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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계절의 좋은 시조>
우현 김민정
비밀번호
문무학
있었으면 좋겠네, 있었으면 좋겠네
내가 꾸욱- 누르면 네 가슴이 확 열리는
아, 그런
비밀번호가
있었으면 좋겠네
있었으면 좋겠네, 있었으면 좋겠네
네가 꼬옥- 누르면 내 가슴이 확 열리는
아, 그런
비밀번호가
있었으면 좋겠네
있었으면 좋겠네, 그대 알고 나만 알아
꾸욱, 꼬옥 누르면 두 가슴 엉키고 마는
정말로
그런 번호가
있었으면 좋겠네.
이 시를 읽으면서 시 읽는 재미를 느꼈다.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는데, 말하듯이 자연스러운데, 그리고 반복되는 시어도 많아 새로운 시어도 별로 없는데 왜 재미있지? 또한 현대 감각이 잘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 시를 읽으면서 핸드폰을 연상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니겠지? 그렇지 않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요!요!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먼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고, 오래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마음에 와 닿는 또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독자가 이 작품 속으로 빨려들어와 화자의 생각에 동참을 하게 된다는 데 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진솔한 감정이 꾸밈없이 나타나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공감을 하게 된다.
현란한 수사법도, 특별히 신선한 어휘도 없고, 감추거나 비비꼬거나, 독자를 낯설게 하지도 않은 단순한(?) 작품 같은데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문학작품은 내 사상, 내 감정의 발로이기는 하지만, 독자의 심리파악을 잘 해야만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 창작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좋은 작품의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은 되리라고 본다. 위 작품은 재미있다고 느끼면서, 또한 공감하면서 읽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할아버지 눈썹
이승현
청록의 솔잎보다 물 빠진 노엽(老葉)에는
광야에 바람소리 깊은 결 녹아 있다
함부로 범접치 못할 금강송의 기개처럼
아들아,
새겨보아라
축축한 네 눈썹보다
성성한 백발 아래 카랑카랑한 저 소리
물기는
다 빠졌다만
서슬 푸르지 않느냐
이 작품에선 할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그 사이에는 아들인 화자가 빠져있지만, 그래도 독자에겐 삼대(三代)가 느껴진다. 첫째 수에서는 '청록의 솔잎보다 물 빠진 노엽에는/ 광야의 바람소리 깊은 결 녹아 있다/ 함부로 범접치 못할 금강송의 기개처럼'라고 지금은 늙으신 할아버지의 눈썹인데도 기개를 느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아직 어리고 앳되어 축축하게 느껴지는 네 눈썹보다 '성성한 백발 아래 카랑카랑한 저 소리/ 물기는/ 다 빠졌다만/ 서슬 푸르지 않느냐'고 말이다.
보통은 늙으면 젊은날의 모든 영광도 과거로 사라지고 초라하고 추하게 늙어갈 수 밖에 없는데, 그러나 이 화자가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선 아직도 '서슬 푸름'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러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아들에게 얘기해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설의법의 사용으로 내용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무릇 역사는 온고지신의 역사가 아닌가. 조상의 슬기, 기개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새롭게 역사를 창조하고, 새로운 전통도 만들어가고, 더욱 푸른 기개도 만들어가야하는 것이리라.
한 장의 노엽(老葉)을 할아버지에 비유하여, 자칫 업수이 여길 조상들에 대한 생각을, 망각되어가는 우리의 전통인 효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싶어하는, 강조하고 싶어하는 화자의 웅숭깊은 마음을 들여다 본다.
간밤에
이원식
꽃바람 불고 *달소수
벚꽃 눈이 쏟아졌다
교교한 달 휘어 감는
하얀 휘파람 소리
유리잔 물오른 양파
환(幻) 하나를 꿰뚫었다
*달소수: 한 달이 좀 지나는 동안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제목은 독자를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마흔 일곱 자 밖에 안 되는 글자인데 굉장히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어쩌면 조금 버거워 휘청거릴 수도 있는.
'달소수'란 순수한 우리말을 살려내어,꽃바람이 불고 한 달이 좀 지나자 벚꽃 눈이 쏟아졌다고 한다. 눈처럼 분분히 날리는 벚꽃의 지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거기다 그 벚꽃이 지는 모습을 교교한 달빛마저 휘어 감는 하얀 휘파람 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휘파람처럼 지는 벚꽃... 멋있다. 자연을 관장하는 신이 불고 있는 휘파람일까? 그렇게 밖에서 벚꽃이 지고 있는 동안, 안의 유리잔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양파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신비한 생명의 촉이 하나 트고 있다. 밖에서는 꽃이 지고 안에서는 촉이 트고 있어 의미상 대비가 되며, 긍정적, 희망적인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은 초, 중, 종장 사이 상상의 폭이 대단히 넓은 시조이다. 이런 시조는 상상의 폭이 하도 넓어 자칫 독자들에게 의미의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행히 이 작품은 제목이 그러한 폭을 감싸고 있어 좋은 작품으로 보인다.
詩, 통신1호
-만횡청류(蔓橫淸流)를 위한 따라지 산조 1
정휘립
시(詩)여, 읽을 수도 안 읽을 수도 없는, 지지리도 잘난, 시여, 그대는 왜 그토록 많은 헛소리를 잔뜩 들고 있나뇨
주둥이 가는 어깨 허리춤 엷은 등판 두 손모가지에 물고 이고 지고 메고 얹고 차고 끼고 또 그것도 모자라 윗도리 아랫도리 주머니란 호주머니 뒷주머니 속주머니 윗주머니 동전주머니 조끼주머니 속바지주머니까지 가득 잔뜩 철렁철렁 채워 넣고 울룩불룩 뒤뚱뒤뚱 거리면서도 꽉 쓰러져 엎어질 줄 모르나뇨
황당한 네 배포에 깔려 내 쥐포 될까 하나니
만횡청류를 위한 따라지 산조라니! 도대체 어떤 내용이야! 석사논문이 ‘만횡청류’에 관한 것이라서 그런지 제목의 부제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평소 바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볼 시간이 별로 없어서 작품을 못 읽다가 요즘에서야 ‘뒤틀린 굴렁쇠 되어’란 시집을 읽어보았는데 많은 내용들이 연시조로 빼곡히 들어차 있어 한 줄 한 줄 글자를 따라가며 읽다가 가끔은 고개도 끄덕이고, 가끔은 비판적인 조금 삐딱한 시선(?)을 만나기도 했었다.
역시 위 시조도 초장부터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시작된다.‘시(詩)여, 읽을 수도 안 읽을 수도 없는, 지지리도 잘난, 시여, 그대는 왜 그토록 많은 헛소리를 잔뜩 들고 있나뇨’라고 초장부터 시에 대한 시비가 아닌가? 수많이 쏟아져 나오는 시에 대한, 시인에 대한, 좀더 냉정하게 자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라고 생각된다. 시인들이 주워 담는 수많은 시어들, 시가 보여주는 모습들, 그렇게 어색하고 많은 내용을 집어넣어 ‘울룩불룩 뒤뚱뒤뚱 거리면서도 꽉 쓰러져 엎어질 줄 모른’다고 시를 비판하는데, 그 내용을 읽으면서 웃음이 나온다. 시에 대한 비판을 하는데도 다분히 해학적이다. 더구나 종장의 ‘황당한 네 배포에 깔려 내 쥐포 될까 하나니’라는 표현도 아주 재미있다. 사설시조의 묘미는 풍자와 해학에 있는데, 위 작품은 그것을 충분히 잘 살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시에 대한 비판, 그것은 달리 말하면 시에 대한 애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定),반(反)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얻게 되는 합(合)의 변증법은 시인이 바라는 시의 참모습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비
권갑하
지난 밤 못다 쓴 시 행간 속에 묻어 두고
우러러 아득한 그리움 온몸으로 젖습니다
거둘 것 하나 없어도 아직은 뜨건 가슴
뼛속 깊이 스미어오는 회한의 하얀 눈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바람찬 세월이래도
말없이 돌아서 가는 뒷모습이고 싶습니다
다 흘러 보내고 나면 여백으로 남을 하늘
끝내 스러질 목숨 보듬어야할 적막이라면
없는 듯 그냥 그 자리 바람 앞에 서렵니다 (『나래시조』, 2006년 겨울호)
봄비가 만물의 생기를 돋아나게 하는 비라면, 여름비는 소나기로 푸른 잎사귀를 더욱 생기 있게 축여주기도 하는 비이다. 그러나 가을비, 특히 늦가을비는 나뭇잎을 떨어지게 하고, 추위를 몰고 오며,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이 시조에서는 가을비 내리는 모습을 보며 시인은 서정적 자아를 발견하고 있다. 첫째 수에서는 가을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지난 밤 못다 쓴 시 행간 속에 묻어 두고’ 온몸으로 그리움에 젖는 화자의 모습이 발견된다. 비록 거둘 것이 하나 없다하여도 아직은 가슴이 뜨겁다는 자기고백적, 독백적이다.
둘째 수에 오면 비의 이미지는 ‘뼛속 깊이 스미어오는 회한의 하얀 눈물’, 로 표현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지나간 날들을 반성해 보는 화자의 감정이입이 들어가 있는 부분이다. 봄, 여름을 다 보낸 가을비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바람찬 세월’ 앞의 ‘회한의 하얀 눈물’로 오는 것이다. 힘든 세월 속에서도 의연하게 ‘말없이 돌아서 가는 뒷모습’ 의 가을비처럼 그렇게 세월을 돌아가는 의연한 모습이고 싶은 화자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다 흘러 보내고 나면 여백으로 남을 하늘은 끝내 스러질 목숨을 안은 적막이다. 그리워했던 그 모든 것도 가을비처럼 흘러 보내고 나면 홀로 보듬어야할 할 것은 남아 있는 적막이며 쓸쓸함이며 상처일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이 있기에 ‘없는 듯 그냥 그 자리 바람 앞에 서렵니다’라는 겸허함과 초연한 의지가 셋째 수 종장에 나타나고 있다. 가을비가 주는 그리움의 정서와 비온 후의 쓸쓸함의 정서까지 포함하고 있는 서정의 자아화, 내면화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침노을
서정택
마치,
죄라도 진 듯
너 보기 미안하다
단 한 번도
조리 들어
물 뿌린 적 없는데
공짜로
얻은 꽃밭이
장미보다 붉고 붉다 (『나래시조』, 2006년 겨울호)
왜 화자는 아침노을을 보며 미안해 하는가. 그것은 단 한 번의 노력도 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공짜로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이 주는 공기, 자연이 주는 사계절, 자연이 주는 햇빛과 눈과 비, 아침노을, 저녁노을, 수없이 많은 꽃과 새와 나무와…이 모든 것을 공짜로 얻어가지면서도 무심히 지나간다.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때로는 감상할 줄도 모르고, 그것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나는 그 곁을 지나는 한 나그네로 존재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면 수많은 꽃들 중에 왕자의 장미 이야기가 나온다. 물을 주고, 가꾸고, 벌레를 잡아주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왕자의 장미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이다’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게 관심을 가져줄 때, 상대방도 사랑의 감정을 갖는 것이거늘, 그러지 못하고 조리 들어 물 한 번 뿌린 적도 없는데 장미보다 붉은 꽃밭인 아침노을을 보여주는 자연이 고맙고, 한편 시인의 양심으로 미안하다고 한다.
평범한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도 고맙다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데, 그 감정을 넘어 미안한 감정에까지 이르고 있어 이 작품이 돋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을 가진 시인은 자연이 주는 혜택을 충분히 이해하고 고마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더욱더 자연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절대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함께 주고 있다.
길보다 낮은 집
박정호
늦은 잠을 깔아뭉개며
차들이 지나간다
송곳처럼 일어선
뽀족한 신경을 피해
덜커덩, 무너질 듯한
무게를 굴리고 간다
길을 걷던 내 몸은
지친 꿈 위에 누웠다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이
또 한 밤을 지나노라면
긁히고 밀린 가슴에
또렷한 타이어 자국……
기우뚱 돌아눕는
방파제 같은 가장의 몸
금 간 벽 하나로
세상과 대치한
길보다 낮은 집 속에
식구들의 부산한 꿈. (『나래시조』, 2006년 겨울호)
‘길보다 낮은 집’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길보다 낮은 집’이란 평균보다 낮은, 중간보다 못한 가난한 생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실존에 대한 인식이 깊이 있게 내재되어 있는 작품이다.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 성립으로 인간의 생활은 영위되는 것이므로 실존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자타에 대한 인식이다.
첫째 수에서 보면 ‘늦은 잠을 깔아뭉개며/ 차들이 지나간다’고 한다. 늦은 잠은 무엇일까. 화자의 꿈을 꾸기 위한 장치일까. 그런데 세상은 화자의 그 잠, 그 꿈을 깔아뭉개며 지나가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에 대해 송곳처럼 뾰족하게 정신은 일어서지만, 그러나 세상은 화자의 그 의식을 피해, 아니 어쩌면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의식 위로 무거운 무게를 굴리며 가고 있다. 냉혹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길을 걷던 내 몸은/ 지친 꿈 위에 누웠다’고 한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 수없이 많은 꿈을 꾸지만 그 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은 분량이고, 자기의 꿈을 이루며 살 수 있는 사람도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다. 그리하여 화자는 지친 꿈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삶의 길을 가면서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이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일에, 사람에 수없이 긁히고 밀리는 또렷한 타이어 자국 같은 상처들만 남는다.
한 가족을 거느리며, 한 가족을 모든 바람과 파도와 해일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와 같은 가장, 그 몸이 기우뚱 하고 돌아눕는 상황이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나약한 ‘금 간 벽 하나’로 세상과 대치한 한 가장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종장에서는 그러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길보다 낮은 집 속에/ 식구들의 부산한 꿈’이 존재한다. 냉혹한 현실 인식과 함께 그것을 극복하려 새로운 꿈을 꾸는 긍정적인 화자의 모습이 이 작품에 존재하기에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날아가는 숭어
한혜영
물수리에 낚아 채인 숭어 훨훨 날아간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채 날아간다.
生死가 한 몸이 되어 기막히게 날아간다.
인간마을 처마 끝에 저런 木魚 많을 거다.
물수리 벼락치듯 꽂힐 때를 기다리는
딱 한번 飛魚가 되어 훨훨 날고 싶어지는.
( 『시조월드』, 2006년 하반기호)
그런가 하면 한혜영은 「날아가는 숭어」라는 작품에서 시적 상상력과 사고력을 마음껏 구사하고 있다. 말라르메의 말처럼 "시는 체험과 상상력의 영역이요 사고의 영역이다"라는 말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났다. 인간의 끊임없는 사고 속에서 시는 탄생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깊은 사유의 천착으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물수리에 채어 날아가는 숭어를 보고 숭어가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것으로 화자는 상상한다. 더구나 '生死가 한 몸이 되어 기막히게 날아간다'고 한다. 물수리와 숭어를 보면서 죽음과 삶의 동반이 의외로 다정해 보인다고 한다. 숭어가 아직 숨을 쉬며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죽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이다. 또 숭어 평생의 소원이었을 비행을 마침내 이루어 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과연 숭어는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을까 궁금해진다. 첫째 수에서는 시각적 감각을 표현하였다면 둘째 수에서는 내면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수에 오면 인간마을에 존재하는, 木魚로 상상이 옮겨진다. 차라리 물수리에 벼락치듯 채여 꽂히더라도 비어가 되어 날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어차피 목어라면 살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하늘을 나는 물고기 또한 상상속의 모습일 뿐이고, 스스로는 결코 날지 못하는 현실이라, 그리하여 비어이기를 꿈꾸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포기한 다음에야, 자기의 목숨을 저당 잡힌 다음에야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헛된 허영심, 헛된 욕망을 경계하는 화자를 만날 수 있다.
외암리 시편(詩篇)
유 권 재
누가 지난 역사를 기록이라 하였나요
어제라는 수레 위에 오늘이 실려 가는
아산의 설화산자락 외암리에 와 보세요.
구태여 기억하려 꺼내보려 하지 않는
다락에 쌓아 놓은 좀먹은 비망록처럼
아득히 지난 내력을 잊은 듯이 살다가
세상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오래 전 그리움이 간절하게 샘솟듯이
소진한 기억 속으로 향수가 스며들면
저물녘 산마루의 자욱한 안개 아래
고가의 밥 짓는 연기 밀어처럼 속삭이는
한편의 과거 속으로 길을 찾아 나서 봐요.
충청남도 아산의 설화산자락 외암리, 이 외암리 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제주도 성읍마을, 경주 양동마을, 강원 고성군 왕곡마을,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맹사성의 고택이 있는 이곳은 삼다(三多)의 마을이라고도 한다. 돌이 많고(石多), 말이 많고(言多), 양반이 많다(班多)는 것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민속축제를 벌이기도 하는 곳이다. 시인은 이 ‘외암리 마을’을 시로 읊고 있는 것이다.
세월은 흘러가고 흘러간 과거의 기록들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려고도 꺼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제가 있어 오늘이 존재하건만, 우리는 어제를 잊은 듯이 살고 있다. 그러다가 현실이 지루해질 때, 과거로의 여행이 그리울 때, 아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스며들 때 아직도 옛 향수를 그대로 간직한 이곳 외암리를 찾아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외암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시인은 마지막 수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수는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짙게 나타난다. 저문 황혼녘 산마루엔 자욱한 안개가 끼고 고가(古家)에선 나무를 때어 밥 짓는 연기가 밀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한 편의 영화 같은 외암리의 고즈넉한 저녁 풍경이 고향집을 보듯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좀먹은 비망록’, 밥 짓은 연기를 ‘밀어처럼 속삭이는’ 등의 참신한 표현이 돋보이며, 작품 전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귀결되고 있다. <『시조문학』, 2004년 가을호>
먼 날의 무늬
정화섭
봄날, 해묵은 김치 통을 비운다
곳곳에 얼룩덜룩 피멍을 들여서
이력서 찬찬히 썼다, 이름 없는 낙관들
장독대 올려놓고 다시 한 번 바라보니
햇살이 핥아주고 바람이 쓰다듬어
깊었던 상처의 흔적 노을처럼 머문다
먼 훗날 아픈 가슴 치유해줄 묘약도
어쩌면 저 햇살과 또한 바람이거늘
내 그때 보여줄 무늬 그마저도 없다면
한국의 정서가 살아나는 작품이다. 첫째 수에서는 긴 겨울 먹던 김장김치통을 비우면서 김치통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씻어도 씻어지지 않고 김치물이 피멍처럼 배어있는 김장통의 모습에서 김치통으로서의 이력서를 읽어내고 있다. 또한
얼룩무늬들을 그곳에 찍힌 낙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수에 오면 그 씻은 김치통들을 장독대에 올려놓고 말리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화자는 '햇살이 핥아주고 바람이 쓰다듬어' 주어 김치통은 상처의 흔적이 사라지며 피멍든 것 같던
보기싫던 모습이 어느새 노을처럼 아름답게 머문다. 셋째 수에 오면 촛점이 화자 자신에게로 옮겨진다. 김치통을 치유하던
햇살과 바람은 먼 훗날 자신의 아픔까지도 치유해 줄 햇살과 바람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 때 보여줄 무늬, 상처의 무늬든
아픔의 무늬든 그것마저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더 외롭고 쓸쓸할 것인가.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상처와 아픔의 무늬까지도
고맙게 받아들이는 화자의 넉넉한 마음, 삶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아름답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나래시조』81, 2007년 봄호 >
정화섭: 경북 예천 출생. 1992년 《문학세곈》신인상, 《시조문학》천료. 시집『봄나비 사랑놀음』『꽃과 새와 벌과 나비』『왔네 봄이 살랑 살랑』
침묵의 개구리
서정아
버려진 바벨탑 그 위엔 아직도
침묵의 개구리가 산다는데
오랜 세월 전, 인간이 세우다가 싸우다가 하던 바벨탑 위를 무심히
오른 개구리 한 마리 있었다지 허무하고 의미 없는 말의 홍수 뚫고
힘차게 폴짝폴짝 제 갈 길만 갔더라네 차디찬 분노로 들끓는 증오의
무리가 사막의 폭풍 몰아 사납게 결별해도 그는, 여전히 오르기를 멈
추지 않았어라 마침내 개미떼 되어 흩어져 가는 그들을 굽어보며 날
렵한 솜씨로 파리 몇 마리 해치울 때도 말 한마디 필요 없던 그 개구
리가
지금도
그 큰 눈 끔뻑이며
인간 군상 바라보고 앉았다는데......
바벨탑이라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전설상의 탑이 소재가 되고 있어 이채롭다.
아니 그 탑위에 아직도 눈만 끔뻑거리며 인간을 바라보는 개구리가 소재가 되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의 허상을 풍자하고 있는 사설시조이다.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올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 허무하고 의미 없는 말의 홍수 속에 시인들은 시어의 탑을 얼마나
높이 쌓고 있는가. 정치가들은 정치가들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들대로, 장사꾼은 장사꾼대로
얼마나 많은 허무하고 의미없는 말을 남발하며 살고 있는가. 그런 가운데 개구리 한 마리
세상물정과는 상관없이, 세상사와는 아랑곳없이 '자기 길만 폴짝폴짝'가고 있다. 저 잘났다고, 하늘에 오르는 바벨탑을 쌓겠다고 큰소리 치며 싸우던 인간 군상들이 개미떼처럼 흩어져 가는 모습을 굽어보며 지금도 짓다만 바벨탑 위에 '그 큰 눈 끔뻑이며/ 인간 군상 바라보고 앉았다는데......'로 여운을 남기며 작품을 끝내고 있다. 이러한 종장의 기법은 독자의 상상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인간의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는 풍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큰 눈만 끔뻑이는 생각없어 뵈는 개구리(?)가 해학성을 지니고 있어 재미있다. <『시조시학』22, 2007년 봄호>
서정아: 1997년 현대시조 신인상 당선
강원시조문학회, 강릉문학회, 관동문학회 회원
시집으로는 『내생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시면』
빚
박시교
살면서 내가 진 빚이 너무도 많구나
평생을 등짐 져
갚아도 다 못 갚을
그 빚을 얼마나 더 지려고
오늘을 또 살았다
거느린 식솔들이야 연의 굴레 썼다지만
가난한 주변머리로 쓴
고작 몇 줄의 시
그것이 드넓은 천지에
무슨 보탬 되겠는가
새삼 사는 일이 숙연해지는 오후 한때
눈 감고 생각느니,
산(山)같이 우람한 저 빛
그 아래 풀벌레처럼 엎드려
오오, 곡(哭), 곡할밖에. (유심, 2007 여름)
시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매일을 사는 것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을 살아내는 것은 또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빚이 되는 것이다.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의 자세가 나타난다. 시인이 한 일이란 '가난한 주변머리로 쓴 고작 몇 줄의 시'가 전부인데 그것이 드넓은 천지에 무슨 보탱이 되겠는가고 회의한다. 남에게 보탬이 되지 못하는 삶이라고...그래서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사는 만큼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함께 사는 식솔들이야 인연의 굴레 때문이라고 치고...
그래서 시인은 사는 일이 새삼 숙연해진다고 한다. 삶이란 우람한 빛 앞에 풀벌레처럼 엎드려 울며 곡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드넓은 우주공간과 무한한 시간 앞에 왜소한 인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느껴보게 하는 시이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숙이듯 자연앞에 겸허해지는 인간의 모습, 젊어서는 오만과 패기도 부려보지만 결국은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과 시간 속에 잠시 살다가는 것이 인생임을 깨닫는 나이, 지천명을 넘어야 알 수 있는 깨달음이 아닐까. 누구의 삶인들 특별히 뾰족하겠는가. 한 편의 깨달음의 시를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세포자멸사를 생각하며
장명웅
육십 조(兆) 한 목숨의 가녀린 세포덩이
갈래갈래 쓰임새 따라 맡은 일 다 달라도
정겹게 밀고 당기며 끌고 가는 수레바퀴.
거친 광야 아우르며 굽이굽이 재를 넘고
골골이 쌓인 응어리 흔적 없이 삭혀 주며
허욕의 너울 벗고서 홀로 걷는 의로운 길.
후미진 자갈밭 길 수신호로 알려주며
지켜야 할 식솔들이 어려움 당할 때면
한 목숨 버려서라도 구해내는 참 사랑. (나래시조 82, 2007 여름)
장명웅 선생님의 글 '의학과 시조의 아름다운 만남' 속에 있는 작품이다. 의사답게 의학적인 면에서 시조의 소재를 찾았기 때문에, 소재면에서 매우 신선한 면이 있었다. 이 작품 외에도 '흰피톨', '암세포', '독감 바이러스' 등의 작품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의학상식들이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 다른 시조에서 맛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신선한 느낌과 감동을 받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충실하고 그것을 이렇게 시조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일까. 이러한 모습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간다면 시조는 명실공히 국민문학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낯선 소재를 다루었음에도, 그리고 시조로 등단한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시조로서 어색한 부분이 별로 없다는 데에 또한 놀랐다. 언어가 어색함 없이 놓일 자리에 놓여 자연스럽게 소재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 작품은 자기를 희생하며 참사랑을 구현하는 신비로운 인체의 세포자멸사를 예찬하고 있다. 자기의 기능을 다 한 후에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희생이 있기에 우리는 건강한 몸으로 새로운 세포를 만들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에도 세포자멸사와 같이 자기희생으로 남을 살리는 미담이 많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아름답다.
폐광산촌에서
현상언
산기슭 솔향기에 솔숲이 술렁이고
기울어진 햇빛에 가을이 쏟아지는
과거가 고요히 환화(幻化)된 폐광마을 갔었네
아들은 광산에서 금빛 금속 캐내었고
아버진 논밭에서 금빛 옥토 일궜다는
한사코 발길 붙잡던 지팡이 할배 만났네
"예기가 우리 턴데 내 사는 곳인데
우리가 맹근 곡식, 먹어두 탈이 웁겄너?"
토양에 엉긴 사투리, 무겁게 내려앉았네
땅심도 사람의 일이라 사람 손을 탓을까
가난을 못 이기고 주름 세월 흩어진 가족,
막걸리 서너 사발을 푸념 대접 받았네
"곡식 여무는 모냥이 알싸하지 않응기
폐석가루가 퍼져뿌러 그렁 기 아니너?"
떠날 때 떠나지 않고 이렁저렁 흘러간 구름
빈 하늘 채우려고 바람 불어 달 뜨는가
서리서리 반짝이는 중금속의 그림자
억새풀 산발한 머리, 그 눈물 가리고 있었네 (유심, 2007년 여름호)
폐광산촌은 광산이 폐광되어 경제적 침체로 힘이 드는데, 가까스로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토양이 중금속에 중독되어 있다는 등의 발표일 것이다. 폐금속 광산의 경우에 납과 카드뮴 같은 인체에 해로운 중금속이 과다 검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뉴스를 보면서 폐금속 폐광촌이 아닌 탄광 폐광촌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왜 폐광촌이라고 하여 탄광촌의 사람들까지도 도매금으로 넘기고 있는가 싶었다. 자세하게 모르는 사람들은 폐금속 광산촌이 아닌 탄광광산촌까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닌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탄광 폐광촌은 납이나 카드뮴이 나올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 시는 폐광마을에 갔던, 그리고 그곳의 한 할배와 나눈 이야기가 바탕이 되고 있다. 그곳이 중금속이 검출되는 폐금속광산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시인은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예기가 우리 턴데 내 사는 곳인데 / 우리가 맹근 곡식, 먹어두 탈이 웁겄너?"라고 농사지은 곡식을 걱정하는 한 노인을 만나는 것이다. "곡식 여무는 모냥이 알싸하지 않응기 / 폐석가루가 퍼져뿌러 그렁 기 아니너?" 알싸하다는 말은 '매운 맛이나 냄새 때문에 혀나 콧속이 알알하다.'는 의미이다. 입맛을 돋구게 하는 긍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는 말인데, 여기서는 노인의 말에서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기네가 키운 곡식조차 신뢰할 수 없는 불안한 폐금속 광산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폐금속 광산촌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억새풀 산발한 머리, 그 눈물 가리고 있었네”라고 폐금속 광산촌의 모습을 안쓰러워하고 연민하는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