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맨발 / 현진건
여름같이 자연과 친하기 쉬운 시절은 없으리라.
풀도 한껏 푸르고 나무도 한껏 우거진데 풀다님 맨발로써 시름없이 소요(逍遙)하는 맛이란,
속된 말로는 형용하기도 어려웁다.
우연히 써 놓은 풀다님 맨발이란 말에 귀여운 어릴 때의 기억이 문득 난다.
그 때 내가 열두 살이든가 열세 살이든가.
우리 고장에서 한 십리 되는 '앞산'이란 데 놀러를 갔었다.
해는 거웃거웃 서산으로 넘어가 장엄하고도 힘없는 광선이 불그스름하게 나뭇가지에 걸렸을 제,
귀여운 처녀 둘이든가 셋이든가 고목나무 등걸에 앉은 내 앞 멀지 않게 나물을 캐고 있었다.
새 새끼가 날기를 배우는 것처럼 잠깐 걸었다 주저앉고, 주저앉고 한다.
그때 이상하게도 그 처녀들의 맨발이 나의 눈을 끌었다.
유순하고도 폭신폭신한 파란 풀 속으로 그 발들은 잠으렀다 떠올랐다.
아마도 바루 그 산 발치를 씻어 나려가는 시내에 씻고 또 씻었던지,
그 발의 희기란 거의 눈과 같지 않은가.
미끄러지는 듯 잠으락질하는 듯 풀 위로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그 예쁜 발들은 마치 물속에 넘노는 은어(銀魚)와도
같았다.
어쩐지 나는 모든 것을 잊고 그 발에만 눈을 주고 있었다.
10여 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나의 기억이란 풀밭에 그 발들은 이따금 솟았다 잠으러졌다 한다.
그 때도 물론 여름이었다.
지금 그 처녀들은 어데 가 있는가.
말이 빗나가 얼토당토않은 옛 이야기에 벌써 정한 페이지는 채워지고 말았다.
문득 그 기억이 나고 보니 어느 사이에 나를 버리고 뒷걸음을 쳐 버린 과거가 돌아다 보이고 또 돌아다 보여,
딴 것을 쓸려도 쓸 수 없다.
여름이 되면 나는 맨발을 연상(聯想)한다.
그러고 어떻다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처녀들의 현재와 장래를 생각한다.
(『별건곤』,1928. 7.)
玄鎭健(1900~1942)
현진건은 1900년 9월 대구에서 우체국장인 현경운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11월 보성고보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다가,
1918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일어를 공부 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오촌당숙 현보운에게 입양되어 종로구 관훈동52번지에 거주하였다.
1920년 『개벽』 지(誌)에 <희생화>를 발표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였다.
이듬해 <빈처(貧妻)>, <술 권하는 사회>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1925년 <B사감과 러브레터>를 발표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하였으며,
1928년 사회부장이 되었고 부암동으로 이사하였다.
1936년 8월25일 신문에 8월 9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손기정 선수가 골인하는 장면에서
손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좌되어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신문사도 그만 두었다.
출옥 후 부암동 325-2로 이사하고 양계를 하며 역사소설 <무영탑>을 집필하였다.
1939년 동아일보에 <흑치상지>를 연재하다가 내용이 사상적으로 불온 하다고 하여 중지 되었다.
1940년 사업실패로 부암동 집을 팔고 동대문구 신설동으로 이사했다가,
1942년 다시 제기동 137-61호로 이사하였는데 그 해 4월25일 지병인 폐결핵과 장 결핵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