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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강(武姜)
연산 58권, 11년(1505 을축/명홍치(弘治) 18년) 5월 18일(임인) 1번째기사
지친이 대죄를 지으면 의를 끊는다하여, 이항등의 죄를 드러내어 효유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지친(支親)이 대죄(大罪)를 지으면 의를 끊어야 하는데, 옛적에 이와같은 논의가 있었는가?”하매,
승지들이 아뢰기를,
“《춘추(春秋)》에, 정장공(鄭莊公)의 아우 정숙단(鄭叔段)이 죄를 지었는데,‘속적(屬籍)4990)에서 끊어야 한다’하였고, 노장공(魯莊公)의 어머니 강씨(姜氏)가 덕을 잃었는데 ‘끊어 친(親)으로 여기지 않는다’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옛적에‘끊어 친으로 여기지않는다’한 것은 성인(聖人)이 그 인륜(人倫)은 사사(私事)라 국가가 중하기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항(李㤚), 이봉(李㦀)이 이미 중죄를 지었는데 목숨을 보존함은 요행이다. 바깥 사람들이 끊어 친으로 여기지 않기를 말하여야 할 터이거늘,
이제껏 말하지 않으니, 정승(政丞)의 생각은 어떠한가?”하매,
유순(柳洵)등이 아뢰기를,
“이들이 이미 중죄를 범하여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기에 이르렀으니,
속적을 끊어야 함은 아주 나머지 일일 뿐입니다.
죄가 이르지 않더라도 《선원록(璿源錄)》에서 오히려 지워버릴 것이거늘, 하물며 이들이리까. 옛적에‘대의(大義)에는 친(親)을 끊는다’하였으니,
이들이 이미 중죄를 입었은즉 끊어 친으로 여기지않는 의가 이미 거기에 드러났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정승의 말이 옳도다. 그러나 무지한 것은 낮은 백성이라,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비에도 오히려 원망한다. 하지만 하늘은 태연하다.
지난해 간신을 죽일 때에 낮은 백성이 어찌 하늘을 원망한 자가 없었으랴마는 국가도 역시 태연해야했다. 어찌 낮은 백성의 시비를 교계하랴!
만약 항, 봉의 죄가 중한 줄 모르고서 위가 잘못이라는 말을 낸다면 논죄(論罪)하지않을 수 없다.
항, 봉의 어미는 미천한 사람으로 선왕(先王)을 모실 수 있었으니 경계하고 두려워하여야 할 터이거늘, 계통(繼統)의 중대함을 생각하지않고 도리어 투기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 화란(禍難)을 끼쳤도다.
참으로 사직(社稷)을 이롭지않게 하였다면 낳은 어머니일지라도 오히려 법으로 결단하여야 하니, 항, 봉은 비록 어려서 참여하여 알지 못하였다하더라도, 그 어미의 죄로 논한다면 그 살을 저며서 씹어도 스스로 달게 받아야 하리라.
글 잘 짓는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속적(屬籍)을 끊어야 하며 끊어서 친으로 여기지 않는 의리로써 글을 짓게 하여 중외에 깨우침이 어떠한가?”하매,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대간(臺諫)이 아뢰기를,
“항, 봉의 죄가 지극히 크니 속적을 끊어야 함을 조정에 있는 신하라면 누가 모르리까마는, 먼 지방이나 궁벽한 곳에 있는 어리석은 백성이라면 모르는 자가 있을 수 있으니, 끊어서 친으로 여기지않는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서 죄를 드러내어 널리 중외에 깨우치심이 매우 마땅합니다”하였다.
註4990]속적(屬籍):그 사람이 속한 적(籍).註4991]《선원록(璿源錄)》:근세 조선(近世朝鮮)의 왕실계보(系譜)를 적은 대장.
○壬寅/傳曰: “至親獲大罪, 義所當絶, 古有如此等論乎?” 承旨等啓, “《春秋》鄭莊公之弟叔段作罪, 而曰: ‘屬籍當絶。’ 魯莊公之母姜氏失德, 而曰: ‘絶不爲親。’ 傳曰: “古云: ‘絶不爲親。’ 聖人以其人倫私事, 而國家爲重, 故如是云爾。 㤚、㦀旣得重罪, 得保性命幸矣, 外人固當以絶不爲親爲言, 而至今不言, 政丞意何如?” 柳洵等啓, “此輩旣犯大罪, 以至籍沒家産, 屬籍當絶, 特餘事耳。 罪雖不至於此, 其於《璿源錄》, 尙且抹去, 況此輩乎? 古云: ‘大義滅親。’ 此輩旣蒙重罪, 則絶不爲親之義, 已著於其間矣。” 傳曰: “政丞之言然矣。 然無知者小民也, 冬寒暑雨, 尙有怨咨, 而天固自若也。 去年誅奸臣之時, 小民豈無怨天者, 而國家亦當自若也。 豈計小民之是非哉! 若有不知㤚、㦀罪重,而發屬上之言, 則不可不論罪。 㤚、㦀之母, 以賤微之人, 得侍先王, 宜若戒懼, 而不顧繼統之重, 反生妬心, 以貽其禍。 苟有不利社稷, 雖所生之母, 尙可斷之以法。 㤚、㦀雖云微少而不與知, 以母罪論之, 則雖臠其肉而啖之, 自當甘受。 令善製文臣, 以屬籍當絶, 絶不爲親之義製文, 以諭中外何如?” 議政府、六曹、臺諫啓, “㤚、㦀之罪至大, 屬籍當絶, 在朝之臣, 誰不知之? 若在遐方僻地, 愚蠢之民, 或有未知者, 今以絶不爲親之意, 作文暴罪, 廣諭中外, 甚當。”
광해 121권, 9년(1617 정사/명만력(萬曆)45년) 11월 23일(갑신) 4번째기사
폐비 문제는 의견을 널리 수렴해야할 중대한 것임을 논하는 기자헌의 상차
영의정 기자헌이 상차하였다.
“여러 선비들의 상소를 묘당에 내려보내라는 것으로 계하(啓下)하셨습니다. 신은 본래 학식이 없는데다 재주도 용렬하고 인망도 가벼운 자인데 마침 인재가 부족한 때를 만나 의정부의 인원수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신이 만약 갑자기 대비를 내쫓을 것을 주장한다면 국사(國史)에 기록하기를 ‘아무개가 제 마음대로 내쫓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대의 공론에 죄를 얻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상의 조정에 수치가 될 것이며, 성명께서는 필시 대비를 제 마음대로 내쫓으려 한 신들에게 죄를 주고 용서하지않을 것입니다.
전날 대간들이 궁전을 달리 하여 각각 거처하게 하자는 논의를 주장한 것만으로도 삭직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만약 이런 일이 있고 난 뒤로 혹시 신에게 죄줄 것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아무리 인자한 전하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용서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영부사 이항복과 좌의정 정인홍은 지방에 있고 전우상 정창연은 두문불출하고있으며 현재 우상 한효순은 병이 나서 휴가신청을 낸 지 여러 날이 지났으므로, 대신중에서 신 혼자만 서울에 있으면서 애써 공무를 보고 있습니다만 이처럼 더없이 중대한 일을 어찌 혼자서 처리해 낼 수 있겠습니까?
계축년간에 여러 대신이 글을 올릴 때 신도 거기에 참여하여‘아비가 비록 사랑하지않더라도···.’라는 말을 하였으니, 그때와 지금의 논의를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몇해 전 이원익이 견책을 받았을 때 삼사에서 말하기를 ‘조정에는 본래 이런 마음이 없었는데 이원익이 노망하여 함부로 말하면서 악명을 전하에게 돌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원익은 비록 경자년간에는 전하께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죄를 짓고 떠나는 것을 면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전하가 우순과 같은 덕을 지녔다고 말하면서 큰 성인의 장한 덕을 모두 흠모하고 있습니다.
여러 상소의 내용을 놓고 본다면, 신은 일찍이 계축년간에 대신들이 글을 올릴 때 참여하였으니 신은 바로 죄를 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상직에 외람되게 몸담고 있는 지가 지금 4년이 되었으니 매우 미안합니다. 그리고 항상 해조에서 전하는 공문이나 하리들이 떠나기를 청하는 것을 보면 대비에게 문안하는 등의 일들을 전례대로 하였으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신이 일찍이 선조(先朝)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본 적이 있는데 장구령(張九齡)이 태자를 교체하려 할 때를 당하여‘신은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 말은 죽어도 받들지못하겠다는 뜻으로 진덕수(眞德秀)가 이를 칭찬하였습니다.
망령된 생각에 신 또한 구령을 본받고 싶어서 일찍이 말하기를 ‘모든 관리가 신(臣)자를 써서 사은 숙배를 하고 만약 바꾼다면 이것은 사람들에게 반역을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이번의 일이 이것과 마찬가지므로 혹시 변란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여겨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범한 것이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큰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상소문이 하도 많아서 비록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이므로 놀랍고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며 어떻게 처리하여야만 인심을 감복시키고 뒷세상에 할 말이 있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씨(姜氏)와 무후(武后)의 일은 그것이 과연 이 일과 모두가 유사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진혜제(晉惠帝)때 양태후(楊太后)의 일은 망발인 듯합니다.
어찌 이것을 성명의 세상에다 견주어서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장화(張華)는 ‘별궁에 거처하게 함으로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은정을 온전히 해야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다른 궁전에 각각 거처하게 한다는 전날의 말과 같을 뿐입니다.
왕황(王晃)등이 전적으로 내쫓을 것을 주장하였고, 주희(朱熹)는《강목(綱目)》을 편찬할 때에 동양(董養)의 말을 인용하여 썼는데, 그 뒤에 과연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힌 일이 있습니다.
진덕수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편찬할 때 이 사실을 간추려서 쓰기를‘동양이 태학에서 공부할 때 명륜당에 올라 탄식하기를「조정에서 이 집을 세운 것은 장차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하늘과 사람의 도리가 없어졌으니 큰 난리가 장차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고,
진덕수는 논하기를 ‘모후(母后)에게 내쫓기는 모욕까지 준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늘과 사람의 도리가 여기서 다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식견있는 사람이 장차 큰 난리가 일어날 줄을 알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 그것을 전례로 인용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장황후에 대해서는 주희가 ‘이보국(李輔國)이 죽였다’라고 특별히 썼습니다. 그리고 안진경(顔眞卿)은, 숙종때는 봉주(蓬州)의 장사(長史)로 폄직되었고 대종(代宗) 때는 이주(利州)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니, 그때는 실지로 조정에 돌아와서 찬성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양관전(楊綰傳)에도 장황후(張皇后)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없으니, 이 말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염황후(閻皇后)는 처음에 황제의 모친을 죽였으며 중간에는 황제를 내쫓고 북향후(北鄕侯)를 내세웠고 마지막에 북향후가 죽은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을 내세우려 하였으니, 그 흉악하고 참혹한 사실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사마광(司馬光)은《자치통감(資治通鑑)》에다 주거(周擧)가 이합(李郃)에게 한 말을 인용하여 쓰기를‘「옛날 고수가 항상 우순(虞舜)을 죽이려 하였으니 우순은 더욱 조심하였다. 정(鄭)나라 무강(武姜)은 장공(莊公)을 죽이려고 음모하였으나 장공이 저승에 가서나 만나겠다고 맹세하였으며, 진시황(秦始皇)은 어미의 행실이 나쁜 것을 원망하여 오랫동안 인연을 끊었는데, 그 뒤에 영고숙(穎考叔)과 모초(茅焦)의 말에 감동하여 다시 자식의 도리를 행하였으므로 전(傳)에다 기록하여 칭찬하였다.
지금 여러 염씨들이 갓 처단되고 태후가 이궁(離宮)에 갇혀 있으니 만약 원망하고 시름하다 병이 생겨 하루아침에 뜻밖의 변고가 발생하면 주상께서는 장차 무슨 말로 온 나라에 지시하겠는가?
그러므로 조정에 비밀히 글을 올려 태후를 받들도록 하고 여러 신하를 데리고 이전과 같이 문안함으로써 하늘의 의사에 순종하고 사람의 기대에 대답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합이 곧 글을 올려 제의하였더니 다음 해에 순제가 태후에게 문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거가 말한 것을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그의 의견을 따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가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너무 빠르다는 진관의 말도 역시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사실과 같은 것은 죽은 뒤에 빈말로 단죄한 것으로 지금은 해마다 한식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이것도 오늘의 일에 견줄 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여러 상소문의 결론에서 중국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많은데,
임진년 후부터는 우리나라의 모든 일에 대하여 중국이 참견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석상서(石尙書)·정응태(丁應泰)·조즙(趙楫)·이성양(李成樑)등의 무리 중에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만약 우리나라에 일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뜻밖의 근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 상소가운데 따져 물을 것이 한개 조항이라도 있으면 대체로 신이 근심하는 것과 대략 같을 것이며, 중국 사람들은 욕심이 끝이 없으므로 만약 이 기회를 노리기라도 한다면 수만냥의 뇌물로는 아마 만족스럽게 여기지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동양·진덕수처럼 말한다면 어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근년에 역적의 족속인 역관(譯官)을 중국에 보내지않는 것은 앞을 내다보는 원대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상소에는 군현(郡縣)의 청(請)이 들어 있었는데 말을 하자니 기가 막히고, 또 진강 유격이 무섭다는 말이 있으니 소견이 없지 않은 말입니다.
예부에 자문을 띄우겠다고 한 말이나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한 말은 바로 자는 범의 꼬리를 밟아서 없는 일을 만들어내려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헤아리소서.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은 아마 먼 곳에 있는 신하들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식견이 어두워서,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위치에 계시게 하고 싶으나 스스로의 논의를 주장하지는 못하고 사마광·주희·진덕수등 여러 사람의 말을 엮어서 먼저 헌의한 것입니다.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어서 처리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상소한 사람들은 신이 책임을 회피한다고 비난합니다만 전하께서는 역시 인정을 아실 것입니다.
요즘 본대로 말씀드리면 책임을 회피한 사람은 신 한 사람뿐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신의 논의가 허망한 것이라면 귀양가거나 형벌을 받게 되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여러 대신들이 ‘집에 있어서 모른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이항복·정인홍·정창연·한효순 등에게 물어보고 또 조정의 의견을 널리 수집해서 처리한다면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좋은 방책을 드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22일에 밤부터 낮에 이르기까지 잇달아 천둥이 치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모든 음기가 이미 극도에 이르고 새로운 양기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이때를 당하여 노기띤 우레소리가 이처럼 요란스럽게 오랫동안 천지를 뒤흔들었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재앙입니다.
형남(荊南)에서 10월 달에 우레가 친 것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더구나 지금 동짓달에 10일 동안 계속해서 안개낀 가운데서 갑자기 우레가 치는 경우이겠습니까?
변고란 공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신은 앞으로 무슨 조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의중(徐義中)의 상소에서 대신이 직책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으니, 이번에 하늘이 노한 원인도 신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신과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오랫동안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음양을 조화시키지 못하여서 이런 큰 변고를 초래하였으니 이같은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을 파면시키고 새로 정승을 임명하는 것이 실로 일에 합당하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우선 어리석은 신을 중한 죄로 다스림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대답하소서. 신이 지금 혼자서 일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부득이 전하를 번거롭게 하였으니 진실로 황공합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領議政奇自獻上箚曰:伏以諸疏下廟堂事, 啓下。 臣本無學識, 才劣望輕, 而適會乏人, 備員政府。 臣若主張, 遽爾廢之, 國史記之曰: “某也擅廢之。” 云, 則非但得罪於萬世公議, 亦必爲聖朝之羞矣。 聖明亦必罪臣等擅廢而不赦。 前日臺諫, 只爲各處之論, 亦未免削職, 今若有此事, 而日後或有請罪臣等者, 則雖聖慈, 必不得赦之。 況今領府事臣李恒福、左議政臣鄭仁弘在外, 前右相臣鄭昌衍杜門不出, 今右相臣韓孝純呈病有日, 大臣之中, 獨臣在京, 黽勉行公, 如此莫大莫重之事, 豈能獨自善處? 癸丑年間, 諸大臣啓辭時, 臣亦隨參, 其中有父雖不慈等語, 則不可前後異議也。 頃年李元翼被譴時, 三司以爲: “朝廷本無此心, 而元翼老悖妄言, 歸惡名於聖上。” 故元翼雖庚子年間, 盡忠於殿下之人, 而猶且不免得罪以去。 中外之人皆言, 聖上有虞舜之行, 莫不欽仰大聖人之盛德也。 以諸疏之意見之, 則臣旣曾參於癸丑年間大臣啓辭, 臣乃負罪之人。 而叨忝相職, 今已四年, 極爲未安。 且常見該曹傳關及下吏請去, 則問安等事, 循例爲之, 臣罪爲大。 臣曾在先朝, 見《大學衍義》, 張九齡當易樹時有“臣不敢奉詔”之語, 乃是抵死不奉之意, 眞德秀美之。 妄意欲效九齡, 嘗曰: “百官書臣字肅拜, 若易之, 則是敎人以逆也。” 因料此事, 與此一樣, 恐或致亂, 不知自觸於罪, 臣之罪至此尤大。 諸疏汗漫, 雖不能詳記, 玆實無前之事, 驚惶罔措, 不知何以處之, 然後乃可以服人心而有辭於天下後世也。 如姜氏、武后事, 不知其果一一相類, 而晉惠帝時楊太后事, 似是妄發, 豈可擬議於聖明之世乎? 昔時張華以爲: “宜處別宮, 以全終始”, 此則只如前日各處之說而已。 王晃等專主廢之, 朱熹修綱目時, 取董養之言書之, 其後果有五胡亂華之事。 眞德秀修《大學衍義》, 略書曰: “董養遊太學, 升堂嘆曰: ‘朝廷建斯堂, 將以何爲乎? 天人之理旣滅, 大亂將至矣。’” 眞德秀論曰: “至於母后亦罹廢辱, 毌乃已甚乎? 天人之理, 於是掃滅。 此識者所以知大亂之將作也。” 云, 今不可援以爲例明矣。 張后則朱熹以李輔國之殺特書。 而顔眞卿則肅宗朝貶蓬州長史, 代宗朝除利州, 不拜則其時固未嘗還朝而贊成之也。 楊綰傳亦無言及張后之事, 未知此言, 出於何書也。 閻后始焉殺帝之母, 中焉廢帝立北鄕侯, 終焉北鄕侯薨後, 又欲立他人, 其凶慘之事至此, 而司馬光《資治通鑑》取周擧謂李郃之言, 而書之曰: “昔瞽瞍常欲殺舜, 舜事之愈謹; 鄭武姜謀殺莊公, 莊公誓之黃泉; 秦始皇怨母失行, 久而隔絶, 後感穎考叔、茅焦之言, 復修子道, 書傳美之。 今諸閻新誅, 太后幽在離宮, 若悲愁生疾, 一朝不虞, 主上將何以令於天下乎? 宜密表朝廷, 令奉太后, 率群臣朝覲如舊, 以壓天心, 以答人望。 李郃卽上疏陳之, 明年順帝朝之。” 云。 其時周擧之言, 非但不罪, 又能從之, 其亦可尙也已。 陳瓘太亟之言, 亦是不爲之意也。 如神德之事, 身後以空言處置之事, 而今則每年寒食祭之, 亦非今日可擬之事也。 況諸疏結語, 多在於天朝, 自壬辰以後, 我國凡事, 天朝無不照管。 況石尙書、丁應泰、趙楫、李成樑等族黨, 亦必猶有存者, 若聞我國之有事, 則不無意外之患。 其疏中恐有詰問之一款, 則大抵與臣所憂略同, 天朝之人志欲無窮, 若乘此機, 恐不以數萬兩爲足也。 若或有董養、眞德秀之言者, 則可不懼哉? 近年逆屬譯官, 不送於天朝, 是爲先見遠慮也。 疏中有郡縣之請, 言之氣塞, 又鎭江遊擊可畏之言, 不無所見。 其曰咨禮部、其曰告天子者, 正李睡虎之尾, 而生事於無事中也。 伏願殿下臨事而懼, 深思熟計焉。 臣雖無狀, 忠君愛國之誠, 必不在於疏遠之下也。 臣意見昏塞, 欲納吾君於無過之地, 而不能自爲立論, 謹掇拾司馬光、朱熹、眞德秀等諸人之意, 倣此先爲獻議。 此事至重至大, 極爲難處之事。 疏者以推諉非臣, 子殿下亦知人情矣。 以近日所見言之, 則推諉者, 恐非獨臣而已也。 若臣議虛妄, 雖加黜戮, 亦所不辭。 諸大臣其敢曰: “在家不知”, 請問于李恒福、鄭仁弘、鄭昌衍、韓孝純等, 且廣收廷議而處之, 必有爲國家獻善策者。 今二十二日自夜達晝, 連有大雷之變。 當此六陰旣極、一陽未生之時, 雷怒之聲如是勃勃, 移時大震, 則災異之甚, 近古所無。 荊南十月之雷, 古今傳說, 況今至月之雷, 忽發於連旬陰霧之中乎? 變不虛生, 必有所召。 臣未知將有何應, 徐義中疏, 指爲大臣等失職, 則是天之怒, 在於臣等之身也。 如臣無狀, 久叨匪據, 不能燮理陰陽, 致此大異, 將焉用彼相哉? 策免改卜, 實合事宜。伏乞聖明爲先重律愚臣,以答天譴。臣今獨當,不得已瀆擾天聽,誠惶誠恐。死罪死罪。
인조 27권, 10년(1632 임신/명숭정(崇禎) 5년) 10월 6일(경오) 1번째기사
인목왕후를 장사지내며 지은 지문과 애책문. 대제학 장유가 짓다
인목왕후(仁穆王后)를 장사지냈는데 그 지문(誌文)에,
“인목왕후의 산릉(山陵)에 흙을 덮는 일이 완성되자, 상이 신 유(維)가 사액(詞掖)1068)의 관장(官長)이라 하여 현궁(玄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시기에, 신이 명을 받고 황공스러웠으나 스스로 직책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김씨(金氏)로서 선계는 신라(新羅)왕족에서 나왔다. 그 뒤에 바른 말로 간하다 죄를 입고 시염성(豉鹽城)으로 귀양간 이가 있어 자손들이 인하여 관향을 삼았는데 뒤에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시조(始祖)는 김섬한(金暹漢)인데 고려의 사문박사(四門博士)이며, 4대를 지나 도(濤)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절행이 있어 황조(皇朝)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안구현승(安丘縣丞)에 제수되었고,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으며, 또 4대가 지나 충정공(忠貞公) 김전(金詮)에 이르러서는 영의정 벼슬을 하여 청백(淸白)으로써 소문났는데,
왕후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의 휘(諱)는 안도(安道)인데 현령(縣令)으로 좌찬성을 증직하였으며,
조부의 휘는 오(祦)인데 사정(司正)으로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아버지의 휘는 제남(悌男)인데 문과(文科)로 벼슬길에 나아가 대각(臺閣)을 역임하고,
천조랑(天曹郞)으로서 작위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올랐는데,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인 노씨(盧氏) 장사랑(將仕郞) 게(垍)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1069) 갑신년1070) 11월 병술(丙戌)에 왕후를 낳았다.
왕후는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고
선묘(宣廟)가 계비(繼妃)를 뽑을 적에, 왕후로 뽑히어 임인년1071) 7월 13일에 왕비로 책봉되어 사신을 보내 황조(皇朝)에 고명(誥命)을 청하니, 신종황제(神宗皇帝)가 고명·관복(冠服) 및 채폐(綵幣)등의 물품을 내려 주었다.
왕후가 이미 중전(中殿) 지위가 정해지자 스스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항상 장공예(張公藝)의 백번 참는다는 대답을 흠모하여 백인(百忍)을 써서 창문벽에 걸어놓고서 스스로 성찰하였다.
겨울철에는 위졸(衛卒)들이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때때로 동옷·가죽모자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하사하곤 하니, 선묘가 일찍이 칭찬하기를 ‘내전(內殿)의 인자함은 비록 옛날의 어진 왕비일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갑진년1072)에 군신(群臣)들이 휘호(徽號)를 소성(昭聖)이라고 올렸다.
무신년1073)에 선묘(宣廟)가 승하하자 슬퍼하여 야윔이 예에 지나쳐, 3년을 다하도록 포최(布縗)를 벗지 아니하고 채소와 과일을 잡수지 아니하였다.
경술년1074)에 또 휘호를 정의(貞懿)라고 올렸다.
당초에 광해(光海)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스스로 덕망을 잃은 줄 알고 있다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게 되자 더욱 시기심을 품어, 이미 왕위를 물려받고서도 오히려 옛날 감정을 가져 왕후를 대우함에 있어 다시는 자식의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간신 이이첨(李爾瞻)등이 그 시기를 틈타 뜻을 펴, 먼저 유언비어로써 틈을 얽어 남몰래 사형수(死刑囚)를 사주하여 옥중(獄中)에서 고변(告變)하도록 하여, ‘연흥(延興)이 영창(永昌)을 끼고서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여, 없는 죄를 꾸며서 옥사(獄事)를 만들어 연흥이 세아들, 한사위와 더불어 모두 살해당하였으며, 영창은 겨우 여덟 살이라서 왕후가 항상 그를 품속에 품고 있었는데 광해가 빼앗아다 죽였고, 노부인(盧夫人)은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이첨(爾瞻)이 그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앞장서서 말하기를 ‘모후(母后)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으니 마땅히 폐위해야 한다.’고 하도록 하여 백관들을 위협하여 정청(庭請)하자, 선조(先朝)의 옛 신하 이항복(李恒福)·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등 5, 6인이 유독 바른 의론을 가지고서 ‘춘추(春秋)의 의리에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삼지아니한다’고 말하니, 광해가 비록 더욱 화를 냈지만 그래도 감히 갑자기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궁(西宮)에 유폐하여 문을 폐색하고 경비하여 겨우 물과 불만을 유통시켜 군색하고 곤욕스러움이 수만 가지였다.
왕후가 원통하고 괴로움이 뼈에 사무쳐 항상 자결하려고 하다가, 모신 사람들의 보호에 힘입어 다행히 보전하게 되었으니, 아, 어찌 차마 형언할 수 있겠는가?
강상(綱常)이 끊어져 인류(人類)가 금수(禽獸)지경에 빠진 지 장차 1기(紀)가 되려던 차에, 천계(天啓)1075) 계해년1076) 3월에 이르러 금상(今上)1077)이 대의(大義)를 걸고 일어나 내란을 평정하고 왕후를 받들어 복위시키니,
왕후가 하교하여 광해의 죄악을 낱낱이 들어 책망하고 그를 폐위하여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금상에게 명하여 대위(大位)를 바르게 하여 선묘(宣廟)의 왕통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미 임금 자리에 오르자, 왕후를 높여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삼고 휘호(徽號)를 더 올려 명렬(明烈)이라고 하였으며, 연흥부원군의 관작을 복직시키고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해도(海島)에서 노부인(盧夫人)을 맞아오도록 하여 인륜이 다시 바르게 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기뻐하였다.
왕후가 항상 시중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몸이 온갖 환난을 만나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성손(聖孫)이 종사(宗社)를 다시 편안하게 하여 나를 물불 속에서 구하고, 나의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아 나로 하여금 만년의 존귀하고 영화스러운 복을 누리게 하였으니, 어찌 천행(天幸)이 아니겠느냐? 나는 죽어도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핍박하므로 상이 공주(公州)로 행행(行幸)하자, 왕후가 글을 내려 8도에 효유하여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는 마음들을 안정시켰다.
왕자 이공(李珙)이 광해 시대를 당하여 폐묘(廢母)하자는 의논에 부회(傅會)하여 말이 몹시 도리에 어긋났었는데도, 왕후는 오히려 그를 위하여 용서해 주었고, 공의 모역(謀逆)사실이 발각됨에 이르러서는 조정 신하들이 법에 의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차마 죽이지못하자, 왕후가 하교(下敎)하여 종사의 대계(大計)와 역적을 토벌하는 대의(大義)로써 효유하여 말이 엄절하니, 공이 마침내 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갑자년1078)과 경오년1079)에 상이 두 번이나 풍정(豊呈)을 올리니, 왕후가 전쟁과 흉년으로 국가가 피폐한 까닭으로 누차 사양하여 즐거이 받아들이지 않다가, 상이 지성으로 굳이 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10년 동안에 양궁(兩宮)이 인자하고 효도하여 간격이 없이 화기애애하니,
사방에서 감동하여 기뻐하지않은 이가 없었다.
숭정(崇禎)1080) 임신년1081) 여름에 왕후가 병으로 누운 지 한달이 지나 더욱 위독하여, 6월 28일 갑오(甲午)에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니, 춘추(春秋)가 49세였다.
유사(有司)가 시법(諡法)을 의논하되,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하는 것[施仁服義]을 인(仁)이라 하고, 덕(德)을 펴고 의를 지키는 것[布德執義]을 목(穆)이라 한다고 하여, 드디어 존시(尊諡)를 인목(仁穆)이라고 올리고, 또 휘호(徽號)를 광숙장정(光淑莊定)이라고 올렸다.
이해 10월 초6일 경오(庚午)에 목릉(穆陵)의 동쪽 산등성이의 갑좌경향(甲坐庚向)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그것이 목릉에 가까워 부장(祔葬)과 같기때문이다. 인하여 목릉으로 칭하였다.
왕후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계축화변(癸丑禍變)으로부터 3년동안 밥을 먹지 아니했고, 복(服)을 벗고서는 다만 미음만을 먹었으며, 이미 복위(復位)되고서도 오히려 어육(魚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상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간곡하게 권한 뒤에야 비로소 평상시의 수라를 회복하였으니, 대개 소밥을 먹은 지 전후 통틀어 17년이었다.
검소한 것을 편안히 여겨 평생에 금수(禽獸)와 주취(珠翠)를 사용한 적이 적었고 항상 명주비단만을 입었을 뿐이며, 선묘(宣廟)에게 누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대우함에 있어 은의(恩義)를 곡진히 하였고, 내외 종족(宗族)들에게 돈목하여 친소간에 각각 마땅하게 하였다.
종들을 부림에 있어서도 은혜와 위엄이 겸하여 지극하기 때문에, 비록 유폐되어 곤욕스러움에 오랫동안 있었어도 좌우에 한사람도 감히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왕후가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와 정명공주(貞明公主)를 낳았는데, 영창은 흉화(凶禍)로 일찍 죽고 공주는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 왕후의 성실하고 그윽한 아름다운 덕으로서 불행하게도 인륜의 변을 만나온 집안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는데, 마침내 금용(金墉)1082)의 화를 모면하였던 것은 우리 성상께서 사직을 안정시킨 한번의 거사에 힘입은 것이다.
전에는 울다가 뒤에 웃어 다시 국양(國養)의 융성함을 누린 지 겨우 10년이 되었는데, 강릉(岡陵)과 같은 장수(長壽)를 하늘이 마침내 인색하게 하였으니, 아, 애통하다. 오직 그 아름다운 덕음(德音)이 없어지지 아니한 것들을 정석(貞石)1083)에 새기어 능묘에 세워, 장차 동관(彤管)으로 기록한 것과 더불어 영원히 오래도록 전하게 될 터이니, 아, 훌륭하도다”하였는데,
이 지문(誌文)은 대제학 장유(張維)가 지은 글이다.
애책문(哀冊文)에,
“숭정(崇禎) 5년 임신년1084) 6월 28일 갑오(甲午)에,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가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시자, 이해 10월 초6일 경오(庚午)에 장차 목릉(穆陵)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니, 이는 예입니다.
그림그려진 찬궁(欑宮)이 막 열릴 적에 그 의장이 이미 도열되어, 봉조(鳳旐)1085)가 드리워지고 용순(蘢楯)1086)이 준비되었는데, 귀찮은 안개가 끼어 차가웁고 새벽바람이 처절함을 돋웁니다.
애손(哀孫) 주상전하가 붙들어잡고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으므로 상심하여 사모함이 더욱 새로워, 기나긴 가을이 영원히 적막할 것을 비통하게 여기고 깊은 밤이 새지 않을 것을 애통스럽게 여기어 동관(彤管)을 가진 이에게 명하여 아름다운 덕행을 찬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 밝은 조정에서 수신(修身)제가(齊家)하여 교화가 이루어지니, 참으로 하늘이 배필을 만들어 왕후의 규범이 따라서 정숙하였습니다.
증사(曾沙)1087)가 영기(靈氣)을 기르고 찬란한 무성(務星)이 정기를 쏟아, 훌륭한 왕비를 특별히 탄생시켜 성명(聖明)의 덕을 짝하였습니다.
즐거움은 종고(鍾鼓)에 있고 법도는 금옥(金玉)에 빛나, 예를 실행하여 몸을 삼가고 시(詩)를 나열하여 규칙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갓끈과 면류관 덮개가 결손된 것이 없고 가는 갈포(葛布)나 거친 갈포를 싫어함이 없으니, 이 왕후의 가르침에 힘입어 임금의 덕이 더욱 빛났습니다. 그런데 운이 양구(陽九)1088)에 모이고 몸이 온갖 환난을 당하여, 창오(蒼梧)에서 임금의 수레가 멀리 떠나가니 반죽(班竹)에 눈물이 젖었습니다.1089)
강회(康回)1090)가 몹시 성내어 우리 중전을 폐위하니, 금용(金墉)에 한번 갇힌 이상 대수(大隨)1091)를 누가 엿볼 수 있었겠습니까?
머리털을 자르고1092) 의뢰할 데가 없었는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품속에서 빼앗아가 죽게 하였으니 부모도 몹시 불쌍하고 형제도 몹시 가여워하였습니다. 인륜이 땅에 떨어져 나라의 운명이 아슬아슬하였는데, 1기(紀)동안 원통한 마음을 품어 씀바귀를 냉이처럼 달게 여기셨습니다.
그러자 천도(天道)가 순환하여 성손(聖孫)이 의리를 들고 일어나 서궁(西宮)이 자물쇠가 열리고 동조(東朝)1093)가 복위되었습니다.
사랑과 효도에 차이가 없고 존귀하고 영화로움이 겸하여 극에 달하였으며, 물건을 갖추어 봉양하니 정사에 관여치 않으면서 스스로 한적하게 생활하였습니다. 큰 교화가 흠뻑 젖고 오복(五福)이 퍼져, 강릉(岡陵)같은 수명을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 축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상(馮相)1094)이 요기(妖氣)을 보고하고 태사(太史)의 점이 흉하여, 무지개가 계백(桂魄)1095)을 휘감고 화성이 헌성(軒星)으로 들어가자, 열병(熱病)에 갑자기 걸려 유로(兪盧)1096)의 의술(醫術)이 다하고, 표어(飆馭)109 7)가 머무르지 않아 성산(星算)1098)이 영원히 끝났습니다.
후한 복이 떨어지고 자운(紫雲)1099)이 걷히니, 온갖 무리가 허둥지둥 놀라고 삼광(三光)1100)이 어두워졌습니다.
아, 슬픕니다. 하늘의 마음을 물어보기 어려운데 신(神)의 이치를 뉘라서 자세히 알겠습니까?
어진 사람이 꼭 오래 사는 것은 아니고 착한 사람이 간혹 상서(祥瑞)를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세 조정(朝廷)에서 영화를 누린 것은 얼마 안되는데, 10년 동안 유폐되어 곤욕을 치른 것은 어찌 그리도 길었습니까?
속세의 누적된 잡일을 싫어하여 참다운 생을 아득한 데에 의탁하였나 봅니다. 요수(瑤水)1101)에서 서왕모(西王母)를 심방하고 은하수에서 천손(天孫)11 02)을 방문하여, 옥난간의 하늘꽃을 구경하고 취굴(聚掘)1103)의 특이한 향기를 남겼습니다. 아, 슬픕니다.
한 임금이 사모함에 백관들이 피눈물로 울어, 보좌(黼座)1104)가 철거되어 의려(倚廬)1105)가 되고 주류(珠旒)가 마질(麻絰)로 변하였습니다.
남긴 선패(仙珮)1106)는 정지해 있고 엄연한 영의(靈衣)1107)는 그냥 진열해 놓았는데, 합문(閤門)에 달이 비춰 처량하고 바람에 발[簾]이 울어 소슬합니다.
엄숙한 궁궐을 떠나 위험스런 서리 내린 들을 밟고서, 가고 또 가 구름을 타고 가셨으니 슬픔중에 보다 더 슬픈 것은 영원히 이별하는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백호(白虎)1108)에서 정기가 솟아오름에 청오(靑烏)1109) 능묘자리를 합당하게 잡아 은해(銀海)1110)가 깊디깊고 주구(珠丘)1111)가 두리둥실합니다.
구의(九疑)1112)에 의로운 무덤이 가련하지만 삼릉(三陵)1113)이 산기슭을 연한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향불을 침전(寢殿)에서와 마찬가지로 올리고 상설(象設)1114)을 빈 골짜기에 마련하였으니 저승과 이승이 한 이치로 알기에 영령이 막히지 않을 줄로 느낍니다.
아, 슬픕니다. 하늘의 조화는 무궁하고 짧은 생명은 끝이 있어, 한 기운이 굴신(屈伸)함에 따라 온갖 만물들이 함께 죽게 됩니다.
무엇이 오래도록 영원히 남는가하면 오직 덕음(德音)이라야만 없어지지 아니하고, 비록 좋은 자질을 가진 이의 아름다운 행실일지라도 오히려 서경(書經)과 시경(詩經)에서 증거하여 믿기때문에 완염(琬琰)1115)에 의탁하여 공덕을 기재하고 한청(汗靑)1116)에까지 아울러 기록하여 분명히 전하였습니다. 아, 슬픕니다.’”하였는데,
이 애책문은 대제학 장유가 지은 글이다.
註1068]사액(詞掖):예문관의 별칭.註1069]만력(萬曆):명신종(明神宗)의 연호. 註1070]갑신년:1584 선조17년 註1071]임인년:1602 선조35년 註1072]갑진년:1604 선조37년 註1073]무신년:1608 선조41년 註1074]경술년:1610 광해군2년 註1075]천계(天啓):명희종(明熹宗)의 연호 註1076]계해년:1623 인조 원년 註1077]금상(今上):인조를 가리킴 註1078]갑자년:1624 인조2년 註1079]경오년:1630 인조8년 註1080]숭정(崇禎):명의종(明毅宗)의 연호 註1081]임신년:1632 인조10년 註1082]금용(金墉):성(城) 이름. 진(晋)나라 양후(楊后)가 추방당하여 여기에서 거주하였다.《독사방흥기요(讀史方興紀要)》註1083]정석(貞石):단단한 비석 註1084]임신년:1632 인조10년 註1085]봉조(鳳旐):봉황새가 그려진 기.註1086]용순(蘢楯):용이 그려진 영구차 註1087]증사(曾沙):한(漢)나라 원후(元后)가 탄생한 지명 註1088]양구(陽九):재난 註1089]창오(蒼梧)에서 임금의 수레가 멀리 떠나가니 반죽(班竹)에 눈물이 젖었습니다:창오는 산이름이며 반죽은 아롱진 무늬가 있는 대나무이다. 순(舜)임금이 순수(巡守)하다가 창오에서 죽자, 그의 왕비 아황(娥皇)·여영(女英)이 소상강(瀟湘江) 대나무에 눈물을 뿌리니, 그 대나무에 아롱진 무뉘가 생겼다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이는 선조(宣祖)의 승하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것을 견주어 말한 것이다 註1090]강회(康回):요(堯)임금의 신하 공공(共工)의 이름인데, 음란 무도하였다. 이는 무도한 광해군을 비유한 것이다 註1091]대수(大隨):큰 지하도(地下道).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그의 어머니 무강(武姜)이 모반한 아우 공숙단(共叔段)을 도와준 것을 증오하여, 마침내 무강을 성영(城穎)에 안치하고서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서로 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뒤에 후회하여 영고숙(穎考叔)의 말을 따라 대수(大隧)를 뚫어놓고 그 속에서 모자(母子)가 서로 만나 보아 옛날로 되돌아간 고사(故事)가 있는데, 여기서는 대수가 전의되어 유폐된 곳을 뜻한다.註1092]머리털을 자르고: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구금당하자, 인목대비가 머리털을 잘라 신표를 보이면서 김제남을 석방해달라고 하소연한 고사(故事)《계축일기(癸丑日記)》註1093]동조(東朝):동궁(東宮)註1094]풍상(馮相):천문(天文)을 맡은 관직이름. 註1095]계백(桂魄):달의 별칭.註1096]유로(兪盧):옛날 명의(名醫)인 유부(兪附)와 편작(扁鵲)을 가리킴 註1097]표어(飆馭):바람을 타고 간다는 신선수레 註1098]성산(星算):천문(天文)과 산수(算數) 註1099]자운(紫雲):인자한 마음이 구름처럼 널리 덮인 것을 말함 註1100]삼광(三光):해와 달과 별 註1101]요수(瑤水):신선이 산다는 곳 註1102]천손(天孫):별 이름. 곧 직녀(織女) 註1103]취굴(聚掘):신선이 산다는 섬 이름 註1104]보좌(黼座):임금의 좌석 註1105]의려(倚廬):상인(喪人)이 거처하는 곳 註1106]선패(仙珮):신선이 평소에 차던 패옥 註1107]영의(靈衣):죽은이가 평소에 입던 옷 註1108]백호(白虎):묘소의 주산(主山)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산 註1109]청오(靑烏):풍수학(風水學) 註1110]은해(銀海):옛날 임금의 능(陵)속에 수은(水銀)을 넣어 강하(江河)와 바다를 상징한 것을 말함.《한서(漢書)》초원왕전(楚元王傳).註1111]주구(珠丘):구슬이 쌓여 이루어진 구릉(丘陵).《습유기(拾遺記)》에 “순(舜)임금을 창오(蒼梧)의 들에 장사지냈는데, 참새와 같은 빙소(憑霄)라는 새가 때때로 청사주(靑砂珠)를 입에 물고 창오의 들로 날아와 떨어뜨려 그것이 쌓여 구릉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인목대비의 목릉(穆陵)을 이에 비하여 지칭한 것이다 註1112]구의(九疑):산 이름. 일명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 순(舜)임금의 무덤이 있다. 여기서는 인목대비의 능이 있는 양주(楊州)의 동구릉(東九陵) 검암산(儉巖山)을 이에 비하여 지칭한 것이다 註1113]삼릉(三陵): 선조(宣祖) 및 그의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와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의 세 목릉(穆陵)을 말함 註1114]상설(象設):죽은이의 생전을 상징하여 설치한 것 註1115]완염(琬琰):옥(玉)이름 註1116]한청(汗靑):역사책. 옛날에 종이가 없을 적에 댓조각을 불에 구워 즙을 빼내고 푸른 대껍질을 제거한 뒤에 역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庚午/葬仁穆王后。 其誌文曰:
仁穆王后山陵, 復土告成, 上以臣維, 忝長詞掖, 命撰玄宮之誌。 臣承命悸恐。 自惟職事, 不敢以不文辭。 謹按, 王后姓金氏, 系出新羅王族。 其後有坐直諫, 謫豉鹽城, 子孫因籍焉, 後改延安府。 始祖暹漢, 高麗四門博士。 歷四代至濤, 有文章節行, 登皇朝制科, 宣授東昌府安丘縣丞, 東還, 官至密直提學。 又四傳而至忠貞公詮, 官領議政, 以淸白聞, 於后爲高祖。 曾祖諱安道, 縣令贈左贊成。 祖諱祦, 司正, 贈領議政。 考諱悌男, 以文科進, 歷官臺閣, 天曹郞, 進爵延興府院君領敦寧府事。 娶光山府夫人盧氏, 將仕郞垍之女, 以萬曆甲申十一月丙戌, 生后。 幼有異質, 懿仁王后薨, 宣廟選繼妃, 后膺選, 壬寅七月十三日, 冊爲王妃, 遣使請命于皇朝, 神宗皇帝賜誥命、冠服及綵幣等物。 后旣正坤極, 克自敬畏, 常慕張公藝百忍之對, 書揭窓壁, 以自省焉。 冬月念衛卒寒苦, 時製襦衣、皮帽以賜之, 宣廟嘗稱曰: “內殿慈仁, 雖古賢妃, 無以過之。” 歲甲辰, 群臣進徽號曰昭聖。 戊申宣廟昇遐, 后哀毁踰禮, 盡三年不脫布縗, 不進菜果。 庚戌, 又進徽號曰貞懿。 始光海吊宮, 自知失德, 及永昌大君生, 益懷猜忌。 旣襲位, 猶挾舊憾, 待后無復子道。 奸臣李爾瞻等, 乘時得逞, 先以蜚語搆釁隙, 陰嗾死囚, 從獄中上變, 謂延興挾永昌, 將爲亂, 羅織成獄。 延興與三子、一壻, 皆遇害。 永昌甫八歲, 后常置諸懷中, 光海奪取殺之, 盧夫人栫棘于濟州。 爾瞻使其黨倡言, 后母道已絶, 當廢, 脅百僚庭請之。 先朝舊臣李恒福、李元翼、李德馨等五六人, 獨持正議, 謂《春秋》之義, 子不讎母。 光海雖益恚, 猶不敢遽加無道, 遂幽之西宮, 錮門警守, 僅通水火, 窘辱萬狀。 后痛毒切骨, 常欲自裁, 賴侍御者護持, 幸而得全。 嗚呼, 尙忍言哉! 綱常斁絶, 人類淪於禽獸者, 將一紀矣。 至天啓癸亥三月, 今上奮大義、定內亂, 奉后復位。 后下敎, 數光海罪惡廢之, 放于江華, 命今上正大位, 承宣廟之統。 上旣踐阼, 尊后爲大王大妃, 加進徽號曰明烈, 復延興官爵, 備禮改葬, 遣使迎盧夫人于海島, 彝倫復正, 中外大悅。 后常語侍者: “予身遭百罹, 頑命不絶, 得見聖孫, 再安宗社, 拯予水火中, 復予父母、兄弟之讎, 俾予享晩景尊榮之福, 豈非天幸歟? 予死無憾矣。” 李适反, 兵逼京都, 上幸公山, 后下書曉諭八路, 以定危疑。 王子珙, 當光海時, 傅會廢母之議, 辭絶悖逆, 后猶爲之容貸。 及珙謀逆事發, 廷臣請按法, 上不忍加誅。 后下敎, 諭以宗社大計, 討逆大義, 辭旨嚴截, 珙竟伏法。 甲子、庚午兩年, 上再進豐呈, 后以兵荒國弊, 累讓不肯受, 上至誠固請然後許之。 十年之內, 兩宮慈孝無間, 和氣藹如, 四方無不感悅。 崇禎壬申夏, 后寢疾, 閱月而彌篤, 六月二十八日甲午, 薨于仁慶宮之欽明殿, 春秋四十有九。 有司議謚法, 施仁服義曰仁, 布德執義曰穆, 遂上尊謚曰仁穆; 又上徽號曰光淑莊定。 以是歲十月初六日庚午, 葬于穆陵東岡甲坐庚向之原。 以其近於穆陵, 猶祔也, 因稱以穆陵。 后天性至孝, 自癸丑禍變, 三年不嚥穀粒, 服除, 只啜糜粥。 旣復位, 猶不御魚肉, 上與中宮, 涕泣懇勸然後, 始復常膳, 蓋茹素者, 前後凡十七年矣。 安於儉素, 生平罕御錦繡、珠翠, 恒服紬帛而已。 宣廟有一姊, 遇之曲盡恩義, 敦睦內外宗族, 親踈各適其宜。 至於任使奚隷, 恩威兼至, 故雖久處幽辱, 而左右無一人敢懷二心者。 后育永昌大君㼁、貞明公主。 永昌凶夭, 公主下嫁永安尉洪柱元, 生三男一女, 皆幼。 嗚呼! 以后之懿德塞淵, 不幸値人倫之變, 闔門遘酷, 其卒免金墉之禍, 賴有我聖上靖社一擧耳。 先咷後笑, 復享國養之盛, 廑廑十稔, 而岡陵之壽, 天竟靳焉, 嗚呼, 痛哉! 惟其徽音之未沫者, 鑱之貞石, 列于幽墟, 將與彤管所記, 永垂悠久, 猗歟, 盛哉! 大提學張維之詞也。
哀冊文曰:
維崇禎五年歲次壬申六月二十八日甲午, 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薨于仁慶宮之欽明殿, 是歲十月初六日庚午, 將遷座于穆陵, 禮也。 畫欑初啓, 厥儀已列。 鳳旐將蕤, 龍輴戒轄。 苦霧凝而慘慄, 晨飆助其悽切。 哀孫主上殿下, 攀號莫逮, 摧慕彌新。 悲長秋之永閴, 痛厚夜之莫晨。 載命彤管, 俾讃芳塵。 其詞曰; 於赫熙朝, 修齊化成。 寔天作合, 壼範繼貞。 曾沙毓靈, 婺曜垂精。 篤生碩媛, 配德聖明。 樂存鍾皷, 度昭金玉。 服禮飭躬, 陳詩正則。 紘綖罔缺, 絺綌無斁。 賴玆陰敎, 益光乾德。 運鍾陽九, 身丁百罹。 蒼梧駕遠, 班竹淚滋。 康回憑怒, 絶我坤維。 金墉一錮, 大隧誰窺? 截髮無賴, 奪懷見殪。 哀哀父母, 戚戚兄弟。 彝倫墜地, 國命(旒綴)〔綴旒〕。 一紀茹痛, 荼甘如薺。 天道循環, 神孫奮義。 西宮啓鑰, 東朝復位。 武帳發命, 玉牒歸美。 再享母儀, 肇修人紀。 慈孝無間, 尊榮兼極。 備物致養, 含飴自適。 大化隆洽, 五福敷錫。 岡陵之壽, 兆庶同祝, 馮相告祲, 太史占凶。 虹纏桂魄, 火入軒星。 美疢忽嬰, 兪盧技窮。 飆馭不留, 星算長終。 厚袛震塌, 慈雲欻空。 萬彙錯愕, 三光闇瞢。 嗚呼, 哀哉! 天心難問, 神理疇詳? 仁未必壽, 善或不祥。 三朝之榮享無幾, 十載之幽辱何長? 厭塵世之積蘇, 託眞遊於混芒。 尋王母於瑤水, 問天孫於銀潢。 賞玉闌之天葩, 遺聚窟之異香。 嗚呼, 哀哉! 一人孺慕, 千官泣血。 黼座輟爲倚廬, 珠旒變以麻絰。 委仙珮兮若休, 儼靈衣兮虛設。 月閤扃兮凄淸, 風簾響兮蕭瑟。 違天居之肅穆, 踐霜郊之嵽嵲。 去復去兮乘雲行, 悲莫悲兮終天訣。 嗚呼, 哀哉! 白虎騰精, 靑烏協卜。 銀海深深, 珠丘矗矗。 憐九疑之孤墳, 幸三陵之連麓。 同香火於寢殿, 擁象設於空谷。 知幽明之一理, 感精爽之不隔。 嗚呼, 哀哉! 玄造無窮, 短生有涯。 一氣屈伸, 品物同歸。 孰長存於悠久? 惟德音之罔虧。 雖靈質之潛翳, 尙徵信乎書詩。 託琬琰以載烈, 竝汗靑而昭垂。 嗚呼, 哀哉! 大提學張維之詞也。
효종 8권, 3년(1652 임진/청순치(順治) 9년) 4월 25일(병인) 2번째기사
사복시정 이회보가 가뭄과 관련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올리다
사복시정 이회보(李回寶)가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오(吳)나라 시장에서의 애초의 마음으로 곧바로 초나라에 들어간 것이 어찌 단지 직명(職名)만을 위해서였겠습니까?587)
큰 경사가 있고난 후에 조금이라도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싶어하는 것은 신하의 다 같은 심정이며 왕도(王道)를 시행하여 훌륭한 사람을 부르고 백성들을 양육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신의 소원입니다.
서울에 온 지 이미 한달이 지났는데, 성상의 거조와 말씀에 한번도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효는 보이지않고 도리어 어지러운 세상의 현상들이 어찌 그리도 많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단 말입니까?
인도하는 말을 하기 전에는 월권행위를 한다고 벌을 주고 인도하는 말을 한 후에는 말만 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니, 뜻있는 선비와 충신들이 그 누가 기가 막히지 않겠습니까?
아, 일에 대한 실책이 하나뿐이 아니니 낱낱이 들어서 논할 수 없으며, 비오기를 비는 일도 그 근본을 잃었으니 말단적인 것만 가지고 간할 수 없습니다. 신이 제왕(帝王)이 천명을 길이 누리는 훈계588)와 공자가 ‘내가 기도한 지가 오래다’라고 한 말589)을 가지고 그 뜻을 유추하여 전하께 진달하겠습니다.
아, 고립된 구중궁궐에서 수년 동안에 걸쳐 발생한 갖가지 변란을 겪으셨습니다만, 그 가운데 큰 것만을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의 맑은 마음이 처음엔 세파에 손상을 받으시더니 조제(調劑)의 편협스러움에 추가로 손상을 받으셨으며, 처음엔 많고 많은 정사에 손상을 받으시더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사로움에 추가로 손상을 받으셨으며, 처음엔 효도와 우애에 손상을 받으시더니 참담한 변란을 만난 데에서 추가로 손상을 받으셨습니다.
이렇듯 엄청난 손상을 이미 받으셨는데, 마음이 어찌 바르겠습니까?
그리하여 노(魯)나라를 작게 여겼던 국량590)이 도리어 깊고 얕음을 엿볼 수 있게 되었으며 태산같이 무겁던 기상이 끝내는 외물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으니, 이것은 청명하신 심덕이 도에 점점 멀리 떨어져서 하늘에 부끄러움이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직한 말을 모두 배척하여 총명이 미치지못하게 되면 전하의 이목을 출입하는 자에게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데, 혹은 영립하는 사사로움과 희로(喜怒)의 불씨가 또 뒤따라 현란하게 하면 전하의 마음이 더욱 크게 병이 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를 하는 근본이 결국에는 가망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천덕(天德)과 왕도에 있어서 처음엔 지척이던 것이 결국에는 만리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지나치거나 정도에 못 미치는 거조와 중립적이 아니거나 정당하지 못한 기쁨과 노여움이 처음엔 달마다 해마다 다르던 것이 이제는 날마다 시간마다 차이가 나고 다릅니다.
신의 말이 지나치다고 하신다면 신이 청컨대 한두 가지를 대략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의 명왕(明王)은 자신을 더 책망하고 남을 덜 책망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남을 책망하는 데 밝으시므로 금부(禁府)의 조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의 명왕은 숨김없이 모두 개방해 놓았으므로 궁중과 부중이 일체가 되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궁중과 부중에 간격을 두므로 집안일과 나라일이 다릅니다. 옛날의 명왕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공론을 들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시고 관계에 치우치시므로 그런 것들이 모여 병이 되었습니다.
옛날 명왕의 방비하는 도리에 사물의 상태를 살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국론을 따르지 않아 먼저 친족을 정리하지 않으시어 결국 ‘정장공(鄭莊公)이 공숙단(公叔段)을 방어하지 못했다591)’는 기롱을 면치 못하십니다.
옛날의 명왕은 따뜻하게 길러주는 명령을 충간(忠諫)하고 직언(直言)을 하는 사람에게 항상 베풀고 차갑게 죽이는 명령을 험하고 공교로운 말을 하는 사람에게 더하였는데, 전하께서는 따뜻한 명령과 엄한 명령을 매번 반대로 행하십니다. 그래서 간교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이 날마다 집에 들어와 뱃속까지 파고들고 충성스럽고 청렴한 신하들은 날마다 줄지어 빠져 나가니 조정은 텅 비어 그 싸늘함이 마치 가을과 같습니다.
신의 말이 지나치다고 하신다면 어찌 물증(物證)을 보지 않으십니까?
양목(陽木)이 장차 왕성할 달에 금철(金鐵)의 기운이 용사하여 가을보리가 2월에 패면 보리거두기는 반드시 3, 4월에 하게 됩니다.
대체로 가을이란 금기(金氣)를 말합니다.
전하께서 숙살의 분부를 내리시는 것이 이처럼 매일 전도되시니, 신은 금철의 기운이 결국 양목에 이롭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이것을 징험이 없다고 하신다면 어찌 옛날의 증거를 보지 않으십니까?
후주(後周) 보정(保定)3년에 음부가 등 뒤에 꼬리처럼 붙어 있는 요물이 있었는데 옛 사람이 이것을 임금과 신하가 전도될 형상이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오늘날 목과 뿔 사이에 꼬리가 붙은 괴물이 나타난 경우이겠습니까?
목은 명(命)을 상징하는 것이고 머리는 존귀함을 상징하는 것인데, 하체인 꼬리가 두달 사이에 명을 상징하는 위치에 있기도 하고 존엄을 상징하는 곳에 있기도 하였습니다. 뿔은 또 군대를 상징합니다. 존귀함을 상징하는 자리와 군대를 상징하는 곳은 결코 하체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건대, 아랫사람이 국가의 운명을 휘어잡을 징조가 머지않은 가까운 시일 내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제(後齊) 천보(天保)592)중에 한 몸통에 머리가 둘인 괴물이 있었는데, 옛사람은 이것을 정사가 간사하고 아첨한 자들에게서 나오고 상하의 질서가 없는데 대한 응험이라고 하였습니다.
당(唐)나라 의종(懿宗)13년에 머리가 둘이고 귀가 넷인 괴물이 있었고, 후위(後魏) 태화(太和)593) 연간에는 귀가 셋이고 발이 여섯 개인 요물이 있었는데, 옛 사람은 머리가 둘이고 귀가 넷인 것은 천하가 통일되지 못한 응험이라고 하고 또 세개의 귀와 여섯 개의 발이 달린 괴물은 육보(六輔)가 정사를 마음대로 한 응험이라고 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의 기운이 치성하면 외물이 따라서 감동한다’하였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오늘날 치성한 기운을 가지심으로써 외물이 서로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필코 혼란을 부를 현상이 이러한데 전하께서 끝내 깨닫지 못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 대역 죄인은 비록 제거하였지만 위태함은 배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마치 심장부에 큰 종기가 있어 이제 한번 물러터진 것과 같아서 원기가 극히 허약해졌으니, 그 원기를 건장하게 하는 방법은 정직한 자를 진출시키고 사악한 자를 물리쳐 조정을 바르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장벽을 헐어놓고 복구하기를 생각하지 않으며 국가의 법을 멀리하고서 수습하지않아서 나라는 호랑이 없는 산이 되었고 조정에는 낮에도 설치는 여우가 있는데594), 전하의 살피지 못하심은 어찌 이렇게도 심하십니까?
하늘이 해괴한 물상(物象)으로 전하께 보여주는데도 전하께서 고치지 않으시므로 또 무기의 형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 말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전하께서 듣고도 소홀히 여기시는 것입니까?
무성(武星)이 낮에 나타난 것은 요즈음 들어 흔히 보는 변고이니 어찌 전하를 크게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하겠습니까마는, 2월초에 아침해가 떠오를 때 동쪽과 서쪽에서 흰 기운이 일어나 해를 가로질렀습니다.
흰 기운은 무기의 상징이므로 식자들은 모두 난리가 일어날 징조라고 말합니다. 안에 걱정은 백성들이 산속으로 숨어드는 것이며 밖에 걱정은 섬 오랑캐가 오래 전부터 병력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니, 국가의 근본인 백성들이 흩어져버릴 내란과 섬 오랑캐가 길을 빌려달라고 할 걱정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변란에 대비할 방법을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부세를 박하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함으로써 국가의 기반을 견고하게 하고, 장수를 뽑아 병사를 훈련시켜서 국가의 형세를 막강하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청명한 기운을 타고 나셨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무엇에 가리워져서 살피지 못하십니까?
가뭄에는 세가지 큰 것이 있는데 세가지 가뭄 중에 나라의 가뭄과 사람의 가뭄이 하늘의 가뭄을 초래한다고 보기때문에 신의 가뭄에 대한 논의는 세속의 말과 다릅니다.
두가지 가뭄의 요점에 대하여 그에 관한 말을 구하려 하신다면,
가뭄을 이르게 한 근본을 어찌 스스로 반성해 보지 않으십니까?
전하가 기도하신 것은 상림(桑林)595)을 얻기 위한 기도였고, 어리석은 신의 기도는 전하의 마음을 얻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전하의 마음에 진실로 신명에게 빈지가 오래였다는 공자의 마음과 오랜 세월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늘에 빌라는 소공(召公)의 뜻을 다하셨다면 현부(賢否)와 사정(邪正)이 절로 마음의 거울에 구분될 것이며 경중(輕重)과 이병(利病)이 절로 마음의 저울에 구분되어서 정치하는 방법은 논할 것도 없이 상림(桑林)을 기다리지 않아도 음과 양이 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사시의 계절이 자연히 순행하며 구름끼고 맑아지는 기후가 제때에 알맞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왕의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至)에서 오는 크나큰 효과가 아니겠으며,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지극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뭔가 하고싶으시다는 대단한 마음으로 하필 이름을 좋아하십니까?이름이란 실상의 객체입니다.
이름과 실상의 차이에서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이 판가름납니다.
너무 세밀하게 살피려하지 마소서. 너무 세밀하게 살피는 것은 대도(大道)를 해칩니다. 너무 친근한 자들의 말을 듣지 마소서. 친근한 자들의 말은 대공(大公)을 어지럽힙니다.
원한을 살 거조를 시행하지 마소서. 원한을 살 때가 아닙니다.
일을 미봉책으로 하는 사안(私案)을 고수하지 마소서.
미봉책으로 하는 일은 균일하지가 못합니다. 필부들이 하는 효도를 하지 마소서. 필부는 제왕이 법으로 삼을 만한 대상이 못됩니다.
입에 쓴 약을 싫어하지 마소서. 입에 쓴 것이 병에는 유익합니다.
법을 집행하면서 사사로운 은혜를 정당하지 못하게 베풀지 마소서.
정당하지 못하게 베풀게 되면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습니다.
엄격한 것을 숭상하여 법을 굽혀가며 지나치게 엄하게 하지 마소서.
지나치게 엄하게 하면 사람들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현인을 구하시려면 초야에 있는 사람을 먼저 찾으소서.
정성을 다하여 찾으신다면 여러 군자들이 흥기할 것입니다. 붕당에 대해서는 그 공(公)과 사(私)를 살피소서. 명확하게 분변하시면 공론(公論)을 하던 자들이 분발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마음의 기준과 마음의 형평에서 오는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이렇게 하신다면 모두가 유신(維新)의 깃발 아래 참여하여, 아첨하던 자들이 변하여 충신이 되고 간사한 자들이 변화하여 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순리대로 일을 행한다고 하는 것으로서, 하늘에 대한 경건한 기도가 이미 깊은 궁궐안 임금의 훌륭한 덕에서 극진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니, 우리 성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상림에서 기우제를 지낼 것이 있겠습니까?
상림의 기도란 바로 성탕이 다만 하늘을 가리켜 맹세한 말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의 기도가 과연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진실로 조그마한 부끄러움이라도 있다면, 기도하여 비가 온다 하더라도 그 비는필시 가을에 장마가 질 것이니 금년에 비록 비를 얻었다손 치더라도 명년에는 필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마음에 있는 하늘에 돌이켜 그러한 부끄러움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시고 만일 그것이 혹시라도 있다면 마땅히 자신을 송사하는 뉘우침으로 하늘에 스스로 새로와질 것을 맹세하고 하늘에 맹세한 후에 실천하는 공력을 쏟게되면 하늘의 요망한 현상과 괴이한 물건도 잠깐 사이에 하나의 마른 뽕나무와 물러가는 형혹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훌륭한 정치를 하는 데도 넉넉할 것입니다. 어찌 단지 비만 오고 말겠습니까? 이렇게 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고 이렇게 했는데도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청컨대 신을 참형에 처하여 망언을 한 죄로 다스리소서”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의 걱정과 사랑이 깃든 정성으로 지금 또 이렇게 간절하게 말하니,
실로 나의 병통에 꼭 맞는다. 어찌 명심하지 않겠는가? 그대의 선견지명과 나라를 위하는 혈성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언제든지 생각한 바가 있거든 그대는 마땅히 낱낱히 상소하여 내 뜻에 부응토록 하라.”하였다.
註587]오(吳)나라 시장에서의 애초의 마음으로 곧바로 초나라에 들어간 것이 어찌 단지 직명(職名)만을 위해서였겠습니까:초(楚)나라 오자서(伍子胥)가 오(吳)나라로 망명했을 때 오나라 시장터에서 구걸하며 지낸 적이 있다. 나중에 오나라 군대로 초나라를 쳐들어가서 아버지와 형의 원수인 초평왕(楚平王)의 무덤을 파고 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하였다.《사기(史記)》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註588]제왕(帝王)이 천명을 길이 누리는 훈계:덕으로 정치를 해야한다는 말.《서경(書經)》주서(周書) 소고(召誥)에 “왕이 그 덕을 쓰는 것이 하늘에 영원한 운명을 비는 것이다.[王其德之用 祇天永命]”하였음 註589]공자가 내가 기도한 지가 오래다라고 한 말:공자의 병환이 악화되자 자로(子路)가 신명에게 빌기를 청하니, “그럴 이치가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나는 신명에게 빈지가 오래되었다”하였다.《논어(論語)》술이(述而) 註590]노(魯)나라를 작게 여겼던 국량:드높은 기상을 비유한 말임. 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가서 굽어보고 노나라를 작다고 여겼고,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굽어보고 천하를 작다고 여겼다.《맹자(孟子)》진심상(盡心上).註591]정장공(鄭莊公)이 공숙단(公叔段)을 방어하지 못했다:무강(武姜)은 큰 아들인 장공을 미워하여 작은아들 공숙단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장공이 즉위하자 무강은 단에게 경(京)땅을 주게 하였다. 신하들이 아우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미리 단속하라고 간청하였으나 장공은 듣지않고 있다가 군사를 보내어 반란을 일으킨 아우를 정벌하고 말았다.《춘추좌전(春秋左傳)》음공(隱公)원년(元年) 註592]천보(天保): 문선제(文宣帝)의 연호 註593]태화(太和):효문제(孝文帝)의 연호 註594]나라는 호랑이 없는 산이 되었고 조정에는 낮에도 설치는 여우가 있는데:사람다운 사람은 없고 소인배들만 우글거린다는 말로, 소식(蘇軾)이 쓴 구양공(歐陽公)의 제문에 “산과 못에 용과 호랑이가 떠나고 나면 온갖 변괴가 나타나서 미꾸라지며 여우 따위가 판을 치는 것과 같다”하였음.《당송팔가(唐宋八家)》권24.註595]상림(桑林):상(商)나라 탕(湯)임금이 가뭄에 비오기를 빌었던 곳. 탕왕(湯王)이 하(夏)나라를 정벌하고 천하를 얻었으나, 오랫동안 가뭄이 들자 자신이 직접 제물이 되어 이곳에서 비오기를 빌었다 함.《여씨춘추(呂氏春秋)》 순민(順民).
○司僕寺正李回寶應旨上疏曰:
吳市初心, 旋踵入國者, 豈但職名爲也? 大慶之後, 近瞻末光, 是臣子常情, 王道克擧, 致賢養民, 亦愚臣至願。 及到日下, 月已經朔, 擧措云爲之間, 一未見誠正格致之效, 反有亂世之象, 何其簇簇, 使人驚心骨耶? 導言之前, 則有越俎之誅; 導言之後, 則有難容口舌之爭, 志士、忠臣孰不氣塞? 嗚呼! 事非一失, 不可枚擧, 而論禱失其本, 不可逐末而諫。 臣請以帝王永命之訓、孔子久矣之禱, 推其意而爲殿下陳之。 嗚呼! 以九重之孤立, 經數年之萬變, 擧其大言之。 殿下之水鏡, 始傷於洶懼, 添傷於調劑之偏; 始傷於萬幾, 添傷於好惡之私; 始傷於孝友, 添傷於遇變之慘, 受傷旣多, 心安得正? 小魯之量, 反歸於淺深之窺; 泰山之重, 終歸於聲色之動, 此非淸明心德, 離道漸遠而有愧於對越者乎? 直言斥盡, 聰明不逮, 則殿下耳目, 不能不有寄於出入者, 或有以營立之私、喜怒之機, 又從而眩亂之, 殿下之心, 於是乎益大病, 則出治之本, 終無可端之望, 其於天德、王道, 是所謂咫尺萬里。 是故, 過不及之擧措, 不中正之喜怒, 初則月異歲不同, 今則日異時不同。 謂臣過言, 臣請略擧一二。 古之明王, 厚於責己, 薄於責人, 殿下則明於責人, 故有禁府朝廷之謠。 古之明王, 洞開無隱, 宮、府一體, 殿下則宮、府有間, 故有家政、國事之異。 古之明王, 畏天畏人, 一聽公議, 殿下則自是也, 偏係也, 合而成病。 古之明王防閑之道, 監象有法, 殿下則不從國言, 不先剪翼, 終未免鄭莊公不能防公叔〈段〉之譏。 古之明王以春令常施於忠諫、直言, 以秋令常加於險陂、巧言, 殿下則春秋兩令每每倒行。 故奸狡闒茸, 日以升堂入腹, 藎臣淸流, 日以聯翩出門, 朝廷空虛, 其涼如秋。 謂臣過言, 盍觀物證? 陽木將旺之月, 金鐵之氣用事, 秋麥二月發穗, 則麥秋必在於月之三四。 夫秋者, 金氣也。 殿下之用秋令, 若是乎日逆, 則臣恐金鐵之氣, 終必不利於陽木矣。 謂此無徵, 盍觀古證? 後周之保定三年, 有陰在背上如尾之妖, 古人以此, 爲君臣顚倒之象, 況今日項上角間之尾乎? 項者命象, 頭者尊象也, 尾以下體, 兩朔之間, 或處於命象之地, 或處於尊象之所, 而角者又是兵象也。 尊象之地, 兵象之間, 決非下體之所可處。 臣恐下執國命之兆, 不遠伊邇耶? 後齊之天保中, 有二頭共體之變, 古人以此爲政由奸侫, 上下無別之應。 唐之懿宗十三年, 有兩頭、四耳之怪; 後魏之太和間, 有三耳、六足之妖, 古人以兩頭、四耳爲天下不一之應, 又以三耳、六足爲六輔用事之應。 《傳》云: “人之氣燄, 物隨以感。” 此非殿下今日之氣燄, 物有以相感者乎? 必亂之象如此, 殿下終莫之悟何耶? 嗚呼, 大逆雖除, 危疑則倍。 國之形勢, 正如心腑大腫, 纔經一潰, 元氣極其虛弱, 則壯其元氣之道, 不過進正退邪, 以正朝廷可也。 撤其墻壁而不思復, 遠其國經而不收拾, 國無在山之虎, 朝有晝鳴之狐, 殿下之不察, 一何至此甚耶? 天以物怪示殿下, 殿下莫之改, 則又以兵象示殿下。 時世莫之言耶, 殿下聞而忽之耶? 武星晝見, 已是今日之常變, 何足爲殿下之大驚懼也, 二月初, 朝日方昇, 而東西白氣, 竝起犯日。 白氣者, 兵象也, 議者莫不以大亂之象言之, 而內憂在赤子山藪之伏, 外憂在於島夷養兵之久, 木腐之災、虞虢之患, 明若觀火。 靜思預變之道, 不過薄賦安民, 以固邦本; 選將鍊兵, 以壯國勢可也。 殿下在躬之淸明, 未知有何所蔽, 而莫之省也? 旱有三大, 而三旱之中, 國旱人旱, 召致天旱, 故臣之論旱, 異於時談。 二旱之要, 必欲求其說, 致旱之本, 何不自反耶? 殿下之禱, 禱求於桑林; 愚臣之禱, 禱求於殿下之心。 殿下之心, 苟能盡久矣之禱、永命之祈, 則賢否、邪正, 自別於心鑑之中, 輕重、利病, 自分於心衡之下, 而治道不足論, 不待桑林, 而陰陽自調, 四時自順, 陰晴自得其時。 此非帝王誠正、格致之極效, 天德、王道之克擧者耶? 殿下以欲云云之大心, 何必好名? 名者, 實之賓, 名實之異, 聖狂判焉。 勿爲察察之明, 察察害大道; 勿聽昵昵之言, 昵昵亂大公; 勿爲任怨之擧, 任怨非其時; 勿守苟簡之案, 苟簡有不均; 勿爲匹夫之孝, 匹夫非帝王可法; 勿惡苦口之藥, 苦口利於厥疾; 勿爲臨法而曲貸私恩, 曲貸則人不服; 勿爲尙嚴而枉法過嚴, 過嚴則人罔措; 求賢盍先於山人? 誠求則衆君子興起; 朋黨盍觀其公私? 明辨則公論者奮發。 此非心鑑、心衡之功用者乎? 允若是, 咸與維新之下, 侫變歸於忠, 邪化服於正。 此謂行其所無事, 而誕見對越之禱, 已盡於九重之湯德, 惟我聖明, 何苦而且從事於桑林耶? 桑林之禱, 此特成湯指天爲誓之言耳。 今我殿下之禱, 果無愧於指天之誓耶? 苟有一毫之愧, 則禱雖或雨 雨必爲秋霑, 今年雖得雨, 明年必猶夫。 伏願殿下, 自反心天, 照其有無, 如其或有, 合以自訟之悔, 乞自新於誓天, 誓天之後, 痛加實踐之功, 則天妖、物怪, 亦轉移間, 一枯桑、一退星耳。 此道優於致治, 何但得雨而止? 如此而不雨, 如此而不治, 請斬臣以正妄言之罪。
答曰: “爾之憂愛之誠, 今又若是懇懇, 實中予病, 可不惕念焉? 爾之先見之明智、爲國之血誠, 予嘗不忘。 凡有所懷, 爾宜一一上聞, 以副予意。”
영조 2권, 즉위년(1724 갑진/청옹정(雍正) 2년) 12월 4일(계유) 4번째기사
김일경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다. 김일경의 공초
김일경(金一鏡)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렸다. 하교(下敎)하기를,
“아아! 오늘 김일경을 국문(鞫問)하는 것이 어찌 다만 나를 무욕(誣辱)했기 때문이겠는가?
대행조(大行朝)의 성덕(盛德)을 무욕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약 엄하게 국문하지 않는다면, 윤상(倫常)이 이로부터 멸절(滅絶)될 것이니, 훗날 무슨 면목으로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영혼을 뵙겠는가?
이것은 한때의 장주(章奏) 사이의 흉패(凶悖)한 말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입에 드러낸 것이니, 그 뜻을 쓴 바가 불을 보듯 환하다.
이것이 내가 이른바‘빈전(殯殿)에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고싶다’고 한 까닭이다. 직접 그 마음을 묻고 싶지만 상복(喪服)을 입은 몸이기 때문에 뜻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엄하게 핵실(覈實)하는 것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접때 이의연(李義淵)의 일로 보건대, 공사(供辭)는 몇 구절의 말에 지나지않았으나, 추안(推案)의 출납은 자연히 지체되었었다.
김일경의 흉패(凶悖)한 사설(辭設)은 묻지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나, 형신(刑訊)을 청한 뒤는 보통 때와 다르다. 그러니 본부(本府)에서 하도록 하되 그 공초(供招)를 받는 것은 엄하게 하지않을 수 없으니, 정국(庭鞫)으로 하라”하였다. 김일경을 국문하였는데, 김일경은 나이 63세이었다.
묻기를,
“찬(撰)했던 교문(敎文)에,‘어찌 금정(禁庭)의 접혈(蹀血)을 면했겠는가?’라고 했고, 소사(疏辭)에는, ‘마치 노(魯)나라의 종무(鍾巫)와 같음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 ‘양기(梁冀)·석현(石顯)에게 종무가 범(犯)했던 것은 있지않았다’고 했는데, 접혈·종무는 《춘추(春秋)》《강목(綱目)》에 쓰여진 곳이 어디인가?
그런데 이에 감히 이 따위의 지극히 흉악하고 패리(悖理)한 문자(文字)를 막중한 대찬(代撰)하는 왕언(王言)에 원용(援用)하였으니, 무욕(誣辱)이 상궁(上躬)에 미쳐 차마 듣지못할 것이 있고, 대행조(大行朝)의 성덕(盛德)을 무욕한 것 또한 망극(罔極)하였다.
교문(敎文)의 개부표(改付標)한 곳 본문(本文)에, ‘거의 노휘(魯翬)·종무(鍾巫)의 해기(駭機)를 답습했고, 거의 또한 조고(趙高)의 사구(沙丘)의 남은 술수를 이룰 뻔하였다’고 했고, 소(疏)에는, ‘진(秦)나라의 이사(李斯)·조고(趙高)와 같음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만약 마음속에 간직해 두고 부도(不道)한 것을 쌓아 두지 않았다면 입밖에 낸 것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그 뜻을 쓴 바가 불을 보듯 환하다.
지극히 흉악한 정절(情節)을 사실대로 직고(直告)하라.”하니,
김일경이 납초(納招)하기를,
“천하(天下)의 일은 사리(事理)를 벗어나지 않으니,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 보아 그 정실(情實)을 얻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선대왕(先大王)의 알아주심을 받아 은택(恩澤)이 높고 두터웠으므로, 끝없이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마음으로 이에 불길(不吉)한 건성(建成)을 끌어다 우리 선왕(先王)께 견주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숙묘(肅廟)의 아드님이시고 경종(景宗)의 아우님이십니다.
경종께 사속(嗣續)이 있지아니하였으므로, 선지(先旨)를 준수하여 자성(慈聖)께 품(稟)해서 전하를 책명(策命)하였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앙대(仰戴)하였습니다. 저는 전후로 3년동안 외람되게도 빈석(賓席)에 있었고, 형관(刑官)이 되었을 때는 인혐(引嫌)하여 체직(遞職)하는 예(例)가 없지않았으나,
곧 경재(卿宰)들 사이에서 말하기를,‘춘궁(春宮)은 대조(大朝)와 달라 강연(講筵) 때가 아니면 감히 뵐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예학(睿學)이 고명(高明)하시고 강론(講論)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니, 빈석(賓席)에 들어가 우러러 옥음(玉音)을 들으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그래서 감히 사피(辭避)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그대의 말이 옳다’하였습니다.
계묘년315) 봄 처음 빈석에 입시하였을 때 성상께서 궁관(宮官)을 돌아보시며 시각(時刻)을 물리라고 명하셨는데, ‘빈객(賓客)의 집이 머니 진시(辰時) 초에 들어온다면 노인이 새벽에 일어나게 되어 반드시 몸을 해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교하셨으므로, 감격이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그래서 이진유에게 말했더니, 이진유가‘내가 문의(文義)로 인해 숙묘의 검소한 덕을 춘궁께 우러러 아뢰었는데,「말이 선조(先朝)에 미치니 저절로 슬픔을 느끼게 된다」고 하교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흐느끼셨다’라고 하므로, 제가 이진유에게 ‘우리 이극(貳極)의 인효(仁孝)는 하늘에서 낸 것인데, 밖으로 드러난 것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이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눈물을 떨구고‘우리 임금과 우리 이극의 효우(孝友)하신 덕(德)은 생각건대 요(堯)·순(舜)·삼대(三代) 이래로 이처럼 성대(盛大)한 경우가 없었다. 두 성인(聖人)께서 계시고 사직(社稷)에 근심할 것이 없으니, 우리 늙은 신하들이 죽기 전에 감격스러움과 다행스러움이 얼마나 지극한가?’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친우(親友)들과 수작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성궁(聖躬)을 침핍(侵逼)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교문(敎文)가운데 있는 ‘접혈(蹀血)’이라는 문자(文字)는 서한(西漢)의 반고(班固)의 사책(史冊)에 처음 보이는데, 한(漢)나라·당(唐)나라때 흔히들 썼으며, 사마광(司馬光)은 당(唐)나라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어(古語)를 인용하여 창졸간에 엮어낼 즈음에, ‘감로(甘露)가 변했을 때 금도(禁塗)의 피를 밟았다[甘露變時禁塗涉血]’란 말을 취해 쓰려고 《통감(通鑑)》의 이훈(李訓) 정주(鄭註)의 ‘시(時)’자 아래를 열어 보았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으니, 그 말이 소종기(昭宗記)의 총론(總論)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섭(涉)’자의 경우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단지‘수(水)’자 변의 ‘유(流)’·‘섭(涉)’두 글자만 생각이 났는데, 재삼 음미해보고 나서 아닌 줄로 생각하고 이에 ‘섭(涉)’자를 본초(本草)에다 썼더니, 어떤 사람이 ‘수(水)’자 변이 아니라 ‘족(足)’자 변이라고 하므로, 마침내 ‘접(蹀)’자로 썼던 것입니다. 얽어낼 때의 일의 정황으로 보건대, 어찌 뜻을 둔 것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한 글자가 잘못된 것에 불과한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지금 만약 ‘접혈(蹀血)은 비록 한나라·당나라때 익히 쓰던 문자라 하더라도 사마광이 이미 현무문의 변에다 썼다면, 이것은 참으로 망발이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느냐?’라고 한다면 참으로 만번 육시(戮屍)를 당해도 달게 여기겠지만 어떤 뜻이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합니다.
‘종무(鍾巫)’에 대한 한가지 조관(條款)을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또한 그것이 혐의가 될 만한지 끝내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상소문에‘「역(逆)」이란 천하의 극악(極惡)이며 인류(人類)의 궁흉(窮凶)입니다. 그 흉악한 짓을 행한 경우 그 계책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으니, 마치 노(魯)나라의 종무(鍾巫)처럼 한밤중에 칼을 품기도 하고, 한(漢)나라의 양기(梁冀)·석현(石顯)처럼 음식 가운데 독(毒)을 넣기도 하고, 진(秦)나라의 이사(李斯)·조고(趙高)처럼 상(喪)을 틈타 거짓 제서(制書)를 만들기도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사·조고에게는 양기·석현의 악(惡)이 있지않았고, 양기·석현에게는 또한 종무가 범했던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만고의 역적(逆賊)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살피고 합쳐 보아도 오늘날 역당들의 궁흉(窮凶)·극악(極惡)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전대(前代)의 일을 두루 들어 삼수(三手)의 역절(逆節)을 갖추어 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지난번 이봉명(李鳳鳴)이 상소가운데 허구 날조하여 말을 만들어 ‘칼을 품은 종무(鍾巫)가 있었고, 환공(桓公)은 시해(弑害)에 참여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아! ‘환공이 시해에 참여했다[桓公與弑]’라는 네글자가 어찌 신자(臣子)된 자가 마음속에 싹틔우고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겠으며,
붓에 적셔 장독(章牘)에 올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대개 김용택(金龍澤)의 칼을 백망(白望)에게 준 것과 이희지(李喜之)의 거짓 조서(詔書)는 장세상(張世相)·김창집(金昌集)과 더불어 상(喪)을 틈타 행사(行使)하려는 계책이었으니, 이 양대(兩代)의 일이 천고(千古)의 확실한 증거가 되므로 다시 많은 생각을 할 것이 없어 과연 원용(援用)해 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 삼수(三手)의 역절(逆節)은 만고(萬古)에 없던 흉모(凶謀)로서 비밀스런 계책이 죄다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역적을 논하는 정상(情狀)이 어찌 국가의 일과 달라 숨기고 감히 말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고금(古今)의 인신(人臣)이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는 자를 논하여 배척할 때마다 곧 ‘지록위마(指鹿謂馬)316)’를 인용하였는데, 또한 모두 그 임금을 이세(二世)에게 비겼다고 죄를 주었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대행대왕과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인덕(仁德)이 깊고 지극하시어 사람들이 이간질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양궁(兩宮)사이에 화기(和氣)가 피어올랐습니다. 이것이 동토(東土)의 신민(臣民)이 같이 손을 모아 축원(祝願)한 바였으니, 저 흉역(凶逆)의 모계(謀計)는 그냥 흉역의 모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감히 비길 수 없는 곳에다 뒤섞어 넣고자 하니, 비록 천번 만번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끝내 그 말이 근거가 있음을 알지못하겠습니다. 또 교문가운데 지워 고친 곳은, 본래부터 그것이 조금이라도 국가의 혐의(嫌疑)가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구절을 두고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은 ‘종무’란 구절을 고칠 것을 청하였고,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은 ‘사구’란 구절을 고칠 것을 청하였습니다. 무릇 국가의 문자는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지 못하는 법이니, 사람들이 혹 타당하지 않다고하면 곧 다시 고치는 것입니다.
그때 일의 정상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합니다. 그리고 문자를 따내어 죄안(罪案)을 구성하는 것은 본래부터 성세(聖世)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바가 아니며, 오래 되면 짐짓 논하지않는 것입니다.
무진년317) 겨울 우리 경종대왕께서 원자(元子)로 탄생하시어 명호(名號)를 정하고 교문(敎文)을 반포(頒布)하였는데, 고(故)판서(判書) 남용익(南龍翼)이 찬진(撰進)한 글가운데 ‘몽란(夢蘭)’이란 두 글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사년318)의 뭇 소인들이 허구 날조해 죄안을 구성하여 마침내 귀양가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슬프고 원통하게 여기지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숙종대왕께서 뒤에 후회하시고 특별히 소설(昭雪)하셨던 것입니다. ‘몽란’이란 말이 출처한 본문(本文)에는 크게 미안(未安)한 것이 있습니다만, 고금의 문사(文士)가 글을 쓸 때 재료로 취하되 출처에 구애받지않았으니, 만약 다시 한두가지를 꼬집어내어 반드시 출처한 본문을 가지고 끌어대고 비유해 죄안을 구성한다면, 고금의 문사로서 어찌 형륙(刑戮)을 면할 자가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말로써 뜻을 해치지말라’고 하였습니다.
사록(沙麓)319)의 상서는 왕씨(王氏)가 한(漢)나라를 찬탈하는 조짐이나,
후비가(后妃家)에 으레 쓰며, ‘개풍(凱風)·한천(寒泉)320)은 그 어머니의 실행(失行)을 그린 것이나 주자(朱子)는 단지 ‘어머니의 노고(勞苦)’라는 뜻을 취하여 ‘한천’을 그 묘려(墓廬)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증증대효(烝烝大孝)321)’라는 구절을 주상(主上)의 위전(慰箋)으로 삼고, ‘융융기락(瀜瀜其樂)322)’을 모후(母后)의 찬사(贊辭)로 삼았으니, 또한 마땅히 군부(君父)를 고수(瞽叟)에게 비기고 성모(聖母)를 강씨(姜氏)에게 증거댔다하여 큰 죄로 삼겠습니까?
지난날의 역변(逆變)은 환첩(宦妾)·장상(將相)·검객(劍客)의 합친 세력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신은 선왕(先王)의 명을 받아 이미 그 옥사(獄事)를 다스려 그 정절(情節)을 깊이 알고 있었으므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힘써 교문(敎文)을 대찬(代撰)할 것을 권하였는데, 주문(主文)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미루어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거듭 패초(牌招)를 어긴 뒤 저녁에야 패초를 받들고 한밤중에 얽어냈던 것입니다. 본래 거칠고 껄끄러운 글이라 그 점검(點檢)을 잃은 것은 괴이할 것이 없으나, 세월이 오래 흐른 뒤 추가로 따내어 이처럼 망측(罔測)한 죄과(罪科)에 빠뜨리니, 한번 죽은 것은 본디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아마도 국가의 형정(刑政)이 마땅히 심각한데 이르러서는 안될 듯합니다.
저는 외람되게도 삼조(三朝)의 구물(舊物)로서 나이가 70줄에 들려하고 지위는 팔좌(八座)에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뜻밖의 죄목을 억지로 더하여 악역(惡逆)의 귀결처로 몰아넣으니, 천지와 귀신이 성대(聖代)의 어질고 밝은 정치에 도리어 혹 누를 끼치는 한탄이 있음을 환히 밝힐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과연 부도(不道)한 마음이 있었다면 몰래 은밀한 곳에 기록해 두어야 옳을 것입니다. 어찌 팔방(八方)의 많은 사람의 눈이 전해 가며 보는 교문(敎文)과 장소(章疏)에 방자하게 국가를 침핍(侵逼)하는 말을 늘어놓는단 말입니까? 풍병(風病)을 앓아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마땅히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아주 죽기로 결심한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슬프고 원통한 것이 있으니, 선왕의 지우(知遇)를 욕되게 하고 신화(新化)의 청명(淸明)함을 막아 장차 구천(九泉) 아래에서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지(傳旨) 안의 사연(辭緣)은 천만 애매합니다”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여 다시 추문(推問)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감히 문목(問目) 외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현혹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은 것이 더욱 지극히 흉참(凶慘)하다. 각별히 엄하게 추문하라”하였다.
국청에서 김일경을 다시 추문하자, 김일경이 공초(供招)하기를,
“종무(鍾巫)의 일은 역휘(逆翬)가 도적을 시켜 몰래 칼로 은공(隱公)을 시해(弑害)했던 것이고, 칼로 임금을 시해한 자는 종무 외에 들은 것이 없었으므로 대급수(大急手)를 논하며 종무를 인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춘추(春秋)》는 말이 간략하기 때문에 비록 ‘회인(懷刃)’이란 두 글자는 없지만, 은공(隱公)은 반드시 한밤중에 분명히 칼로 피살되었을 것이므로 글을 지을 때 ‘화인’이란 두 글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접혈(蹀血)’이란 글자는 본래 한(漢)나라·당(唐)나라때 익히 쓰던 문자(文字)이나, 사마광(司馬光)이 이미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에 썼으니, 단지 《한서(漢書)》만 기억하여 쓴 것은 크게 살피고 신중히 하는 체모를 잃은 것이므로 망발(妄發)이라 한 것입니다.
사구(沙丘)의 일이 죄가 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희지(李喜之)의 거짓 조서(詔書) 초본(草本)은, ‘선왕을 폐(廢)하여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되, 지열(池烈)·장세상(張世相)과 더불어 안에서 그 조서를 내리고 김창집(金昌集)이 봉행(奉行)한다’고 한 것이 옥안(獄案)에 환히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이 따위의 역절(逆節)을 어떻게 안치(按治)하겠는가? 제기(提起)하지말 것이다’라고 한다면, 안옥(案獄)한 대신(大臣)인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에게 균등한 죄가 있으니, 유독 신만 책망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 역모(逆謀)의 곡절이 환하니, 사구(沙丘)의 고사(故事)는 헐후(歇後)할 뿐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구를 인용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그 사실은 문안(文案)에 실려 있어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용한 고사의 지나가다 쓴 말을 가지고 억지로 큰 죄를 구성하니, 실로 뜻과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바입니다.
처음 교문(敎文)에 쓰고 친우(親友)가 고치기를 청하였을 때 누차 논난(論難)하니, 어떤 이가 ‘사구(沙丘)를 인용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고 사람들이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 하는데, 어찌 반드시 굳게 고집하는가?’하였으므로 과연 종무(鍾巫)로 고쳤고, 이미 대신의 보고에 나왔으므로 다시 논난하지않고 즉시 고쳤던 것입니다.
원통하고 한스러운 것은 흉도(凶徒)와 역당(逆黨)이 반드시 성궁(聖躬)을 빙자하여 악역(惡逆)을 비호하려는 계책을 삼으려는 것으로, 그 말의 무패(誣悖)·흉참(凶慘)함은 진실로 족히 논할 것이 없습니다만, 오늘날 조정에서 또한 이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으니, 실로 상정(常情)밖입니다.
성명(聖明)께서는 깊이 구중궁궐 안에 계시며 갑자기 흉소(凶疏)의 말을 들으셨으니, 경동(驚動)하는 바가 있음이 마땅합니다만, 조용히 따져 보시고 문안(文案)의 수미(首尾)를 세밀하게 살펴보신다면, 반드시 남김없이 환히 살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함없는 외로운 충성으로 반드시 성궁을 보호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겼고, 고(故) 좌의정 최석항(崔錫恒)과 더불어 누누이 상확(商確)하였는데, 상신(相臣)이 작고(作故)하여 지금 물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연중(筵中)에게 진달하기를, ‘이 사람의 충절(忠節)은 전하께서 보호(保護)하는 신하로 여기시어 반년동안 일을 같이 하셨으니, 그 나라를 향한 정성을 깊이 아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손수 진달한 말을 쓰시어 사국(史局)에 보내셨습니다. 나라를 향한 어리석은 충성을 늙은 상신이 연석(筵席)에 들어가서 진달하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전하의 일월(日月)같은 밝으심에 이해받지 못하니, 이제는 목숨이 끝날 때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비록 만번 주륙(誅戮)을 당한다할지라도 끝내 근거없는 말로 교묘하게 피하고 싶지 않으니, 이것은 우직한 평소의 성품이 그런 것입니다.
품은 생각을 전후로 대략 말씀드렸으니, 오로지 성명(聖明)의 살리고 죽이는 처분(處分)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리하게 번복하는 것은 황공하여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국청에서 형신(刑訊)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흉패(凶悖)한 말이 전보다 배나 더하며, ‘죽이고 살리는 처분’이란 말에 이르러서는 그 거칠고 포악한 성품을 알 수 있다.
각별히 엄하게 형신하여 실토 받도록 기필하라”하였다.
註315]계묘년:1723 경종3년.註316]지록위마(指鹿謂馬):진(秦)나라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이세황제(二世皇帝)에게 말을 바치며 사슴이라 일컫고, 여러 신하가운데 사슴이 아니고 말이라고 한 자를 벌준 고사. 윗사람을 농락하여 위세(威勢)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임.註317]무진년:1688 숙종 14년.註318]기사년:1689 숙종15년.註319]사록(沙麓):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 춘추시대 이 토산이 무너지자 일관(日官)이 645년 뒤 성녀(聖女)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后)인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태어나 645년 뒤인 해에 애제(哀帝)가 죽은 후 섭정(攝政)하였고 이때부터 왕망(王莽)이 섭황제(攝皇帝)로 집권하였음.註320]개풍(凱風)·한천(寒泉):개풍(凱風)은《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이고 한천(寒泉)은 이 시안에 나오는 말임. 이 시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의 수고하신 은혜를 생각하여 지은 시라고 함. 본문에서 그 어머니의 실행(失行)을 그린 것이라 함은 일곱 아들의 아버지가 각각 달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어머니의 행실이 문란했음을 말함.註321]증증대효(烝烝大孝):증증은 두텁고 아름다운 모양을 말하는 것으로 순(舜)임금의 큰 효성(孝誠)을 말한 것임. 이 말의 출전은 《서경(書經)》요전(堯典)으로 요(堯)임금이 사악(四岳)에게 순임금에 대해 묻자
사악이 “고수(瞽叟)의 아들로 아비는 어리석고 어미는 간악하며 아우인 상(象)은 오만하나, 효(孝)로써 잘 화해시켜 두텁고 아름답게 하였다”라고 한데서 나왔음.註322]융융기락(瀜瀜其樂):《좌전(左傳)》은공(隱公) 원년(元年)에 나오는 말로 그 즐거움이 무르녹는다는 뜻임.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자기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 공숙단(共叔段)과 공모(共謀)하였던 어머니 강씨(姜氏)를 성영(城潁)에 유폐시키고 다시 만나지않겠다고 했다가, 영고숙(潁考叔)의 진언(進言)으로 땅속의 굴에서 강씨를 만나고 나서 이런 말로 그 기쁨을 나타낸 것임.
○下金一鏡義禁府。 敎曰: “噫! 今日鞫問一鏡, 奚但爲誣予而已? 其誣大行朝盛德極矣。 若不嚴鞫, 則倫常從此滅矣, 他日將何面, 見先王在天之靈乎? 此非一時章奏間凶悖之說也, 藏諸心而發諸口, 其所用意明若觀火。 此予所謂叫呼殯殿, 寧欲溘然者也。 欲爲親問其心, 而縗麻在身, 故不得如意。 其所嚴覈, 不可少忽。 向以義淵事觀之, 供辭不過數句語, 而推案出納, 自然遲滯。 一鏡凶辭悖說, 不問可知, 請刑之後, 則異於常時。 自本府爲之, 而其所取招, 則不可不嚴, 庭鞫爲之。” 鞫一鏡。 一鏡年六十三。 問: “所撰敎文曰: ‘抑何免禁庭之蹀血?’ 疏辭曰: ‘有若魯之鍾巫。’ 又曰: ‘冀、顯未有鍾巫之犯。’ 蹀血、鍾巫, 《春秋》、《綱目》所書者何處? 乃敢以此等窮凶絶悖之文字, 援用於莫重代撰之王言, 其所誣及上躬, 有不忍聞, 而誣大行朝盛德, 亦爲罔極。 敎文改付標處, 本文有曰: ‘幾乎蹈魯翬、鍾巫之駭機, 殆亦售趙高沙丘之餘術。’ 疏中又曰: ‘有若秦之斯、高。’ 援引尤極凶悖, 苟非藏諸心者, 積蓄不道, 則發諸口者, 何至於此? 其所用意, 明若觀火, 窮凶情節, 從實直告。” 一鏡供: “天下事, 不出理外。 揆以天理、人情, 鮮有不得其情實矣。 身受知先大王, 隆恩厚澤, 欲報罔極。 抑何心腸, 乃以不吉之建成, 援比於我先王哉? 惟我主上殿下, 肅廟之子, 景宗之弟。 景宗未有嗣續, 遵先旨稟慈聖, 策命殿下, 擧國仰戴。 矣身忝叨賓席, 首尾三年, 及爲刑官, 不無引遞之例, 而輒於卿宰間曰: ‘春宮異於大朝, 非講筵, 未敢得見。 今睿學高明, 講論不怠。 若入賓席, 仰聆玉音, 愛敬之心, 油然藹然, 吾不敢辭避’ 云, 則李眞儒曰: ‘君言是矣。’ 癸卯春初, 入侍賓席, 自上顧謂宮官, 命退時刻, 賓客家遠, 趁辰初入來, 則老人晨起必傷爲敎, 感銘骨髓。 爲詑於李眞儒, 則眞儒曰: ‘吾因文義, 以肅廟儉德, 仰白春宮, 以語及先朝, 自然感愴爲敎, 泫然含淚。’ 矣身謂眞儒曰: ‘吾貳極仁孝出天, 見於外者若是, 吾輩豈不感動乎?’ 兩人相對涕零曰: ‘吾王、吾貳極孝友之德, 惟堯與舜三代以下, 未有若是之盛。 二聖在焉, 社稷無憂, 吾輩老臣, 未死之前, 感幸何極?’ 常常與親友酬酢如此, 豈敢有一毫侵逼聖躬之意哉? 敎文中, 蹀血文字出處, 始見於西漢班固之史, 漢、唐爛用, 司馬光論唐玄武門之變, 而引用古語, 倉卒搆出之際, 甘露變時, 禁塗涉血之語, 欲爲取用, 開見《通鑑》李訓鄭註時下, 而終不能得, 語在《昭宗記》下摠論故也。 涉字, 頓然忘却, 只記水邊, 流、涉兩字, 再三吟過, 而以爲非也, 乃以涉字, 書於本草, 人有爲非水邊, 乃足邊, 遂以蹀字書之。 以其搆出時事狀觀之, 是豈有意者乎? 此不過一字差誤, 而遽至此境。 今若以蹀血, 雖是漢、唐習用之文字, 司馬光旣用於玄武門外, 則此眞妄發, 安得無罪? 云爾, 則固當萬戮是甘, 謂之有意, 則萬萬痛冤。 鍾巫一款, 到今思之, 亦終不覺其爲可嫌。 疏中曰: ‘逆者天下之極惡, 人類之窮凶也, 若其行凶作惡, 不一其謀。 夜半懷刃, 有若魯之鍾巫; 食中置毒, 有若漢之冀、顯; 乘喪矯制, 有若泰之斯、高。 雖然, 斯、高未有冀、顯之惡, 冀、顯亦未有鍾巫之犯。 泝萬古之逆, 而合而幷之, 未有若今日逆黨之窮凶、極惡。’ 此不過歷擧前代事, 備論三手逆節而已。 向日鳳鳴疏中, 捏造成語曰: ‘懷刃鍾巫, 桓公與弑。’ 噫嘻! 桓公與弑四字, 是豈爲人臣子者, 萠於心而發諸口, 濡於筆而登諸章牘乎? 蓋龍澤之劍, 給於白望, 喜之之矯詔, 與世相、昌集, 欲爲乘喪行事之計, 則此兩代事, 千古之的證, 故不復多思, 果有援論, 而向者三手之逆, 亘萬古所無之凶謀秘計, 靡不畢具, 論逆之情狀, 何與於國家事, 而諱不敢言哉? 古今人臣論斥奸侫, 輒引指鹿, 亦將皆以擬其君於二世而爲罪哉? 唯我大行大王, 曁我主上殿下, 深仁至德, 人無間焉, 兩宮之間, 和氣藹然。 此東土臣民所共攅祝者, 則彼凶逆之謀計, 自凶逆之謀計耳。 必欲參錯於不敢擬之地者, 雖千思萬思, 而終不覺其說之有據也。 且敎文中, 抹改處, 則本不知其可以少嫌於國家。 初有是句, 左議政崔錫恒, 請改鍾巫之句, 校理李匡輔, 請改沙丘之句。 凡於國家文字, 無執己見, 人或以爲未妥, 則輒復改之。 伊時事狀, 不過如斯。 文字之拈出成案, 本非聖世所宜有。 久遠姑勿論, 戊辰冬, 我景宗大王誕降, 元子定號頒敎文, 故判書臣南龍翼撰進中, 有夢蘭二字。 己巳群壬, 搆捏成案, 終至竄死, 人莫不悲冤, 肅宗大王, 追悔復官, 特賜昭雪。 夢蘭出處本文, 有大未安者, 而古今文士, 臨文取材, 不拘出處。 若復一二摘抉, 必以出處本文, 援譬成罪, 則古今文人, 豈有免於刑戮者哉? 孟子云: ‘不以辭害意。’ 沙麓之祥, 王氏纂漢之兆, 而例用於后妃家, 《凱風》寒泉, 厥母失行, 而朱子只取母氏勞苦之義, 以寒泉名其墓廬。 前輩有以烝烝大孝爲主上慰箋, 瀜瀜其樂, 爲母后贊辭。 亦當以比君父於瞽瞍, 證聖母於姜氏, 爲大罪哉? 向日逆變, 宦妾、將相、劍客, 合勢淊天。 矣身受命先王, 旣按其獄, 深知情節, 故大臣、諸臣, 力勸代撰敎文, 而以有主文之人, 始則推辭, 再違牌之後, 乘夕承牌, 半夜搆出。 本來荒澁之文, 其失點檢無怪, 而歲月旣久之後, 追加採摘, 陷此罔測之科, 一死固不足恤, 抑恐國家刑政, 不宜至深也。 矣身猥以三朝舊物, 年入七耋, 位在八座。 勒加萬萬情外之目, 驅入於惡逆之歸, 則天地鬼神, 赫赫昭昭, 聖代仁明之政, 抑或有貽累之歎。 眞果有不道之心, 潛記暗錄於密地可也。 豈可以八方萬目傳看之敎文、章疏, 肆然以逼國家之語, 陳列哉? 非病風喪性之人, 決不當爲此。 矣身滅死, 決之久矣。 所可悲冤者, 辱先王之知遇, 阻新化之淸明, 將作不瞑之鬼於九泉之下。 傳旨內辭緣, 千萬曖昧。” 鞫廳議啓, 請更推, 批曰: “敢陳問目外說話, 欲爲眩惑之計者, 尤極凶慘。 各別嚴問。” 更推一鏡, 一鏡供: “鍾巫事, 逆翬使盜潛弑隱公以刃。 以刃弑君者, 鍾巫外未聞, 故其論大急手, 以鍾巫爲引, 而《春秋》辭簡, 故雖無懷刃二字, 隱公之夜半被戮, 分明以刃, 故臨文有懷刃二字。 蹀血字, 本來漢、唐習用之文字, 而司馬光旣用於玄武門之變, 則只記《漢書》而用之者, 殊失審愼之體, 故謂之妄發。 沙丘事之爲罪, 全未曉得。 喜之矯詔草, 廢先王爲德讓君, 與池烈、世相, 從中下其詔, 而昌集奉行云, 獄案昭昭。 今若以此等逆節, 何以按治乎? 可勿提起云爾, 則按獄大臣趙泰耉、崔錫怛, 均有其罪, 宜不當獨責於矣身。 其逆謀委折昭昭, 則沙丘故事, 不啻歇後, 引用沙丘, 不是異事。 其事實則載錄於文案, 而不避以引用故事之過辭行語, 勒成大罪, 實是意慮所不到。 初用於敎文, 而親友請改之時, 累次論難, 則或有以引用沙丘, 固爲不可, 而人言當改, 則何必堅持云, 故果改之, 鍾巫, 旣出於大臣所報, 故不復論難, 而卽改之。 所痛恨者, 凶徒逆黨, 必憑藉聖躬, 以爲容護惡逆之計, 其言之誣悖、凶慘, 固不足論, 今日朝廷, 亦以此爲罪案者, 實是恒情之外。 聖明深居九重, 驟聞凶疏之說, 宜有所驚動, 而從容徐究, 細察文案之首尾, 想必照察無餘矣。 斷斷孤誠, 必以保護聖躬爲己任, 與故左議政崔錫恒, 縷縷商確, 相臣作故, 今不可問, 而嘗陳達於筵中曰: ‘此人忠節, 殿下宜保護之。 臣與半年同事, 深知其向國之誠。’ 手書所陳之語, 送于史官。 向國愚忠, 至於老相入陳筵席, 而今不能見諒於殿下日月之明, 此命卒之時也。 誰怨誰尤, 而雖被萬戮, 終不欲游辭巧避, 是戇樸之素性然也。 所懷略攄於前後, 惟在聖明生殺處分之如何。 支辭煩複, 惶恐不敢。” 鞫廳議啓請刑, 批曰: “依啓。 凶言悖說, 有倍於前, 至於生殺處分之說, 其不勝其麤暴之性, 可以知之。 各別嚴刑, 期於吐實。”
정(鄭)나라 무강(武姜)은 장공(莊公)을 죽이려고 음모하였으나 장공이 저승에 가서나 만나겠다고 맹세하였다.
무강(武姜)은 큰 아들인 장공(莊公)을 미워하여 작은아들 공숙단(共叔段)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장공이 즉위하자 무강은 단에게 경(京)땅을 주게 하였다. 신하들이 아우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미리 단속하라고 간청하였으나 장공은 듣지 않고 있다가 군사를 보내어 반란을 일으킨 아우를 정벌하고 말았다.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그의 어머니 무강(武姜)이 모반한 아우 공숙단(共叔段)을 도와준 것을 증오하여, 마침내 무강을 성영(城穎)에 안치하고서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서로 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뒤에 후회하여 영고숙(穎考叔)의 말을 따라 대수(大隧)를 뚫어놓고 그 속에서 모자(母子)가 서로 만나 보아 옛날로 되돌아간 고사(故事).
융융기락(瀜瀜其樂):《좌전(左傳)》은공(隱公) 원년(元年)에 나오는 말로 그 즐거움이 무르녹는다는 뜻임.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자기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 공숙단(共叔段)과 공모(共謀)하였던 어머니 강씨(姜氏)를 성영(城潁)에 유폐시키고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가, 영고숙(潁考叔)의 진언(進言)으로 땅속의 굴에서 강씨를 만나고 나서 이런 말로 그 기쁨을 나타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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