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일본에서의 상황(자료14-이수정)

알렌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로스 선교사를 통해서 만주에서 성경번역을 하게하셨는데 일본에서 역시 성경번역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인물이 이수정입니다.
이
수정은 한국의 유학자로서 상당한 학문적 소양과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체류할 동안 9개월 만에 일본어를 능숙하게
터득을 했고, 그가 한시를 한번 쓰면 일본 학자들이 서로 다투어 그것을 얻으려고 했을 정도입니다.(니지마조 생가의 병풍,
윤종주, 정지용, 교토 동지사대)
이런 이수정을 일본 정부는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 선생으로 이수정을 채용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자료15)

1882
년에 조선에서 임오군란이라는 큰 사건이 터집니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을 중심으로한 수구파와 민씨 집안을
중심으로한 개화파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대원군의 수구세력은 정치에서 많이 밀려나고 개화파가
많이 득세했습니다. 이러던 중 1881년에 개화파가 일본의 후원을 받아서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창설합니다. 그러데 문제는 이
별기군과 기존에 있던 구식 군대간에 차별이 심했습니다. 대원군이 정치 무대에 있을 때는 구식 군대에 대한 대우가 굉장히 좋았는데
지금은 벌써 13개월째 군료가 밀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오랜 만에 1개월치의 급료를 쌀로 받았는데 그 쌀을 보니까
모래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구식 군대가 들고 일어나서 민씨 세력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는데 이 사건이 ‘임오군란’입니다.
이때 성난 민중이 궁궐까지 들어가서 왕후를 죽이려고 했는데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명성왕후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이수정이라고 합니다.그래서 나중에 고종황제가 이수정을 불러서 감사의 표시로 일본유학을 시켜주 게 됩니다.
(자료16)

이
수정이 일본에 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이 일본의 농학자 ‘츠다센’입니다. 그것은 이수정이 농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개화파 인물인 안종수라는 친구가 츠다센을 꼭 만나보라고 했기 때문인데, 츠다센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농업 지도자를
육성함으로써 일본 근대 농업의 창시자라라는 칭호를 받은 초기 일본 기독교의 매우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츠다센과 교분을 쌓아가던중 이수정은 츠다센으로부터 한문성경을 선물받게 되고 그때부터 그의 마음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수정이 하루는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꿈 속에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다른 한 사람은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옆구리에 한 보따리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수정이 그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들은 “이
책들은 당신네 나라를 위한 무엇보다 가장 귀한 책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이수정이 그게 무슨 책이냐라고 묻자
“성경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낙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처럼 성경은 이수정을 개종하도록
만든 도구이면서, 동시에 개종 후에는 그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예기치 못하게 로스 선교사가 우연히 만난 50대
상인에게 준 한문 성경이 그의 아들 백홍준과 친구들을 변화시켰고, 또 전혀 다른 나라 일본에서 유학의 대학자인 이수정이 성경을
보고 회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선교를 위해 준비 작업을 튼튼히 하십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자 당시 미국 성서공회의 총무였던 루미스(자료17)는 이수정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 어떻겠냐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이 때 이수정이 비로소 모든 민중이 쉽게 볼 수 있는 한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선교본부에 미국인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당시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는 이것을 ‘한국의
마케노니아의 부름’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이수정의 이런 끈질긴 요청으로 인해 본래 조선 선교계획이 없던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
언더우드를 급히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주에서는 서상륜이 로스 선교사에게 조선에 와서 세례를 주라고 요청하고, 지금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미국장로교본부에 선교사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료18)

그
래서 이수정은 언더우드의 조선입국에 앞서 성경번역을 마치려고 했고 결국 그가 번역한 한글 마가복음이 1885년 <신약전
마가복음서 언해>라는 제목으로 요코하마에서 인쇄가 됩니다. 그리고 그 해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를 만나 수개월간 열심히
조선어를 가리켜 주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그 성서를 들고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한국 교회가 100년만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어는가 미스테리로 여깁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로 우연이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치밀하게 준비하신 것들이 열매로 맺어진 겁니다. 우리
나라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미국에서의 상황
한편 미국에서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중요한 만남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해 두셨습니다.
제네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간에 신미양요(1871년 5월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5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남)가 일어나고
1882년에 한미수호조약이 맺어집니다. 조선이 서양과 외교를 시작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비밀조약, 이 비밀조약은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때 일어났음,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31대 대통령 /11월 을사늑약)
그 후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을 역임한 푸트를(자료19) 전권공사로 임명한 후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 조선에 보냅니다.

그리고 푸트는 국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조선에서도 미국에 사절을 보내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고종은 겨우 27살밖에 되지 않은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임명한 후 평균 25가 안된 청년들로 구성된 ‘견미사절단’을 미국에 보냅니다.(자료20)

사절단은 1883년 7월 16일 제물포를 출발하여 요코하마를 거쳐 9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이틀 후 사절단은 대륙횡단 철도를 이용해서 시카고, 뉴욕 등을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여 미국 21대 대통령 ‘체스터
아더‘를 만납니다. 그 후 민영익, 서광범, 변 수 등은 유럽을 돌다가 그 이듬해 5월에 귀국하고 나머지는 12월에 모두
귀국합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가는 도중에 중요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기차안에서 민영익이 훗날 감리교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존 가우처 박사를 만난 겁니다.(자료21)

가우처는 볼티미어 여자 대학의 창설자입니다. 이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은 참 많은 대화를 나누고 민영익은 기독교에 대해서, 가우처는
조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민영익이 기독교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가 갑신정변때 알렌 선교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것도 있지만, 이 가우처 박사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데 민영익은 그때
기독교를 발견한 것입니다.
가우처 역시 민영익과의 만남을 계기로 1883년 11월 6일자로 감리교 와일리 감독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면서 선교헌금 2천불을 보냅니다. 그리고 일본 선교사로 있던 맥클레이에게(자료22) 한국을 방문해서 선교 가능성에 대해서 직접 확인해 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맥클레이가 가우처의 요청으로 1884년 6월부터 2주간 한국에 다녀왔고 고종으로부터 미국의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허락받습니다. (자료23)

그래서 감리교에서 1884년 말에 교육사업을 위해 아펜젤러를 의료사업을 위해 스크랜튼, 스크랜튼의 어머니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이들은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제 드디어 개신교 선교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짧은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한국 선교를 위해 얼마나 세밀하게 준비해 주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한국
초창기 선교의 역사만큼 확실한 ’여호와 이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풍족하게 살아갈 수있는 것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와 많은 분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내가 잘해서 성공했고, 나 혼자 잘나서 안락함을 누리고 있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물론 자신의 행복을 많이 좌우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환경을
만들어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분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을 인정한다면 내가 가진 것을 나보다 생활이 힘든 분들을 위해, 사회를 위해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부유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세금을 많이내고, 사회적 책임을 더많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억울한 것이 아닌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 신분에 상응해서 마땅히 사회, 도덕적 책임을 감당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은혜를 베풀줄 알고, 사랑을 받아본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는데 최소한 여기 있는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두 받고 계신 분들 아닙니까?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도 우리 개개인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우리에게 공통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초기 선교역사가 바로 이런 공통된 은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교인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