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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의 기억
윤 명숙 (문학미디어 작가)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선 지 채 20분도 안 돼 A시로 접어든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아틀리에로 가려면 등성이를 넘는 지름길로 가거나 나지막한 야산을 끼고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양치류로 뒤덮인 숲 사이 오솔길은 조금 가파른 오르막이다. 천천히 걸어 등성이를 넘으면 물이 흘렀던 흔적만 남은 도랑 옆으로 제대로 된 길이 나타난다. 길 양쪽으로 밤나무가 빽빽하다. 밤나무 길이 끝나는 데서 길은 갑자기 좁아지고 양쪽으로 개나리가 뒤엉켜 노란색 병풍을 친 것 같다. 그 길을 빠져나오자 눈 아래 아틀리에가 보인다. 관목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을씨년스럽다. 건물 뒤 불이 났던 창고는 깨끗이 들어내져 있고 훤하게 들어난 공터 주위로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패잔병처럼 서있다. 담쟁이덩굴만이 기세등등하게 주인 잃은 건물을 칭칭 감아 틀어쥐고 당장에 숨통을 조이는 듯하다.
나는 늘 들락거리던 문을 가볍게 밀고 정원으로 들어선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있다. 휑뎅그렁한 꽃밭 너머로 낡은 휠체어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져있다. 그 옆에 삽이며 호미를 넣어두던 간이 창고로 걸어가 안을 들여다본다. 찢긴 비료 부대에서 가루가 쏟아져 바닥이 어지럽다. 선반에 눈길을 준다. 해충 약병들 틈에서 해골 그림의 쥐 약병을 본다. 갑자기 가슴이 후루룩 떨린다. 나는 비실대며 돌절구 위에 앉는다.
지난 봄, 내가 일하던 출판사에 중견화가 최 수헌이 자신의 화집 출판을 의뢰해 왔다. 기존의 화집과는 달리, 그림과 그림에 얽힌 일화를 묶어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라고 했다. 산업디자인이 전공인 나는 그 일에 각별히 기대를 걸었다. 사장과 동향이라는 그 화가는 수시로 회사에 나타났다. 오십대 초반의 중후한 외모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영락없이 십대 소년 같았다. 팽팽한 피부를 감싼 그의 은빛 머리도 그랬지만 숱 적은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것도 남달라 보였다.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보이지 않았다. 사장의 말로는 최 화백이 자신의 그림을 소장한 사람들을 찾지 못해 일이 늦어진다고 했다. 당장 작품사진을 찍을 수가 없게 됐다. 아쉬웠지만 나는 금방 그 일을 잊었다. 서너 달 후 사장이 보수가 괜찮은 일이라며 최 화백 아틀리에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이번에 다시 화집 출판을 제의해온 사람은 뜻밖에도 별거 중이라던 그의 부인이었다. 매주 삼 일, 그것도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면 주겠다는 보수는 다음 학기 등록금으로 고민하던 나에게는 매력 있는 일거리였다 나는 곧바로 A시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낮은 생 울타리가 에워싼 정원에서 챙 넓은 모자를 쓴 가무잡잡하고 깡마른 오십대 초반의 여자가 목에 걸쳤던 수건으로 얼굴을 가볍게 누르며 갸웃이 고개 숙여 나를 바라봤다.
“선경 씨?”
내가 그렇다고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가 서둘러 말했다.
“나 지 윤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허리가 아파 쉬려했는데 잘됐다.”
유난히 까만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 슬그머니 시선을 거두고는 외진 곳을 손가락질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좀 보세요! 수선화가 아직도 피어 있어요.”
그곳에는 몹시 수줍어 보이는 흰 꽃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지 윤이 현관문을 열자 안에서 테레빈 오일 냄새가 훅 끼쳤다. 마주 보이는 곳에는 50호쯤 되는 그림이 높게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는 고풍스런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높은 천장에는 둥근 창이 나 있었는데 그곳으로 여린 빛이 비집고 들어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눈에 익자 흰머리를 풀어헤친 창백한 얼굴의 최 화백이 휠체어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출판사 사장한테서 최 화백의 근황을 듣긴 했어도 이렇게 까진 상상하지 못했었다. 재빨리 달려가 인사했지만 최 화백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초췌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불편한 손을 들어 바지춤을 끌어내리며 끙끙거렸다. 난처해진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잽싸게 휠체어를 어두운 구석으로 밀고 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사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문소리와 함께 벌컥 떠밀린 듯해서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나는 왠지 낯선 세상으로 던져져 등덜미를 잡힌 것 같았다.
학교와 출판사 가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도 없던 터라 나는 나머지 시간을 최 화백의 아틀리에에서 보냈다. 서로 익숙해지자 지 윤은 자료 분류하는 일을 내게 맡겼다. 전에 이미 스크랩 해놓은, 잡지에 소개된 글이나 신문기사를 연도 별, 월 별로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단체 사진에 찍힌 인물들의 이름을 알아내거나 연도를 확인할 때 외에는 최 화백을 피했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리 무시하려고 애를 써도 이상하리만치 집요한 그의 눈초리가 등허리 깨에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와는 손발이 잘 맞았다. 어쩌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은 그녀가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우린 아이들처럼 플래시 불빛을 사방으로 쏘아대며 마을을 외돌아 어두운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었다.
“집이 너무 외져서 무섭지 않으세요?”
“내 나이 돼 봐. 무서울 게 없어. 허긴 나도 어렸을 땐 겁쟁이였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거든. 할머니 돌아가신 후 이런저런 일로 시달리다 보니까 이렇게 됐지만.”
“두 분이 대학 동기시죠?”
“졸업전시회에서 처음 만났어. 까마득히 오래 전 일인데 신기하지? 바로 엊그제 같네. 방 가운데 걸려있는 반 구상화 있지? 손에 오렌지 하나 씩 들고 있는 두 남자, 그게 그 사람 작품이야.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지. 난 거짓말처럼 반했어. 오렌지를 들고 있던 남자가 아니고 그걸 그린 남자한테.”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어둡고 암담한 색조 위에 밝은 오렌지색은 어딘지 따스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저는 오렌지를 들고 있는 남자가 좋던데요.”
나도 덩달아 웃었다.
“그 그림을 책 표지로 쓰면 어떨까요?”
“뭐 나쁠 것 없지”
그녀가 선선히 대답했다.
“최 화백님의 60년대 작품들이 반구상의 표현주의 경향을 띠었다면 그 이후의 작품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 완전히 배제됐는데 그 이유가 미술사적인 흐름 때문인가요, 아니면 개인적인 욕구 변화였나요?”
그녀가 나를 가만히 돌아다보았다. 어두워서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67년 2월에 내가 아이를 사산하고 몹시 절망했을 때가 있었어. 난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했지. 그때 그린 그림들이 감성에서 이성 쪽으로 옮겨 간 시기와 맞물려 있긴 해.”
“최근 그림들은 색 마저도 사라졌는데 지난번 개인전 팸플릿에 올린 B평론가의 서문을 그대로 인용해도 될까요? 욕망을 하나하나 지워 나가면 무색에 이른다고 한, 흰색과 무색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이 좋던데요.”
“그 글 좋았어. 근데 선경 씨는 디자인이 전공 아닌가? 현대 미술도 공부 좀 했구나.”
“교정 일 하다보면 이것저것 배우는 게 있어요. 겉핥기지만.”
“내가 쫒던 화두였는데. 그 인간이 훔쳐갔지.”
그녀가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며 잇새로 말을 밀어냈다. 버스가 저만치서 달려왔다. 나는 버스에 올라 차창에 뺨을 대고 플래시 빛이 흔들리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낯설음이 차츰 가시고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화집에 들어갈 자료 모으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방학이면 시골집에서 즐겁게 거들던 농사일도, 조카들의 응석도 뿌리치고, 내려간 지 하루 만에 냉큼 올라와 버렸다. 방학이 끝날 즈음에는 자료 정리하는 일에서 글쓰기로 넘어 왔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싸늘해졌다. 나는 서툰 컴퓨터를 덮어두고 수작업으로 레이아웃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나를 덤덤히 바라보며 지 윤은 하루 종일 꽃밭에서 서성댔다. 최 화백만 여전히 어둑한 작업실에서 휠체어를 조금씩 밀며 유령처럼 돌아 다녔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가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인 듯했다.
내가 마당으로 나와 한숨 돌리고 있는데 그녀가 휠체어를 밀고 나왔다. 최 화백이 막 점심을 먹은 뒤라 산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거 새 모이에요?”
내가 정원 석 사이에 흩어져있는 빵가루를 보며 무료해서 그냥 물었는데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쥐 밥이야.”
그리고 숨죽여 키득키득 웃었다.
“점점 쥐가 많이 모여 들고 있어. 들쥐라 먹성도 엄청 나.”
“쥐 못 봤는데 어디서 살아요?”
“당연히 숨어살지. 화초가 이유 없이 죽으면 땅 밑에 들쥐가 굴을 팠기 때문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살아있는 생물을 보면서 살의를 느껴본 적 있어?”
최 화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 윤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전 무서워서 고양이도 못 키워요.”
어렸을 때 늙은 고양이의 죽음을 본 이후로 나는 동물을 덮어놓고 멀리했다.
“쥐도 작은 동물일 뿐인데 왜들 싫어하지? 아무래도 긴 꽁지에 털이 없어 징그러운 거야. 소담스러웠으면 제법 귀여웠을 텐데.”
그녀가 갸웃이 고개를 들고 최 화백을 보며 말했다.
“쥐새끼는 털이 반드르르하고 얼마나 귀여운데. 그치?”
최 화백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변태”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깔깔 웃었다.
나는 돌절구 위에서 몸을 일으킨다. 얼얼해진 엉덩이를 끌고 모과나무 아래로 걸어가 고개를 뒤로 꺾고 올려다본다. 새들이 쪼아 먹다 남긴 샛노란 모과 한 개가 시들하니 쪼그라든 채 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땅 바닥을 두어 번 굴러본다.
검고 기름진 땅에 신발 자국이 깊게 찍힌다. 나는 쥐 무덤을 떠올리며 바닥을 주의 깊게 살핀다. 흙속에 반쯤 묻혀있는 농염한 노란 색의 모과를 집어 든다. 손에 달라붙는 끈끈한 즙과 짙은 향기가 식충 식물을 떠올리게 한다. 반쪽은 까맣게 썩어있다. 나는 들고 있던 모과를 제자리에 던지고 빈 꽃밭 사이를 걷는다. 툭툭 갈라진 흙 사이로 새 싹이 비집고 올라오는 게 보인다. 정원은 알 수 없는 수런거림으로 가득 차있다. 흰 나비가 눈앞에서 팔랑거리더니 먼지를 쓰고 있는 휠체어 등받이에서 날개를 접고 파르르 떤다. 새 해 처음 보는 나비가 흰색이면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고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는다.
내가 이곳에 온 날로부터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불안감의 정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날, 밤나무 길에는 낙엽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채이고 있었다.
문을 밀고 정원으로 들어서는데 최 화백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걸음마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동안 그가 혼자 일어선 것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 적잖이 놀랐다. 얼떨결에 몸을 숨기려다 그도 나를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의 옆을 스쳐 지나며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 컨디션 좋으시네요.”
힐끗 보니 그가 씩 웃으며 휠체어에 앉는 게 보였다.
“소설은 잘 써지나?”
그가 뒤에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뒷덜미를 억새풀에 베이기라도 한 듯 진저리를 치며 재빨리 아틀리에로 들어섰다.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저 왔어요.”
물소리가 뚝 끊기고 잠깐 조용하더니 문이 빠끔히 열리고 타월을 두른 지 윤이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마침 잘 왔어. 저이 좀 안으로 모셔올래? 밖이 쌀쌀하지?”
그렇게 말하고는 김이 서린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내키지 않는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휠체어가 꼼짝도 안했다. 힘껏 밀어봤지만 사람만 기우뚱했다. 최 화백이 실실 웃었다. 난 안절부절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최 화백이 뭐라고 했지만 당황한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가없었다. 한참 만에 나온 그녀는 젖은 머리를 앞이마에 수초처럼 붙이고 오스스한 얼굴로 최 화백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일부러 심술부리는 거지? 자꾸 그러면 옷 홀랑 벗겨 길거리에 버린다.”
그녀가 으름장을 놓는데도 안 들리는 척 딴청을 하던 최 화백이 꽥 소리 지르며 투우사를 향해 달려드는 소처럼 그녀의 가슴을 들이 받았다. 놀란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녀가 능숙하게 발로 휠체어의 잠금 고리를 풀더니 안으로 휑하니 밀고 들어갔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 들어가야 했다. 침실에서 윽박지르는 소리가 문틈 사이로 낮게 흘러 나왔다.
“이건 완전히 전쟁이야. 목욕시켜 옷 갈아입혔더니 똥을 싸? 인간이기를 포기한 거야?”
컵이 바닥에 떨어져 떼구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불평 해봤자 소용없어. 병원에서 이리 끌고 온 건 너잖아. 이럴 줄 몰랐니?”
“그랬지. 그러니까 보내는 것도 내 맘이야. 무연고자 수용소로 보내줄까?”
“그러던지. 네 허영심이 허락하면 그렇게 해. 그럴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쁜 놈! 남의 그림 갖고 화가 행세 하는 주제에.”
“여전히 내 그림 보면 흥분되니? 네가 그린 것처럼 몸이 떨려?”
열려진 창문으로 갈바람이 밀고 들어와 커튼을 흔들어댔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그녀가 튀어 나왔다. 뒤에서 최 화백의 눅눅한 음성이 따라 나왔다.
“난 다 잃었어. 그럼 됐잖아?”
그녀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내가 그 곳에 있다는 것도 잊고 있는 듯 했다. 그녀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 옆에 잔뜩 세워놓은
캔버스들 중에서 하나를 꺼내어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물감 흔적이 희미하게 배어있었다. 그녀가 흰 수건으로 캔버스 표면을 조심스럽게 닦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애틋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낮추고 아직도 내가 옆에 있음을 그녀가 스스로 알아 차려주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잡자기 방안에 괴어있던 테레빈 오일냄새가 뭉클 피어올랐다. ‘훅’ 입김만 쏘여도 흩날리는 민들레 꽃씨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공기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소리쳤다.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이건 지옥이야.”
그녀가 캔버스를 바닥에 내 팽개치고 황급히 밖으로 나가다 휙 돌아서서 낯선 사람을 보듯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색이 점점 죽어.”
내가 놀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제멋대로 굴러가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그녀가 표정을 풀더니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비집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켜는 게 보였다. 나는 살그머니 창문에서 물러났다.
굳게 닫힌 현관문손잡이를 두어 번 비틀어보다 불에 댄 듯 급히 손을 뗀다. 열린다 해도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용기가 있을 것 같지 않다. 나는 뒤뜰로 돌아간다. 창고가 있던 자리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다. 훤히 들어난 바닥은 포클레인의 톱날 자국만 생채기처럼 드러나 있다. 늘 습하고 어둠침침한 그늘을 드리웠던 거대한 관목들은 위로 갈수록 검게 그을린 흉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흰 자갈이 반짝이던 샛길은 흔적도 없다. 가끔 앉아 쉬던 널 바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쐐기풀로 뒤덮였던 생 울타리 덤불속에서 그을린 캔버스 조각을 찾아낸다. 타 들어가다 멈춘 듯 그을음이 번져있다. 뒤집어본다. 82-NO.99 작품의 넘버가 낯익다. 나는 조심스레 흙을 털어낸다.
창고 문은 아직 닫혀 있었다. 시월 들어, 책에 삽입될 작품을 찍기로 한 날, 난 학교 수업도 빠져가면서 A시로 달려갔다. 사진작가와 그의 조수는 이미 와 있었다.
그때 최 화백이 지 윤이 미는 휠체어에 앉아 뭔가 우물우물 씹으며 두리번거리고 나왔다. 그날 작업복 차림의 그녀는 활기차 보였다. 창고 문에 매달린 커다란 구식 자물통이 벗겨지고 육중한 문이 스르르 열렸다. 거미줄과 곰팡내를 상상했던 나는 광목으로 일일이 싸 완벽하게 정리 되어 있는 작품에 입이 딱 벌어졌다. 사진작가와 그의 조수가 프로답게 그림을 들어내고 포장을 벗겨 벽에 기대어 놓기 시작했다. 나는 광목의 먼지를 털고 햇빛에 살균한다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때 최 화백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최 화백이 휠체어에서 떨어져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녀가 달려가 일으켜 세우려하자 최 화백이 쥐어짜는 목소리로 ‘도둑년’ 이라고 소리쳤다. 그녀와 나는 휠체어에 안타겠다고 뻗대는 그를 억지로 태워 작업실에 끌어다 놓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최 화백의 고함은 계속되었다. 난 현관에 붙어 서서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호기심보다 앞섰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갤러리 통해서 돈 주고 샀어. 온전히 합법적으로.”
그녀가 빈정대며 말했다.
“네가 그림 못 그리는 건 네 탓이야. 그거 인정하는 게 그렇게 힘드냐? 나한테 달라붙어 기생하려 들지 말고 네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봐.”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너! 너야말로 돌아다보시지. 별 볼일 없는 건달 구제했더니 감히 내 그림을 베껴먹어?”
“누가, 내가? 베껴 먹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되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근데 너 더 심해졌다. 병원 좀 가 봐라. 나 네 그림 본 적 없어. 그리기나 하고 그런 소리 하는 거냐?”
“전부 불 질러 버릴 테야.”
그녀의 낮고 쉰 목소리가 선뜩하게 들려왔다. 나는 엿듣고 있는 나 자신에 화들짝 놀라 그 자리를 급히 떠났다. 오후 들어 구름이 몰려들었다. 비가 오려는지 잠자리가 떼로 몰려와 낮게 날아다니며 사진 작업을 방해했다. 작품 촬영은 여러 날 걸려 이어졌다. 이럭저럭 거의 끝날 때 쯤 그림을 보관하는 창고에 또 한 번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두 번째 들어갔을 때는 좀 더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는데 구석의 문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리 넓지 않는 방에는 필름을 현상해 매달아 놓듯 나무틀을 떼어낸 캔버스 천이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슷한 크기의 아주 작고 섬세한 꽃이 세필로 화면 가득 그려져 있었는데 그린 후에 나이프로 긁어낸 듯 색이 몽롱하게 떠 있었다.
“아무한테도 보여준 적 없는 내 그림이야. 어때, 이상한 생각 들지 않아? 어디서
본 듯하지? 내가 62년도에 그린거야. 최 화백의 82-NO.99 작품과 비교해 봐. 20년의 시간이 그 두 작품 사이에 보여? 내 그림에서 꽃을 살짝 들어내 봐. 똑같지? 소름이 끼쳐. 완벽하게 감정이입이 되거든. 그의 눈과 손을 통해 내 그림을 그리는 거야. 최 수헌! 너는 나의 허수아비야.”
그녀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천정에 매달려있는 그림들 사이를 정신없이 헤집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장대비가 내리 사흘 쏟아졌다. 사진 촬영은 다행히 끝나 있었다.
최 화백의 70년대 초 몇 년간은 거의 공백기로 어디에도 남아 있는 작품이 없었다. 아예 작품 활동을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품을 뒤지느라 혈안이 돼 있었는데 드디어 최 화백의 소품을 간직하고 있다는 문 선생이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나는 그 사람을 찾아보기로 했다. 최 화백과 가까운 친구라는 그 사람은 부인과 단둘이 조촐하게 살고 있었다.
“그 그림들 나한테 없는데.”
“지 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기억하시던데요”
“내가 가지고 있었지. 근데 얼마 전에 그 친구가 돈이 급하다며 도로 뺏어갔어.”
“누가요?”
“누군 누구야 그림 임자지. 갤러리에 알아보면 그림의 행방을 알 수 있을게요.”
털고 일어나려는데 부인이 차를 내왔다. 밖은 낮인데도 어두웠다. 간간이 천둥번개까지 치면서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두 분이 친하셨으면 혹시 에피소드 같은 게 있을까요? 이미 밝혀진 자료만 갖고는 내용이 딱딱해서요.”
난 주섬주섬 녹음기랑 속기 준비를 하고 좀 더 눌러앉을 양으로 느긋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부인이 낯을 붉히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문 선생이 담배를 찾아 물고 TV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화면에서는 88올림픽대로가
간간이 비춰졌다. 부인이 머뭇거리며 남편을 넘겨다보았다. 그는 TV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 운동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열띤 목소리가 함성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부인의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그녀는 그 두 사람 얘기를 몹시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최 화백과 지 윤의 결혼식은 졸업 전시회 쫑파티에서 친구들을 불러놓고 술대접하는 것으로 간단히 치러졌다. 양쪽 다 딱히 모셔야 할 어른들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쨌거나 법적으로 부부 사이임은 틀림없었다. 그들이 신혼살림이라고 차린 곳은 장사꾼들이 물건을 쌓아놓고 쓰던 썰렁한 창고였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재산을 많이 남겨 주었다고 들었는데 어이가 없었어요. 그 후 일 년 가까이 소식 없이 지내다가 최 화백이 남편의 직장으로 전화를 했어요. 영문도 모르고 남편 퇴근에 맞춰 오라는 병원으로 같이 갔지요. 우린 지 윤이 임신한 줄도 몰랐어요.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뒤둥그러져 못 알아볼 뻔했다니까요. 아기는 사산됐어요. 봐서 알겠지만 최 화백이 좀 멀쑥해요? 폭력적인 남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란 것을 그때 알았죠.”
산모가 아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수술이 늦어졌고 산모를 살리기 위해 자궁적출 수술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최 화백은 작업실에도 없고 병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 윤은 중태였고 회복기간은 예상외로 길어졌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별거를 했던 거 같아요. 일 년쯤 지나서 지 윤씨가 A시에 아틀리에를 지어 이사했다고 해서 한 번 내려간 적이 있고 최 화백은 그의 개인전 때 서너 번 회장에서 본 게 다예요. 최 화백 작업실은 서울에 있었는데 동거하는 여자도 있다고 들었어요.”
나는 미진해하는 부인의 말을 막고 슬그머니 일어났다. 무거운 마음으로 그 집을 나오는데 문 선생이 인사치례로 대문 밖까지 나와 주었다.
“지 윤은 아이를 잃고부터 급격히 망가졌어. 아까운 사람이지. 그 전까진 최 화백보다 지 윤이 훨씬 작품 활동을 많이 했거든. 화단에서 인정도 더 많이 받고.”
화집 출판은 마무리 단계로 들어갔다. 한가해진 나는 정원에서 지 윤이 화초 갈무리 하는 것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곧 추워지면 다년생 화초는 집안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오슬오슬해지네. 선경 씨 안 추워?”
요즘 들어 부쩍 그녀의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짙어졌다. 그녀는 며칠 전 동네 의원에 다녀왔는데 감기기운이 영 안 떨어진다고 했다.
“그놈의 의사가 서울의 큰 병원에 가라더군. 죽을병에라도 걸린 건가?”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고 큰 병원에 가서 진찰받을 것을 강요했다.
“먼 곳은 못가. 집에 환자는 어떻게 하고? 화장실 출입도 못하는 사람을”
난 최 화백이 혼자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말을 왠지 할 수가 없었다.
“두 분이 함께 입원 하세요. 허리 아픈 것도 검사하시고, 최 화백님 물리치료도 받아 보시고.”
그녀는 순순히 병원 예약을 하고 일주일 있다가 최 화백과 함께 서울병원으로 갔다. 다음 날 나는 빈 집을 둘러볼 양으로 평소보다 일찍 아틀리에로 왔다. 정원을 가로 질러가는데 여기저기 바닥에 죽은 쥐가 널브러져 있었다. 정원 석 틈새에는 엄지손가락 크기에 털이 반지르르한 새끼 쥐들이 서로 뒤엉켜 죽어있었다. 난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쥐를 보며 살의를 느꼈던 것일까?
지 윤이 퇴원해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야 했다.
최 화백의 입 속에 음식을 떠 넣으며 그녀가 물방울이 터지듯 부드러운 소리로 수헌, 입 벌려. 라든지 수헌, 여기 봐. 라고 할 때에 그녀의 표정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어떤 것이 느껴졌었는데 나는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휠체어를 한 쪽에 밀어둔 채 침대에서만 뭉그적거리는 최 화백의 체중은 제법 늘어나 있었다. 간간이 서로 빈정거리던 말싸움도 없어지고 평온한 나날이 계속됐다. 억지스레 찾자면 지 윤이 화단에서 지내는 시간이 짧아졌다는 정도였다. 건물 뒤로 돌아가면 창고와 언덕사이에 주물 솥이 걸려있었는데 지 윤은 그곳에서 염색에 열중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삭정이 타는 연기와 시큼한 공업용 초 냄새가 역겨워 가까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 멀찌감치 앉아 그녀가 무슨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문지 반쪽 크기로 자른 캔버스 천을 솥 속에 담갔다가 꺼내는 일은 단조롭고 지루했다. 붉으죽죽한 색깔도 달라질 기미가 없었다. 내가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을 들고 나를 돌아다보았다.
“이 색 너무 파랗게 보이지 않아?”
“전혀 아닌데요.”
“무슨 색으로 보여?”
“글쎄요. 그러니까 그게”
순간 나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말꼬리를 흐리며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곧 그녀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아무 색도 아니란 말이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나에게로 발걸음을 떼어놓는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달려가 무너지듯 쓰러지는 그녀를 껴안았다.
“난 색맹이야. 아기를 잃던 날, 색도 잃었어.”
벌겋게 물든 손을 눈앞에서 흔들어대며 그녀가 소리쳤다. 나중에 알아낸 바지만 그녀의 후천성 적록 색맹은 화가로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커튼이 반쯤 가려진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먼지와 그을음으로 더렵혀진 어두운 벽에 그림을 떼어낸 곳만 하얗게 남아 비밀이라도 숨긴 듯 빤히 맞바라본다. 컴컴한 구석진 곳에서 무언가 어른거리는 듯해 나는 황급히 창문에서 떨어져 도망치듯 나온다.
이젠 물이 흘렀던 흔적마저 없어진 도랑을 건너 둔덕으로 올라선다. 호두나무길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명치끝이 뻐근해진다.
설에 내가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그 때의 상황이 바뀌었을까? 아니 적어도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자신을 향해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한다.
며칠 퍼부은 눈으로 귀성객의 발을 묶었던 그 날, 차례 상을 치우자마자 올케가 싸주는 떡을 들고 교통체증을 핑계 삼아 아틀리에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나를 맞아준 사람은 엉뚱하게도 정복 입은 경찰들이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막았다. 이 시간이면 당연히 켜져 있어야 할 외등이 꺼져있었다. 수북이 쌓인 눈 위에 어지럽게 짓이겨진 더러운 발자국을 보며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소방장비를 만지고 있던 소방수가 창고 쪽을 가리켰다. 창고 문이 뜯겨져 비스듬히 기울어진 사이로 누리끼리한 연기가 조금씩 새 나왔다.
“아가씬 누구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복 입은 경찰로 보이는 남자가 내 위아래를 훑어보며 창고에서 불 난 거 몰랐냐고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창고를 향해 뛰어가려는데 정복 입은 경찰이 또 막아섰다.
“두 분은 괜찮은 거죠?”
아틀리에 쪽을 바라보며 급하게 물었다. 시커먼 건물은 죽은 듯 숨죽이고 있었다.
“병원으로 옮겼어요. 남자 분은 간신히 목숨이 붙어있었소.”
사복 경찰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매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 분은요?”
“가망 없다고 합디다. 목을 맸거든. 동반 자살로 추정은 되지만 아직 현장조사중이라 단정 내리기는 이르고. 어이! 강 순경! 이 아가씨 신원확인하고 연락처 받아 놔.”
나는 강 순경이라 불리 운 남자 뒤를 멍한 정신으로 따라갔다.
지 윤의 장례식은 형식만 갖추어 치렀다. 시신은 부검 중이라고 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곧바로 경찰서로 불려갔다. 참고인이라는 자격이 무색하리만치 담당 경찰의 태도는 무례했다.
“아틀리에를 떠난 날이 12월 31일 오전. 맞죠? 돌아온 날은 다음 날 1월 1일 오후.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죠? 가족들과 지내지 않고?”
사흘을 예정하고 내려간 집에서 내가 하루 만에 돌아온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럼 마음이 당기는 무엇이 작용했다는 말인가? 딱딱한 경찰 물음에 까맣게 잊고 있던 꿈이 떠올랐다.
시골집으로 내려가는 버스에서 옷자락을 잡아끄는 손을 뿌리치고 돌아다보니 바로 눈앞에 창백한 지 윤이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까칠한 피부의 촉감과 뜨거운 숨결까지 느껴졌다. 그녀 뒤로 보이는 울울한 숲은 불에 타고 있었다.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지 윤을 소리쳐 부르다 깜짝 놀라 깼다.
“불이 난 창고는 평소에 자주 사용했나요?”
“작품 촬영할 때 한 번 들어가 봤어요. 작품만 보관하는 곳이에요.”
“창고 문 열쇠는 누가 관리했죠?”
“지 선생님이 갖고 계셨는데요.”
“두 분을 마지막 본 날 이상한 낌새 같은 거 없었어요?”
“네?”
“두 분이 싸웠다든지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거의 탭댄스 수준으로 들까부는 경찰관의 발을 내려다보며 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아니요. 최 화백님은 그날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침실에 누워 계신 것 보고 나왔는데요. 지 선생님은 평소와 다름없었고요.”
“휠체어는 누가 사용했죠?”
“최 화백님요. 중풍으로 몇 달 전에 쓰러지신 후 거동이 불편하셨어요.”
“혼자도 나 다닐 수 있었나요?”
“아니요. 실내에서도 휠체어를 사용하셨어요.”
나는 또 망설이다 거짓말을 했다. 최 화백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두고 경찰이 어떤 추측을 끌어낼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질문을 하던 경찰이 옆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료 쪽으로 의자를 돌리며 말했다.
“그림 그릴 때 휘발유로 붓을 빤데요. 그러니까 휘발유 통이 그곳에 있었다는 게 설명이 되지. 마당에 뿌려진 것까지는 설명이 안 되지만 어쨌거나 방화를 의심할게 아니라 낡은 전기선을 더 철저히 찾아보라고 해. 최 수헌씨는 아직도 의식 없데? 병원에 전화 좀 해보지.”
“골치 아픈 사건이에요. 만약 실화면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요. 남자는 쥐약 먹고 여자는 목을 매고 불은 스스로 나고. 젠장. 위에는 뭐라고 보고할까요?”
경찰관 말에 의하면 지 윤은 침실 문설주에 명주 끈으로 목이 매여져있었고 최 화백의 토사물에서는 약물이 검출 됐다고 했다.
둔덕에 서서 나는 조심스럽게 핸드백을 열고 닳아빠진 녹음기를 꺼낸다.
아틀리에에서 사용하던 컴퓨터, 녹음기 그리고 자잘한 소지품들은 결국 지 윤의 장례식을 치르고 경찰서 출입을 몇 번 더 한 후에 찾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 수십 번도 더 들었지만 녹음기에 숨겨놓은 지 윤의 메시지는 여전히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삼킬 수가 없다. 나는 녹음기의 스위치를 또 누른다. 녹음기에서는 한동안 쉿, 쉿 잡음이 나다가 그녀의 낮은 음성이 나오기 시작한다.
“선경 씨! 오래간만에 가족들 만나니 좋지? 녹음기 잊고 간 거 아는지 모르겠네. 잃어버렸다고 엉뚱한 곳에서 찾지나 않는지? 여기 일은 몽땅 잊고 푹 쉬어.”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이어 그녀가 나직하게 말한다.
“출판사에 화집자료 넘겼으니까 선경 씨가 끝까지 수고 좀 해줘요. 그동안 못했던 말 편지로 쓰려했는데 녹음기 보니까 직접 말하고 싶어졌어. 사실은 내 상태가 아주 안 좋아. 지난 번 병원 갔잖아?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어. 그나마 통증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근데 얼마 전부터 진통제 없인 견디기 어려워. 병원 가라고? 나아진다는 확률도 없는데 고생만 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이어 심한 기침소리가 난다.
“선경 씨 계좌로 돈 좀 보냈어. 작지만 내 성의로 알고 잘 써요. 그리고 이 녹음한 거 나 죽은 담에 틀어봐. 원래 유언은 그렇게 하더라.”
키득키득하는 웃음소리에 이어 녹음이 되고 있나? 하는 그녀 특유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죽음 앞에서 장난기를 보이고 있는 이 여자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지 윤 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녹음테이프는 계속 돌아간다.
“내 그림은 몽땅 H미술관에 기증했어. 이 건물도 함께. 언젠가는 내 그림들이 사람들에게 보여 질 날이 있을 거야. 미술관 큐레이터가 나보고 그러더라.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남편을 화가로 키운 지고지순한 사랑의 승리자라고. 최 화백의 작품을 비밀리에 사들인 사람이 나 라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대. 웃기지 않니? 사람들은 그의 불륜까지도 창작의 고통이라며 용서하겠지. 훗날 우리들의 삶이 아름다운 전설로 남게 되는 거나 아닌지 몰라. 관객이 없어 싱겁지만 나 지금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어. 화집은 내가 최 수헌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사형선고가 될 거야.”
녹음이 끝난듯하더니 느닷없이 최 화백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뭐 하는 거야?”
“명주 끈이 너무 사치스러운가? 하지만 부드럽잖아. 수헌! 이리 와서 이 의자 좀 넘어트려 줘.”
“그렇게 죽고 싶으면 네가 발로 차. 나 끌어들이지 말고.”
“뭐야! 너 걸을 수 있어?”
“네가 나한테 한두 번 속았냐?”
“수헌! 아까 마신 개소주 괜찮아?”
“안 괜찮으면?”
“죽는 거지.”
“안 돼! 난 할일이 있어.”
“바보! 네가 지금 할일은 불 끄는 일이야. 네 그림이 타고 있단 말이야. 활활 타고 있다고.”
쿵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최 화백의 신음과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테이프가 다 돌아 갈 때 까지 이어진다.
나는 삭정이를 그러모아 성냥불을 붙인다. 그리고 천천히 녹음기에서 테이프를 뽑아 그 위에 올려놓는다. 흉하게 오그라드는 플라스틱에서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향해 깊게 숨을 들어 마신다. 무겁고 축축한 밤공기에서 비구름 냄새가 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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