는 그와 동시에 궁극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인간 대신 창조주가 대신 이런 처벌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희생입니다. 정신 나간 사랑이죠. 그래서 이걸 Amazing Grace라며 찬양하지 않습니까? 정말 놀라운 은혜.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로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5절)
11. 중요한 건 십자가가 4막의 클라이맥스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단 사실이에요. 만약 예수의 죽음이 클라이맥스였으면 우린 아무런 희망이 없었겠죠. 그렇기에 그분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의미하는 게 뭐냐면요. 악의 권세, 성경은 악의 권세의 총 지휘자를 사단이라고 말해요. 이 사탄의 가장 센 무기가 뭐냐면 사망이에요. 사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은 죽이는 거에요. 그래서 사탄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이제 죽을 수 있는 몸을 입은 것 같군? 그럼 내가 죽일 수 있겠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신의 초필살기인 죽음을 퍼부은 거에요. 근데 사탄의 무기는 예수님에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통하는 줄 알았겠지만, 다시 살아나셨거든요. 결국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죽은 거에요.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
12. 예수의 부활은 전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논하는 건 차고에 투명 드래곤이 있다거나 제우스가 번개 던지는 걸 봤다는 주장같이 추상적인 판타지가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아무도 목숨 안 바쳐요. 기독교인들은 이 일이 인간 역사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거에요. 우린 이를 조사해볼 수 있고, 따라서 기독교가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해볼 수 있어요. 역사학자들은(기독교 신자든 비신자든 간에) 예수님의 장례식, 비어있는 채로 발견된 무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증언한 사실, 그리고 이 증언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길 서슴지 않았다는 점, 이 네 가지를 명백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합니다. 많은 전승과 기록, 정황이 증거가 돼주거든요.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가정이 없이도 객관적으로 조사해볼 수 있는 사건이란 소립니다. 이를 연구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어떤 다른 설명들보다 합리적인 설명이란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다른 가설들, 이를 테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쳤다거나, 유대인들이 시체를 훔쳤다거나, 사실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적이 없이 탈출했다거나,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조리 환각상태에 빠졌다거나 하는 설명은 전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뒷받침할 근거가 아예 없어요.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수많은 신약학자, 역사학자들이 계속해서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반대할 근거는 "난 죽어도 기적을 믿지 못하겠다." 라는 말밖에 없어요. 실제로 이것 때문에 대부분 못 믿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사실 하나님이 존재하실 확률과 비례해요. 우주의 창조자가 계시기만 하다면야 자기 아들을 살리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어떤 무신론자조차 신이 없을 확률이 0%라고 말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엄청난 입증책임을 지는거니까요. 리차드 도킨스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거의(Probably) 확실하다고 말할 뿐이에요. (만들어진 신 158p) 물론 그런 결론을 내는 논리도 엉성하지만요. 여기선 일단 넘어갈게요.
어쨌든 기적은 말 그대로 일어날 확률이 극히 희박하니까 기적인 거에요. 자주 일어나면 그건 자연법칙이지 기적이 아니죠. 확률이 0%만 아니면 기적이 일어나지 못할 이유가 뭔가요? 따라서 기적을 믿을 수 없다는 반론도 부활을 반증할 순 없어요.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직접 증언하셨던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는 사실이라는 게 확실히 밝혀져요. 그러니까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성경을 믿어서 부활을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활을 믿기에 성경을 믿을 수 있다."
오, 이거 완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네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19절)
13.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끊어진 줄 알았던 연결고리를 다시 맺어주셨어요. 예수님이 그 끊어진 다리에다 자기 몸을 던져서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주셨다는 거에요. 그렇기에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죗값이 지불되었고, 따라서 죄의 대가인 사망을 면제해주셨단 말이에요.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
다만 이 사실을 믿어야만 해당하는 거예요. 믿지도 않는데 어떻게 효력을 누리겠습니까? 믿는 자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이 된 거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예전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거에요. 강제로 착하게 사는 게 아니라, 감사로 인해 자발적으로 그렇게 사는거에요. 도덕적인 삶은 다른 종교나 무교인 분들도 많이 보여줍니다. 아니 그분들이 오히려 더 착해요. 그런데 동기가 다른 거에요.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여기까지가 4막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
[제5막: 하나님 나라 (천국)] 신약의 편지들 - 현재
14. 드디어 마지막 장인 제 5막이 시작돼요. 5막은 신약성경의 편지들을 포함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까지 쭉 이어져 오고 있어요. 우리가 곧 5막의 주인공인 거에요. 그럼 연극배우로서 우리의 임무가 뭐냐?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고 알리는 거에요. 아니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제4막에서 이미 임했어요. 십자가와 부활로서 그 나라에 참여할 백성은 이미 만들어 놓으셨으니까요. 그렇지만 여전히 임하는 중인 거에요. 신학적으로 논란도 있고 헷갈리는 개념이지만, 일단은 5막의 주인공인 우릴 통해 그 나라가 완성되어 간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어 영원히 사는 곳이에요. 완벽한 도덕성과 완벽한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서 독재라고 하면 자동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데요, 세종대왕의 통치도 독재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세종대왕의 시절은 좋은 시절로 생각하죠.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세종대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완벽한 왕이 다스리는 곳이에요.
하나님은 신이라 실수를 안 하세요. 그러니까 그곳엔 싸움도 미움도 불평등도 없이 영원한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할 거에요. 그곳이 하나님 나라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이 바로 그곳인 거에요. 하나님 나라와 천국 둘 다 똑같은 말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지금껏 약속을 지켜오셨고, 이 약속도 지키실 거에요.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그냥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 이게 끝이 아니라, 인간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몸을 입고 부활하는 거예요, 마치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성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성 안에 있고, 그의 종들이 그를 예배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고,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3-5절)
[성경에서 성령님은 비둘기와 불로 자주 비유되요]
15. 5막의 주인공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거에요. 4막의 클라이맥스인 복음을 널리 알리고, 장차 오실 하나님 나라의 기반을 닦는 일을 하는 거죠. 모두 목사 되고 선교사 되라는 가르침이 아니에요.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타협하지 않고 한 줄기 빛이 되어 살아가라는 거에요. 희망을 혼자만 꽁꽁 숨겨두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세상의 희망이 되는 거예요. "아, 이 세상에 아직 살아갈 희망이 있구나. 저런 사람들이 있구나." 이걸 보여줘야만 하는 게그리스도인이에요.
이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이에요.
그런데 이런 삶을 살 힘이 우리 안에는 도저히 없어요. 제 안에도 없고요, 다른 기독교인들 안에도 없어요. 아직 죄의 잔재들이 남아있고, 하나님의 형상이 궁극적으로 회복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특히 기독교인들에겐 사단의 방해도 강한지라, 교회만 가면 인간관계가 꼬이고 어려운 것만 같아요. 아..., 그래서 참 예배드리러 가기가 싫어져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아마 누구나 느낄걸요. 근데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5막에는 전투씬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 해리포터, 나니아 연대기 같은 긴 시리즈물을 보세요. 마지막 편에서 가장 전투가 많이 일어나지 않나요? 보통 마지막 편의 부제는 이렇게 붙이죠. "최후의 전투". 성경의 5막도 마찬가지예요. 영적인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 이 말이에요. 거창한 스케일에서부터, 가장 사소한 일상에까지 영적 전쟁이 일어나요. 따라서 이 전투를 지휘해주실 든든한 사령관이 필요해요.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영으로 오신 세 번째 하나님, 즉 성령님이에요.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
[물, 수증기, 얼음. 그러나 같은 H20]
16. 따라서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예수님, 인도하시는 성령님 세 분을 동시에 믿는 거에요. 이 세 분은 근본이 같은 분이에요. 그래서 이를 삼위일체라 불러요. 세 인격이 하나의 존재라는 거죠. 이를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묘사해볼 수는 있어요. 마치 얼음, 물, 수증기가 똑같이 H20이듯이 하나님은 세 분이 한 명이세요. 하지만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세 인격이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한 비유가 아니에요. 아니면 태아를 품고 있는 엄마가, 엄마의 자궁, 아빠의 DNA, 그리고 아기 이렇게 세 종류의 생명력을 품고 있다고 비유해볼 수도 있을 거에요.
17. 우린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녹록지 않은 이 5막의 무대를 살아가야만 해요. 예수님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순탄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가짜에요. 만약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것이 바로 제5막이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잊지 마세요. 5막엔 최후의 전투가 일어나요.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이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어요. 혹은 목숨의 위협까진 안 받더라도 방대한 철학의 비판과 상대해야만 합니다. 신앙을 온전히 유지하려면 공부할 게 참 많죠.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 복음을 진실로 믿고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사람이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는 현실도 감당해야 합니다. 같이 욕먹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겁니다. 정말 상상도 못 할 교회의 악행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교회 다닌다는 말을 꺼내는 것에도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평판이 나빠요. 물론 유혹도 그만큼 많아졌기에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할 가능성도 너무나 높고요. 그래도 버텨나가야해요.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그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이 연극은 끝이 이미 정해진 대본이에요. 해피엔딩이거든요. 주님께 영광스런 칭찬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것으로 끝나는 거에요.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마태복음 25장 23절)
18. 사실 종교는 자리 잡고 안정되면 그때 가져도 돼요. 근데 복음은 아니에요. 복음을 믿기에 너무 이른 때는 없는 거에요. 복음은 종교가 아니에요. 복음은 죽기 전에 천국 가려고 드는 보험도 아니에요. 복음은 관계에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예수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세요. 정말로 복음을 믿는다면 현재의 삶 또한 뒤집어지거든요. 의미를 찾으려 열심히 달려보지만 결국 죽음이란 낭떠러지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 외롭고 허무하고 무의미해요. 프랑스의 대문학가들이 느꼈던 그 감정 그대로에요. 그런데 복음을 믿는 순간 우린 대서사시의 마지막 5막을 담당하는 주인공의 정체성으로 완전히 뒤바뀌는거에요.
죽음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마치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의 삶과도 같아요. 그런데 죽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통과 과정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삶의 마음가짐이 완전히 다를거에요. 여행 날짜를 기다리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죠. 여행의 준비과정은 물론 어렵고 복잡해요. 길고 거창한 여행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로의 여행은 얼마나 준비할 게 많고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어마어마한 곳으로의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이를 믿는다면 항상 기쁜마음으로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이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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