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인탐방 -
◆황인숙 시인/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동서문학상(1999)과 김수영문학상(2004) 수상. 1984년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데뷔.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리스본行 야간열차」
<문인의 향기를 찾아서..>
"서울역에 도착해서 4호선 삼각지 방향 숙대 입구역에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돼요. 지하철 타실 때 맨 끝으로 타시면 출구와 더 가까워요." 상냥한 서울 억양이 길치인 나에게 큰 배려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역에 도착한 후 곧장 택시를 타 버렸다.
설명대로 찾아간 카페에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황현주 문우를 만났다. 조금 늦게 도착한 그녀, 옅은 화장기에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떡만두 메뉴를 주문하시곤 만두 하나씩 나눠 주고 싶으시다며 접시 두 개를 가져와 만두 한 개씩 나눠 담으시던 시인님은 화려함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겐 특별한 향기가 있음을 알게 됐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그녀와 길고양이가 늘 만나는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짧은 동네 한 바퀴 걷는 느낌은
점점 더 그녀의 가슴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설레었다.
골목 어느 작은 카페에 들러 대화를 이어갔다
---------------------------------------
(김지영)
선생님을 처음 뵈니까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부담이 오네요.
(시인)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요즘은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이 늘었나요? 열심히 살다가 잃어버린 문학을 찾아서 이러면서요.
(김지영)
네, 나이를 막론하고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너무 좋아 보여요. 저희는 꿈을 꾸는 것인데, 자유롭게 시를 쓰고 계시니까요.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느낀점이 공부하면서 쓰는 글과 선생님이 쓴 시가 구분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인)
그렇지 않다고 봐요. 늘 시를 쓸 땐 맨 처음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은 똑같다고 봐요. 일단 활자화된 것에 대해 접고 들어가는 것도 있고요. 지난겨울에 몸이 안 좋아서 네 달째 천식 알레르기 약을 못 끊고 있거든요.
(질문)
칼로 사과를 먹다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깍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 낸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인데
그걸 아직
두려워 한다는 건데.
선생님의 좋은 시가 많은데, 그중에서 <칼로 사과를 먹다>의 시에서처럼 아직도 가슴 아플 일이 있다는 생각을 하시는지요? 그렇다면 지금도 사과를 칼로 찍어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시인)
가슴 아픈 일은 참 많죠. 살면서 점점 더 가슴 아픈 일이 많은 것 같아요. 가슴 아픈 일도 많았죠. 근데 칼로 음식을 찍어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이 생긴다는 미신이 있나 봐요. 어느 나라 미신 인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들으니깐 미신적인 생각이지만 좀 안 그러게 되더라고요. 옛날에는 깎고 자르면서 집어먹고 했는데 그런 거 왠지 안 하게 되더라고요.
(김지영)
고양이와 함께하다 보면 길 고양이에 관한 가슴 아픈 사연도 있지 않나요?
(시인)
길 고양이에게 밥 주는 사람은 정기적인 치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게 허구한 날 상처예요. 상처.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길 고양이에게 밥주는 사람은 아마 거의 다 우울증에 걸려 있을 거예요.
(김지영)
길고양이들에게 위로받는 부분도 있으신가요?
(시인)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는 기쁨, 어쨌든 애들을 편안히 한 끼 먹였구나 그런 보람이죠 뭐.
(질문)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하얗게
텅
하얗게
텅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습작하는 저희들에게는 시는 은유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미안하고
그리우신가요?
(시인)
이것도 고양이 때문에 쓴 시예요.
제가 고양이 하고는 각별히 안 사귀려고 해요. 밥이나 주고... 친하게 다가오는 고양이들이 마음을 힘들게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결심하기 전에
7년인가 8년 전쯤에 베티라는 너무 사람을 잘 따르고 애틋한 고양이가 있었는데, 한겨울이 지나자마자 3월 경에 집도 지어주고, 집 지어준 아주머니한테 사료를 드리고 때론 얘 때문이라도 하루도 안 거르고 갔었어요. 한 번은 시간이 없어서 못 가다가 일주일 만에 가니깐 밥그릇이 텅 빈 거예요. 물론 빌 수도 있는 건데 한낮에 사기 밥그릇이 하얗게 비어 있는 걸 보는 순간 기분이 막 이상 하더라고요. 그런데 몇 시간 후에 얘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 죄책감...
아무튼 고양이가 살갑게 따르면 제가 그만큼 거두지도 못하고 밥이나 줄 뿐이에요. 그런데 어떤 고양이는 얼마나 사납게 군다고요. 이 놈이 미쳤나 하고 여름에 물도 끼얹고 그러는데, 사나우면 사나운 대로 살살 거리면 살살 거리는 대로 다 마음이 가죠.
그런데, 그냥 밥만 주고 쓱 지나가면 그만이니깐 그 고양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미안하죠
(질문)
운명의 힘
상대의 성향과 확률을 숙고해서
가위를 낼지 바위를 낼지
보를 낼지 결정하는 승부사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가, 요거 내래!”
가락 맞춰 외치다 보면
얼결에 손을 내게 된다
흥겨워라,
운명의 힘
시에서
'흥겨워라' 이런 행을 넣으신 점이 놀랍습니다. 평소에 이렇게 유연한 상상이나 삶의 체험을 넣는 훈련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시인)
훈련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삶의 체험이라든가 일상의 자기 삶이 시를 쓸려고 마음먹으면 시 소재로서의 보고인 거죠. 특별히 훈련을 하는 건 아니에요.
흥겨워라는 저절로 나온 건데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의 가위 바위 보! 흥이 나잖아요. 그 가락이
(질문)
시를 본격적으로 쓰시기 전에 주로 소설책을 읽으셨다고 어느 인터뷰 내용에서 보았습니다. 소설에서 시로 넘어오는 과정에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시인)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사람들의 경험이나 체험, 산다는 게 매일이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물론 실생활을 활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죠. 운동을 한다든가 모험을 한다든가 아주 열렬히 자원봉사를
한다든가 기타 등등 그런데 소설을 읽는 것은 좀 소극적으로나마 자기 삶, 자기 세계를 확장하는 그런 거잖아요. 그것도 즐겁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거죠. 서울에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그냥 몰랐을 어떤 분위기나 상황이나 마음 상태나 정조 이런 것을 소설에서는 이런 거 저런 거를 맛볼 수 있잖아요. 그때 그런 게 내 속에 잠들어 있던 어떤 감각을 소설의 어떤 구절을 읽다가 깨우치기도 하고, 아니면 없었던 게 생기기도 하고, 그럴 때 잽싸게 그걸 살리는 거죠. 잡아 채서...
대체로 소설책을 주로 읽으신 분은 소설을 쓰게 되는데요, 아마 저한테 중요한 건 제가 시간이 없어서 소설은 진짜 의지와의 싸움이라고 그러잖아요
확실히 소설이나 산문은 쓸수록 늘어요. 그래서 나이 들어도 오히려 유리한 게 소설이란 장르인데, 소설가는 굉장히 인내심이 있고 성실해야 된다고 봐요. 그 이유이겠지만 그 당시 제가 삶의 경험도 부족하고, 기본적으로 저한테 스토리텔링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를 쓰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시는 짧은 시간 몰두를 하면 되죠. 그게 고양이 기질 비슷한 건데, 고양이는 호기심도 많고 대체로 순간 집중하고 그러는데, 절대 길게 뭘 하고 참을성 있고 이렇지는 않거든요.
(질문)
선생님의 글을 접할수록 사람은 말 없는 사물의 또 다른 형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사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 사물에서 나온 듯한 그런‥ 오랫동안 문단에 계신 시인의 삶 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시인)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건 있을 수 있겠어요 제가 시인으로 살지 않았으면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공감능력 이런 게 지금보다는 좀 둔하지 않았을까? 공감 능력은 떨어지지 않았을까? 시를 써서 좀 더 다른 삶에 대한 사려가 깊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가 실제로 애니미즘도 생기는 거죠. 사물을 사물이다 이러지 않고 예컨대 그것도 어쩌면 일종의 뭘 아까워하는 마음일지 몰라도 저는 제가 오래 쓰던 식탁도 새것이 생겨서 버려야 될 때도 이걸 버리는 순간 얘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힘들거든요. 말하자면 애니미즘인 거죠 뭐. 그냥 물질은 물질일 뿐인데... 그게 시인으로 사는 여파가 아닌가 싶어요.
(질문)
오래전에 보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꿈 많은 청춘이 꿈을 펼쳐야 할 시기가 있음에도,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저항할 수 없는 청춘에게, 키팅 선생의 시가 흐르는 교실을 만들기 위한 시 수업 도중 교재 속 시를 알기 위해 운율, 음조를 따져봐야 한다는 원론이 쓰인 페이지에 대해 ‘쓰레기’라고 일갈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책을 찢게 합니다. 시로 인한 진정한 삶의 가치관, 근원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청춘들에게 한 말씀해 주신다면요?
그리고 시 쓰기를 시작한 기성세대에게 시의 가치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시인)
말하자면 우리나라 시조같이 형식 맞추느라 본질을 놓치지 마라 이런 뜻으로 하는 거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죠. 시는 뭐니 뭐니 해도 리듬이거든요. 리듬 이란 것이 운율을 정형화해 갖고 마치 운을 맞춘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연스럽게 우러나야되요. 예컨대 아까 그 '흥겨워라' 처럼 말이죠.
얽매이지 마라, 그런데 얽매이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알고는 있으면 좋겠죠. 굉장히 흔한 말이지만 좋은 음악은 들으면 힐링이 되잖아요. 좋은 시도 그런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 음악은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각으로 쉽게 청각을 통해서 와서 마음을 흔들지만,
시인의 입장에서 쉽게 쓰인 시가 있다면 아주 쉬운 시라고 생각하는 건 시 쓴 사람 마음이고, 그런 시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낼 능력이 있다면 좋겠죠. 많이 읽어서 독해력을 키우는 게 시가 주는 즐거움의 최대치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죠. 외국어도 듣기, 읽기, 쓰기가 있듯이 시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줄 모르고
시를 읽거나, 향유할 수 있는 독해법을 모르면서 남의 시에 관심 하나도 없이 스스로 시 쓰기만 잘한다 이런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느 소설에서 보았는데, 이 사람이 소설에 대해 예술 작품이란 재료보다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했듯이 시도 물론 재료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시가 되려면 구조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 경우는 이론을 먼저 배우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거의 병적으로 책을 읽어 대서 나도 모르게 그게 저한테 체득되었는지는 몰라도, 제가 처음에 시랍시고 썼는데 정현종 선생님한테 엄청 고무 받았어요. 그게 등단 시인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잠자는 숲> 이에요.
(김지영)
시 작법 이론으로 출발함이 아닌 창작에 있어서 감각 그대로 시가 되는 선생님의 그 영역이 너무 부럽습니다.
한 분야의 최고점에 도달하기 위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지점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여전히 비율적 통계 안에 있다는 점은 낯설지 않은 사실인데, 시인님은 현대 시문학 분야에서 고점에 자리매김하셨습니다. 이 길을 자신하셨던 순간이 있으셨는지요?
(시인)
생각해 보니 제가 걸어온 길도 좋은 코스였구나. 우연히도 시 로서는 제가 평탄한 길을 걸어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냥 그때는 멋모르고 저 잘난 맛에 살았지, 다 저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줄 알았어요.
김지영 씨도 배우면서 자기 시를 쓰는 거예요. 가요를 배워도 더 맛깔나게 부르려고 애쓰면서 배우잖아요. 저는 한 인간으로서 행운 있는 삶을, 유복한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오히려 힘들게 산 측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에 있어서는 알고 보니 좀 다르게 그렇게 시인으로 시 쓰는 삶을 살아온 것 같아요
(질문)
요즘 현대시 중 다의적 측면을 넘어 작가만의 진술 속에서 해석 가능한... 난해시라고 하나요? 시인님은 그러한 글들을 접하셨을 때 현대시의 갈래적인 측면에 세워야 하는 긍정적 견해가 있으신가요? 시 공부하는 문학생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요?
(시인)
저는 난해시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난해하다는 거는 자기 독해력이 낮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시 쓴 사람이 배짱으로 자기 맘대로 쓰거나 아니면말고 그러면서 이건 자동기술이야 하면서 그럴싸한 것을 뚤뚤 뭉쳐갖고 탁 내던지고 자기는 내던졌으니 알아서 해석해 주길 바라는 경우도 물론 있겠죠. 근데 읽다가 난해시라고 생각 들면 자기가 느낄 수 있는 만큼, 음미할 수 있는 만큼만 음미하고 모르는 구절은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걸 이게 뭔가 하고 무슨 깊은 뜻이 있을 거야 하고 골머리 썩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한 사람이 시라고 썼는데 이건 시도 아니야 하고 무시할 것도 아니고, 그냥 뭐 이 사람은 이렇게 썼는데 이런 부분은 알아먹기 좋게 표현하고 어떤 것은 글쎄 좋아 보이는데 나는 모르겠네 하고‥
신춘문예 당선작으로는 거의 없는데, 작년 경우에는 한국일보 시가 조금 그랬고.. 다른 데는 모르겠고, 제가 심사 본 데서는 소위 그 추세 미래파시? 그런 영향을 받은 시들이 그래도 시집으로 나오거나 활자화된 것은 그럭저럭 읽을만 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 쓴 응모작들 중에서는 별로 좋은 게 없었어요. 딱히 그런 유의 시다 해서 배제하라는게 아니라, 공평하게 봤는데 그 자체도 난해하다는 말을 듣는데 그걸 흉내 내면 어설프게 되는 것 같아요.
(김지영)
신춘문예풍의 시가 일반 문예지 시들과 조금 구분 되는 부분이 있나요?
(시인)
구분 되는 것은 잘 모르겠는데 그런 건 있을 거예요. 신춘문예에서는 그 사람이 다섯 편 응모하면 딱 한 편을 싣잖아요. 그러니까 문예지나 이런데 가면, 굉장히 매력 있는 시인데 어느 구절이나 부분이 조금 그러네 싶어도 그래도 뽑아요. 그런데 신춘문예는 조금 곤란할 것 같아요. 신선도를 애타게 찾으면서도 나름 완결 미가 있어야 하고, 흠잡을 데가 있으면 제쳐놓게 돼요. 그러다 보면 하나도 신선하지 않네 이런 게 올라가게 돼요.
(질문)
선생님 스스로 시인으로서 소명감이나 철학이 있으신지요?
(시인)
시를 쓴다는 소명감‥ 글쎄 특별히 그런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데, 시인이 뭐 저렇게 악한가 시인이 뭐 저렇게 선한가 그러면서 그 좋지 않은 쪽과 내가 소속된 시인이란 게 연루되게 살지는 않으려는 게 소망 이예요
(김지영)
선생님은 지금 시점에서 또 다른 목표 라든가 이런 부분이 있으신 가요?
(시인)
시인으로서는 좋은 시를 쓰고 싶은 거죠. 좋은 시는 관두고, 일단 시를 쓰고 싶은 거죠. 그리고 그 시 중에서 좋은 시가 있다면 정말 다행인 거죠. 목적을 두고 쓰는 게 아니라 쓰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서 무작정 쓰는 게 제일 소망이에요. 청탁 때문에 꾸역꾸역 쓰는 거 말고요. 그런데 청탁시라도 꾸역꾸역 써지면 좋겠네요.
(김지영)
습작하다 보면 어떻게든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인)
그런 것도 좋은 것이죠. 아무 생각 없이 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게 더 슬픈 거죠
(질문)
길고양이는 사람들에게 주로 미움의 대상인데 보잘것없이 대우받는 동물에게 애정을 갖고 계신 마음이 참 고맙습니다. 고양이와 교감을 하면서 인간과의
차이점에서 특별한 애정을 갖게 된 부분이 있으신가요?
(시인)
차이점이라기 보다 차라리 닮은 점 때문에 더 애정이 가는 거 같은데요. 똑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고통받고 삐지기도 하고 뭐 아무튼 차이점보다는 같은 점, 닮은 점 때문에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아요.
(질문)
현시대에는 시만큼이나 시인이 넘쳐난다고 하는데, 시인 지망생으로서 가져야 할 진정한 가치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시인)
글쎄요. 진정한 가치관이 뭐가 있을까요?
현재의 내 세계를 시라는 세계로 아름답게 확장해 보자 이런 마음으로.. 시와 무관하게 살 때는 그때도 나름대로 예민하고 의롭게 살 수가 있겠지만, 시를 쓸려고 생각하면 시감을 캐치하기 위해서라도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하게 되고 관찰도 더 하게 되죠. 시를 쓸려면 구조가 있어야 되니까.
시가 사실 수학이고 논리면서도 수학·논리가 드러나지 않게 착착 구축하는 것이니까요. 두뇌 훈련이나 마찬가지죠. 안 쓸 때 보다 좋아지니까요. 어쨌든 생각 없이 살지 않게 하는 것만도 어디예요. 생각 없이가 유심, 그리고 유정하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게 되는 거죠. 보다 더
(질문)
등단을 희망하는 습작생들에게 문예지 급수는 등단도 하기 전에 자존심의 일부가 된 듯 급을 따지는 행위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혼란 스럽습니다.
(시인)
저한테 오는 시들 중에서 안 알려진 시인이고 안 알려진 출판사인데도 드물게, 문제는 드물게 예요. 시 참 좋다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거지요. 하지만 피드백, 들려주는 기쁨을 만끽하려면.. 그래서 급을 따지는 게 아닌가 싶네요.
제가 유난히 많이 읽으니까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숨어 있었네 하고 발견되지, 잘 쓰는데도 몰라 주기가 쉽죠. 급을 따진다면 그런 의미에서 따질 수는 있어요. 이상한 매체는 상종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 하세요. 좋은 사냥꾼은 사자 잡을 때나 토끼 잡을 때나 똑같이 최선을 다하는
것 처럼요.
(질문)
기억을 되살려 볼 질문하나 드리려 합니다. 시인을 꿈꾸며 필사와 습작에 몰두하다 보면 순간순간 벽 앞에 서게 됩니다 어떤 자세로 극복을 하면 좋을까요? 시인님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인)
자기가 쓴 시 중에서 좀 잘 쓴 시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감을 살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또 어떠한 시를 이해하는 데는 필사를 해보면 확실히 이해가 빨라요. 컴퓨터 모니터로 보거나 시집을 보더라도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필사를 해 보면 더 깊이 있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제 경험이라면 전체적으로 필사를 한 적은 없지만, 무슨 시를 읽다가 시 뿐만 아니라 소설도 그렇고 좋은 구절이 있으면 베껴놓게돼요. 어디서 옮긴 건 따옴표를 해 놔요. 아무튼 좋은 구절 보면 이렇게 옮겨 적고 싶지 않나? 또 하나는 시를 배우기보다도 어떤 시를 평할 때 필사를 해서 보면 눈에 더 잘 보여요. 필사를 해서 들여다보면 눈에 잘 보인다는 거는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김지영)
습작생 질문 중,
시는 계몽적 이어야 하나 아니면 서정적인 시가 더 좋을까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시인)
글쎄, 그냥 서정시를 보고도 뭐가 계몽될 수 있어요. 계몽만을 위한 시는 격이 좀 떨어지지 않나? 뭐든지 가르치려고 하면 드러나는 것은 아주 멀게 느껴져요. 저절로 배우는 바가 있으면 몰라도... 즐겁게 쓰셨으면 좋겠어요. 고통조차도 즐겁게요.
저는 착실히 시를 써 온 게 아니라서 할 말은 없는데요.
저는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이번 시집도 10년 만에 나왔어요.
한편 한편 늘 쓰는 것이 중요한 거 같아요. 오규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시처럼 질투가 심한 애인은 없다. 잠깐 한 눈을 팔아도 휙 멀어진다”. 그런데 저는 거의 딴 눈을 팔고 살고 있는데 안 그러려고 노력해요. 참고로 메모하는 습관도 굉장히 중요해요. 요즘은 휴대폰에도
메모한다는데 조그마한 수첩이나 볼펜을 지참을 하세요. 저는 손으로 하는 게 참 좋아요. 휴대폰은 메모하려고 꺼냈다가도 다른 거 보게 되지 않나?^^ 글이 글을 부르거든요. 메모는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옛날에는 잘 때도 메모지랑 볼펜을 머리맡에 두고 잤어요.
밤에 뭐가 떠오르거나 꿈에 나타날 수가 있어요. 꿈을 꿨는데 어떤 사람의 시를 보는데 너무너무 좋아서 질투로 가슴이 찢어지는 거예요.
(김지영)
그 정도 몰입하신 적이 있으셨군요.
(시인)
딱히 몰입했다기보다 그냥 제가 좀 주의산만형이라서^^ 그렇게 살아도 그 와중에 기본적으로는 시를 생각하면서 살았나 봐요.
아무튼, 저같이 시 쓴 세월이 긴 사람도 시 메모가 없으면 시를 쓸 때는 맨날 A, B, C부터 쓰기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시를 놓지 않고 있으면 유연하게 들어갈 때 있지만. 정말 다시는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그러면서 글이 글을 부른다는 게 어찌어찌해서 시 비슷한 게 되면 다행이다, 썼네 하는 기분이 들죠. 물리적으로 시간을 내줘야 좋은 시든 나쁜 시든 써지게 돼요.
어쨌든, 시를 쓰게 돼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질문)
마지막으로 솜다리 문학회 회장님 질문으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처음 출발 시점에 선 문학지에 대해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시인)
문예지가 그냥 오래가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갔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앞에 두 분만해도 전업 시인이 아니라 직장을 갖고 있잖아요. 전 그게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글 쓰는 사람이 직장을 갖는 게 좋다 보는 게 세계가 넓어지지 않나? 시라는 것이 삶에서 나오는 건데 자기만의 직업에서 자기만의 시가 나오기도 하잖아요. 김기택 시인의
사무원이라는 시가 얼마나 좋아요. 김기택 시인이 착실한 회사원이
아니었으면 나올 수 없는 시죠.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가는 문학회가 되길 바랍니다.
----------------------------------
커피숍에서 대화를 이어 가던 중 특히 상대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 유난히 목소리가 활기찼고 눈이 반짝였다. 다이어트를 걱정하며 소소한 고민을 여과 없이 털기도 했다.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의 중심으로 향할 때 삶의 외곽에 위태롭게 서성이는 것들과 함께 아파했던 황인숙 시인님. 가보지 못한 곳의 환상보다 더 큰 의미의 진솔한 시인의 삶을 느낄 수 있었던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시는 ‥조립의 도구로 배양되는 것이 아닌, 지독한 고독 속에서 삶과 고군분투 끝에 피워낸 꽃 향기가 아닐까 되새겨 본다
첫댓글 그때 황인숙 시인님의 편안하시고 인자하시고 소녀같은 모습이 떠오르네요.커피도 사주시고 정말 인간성 좋은 시인이셨습니다.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