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앞서 백제는 병력을 파견하여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고 호적을 정리하고, 왕위와 작위를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에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그 후 문자호태열제 명치 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진흥치 못하매 권익의 집행이 고구려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성읍을 구획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나라가 또 군대를 이르켜 난리가 났다.
남북이 소요하여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 지니 해독은 백성에 미치게 된지라, 열제는 몹시 화를 내어 삼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나라왕 양견이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위충 총관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 위충을 사로잡아 죽이니, 산동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기사에서 대륙의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가 어디였는가가 명백히 들어난다.
즉 수나라는 내몽고와 한반도 북부지방에 있었던 선비족으로 지금의 북경인 요동을 차지하려 하였으며 호시탐탐 산동지방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으나 그 지방 즉 제,노,오,월나라가 있던 지역은 원래 백제가 차지하고 있다가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자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고,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중 백제는 한때 수나라의 향도가 되려한 이유가 이 지역이 원래 백제의 영토이었던 까닭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 홍무9년(598) 이 해에 양견은 또 양량왕 세적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 이르지도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구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서 웅거하여 전함 수백척을 징집하여 동래로 부터 배를 띠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 차리고는 후군으로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수나라 양광은 본래 선비의 유종족인바, 중원을 향한 욕심에 상국(고구려)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홍무25년(614)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 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겹 포위케 하였다.
여기에서 비사성은 어디인가? 고구려 장안성 남서쪽의 상락군이다 즉 황하를 거슬러 오다가 낙양성에서는 낙수를 거슬러 오르게 되는데 이 상류를 상락이라고 부른다.
위의 지도가 하남성 황하의 흐름이다. 하남이란 지명이 황하의 남쪽지방이란 뜻이고, 상락上洛이란 지명은 낙수의 상류라는 지명이며 이 상락이 상주가 되며 원래는 沙伐國이란 나라가 있었고, 고구려의 비사성이 된다.
후에 신라의 商州가 된다. 지도에 상주라는 지명이 뚜렸하다.
위의 지도의 상주가 고구려의 비사성이였다.
고구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야흐로 평양성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광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도 전에 갑자기 소매속에서 작은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 하여 작은배로 갈아 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 시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