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 1
A 문제제기
B. 연구방법 및 범위
Ⅱ. 몽골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 2
Ⅲ. 몽골선교의 역사
A. 서양인에 의한 선교
1. 최초의 기독교 전래(7세기경)
2. 12-13세기 초(징기스칸 시대)의 선교
3. 19-20세기 중반(1815-1916년)의 선교
B. 한국인의 몽골선교
Ⅳ. 몽골선교전략
A. 문화인류학적 측면서의 선교전략---------------------------------------
1. 한국민족과의 연관성
2. 이스라엘과의 연관성
B. 종교학적인 측면에서의 선교전략 -------------------------------- 16
1. 몽골 라마교의 역사
(1) 라마교의 몽골 전파(원나라 시대)
(2) 원조 멸망 이후의 라마교
(3) 청나라 시대의 라마교
(4) 1921년 혁명에서 1990년 이전까지의 몽골정부와 라마교
(5) 1990년 개혁과 종교당의 창당 그리고 현재
2. 라마교를 향한 선교 대책
(1) 교리적 측면에서의 접근
(2) 실질적인 측면에서의 정직한 평가유도
C.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선교전략
1. 전문인 사역
(1) 학생으로서의 선교
(2) 의료선교
(3) 기타 전문인 사역
2. 성경번역
3. 현지 교회 개척과 제자화 훈련
4. 학교설립 및 사회봉사를 통한 접근
5. 기타 접근 방법
Ⅴ. 결론 (선교사로서의 준비) -------------------------- 26
**** 참고문헌
Ⅰ. 서론
A. 문제제기
과거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은 서구교회의 해외선교정책에 의존하여 세워졌다. 즉 서구인들이 가는 곳에 우리도 따라가는 형태였다. 하지만 이제 2000년대를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선교에 있어서 서구의 존 적이 아니라, 세계의 미전도 선교 대상 지역을 놓고 서로가 각각 '지체'로서 역할 분담을 해야할 시기가 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와 역사적인 배경과 문화적인 요소 그리고 언어적인 친근성이 있는 아시아 민족들 특히 그중 에서도 중앙 아시아와 알타이 언어군의 사람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명은 더욱 크다. 이중에서도 몽골지역은 이제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가고 개방되어 가는 상태에 있으며, 이에 따라서 젊은이들은 심적인 불안 상태에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개화기 당시에 한국인의 심적 상황과도 유사한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몽골에 대한 선교의 관심은 아직은 매우 미약하며, 걸음마 단계이다. 현재 전세계 51억 인구, 11,500족속, 250개의 국가 중에서 미복음화 된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13억이다. 이들 13억의 인구는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분류로 볼 때 몽골은 미복음화 지역에 분류되고 복음의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다. 물론 과거 원나라 당시나 그 후에도 미약하나마 선교사들의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1921년 소련의 지원으로 혁명이 난 후에는 자취를 감추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몽골선교를 염두에 두고, 그곳의 상황, 역사,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서 연구하고, 선교전략을 세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B. 연구방법 및 범위
본 연구는 전체를 다섯 개의 단원으로 나누고, 먼저 제1단원에서는 서론으로 문제제기와 연구방법을 소개하고, 제2장에서는 몽골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그들의 인구, 환경 등 전반적인 석들을 소개한다. 제3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몽골선교의 역사에 대해서 개괄한다. 특히 서양인에 의한 선교의 역사와 한국인에 의한 선교의 역사를 구분하여 연구하며, 여기에서 최근의 상황도 언급할 것이다. 제4장은 몽골을 향한 선교 전략으로서 본 연구의 실질적인 접근 가능성 그리고 현실적인 실질적인 면에서의 선교전략을 살 필 것이다.
먼저 문화 인류학적인 면에서는 한국민족과 몽골과의 연관성 그리고 이스라엘과 몽골과의 연관성을 연구하여 전략을 세우고, 다음은 종교적 측면에서 특히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실제 사역의 방법 등을 다룰 것이다. 이러한 순서로 본 연구가 진행되어 가며, 필자는 선교의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상 선교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바, 마지막 제5장에서는 결론을 겸하여서 선교사로서의 준비할 것을 피력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Ⅱ, 몽골에 일반적 이해
우리가 흔히 '몽고'라고 부를 때, 일반 적으로 사회주의 인 몽고인민공화국 만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몽고는 고비사막을 경계로 하여 중국 쪽을 내몽고라고 하고, 소련 쪽을 외몽고라고 한다. 그리고 '몽고 인민공화국'이라 할 때는 북쪽의 외몽고 지역을 가리킨다. 내몽고는 중공의 '내몽고 자치구'로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몽고'라고 통칭하는 것은 사실상 잘못이다. 왜냐 하면 이 말은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중화사상에 명칭을 붙인 서이다.(마치 우리가 조센진 이라는 이름을 대하듯이) '몽골'이라는 명칭이 원래의 이름이며, 그 뜻은 '용감한 징기스칸의 후예이다.
몽골의 수도는 '울란바트르'이며, 1991년 통계에 의하면 면적은 1,565,000㎢ (약 1600만㎢이며, 이는 한반도의 약 7배이다.), 인구는 305만(외몽고 205만, 내몽고 약100만)명, 종족분포는 몽골인이 71% 그리고 러시아인이 13%이며, 소수의 카작인과 중국인이 있다. 그들의 종교상황을 보면 라마불교 32%, 이슬람 2% 기타 무신론자가 있고 샤머니즘이 그들의 심성에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다.
몽골의 지형은 북부와 서부의 세 개의 큰 산맥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 산악 사이의 분지, 사막지대 및 초원 지대로 나누어져 있다. 국토 전체가 아주 높은 지대로 해발 약 1600미터의 고원국가이다. 따라서 높은 고온을 이용한 고온성 초원지대가 서부에 있고 국토 중앙부에서 동부에 걸쳐서도 목축에 적합한 대초원 지대가 펼쳐 있어서 목축에 매우 적합하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여름의 더위는 덥고, 겨울은 기간이 7-8개월 지속되는데, 온도가 영하 40도 까지 내려가는 것은 보통이고 최저 영하55도 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현재 몽골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나라가운데로서, 1960년대 이래 인구가 두 배 이상 증가해 현재 (1992년) 인구 중 약 50%가 20세 이하의 젊은 층으로 구성 되어있다. 몽골은 인구 밀도가 낮아서 인구 장려 책을 쓰고 있는데, 낙태를 금지하고 자녀가 많을수록 국가의 혜택을 많이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소아과 의사의 절대 부족으로 정확한 사망률을 측정 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유아 사망률을 가지고 있다.
몽골의 주식은 가축에서 나오는 유제품이며, 겨울에는 양고기를 먹는다, 주택은 전통적인 몽골 거주지인 '겔(GEL) 인데, 이것은 텐트 같은 것으로서 이동이 가능하고 그 집의 내부에는 말똥이나 소똥 같은 것을 바른다. 이러한 가옥은 그들의 유목생활의 전통에 기인한다. 또한 젖 술로서 성인병 치료에도 쓴다고 하며, 여름에는 먹기도 한다.
그들은 옛부터 말을 타는 민족이므로 대단히 많은 말들을 사육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특히 길거리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과 말이 다니는 길이 따로 구분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들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호전적이며, 거짓말이나 배신 등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Ⅲ. 몽골선교의 역사
A. 서양인에 의한 선교
1. 최초의 기독교 절래(7 세기경으로 추정)
흔히 네스투리우스파로 불려지는 동방교회의 열성적인 선교사들이 중국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던 7세기에 과연 외몽고 지역까지 그들이 도착했겠는가? 라는 문제는 확언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오래된 기록에 보면 7세기에 몽골에는 수 백 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동방교회 선교사들이 직접 몽골을 방문했거나 아니면 그들이 개종시킨 중국인들이 당나라 시대( 618 - 906 )에 이곳을 방문했으리라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사실에, 기독교는 경멸스러운 몽고인 들의 신앙으로 간주되었고 또한 이 때문에 탄압 받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2. 12-13 세기초 (징기스칸 시대)의 선교
보다 신빙성 있는 기록에 의하면 12세기에 동방교회 네스투리우스파 선교사들이 몽골의 북부인 고비 사막 북쪽에서 성공적으로 그 속의 '케라이트' 부족을 복음화 시켰고, 그 결과 그 부족의 통치자와 백성들의 일부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13세기초에 징기스칸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우선 케라이트족과 동맹을 맺고 그 다음에 다시 그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수도인 '카라코움'을 자신의 수도로 삼았는데, 이 당시 그 도시에는 소규모의 기독교인이 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징기스칸이 근동과 중동의 회교도 국가들을 정복해 갈 때 서구의 로마 카톨릭과 기독교 국가들은 한편으로는 또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십자군 원정으로도 회복하지 못한 성지 팔레스틴을 몽고군이 쉽게 정복하고 기독교인의 순례를 자유롭게 해주었고, 또한 징기스칸이 비록 원시적인 샤머니즘의 소유자였지만, 종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종교가 다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특히 징키스칸의 며느리 중의 하나가 개종했으며, 나중에 그는 후에 원 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의 할머니가 되었고, 이러한 까닭으로 쿠빌라이 칸은 자신이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 이였고, 이뿐 아니라 당시 서구교회에 대규모의 기독교선교사를 요청했으나, 당시 교회는 내부적인 사정으로 이에 응답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나라의 멸망 후에 기독교도 같이 종말을 고하고 이 때부터 최소한 500년 이상의 기간동안 복음을 접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 대신에 티벳의 라마교와 이슬람교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3. 19-20세기 중반(1815-1968년)의 선교
1815년 영국의 쉬미트 (I.J.Schmidt) 교수는 '깔묵어 (북족 변경의 시베리아 몽고 지역에 몽골인들에 의해 사용된 언어)'로 "마태복음"을 번역했고, 1817년에 스웨덴 출신 '코르넬리우스 라함'과 영국인 '스툴리브레스' 부부에 의해서 성경 전권을 번역했고 (현재도 존재하는지는 미확인), 1870년 났을 때 다수의 서양 선교사가 순교 당했다. 그후 1919년 우르가에서 다시 선교가 시작 되었고, 1921년 에는 더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했지만 러시아 관리의 주목과 억압으로 1924년 5월 몽고를 떠났다.
제2차 대전을 전후하여 가장 의미 있는 계획 중의 하나는 스웨덴 몽고 선교회와 홍콩에 사는 몽고 본토인 2명이 함께 몽고어 신약성서 전권을 개역 한 것이다. 1949년 이것이 완성되자 이 신약성서는 최소한 10년 동안 중국 북부에서 접촉하는 기독교인을 통해 우송되었고, 그후 1968년 1월에는 몽고어 라디오 방송 메시지가 한국의 극동방송을 통해 발사 되었다.
B. 한국인의 몽골선교
한국인의 몽고선교는 주로 만주선교의 연장으로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몽고 선교는 1925년 감리교 '최성모' 목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24년 만주 봉천에 부임하여 내몽고 (고비사막 이남) 지역에 선교를 전개하여 이듬해에 백음태래 (백음태래) 에 화흥교회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래 헌신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몽고 선교의 두 번째 시도는 대한기독교회(후의 동아기독교)의 '이현태' 교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930년 겨에 주거지를 '왕야묘 (왕야묘)'로 잡고 선교를 시작했고 후에 만주리 (만주리)에도 교회를 설립했으며, 1936년 조남(조남)현 와방 (와방)으로 옮겨 선교하면서 신자400여명과 성경학교까지 설립하였다. 그후 그는 1939년 10월 5일 몽고인 들에게 구타당하여 무참히 순교하고 말았다. 한편 1935년 장로회는 '조보근'을 내몽고에 파송하여, 1938년에는 통요현 신흥농장에 교회를 개척했다. 하지만 1941년 이 교회들은 '만주기독교도연맹'에 흡수 됨으로서 독창적인 몽고선교는 끝나고, 1990년을 전후하여 몽골의 개방과 함께 새롭게 선교의 관심사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1992년 한국해외선교회 성경번역선교회 (GBT)에서는 두 가정을 파송 했고, 모퉁이 돌 선교회에서 의료선교를 그리고 한국 개척선교단 (KTM)에서 김기선 선교사를 그리고 예장 총회에서는 91년 10월 25일 ' 김도영 ' 선교사를 파송 했다.
Ⅳ. 몽고 ( MONGOL ) 선교 전략
몽골선교 전략에 있어서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그것은 먼저 문화 인류학적 측면에서의 접근이며, 둘째는 종교적인 심성 측면에서의 접근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접근 방법들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다.
A. 문화 인류학적 측면에서의 선교 전략
1. 한국 민족과의 연관성
역사적인 배경을 감안하여 아시아의 대륙을 문화권 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중국 문화권, 인도 문화권, 알타이 문화권으로 나눌 수 있다. 알타이 문화권은 지역적으로 넓은 의미의 중앙 아시아와 그 주변을 포괄하는 지역으로서 튀르크족과 몽골족이 거주하는 소아시아, 중앙 아시아, 동부 시베리아 그리고 만주 지방과 한반도를 말한다. 따라서 크게 한국과 몽골지역은 알타이 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알타이 문화권이라고 할 때 그것은 알타이 언어권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즉 문화권이라는 말과 같은 언어권이라는 말이 거의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 최근 종족 구분의 흐름이며, 이러한 구분은 단지 몽고 지역에만 사는 사람들을 지칭해서 몽고인 이라 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언의 차이는 있을 망정 기본적으로는 몽고어를 사용하고, 또 풍속 습관 등을 같이 하는 종족군을 몽고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류학적인 몽골로이드는 우랄 알타이 어족은 물론 티벳, 윤남 어족, 알타이 어족들이 넓게 포괄 된다.
실질적으로 현재의 몽골 지역에 지역 구분적인 (언어 구분이 아니라) 국가가 들어선 것은 13세기에 들어 와서였다. 바로 이 시기가 '징기스칸'이 전 몽골 지역을 석권하였던 때이다. 그러므로 13세기라는 시기는 몽고의 역사에 있어 일대 전환 적인 시기인 것이다.
사실상 13세기 이전에 몽고고온 지대에는 거란족이나 타타르족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진짜 이 지역의 주인공들은 13세기초에 비로써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3세기 이전에 이들은 어디에서 존재했고 또 어떤 종교와 어떤 생활방식, 또는 그들의 기원 등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 13세기 이전의 연구는 바로 고대 한국의 역사와도 연관되고, 또 선교의 접촉점을 찾는데도 근본적인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전의 기원에서 공감대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징기스칸 이후에는 이미 양 국가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이들이 적대적인 오량캐로 인식되므로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 이들과의 접촉점 내지는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는 분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고찰함 바와 같이 같은 종류의 알타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이 지역과 한국은 언어의 구조나 문법 체계에 있어서 매우 유사한 점들이 많아서 한국인은 쉽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 김기선 선교사는 말하기를 '그들의 언어는 한국과 99% 정도가 어순과 문법이 동일하다.' 라고 하였고 현지에서 약 6개월 정도면 통역과 간단한 설교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1001년 몽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몽골 대통령의 공식 통역사로 한국에 왔었는데, 이때 그는 몽골에서 1년 6개월 정도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한편 언어학 박사이며, 터어키에서 선교를 하는 최바울 선교사는 이 두 언어의 연관성에 대해서 동일하다는 몇 가지의 증거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예컨데 고구려의 왕 및 왕비족 등의 원로 지도자에게 주어졌던 칭호인 '고추가'는 Koch와 Ka의 두 단어로 형성 된 것으로서, Koch는 본래 '길게 수염을 늘여 드린 염소'라는 뜻으로 고대 튀르크 시대에 '왕자, 귀공자'를 상징하는 지도자의 칭호로 쓰였다. 또한 고대 그들의 왕의 칭호인 '칸 (Kagan)'은 신라시대 지도자의 칭호 중의 하나인 '각간(KaKKan, Kagn)' 과도 동일하다. 이러한 것은 백제에서도 나타난다. 백제의 실질적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고이왕'에 나타나는 '고이'는 전혀 한국말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단어는 한자로 표기 되었는데, 이 한자의 고대 발음은 ,Kony로 추정 된다. 이것은 고대 튀르크어 '염소'란 뜻을 가지 ' Kony ' 와 동일한 것이다. 고대 몽골 - 튀르크인들은 길게 수염을 늘여 드린 양 혹은 염소를 국가 지도자의 상징으로 생각해서, 국가의 관직명으로 사용하곤 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고대 국가인 '부여' 이름 역시 알타이 언어이다. '부여'는 봉골, 만주 -퉁구스인들에게는 bugu로서 이는 '사슴'을 가르킨다. 이것은 그들이 부족의 상징으로 사슴을 숭배했다는 것과 일치하며, 본 발제자는 이에 대한 문제를 바로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아무튼 한국인과 몽골인 사이에 같은 언어요,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는 것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둘째는 몽골의 고대설화에 나타나는 토템사상과 이것이 그들의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가는 양상으로 발전되어 가는데, 이는 고대 한국의 '곰' 토템사상과 '단군' 그리고 이것이 샤머니즘의 '하늘' 숭배와 혼합되어 가는 양상과 유사하다. 이것은 곧 한국의 샤머니즘과 고대 토템사상과의 연관성을 추적함으로서 그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종교관 내지는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의 부분을 집중 공략할 수 있다는 말로도 설명된다. 이러한 추적은 그들과 한국인이 같은 문화권이라는 데에서 용이하다.
그런데 이 부문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 혼합된 형태의 샤머니즘의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샤머니즘이 한국이나 동북아시아의 사람들의 근처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샤머니즘은 한반도에서 스스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 몽골, 만주, 우랄 알타이 문화권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원시종교이며 그것은 북방 시베리아, 몽골 등에서 유입 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한국의 샤머니즘은 단군 신화에서도 그 전형적인 예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예컨대 환인 (환인)이라는 천제(천제)가 그 아들 환웅(환웅)에게 세상을 다스리게 하고, 그가 태백산 신단수(신단수)밑에서 신시(신시)를 이루고 다스리다가, 웅녀(웅녀:곰)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군에 대한 일반적인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그가 '무당' 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하는'을 숭배하는 사상이 나타난다. 즉 하늘을 최고의 신(신)으로 복고 그 밑에 범신들이 있고 그리고 하늘과 땅의 중재다가 무당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늘 숭배와 무당은 한국 샤머니즘의 원류인 시베리아, 몽골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지금까지 사용되는 무당의 칭호는 '단군'의 사음(사음)이다. 이것은 '몽고어'의 텐그리( Tengri)와 같은 단어로서 그 뜻은 하늘이다. 이에 대해서 최바울 박사는 중앙아시아의 샤머니즘의 공통되는 신관은 '하늘님(천: Tengri:텐그리)'라고 말했다.
이러한 하늘 숭배 외에도 철저하게 한국, 몽골, 동북아에 있어서의 샤머니즘은 고등 종교와의 만남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들 종교 속에 침투해서 혼합적인 양상으로 지금까지 살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한국에서는 이미 상식적인 사실이며, 몽골에서도 이러한 혼합이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이는 몽골을 대표하는 종교를 '라마교(라마불교)'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라마불교도 그들의 예식이나 승려들의 의식을 보면 샤머니즘과 철저하게 혼합되어 있음을 본다. 예컨대 이 지역에서 무당이 사망했을 경우 라마승은 죽은 무당이 쉴 수 있는 매장지를 지정하게 되고, 장소가 지정되면 여름에는 땅에 막대기를 대고, 겨울에는 눈 속에 장대를 세운다. 그리고 12-14미터의 밧줄을 구한다. 라마승은 첫 번째 막대기에 밧줄의 한쪽 끝을 맨다. 두 번째는 태양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밧줄의 다른 쪽을 잡고 원을 그린다. 대체로 이러한 순서로 매장지를 정해주면, 무당의 가족들은 그 대가로 라마승에게 안장 얹은 말, 2장의 검은 양가죽, 10-20마리의 소, 그리고 최고급 옷가지를 준다.
한국은 하늘 숭배와 토템이즘 그리고 건국신화 그 이후의 혼합 형태의 샤머니즘이 되어갔다면, 몽골에서는 하늘 숭배(Tengri:천)와 사슴, 늑대 숭배의 토템이즘, 그리고 라마교와의 혼합주의 형태로 전달되어 간다.
여기서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한국의 건국 신화에는 곰이 등장하지만, 몽골 건국 신화에는 사슴과 늑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고대 역사와 연관되는데. 몽고인들이 실질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13세기초 징기스칸의 출현부터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들은 몽골 삼림부족으로서 바이칼호 주변, 예니세이 하(하)상류, 이르티아 하(하)연안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삼림부족으로서 어업보다는 (호수, 강가에 살았음을 기억하라), 야생동물들을 사냥하면서 살았다. 10세기 이후 이 '숲 속의 백성'은 실가강, 오논강을 따라서 초원재대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때에 이들은 초원지대에 사는 유목민과 산에서 올라온 삼림부족이 만나게 된다. 또한 산에서 온 부족은 사슴 또는 산록에 대한 이야기 (감생설화:감생설화)가 있었고 초원의 유목민은 늑대이야기 건국 신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몽고 내부에서 여러 개의 씨족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늑대와 사슴의 조상을 가졌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몽골의 설화 그리고 샤머니즘의 무당들을 고찰한 바, 우리가 그들에게 강조할 것은 다음과 갔다. 첫째 그들은 기본적으로 가장 깊은 내면에 '하늘님(Tengri)'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들에게 인격적인 하나님 사상을 강조할 필요가 있고, 특히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해야 한다. 둘째로 그들과 한국인은 비슷한 건국 신화의 구조를 갖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샤머니즘의 무당이 하늘과 땅의 준재자가 아니라, 하늘의 최고신은 유일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 단 유의 할 것은 이 경우 예수를 유일하신 구원자로서가 아니라 최고의 신령한 무당이나 샤먼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하나님으로서의 성육신 사건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2. 이스라엘과의 연관성
문화 인류학적으로 몽골족과 이스라엘과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 일단, 외형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비록 지역적인 거리의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두 민족사이에 공유 점을 볼 때 '같은 생활양식'이용 '같은 유목민'이라는 것 외에는 또 다른 일치점은 많지 않다. 즉 그 둘은 서로 접촉한 적도, 대화한 적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유목민으로서의 공통점을 부각시킨다면 몽골인 들에게 구약의 이야기들이나 목동들의 이야기 또는 예수의 비유 등은 쉽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목생활과 더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은 고대 몽고인의 집단을 형성하는 형태이다. 소련의 몽골학 전문가인 '베.야.블라디미르초프'에 의하면 11-13세기의 몽골유목 민족은 경제생활의 기초를 목축업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해마다 목초지를 따라서 이목을 하면서 양떼를 사육했다. 이 당시의 기록인 "원조비사 ( 원조비사 )"에는 이들이 이동하며 천막을 짓고 야영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징기스칸에 대해서도 '양탄자로 만든 천막에 사는 수령'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이들이 집단을 지어서 이동할 때는 보통 그 대열을 '환영 (환영) '의 형태였다. 물론 이것은 목초지에서 주둔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환영을 몽골어로는 '구리엔(구리엔:Kuriyen-guriyen)'이라고 하는데, 이는 '둥근 고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동하다가 어느 지역에 머무르려고 할 때는 이내 둥근 고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진영을 배열하고, 그 중앙에는 그들의 원로 (또는 장로)가 머무르게 된다. 바로 이것을 '구리엔'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배열은 전쟁이 났을 때 적군이 중앙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데 응용되기도 했으며, 실제로 1911-1912년 몽골 제1차 혁명 때에 몽골 군대는 이와 동일한 진형으로서 전투에 임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대 몽골의 '구리엔'이 형태는 같은 유목민인 고대 이스라엘의 이동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요셉이 형들을 찾아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을 때 형들이 여기 저기로 이동하면서 목축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고대 이스라엘의 지파 동맹체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물로 마틴노트( MatinNoth)라는 구약학자는 이를 고대 근동의 이방인 신들과 별 차이 없는 형태로 보고 특별히 이스라엘의 지파 공동체를 '앰픽티오니(Ampictiony)'라고 했다. 라지만 최 종진 교수는 마틴노트의 가설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고대 지파 공동체는 고정식이 아니라 움직이는 성소였고(광야에서), 또한 그 중심도 이방인과는 달리 야훼 하나님 이였다고 말함으로서, 근동의 다른 민족들과는 그 형태는 유사하지만 내용 면에서 다르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도식화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래의 도표처럼 이스라엘의 목축형태나 지파 동맹체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고, 근동 다른 민족들의 중심에는 이방의 만신전이 있고, 몽골의 야영에서는 중심에 그곳의 내용 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그 형태 또는 진을 치고 있는 진영의 형식은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목민이라는 공유 점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과 몽골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접근 통로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첫째 그들은 같은 유목생활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서로 들어가는데 용이한 면을 가지고 있다. 둘째로는 고대 그들의 구리엔과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형태를 말하면서 특히 그들에게 구리엔의 중심인 장로 (징기스칸 같은)들이 유한한 인간이며, 그들도 인간으로서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고,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유일신이며,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이에 따라서 몽골인은 집단의 장로를 중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장로를 창조한 하나님을 모실 것을 말하고 여기에서 발전해서 인간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특히 죽음을 이긴 '부활'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는 모든 운명의 사슬을 십자가의 보혈로써 파괴했음을 선언해야 할 것이다.
B. 종교학적인 측면에서의 접근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몽골의 대표적인 종교는 샤마니즘과 라마불교이다.
물론 극소수의 이슬람인들과 카톨릭이 있으나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또한 본 장에서는 라마교에 대한 전략 만을 다루겠다. 샤마니즘은 이미 전장에서 고찰했기 때문이다.
1. 몽골 라마교의 역사
(1) 라마교의 몽골 전파 ( 원 나라 시대 )
불교의 한 지류인 티벳불교인 라마교는 1207년 당시에 티벳과 그 주변 그리고 중국 내륙의 탕굴(西하)을 징기스칸이 정복할 때, 티벳과의 접촉으로 몽골인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 그 후 1247년 징기스칸의 손자 고단이 라마교를 공인 함으로서 라마교는 토속 신앙인 샤마니즘, 토테미즘(늑대와 사슴 숭배) 등과 함께 혼합된 형태로서 몽골의 종교로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52)
원조( 元 朝 )에서는 라마교의 정교합일주의에 입각하여, 라마승들은 정책결정의 조언자로서 그 위치를 굳혔는데, 대표적으로 '후밀라이칸'과 '파스파'라는 라마승은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파스파라마승은 정치관여는 물론 이거니와 문자가 없던 몽골에 '파스파 문자'라는 것을 창제하여 몽골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지만, 이 글자는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53)
이 당시에는 라마교가 전체 백성보다는 주로 고위계층 사이에서 기초를 다져갔다.
(2) 원조 ( 元 朝 ) 멸망 이후의 라마교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 북원( 北 元 )시대에서는 주로 서몽골 지역에서 계속 번성해 가다가 '알탄칸'시대에는 '쏘드남 라마'가 정치에도 많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1409년에 '총가바 라마'가 겔룩파 승려 학교를 설립하고, 1578년 티벳 불교의 제 3대 달라이 라마인 '소난 걈초'가 입국하여 성대한 법회를 가졌는데, 이때부터 급격하게 라마교는 확산되기 시작했고,
52)이 자료는 1992년 9월 4-5일 온누리 교회에서 열린 한국개척선교단 주최'중앙 아시아 선교세미나 자료집'의 PP. 27 - 29를 기초로 한 것이다.
53) Ibid.
잇달아서 칸 ( )이 거주하는 귀화성 ( 歸化城 )에 홍자사 (弘慈寺)가 세워져서 몽골 뿐 아니라 인근의 오이라이트족등 에게도 퍼져 나갔다. 54) 이 시기에 몽골에왔던 티벳의 달라이 라마가 2년 후에 죽자 라마교의 윤회설에 입각하여,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서 환생 한다는 교리 아래 몽골의 라마교는 티벳에 이어서 활불 ( 活 佛 )을 갖게 되어서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전해진다. 55) 특히 몽골의 마지막 대칸 ( 大 )인 '락디 칸'은 라마교 사원을 곳곳에 세워 라마교를 통한 몽골인의 단합을 시도했지만, 동몽골 부족들의 반란등으로 실패했다. 56)
(3) 청 ( 靑 ) 나라 시대의 라마교
몽골을 가장 잘 통치한 것으로 알려진 청조에 이르러서 '강희', '건륭제'등은 몽골인들에 대한 '분활과 통치'정책으로 몽골은 내, 외몽골로 그리고 다시 旗 와 등으로 나뉘어져서 그 힘을 잃었다. 다른 한편 청조는 몽골인이 호전성을 없애고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몽골지역에 라마교를 더욱 장려하고 지원하였다. 이 시기에 모든 라마교 서적들이 번역 되었고 일반 가정에서도 아들 중의 하나는 라마 사원에 보내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57)
라마교가 청조에 의해서 또 한번 부흥하면서 민간인들 사이에서 특히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 그 이유는 징기스칸도 부처 중의 하나로 (즉 神으로) 숭배하게 했기 때문 이였다. 하지만 청조 말기에는 승려들의 증가로 인해서 몽골경제 약화의 문제를 야기 시켰다. 58)
(4) 1921년 혁명에서 1990년 이전 까지의 몽골정부와 라마교의 관계
1921년 소련의 지원 아래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세운 '몽골 공화국(1924년 부터는 몽골인민공화국으로 개칭)'은 대내외적으로 몽골의 지도자로 숭배 받던 '접준담바 후툭투'를 실권 없는 국가 원수로 내세우고, 혁명에 참여 했던 라마승려들과 귀족들이 한 세력을 형성하고, 소련의 영향을 받던 친소파가
54)세기출판사 편집부, 세계의 역사 제3권(서울:세기출판가,1978), P.535
55)중앙아시아 세미나 자료집, OP. cit, P. 27
56) Ibid
57)세기출판사 편집부, OP. cit P. 535
58)중앙 아시아 세미나 자료집, OP. P.27
또 한 세력을 형성하여 두 세력 간이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59)
그러나 1924년 '접준담바'활불의 죽음을 틈타서 친소파는 더 이상의 활불의 환생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 명칭도 몽골공화국에서 몽골인민공화국으로,그리고 몽골인민당도 몽골인민 혁명당으로 바꾸어서 공산주의 국가로서의
걸음을 내딛였다. 이때부처 건국초기에 몽골의 정치에 상당히 영향을 주던
라마세력들은 점점 숙청되기 시작 했고, 1930년에 들어서면서 소련의 스탈린식 독재의 영향아래, 당시에 친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몽골의 스탈린식 독재자인 '초이발산'은 문화혁명을 일으킴으로서 라마교의 탄압을 감행하였다. 60)
전국적으로 700여개가 넘던 라마사원은 수도 울란바트의 '간단사' 한 개만을 남겨놓고 대부분 파괴 되었고, 수 만의 라마승이 처형되었으며, 라마사원의 토지들은 압수 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라마교 서적들을 불태웠다. 61)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일부의 국민들은 찬사를 보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라마교의 탄압에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였다. 더우기 부처의 하나로 추앙 받던 징기스칸을 격하 시킨 것은 더욱 민중을 반발하게 하였다. 1962년 징기스칸 탄생 800주년기념 행사는 모두 취소되었고, 징기스칸의 초상이 그려진 우표는 모두 압수 되었다. 62)
이제 라마교는 더 이상 몽골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올란바트로의 간단사와 부설 승려학교 만이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며 정치적으로 이용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몽골의 라마교단은 사회주의 가치아래, 아시아 불교의 단합이라는 명목으로 북한불교와 중국의 티벳라마교 그외 동남아의 불교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매년 아시아 불교연합회를 개최하면서 불교 사회주의에 대한 공헌등을 강조했다. 63)
(5) 1990년 개혁과 종교당의 창당 그리고 현재
59) Ibid ,P . 28.
60) Ibid
61) 한국종교연구회, 세계종교사입문 (서울:청년사, 1992), P.240
62) 중앙아시아 세미나 자료집, op. cit
63) Ibid
1990년초 몽골의 정치 개혁은 그 동안 거의 활동을 못했던 라마교 신자들과 울란 바트로 승려학교의 젊은 승려들, 그리고 그동안 정치적으로만 이용 되었던 라마교의 최고승 '함바 라마'등에게는 라마교의 재부흥의 게기가 되었다. 이때의 개혁 내용의 특징은 정치적으로 다당제를 수용하고 경제를 개방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몽골인민혁명당의 서기장이자 개혁을 주도했던 '곰보자민 오치르바트'는 종교의 자유도 보장되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개혁은 동구권과 소련의 변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후 1990년 3월 '신도연합단체'가 결성되고 3개월 후에는 이 단체의 후원으로 '종교민주당'이 창당되어 개혁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당의 가입자는 놀라울 정도로 급속히 불어 났으며, 먼 지방에서 가지 몇일씩 걸려서 말을 타고와서 꼬깃꼬깃 접어온 기부금을 내는 촌로들이 연일 줄지어 있는 일도 있었다. 64)
과연 이 종교 민주당이 어느 정도나 몽골에서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 이에 대해서 라마승들은 그들의 정치참여가 과거와 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 질 것을 희망하고 있다. 아직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숫자적으로 우세한 종교민주당이 라마승과 당 간부들의 연합을 통해 현대 몽골 정치에 적극 관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65) 또한 이들은 '간단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함으로서 라마교의 부흥을 시도하고 있으므로, 이 종교민주당의 역량에 따라서 몽골은 정치적 변수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
2. 라마교를 향한 선교 대책
몽골의 라마교 신자를 염두에 두고 선교를 펼칠때에 두 가지 면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이고, 또 하나는 실질적으로 역사 속에서의 라마교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내리게 하는 것이다.
(1) 교리적 측면에서의 접근
라마교는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1207년에 몽골에 수입 되었다. 그리고 라마교단의 3대 달라이 라마인 '소난 걈초'가 몽골에서 포교하던 중 죽음으
64) Ibid
65) Ibid . P . 29
로서 몽골에서도 그 정통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라마교의 정통성을 이어 받을 수 있는 것은 라마불교의 가장 특이한 교리인 '활불사상(活拂思想)' 때문이다. 66) 다시 말하면 라마교가 원조(元朝)에 수입 된 후에 국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흥왕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도가 지나쳐서 라마교를 더욱 타락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4세기 후반 '총카파(Tsom - kha - pa)' 라는 위대한 티벳의 승려가 나타나서 불교를 개혁하려고 시도했다. 그때 그들은 개혁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머리에 황색 모자를 쓰고 다니므로해서 '황모파(黃帽派)'라고도 불렸고, 그 우두머리를 '달라이 라마' 라고 불렀다. '달라이'는 대해(大海)라는 뜻이고, '라마'는 훌륭한 사람을 뜻한다. 67) 이들은 승려의 독신생활을 주장하였고, 엄격한 수도생활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총카파'가 그 법통을 전달해 줄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조카인 '게둔두트(Dge - hdun grub)'에게 종파의 지도권을 계승하였는데, 이 게둔두트가 제 1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고, 바로 제 1대 교주인 '게둔두트 달라이 라마'가 그 계승자에게 환생 한다는 것이다. 68) 이 때부터 현재 14대 까지 달라이 라마가 계승되고있고, 몽골에 전파한 '소난 걈초'는 3대 달라이 라마요, 그가 몽골에서 죽은 때가 1578년 이다. 69)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계승자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 예를들면 계승자 라마는 이전에 라마가 죽은지 49일만에 태어났으며, 여러 가지 비범한 출생과정이나 증표가 있어야하고 일종의 신탁의식(神託義式)을 치러 결정 되곤 했다. 70)
이러한 라마교에 대해서 교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갈 때, 여기에서는 불교에 대한 여러 교리들은 배제하고, 주로 라마교의 가장 큰 교리적 특징인 달라이 라마의 활불 사상을 고찰한다. 달라이 라마의 활불사상을 볼 때 먼저
몇 가지의 문제점을 제기 할 수 있다. 먼저, 라마교에서 환생의 교리를 믿으며, 특히 제 1대 달라이 라마가 그 계승자에게 계속해서 환생한다고 한다. 71) 그렇다면 현재까지의 모든 달라이 라마는 결국 외형적인 모습만 다르다. 뿐이지 실상 제 1대 달라이 라마인 '게둔두트'인 것이다. 즉 겉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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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한국종교 연구회, oP. cit . P. 218
67) Ibid
68) Ibid
69)중앙 아시아 세미나 자료집, op. cit .P. 27
70)한국종교 연구회, op cit .P. 219
71) Ibid
양은 달라도 그 속의 인격은 동일 인물인 것이데, 그러면 왜 각 달라이 라마들의 성격, 인격, 사고, 행동들이 다르게 나타나는가? 겉 모양만 다를 뿐 동일 인물이라면, 인격이나 성격등 모든 면에서 일관성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둘째로 이 달라이 라마가 환생할 때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서 난다면, 즉 한 몸 속에 달라이 라마와 원래 그 몸의 주인인 인격이 동시에 존재 한다면, 첫번째의 문제는 해결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는데 , 그것은 '원래 그 몸의 주인이 되어야할 사람은 어디로 갔으며, 사후에 그는 무엇으로 환생한다는 말인가? 결국 달라이 라마의 활불사상은 자세히 보면 스스로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다음과 같은 면을 염두에 두고 공략하면 용이하지 않을까 한다. 먼저 이들에게 이러한 논리적인 모순을 설명하고, 이에 대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단 이 때에 그들은 그들의 불교의 '인간 율'에 근거해서 '예수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십자가에서 죽은 불쌍한 사람'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복음 전달자는 예수가 전생의 업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께서 윤회의 사슬에서 고통 당하는 인간을 구원하고 그 것을 절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보내신 것이며, 이 십자가의 보혈을 믿을 때에 라마교 신자도 비로소 모든 환생(윤회)의 고리로부터 해방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윤회하지 않는)생명을 소유함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결정적으로 부활을 설명해야 한다. 즉 예수가 업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요, 윤회의 사슬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왔고, 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부활로 증명됨을 말한다. 이때에 복음 전달자는 환생과 재생 그리고 부활의 차이를 말할 필요가 있다.
달라이 라마는 육신이 쇄하므로 다른 육신으로 환생 하는 유한한 환생이였고, 이러한 유한성은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서 환생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부활체로서 영원히 변치 않음을 알아야한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 예수는 죽은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렸다. 그것도 달라이 라마처럼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원래 그 몸 그대로 살린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모든 죽음과 우주를 지배하시는 영원한 하나님 이신 예수를 믿어야 할 것이다.
(2) 실질적인 측면(윤리적)에의 정직한 평가 유도
대체적으로 불교권의 국가들이 다른 서양의 기독교나 카톨릭 국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경제나 생활의 역동성 같은 면에서 수동적이다. 그것은 북교의 교리가 현재의 어려움을 과거의 업보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 더군다나 라마교는 현세의 행복, 쾌락은 인정 받아야 할 것을 말하고, 72) 그 실천윤리로서 교리적으로 5단계, 팔정도, 육바라밀을 들고 있으나, 실질에 있어서는 성력(性力)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퇴폐적인 일면이 있다. 73) 이것은 지금도 존재하며, 이것 때문에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총카바' 같은 이의 노력이 있음을 본다. 74) 뿐만 아니라 라마승과 정치, 사원의 부의 독점등을 정직히 평가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1990년 이후의 개혁시대 이므로 새롭게 기독교를 권하는 것도 중요 할 것이다.
C.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선교전략
1990년 이후 몽골이 대외적으로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개방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 한다면 약 60%정도의 문이 열린 것이다. 75)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완전히 개방 될 것을 예상하지만 현재에서는 사회주의의 잔재가 존재하고 있는 지역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들에게 접근 가능한 현실적인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천문인 사역 (Tent - Making)
90년을 전후하여 여러 곳의 공산권 국가들이 그러하듯이 몽골에서도 과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찿는 운동이 활발하다. 76) 그것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가 파산 됨에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한다. 사실 이러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찿으려는 의식은 소련 남부의 공화국들이 '이슬람화'를 추구하
72) Ibid ,P.203
73) 기독교 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서울:기독교문사, 1981),
P. 920.
74)한국종교연구회, op. cit .P .218
75)최 바울, "알타이 문화권 선교" - 1992년 선교한국 92대회에서의 선택식 강의 중에서 발췌함 (1992. 8. 12 - 한양대학교)
76) Ibid
는 것이나. 몽골에 라마교 주축의 '종교 민주당'이 탄생되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77)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감안 할 때 전문적인 사역은 몽골 지역에서는 매우 중요한 선교의 접촉점이 된다. 현재 몽골에서의 전문인 사역은 주로 의료사역과 유학생으로서 접근하는 방법이 가장 유리하다. 이외에도 여러 방법이 가능 하다.
(1)학생으로서의 선교
이는 몽고에 있는 대학에 유학하면서 언어를 습득하고, 또 현지의 대학생들을 접촉하면서 제자화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과거에는 사회주의 국가 였으므로 몽골에 유학이 가능한 사람은 사회주의 출신 학생들 뿐 이였지만, 1986년 몽골의 페레스트로이카라고 불리는 '시네치엘'과 일도트(개방) 의 영향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학생들도 유학이 가능 하게 되었다. 78) 이러한 유학선교는 현지의 언어 습득은 물론 이거니와 공부하는 동안 그들의 문화를 익히고, 또한 그곳의 대학생들이 후에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므로 장기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접촉점이라 할 수 있다. 79)
(2) 의 료 선 교
종교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이질감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접근이 가장 용이한 것 중의 하나는 여타 지역에서와 같이 의료선교일 것이다. 현재 몽골에 의료선교를 실시하고 있는 단체는 '모퉁이돌 선교회 (대표:이삭 목사)'이며, 80) '연세 의료원'에서도 93년 7월 개원을 목표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선교 병원을 건립할 것을 추진 중이다. 81) 이 병원 건립은 10만 달러의 예산이 소요될 것이며, 일단 국내에서 파송하는 의사 3명과 현지의사 12명등 총 15명으로 출발하게 된다. 82)
(3)이외에도 사업을 통해서 현지에 진출할 수 있고, 무역, 교수 요원, 그리고
77)최 바울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부흥운동 "빛, 소금 92년 7월(서울:두란노서원, 1992), PP. 205 - 209.
78)중앙아시아 선교 세미나 자료집, op. cit .P.26
79)김 기선, op. cit
80) 1992년 8월 13일 "선교한국 92"에서 모퉁이돌 선교회 홍보관에서 상담.
81)서울신문, 1992연 10월 27일, 19면
82)최 바울, "중앙 아시아의 선교적 접근", op. cit .P.210
관광객이나, 단기 팀 사역을 통해서도 사역이 가능 할 것이다.
2. 성 경 번 역
현재 몽골어로 번역 된 성서는 신약성서 뿐이다. 83) 몽골 지역은 세계의 다른 지역의 문화권과는 달리 한국과 같은 알타이 문화권으로서 거의 동일한 문법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이 지역에서 성서를 번역할 경우에 다른 어떤 서구 선교사 보다 잘 번역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예컨데 파퓨아뉴기니아 처럼 문자가 없는 지역에서 번역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알타이 분법 체계로 번역하므로 좀 더 빠른 시일 내에 번역이 가능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성서가 제대로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3. 현지 교회개척과 제자화 훈련
몽골지역은 완전치는 않지만 현재 교회개척이 가능하다. 현재 울란바트로에 교회가 3개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김 기선 선교사가 91년 1월에 개척했는데 처음 9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3월에는 80명으로, 6월에는 200명으로, 8월에는 350명으로 신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 84) 이들이 이렇게 몰려드는 원인은 두가지 정도의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 첫째는 공산권 붕괴 이후 심리적인 안정을 찿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과거의 라마교 보다는 보다신선한 교회로 몰려와서 심적인 안정을 희구하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배고픔'때문인 것이다. 즉 과거 한국인들이 서양 선교사들을 향해서 구호물품을 기대 했던 것처럼 그들도 모여든다는 것이다. 85)
따라서 몰려드는 이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현지인 지도자 양성과 개인적인 제자화 사역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손으로 교회를 이끌어가게 해야 한다.
83) bid
84) 김 기선, "몽골선교에 대해서", op . cit
85) 최 바울, "중앙 아시아의 역사적 배경과 선교", 중앙아시아 선교세미나 강의 내용 정이 (92년 9월 4일, 온누리교회)
4. 학교설립 및 사회봉사를 통한 접근
과거 몽골은 교육적으로 매우 낙후된 지역 이였는데, 1949년 몽골 문자를 폐지 하고 '시릴어'로 바꾼 후, 문맹률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현재 몽골은 인구구성상 18세 미만의 비율이 48%로서 교육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정부는 최근에 8 - 10년제의 보통학교 의무교육제를 시작하고 있다. 현재 보통교육학교가 891개, 고등전문기술학교가 62개, 대학교가 8개나 있다. 그리고 인구1만명당 2723명이 학생이고, 1만명당 고등학생은 145명 꼴이다. 86)
현재 몽골 정부는 이 교육 부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고 있으므로 한국에서 기독교계학교를 세워 교육을 하면서 성서를 가르친다면 상당한 효과를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고아원, 양로원 같은 사회 봉사를 통한 접촉도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기타 접근 방법
열거한 벙법들 이외에도 방송선교나 현지 젊은이들을 겨냥한 문서선교도 주요한 접촉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86) 중앙 아시아 선교세미나 자료집, op. cit .P.26
V. 결 론 (선교사로서의 준비)
우리는 지금까지 몽골선교에 대해서 그 일반적인 배경과 몽골에 대한 선교의 역사 그리고 선교전략에 대해서 고찰 하여 보았다. 몽골에 대한 선교의 당위성은 더 논할 만한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성서 속에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 28:19)' 예수님의 명령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선교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것은 2000년대를 향한한국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선교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 역시 필수적인 것이다. 본 발제자는 이미 몽골의 선교 전략에서 인류문화적인 측면, 종교적인 측면, 그리고 현실적인 접근 방법들을 부족하나마 고찰하여 왔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에 앞서서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선교사 자신의 준비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크리스찬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하나님이 부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철저히 순종하고 헌신되지 못하는 것과, 이에 대한 준비부족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서는 좋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선교사로서의 준비자세를 피력함으로서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먼저 선교사는 선교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심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어떠한 지시하심에도 순종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선교에 대한 철저한 '소명감'이다. 철저한 헌신의 배후에는 철저한 소명감이 있다. 셋째는 강력한 성령 충만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선교는 영적인 전쟁이므로 선교사는 말씀의 지식과 더불어서 영적인 능력을 절대적으로 받아야 한다. 넷째는 제자화 훈련에 대한 철처한 대비이다. 다섯째로는 현지 언어습득 (특히 영어)과 현지 문화에 대한 공부 그리고 필요한 기술등의 습득이 요구 된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장소에서 풍성한 인격의 연마와 인간관계의 원만성을 닦아야 한다. 이러한 인격이나 인간관계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워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