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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정리 및 글쓴이 : 정재억
4월 초 봉의산 답사에서 한림대학교 뒤쪽 바위벽에 새겨진 송애 반석평(潘碩枰)의 한시를 첫 대면하는 기쁨을 맛봤다. 그날 답사에는 사공 민 춘천시청 문화체육과 문화재담당과 심창섭 사진작가, 오동철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장, 김남덕 강원사진연구소 소장이자 역문연 운영위원 등 5명이 참석하였다.
때 마침 한시 암각을 처음 발견했다는 오춘택 한림대 교수와 홍천에 사는 광주 반씨 종인(宗人) 등 서너분이 와 계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춘천에는 바위 위에 글씨를 새긴 암각문(岩刻文)이 모두 일곱군데에 있다. 북산면 청평 1리 청평사 일원에는 세 곳에 암각문이 있다. 이 가운데 공주탑 부근에 가장 많은 각자군(刻字群)이 모여 있고, 고려정원옆과 적멸보궁 부근에 각각 20여자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남면 가정리에서 박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밑의 강가 바위벽(홍무벽)에도 각자군이 있다.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글씨바위’라고 하고 고흥 류씨집안에서는 ‘洞口石’이라고 한다. 사북면 오탄 2리와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의 경계선, 방화기폭포 근처 시냇가 커다란 암반 위에 누구의 시인지 모를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밖에 삼악산 등선폭포 계곡에도 바위벽에 새긴 5瀑 1潭의 암각문 각자군(刻字群)이 모여 있다. 이들 각자군은 1957년 김장흥 도지사 재임 때 새긴 것으로, 지난해 춘천역사문화연구회에서 등선폭기념비 전문을 번역했다.
반석평(潘碩枰), 그는 누구인가
반석평은 본관이 광주(光州) 호는 송애(松崖)로 서얼출신 반서린(潘瑞麟)을 아버지로 1472년(성종 3년) 충북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재상가의 종이었으나 재상이 반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하여 글을 가르치고 아들 없는 부잣집에 보내 아들로 삼게 하고 공부에 힘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13세 때 부친이 죽자 모친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한양으로 올라갔다는 기록도 함께 전한다.
그는 비록 서얼출신이지만 1507년 35세의 늦은 나이에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을 첫 관직으로 관리의 길에 들어서며, 훗날 조광조. 김식 등과도 교유하였다. 특정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리인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하였으나 노비출신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516년(중종 11) 안당(安塘)의 추천으로 종5품으로서 경흥부사가 되고, 1522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를 거쳐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1524년 (중종 19)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 보고를 잘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530년(중종 25)에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과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53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판과 전라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는 조선시대에 함주림이라는 사람과 함께 8도감사를 모두 역임한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1540년(중종 35) 5월에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묘소는 본래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조안리에 있었으나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해산으로 이장하였다. 묘역에는 정사룡이 지은 묘갈이 있다.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반석평 시(詩)
오언절구의 이 시는 1985년 봄에 발견됐으며, 오춘택 교수가 1989년 아시아문화연구소에 '반석평론'을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반석평 암각시는 한림대학교 뒤쪽 봉의산 등산로 해발 275m정도에 있는 암석벽면에 새겨져 있는데, 최근 춘천시가 휴식년제 실시구역으로 정해 출입구를 막아 놓았다. 암벽 앞에는 심하게 녹 쓴 가로등이 서 있어 흉물스럽다.
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모두 아홉 줄로 위에서 아래로 예서체로 쓰여졌고 한 글자의 크기는 5~6cm로 붉은 칠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봉황을 연상케 하는 봉의산의 날개 사이의 목이나 가슴 언저리 쯤에 해당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시는 반석평이 1534년 강원도 감사로 재직 시 지은 시로 봉의산에 올라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춘천과 직접 관련된 내용은 아니다.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며 정회(情懷)하는 마음을 독백형식으로 나열하였다. 시를 새긴 시기는 191년 뒤인 1725년(雍正 3년 : *옹정은 청나라 세종 옹정제의 연호로 1723년에서 1735년까지 13년간 사용)으로, 9세손인 반우한(潘遇漢)이 새겼다고 기록돼 있다. 그날 봉의산에서 만난 반씨 종인 중 한분은 “반석평 한시를 새긴 우한(遇漢)은 홍천출신”이라고 설명했다.
반석평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실제는 세로 글씨임.)
벽소(?)대성화 碧소(山변 밑에召)帶聖化 성인의 교화를 두른 푸르른 산
미호지금전 美號至今傳 그 이름 아름다워 지금까지 전하였네
봉거소성단 鳳去韶聲斷 봉황새 날아가자 태평시대도 끝나 버려
등임독창연 登臨獨悵然 산에 올라 창연함을 홀로 느끼네
가정십년일 嘉靖十年日
감사 반석평 監司 潘碩枰
제 題
구세손 우한 九世孫 遇漢
옹정삼년 각 雍正三年 刻
<책 소개>
선비평전 - 우리 시대에 던지는 오백년 선비의 역사
붓을 빠는 이들이 다스린 나라 조선朝鮮
무인과 잡류는 물론 왕까지 눌렀던 5백년 지배체제 조망
조선을 흥망케 한 사士의 역사적 존재의미 탐구
조선시대사 학계의 원로이자 당쟁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조선 5백년 정치지형 속에서 선비라는 존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읽어낸 『선비평전』을 펴냈다. 이 책의 특징은 조선을 대표하는 계급이자 이념이었던 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발가벗겨’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간 선비에 관한 여러 저작들이 있었지만 ‘선비정신=대쪽정신’이라는 유산의 밝은 면을 통해 현실을 계몽하려는 입장의 책들, 수탈계급으로서의 존재와 망국책임 등을 타박하는 책들, 개별적 선비들의 선행과 비행을 에피소딕하게 소비하는 책들의 세 갈래로 나뉘어 그 종합적 역사상이 완벽하게 그려지지 못한 감이 컸다.
선비를 보는 양 갈래의 관점 통합한 비평적 시야
허나 ‘선비’라 하면 미국의 ‘청교도’, 일본의 ‘무사도’, 영국의 ‘신사도’처럼 조선을 대표하는 정신적 기풍이자 사회의 조직논리이고, 명실상부한 국가의 중심동력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규명해 그 역사적 실체를 제도적으로, 사실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 『선비평전』은 그런 상황에서 선비에 가해진 긍·부정의 관점을 모두 포용해 ‘쌍라이트’를 켜고 그 복잡한 미로를 밝게 비추고자 한 시도이다. 조선건국의 특수성에서 배태된 운명적 사회제도들을 살핌과 동시에 다양한 선비의 인간상을 개별적으로 탐사하여 역사를 정합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이 책이 “조선시대사를 연구하다가 얻은 일종의 낙수落穗”라고 겸양하지만 군데군데 빛을 발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분명 이러한 균형 잡힌 종합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1)통설 2)통사적 흐름 속에서 개별 선비 탐색 3)선비정신의 구조와 본질 탐색이 그것이다.
먼저 통설에서 저자는 선비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증, 왜 조선에 선비라는 계급이 등장했는지, 선비지배체제의 일반적 특징은 무엇인지, 그것을 5백 년 간이나 지속시켜준 제도적 여건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이 선비의 나라였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조선이 ‘민본주의民本主義’를 표방했다고 해서 실제 조선이 모든 ‘민民’을 아우르는 국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민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선비들의 덕치를 표방한 것이요, 백성들은 덕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점이 현대 민주주의와 다른 점이다. 선비들은 지주이자 관료요,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정치 주체였고, 그들이 내세우는 여론정치도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했다.”(20쪽)
조선은 군사령관도 문신文臣이 차지한 국가다. “전술보다 전략이 더 중요하다는 명분”에서였다. 선비국가는 중국에서도 못 막은 환관의 발호를 막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 환관은 사대부 앞에서 힘을 못 쓰게 되었다. 직종도 다르고, 금령도 많았으며, 처벌도 심했던 것이다.
왜 똑똑하지 못한 왕보다 우유부단한 왕이 더 위험한가
당쟁사와 조선의 정치제도사를 면밀히 살핀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똑똑하지 못한 왕보다 우유부단한 왕이 즉위하면 훨씬 위험하다. 그 이유는 “똑똑하지 못한 왕이 즉위하면 훌륭한 신하만 피해를 입게 되지만, 중종처럼 우유부단한 국왕이 권력을 잡으면 좋은 현신과 간신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이쪽 말을 들으면 이쪽 말이 맞고, 저쪽 말을 들으면 저쪽 말이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똑똑한 선비들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강병정책을 쓰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저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답한다. 조선은 농업국가였지만 농업조건이 좋지 않았다. 농토는 적고 토박하며, 날씨는 가물다가 7-8월에 태풍이 불어 상습적으로 홍수가 일었다. 만성 기근을 조선인들은 피해갈 수 없었고, 이런 환경에서 강군을 양성하기란 어려웠다. 그럴 돈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강군을 기르면 쿠데타의 가능성이 있어 문치주의를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조선을 국방보다는 외교에 치중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선비의 역사 통사적으로 훑고 ‘선비정신’ 체계화
2장에서는 선비국가가 전면에 내세운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로 대표되는 유교문화의 면면들을 살펴보았고, 3장부터 9장까지는 ‘여말선초’-‘사림정치’-‘임진왜란’-‘정묘·병자호란’-‘숙종조의 당쟁’-‘세도정치’ 등 시대순으로 내려가면서 전쟁과 같은 큰 사건들과 사림정치가 어떻게 맞물리면서 역사가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선비라는 존재가 어떻게 운위했는지 행위자들의 구체적 사유와 판단, 정치적 실천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선비와 선비사상’이라는 장을 마련해 선비들의 정치적 강령을 뒤에서 받쳐준 철학체계과 정신세계를 압축적으로 체계화시켜 살펴봄으로써 끝을 맺는다.
충의의 사육신 신화는 사실 정치투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고려 말에 형성돼 조선 중기에 사림정치로 완성되는 선비 지배체제가 선비들의 주체적 역량으로 일궈내어 각고의 노력으로 지켜낸 결과라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성리학이라는 대전제와 도통과 의리라는 명분 아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치적 수읽기로 상대방을 음해하고 그야말로 명줄을 놓고 각축한 생존분투의 측면을 함께 읽어냄으로써 ‘선비의 역사’ 또한 이상추구와 생존본능이 치밀하게 교직된 현장이었다는 점을 실감나게 펼쳐 보인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자면, 저자는 그동안 충의忠義의 대표 격으로 여겨져 왔던 ‘사육신’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살피고 있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사육신이 애초에는 모두 수양대군 라인에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단종을 대신해서 전권을 쥐고 인사권을 행사하던 당시의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에게 집현전 학사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대간大諫으로서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 또한 이런 집현전 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포섭하려고 애썼다. 운명은 세조가 즉위하면서부터 틀어졌다. 즉, 그가 전제군주의 모습을 보이며 6조 직계제 등 왕권강화를 노골화하자 집현전 학사들은 그런 전제군주화가 자신들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던 관계로 ‘단종복위’를 내세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사육신 사건이 겉으로는 충·역 시비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권력투쟁의 한 방편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사육신의 역사무대 복귀’도 그 안엔 정치적 배경이 존재한다. 이는 숙종이 송시열 등 노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기 위해서였다. 군주를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을 내세워 송시열 등을 불충으로 낙인찍고, 원자 책봉을 강행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즉, 사육신의 충절은 이처럼 숙종대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창출된 면이 강하다.
오윤겸, 반석평 등 선비의 재발견과 인조반정 비판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를 살다간 여러 선비들을 재발견해서 보여준다. 노비 출신 형조판서 반석평 등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 이들이 소개되며, 기인奇人으로만 알려진 토정 이지함이 포천·아산 현감이 되었을 때 펼친 개혁정책의 좌절 과정도 들려준다. 율곡 이이에 의해서 “옛사람들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착했는데, 지금 사람(이준경)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악하다”고 적대시된 이준경이 실은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동서 붕당의 당쟁을 막아보려고 했던 균형잡힌 선비였다는 점을 강조했고, 같은 차원에서 당쟁 속에서의 아계 이산해의 실리적 현실주의와 임진왜란 중에서의 유성룡의 현실적 실용노선을 파악하기도 했다. 특히 인조 조에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의 훌륭한 목민관으로서의 업적, “남인 같은 서인”이라 불리며 당색을 초월했던 인품과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한 과정, 목숨 걸고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한 기개 등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을 이끈 실무관료’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기존 역사해석에 대한 문제제기도 잇따른다. 인조반정이 내세운 “광해군이 존명사대尊名事大를 어겼고, 폐모살제廢母殺弟했다”는 명분은 당시 동아시아 세계정세에 잘못 대처한 선비들의 쿠데타가 내세운 거사명분일 뿐이라며 재평가를 촉구하기도 했다.
차례
머리말
1장 통설
선비, 임협과 문사를 갖춘 존재
붓을 빠는 이들이 다스린 나라
무사와 환관과 여성을 누르다
똑똑하지 못한 왕이 위험한 이유
교린 없이 사대에만 치중하다
노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까닭
936년간 나라의 저력이 된 과거제도
일제가 만든 한자어를 없앨 수 있을까
2장 유교문화
공자의 인仁, 사람다움을 가르는 기준
겸애로 공자에게 맞선 묵자
공자식 사랑이 감추고 있는 폭력성
동중서, “인으로 스스로를 살찌우지 마라”
짐승도 할 수 있는 효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효
3. 여말선초의 선비들
망국대부는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다-이색의 절의
유생의 영수로서 선禪에 심취했던 목은
이집과 최원도의 각별한 우정
한양 정도와 정도전
13년 2개월간 관직에서 쫓겨난 맹사성
김종서를 알아보았던 황희
태종은 병권을, 세종은 정권을
단종복위라는 역사의 아이러니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은 권력투쟁인가
훈구파와 사육신의 갈림길-세조와 이계전
단종복위와 금성대군·이보흠의 운명
4장 사림과 사림정치
사림정치,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다
이세좌와 연산군, 뿌리 깊은 악연
심희수와 기생 일타홍
노비 출신 형조판서 반석평
“외할머니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해”
토정 이지함의 기행
퇴계의 공부법
종계변무와 역관 홍순언
사람을 알아보는 동고 이준경
세 번째 엎드린 분을 왕으로 세우다
5장 당쟁과 선비들
붕당과 당쟁
붕당사의 굵은 줄기들
당쟁의 조짐, 선배와 후배의 대결
“곧 붕당이 일어날 것이다”-영의정 이준경의 유차
이준경이 이황을 꾸짖은 까닭
이준경과 이이, 원수처럼 배척하다
십만양병은 가능한가
우남명 좌퇴계
당쟁의 서곡, 동서분당
5현종사五賢從祀
6장 임진왜란과 선비들
김충선, 오랑캐의 나라를 저버리다
정철의 건저의建儲議
오성과 한음, 삶과 죽음을 같이하다
선릉·정릉 도굴사건
유극량의 살신성인
재주꾼 이산해
이구 부인 전주이씨
허준의 출생과 경력의 진위 논쟁
『동의보감』 다시 보기
임진왜란 18년간의 기록, 『고대일록』
주화오국主和誤國
『퇴계집』으로 갈라선 조목과 유성룡
7장 정묘·병자호란과 선비들
인조반정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월사 이정구 가문의 영광
월사 산소의 명당 찾기
오윤겸, 목숨 걸고 지도자의 길을 보여주다
오달제와 『남한산성』
장만과 정충신
장만에 대한 양면적 평가
척화파 김상헌 vs 주화파 최명길
이경석을 비난만 할 수 있는가
“개도 그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송시열과 이경석
이경석, 효종을 위해 청에 무릎 꿇다
원종元宗 추숭
8장 숙종 조의 당쟁과 선비
송시열은 왜 윤휴를 두려워했나
평안감사 박엽의 권력형 비리
이만부의 실학사상
윤휴에 대한 서인의 평가
이옥의 배사론背師論
영남호강론嶺南豪强論
퇴계변무소
48조목으로 집안을 이끌다-분봉가훈
기혜예송己亥禮訟
갑인예송甲寅禮訟
1728년의 무신난
9장 세도정치와 선비들
다산이 다산이 된 까닭
윤상도의 상소
추사와 「세한도」
매천 황현의 절명시
부록: 선비와 선비 사상
지은이 소개
이성무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 연구교수와 독일 튀빙겐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연세대학교 용재석좌교수를 지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자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초기 양반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양반사회연구』 『한국역사의 이해(1~7)』 『조선왕조사』 『조선시대 당쟁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 『명장 열전』 『조선의 옛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만나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공저)』 등이 있다.
<제공> : 글항아리
참고문헌 :
-신종원, '춘천 봉의산 암벽의 반석평 시', 강원문화연구 5, 강원대 강원문화연구소, 1985.
-오춘택, '반석평 론', 아시아문화 5,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89, pp.22~23
<사진자료>
<참고자료>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조상 장절공 반석평
[출처 : http://blog.daum.net/wuban777]
[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생가가 있는 충북 음성 행치마을 입구에는 "광주반씨 장절공 행치파....."를 안내하는 비가 서 있다. 나는 이 비를 보고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지금까지 반씨는 거제반씨(巨濟潘氏)로만 알고 있었는데 광주반씨(光州潘氏)라고 하여 놀랐고, 둘째는 장절공(壯節公)이라고 하면 고려의 개국공신인 평산신씨의 조상 신숭겸(申崇謙)장군만 알고 있었는데 또 다른 장절공 반석평(潘碩枰)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집에 돌아와 성보(姓譜)를 뒤져보니 광주반씨는 거제반씨에서 갈라져나온 한 파(派)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장절공(壯節公) 송애 반석평(松崖 潘碩枰)선생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 있질 않았다. 인터넷 사이트를 두루 검색해 보았으나 여기에서도 그분에 대한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 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오래전부터 교분이 있는 종로문화원 초대 원장 반재식(潘在植)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그분은 반색을 하며 바로 자신이 1993년에 팔도감사 반석평 관산별곡(關山別曲)이란 책을 저술했는데 몇 권이 남아있다며 당장 부쳐주겠다고 말했다. 관산별곡은 송애 반석평(松崖 潘碩枰)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생애를 이해하는데 더 없이 좋은 지침서이다. 여기에 그 내용의 핵심적 내용을 간추려 올린다.
반석평(潘碩枰))은 청백리로 존경을 받았으며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 병조참의(兵曹參議).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 공조참판(工曹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형조참판(刑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반씨가문을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이끈 인걸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광주반씨 장절공 반석평의 대손이다. 광주반씨의 시조는 조선왕조 개국 당시 공신인 반충(潘忠)으로 고려 조정에서 공조전서(장관)를 지내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후 원종공신으로 인정을 받고 해양군 광주백(光州佰)에 봉해졌다.
반석평은 반충의 고손자로 성종 3년(1472년)에 옥구에서 태어 났다. 그의 어머니는 학 3마리를 가슴에 품는 태몽을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맞이가 석정(碩楨)이요, 둘 째가 석평(碩枰), 세셋째가 석권(碩權)이다. 석평(碩枰)이 13세 때 아버지 반서린이 세상을 뜬 후 어머니 장씨부인은 세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한성(서울)으로 이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 당시로서는 누구도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세 아들을 데리고 한성에 도착한 장씨는 훌륭한 선생이 있다는 소식을 들리면 그가 사는 가까운 곳으로 또 이사를 했다. 반씨가문에서는 이를 두고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훌륭히 키우기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던 맹모삼천지겨'에 비교하여 '경천지교(京遷之敎)'라고 부른다.
반석평은 공부를 하는 동안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과 권오복 등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들이 무오사화 때 간신 유자광 등의 모함으로 연산군에 의해 억을하게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반석평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의 나이 32세 때(1504년) 그는 비로소 형과 함께 과거에 급제 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는 1508년, 임금의 명령을 기록하는 기관인 예문관(藝文官)의 검열(檢閱)에 임명되었고 1년 후인 1509년에는 4등급이나 뛰어 정 5품의 홍문관(弘文館) 교리(校里)로 승진 되었다. 그러나 그바람에 그는 주위로부터 질투를 받는 대상이 되어 2년간 대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임금의 명령이나 그 이행과정에 이상이 없는지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정 6품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다. 1513년, 왕(중종)의 명령으로 함경도 지방의 민정을 살피는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샅샅이 돌아 보고 돌아와 임금을 직접 대면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 일로 인해 그는 나라의 중신들 사이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또 다시 미천한 가문의 후처 소생이라는 등 모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반석병은 진중하고 온후한 사람이어서 주위에서 그에 대해 좋은 평을 하고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다. 1516년, 왕은 그를 '경흥부사'로 임명하였는데 그무렵 반석병은 조광조와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어느날 밤 오랑캐 50여 명이 신관 경흥부사를 노리고 급습을 하였다. 자다가 밖이 소란하여 깬 반석평은 달빛 아래 접전을 벌리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고 활시위를 당겨 적장의 가슴을 명중시켜 떨어 뜨렸다. 그 바람에 오랑캐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을 쳤으며 그 후 변방은 철통같은 경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경흥부사로 간지 3년째 되던 1519년, 그의 나이 47세 때, 그는 중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변방상황을 보고 하였다. 왕은 "오랑캐들이 천 명의 군사 보다 부사의 화살 한 개를 더 무서워 한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소."라고 말했다. 그 해 12월 기묘사화로 평소 자별하게 지냈던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얼마 후 은인과 다름 없는 안당 역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6년간 경흥부사로 근무하는동안 공적이 높이 평가되어 1522년, 그는 만포 첨사로 승진 발령되었고, 잠시 공주목사(公州牧使)를 거쳐 1년 후에는 함경도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로 제수 되었다. 본시 문신이면서도 무관직에 있는 반석평은 정광필, 정사룡 등 친구들을 만날 때면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 내용이 훌륭하여 문집에 실려 전해 지고 있다.
반석평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간이 지필묵함을 꺼내 지시사항 등을 기록하고 그 여백에 마음을 가다듬는 글을 짓기 시작했다. 반석평의 시심은 노래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우국애민가(憂國愛民歌)인 관산별곡은 이렇게 탄생되었는데 그 명성은 대단했다.
1524년, 반석병은 41세 때 경차관으로 변방에 간지 11년만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발령을 받고 한성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조정은 당쟁과 세력다둠 때문에 더 이상 있을 곳이 못된다고 느꼈다. 바로 그 때 북방의 여진족이 빈번히 침략을 해왔다. 중종은 1527. 2, 북방 경비의 전문가인 반석병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하였다. 1528 정월, 회령에서 10여명을 데리고 여진족에게 포로가된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갔다가 100여 명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꼼짝없이 죽을 입장이 되었다. 그 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반석병은 10 년전 죽을 병에 걸린 딸을 살리기 위해 황기를 훔치러 왔던 여진족 한 사람을 불쌍히여겨 약을 주어 돌려 보냈 일이 있었다. 그런데 반석병을 포위한 100여명의 여진족 족장이 바로 그 황기를 훔치러왔던 자의 아버지였다. 반석병은 그런 인연으로 인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다.
1530년, 58세가 되던 해에 그는 정3품인 특진관(特進官)으로 제수되어 늘 왕의 곁에서 국정에 관한 자문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 반석병은 왕에게 함경도 변방지역의 잘못된 노비제도를 개선토록 진언하여 바로 잡았다. 즉 외지에서 유입된 사람 가운데 신원이 확실치 않은 사람은 신분을 무조건 노비로 하여 많은 문제가 파생됐는데 이를 시정토록 한 것이다.
반석정은 특진관(特進官)의 임무를 끝내고 처음으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에 임명되었다. 그가 부임한 후 마을에는 5년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던 학의 무리가 다시 돌아와 사람들은 길조라고 좋아했다.
반석정은 시인인 동시에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는 특히 학을 많이 그렸다. 충청도 제천의 청풍 누각 '한벽루'에서 지은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상 욕망 버리고 황학 타고 가
아무도 모르게 신선이 되리라...."
1531년, 충청도 관찰사로 일 년 반쯤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중국에 다녀왔다. 명나라 세종의 생일을 맞아 축하사절 단장인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온 것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명나라 백성들이 무단으로 조선에 들어와 경작을 하며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촉구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 온 후 잠시 예조참판(예曹參判)을 역임하고 1532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가 고향인 옥구 동헌에 현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옛날 자기가 경흥부사로 떠날 때 정웅이 자신을 위해 지은 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용마가 움직이어 신마가 날 듯하고
곤새가 남명에서 날고
대붕이 삼만리 청천을 나는 듯하네
명장 중에 그 누가 이 분을 따르며
선비 중에 그 누가 이분을 견주랴!
반석병의 첫번 째 부인은 남양박씨로 아기를 낳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떴다. 두 번째 부인은 창원부사 이색(李穡)의 딸 예안이씨인데 병약하여 반석병이 전라도 관찰사를 하는동안 한양에서 살았다. 관찰사가 멀리 출타를 하려면 조정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반석병은 부인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허가를 받을 새 없이 급히 다녀 오는 바람에 그 게 화근이 되어 파직을 당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예안이씨는 세상을 떠났는데, 반석정은 아내의 장례기간을 50일을 잡았다. 얼마나 부인을 애틋하게 사랑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부인이 세상을 떠난지 한 달 후 그는 또 다시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장례기간이 끝나지 않아 즉시 떠나지 않으므로 체직을 당했다. 부인 때문에 두 번씩이나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61세가 되던 1533년 6월, 반석병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경주를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 조광조와 함께 사형이 결정되었다 구사일생으로 감면되어 유배된 김구의 아내가 불심검문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구해 주었다. 잘 못 했다가 역적을 도왔다고 화를 입을 수 있었으나 그는 소신껏 행동하였던 것이다. 경상도에 가서는 백성들이 빈충하게 사는 것을 보고 경상도 전역에서 도토리 줍기 운동을 전개하여 1만석을 수집, 허기를 이겨내게 하였다.
여진족이 국경지대를 소란케하여 조정에서는 북방문제에 정통한 반석병을 또 차출하였다. 이번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평양에 부임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명나라 사신들의 접대와 선물준비 등이 도수를 넘쳐 부작용이 심한 것을 바로 잡으려 애썼다.
1534년, 반석병 강원도 관찰사로 가게 되었다. 원주 감영에 와서도 그는 학을 길렀다.학을 화폭에 담고, 학을따라 걷기도 했다. 시를 지어도 학이 등장했고 춤을 추어도 늘 학처럼 추었다. 그는 춘천의 봉의산에 올라 봉황을 소재로 시를 지었는데 지금까지 바위에 새겨져 전해내려 오고 있다.
1536년(중종 31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이것이 이례적인 것이라고 계속 주장하여 그 다음 자리인 공조참판으로 조정되었다. 그는 1년 남짓 공조참판으로 재직하다가 1537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538년, 그의 나이 67세 때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539년, 반석평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이어 형조참판에 제수 되었다. 그 해 7월에는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이 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중종은 직접 인사권을 발동하여 반석평을 형조판서에 제수 하였다. 이 때의 친정은 이례적인 것으로 임금의 반석평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입증하는 것이다.
반석평은 1540년 음 5월 19일 69세를 일기로 지상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남양박씨, 예안이씨, 진보 조씨 세 부인을 맞이했으나 후사를 엊지 못해 동생 반석권의 아들 사렴을 후사로 앉혀 주었다.
운구는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조안리에 안장되었다. 나라에서는 반석평에게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이것은 우국정신이 투철함과 특출한 무공을 인정하여 주어진 이름이다.
[책명] 팔도감사 반석평, 관산별곡 반재식 저. 1993.8.15. 을지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