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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중.고등학교 동창회보 원고
경주에 가거든 남산을 찿아라
서라벌역사문화연구원 부설
경주가이드센터 회장
1.경주 남산과 교가
꽃다운 혼 피어 올라 서라벌 천년
수정 앞 남산에 옥돌이 난다
젊은 가슴 품은 뜻을 갈고 닦는 곳
이상에 불타는 그 이름 경주중학교
퍼져 나간다 빛은 동방에서 서라벌에서
아 - 아 - 경주중학교 영원한 마음의 고향아
마음의 고향아
경주중학교 교정에서 바라 보이는 앞산이 바로 경주 남산이다. 옛부터 남산에는 옥돌이 많이 난다고 해서 “경주 돌이면 다 옥돌이냐?” 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그래서 모교의 교가에서도 남산에 옥돌이 난다고 노래 하고 있다.
물론 수봉뜰에 뛰어놀던 동문들의 됨됨이를 이야기하는 가사인걸 알지만, 경주를 대표하는 남산 옥돌에 빗대어 노래한걸 보면 경주중학교 출신 동문들은 대단한 옥돌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경주 남산은 수반 위에 얹힌 잘 생긴 돌 같다고 수석 (水石)하는 이들은 탄복하는 산이다 그런데 경주중고등학교 동창회가 10여년 전부터 동문산행대회를 개최하였더니,경주에 있는 명문교는 너도 나도 다 나서서 이제는 경주공고, 문화고, 경주정보고,신라중학교 총동창회까지 남산에서 동문단합잔치를 벌리고,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에서도 매년 봄에 전교생은 물론 동국대사회교육원까지 포함하여 남산을 보호 한답시고 자근자근 밟고 있으며,그 외에도 전국각지의 산악회가 등산화 발자국을 남기더니, 이제는 수많은 지자체 자생단체들이 남산을 정화한다는 어깨띠를 두르고 오늘도 남산을 짓밟고 있다.
또 못난 승려와 마라톤매니아들은 신성한 성지요,소중한 문화유산인 경주남산을 운동장인양 착각하여 팬티만 걸치고 뛰는 소위 산길마라톤대회를 부처님오신날에 맞춰서 개최하는데 불국사등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가 동참하여 훼손시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어디 그뿐인가 어떤 멍청한 행정가는 야간관광을 위하여 경주 남산 유적지마다 가로등과 조명등을 설치할 계획을 하는 등 남산의 훼손과 황폐화에 종교인와 행정가 등이 승속을 넘어 함께 하고 있고,지역내 명문고교 총동창회는 세력과시의 일환으로 말 못하는 남산을 짓밟고 나설 궁리에 열중하고 있다.이것이 진정한 21세기 경주 사람들의 남산사랑 방법이란 말인가?
경주 남산은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다.길이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연과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룬 한국의 문화유산이요,세계의 문화유산이다.이제 수봉동문들은 지난날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주 남산의 소중함과 역사성을 인식하고, 진정한 남산사랑에 앞장서야 할 때가 도래하였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 경주 남산을 지키고 가꾸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우리는 남산에 대해 더 많은 숙제도 함께 떠 안게 되었다.늘어나는 탐방객들로 인한 훼손,분묘,편의시설,탐방객을 제대로 안내하기 위한 교육과 홍보 등 여러 가지 문제점과 논의사항들이 산재해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경주 남산은 국립공원이 아니라 문화유산으로서 마땅히 자연과 어우러지고,자연 속에 살아 숨쉬는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고,계승.발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흔들리지않는 원칙의 고수만이 세계문화유산 남산을 제대로 지켜나갈 수 있는 길이다.
2.경주와 남산
경주는 신라천년의 도읍지로 경순왕때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내주고 나서부터 경주(慶州)라 이름하였다.그리고 고려 성종때 동경(東京)이라 하고, 이후 영남의 웅도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경주는 동(東)으로 명활산,서(西)로는 선도산,남(南)으로 남산,북(北)으로 금강산을두고 가운데 커다란 분지를 형성하였다.
남산은 분지 중앙에 있으며,북에서 남을 향해 솟은 긴 타원형의 큰언덕으로, 남천(南川)의 남쪽 기슭에서 시작해 차츰 해목령과 냉골암봉으로 올라,468미터의 금오산 꼭대기에 이르러서는 멀리 동쪽의 토함산과 함월산이 마주보고 있고,서쪽엔 망산이 빤히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에 벽도산, 단석산이 준령을 자랑하고 있다,남쪽으로는 용장계의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494미터의 고위산에 접하며,다시 백운계를 지나 마석산령으로 해서 치술령으로 이어진다.남북길이 4키로미터,동서너비 8키로미터이며,산은 험하고 깊으면서,계곡은 굽이쳐 흘러 64골짜기에 수많은 유물,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 서남산의 장창곡,포석계,삼릉계,약수계,용장계,천룡사지의 물은 서천으로 흘러들어가고,동남산의 불곡,탑곡,국사곡,대지암곡,오산골등의 물이 남천내로 합류하여 이윽고 서천과 합하고, 북천을 모아서 북쪽으로 흘러 형산강이 되어 동해로 들어 간다.
3.고청(古靑)과 남산
우현(又玄)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의 남쪽에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남산에는 경주 사람이면 다 아다시피 신라시대의 수많은 불상과 탑 등 불교 문화유산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최근세에 이르기 까지 각양각종의 문화재가 아울러 밀집분포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천년간의 신라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보물 같은 자료와 자연 환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이다. 나아가 남산은 하나의 단위 문화재로서 단일지역에 672 개소(건)의 문화재가 서로 어우러져 집중되어 있을 만큼 질적으로, 양적으로 독보적이고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불교 문화유산의 보고이며, 신라의 영산이요 우리민족의 성지이다.
또한 경주 남산은 신라도성의 진산이며, 미타의 도량이고 도솔천이었다. 계곡마다 절이 있고 탑이 있고 불, 보살상들이 있으며, 높은 바위에는 수척이나 되는 마애불을 새기고, 큰 바위 4면에는 모든 하늘과 모든 부처님의 정경을 표현하였다. 골짜기가 있으면 절 터(寺址)가 있고, 절 터가 있으면 탑과 불상을 남겨 놓았으니, 남산 전체가 하나의 큰 사원이며, 불적(佛蹟)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골짜기 마다 넘치는 종소리와 북소리는 지금 바로 산바람 되어서 봉우리 마다 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가 바위 끝에 서있는 탑, 깍아지른듯한 바위 위에 높이 솟아있는 불, 보살상, 곳곳의 큰 탑, 산기슭의 대가람 등 모두 포함 하고 있어서 건축 또는 조각사 에서 둘도 없는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4.세계문화유산 경주 남산 종합정비 계획
경주의 남쪽에 자리잡은 남산은
이후 남산의 문화유적에 대한 전반적인 중요성이 인정되어
또한
문화재청에서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를 통하여 이미1998년부터2002년까지 5개년에 걸쳐서 보존.정비계획수립하였다.이에 경주남산종합정비계획은 남산과 그주변에 대한 총체적인 정비계획안을 마련하며,각 단위 기간 5년으로 설정하여 2003년부터 2052년까지 총50년간에 걸친 중장기 계획으로 실행중에 있다.금년에는 지방유형문화재제113호인 새갓골 제3사지 석조여래좌상 주변과 삼릉계
제6사지 보물 제666호인 석조여래좌상 주변을 발굴 조사하고 있다.
5.경주남산의 절터
경주에는 현재까지 조사를 통하여 파악된 사찰 혹은 절 터가 모두 220여개소에 이르는데, 이 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찰은 90개소이다.경주권역에서 확인된 220여개소의 절터중 남산에 조영된 사찰은 모두 147개소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대부분 폐사되어 법통이 유지되는 사찰은 거의 없다.석조불상과탑이 소재하는 곳은 대부분 사찰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축대나 건물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사찰 가운데 문헌기록상에 전해오는 대표적인 곳은 천룡사,보리사,천은사,천관사,남간사,인용사,용장사,석가사,양피사,피리사(후에 염불사로 바뀜),불무사,창림사,생의사 등이다.이 가운데 천룡사와 보리사(현재의 보리사는 정확하게 고증된 것은 아님)만 근대에 들어 다시 법통을 이어 가고 있을 뿐이며,위치를 정확하게 고증하기 어려운 사찰이 대부분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찰이 도성내 궁궐을 중심으로 주로 창건되었으나,통일 이후 평지에 조영되던 사찰과 왕릉들은 주변의 산지에 자리잡게 된다.고신라에서 남산에 조영된 사찰로는 선방사와 장창곡 삼존불출토 절터 등을 들 수 있는데,대부분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고,조선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 법통이 끊어지고,조선후기에 극히 일부 사찰에서 그 법맥이 겨우 유지되고 있었음을 개인문집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동남산의 칠불암,통일암,무량사,보리사와 서남산의 성불사,부흥사,삼불사,망월사,와룡암 등의 사찰은 근세들어세워졌고, 서남산에 새로 생긴 정각사,함월사,금오사,보성사 등은 근래에 신축 되었으며,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가 또 절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남산에서 수많은 절터가 확인되었지만,지금까지 절터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이 실시된 적이 없어 가람배치나 창건 시기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성격규명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하지만 크게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으로 구별할 수 있으며,이 중에는 쌍탑의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는 傳인용사지,傳양피사지,傳염불사지가 동남산에 위치하고 있으며,서남산에는 기암곡 제2사지가 유일하게 확인되고 있다.산지가람의 경우 단탑 가람은 대부분 망탑(望塔) 형식으로 절터내 혹은 주변에 가장 높은 곳에축조되기도 하며,무탑 가람 혹은 암자 규모 내지는 야외에 석조불상만을 모시는 사찰들도 다수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남산의 불상
법흥왕15년(A.D.528)에 불교를 공인한 이후,신라는 왕경 중심지에 흥륜사(544년).황룡사(553년)와 같은 대형사찰과 함께 수많은 불상들을 조성하였다.평지형 가람에는 주로 예배의 대상이 되는 금동불상이 모셔지고,남산과 같이 산속에 세워지는 절들은 주변의 자연바위를 활용한 석조불상이 널리 제작되었다.
특히 남산은 다른지역과 달리 양질의 화강암이 다량 분포하고 있어 7세기경부터 석조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하였고,8.9세기를 지나면서 불상의 양식은 다양하게 변화.발전하였다.60여개의 계곡을 따라 147개소의 사찰이 조영되면서 주변의 자연바위는 입체적으로 새기는 환조,돋을 새김하는 부조,선으로 표시하는 선각등 여러형태의 불.보살상으로 다듬어졌는데,지금까지 총 107구의 석조불.보살상이 확인되었다.여기에 발굴또는 수습된 소형의 금동.청동불 11구를 포함하면 남산의 불상은 총 118구에 이른다.이처럼 불.보살상으로 가득 찬 남산은 신라사람들이 꿈꾸었던 불국정토 그 자체인 것이다.
남산에서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한 7세기쯤에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머리가 큰, 아동형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불상이 몇구 남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장창곡 삼화령 미륵삼존불상과 배동 삼존불상이다.이와 함께 불곡에 조성된 감실 석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작을 보여주는 예로 주목받고 있다.
삼국통일(676년) 후 새로운 불상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출발점은 동남산의 봉화곡 칠불암 마애삼존불상이라 할 수 있다.본존불은 성도의 순간을 표현한 항마촉지인을 결하고,우견편단의 법의를 입었으며,결가부좌한 양다리사이의 옷자락을 부채살 모양으로 표현하였다.이러한 형식들은 이후 8세기 중엽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전한 정형(定型)을 이루게 된다.
남산에서는 칠불암 본존불상 외에 총 13구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이 제작되었는데 주로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여준다.항마촉지인의 불상의 법의는 석굴암 본존불상처럼 우견편단 또는 통견의 법의를 착의하기도 하며,온쪽어깨위에 가사 끈 장식을 하는등 법의의 표현에서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대좌도 장엄한 8각형대좌와 사천왕상이 새겨진 4각형대좌도 있어 석굴암 불상의 정형에서 벗어난 변화를 보여준다.그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삼릉계 제6사지 석조 약사여래좌상처럼 약그릇을 들고 있는 항마촉지인 약사여래불이라는 예외적인 형식도 있어 다양한 유형으로 발전한 항마촉지인 불상의 계보를 엿 볼 수 있다.
9세기 불상의 새로운 경향은 대형화된 마애불의 조성에서 찿을 수 있다.이 시기 남산에는 8.6 미터에 이르는 약수골 마애여래입상과 5.2 미터의 삼릉계 상선암 마애여래좌상이 제작되었다.약수계마애불은 좁은어깨와 평행 계단식 옷주름 표현으로,이러한 특징은 삼릉계 상선암 마애여래좌상으로 이어져 통일신라 말기까지 지속된다.또한 사면에 불.보살을 비롯하여 비천,승려,사자,및 마애탑 등을 표현한 높이 10미터의 탑곡 마애조상군은 남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일반적으로 9세기에 널리 제작되던 비로자나불상은 장창곡 전창림사지 2구만 전할 뿐이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은 제대로 계승되지 않아 남산에서는 10세기 이후 불상 양식의 전개과정을 보여 주는 불상은 거의 조성되지 않았다.또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배불숭유 정책에 따라 많은 석조불상들은 머리가 잘리는 수난을 당해 지금 남아있는 불상의 대부분은 완전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더하여 사찰들도 폐사가 되었다.이에 각 사찰에 안치되었던 불상은 그 자취를 알 수 없고, 소형의 금동불상이 가끔 출토되고 있다.향후 지속적인 조사와 정비를 위한 사지 발굴이 진행된다면 더 많은 불상이 출토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국사골 부석 아래 기도처에 새겨진 마애불과 지바위골의 마애불들은 1960~70년대에 기도하던 사람들에 의해 새겨 졌다.
7.남산의 탑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예배하는 대상물로 진신사리 대신 불경이나 작은 금동불 등 법물을 봉안하기도 한다.재료에 따라 목탑,석탑,전탑 등으로 구분되는데,특성상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탑이 지금까지 많이 전해오고 있으며,사찰에서는 불상과 함께 중요한 예배대상이다.
신라의 석탑은 분황사 모전석탑(634년)을 비롯,통일 이후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682년),고선사지 삼층석탑(7세기 후반) 등이 조성 되었다.8세기에는 구황동 삼층석탑(8세기 전반)을 비롯한 전대의 양식들이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을 통해 하나의 전형양식(典型樣式)으로 완성되고,또한 동시에 다보탑이라는 이형탑(異形塔)을 만들어 탑 조영(造營)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그리고 불국사 삼층석탑 이후 다양하게 변화된 모습의 탑은 8세기와 9세기 각 지방으로 전파되었다.
남산에 자리잡은 탑들도 대개 이러한 모습으로 남아있는데,현재까지 확인된 96기(흙탑 1기,마애탑 3기 포함)의 탑은 당시 신라인들이 남산을 중요한 불국토로 생각하였음을 잘 보여준다.평지와 봉우리 곳곳에 쌍탑(雙塔)과 단탑(單塔)을 세워 산 전체를 예배와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들의 이상향(理想鄕)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지금은 15기만이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계곡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남산의 탑부재들은 8세기의 전형적양식을 시작으로 9세기의 변화된 양식,그리고 고려시대의 그것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층기단과 2개의 탱주(가운데 기둥)가 있는 상.하층기단면석,5단의 옥개받침(낙수면 층급받침) 등으로 특징짓는 8세기 전형양식의 석탑은 12기이며,대부분 남산으로 오르는 계곡의 초입부 평지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현재 불국사역 광장으로 옮겨져 이전.복원되어 있는 傳염불사지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傳창림사지 삼층석탑과 傳담암사지 상층기단면석의 팔부중에서 보여지는 힘있고 양감있는 조각수법은 8세기의 양식으로 보여진다.
전형양식에서 다양한 변화가 시도되는 9세기의 탑은 현재 70여기가 있다.천룡사지 삼층석탑에서 보이는 단층기단과 용장사지 삼층석탑에서 보이는 자연암반의 기단화는 이 시기 탑 기단부에서 새로운 양식이 시도되었음을 보여준다.승소곡 제1사지 삼층석탑(국립경주박물관 앞 동산으로 옮겨져 있음)
동남산에 자리잡고 있는 傳양피사지 동탑과 서남산의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은 모전석탑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나가고 있으며,전양피사지 서탑은 상층기단면석의 팔부중 배치가 원형으로 추정되어 이 분야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그 밖에 포석계 윤을곡 제2사지와 용장계 열반곡 제2사지의 탑재는 5층탑의 부재로 주목된다.
포석계 포석곡 제1사지 옥개석의 우동(隅棟=모퉁이마루),제6사지 5층석탑,망월사 삼층석탑에서 보이는 옥개받침의 연화문양은 9세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탑이 조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특히 국사곡에서 수습된 탑신석은 고려시대에도 불탑의 건립이 계속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밖에도 남산 주변의 마을과 민가에는 아직 조사되지 않은 탑재들이 적지않다.이들은 후일 때가 되면 만날 수 있게 되리라고 본다.
8.남산의 왕릉
경주지역에 전해오는 신라 왕릉 가운데 남산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전칭(傳稱) 왕릉은 모두 12기이며,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비릉까지 포함하면 13기에 이른다.서남산 일원에 소재하는 왕릉은 모두 박씨 왕릉으로 10기가 전해지는데,신라건국의 시조인 박혁거세왕(B.C.57~A.D.4)과 그의 부인인 알영비.제2대 남해차차웅(A.D.4~24),제3대 유리니사금(A.D.24~57),제5대 파사니사금(A.D.80~112)의 릉으로 알려진 오릉이 문천가에 자리잡고 있다.그리고 박혁거세의 탄강지인 나정에서 남산쪽으로 남간마을을 지나 남산신성 아래에는 제7대 일성왕릉(A.D.134~154)이 위치하고 있다.또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13년간 거주하였던 곳이라는 傳창림사지를 지나 서남쪽 약 1.5 키로미터 떨어진 포석정 입구 남쪽에는 제6대 지마왕릉(A.D.112~134)이,그곳에서 약 500미터 정도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삼릉이 나타난다.삼릉은 제8대 아달라왕(A.D.154~184),제53대 신덕왕(A.D.912~917),제54대 경명왕(A.D.917~924)의 릉으로 전해지고 있으며,남쪽으로 작은 계곡을 건너면 제55대 경애왕(A.D.924~927)릉이 소나무 숲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동남산 기슭에는 제49대 헌강왕(A.D.875~886)릉과 제50대 정강왕(A.D.886~887)릉 2기가 있다.
지금까지 남산의 유적중 고고학 분야인 고분과 왕릉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그 주된 이유는 고분군과 왕릉이 몇기되지 않은 외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왕릉의 경우 신라이래 전승과정이 의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남산에 위치한 12기의 왕릉중 오릉을 제외한 실전(失傳) 왕릉 8기는 18세기에 이르러 전칭 왕릉으로 등장하게 되는데,사료의 기록과 고분의 외형적 구조.형식 등을 살펴볼 때 지금까지의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성과에 비추어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릉 즉,박혁거세와 알영비를 비롯한 초기 4대왕의 릉이 이 시기에 나타나는 목곽묘(木槨墓)가 아닌 4세기대 이후에 조성되는 적석(積石)목곽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지마왕,일성왕,아달라왕의릉 역시 재위기간 및 사망연대와 부합되는 1~2세기대의 목곽묘가 아닌 7세기 이후 통일기 단계에 나타나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라는 점이다.또한 신덕왕과 경명왕은 화장된후 각각 장골(藏骨) 및 산골(散骨)하고 있으나 18세기 초에 이르러 삼릉지역의 왕릉으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오고 있기도 하다.
9. 남산 안내자
첫번째로 경주남산연구소 소장인 김구석은 경주중 30회,경주고 21회의 수봉 동문으로 철밥통이라는 공무원 생활을 과감히 접고 뛰쳐 나와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을 수료한 후, 경주 남산 연구에 신명을 바쳐 일하고 있다.현재 경주시 문화복지회관에서 경주 남산 강좌를 열고 있으며,동국대 사회교육원의 남산답사를 지도하고 있고,서라벌대학 국제관광학부의 문화유산해설전공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두번째로 금년 2월25일에 경주공고에서 정년퇴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신
그는 일찍이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취하여 젊은시절부터 신라문화동인회의 일원으로 경주의 각종 문화행사에 참여하여온 진정한 신라인의 후예이다.현재 신라문화원 시니어클럽에서 문화유산해설사 교육을 맡고 있으며,동국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이시고, 경주 유일의 야간학교인 한림학교 교장으로 복무중이시다.
세번째로 신라관광 사장이며,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인 김상유는 해박한 역사,문화,관광 안내가이드이다.경주중 30회,경주고 21회인 그는 일찍이 관광산업의 앞날을 예측하고 경기대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평생을 관광문화사업에 종사한 프로이다.
네번째로 서라벌대학 문화유산해설전공 2년과정을 마치고 출발한 “서라벌역사문화연구원” 부설 “경주가이드센터”이다.이 모임에 참여 하는 이는 모두 국내관광안내사자격증을 가진 프로급 가이드들이다.경주 남산은 물론 경주관광 전반에 관한 안내를 하고 있다.그리고 필자는 이 모임의 회장임을 밝혀 둔다.
경주 남산이나 경주를 여행하실 동문이 계시면 앞에 소개한 사람들을 찿아 안내 받으면 제대로 된 경주관광을 만끽 할 수 있을 것이다.(끝)
참고문헌
1. 경주 남산 문화재의 종합적 검토(2002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 특별전 경 남산(1995년,국립경주박물관)
3. 경주남산 종합정비 기본계획안(2003년,경주시.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4. 경주 남산(2002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5. 겨레의땅,부처님땅 경주 남산(1993년 윤경렬지음.불지사)
6. 향토와문화 41 경주 남산(2006년 대구은행 사외보)
첫댓글 훌륭한 글입니다. 덕수선배님 사진요 사진요?
이선생땜에 천상에 금주내로 일해야겠네.
부처님마을에몇십년만에 들렸읍니다 김 선배님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