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25(금) 사도행전
21장
1-16 : 1-6절은 3차 선교를 마치는 일정입니다. 두로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이사랴 도착했을 때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띠로 수족을 묶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17-26 :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형제들이 기꺼이 영접했고, 야고보(주의 동생)를 방문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와 규모를 금지시켰다고 오해하여 큰 소요가 예상되므로 머리를 깎게 했습니다(24). 이는 서원을 의미한 것으로 율법에 충실한 자임을 보여주는 결례입니다(24).
27-40 : 결례의 기간이 찼을 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 무리를 충동하여 성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폭행을 할 때 로마군 천부장이 급히 구출하여 쇠사슬로 결박했습니다. 군대 영문으로 끌려간 바울은 천부장에게 백성에 말하기를 요청해 허락을 받았습니다.
22장
1-21 : 바울의 설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제자였으며,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위임을 받아 다메섹에 가던 중 큰 빛이 둘러 비친 것을 말했습니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눈이 멀었는데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가 "사울아, 다시 보라" 하므로 즉시 보게 됐다고 했습니다. 또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 되리라" 했고, 그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주께서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22-30 :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다시 소동을 일으켰고, 천부장이 채찍질 하며 신문하게 했으나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밝혀 신문이 중단됐습니다.
2019. 1. 26(토) 사도행전
23장
1-11 : 공회에서의 증언입니다. 바울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했고, "죽은 자의 소망과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분쟁이 생겼고, 천부장은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날 밤 주께서 바울에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2-30 : 유대인들 중 40여 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들에게 동조하여 바울을 죽일 계획으로 공회에 나오게 했으나, 바울의 조카가 바울에게 고했습니다. 음모를 전해 들은 천부장은 바울을 편지와 함께 가이사랴 총독 벨릭스에게 보냈습니다.
31-35 : 벨릭스는 바울에게 "너를 송사하는 사람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하고 헤롯궁에 가뒀습니다.
24장
1-9 : 24장은 벨릭스 법정에서 있었던 바울에 대한 고발과 변호 사건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울을 가리켜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므로" 잡았다고 했습니다.
10-23 : 바울의 변론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안 됐고, 누구와 변론하거나 소동케 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벨릭스는 이 도(진리)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처결을 연기한다고 했습니다.
24-27 : 며칠 후 벨릭스가 자기 아내와 함께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습니다. 벨렉스는 돈을 받을까 하여 바울을 자주 불렀는데 그렇게 두 해를 보냈습니다.
2019. 1. 27(주일) 사도행전
25장
1-12 : 베스도는 벨릭스의 후임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을 구금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호송하여 재판하기를 요청했는데 암살하기 위한 요청이었습니다(3). 그러나 베스도는 가이사랴에서 재판했고, 유대인들은 고발하되 증거를 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베스도는 바울의 무죄를 알고도(25) 역시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으라 했습니다(9). 더 이상 정의가 없는 것을 안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를 했습니다(11). 로마시민의 권한으로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 선교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13-21 :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의 부임을 축하하러 왔는데, 베스도가 바울에 대해 대제사장의 말과 달리 악행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22-27 :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 대해 듣고자 하여 개정한 법정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서 죽일 죄를 범한 것이 없다고 소개했습니다(25).
26장
1-23 : 바울 사도가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한 변증입니다. 자신은 바리새파에서 속했었고(5),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구원)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 고소당했다고 했습니다(5-6). 그리고 자신이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한 것(9-12)과, 다메섹에 가던 중 정오쯤에 해보다 밝은 빛이 비쳐서 땅에 엎드러졌다고 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신 음성을 들었노라 했습니다. 또 주께서 "일어나 네 발로 서라"하셨고,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한다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서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 나를 잡아 죽이고자"한다고 했습니다.
24-32 : 바울의 변증을 들은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다"고 했고,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했는데 이에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고 했습니다. 아그립바는 베스도에게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놓을 수 있을뻔 했다고 했습니다.
2019. 1. 28(월) 사도행전
27장
1-13 : 27장은 바울 사도가 로마로 압송되는 여정입니다. 호송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친절하게 대했습니다(3). 가이사랴를 출발한 배가 루기아의 무라성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배로 바꿔탔습니다. 그후 풍세와 금식으로 항해가 위태로워 바울은 항해를 중단할 것을 제안했으나 백부장은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11).
14-26 : 유라굴라라는 광풍으로 여러 날 먹지 못했고, 선원들은 화물과 배의 기구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했으므로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고 위로했습니다.
27-44 : 열나흘 째 됐을 때 사공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하려 하였으나 바울의 제안으로 백부장이 거룻배를 버리게 함으로 막았고(31-32), 다음 날에는 음식을 먹도록 권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머리카락 하나도 잃은 자가 없도록 지키신다며 격려했습니다. 백부장은 군인들이 죄수들의 도망을 막으려고 죽이려했을 때 바울을 살리기 위해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43). 하나님은 바울을 그렇게 지키셨고, 그 뜻대로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28장
1-10 : 바울 일행이 구조된 후에 머물렀던 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조된 후 모닥불을 쬐던 중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그 섬의 원주민들은 그 일로 바울을 살인자로 간주했고, 곧 죽을 줄로 알았습니다(4, 6). 그러나 아무 이상 없음을 보고 바울을 신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바울은 자신이 신이 아니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것입니다. 그 섬의 촌장의 부친이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바울이 기도하므로 낫게 했습니다(8).
11-30 :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곳 형제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15). 17-20은 바울이 로마에 오게된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유대인 형제들의 반대로 마지 못해 가이사에게 상소했다고 했습니다(29).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현명하게 대했고(21-22), 바울이 유숙하는 집에 찾아와 복음을 들었습니다(23). 그 중에는 믿는 자들이 있고, 안 믿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이사야의 예언(26-27)대로 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2년 동안 셋집(가택 연금 상태)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하게 가르쳤습니다(31).
첫댓글 21장
<행 21:7>과 <러브레터>
"안부를 묻고" 신약 중 사도행전 번역에만 나오는 표현(18:22, 21:7). 역시 한글 성경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문안-하다(greet-ing)”로 번역됩니다. 왜 여기만 그렇게 번역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순한 인사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뉘앙스 차이가 확실히 있습니다.
그런데. 안부. 저는 꽤 용기가 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안부를 물어보기도 힘들고, 답하기도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https://youtu.be/72MiVbSVOMY
영화가 직접 상관 있지는 않지만, 안부 하면 떠오르는 영화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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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행 22:01-22>과 <어 퓨 굿 맨>
행전에서 바울은 절대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리고 변론할 때 언제나 '왜'보다 '어떻게'를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왜보다 반박하기 힘든 게 어떻게 이기도 합니다.
그런 캐릭터라는 전제에, 박윤석 주석에 따르면(p.162) 21절은 상대가 흥분할 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변증과 영화 속 검사의 마지막 질문 방식이 유사합니다. https://youtu.be/K3b05VXZL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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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행 23:23-33>과 <시즌 오브 위치>
바울을 호송합니다. 이 장면이 꽤 기묘한 장면입니다.
분명 바울은 '죄인' 취급인데, 천부장은 그를 꽤 많은 병력을 동원해서 보호하며 호송합니다.
한편, 영화와 구절은 정반대 상황을 그립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그려진 영화입니다.
24장
<행 24:24-27>과 <폼페이: 최후의 날>
미리 말하면 영화는 재미없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 때문에 추천한 영화. 두 사람이 바로 폼페이 그 날에 죽습니다. 영화는 로맨스를 버무려 별로 재미없게 그립니다. 성경 속 인물 중에 역사 기록에 남겨진 인물들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영화와 별개로 폼페이 화산 폭발을 당시 퇴폐적인 행태의 대가라는 해석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25장
<행 25:11-12>과 <글래디에이터>
영화 속 황제는 마치 네로처럼 묘사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 황제는 기독교 탄압하지 않았다는 게 함정.
이 영화의 감독이 연출한 영화들은 다분히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킹덤 오브 헤븐><엑소더스><프로메테우스><마션> 등. 그런데 저는 일부러 이 감독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영화들이 기독교를 반대하고 부정한다기보다, 기독교인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답을 해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 영화에 각을 세우고 외면하고 부정하기보다, 저는 대중 영화를 그렇게 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26장
<행 26:31-32>과 <7번방의 선물>
이 절로 우리는 그 재판의 진실을 압니다. <7번방의 선물>은 모의 재판으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집니다.
27장
<행 27:14-44>과 <퍼펙트 스톰>
바울 일행은 난파 당합니다. 본문과 영화가 어울리는지는 의문입니다. 차라리 <포세이돈>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퍼펙트 스톰>은 단순한 재난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퍼펙트 스톰'을 생각하게 됩니다.
28장
<행 28:30-31>과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자기 셋집"이라는 표현. 굉장히 이상한 표현입니다. 세 들어 사는 집인데 어떻게 자신의 것일 수 있을까. 아마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으나 그건 강제가 아니라 주님의 Vision에 의한 바울의 자의로 갇혔다는 의미가 아닐까.(영화 바울이 그런 해석을 지지합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가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월터는 이제부터 밖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행전의 마지막이 그러합니다. 이제 막 도착한 로마. 그런 의미에서 행전은 격려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https://youtu.be/Na-15UDaN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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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 올린 영화 이야기들은, 청년부 수련회에서 준비했던 영화들입니다. 이야기는 다 못 전했고, 그렇다고 따로 사용할 곳은 없고 해서, 그 날 모인 분들이 카페에 오시면 참고하시도록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