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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1박2일(1)
김 선 구
어쩌면 대마도는 우리들에게 무척 가까운 섬이란 생각이들었다. 아침 8시 40분 부산항을 출발하여 1시간 10분 만에 대마도 북단 히타카쯔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인 관광객들이었다. 들리는 말소리며, 얼굴 모습 옻 차림새도 모두 비슷하니 부산항 대합실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입국심사장 분위기는 다소 긴장되었다. 모자도 벗고 안경도 벗고 양쪽 손가락 지문을 입력하고, 역시 외국에 왔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입국절차를 밟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이른 점심시간이다. 새벽부터 서둘러 여행길에 오른 탓에 배가 고팠던 터라 잘 되었다 싶었다. 선착장 주변의 자연경관과 거리의 모습을 대강 둘러보고 예약된 식당을 찾아 갔더니 “TOKISEKI”라는 영어철자간판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토끼새끼“라는 표시였다. 옆에는 작은 글씨로 “아기토끼“라고 한글로도 적어 놓았다. 순전히 한국인 손님을 의식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대마도 관광객 99%가 한국인이라 했다. 1999년 부산~대마도 간 여객선 운항이 개통 되면서 한해 30만 명 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찾는 여행지로 부상했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대마도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고도 했다. 코로나 기간 중 한국인 관광객이 끊기는 바람에 대마도 전체가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였었다. 요새 다시 관광, 낚시, 등산 등 대마도를 찾는 한국인들이 많아지면서 대마도가 활기를 띄고 있다고 한다. 거리의 간판은 대부분 일본어였지만 외국에 왔다는 실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운 곳을 두고 오랜 세월을 무심하게 흘려보냈다는 것을 생각하니 지나간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찍이 대마도 방문에 뜻을 두고 여행사와 계약까지 해 놓았었다. 그때가 1993년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폭파시켜버린 대참사, 9.11폭탄테러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공직자들에게 해외여행 자제명령이 하달되는 바람에 여행은 취소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무려 30년 세월이 흘렀다. 그 때 좌절되었던 꿈이 이제야 빛을 본 셈이 되었다.
그 동안 대마도를 다녀 온 사람들로부터 경험담을 들어보았다. 별로 볼 것이 없는 곳, 또는 한 번 쯤은 가 볼만 하지만 두 번 갈 곳은 아니라는 등 크게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얘기뿐이었다. 그래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이번에 이웃 지인의 권유로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 여행사의 안내로 1박2일(2024. 03.12~13) 일정 속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대마도를 새롭게 관찰해 보았다. 현지사정을 몸소 체험하며 이것저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역사적 사실도 돼 새겨보니, 내 딴에는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대마도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조선 영조 때 문신 조 엄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던 중 대마도에 들려 고구마 씨를 가져와서 우리나라 보급시켰다는 것. 그래서 선입감에 야생 대마가 많이 자생하는 섬이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엉뚱한 추측이었다. 대마도는 상대마와 하대마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두 개의 섬이 각각 말처럼 생겨서 두 마리의 말이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대마도(對馬島)라 부르고 있었다.
길쭉한 모습의 섬 대마도는 폭이 18km, 길이 82km, 면적은 708.5㎢. 거제도의 1.8배, 울릉도의 10배라고 했다. 그러나 경작지는 전체 면적의 3%에 불과 하고, 90%정도가 산림지대이다.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100여 년 전 일본정부가 대마도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자연히 개발이 제한되다보니 산업시설이 별로 없고 경제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본토로 떠나는 바람에 계속 인구가 줄고 있다고 한다. 한 때 근 7만 명에 이르던 주민이 현재 2만 8천 명 정도라 한다.
대마도는 행정상 나카사끼 현 대마도 시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인구수로 보면 우리나라의 군 정도에도 못 미쳤다. 그 밑에 우 리나라의 읍면에 해당하는 마치(町)가 6개로. 상대마에 4개, 하대마에 2개가 있었다. 대마도 시청사가 있는 곳은 하대마의 이즈하라라는 항구도시였다. 히타카쯔 항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90여km를 달려 도착했다. 첫 날은 여기에서 숙소를 정하고 시내 중심에 있는 관광지를 둘러보며 하루 일정을 소화했다. 다음 날 다시 상대마 히타카쯔 항으로 이동 하면서 만관교, 와타르마 신사, 에보시타게 전망대, 슈시강, 미우다 해변 등을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이즈하라는 대마도의 중심지이며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대마도 인구의 절반 정도가 사는 곳이었다. 예로부터 대마도 도주가 머물며 통치하던 곳이므로 문화재가 많았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하치만구신사. 가네이시(金石)성터, 무가저택거리, 나카라이토쓰이기념관, 역사박물관 등이었고, 우리의 역사와 관련하여 고려문, 덕혜옹주봉축비, 최익현순국비 등이 있었다. 시내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범위에 역사 관련된 관광지들을 둘러보았다.
1. 하치만구신사(八幡宮神社)
하치만구신사는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였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내 세우는 진구(神功)왕후를 모신 신사였다. 진구황후는 누구인가. 고대 일본의 여걸로 추앙받는 전설적인 여인이다. 일본의 역사서에 따르면 진구황후는 일본 15대 천황인 오진천황을 임신한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정벌했다. 이를 기회로 임나(가야)에 일본부를 설치 200년간 한반도를 다스렸다는 얘기이다.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 하기위한 설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 근거를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을 몰랐다. 진후왕후가 본토로 돌아가는 길에 대마도에 들렸다하여 이 신사에 모시고 있는 것 같았다. 대마도가 우리나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여러가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하치만신은 일본의 대표적인 신 중 활과 화살의 신으로 알려졌다. 예로부터 무사들이 숭배하는 신이었고 병사와 어부들을 보호하는 신으로 추앙하고 있었다. 일본 전역에 4만여 곳 넘게 존치한다고 했다. 자연재해 때문에 신과 신화가 많은 나라 일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사 입구에는 개를 닮은 조각상 두개가 신사를 지키고 있었다. 암컷은 입을 다물고 있고, 수컷은 입을 열고 있는데, 이는 만물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것이란다. 고마이누(고려견)이라 불리며 한반도에서 전해져서 남아 있다하니 더 관심이 갔다. 매년 8월 15일에 하치만구대제행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하치만구신사 내에는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종의지)의 부인 코니시 마리아의 영령도 모셔져 있었다. 일본인으로 마리아란 이름이 특이했다. 그 녀는 임진왜란 때 육군 선봉대장이었던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딸이다.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를 신봉해서 마리아라 불리었던 것 같다.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명으로 대마도주와 정략결혼 했었다. 풍신수길이 죽은 다음 군부 간에 싸움이 일어나면서 그녀의 운명에 검은 구름이 끼었다. 풍신수길의 아들 히데요리를 따르는 무리와 새로 정권을 잡으려는 도쿠가와 이에나스(덕천가강)파 간에 벌어진 전쟁 속에서 히데요리가 패배하자 그편에 섰던 소서행장이 처형을 당했다. 장인의 몰락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마리아와 이혼하고, 그녀를 나가사키로 쫓아내버림으로써 덕천가강으로 부터 신임을 얻는다.
이런 약삭빠른 행동으로 소 요토시는 대마도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0만석 급에 해당하는 영주가 되었으며, 제1대 대마번주(對馬藩主)가 되었다. 반면 마리아는 아버지를 잃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한을 안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삶을 마감 했다. 훗날 대마도 사람들이 그녀와 그녀아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여기에 작은 신사를 세워 주었다.
2. 가네이시(金石) 성터
불행했던 여인의 행적은 다른 곳에 또 있었다. 대마번주가 관장했던 가네이시성터 한구석에 “李王家宗家御成婚記念碑”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 비가 서 있었다. 여기서 李王家는 조선의 왕가를, 宗家는 대마도를 다스리던 소(宗)씨 가문을 말한다. 즉 이씨 왕가와 소씨 가문의 혼인을 축하하는 기념비였다. 그 주인공이 바로 고종황제의 고명 딸 “덕혜공주”와 대마번주 후손인 소 다케유키였다.
덕혜홍주는 고종의 후궁인 양귀인의 소생이다. 7세 때 부친인 고종이 승하하였고, 14세 때 유학이란 명목으로 일본으로 보내졌다. 이국 땅 낯선 사람들 틈에 살면서 마음에 병이 싹트기 시작했다. 유학 이듬해 자기를 아껴주었던 큰 오빠 순종이 죽고, 몇 년 후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는 불행을 경험한다. 그 후 덕혜공주는 정신분열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때 일본 정부는 덕혜옹주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배필을 정해 통고한다. 도쿄대학 영문과 학생이던 23세 청년 소 다케유키였다. 덕혜옹주는 19세,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년이 지났을 때었다.
두 사람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두 사람 사이에 마사에라는 딸도 낳고 잘 사는 모습을 보인 시절도 있었다한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정신분열 증세는 심해져 병상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국 우리나라가 해방 된지 10년 뒤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고, 그 충격 때문인지 하나 뿐인 딸이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취를 감춰버린다. 겹치는 불행 속에 모진 목숨을 이어가던 덕혜옹주는 1962년 귀국길에 올라 한국인으로 호적을 만들었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다가 77세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도쿄에서 결혼한 덕혜옹주 부부는 그해 대마도를 방문하자 대마도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이에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에서 성금을 모아 결혼 기념비를 세웠고 일본인들은 기념식수도 했다. 그러나 덕혜옹주가 다케유키와 이혼하자 일본인들은 비석과 나무를 뿌리 채 뽑아 없애 버렸고, 그 흔적도 묘연했었다. 최근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 관광선을 띄우고 관광객이 불어나자 이를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한다. 원래 비를 세웠던 자리는 현재 서 일본 은행자리였다. 약삭빠른 일본인들의 이중적인 자세에 대한 혐오의 심정과 함께 나라 잃은 백성이 겪었던 서글픔을 생각하며 한동안 비석을 응시해야했다.
가네이시성터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세를 끼고 있어서 풍수적으로는 명당의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통신사가 도쿄로 갈 때면 반드시 대마도를 거쳐 갔다. 이때 가네이시 성에서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여 무사히 본토로 갈 수 있게 도와야 했다. 그 때문에 성곽을 개축하고, 고려문을 세우는 등 조선과 일본사이 우호관계가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대마번주 제도가 폐지되면서 가네이 성도 주인을 잃게 되었다.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한국인들에게는 관광필수코스가 되었다. 대마번주가 기거하며 대마도를 통치했던 건물터에는 백색의 건물이 서 있고 현재 체육관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그 역사 깊은 장소에 체육관을 세우다니! 역사인식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주인 잃은 성터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아 나그네의 마음이 더욱 쓸쓸했다. <가네이시 성터 정문>
3. 니카라이 토스카 기념관
가네이시 성터를 나온 후 찾아 간 곳은 나가무라지구의 무가저택거리에 있는 니카라이 토스카 기념관이었다. 무가저택거리는 이시하라가 섬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조성된 거리였다. 원래 대마도의 거점은 미네마치사가였다. 10대 대마도주였던 사다쿠니가 이시하라로 옮겨와서 새 저택을 지었다. 그것을 표본으로 마을을 정비하였던 관계로 무가저택거리라 부르고 있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많은 돌담이나 대문 등이 당시 무가저택의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여기에서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니카라이 토스이가 태어났고 그의 생가가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그는 의사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와서, 그곳 왜관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바람에 한국어에 능통했던 모양이다. 도쿄의 아사히신문사 기자가 된 후 서울과 부산에 파견 근무도 했으며, 우리나라의 춘향전을 번역하여 일본의 아사히신문에 연재함으로써 인기소설 작가로 등장했다. 가는 날이 월요일이어서 기념관 내는 들어 가 볼 수가 없어 그의 행적에 대한 자료들을 둘러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그의 제자요 여류소설가였던 히구치 이치요와의 일화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니카라이 토이스 생가입구>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근대여성문학의 선구자이며, 일본 5천 엔 화폐의 도안 인물로 등장할 만큼 유명했다. 20세에 “어둠의 꽃”이란 작품으로 등단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25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던 불운의 작가이기도 했다.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이 사업실패와 사망 그리고 정혼자로부터 파혼 등 불운이 닥쳤다. 17세의 나이에 호주가 되어 가정을 책임져야 했기에 짧은 일생동안 가난의 저주를 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오직 원고료를 받을 욕심으로 집필했었다. 허지만 소설가로서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고액의 원고료는 이치요의 탄생을 재촉하는 촉매제였고, 니카라이 토스이에게 사사 받으면서 보다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고, 유명세를 띄게 했다. 그녀의 사망 후 발견된 일기 속에 니카라이 토스카에 대한 연모와 애절함이 숨겨져 있었다 한다. 조선의 허 난설헌처럼 타고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일찍 사라져간 운명 앞에 애석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1부 끝
첫댓글 대마도 방문기 자세히 잘 소개했습니다. 대마도를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자세히 알 수는 없었는데 세밀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전 대마도 여행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역사적인 의미보다 휴식이 먼저였는데 글을 읽고 많이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