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Adam씨(University of Texas Medical Branch에서 의사 및 교수를 역함)
이 사진을 공개한 사람은 미국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이 Adam씨와 친분이 두터워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것을, 본인(안명호)이 당시를 회상하며 설명을 곁들여 재편집하였다.
잊을 수 없는 그 시대 (연재1)
사진 : Adam씨
기독교 봉사단으로 온 미국인 Adam씨가
1954년 ~1955년에 촬영한 것으로,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당시
생활의 고난을 읽을 수 있는 사진이다.
(글 및 편집 : 오정 안명호)
머리글
여기에 수록된 사진은 미국의 한 기독교 자원봉사자가 한국의 대구에서 1954년부터 1955년까지 약 2년간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촬영한 수 십장의 사진을 편집하여 소개한다. 이 시기에 나는 전남 광주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이 사진속의 장면은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자원봉사활동과 관계되는 내용을 주로 촬영한 것이며, 그 당시 이보다 더 비참하고 어렵게 생활한 것은 이 사진 속에는 없어 보인다.
사실은 당시 외국의 봉사활동단체와 연합군 및 미8군의 봉사로 많은 위로와 혜택을 받으며 자라난 어린이들(청소년)이 무수히 많았다. 원조물자(의복, 의료용품, 식품류, 식량)는 극빈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것을 받아가기위해 아이들, 아낙네, 노인들은 줄을 서서 기다렸으며, 분유를 끓여서 나누어주는 것을 받아먹은 날은 운이 좋은 하루였다.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좁은 주거공간을 이용한 고아원이 부지기수로 늘어났으며, 하루를 유지하는데도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러한 고아원에 도움을 주는 데는, 외국자원봉사단체와 봉사자의 배려와 미군들의 따뜻한 도움과 보살핌을 받았다.
어찌 지난날을 잊고서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조국을 이렇게 이룩한 자들이 바로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거늘..., 국가가 부강하면 노후에 편히 잘 살 것이라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을 낮삼아 일을 했으나 누구도 국가를 원망하거나 민족을 탓하지 않았다. 오천년 동안 이어온 가난을 물리치고 부흥국가로 태어나기를 소망으로 기원을 했었다. 풋나물죽 한 그릇을 온 식구가 나누어 먹었어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오늘의 한국은 잘 사는 나라라고 하겠으나, 잃은 것이 너무도 많아서 가슴이 아프고 쓰리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8.15해방 광복을 맞이하면, 잘 살고 부강한 나라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정부수립, 해외거주동포들의 조국입국, 사상의 갈등, 지방자립구도의 생활 속에서 빈부의 격차는 하늘과 땅으로 벌어졌다. 이승만대통령이 서구사회를 잘 알고 있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구호물자를 원조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광복으로 신정부가 수립되고 정치, 경제, 문화, 산업, 교육을 새롭게 건설해야 하는데, 사회는 민주와 공산의 대립으로 무질서하게 흐려져 있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진 가난의 상징인 보릿고개를 없애고, 부강국가의 길을 열기위해 새 깃발의 국가건설에 하나같이 동참했던 결과가 오늘의 한국을 일구어낸 저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우연과 기적에서 이루어진 한국경제발전이 아니다. 피와 땀과 협동심으로 뭉친 자신감이 넘쳐흘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사변이 발발했으니, 국가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산업경제는 20년을 후퇴했다. 재산은 잿더미가 되었고, 전쟁을 위해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은 415,000명이 사망했으며, 희생자는 무려 1,313,000명(당시 남북 합친 국민수가 약 3,000만 명이었다.)이나 발생했다.
북한공산당 김일성은 민족의 한을 심어놓은 전범(戰犯)이며, 남한 국민에게 사죄하고 분단의 통일 성업에 자인하고 실천했어야 했으나 분단의 아픔만 남겨놓았다. 당시 전후의 비참함을 이 사진을 통하여 보면 알 수가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진을 촬영한 미국인 Adam씨는 당시 기독교 자원봉사자 젊은 청년으로 한국의 대구를 중심으로 부근의 농촌과 고아원, 그리고 유치원을 찾아다니면서 분유를 끓여 급식시켜 왔으며, 그의 회고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우유를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체질에 맞지 않아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해서 급식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후에는 잘 먹고 배탈이 없었다.” 고 한다. 지금의 세대에서는 이해와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이런 봉사자에게 부끄럼이 없도록 잘 살아야 한다. 나는 지난날을 회상해보면서 이 사진속의 스토리가 너무나 당시의 상황을 잘 증명해주고 있어서 감회가 새롭고 귀중한 사진임으로 소중히 간직하려고 재편집을 시도해 보았다.
2009년 2월 10일 화요일
오정 안명호 씀
*** 이 자료사진을 공개한 사람은 미국유학중인 한국인이 인터넷에 올린 것을 오정 안명호 선생이 인용하여 변색 또는 퇴색된 사진 등을 수정하여 재편집하였음을 알려드린다. ***
(사진 2)
1954년-1955년 사이에 촬영한 대구사과가 그려진 표지판)당시 대구동촌 사과가 유명했다. 일본군 무기해제구역분담으로 남한측은 미군이 점령하고, 북한측은 소련군이 점령하여, 양측이 맡으면서 38도선을 위주로 동서로 철조망이 설치되면서 남북이 분단되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민주와 공산으로 분류된 원한의 38선이 되었다.) 그래서 이 표지판에는 “너도 나도 사랑하자 백두산 가는 길을” 이라고 명시하여 통일을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의 위치가 본인의 기억으로는 대구 팔달교 부근으로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시대(日帝强占期時代)때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동촌, 반야월, 경산일대와 팔달교 부근에 심어진 사과는 전국적으로 판매되고 좋은 상품은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일제강점기시대(日帝强占期時代)에는 특별한 날(제사, 기념식, 행사, 귀한선물)이외는 대구사과를 먹어볼 수도 없고, 또 빈(貧)한자는 더더욱 맛을 보기가 어려울 때였다.
한국의 기후와 계절 등이 대구부근만이 사과재배가 가능했던 시대였다. 지금은 품종을 개량하여 전국 어느 곳이나 제배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많은 재배로 풍작을 이루고 있지만.....
(사진 3)
대구 신천동 일대에 당시 판잣집이 많았고 피난민이 떠나지 못하고 거주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대구 근교에 많은 판잣집들이 있었다. 당시의 판잣집은 미군부대에서 버려진 합판 조각으로 집을 짓고, 천막 조각이나 빈 맥주 캔을 펼쳐 이어서 지붕을 덮어씌웠다. 한 가족이 사는 집의 면적은 2~3평(6.6평방미터~99.평방미터)으로 생활했으며, 화장실은 공동변소를 지어서 이용했고, 한 번 용변을 보려면 차례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으며, 물은 상수도 한두 곳을 만들어 공동으로 사용했다. 이것 역시 물동이를 차례로 놓고 기다렸다가 물을 받아가곤 하였다.
세탁은 주로 신천 냇가나 동촌 금호강줄기, 또는 팔달교 밑에서 많이 했다. 이 사진을 보면 냇가를 끼고 판자촌을 이루고 있으며, 냇가에서 빨래하는 주부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앞쪽에 많은 빨래가 쌓여있는데, 당시에는 냇가에서 빨래를 삶아주고 돈을 받기도 하였다. 멀리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였으며, 또 염색도 해주고 삶아주기도 하였다. 이 사진에서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빨래 삶는 것이나 염색하는 것이 끝난 것 같다. 판자촌위로 많은 고압선이 지나고 있어 위험해 보이는데, 당시의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사진 4)
사진은 판자촌에 어린이들을 먹이려고 분유를 끓이고 있다. 이 시대에는 대다수의 가정에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굶고 넘어갔다. 그래서 분유를 끓여주는 시간이 점심시간 때이다. 점심시간에 주로 분유를 끓여 나누어 주었는데 각자가 집에서 그릇을 가지고 와서 받아갔다. 이 사진의 우측 뒤쪽에 서 있는 아가씨들이 분유를 끓여서 나누어주는 봉사자로 보인다. 솥은 큰 가마솥이고, 굴뚝은 미군부대에서 버린 식품이 담겨 나온 1개론 캔이나 모빌유를 담았던 캔을 주어서 연결한 것이다.
한국에 보내온 외국원조물자로 들여온 분유와 황설탕(원당)과 옥수수가루 등을 극빈자(피난민, 고아원, 독거노인, 생활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배급하였으며, 의류(구호물자)도 나누어 주었다.
(사진 5)
사진은 밀집한 판자촌이 대형 화재로 전소된 것으로 보인다. 화재로 집과 살림살이를 모두 태우고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한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시름에 쌓여있는 듯하다. 불을 진압하려고 안간힘을 쓴 탓인지 온통 입은 옷이 검정 투성이다. 타고 있는 연기 속에 재건이 언제쯤 이루어 질 것이지 답답하게 보인다. 당시의 정부의 제정여건으로는 도저히 복구의 엄두도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비참하고 답답하고 막막하게 보인다. (다음호 연재2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