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李存勖。
이씨는 공겸을 차용사로 임명했고 공겸은 백성의 재물을 모아 이존필을 모시기 위해 돈을 쓰자 번진을 돌아 장령(長。)을 거쳐 곧바로 주(州)현으로 내려가 조세를 독촉했다.공겸을 탄핵한 번진의 조정제도 위반에 대해 이 씨는 조칙을 내리면서 제도에 따라 일하라고 하면서 공겸이를 가만두는 모습을 보여 민심을 수렴하는 데 실패했다.위나라 백성이 너무 자주 가차없이 굴어서, 이씨는 위나라 관리 조계량에게, 조계양은 하남을 언제 평정하고 싶냐고 되물었고, 이존호는 화가 나서 "당신의 직책은 세금을 독납하는 것이다.조씨는 "하남을 챙길려고 해도 백성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으면 허베이(不属于北)도 당신 것이 아닐 텐데 하남(?"南)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했다.이씨는 조계량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화가 갑자기 가라앉아, 그제야 약간의 세금 징수를 유예하였다.
리존유는 유인공 부자를 멸하고, 북으로 거란을 쳐서, 다시 뒷양을 멸하고, 아버지의 세 화살이 대표하는 세 가지 버킷을 맺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교만해져서, 더 이상 상대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구속하지 않았다.이상 사람을 쓰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것도 교만하고 방종한 하나의 표현이다.공겸 같은 축재의 신을 임용하는 것은 향락을 위해 흥청망청 낭비하는 것으로, 토목을 크게 일으켜서 부화당황한 궁전을 짓고, 또 영인 경진 등 널리 미녀에게 진헌을 구하고, 그 황음의 삶을 만족시킨다.환관, 영인, 간악한 권력을 중용하다가 결국 공신인 숙장들이 기만당해 줄줄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도 이 씨가 비명을 지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곽숭도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큰 잘못인데, 곽숭도는 원래 멸량 공신이었는데, 몇 차례 진언을 하여 이존유를 매우 불쾌하게 하고, 게다가 영인이 모함을 하여, 이존유를 더욱 의심하게 하였다.궈숭타오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씨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시비를 가리지 않았다.
이후 이씨는 영인경진의 참언을 믿고 공신 주유겸 일가를 억울하게 죽였으며, 조정의 공신들은 모두 황공했고, 특히 장교와 사병의 생활이 날로 곤궁해져 처자식이 더부러웠다.당시 사천유공을 평정한 강연수 대장은 곽숭도와 주우겸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사천대란, 강연수 병사가 패망한 뒤에도 쓰촨은 혼전을 계속했다.이때 와교 관을 지키던 위박진 장병은 수비 기간이 끝나 귀진 도중 베이저우를 지날 때 갑자기 귀향 금지를 명했다.이런 상황에서 사천전란과 인심이 요동치자 병사는 조재례를 위협하여 대거 남하하여 청두(邺都, 즉 위주, 후당 창건 후 개명)로 쳐들어갔는데, 이존유문이씨는 평소 의심이 많았던 이사원을 다시 파견해 시위군을 이끌고 징집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사원은 도착하자마자 정세에 쫓겨 거병들이 반격하여 낙양으로 진격하였다.이때도 이 씨는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이명종(李勖)의 호위군은 '종마직(从)'으로 불리며 군대에서 강건한 사졸을 골라 조직한 것으로, 지휘자는 곽종겸(郭)으로, 원래는 영인(。人)이었다.그는 평소 궈숭타오를 숙부이자 목왕 이존의 양자로 여겨 궈숭타오와 이존의가 모두 리존링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궈종겸한이 미워하며 사적으로 교종을 준비하였다.뤄양에서는 우월한 추위로 일부 상병이 반란을 일으켰고, 비밀 누설로 진압됐다.이씨는 곽종겸과의 한담에서 왜 곽숭도와 이존의에 의지하고 왜 병사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느냐고 농담으로 물었다.이것이 곽종겸으로 하여금 이존찬이 눈치 채고, 마음이 더욱 불안하다고 생각하여, 사졸들에게 이르기를 리존勖돈 친군들이 불신하게 하였으니, 북쪽 위박병변을 평정한 뒤에는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헛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모두 위독해져서, 병변이 일촉즉발로 일어났다.이때 이씨가 또 이사원을 따라 출정하라는 것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겠다는 것과 같다.이들 친군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이사원을 납치해 병변을 일으켰다.이사원은 결국 석 감독의 권유에 따라 다시 돌아와 이씨에게 자신을 고백하는 대신 전군을 공격했다.
그제서야 그는 장병들에게 재물로 장사를 시키고, 병사들이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병사들이 금품을 등에 업은 데 대한 고마움 없이 "우리 처자식은 굶어죽었는데 뭘 하겠느냐"고 욕설을 퍼부었다.그는 군사를 이끌고 개봉해 막아섰다가 도중에 이미 이사원에 점령당했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철수했다.사졸은 이미 대부분 도망갔다.이 저삼하사구 사졸이 낙양으로 돌아가시라고 호도하고, 중상을 약속하자, 사졸들은 "폐하께서 너무 늦게 주시니, 우리는 성은에 감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부대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곽종겸은 병변을 일으켜 경성의 주둔군과 혼전(混戰)에 빠졌고, 난군(乱軍)에서는 이존유전(李勖)이 유전(。)에 맞아 숨졌다.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후당장종(李) 이존정(李勖)은 용무다모(武武多)로 허베이(。北) 동서(東北)를 정벌하여 중원 남북을 평정한 후 당멸하였다.하지만 승리가 빠르고 사치를 부리며 망신을 재촉한다.한번 이기면 예전의 고단한 생활을 잊어버리고, 향락할 때가 된 줄 알았으니 안도해야 한다.영인을 총애하는 환관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망치고 사치 황음하여 장병들의 원성을 샀다.3년 동안 하동변강서(。東变西)로 변한 이 씨의 이야기는 교훈으로 삼을 만한 전형이다.근검절약, 근정도치란 나라가 흥망할 때 지켜야 할 준칙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며 집을 지키며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멸량 전투
후당멸후량전전 태세
이씨는 백향에서 위주의 허베이(北北) 지역 점유를 받아낸 뒤 아버지의 임종을 기약하기 위해 양치기 사업을 시작했다.
30만 명의 병력이 유주에 포위돼 후방을 위협하자 그는 먼저 북상해 결국 거란군을 무너뜨린 뒤 후량군과 전략 쟁탈전을 벌이며 황하 연안을 향한 치열한 전략 포인트 싸움을 거듭했다.양유나루와 후류피전, 덕승나루전이다.각 나루를 점령하고 공고히 한 뒤, 양유를 파병해 다시 한 번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자, 과감한 기병(。)을 앞세워 기병의 장점을 발휘하고 장거리 기습을 감행해 일거에 멸했다.
전쟁 과정
양유는 황하의 중요한 나루터로, 바로 후량중진인 郓州를 압박하여 양군이 강을 따라 주둔할 수 있다.정명 3년(서기 917년) 12월, 이씨는 황하가 얼어붙은 틈을 타서 진양에서 위주로 이동하여, 군사를 이끌고 조정성(현 하북신현 남서쪽)을 거쳐 황하를 건넜다.
양유를 통제한 후, 정명 4년(서기 918년) 7월에, 리춘유는 다시 중병을 모아 단번에 남하하여 대들보를 멸하려 하였다.기병은 연하 지역의 양군에 대한 보급을 파괴하기 위하여 병졸을 거느리고 양유를 거쳐 황하를 건너, 郓州(현 산동 동서북)濮州(현 하남鄄城北)를 공격한 후 강을 따라갔다.
양군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지자 영하령이 셰옌장을 사살했다.이씨는 틈을 타 수도까지 진격하려 했다.그러나 저우더웨이는 양군이 일장(一将)을 잃고 실력에 지장이 없어 경거망동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그러나 이씨는 듣지도 않고, 먼저 노약자와 가족을 위주로 돌려보내고, 진을 무너뜨린 뒤, 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일거에 거들먹거리게 하였다.하괴는 진군의 의도를 탐지한 뒤 진을 치고 추격했다.후류피(지금의 산동성에 북서쪽)에 도착했을 때, 리춘유는 진을 쳤다.다음 날 아침 일찍 귀신을 쫓는 추병도 도착했다.저우더웨이는 이귀찬에게 진군은 고군고군하고, 또 후량 수도에 가까우며, 전투를 쉽게 할 수 없고, 양군은 막 와서 진군 미건에 도전하고, 진군에 가서 피곤한 후에 편안히 지내라고 건의하였다.이씨는 "예전에는 황하 둔치에서 양군을 만나지 못해 원망했는데, 지금 양군이 오면 뭘 기다리냐.리위안차오(李勖)는 出发중(辎中)에게 즉시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출격했다.주드웨이가 군대를 인솔하여 후원하다.양군이 정렬하여 교전을 벌인 후, 리춘유는 기병을 이끌고 양군을 공격했고 양장 왕옌장병은 적게 패하고 뒤로 물러났다.대열에 서 있던 진군 야중부대는 양군이 협공하러 온 것으로 착각하고 황급히 주드웨이 진영으로 후퇴해 혼란을 일으켰다.양군은 이 틈을 타 돌진해 저우더웨이 부자를 전사시켰다.진군의 사상자가 막심하자, 이씨는 그제야 정세를 바로잡고, 조금은 진을 잡은 뒤 기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양군의 고개를 빼앗았다.
이때 황혼이 다가오자, 리춘위와 중장은 모두 군사를 거두고 병영으로 돌아가 휴식할 생각이었으나, 이사소는 진군이 양군 관할에 깊이 들어가 각 방면에서 불리할 것이며, 퇴영하면 양군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그는 군영을 짓고 있는 양군 보병을 기병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왕언장의 기병은 물러갔고 산 아래에는 보병만 있었기 때문이다.이때 적은 수의 기병으로 기습해 보병들이 저녁 식사를 할 수 없게 하고, 후퇴하는 틈을 타 다시 맹추격하면 일거에 섬멸할 수 있다.리는 정신을 가다듬은 후 즉시 이사소등솔기병에게 선제 출격을 명령하고 자신은 대부대 증원을 감독하였다.량쥔은 진군이 다시 급습해 추격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진세는 순식간에 대란을 일으켜 3만 명 가까이 섬멸됐다.
후류피, 리춘유는 1명의 대장을 잃었지만 결국 승리했다.그러나 양측 모두 3분의 2 가까운 사상자를 낼 정도로 피해가 컸다.진군은 재진입할 힘이 없어 위주에 복귀하여 휴식하였다.이씨가 일거에 대들보를 끊으려던 계획은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양군의 실력이 아직 남아 있고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게다가 리춘유는 모험을 감행해 승리했지만 완승은 아니었다.
정명 5년(서기 919년) 정월, 이존심(李存) 진군장병은 점덕승(。)을 이끌고 강을 사이에 두고 두 성 수비 나루를 쌓았다.진량은 덕승나루 싸움을 시작했다.4월에는 양장하구이가 진군의 덕승점유에 대한 위협이 크다고 보고 덕승을 공략했다.진군이 강에서 증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함 10여 척을 황하 위에 연결해 횡단하고, 전함 위에 소가죽을 뒤집어씌우고, 방어벽을 쌓았다.이씨는 300대 결사대를 이끌고 배를 타고 양군의 전함 속으로 들어가 밧줄을 끊고 나무로 만든 큰 통에 땔감을 채워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뒤 물길을 따라 떠내려간 뒤 병선으로 공격했다.양군은 대부분 익사하거나 불에 타 죽었다.제1차 덕승나루 보위전은 진군의 승리로 끝났다.
오래지 않아 고괴가 병들어 죽자 양말제는 윤왕조를 개봉하여 북면 행영으로 모사하도록 명하였다.오만도하(澶)와 위주(魏州) 일대를 습격한 왕정(王瓒)이 하남으로 철수한 뒤 덕승나루 상류 18리 양촌집하(。)에 보루를 쌓고 부교를 만들어 하남과 연락한다.리춘진(李。) 진쥔(李李)이 맞서고, 덕승나루터에 부교(浮橋)를 세우고, 수비를 강화해 장차 대부대가 도하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이씨는 대규모 남진을 위해 먼저 덕승북성을 확장해 둔병 준비물자를 마련했다.양군을 습격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황하남안을 따라 서진해 양군의 보급부대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양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패퇴해 부귀를 얻었다.며칠 뒤 그는 주력을 이끌고 양군과 황하남안에서 맞붙어 왕정소 양군을 대파하고 만 명을 섬멸했다.진군은 또 승승장구하여 濮양을 공략하였다.胜양은 덕승나루 남쪽에 위치해 덕승 고수에 대한 전략 포인트를 하나 더 추가했다.양말제는 왕이 패배하자 다이쓰위안으로 대신하여 북면 행영으로 토벌사를 모았고, 영병은 황하남안에 주둔하여 진군의 남하를 견제하고 저지하였다.덕승전은 결국 진군이 승리해 향후 전략 전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양유를 점령한 진군에서부터 후류피 전투, 그리고 덕승나루 쟁탈전까지 황하 연안 전략 요충지인 양군과의 전쟁을 전후하여 2년 동안 계속하여, 양쪽 병력을 십만 명 가량 끌어왔다.교전 초기에는 양군이 이들 거점과 나루터를 점유하고 있고 후원이 충분하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진군의 공략 이후 새로 얻은 허베이(河北) 지역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후량(后) 수도의 가장 큰 장벽인 황허(河)를 뚫고 후량(。)에 치명적인 위협이 됐다.이후 이씨가 기병(。)을 출사(勖)해 후량(后)을 멸할 수 있었던 것은 진군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점, 특히 중요한 나루터를 차지한 점과 관계가 깊다.그러나 진군은 산천의 지형에 한정되어 기병의 우세를 발휘하지 못하고 양군의 주력을 섬멸하고, 자신의 인명피해도 커 후속의 힘이 부족하여, 일거에 남하하여 수도를 교란할 수 없었고, 이것이 양측의 힘을 비축하게 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