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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제 21장
=====21:1
본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지금까지 본서의 기자는 승승 장구하는 다윗 왕의 영광된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기록했다(10:1-20:8). 그러나 본장에서부터는관심을달리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준비하는 다윗 왕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즉, 자신
의 인생 말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다윗의 신앙적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
다. 사실 이때는 시기적으로 다윗 왕의 통치 말기에 해당하는데 다윗 왕의 세력이 크
게 확장되었던 때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경과한 것으로 보인다(Payne). 참으로 이
20년의 기간 동안에 다윗 왕은 그의 큰 범죄로 말미암아 일련의 연쇄적인 징계들을 받
았다. 그 징계들이란 암논의 추행 사건(삼하 13장), 압살롬의 반란(삼하 14-19장), 그
리고 세바의 반란(20장) 등이었다. 그러나 본서 저자는 이러한 다윗(David) 왕의 불행
했던 역사를 뛰어넘어 곧바로 성전 건축에 관련된 다윗 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
이다. 이와같이 저자가 다윗 왕이 겪은 고통스런 일련의 역사를 본서에서 생략한 것은
바벨론(Babylon) 유수(幽囚)에서 풀려난 유다 왕조의 후손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그
왕조의 탁월성 및 정통성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신정 국가 건설에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하기 위함이었다(Payne).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 다윗 왕이 크게 범죄했다고 생각되는 인구 조사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서에 언급된 것은 이 일을 계기로 말미암
아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사건을 동기로 해
서 성전의 부지가 결정되고 성전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단이...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본 문맥은 내용상 삼하
24장과 일치하고 있으나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즉, 삼하 24장에서는 다윗을 격동한
주체가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그 주체가 사단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삼하 24장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그
러나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의 신관(神觀)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추측이다.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실 때에야 비로소 사단은 활동을 개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욥 1:12;삼상 26:19). 참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
의 모든 일에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다(욥 12:23;시104:9-31;사 50:2, 3;갈
1:15, 16). 그래서 삼하 24장은 바로 이러한 섭리적 차원에서 다윗을 격동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여지
는 결과적 측면에서 그 주체를 사단으로 기록한 것 뿐이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어느
하나 잘못된 것이 없으며 다만 상이한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된 것일 뿐이다(Pulpit
Commentary).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사단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과 이
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욥 1:11;2:5, Wycliffe). 그러나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라고 하기보다는 '고소', '기만'
'파멸'을 일삼는 사단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은 이 사단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자신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신다.
(1) 그것은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다윗 왕의 교만을 제거하여겸손하게 만드는
것, (2) 지난번 압살롬의 난, 세바의 난 때에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종 다윗을 거
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벌하시는 것(삼하 24:1), (3) 그리고 궁극적인 것으로 성전
건축을 구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단의 역할이 인
간을 파멸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활동을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혹은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상(思想)은 포로기 전후에 나타난 유대교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생
각된다(O. Zockler). 한편, 사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장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21: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두목에게 이르되 - 여기서 '백성의 두목'(the ruler of the
people)이란 삼하 24:4에 의하면 다윗 왕의 '군사 지휘관(군대 장관)'(the captains
of the host)들이었다. 그런데 다윗이 요압과 함께 이들에게 인구 조사를 명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공식 석상에서, 곧 지휘관 회의에서 이 명령을 시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
이다.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의 남쪽 경계지이며 단
(Dan)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지이기 때문에 이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온 영토'를 지
칭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브엘세바(Beersheba)는 헤브론(Hebron) 서남방 약 50km
지점에위치한팔레스틴의 남쪽 국경이다. 그리고 단(Dan)은옛날의바니아스
(Banias), 즉 가이사랴 빌립보(Cesarea Philippi) 북방 약 5km 지점에 위치한 팔레스
틴의 북쪽 국경이다. 그러므로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혹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이스라엘 전 국토를 가리키는 말이다(삿 20:1;삼상 3:20;왕상 4:25).
그 수효를 알게 하라 -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하는 장면이다. 결국 다윗은 이러한
명령을 함으로써 국가적인 큰 재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인구 조사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시하에 인구 조사
를 실시한 사례들이 여러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민 1:1-3;26:1-4;출 30:12-16).
문제는 다윗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동기를 가지고 인구를 조사하였다는 데 있었다.
즉, 다윗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인구 조사를 명하였던 것이
다. 그래서 다윗은 인구 조사의 명령을 내림과 더불어 칼을 뺄만한 사람의 수(5절)를
헤아리게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그는 우선 인구 조사를집행할책임자로
군대 장관인 요압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합법적인 인구 조사에
있어서 제사장들이 그 임무를 감당했던 것과 크게배치되는 것이었다(민 1:3;26:1,
2). 또한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할 때 각 사람에게 생명의 속전(贖錢)을 받아 하나
님께 드려야 했으나(출 30:12) 다윗의 인구 조사에 있어서는 이런 일이 행하여지지 않
았다. 사실 이 속전은 이스라엘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
라엘을 생존케 하시고 번성케 해 주신데 대한 감사의 예물이었던 것이다(출 30:13).
그러나 다윗은 이 예물을 백성들에게 받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시행하지 않았다. 지
금까지 논의된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다윗은 자신의 왕권의 강화를 위해, 그리고 자
신의 권세를 확인하기 위하여 인구 조사를 시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인구
조사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세력을 의지한 그의 교만함과 불신앙을 보여준 죄악된 행위
였던 것이다(Matthew Henry, Lange, Keil, Pulpit Commentary, Payne).
=====21:3
요압이 가로되...어찌하여 이 일을 명하시나이까 - 요압이 다윗의 인구 조사 명령
에 반발하여 강력히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요압이 이처럼 다윗의
명령에 크게 반발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요압은 백성들의
원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The Interpreter's Bible). 즉, 당시 근동 지방
에서 실시된 인구 조사는 흔히 과세와 징병의 목적으로 실시되었는데 금번의 다윗의
인구 조사에 대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와 같은 시각으로 인식하여 다윗 왕조에
대해 원망을 터뜨릴 것을 요압은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가
능성에 대해 전혀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정 국가인 다윗 왕조의 군대
장관 요압이 이처럼 크게 반발한 것은 보다 특별한 이유에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
다. 즉, 그는 신정 국가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지고 또한 앞으로 더
크게 세워질 것을 알고 있었다(신 33:29). 그런데 다윗 왕이 이러한 신정 국가의 원리
를 무시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려는 동기에서 인구 조사를 실시하려 하자 이에 강력
히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Lange).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용장
(勇將)으로서 그와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삼하 3:27-29) 본절에서 하나님의 뜻
에 부합된 신실한 조언을 하는 것이다.이러한 이유로 인해 혹자는 요압의 간언이 인구
조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보다 자
신의 군사에게서 안정을 찾고 있었음에 대해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Wycliffe).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 여기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쉐마'(* )는 종국적으로 형벌을 초래하고야 마는 '원인적인 죄'를 가리키
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 같은 표현은 이러한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죄에 동참하게 되었으며(Barker)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
게 된다는 의미이다(O. Zockler). 그래서 요압은 이 문맥에서 다윗의 인구 조사가 결
국은 이스라엘을 형벌 가운데로 나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러한 요압의 말 가운데는 다윗 왕과 이스라엘이 언약(서약)으로 연합된 관계에 있다는
사상이 나타나 있다. 즉, 온 이스라엘은 다윗 즉위시 그 앞에서 충성의 서약을 함으로
써(11:3;삼하 5:3) 그와 하나된 공동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다윗의
죄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죄가 되는 것이다.
=====21:4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 여기서 '재촉한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자
크'(* )는 본래 '강퍅하다', '강화하다', '완악하다'는 뜻이다(출 8:19;9:35).
그래서 이는 다윗 왕이 요압의 반대를 끝까지 뿌리치는 완악함을 보였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요압의 충언에 대해 매우 위압적인(NIV, overruled) 자세로 단호
하게 물리친 것이다. 이 때문에 공동 번역은 이를 '굽히지 않았다'라고 의역한 것이
다. 한편, 이처럼 사단의 유혹 아래 있는 자들은 그 귀가 무디어져 버리기 때문에 아
무리 유익한 충고를 듣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사단이 하나님의 교
회를 혼란시키기 위해 취하는 가장 교활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지도자를 교만
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말이라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
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 병행 구절인 삼하 24:5-8
에는 인구 조사를 한 요압의 경로(經路)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나본절에서는 이를
간단히 요약해 버렸다. 사무엘하에 의하면, 요압은 요단(Jordan)을 건너 갓(Gad) 골짜
기 가운데 성읍인 아로엘(Aroer)에서 출발하여 지도상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였다. 또한 삼하 24:8의 기록에 의하면, 요압은 이 일을 9개
월 20일 만에 완료하였음을 볼 수 있다.
=====21:5
이스라엘 중에...일백 십만이요 유다 중에...사십 칠만이라 - 병행 구절인 삼하
24:9에는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 만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 만이었
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본서의 언급과 사무엘서의 두 기록 사이에 숫
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군사의 수에서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혹자는 사무엘하의 기록보
다 본절의 기록에 유다의 군사 숫자가 감소되어 나타나 있는 것은 본절에는 레위와 베
탸민 지파의 수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Curtis). 그러나 이러한 사실
은 사무엘하의 기록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므로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다시 말해
서 베냐민의 숫자가 빠져 있어서 본절에서 유다의 수가 감소했다는 의견은 긍정이 가
나 레위 지파의 수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수가 본절에서 늘어난 것은 이
해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견은 부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2) 혹자는 본
장의 기록이 이방인, 곧 다윗 왕의 통치를 받고 있던 이방인의 숫자까지도포함시킨
기록이기 때문에 사무엘하의 기록보다 더 많게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는 성경 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다. (3) 혹자는 '그 수효를 다윗 왕의 역대지략에 기록
하지 아니하였더라'(27:24)는 구절에 근거하여 이 숫자는 기록되지 아니한 구전에 의
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두 구절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설명한다
(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우리는 이 주장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설득력있는 주장이 있기에 우리는 또한 그 설명을 주시해 보아야 한
다. 즉, (4)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군사 110만명의 숫자에는 다윗의 정규군
약 30만명(정확히 말해서 28만 8천명;27:1-15)이 포함되었으며 사무엘하의 80만명에는
그 정규군의 숫자가 빠진 것이라고 주장한다(Payne). 이는 이스라엘의 군사 수에 대해
서만 수치상으로 거의 맞아떨어지는 주장이기 때문에 타당한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비단 본절 뿐만 아니라 본서와 평행 구절의 많은 부분(왕상 4:26과 대하 9:25;왕상
7:26과 대하 4:5 등)에서 이같이 숫자상의 차이는 발견된다. 이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
어서 숫자 서술을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기이거나 잘못 해독
한 경우일 수 있다. 또는 500 이상의 숫자를 표기할 때는 알파벳 위에 특별한 표시(그
한 예로 점을 사용했음)를 했기 때문에 기록하거나 해독할 때 생긴 실수일 수도 있다.
=====21:6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 본절의 이러한 언급은 사무엘서의
평행 구절에는 없는, 본서에만 나타난 사실이다. 그런데 요압이 레위 지파를 계수하지
아니한 것은 선례(先例)를 따른 것이었다. 즉, 이전의 합법적인 인구 조사에서 하나님
은 레위 지파의 종교적인 지위 때문에 그들을 계수하지 말도록 명령하셨던 것이다(민
1:49). 그래서 요압은 다윗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차에 이와같이 선례를 따라 레
위 자파를 인구 조사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또한 베냐민 지파의 영토 안에는
예루살렘(Jerusalem) 성과 기브온(Gibeon) 성막이 있었으므로 요압은 이것을 빌미로
베냐민 지파도 조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Payne). 한편, 27:24에 의하면, 요
압이 인구 조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임하였다. 이로 비추
어 보건대, 요압은 레위 지파 또는 베냐민 지파의 경내에서 소일(消日)하다가 하나님
의 진노가 임하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21:7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 이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 일이 하나님 보
시기에 악하였더라', 혹은 '이 일은 하나님 눈에 악한 것이었다'라는 의미이다. 즉,
다윗이 자신의 안정과 교만을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케 한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
하였다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때에는 언제나 그의 행위에 대해
여호와께서 괘씸히 보신다(출 34:7;시 45:7; 사 31:2).
이스라엘을 치시매 - 이는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한 예비적인 매라기 보다는 14절에
기술된 '온역의 재앙'을 가리키는 구절이다(Pulpit Commentary, Lange). 한편 본절에
언급된 '치시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카'(* )인데 이는 '때리다', '쫓아
내다', '죽이다', '벌주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본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윗
의 범죄로 인해 벌을 줘서 온역으로 백성들을 죽였다'라는 뜻이다.
=====21:8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 병행 구절인 삼하 24:10에
는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 나서 여호와께 회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 계기가 요압의 계속적인 반대였을 가능성도 배
제할 수 없다(Payne). 한편 본절에 언급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는 말은 다윗이
밧세바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 죄의 고백을 할 때 사용한 표현과 유사하다(삼하
12:13).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드러내며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다윗이 지닌 진
솔한 성품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한 마디의 변명도, 타인에 대한 책임 전가도 없이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자세이다. 사실 죄악으로 인해 초래되는 가장 심각한 병폐는 하
나님과의 영적 교제 단절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단의 시험을 극복하고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며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던 것이다.
=====21:9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이르시되 - 병행 구절인 삼하 24:11에는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갓에게 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다윗은
밤새도록 양심의 가책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이후 곧
그날 아침에 선견자 갓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따라서 선견자 갓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다윗의 회개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그리
고 선견자 갓(God)은 이전 다윗의 망명 시절에 모압(Moab)을 따라 유다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다윗에게 전하여 주었던 사람이다(삼상 22:5). 그리고 그 이후 그는
언약궤 앞에 아삽의 찬양대를 상주하게 하라는 지시를 다윗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대
하 29:25). 또한 그는 사무엘, 나단 선지자와 더불어 다윗의 행적을 기록한역사가로
소개되기도 한다(29:29). 한편, 본절에 나타난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
제'(* )이다. 그런데 이는 '주시하다', '감지하다', '이상을 보다'를 뜻하는
'하자'(* )에서 유래한 용어로 '꿈, 계시, 신탁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즉, 다
시 말해서 '선견자'란 하나님의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는 자이다
(단 2:26, 41, 43, 45;4:20;7:2). 그러나 이와는 달리 선견자(seer)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선지자'(prophet)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그 초기에는 선견자와 선지자가
분명히 구분되어 사용되지 않은 듯하다(삼상 9:11;사 30:10).
=====21:10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 본절에 언급된 '보이노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타'(* )로서 '뻗다', '펼치다', '제공하다'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
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택할 것을 앞에 놓아둔 생생한 현장을 나타낸 것이다
(Lange). 그런데 여기서 세 가지는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3년 동안의 기근, 3개
월의 칼의 재앙, 그리고 3일 간의 온역이었다. 이 세 가지는 흔히 하나님의대표적인
형벌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레 26:25;왕상 8:37;대하 20:9;렘 14:12;21:7-9;24:10
;27:8, 13;29:17) 다윗은 이중에서 기근과 칼의 재앙을 이미 맛본 바 있다(삼하 21:1;
12:10).
=====21:11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이
지 결코 하나님 밖에서의 방종이 아니다. 본절에서 볼 때 사실 다윗에게 어떤 형벌을
주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세
가지를 제시하시면서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윗이진실로하나님께
회개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12
삼 년 기근일지 - 병행 구절인 삼하 24:13에는 본절의 3년 기근이 7년 기근으로 기
록되어 있으나 본 구절의 언급이 옳은 듯하다. 왜냐하면 본 문맥에서 하나님이 갓 선
지자에게 제시하고 있는 재앙들이 모두 3이란 숫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Payne,
Lange, Pulpit Commentary). 그래서 70인역(LXX)도 이를 지지해서 3년으로 기록해 놓
았다. 그런데 사무엘서에서 이렇듯 7년으로 나타낸 것은 숫자를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기록한 것을 잘못 해독했거나 오기(誤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3'을 가리
키는 히브리어 '깃멜'(* )과 '7'을 뜻하는 '자인'(* )은 그 모습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기근, 칼, 온역의 세 가지 형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이뤄가시는 과정에서 자주 사용하신 형벌로 성경의 여
러 곳에서 발견된다(신 28:21-25;삼상 6:3-6;왕하 19:35;겔 14:21;계 6:4-8).
여호와의 사자 - 평행 구절인 삼하에서는 발견되어지지 않는 말로 '천사'(KJV, the
angle of the Lord)를 의미한다(Payne).
=====21:13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 다윗이세 가지
재앙 중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시는 형벌이라고 여겨지는 온역을 선택하는 말이
다. 그는 잔악한 이방인의 손에 붙여지기 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붙여짐으로써 긍휼하
신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살 소망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선택은 하나님의 진정한 본성이 긍휼과 자비라는 그의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참으로 이 장면에서 다윗은 비록 재앙을 당하더라도 원수의 손에서는 당하
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서 당하겠다는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신앙적인 태도를 보여주
었다. 그래서 혹자는 다윗의 이러한 대답을 '경건과 지혜가 합한 응답'이라고 표현하
는 것이다(P.C. Barker).
=====21:14
여호와께서...온역을 내리시매 - 이 형벌에 대해 사무엘서(삼하 24:15)에서는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이 이스라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
하신 때라는 말을 '저녁 희생 제사 때'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삼일 동안의 온역을
하루로 단축시키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Barker). 왜냐하면 15절에 하나님께서 재앙
을 내리는 뜻을 돌이키고 있고, 이것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원문에도 원어상 이 말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 - 혹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인
구가 약 5백만명인 것으로 보고 7만명의 사상자는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것이
라고 추정한다(Pulpit Commentary). 사실 이렇게 볼 때 당시 이 재앙의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뿐 아니라 당시의 다윗
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 신정 국가 안에는
하나님보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그 어떠한 불신앙적 요소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을 내리셨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혹자는 이 형벌이 매우 적절
한 벌이었음을 강조한다(Wycliffe). 왜냐하면 다윗의 범죄는 곧 군사력에 의지하며 그
것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인구 계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21:15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 여기서 '뉘우치사'에 해당하는 히브
리어 '나함'(* )은 '뜻을 돌이키다', '동정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이다(창
6:6;출 32:14;삿 2:18;시 106:45). 그래서 본절은 온역의 재앙이 3일간 계속되지 아니
하고 중간에 중단된 것을 암시한다. 진정 여호와께서는 천사가 예루살렘을 멸하려 하
는 것을 보시고 3일간의 재앙 기간을 단축하여 본래의 계획을 수정하신 것이었다. 이
와같이 하나님께서 본래의 뜻을 돌이키신 것은 하나님의 본성인 긍휼하심에 의한 것이
었다. 그런데 이 같은 것은 바로 다윗이 재앙을 선택하기 직전에 한 가닥 희망으로 가
졌던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 여기에서 여부스
사람이란 '예루살렘 성의 원주민'을 의미한다(11:4). 왜냐하면 여부스 족속은 가나안
의 일곱 족속 중 한 족속으로(창 10:15, 16) 예루살렘 산악 지대에거했기때문이다
(민 13:29).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오르난(Ornan)이 병행 구절인 삼하 24:16에서는
'아라우나'(Araunah)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은 결국 한 사람의 다른 이름들이다. 즉,
오르난은 히브리식 발음의 이름이며 아라우나는 여부스식 발음의 이름인 것이다(Keil,
Ewald, Lange). 그리고, 오르난의 타작 마당은 예루살렘 동편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은 후에 솔로몬 때에 성전의 터가 되었다. 사실 타작 마당은 곡식의 낟알을 떨고
까부르기 위해 평지보다 조금 높은 지역에 단단하고 매끈한 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무로 된 바퀴나 철이나 돌로 된 바퀴를 굴려서, 또는 가축으로 밟게 하여
곡식들을 타작하였다(삼하 24:22;사 41:15;룻 2:17, Pulpit Commentary). 한편, 본절
에서 나타난 '선지라'라는 말은 대단히 모호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는 '아마드'(* )로서 '서다'란 뜻과 더불어 '지정하다', '일어나다', '체재하
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창 19:27;30:9;레 13:5;수 10:13;삼상 14:9;렘 7:10). 그
러나 천사를 의인화해서 표현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하나님의 사자가 타작 마당
곁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 말이 천사가
땅 위에 서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Barker).
=====21:16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 이는 천사가 하늘과 땅 사이 곧 '공중에 서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Curtis, p. 251). 그래서 공동 번역은 이를 '공
중에 서서'라고 번역하였다.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 여기서 굵은
베를 입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표시이며(왕상 21:27;왕하 6:30;단 9:3;욜
1:13;욘 3:5, 6), 얼굴을 땅에 댄 것은 주께 대한 경배의 표시이다(대하 20:18;삼하
14:33). 한편, 병행 구절인 삼하 24:17에는 장로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본절에서
는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하나님의 재앙이 전국에 걸쳐 미쳤으므로 장로들이 다
윗과 함께 회개에 참여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드려질수 있다
(Lange).
=====21:17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 다윗은 이번의 범죄, 곧 인구 조사의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만 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본 구절에서 강
조의 의미로만 사용되는 인칭 대명사 '나'(* , 아니)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
기서 자신의 죄를 일체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아니하는 다윗의진실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서 본절을 통해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회개의 올바른 자세를 볼 수 있다.
그것은 (1)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것, (2) 자신 때문에 고난받는 자를 위해 간
구하는 것, (3) 자신을 내어 맡기고 오직 그분의 긍휼만을 구하는 것 등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 신정 국가(神政國家)에 있어서 왕과 백성의 관
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였다(11:2;렘 23:1-4). 그래서 성경은 빈번히 지도자와 백성을
목자와 양무리로 비교하는 것이다(Wycliffe, p. 384).
=====21:18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 혹자는 (1) 여호와의 사자가 임한 곳은 정결해야만
했으므로(창 28:18;삿 6:20;13:6, 19)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그곳을 정결케 하는 제
사가 드려질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Curtis, p.252). 그러나 우리는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단을 쌓으라고 한 여호와의 지시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시가 있기 전에 다윗은 하나님께 진실한 회개를드렸고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이번의 지시는 다윗의 회개 기도에 대
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킬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진정시킬 그장소로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지명하신 것은 그곳에서 천사의 심판 활동이 중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따
라서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이스라엘을 위해 화목의 은총을 베푸실 장소로 지정하시고
그 땅을 성결케 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르난의 이 타작 마당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사로 드리려한 장소로 유명한데(창 22:2, 9;대하 3:1) 혹자는 이곳을
멜기세덱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한 장소(창 14:17-20)로 추측한다(Barker). 한편, 본
구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갓을 통하여 지시를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병행
구절인 삼하 24:18에서는 여호와의 계시를 받은 갓이 그 지시를 전달한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
=====21:19
다윗이...말씀대로 올라가니라 - 다윗 왕이 갖고 있던 신앙의 큰 특징인 순종의 모
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즉, 다윗은 갓의 말을 듣고 지체없이 여호와의 지시에 순종
하고 있는 것이다.
=====21:20
오르난이...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더니 - 오르난과 그 아들들이 숨은 이
유는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있었기(6절)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당시 여호와나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삿
6:22, 23;13:22). 한편, 70인역(LXX)에서는 '천사'(* , 말르아크) 대신 '왕'
(* , 말렉)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이러한 번역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오르난이 그곳에서 천사를 목격했다는 것은 문맥의 흐름상 자
연스러운 것이며 반면 왕을 보고 숨었다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1:21
오르난이 내어다보다가 다윗을 보고 - 여기서 '내어다보다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트'(* )는 '유의하여 보다', '골똘히 주시하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
는 뜻으로(창 15:5;시 84:9;애 4:17) 오르난이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숨은 곳에서
유의하여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그는 다윗 일행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한편,
병행 구절인 삼하 24:20에서는 '왕과 그 신복들'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이른 것으로
나타나 있어 본절의 표현보다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매 - 구약에서 빈번하게 언급된 경배의 자세는 '무릎을 꿇
는' 태도였다(왕상 8:54;스 9:5;사 45:23). 그러나 이마가 땅에 닿도록 몸을 숙이는
자세는 특별히 그 상대에게 절대 복종하는 태도였다(삼상 25:23;왕하 4:37;에 8:3).
이처럼 오르난은 다윗에게 왕으로서 절대 존경과 복종심을 내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
의 이러한 태도 이면에는 방금 목격한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1:22
내게 붙이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붙이라 - 여기서 '붙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
리어 '나탄'(* )은 '주다'라는 기본 어근과 더불어 '지정하다', '배당하다',
'수여하다'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말은 결국 '팔라'는 의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상당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는 '충분한', '꽉찬'이란 뜻으로 타작 마
당의 넉넉한 시가(時價)를 표현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요구는 곧 타작 마당
전체(O. Zockler)를 팔라는 요구로 이해되어 진다. 한편, 본절을 '이 타작 마당에서
장소를 빌려라'라고 번역한 혹자의 주장(Luther)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
어 질 수 있다.
=====21:23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에브론(Ephron)이 자신의 소유인 밭을아브라함
(Abraham)에게 주려고 했던 것처럼(창 23:10, 11) 오르난도 자기의소유를다윗에게
바치고자 했다(James Wolfendale).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역이 속히 그쳐
지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 여기서 '곡식 떠는 기계'는 나무로 만든 썰매와 같은
것(삿 8:7, 16)으로 가축들이 끌고 다니며 곡식 낟알을 떨도록 고안된 것이다. 오르난
은 번제물을 태울 화목(火木)으로 이것을 다윗 왕에게 기증하려 하였던 것이다. 참으
로 그의 정성과 믿음은 가상(嘉賞)한 것이다.
밀은 소제물로 - 소제물로는 곡식을 빻은 고운 가루(레 2:1), 고운 가루로 떡을 만
들어 구운 것(레 2:4),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삶은 것(레 2:7), 그리고 첫 이삭(레
2:14) 등을 드렸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난 때가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는도중이었
기에(20절) 그는 자신의 수확물 중 첫 열매를 다윗에게 바쳤을 것이다. 한편, 이 소제
는 번제를 드리고 난 후에 이어서 드려지는 제사였다(레 2장;6:14-23).
=====21:24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 다윗은 제사에 있어서형식적인 것보다
내용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드리지 아
니하는 그럴듯한 외형적인 제사보다 자신을 함께 바치는 참된 제사를 원하신다는 사실
을 경건한 다윗이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피정복민인 오르난의 제의를
거절하고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그에 상응하는 가격으로 구
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Payne, McConcille).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희
생해서 드리는 자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가 주께
드려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롬 12:1).
=====21:25
그 기지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 금 한 세겔(Shekel)은 은 한 세겔의 15배이
며 은 한 세겔은 노동자의 4일 동안의 품삯에 해당하는 값어치이다(출 30:24). 따라서
이를 계산해 보면 금 육백 세겔은 노동자가 3만 6천일, 다시 말해서 약 100년 동안 일
한 품삯에 해당하는 값어치이다. 한편, 병행 구절인 삼하 24:24에는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라고 기록되었다. 이와같이 양 구절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 혹자는 본서 저자가 크게 과장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Thenius,
Lange). 그러나 이 차이는 과장치고는 너무도 큰 차이이며 터무니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양 구절의 상이한 수치가 각기 다른 두
품목에 대한 다른 가격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Pulpit Commentary, Payne, Curtis,
p. 253). 즉, 은 오십 세겔은 단지 타작 마당과 소를 사는데 든 비용일 뿐이며 금 육
백 세겔은 후에 성전 부지가 된 모리아(Moriah) 산 전체를 구입하는 데 든 비용인 것
이다.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기 때문에 그는 단지 다윗 왕이 제사에 필요한 것만을 구입한 것으로기록하였
으나 본서 저자는 성전 건축을 예비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기 때문에 성전
부지를 사들인 것으로 서술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다윗이 성전 부지를 구입하는데
지불한 600 세겔은 한 지파당 50세겔씩 12지파에게 부담시켜 산출한 액수라고 추정한
다(Curtis).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미비하다.
=====21:26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불로써 번
제단 위의 제물을 사르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죄의 소멸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
도에 대한 응답으로 내려진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병행 구절인 삼하
24:25의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라는 평범한 기술과는 달리 기
적적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그 제물을 태우신 사례는
성경에서 그리 흔치 않은 일로서(레 9:24;왕상 18:24, 37, 38;대하 7:1) 하나님의 영
광스런 출현과 관련되어 나타난 것들이다. 즉, 하나님이 불을 내리신 것은 단순히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사실 외에 이제 그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계심을 상징
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본 문맥에서 하나님께서 불로써 그 제물을 태우
신 사실은 (1)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용서해 주심과 아
울러 (2) 그곳(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심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볼 때 본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곳을 성전 건축의 부지로 승
락하시는 하나의 공식적인 재가(裁可)의 성격을 지닌것임에 틀림없다(Pulpit
Commentary).
=====21:27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 실제적으로든 또는 결과적으로든 이말은 이스라엘에
온역이 완전히 그쳤음을 의미한다(삼하 24:25).
=====21:28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 이는 다윗이 불로 응답을 받은 이후 계속해서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있는 단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다윗은 이곳에
서 계속적으로 조직적인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Barker, O. Zockler). 이유인 즉, 다윗
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21:29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으나 - 다윗 왕은 이전에 기브
온(Gibeon) 산당에서 조직적인 예배를 확립한 바 있다. 즉, 그는 그곳에서대제사장
사독(Zadok)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성막을모시게하였으며 헤만(Herman)과 여두둔
(Jeduthun)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였던 것이다(16:39-42). 그런데 사실 여
호와의 성막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성막 건축에 대한 계시를 받고(출 25:1-31:11)
시내 산에다 건축하였다(출 36:1-40:33). 그러나 성막이 완성된 후 약 50일동안 그
장막은 시내 산에 안치되었다가 출애굽한 지제 2년 2월 20일에(민 10:11, 12) 이동을
시작하여 약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한다. 그러다가이스라엘
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정착한 후 최초로 여리고 근처인 길갈에 진을 치고 성막
을 세웠다(수 4:19;5:10;9:6;10:6, 43). 그러나 이곳은 일시적인 장소였기에 마침내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실로로 옮겨진다(수 18:1;19:51). 그 이후 성막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다가 블레셋에 의해 실로가 함락될 당
시, 다시 말해서 실로에서 블레셋 군에게 법궤를 빼앗길 당시 하나님의 성막은 여기에
서 놉으로 옮겨진 듯하다. 왜냐하면 사울이 놉에서 아비아달을 제외한 모든제사장을
죽인 후(삼상 22:9-23) 그곳에서 성막을 기브온으로 옮긴 사실이 성경에 나타나기 때
문이다(16:39). 그런 후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다윗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언
약궤와 성막을 위한 한 장소(오르난의 타작 마당)를 마련해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었
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 시대에는 기브온과 예루살렘에 각각 성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때 성막이 성전으로 대치되고 성막의 기구들이 모두 성전으로 옮겨짐으
로써 약 500년 간의 성막 역사는 끝이 난다(대하 5:1), 수 18:1-7, 강해 '성막의 역
사' 참조.
=====21:30
다윗이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두려워하여 - 기브온(Gibeon) 산당에 여호와의 장막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오르난(Ornan)의 타작
마당에서 계속 제사를 드린 이유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까지 제사
를 드렸던 기브온 산당에 얼마든지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지아니했는
데 그것은 본 구절 그대로 그가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후 다시 기브온으로 가서 제사
를 드리면 하나님의 천사가 다시 칼로 온역을 발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옮기지
못한 것이다(J. Wolfendale). 그래서 다윗이 다시 기브온 산당에서제사를드린다는
것은 지난번 칼을 집에 꽂았던 여호와의 사자를 무시하는 처사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옮기지 못했다고 하는 혹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으로 받아드려지는 것이다
(Pulpit Commentary).
역대상 제 22장
=====22;1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 내용상 본절은 다윗 왕이 오르난(Ornan)의 타작 마
당에서 제사드린 내용인 전장(前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본
절은 다윗 왕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불의 응답을 받은 후 마음 속으로 이곳
이 하나님의 성전이 들어설 장소라고 결정한 내용의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서 다윗 왕은 아직 건물이 세워지지도 아니하였는데도 그곳을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라
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여기에서 불을 내리신 하나님의 응답을 보았기 때문
이었다. 이는 마치 야곱이 꿈에서 깨어나 그곳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벧엘)이요 하늘
의 문이라고 표현했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창 28:17). 한편, 이곳이 성전의 터로 지정
된 것은 (1)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단일 중앙 성소
인 성전의 장소로서 지정학적으로 안성 마춤의 장소이고, (2) 여호와께서 불로 응답하
신 곳이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이
원래 이방인의 소유였다는 사실은 장차 하나님의 교회가 이방 온 땅에 설립될 것을 예
표하고 있다 하겠다(마 8:11-13).
=====22:2
이스라엘 땅에 우거하는 이방 사람 - 이들은 본래 가나안 원주민들이었으나 가나안
정복 때 여호와의 종교로 개종한 자들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서 솔로몬 때
에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숫자는 모두 15만명이 넘는 많은 인구였다(대하
2:17). 그렇기 때문에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감독관 아도
니람을 중심해서(삼하 20:24) 이들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들이 이방의
기술자들이었으며 무역을 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왔다가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
들이었다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래서 70인역(LXX)에서는 이를분명하게
'개종자들'(* , 토위스 프로 세뤼토위스)이라고 번
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여건에서 살펴볼 때 타당치 않은 것으로 사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스라엘에 '우거하는 자'들이었다고 본 구절이 분명히 언급하
고 있는데다 15만명이라는 숫자를 당시에 귀화한 자들의 명수(名數)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방 사람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림'(* )은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기 때문에 더욱 후자(後者)의 주장은 옳지 않는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들을 본래부터 가나안 땅에 살았던 '원주민의 후
손들' 곧 '느디님 사람들'(9:2, Wycliffe)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Lange, Payne). 그런
데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이들을 모은 것은 이들이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기 때문으로 추측된다(Barker).
석수를 시켜...돌을 다듬게 하고 - 여기서 돌을 다듬는 일은 일반 사람들에게 맡겨
지지 않았고 오직 숙련된 기술자들에게만 맡겨졌다(왕상 5:17, 31). 왜냐하면 채석장
에서 규정된 크기로 돌을 자르고 정돈하는 일(왕상 6:7)은 전문적인 사역이었기 때문
이다.
=====22:3
거멀 못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하베로트'(* )는 '함께 묶다',
'연결시키다'는 뜻의 동사 '하바르'(* )에서 파생된 명사로 나무나 돌 등을 서
로 연결시켜 주는 정쇠를 의미한다. 그래서 70인역(LXX)에서는 이를 '스트로페이스'
(* ), 즉 '연결시키는 것들'로 나타내고 벌게이트(Vulgate)역에서는
이를 '연결시켜 붙이는 도구'(commissurae atque junctarae)로 표현했다. 그러나 대하
34:11에서 나타난 '연접하는 나무'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곳에
나타나 있는 것은 '쇠'가 그 재료인 반면 대하에 표현된 것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기능과 용도는 같았었다.
중수를 셀 수 없는 놋을 준비하고 - 이렇게 많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준비된 놋은
후에 성전의 두 기둥과 놋바다, 그밖에 성스러운 기구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22:4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 레바논 산지에 주로 분포해 있는 백향목은 색
깔이 매우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나무에 옹이가 없고 대단한 내구성을 지니고 있어 최
고급 건축자재로 많이 쓰였다. 따라서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백향목을 무수히
국내에 들여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이 뿐만 아니라 이 나무는 이방인
들에게도 좋은 목재로 알려져 아람, 앗수르, 바벧론에서도 중요한 건축재로사용되었
다.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수운하여 왔음이라 - 시돈(Sidon)과 두로(Tyre)는 베니
게(페니키아)의 유명한 성읍들로 일찍이 해상무역이 발달했었다. 즉, 시돈은 오늘날의
레바논 공화국의 항구 도시 사이다(Saida)로서 그 위치는 두로와 베이루트의 중간 지
점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돈은 두로 북방 36km, 베이루트 남방 30여km에 있
는 성읍이었다. 그리고 두로는 베니게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도시로 팔레스틴 해안의
갈멜 산과 베이루트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이 두 항구 도시는 구약뿐 아니
라 신약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것이다(마 11:21, 22;15:21;막 7:31;행 12:20). 한편,
이들이 무수한 백향목을 다윗에게까지 수운해 왔던 것은 다윗의 정치적인 역량의 결과
였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 왕의 판도(版圖) 내에 이들 두 해상 국가가 포함되어 있었
기 때문에 이들은 다윗 왕의 성전 건축 계획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2:5
내 아들 솔로몬이 어리고 연약하고 - 성경에서 다른 왕들의 경우 대체로 즉위 때의
나이가 밝혀져 있으나 솔로몬의 나이는 그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그의 통
치 연한이 40년인 것과(대하 9:30) 그가 르호보암(Rehoboam)에게 왕위를 계승해 주었
을 때 르호보암의 나이가 41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대하 12:13). 이렇게 볼 때 비록
확실하지는 않지만 즉위 때의 솔로몬의 나이는 20세가 갓 넘은 나이였다고 우리는 추
정해 볼 수 있다(O. Zockler, Wycliff). 왜냐하면 위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즉위할 때 한 살난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이 입증되는데 그렇다면 당시 그의 나이가 최
소한 20세는 넘었을 것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Payne). 그러나솔로몬의
당시 나이가 약 16세 정도였을 것이라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추정은 적
절치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만약 솔로몬이 당시 약 16세였다면 르호보암의
나이와 솔로몬의 통치 연대를 계산해 볼 때 그는 적어도 14-15세 때 결혼을 했어야 했
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나이는 너무 어린 것으로 생각된다.
극히 장려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 여기서 '극히 장려하
여'란 말은 규모 면에서 '대단히 거대하여'란 의미의 말이다. 그래서 KJV은 '과도한',
'대단한' 의미를 가진 exceeding과 '장대', '웅대'의 뜻을 가진 magnifical를 써서 이
를 표현한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공동 번역은 이를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여'라고
표현해 앞으로 지어질 성전의 규모와 그 모습이 어떤지를 잘 나타낸다. 사실 여기서
다윗이 앞으로 지어질 성전의 규모에 대해 이렇듯 분명히, 그리고 비교적 소상하게 언
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만국에 드러내려 하기 위해 성전을 짓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22:6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을 불러...부탁하여 - 다윗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평생의
소원이던 성전건축 사업을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Lange, James
Wolfendale).
=====22:7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 이는 곧 '내 하나님 여호와 그분을 위하여'라
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이름은 대부분의 경우 '존재에 대한 단
순한 확인'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시 8:1, 9;신 12:11;대하 6:20). 그래서
본 구절에서도 '이름'이란 말은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것
이다(Payne).
마음이 있었으나 - 문자적인 의미는 '그것이 나의 마음에 있었다'란 뜻이다. 즉,
이는 '내가 그 일을 하기 위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말로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열정과 그의 사모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 준다(대하 6:7).
=====22: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
이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주어졌던 '언약의 말씀'을 의미한다(17:1-15;삼
하 7:1-17). 한편 상기(上記)한 이러한 구절들에는 밝혀지지 아니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본 구절에는 밝혀지고 있다. 즉, 다시 말해서 상기한 구절들에는 다윗 왕이 성
전을 건축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명백하게 언급되지 아니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 이
유가 확실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다윗이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 문제
를 허락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전쟁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다윗이 군인으로서 이스라엘의대적들을
칼로 죽이는 것은 허락된 것이었다. 따라서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된 원인으
로서 그가 과도하게 칼을 휘두른 경우들, 예를들면 모압 족속을 잔인하게 형벌했다든
가(삼하 8:2), 암몬 족속을 형벌했다든가(삼하 12:31) 하는 사실들을 내세우는 주장
(Payne)은 옳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다윗은 타락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의 도구로서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이 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사명에 관한 말씀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군인
으로서 이방인들을 정복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성전 건축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전 건축은 성격상 평화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만일 피를 많이 흘린 군인에 의해 성전이 건축된다면 성전의 참된 의
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실로 성전은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베풀어 주는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전이 내포하고 있는 속성과 그 성격상 성전 건축
의 적임자는 다윗이 될 수 없었던 대신 전쟁을 알지 못한 솔로몬이 되어야 했던 것이
다(28:3, 6).
=====22:9
평강의 사람 - 이것은 솔로몬 왕의 특성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용맹 무쌍하
게 정복 사업을 추진하여 약속의 지경(地境)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다윗의 사명이라
면, 회복된 땅을 지혜롭게 통치하여 대내외적으로 평강을 끼치는 것은 솔로몬의 사명
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평강의 사람 솔로몬은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를 예표한다(사 9:6). 그리고 이미 도래하였고 또한 장차 도래할 천국을 소망하는 성
도들은, 한편으로는 천국 확장과 성장을 위해 영적 전투를 감행해야 하지만한편으로
는 이미 완성된 평강의 나라를 온 성도와 더불어 누려야 한다.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 본 약속은 솔로몬이하맛소바
(Hamath Zobah)를 취한 시점에서(대하 8:3) 완전히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유
일한 전쟁이었던 하맛소바와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함으로써 솔로몬 왕국은 드디
어 사방의 모든 대적으로부터 완전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된것이기때문이다
(Payne).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 그의 본래 이름은 여디디야(Jedidiah, '여호와께서
사랑하신 자'라는 뜻)였으나(삼하 12:25), 여기서는 그의 다른 이름이 강조되고 있다.
이 다른 이름은 앞으로 이루어질 그의 왕국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즉, '솔로몬'(* )이란 이름은 평강이란 뜻의 '솰롬'(* )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그가 장차 평강의 왕이 될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한편 '여디디
야'(* )는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의 '다윗'(* , 다윗)과 의미상
같은 이름으로 그가 이미 다윗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음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삼하
12:25 주석 참조.
=====22:10
약간의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다윗 언약의 내용(17:12, 13;삼하 7:13, 14)과 일치하
는 구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언약의 내용을 본 구절에서 그대로 인
용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 - 본 구절에는 이렇듯 아비와 아들의
관계, 또한 아들과 아비의 관계가 된다는 것에 대한 언약의 조건이 제시되어 있지 않
으나 28:7에서는 이 언약의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솔로몬이 결국에는 이 조건
을 이행하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조건을 온전히 이행하
셨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은 인간적인 제한점들 때문에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온전
히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모든 인간들의 구세주인 예수께서는 하
나님의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마 5:17;롬 10:3, 4) 이 조건을 성취시킨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 하나
님을 아버지라고 칭하는 것이다(롬 8:15;고후 6:18;갈 3:26;4:5, 6;엡 1:5).
=====22:11
본절부터 13절까지는 다윗 왕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위해 기원하는 내용의 구절이
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를 - 이러한 축복의 말로 이루어진 표현은 비단 본절
뿐만 아니라 16, 18절, 28:20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다윗 자신에게 함께 하셨던 하
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솔로몬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다윗의 간구이다.
=====22:12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 임종을 얼마 앞두고 아들에게 바라는 다윗
의 간절한 기원이다. 이 간절한 기원은 솔로몬에게 깊은 감동이 되어 그의 마음 속에
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그는 즉위 후 곧바로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지혜를 간구했기 때문이다(왕상 3:5-14;대하 1:7-12;Pulpit
Commentary). 그리고 이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
는 고백(잠 1:7)을 통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어 말씀대로 살기 위해노력했기
때문이다.
=====22:13
모든 율례와 규례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니 - 본 구절은 신명기적 어법과 일치하
고 있다. 즉, 다윗 왕은 여기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는 신
명기의 주된 기조(신 4:1;5:1;7:4, 11;11:32;수 1:5-9)를 솔로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Barker, O. Zockler). 이처럼 그가 솔로몬에게 신명기의 율법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지난날의 자기의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
함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엄청난 대가를 치룬 쓰라린 경험을 가지
고 있었다. 즉, 그는 밧세바와의동침(삼하 11:1-5), 우리아를 모살한 행위(삼하
11:14-25)로 인한 일련의 고통스런 재앙들을 겪었던 것이다(삼하 13:1-18:33). 그리하
여 솔로몬에게는 이러한 고통의 재앙들이 임하지 않도록 다윗은 솔로몬에게 단단히 경
각심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22:14
환난 중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아네이'(* )는 (1) '환난 중
에'라고도 번역될 수 있으나 (2) '대단한 열심으로', 또는 '수고함으로'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의 어간 '아나'(* )는 (1)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뜻과
함께(시 116:10;사 31:4;53:7) (2) '수고하다' '일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다(전 1:13;3:10). 그런데 여기서는 (2)번의 의미로 번역되어 지는 것이 타당할 듯 싶
다. 왜냐하면 다윗 왕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모을 수 있었던 시기를 단지 환난의 시
기로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본 구절의 내용과 유사한 다윗의 고백에서 그는 보
다 분명하게 '힘을 다하여'이 모든 것들을 예비하였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29:2). 따라서 이 용어는 '수고함으로' 또는 '열심으로'라고 개역되어야 할 것이다
(Pulpit Commentary, Wycliffe, p. 385). 그래서 70인역(LXX)과 루터(Luther)역은 이
를 '나의 고통스런 수고 가운데'로 번역한 것이다.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 백만 달란트 - 무게로 따지면 금 십만달란트(talent)는
약 3,408t에 달하고 은 일 백만 달란트는 약 34,080t에 달한다. 왜냐하면 3,000세겔
(shekel)에 해당하는 1달란트는 약 34.08kg에 해당하기 때문이다(출 38:25, 27;왕상
16:24;계16:21). 또한 은 한 달란트는 6,000 드라크마(drachma)에 해당하는 액수이고,
금 한 달란트는 은 한 달란트의 15배에 해당되는 액수이기 때문에 은 일 백만 달란트
는 60억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그리고 금 십만 달란트는 90억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금
액이다. 이를 현대적인 감각에 의해 요즈음의 시세로 환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1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므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30,000
원으로 계산할 경우 금 십만 달란트는 2,700조에 해당하는 금액이고, 은 백만 달란트
는 1,800조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다. 그런데 이는 당시의 화폐 가치로 따져볼 때 한
사람이 도저히 모을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돈이었다. 사실 지난번 암몬이 다윗의 공격
에 대비하기 위해 용병을 모집하였는데 그때에 든 비용이 모두 은일천 달란트였다
(19:6).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모은 양이 금 십만 달란트요, 은 일백만 달란트라고
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이러한 돈을 비축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엄청난 양이었다. 또한
왕상 10:14에 의하면, 솔로몬의 세입(歲入)이 일년에 666 금 달란트(talent)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이렇게 볼 때 이 액수는 솔로몬이 아무데도 쓰지않고고스란히 모은다
해도 150년은 족히 걸릴 정도의 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혹자는 본서 저자
가 성전의 영광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실을 크게 과장되게 보도한 것이라고주장한다
(Curtis, p. 258).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릇된주장이라
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의 , 혹은 우리의 안목으로 측정해서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모두 저자의 과장된 표현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미약하기 때문이
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본문의 기록이 필사자의 실수에 의한 오기(誤記), 혹은 잘못
해독한 경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Matthew Henry). 왜냐하면 실제로 다윗이 모든 금.
은의 양이 29:4에서는 본절과는 달리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더할 것이며 - 솔로몬은 실제로 다윗 왕의 이러한 권고를 받아드려 다윗이 준
비한 성전 건축의 재료 위에 더 많은 것들을 준비했다(대하 2:1-18). 이렇게 볼 때 참
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 규모가 어떠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철저히 준비한 것으로 그 성전이 지어졌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22:15
석수와 목수 - 원문상으로 볼 때는 이를 단순히 어떤 재료로 '공작하는 사람' 이나
'숙련공','장인','만드는 자','석공','철공'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라쉬'(*
)로 되어 있다. 그래서 본절을 히브리어 원어상으로 볼 때 석수와 목수는 따로 떨
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원문에서 이에 해당하는 구절은 '돌이나 나무를 자르고
조각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말이지 분명하게 석수와 목수를 구별하는 말이 아니다. 본
구절은 석수일과 목수일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있고 기술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14절에서 '놋과 철'을 준비하고,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기에 그에 합당하게
'석수와 목수'가 있었다는 흑자의 주장(Curtis, p. 258)은 타당치 않은 것으로 판단된
다. 왜냐하면 언어적으로 석수와 목수를 나타내는 말이 한 단어로 쓰였다는것은 곧
당시의 사회에서 석수와 목수를 구분하지 않고 부른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 본 구절은 다음 절과 연관된 구절로 보아야
한다. 즉, 온갖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란 다음 절에 나오는 '금과 은과 놋과 철'을
세공하는 탁월한 기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다음 16절의 '무수하니'라
는 말은 금, 은, 놋, 철 등이 무수하다는 말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금속들을 세공할 수
있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하는 말이다(Wycliffe, p. 385). 그렇기
때문에 본서 저자는 분명히 14절에서는 물량의 풍부함을, 그리고 15, 16절에서는 기술
인력의 풍부함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16절 상반절은 15절과 연관되어 해석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익숙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캄'(* )인데 이
는 '지혜로운', '미묘한', '간교한'이란 뜻이다. 이렇게 볼 때 본절에 나타난 '익숙한
사람들'은 손 재주의 기술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지혜로웠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
래서 이 단어는 성전과 장막을 건설하는 기능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쓰여진 것이다
(Curtis;출 31:6;35:10;36:1, 2, 4, 8;대하 2:12).
=====22:16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 솔로몬에게 용기를 북돋우
어 주는 다윗 왕의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니 나가서 성전
을 세우라는 것이다. 이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
음이니라"(사 60:1)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힘찬 의욕을 불어 넣어주는 말이다. 만
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면 비록 여건이 불비(不備)하다 할지라도 과감히 일어나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하는 결단의 자세야말로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
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라 하겠다.
=====22:17
본절 이하 마지막 절까지는 방백들에 대한 다윗 왕의 권고이다. 여기서 다윗 왕이
이스라엘 모든 방백을 부른 것은 성전 건축이 솔로몬 개인의 사업의 결코 아니고 범국
민적인 과업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방백'에 해당하는 히브
리어는 '사르'(* )이다. 그런데 이 말은 부족의 대표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나
시'(* )보다도 '왕의 대신'이나 '대표자들'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
백이란 말은 단순히 지파의 두목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보다는 '국가와 종족의 지도자
들'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Wycliffe).
=====22:18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이 땅으로...복종하게 하셨나니 - 이는 언약의 실제적인
성취를 다윗 자신의 입으로 확인하는 말이다(민 18:1;32:22, 29). 이와같이 다윗 왕을
통해 미리 예견된 언약의 성취는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성전을 건축해야 할 당위성
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었다.
=====22:19
너희는 마음과 정신을 진정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고 - 여기서 '진정하여'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누'(* )는 '주다'란 의미의 '나탄'(* )에서 파생
한 용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은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이다. 또한 '정
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 )는 '생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
다. 따라서 본 구절의 첫 부분은 마음과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라는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구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라쉬'(* )는 '찾다', '묻다'
라는 뜻으로 특히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는 행위를 가리킨다(창 25:22;출 18:15;
대하 20:3). 즉, 이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다
윗 왕은 지난날 하나님께 묻는 기도의 행위를 통하여 큰 승리를 거둔 경험에 근거하여
지금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바쳐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소를 건축하고 - 이는 다윗 왕의 평생 소원이었다.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의 거룩한 기구를...드리게 하라 - 당시 여호와의 언약궤
는 다윗 성에,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장막, 곧 성막은 기브온 산당에 있었다(대하
5:5).
역대상 제 23장
=====23:1
다윗 왕은 성전 건축에 대한 지대한 관심(22장) 못지 않게 건축된 성전 내에서 드
려질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다윗 왕의 관
심은 23:1-26:32에 걸쳐 이를 위한 실제적인 준비의 행동으로 나타나 있다. 즉 여기서
다윗 왕은 여호와 경배를 위하여 선택된 레위인들을 여러 가지 기능별로 조직하여 봉
사하게 함으로써 여호와를 향한 경배가 후대에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조처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나이 많아 늙으매 -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
리고선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예루살렘에서 33년, 도합 40년 6개월을 통치하였다(삼
하 5:4, 5). 그러므로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그의 나이는 적어도 70세
는 되었을 것이다.
아들 솔로몬으로 이스라엘 왕을 삼고 -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
으로 즉위하는 장면은 왕상 1장에 잘 묘사되어 있으니 참조하라. 한편 솔로몬은 출생
시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지목된 아들이었다. 즉, 솔로몬이 태어날 때 하나님
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다윗 왕에게 보내어 솔로몬의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신 자'라는 뜻의 여디디야(Jedidiah)였던 것이다(삼하 12:25). 그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
다. 이로써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지목하셨음을 분명히 알수 있었
다. 따라서 이제 그가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른 순
종의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23:2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 다윗 왕은 성전 건축 이후
예배 및 성전 관리에 필요한 많은 인력을 확보하고 동시에 효율적인 조직을체계화시
키기 위해 전국의 레위인들을 소집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리에 이스라엘 모든 방백
들이 참여했던 것은 성전 예배를 준비하는 일이 전국가적인 관심사가 되었을 뿐만 아
니라 이 일을 위해서는 각 지파의 협조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26:31의
기록에 의해서 우리는 레위인들의 소집이 다윗 왕 40년 곧 그의 생애의 마지막 해(왕
상 2:10, 11)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써 다윗 왕이마지막까
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다윗 왕실 주변에서
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와 모반(謀反)이 종종 일어났다(왕상 1:5-10). 그리고 솔
로몬을 다윗 왕조의 첫 후계자로 세움과 관련, 선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
다. 그런데도 다윗이 성전 봉사 직제(職制) 확립에 최우선적 관심을 보인 것은 그의
하나님 중심주의, 신앙 제일주의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23:3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였으니 모든 남자의 명수가 삼만 팔천인데 - 레위인들은
30세 이상부터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었으며 그 정년(停年)은 50세였다(민 4:3, 23).
그러나 본절은 다윗 왕이 30세 이상의 레위인을 계수하였다는 말이 아니다.왜냐하면
24, 27절에서 20세 이상의 레위인들이 계수되었다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절은 원래의 레위인의 봉사 가능한 연령을지적해주고 있을 뿐이다(Keil,
Lange). 즉 레위인들은 30세부터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었으며 25세만 되어도 성막에
서 일을 보조할 수 있었다(민 8:24). 그런데 다윗은 그 하한선을 20세로 낮추었다. 아
마도 그 까닭은 거친 광야 생활 때에 비해 성막 봉사가 훨씬 쉬어졌고(26절) 더욱이
성전 건축이라는 대역사를 앞두고 많은 일꾼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모세
때에 30세 이상인 레위인의 수는 8,580명이었다(민 4:47, 48). 그에 비하면 다윗 당시
의 30세 이상 레위인들의 수 38,000명은 약 4배 이상 증가한 수이다.
=====23:4
이만 사천은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살피는 자요 - 본절의 이만 사천에 해당하는 레
위인들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여호와의 전(殿) 사무를 보살피는 자'들이라
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이 이만 사천의 레위인들은
성전을 건축하는 모든 일들을 감독한 감독관들이었다고 주장한다(Curtis). 그러나 본
문맥은 분명히 성전 건축에 관한 것이 아니고 성전 건축 이후에 있을 성전 봉사에 관
한 것이다. 따라서 그 같은 주장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더군다나 성전 건축을
감독하는 것은 레위인들의 임무에도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
살피는 임무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제사장을 도와 제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진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전에서 행하여질 사
무(일)란 제사의 행위 외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같이 제사
장들을 돕는 이만 사천 명의 레위인들이 맡은 구체적인 직무는 28-32절에 기록되어 있
다(Keil). 이들은 각 가문에 따라 구분된 24반열(6-24절)의 반차(班次)를 좇아 봉사하
였다. 이처럼 이만 사천 명이 24교대로 근무할 경우 한 번에 천 명씩 제사직에 종사하
게 되는데 이와 관련 페인(Payne)은 1000명이라는 숫자가 성전 규모상 결코불합리한
숫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육천은 유사와 재판관이요 - '유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테르'(* )는
'관리'를 의미하며 또한 '서기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26:29 주석 참조. 이들은 재판
관의 재판의 근거를 마련해 주기 위해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여진
다. 그리고 여기서의 '재판관'은 '여호와께 속한 일'(대하 19:8), 곧 종교적인 문제를
판결하는 업무를 관할하였던 자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26:29-32에 다시금 나오니 참조하라.
=====23:5
사천은 문지기요 - 이들 문지기에 관해서는 26:1-28에 그 반차와 직임이 다시금 상
세히 나와 있다. 그러니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을 참조하라. 더욱이 그곳에는 성전
곳간을 관리하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사천은...찬송하는 자라 - 이들 찬양 대원들은 25:1-31에 다시금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들로서 돌아가며 찬양의 직무를 맡기 위하여
역시 24반열로 구분되었다(25:1, 9-31). 보다 자세한 내용은 25장을 참조하라.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 - 악사(樂士)들이 여호와를 찬송하기 위하여 주
로 사용한 악기는 제금, 비파, 수금 등이었다(대하 29:25-27;느 12:35:36;암 6:5). 이
들 여러 악기에 관해서는 15:16 주석에서 간략히 도표로 정리해 놓았으니 참조하라.
=====23:6
다윗이...그 반열을 나누었더라 - 다윗은 레위 족속을 게르손, 그핫, 므라리의 혈
통을 따라 24반열로 구분하였다(7-24절). 이렇게 구분된 레위인들은 역시 24반열로 구
분된 제사장들(24:1-19)을 순번에 따라 돕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한편, 다윗이 마련한
24반열 제도는 솔로몬 때에 철저히 이행되었으며(대하 8:14;29:25) 이후 몇몇 의로운
왕들의 종교 부흥 운동으로 인해 그 명맥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에 다시금 회복되었으니 곧 바벨론 포로 이후기의 일이다(느 12:1-7,
12-21).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상 24반열 제도의 시행 유무는 당시의 종교적, 신앙적
상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3:7
게르손 - 레위의 장남이다. 그 자손들은 광야 생활시 성막과 장막, 그 덮개 및 기
타 부속물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았었다(민 3:25, 26).
라단과 시므이라 - 다른 기록에 의하면 게르손 계통의 중요한 두 가문의 시조는 립
니(Libni)와 시므이(Shimei)이다(6:17, 20;출 6:17;민 3:18). 여기서 라단(Ladan)은
립니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고 립니의 후손인 것으로 추측된다(Curtis, Lange).
=====23:8
여히엘 -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살아계심'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다윗 당시 여호
와의 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한 레위인 여히엘(Jehiel, 15:18)과는 구별된다. 이밖에도
성경에서 '여히엘'로 불리운 동명 이인이 많으니 착각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27:32;대
하 21:2;29:14;35:8;스 8:9;10:21, 26).
요엘 -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그의 하나님'이다. 그는 15:7에 나오는 '게르솜 자
손의 족장 요엘'과 동일 인물인 듯하다. 15:7 주석 참조.
=====23:9
시므이의 아들들은...라단의 족장들이며 - 본절은 시므이의 세 아들들이 라단 계통
에 속한 족장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본절의 시므이가 립니의 아우인 시
므이(6:17)와는 다른 동명 이인(同名異人)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므이는 라단 계
통의 후손이므로 결국 라단 계통의 후손들에게는 모두 6개의 반차가 주어진 셈이다(본
절과 8절). 이로 보아 라단의 후손들이 다윗 당시에 매우 중요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3:10,11
시므이 - 이 시므이는 6:17에 언급된 게르손의 차남, 곧 립니의아우인시므이이
다. 그의 후손들에게는 모두 네 개의 반차가 할당되었다.
시나 - 본문에서 그는 일명 '시사'로도 불리우고 있다. '시나(Zina)'는 '풍부'라는
뜻이며 '시사(Zizah)'는 '열렬히 사랑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의 변화가
단순한 필사자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Barker).
브리아 - 그는 브리아 가족(Beriites)의 조상인 아셀의 넷째 아들 브리아(Beriah,
창 46:17)와는 구별된다. 한편 '브리아'라는 이름의 뜻은 '사악함', '나쁨'이다.
=====23:12
그핫 - 레위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그핫(Kehath)보다는 고핫(Kohath)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편 그핫의 후손들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족속이었다. 이
는 그들 가운데서 제사장 가문이 나온 것(민 3:2-4)만으로도 여실히 입증된다. 6:1 주
석 참조.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 네 사람이라 - 이 족보의 명단은 다른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6:2;출 6:18;민 3:27). 이들 네 사람에 대해서는 6:2 주석에서 언급하
였으니 참조하라.
=====23:13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니 -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언급이 출 6:20에 나타
나 있다. 그에 따르면 아론과 모세의 모친(母親)은 요게벱(Jochebed)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론은...영원토록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어 - 이는 하나님께서 아론(Aaron)과 그
의 후손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대대로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게 하신 사실(출 28:1)
을 언급한 구절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들을 제사장직에 위임하기 위하여 몸을
성결케 할 것을 요구하셨는데 그 자세한 내용이 레위기 8장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보면, 이들은 성결케 되기 위하여 먼저 결례(潔禮)를 행하고 머리와 몸에 관유(灌油)
를 발라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으며 희생 제물의 피를 취해 몸에
바르며 회막 안에서 꼬박 7주야를 지내야만 했었다. 이러한 제사장 위임 규례가 갖는
의미에 관해서는 레 8장 강해 전반을 참조하라.
여호와 앞에 분향하며 섬기며...축복하게 되었으며 - 본절은 제사장의 3대 직무를
말하고 있다. 곧, 제사장의 3대 직무는 (1) 여호와 앞에 분향하는 것, (2)여호와를
섬기는 것, (3) 그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 분향하는 것이란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가리키며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란 성소내에서의
여러 가지 봉사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받들어 축복한다는 말
은 여호와의 이름을 축복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축복을 선포한
다는 말이다(출 28:1, 38, 43;29:1, 35, 45;30:7-10;민 6:22-27). 이와 관련해서는 민
8:14-22 강해, '레위인의 제사장직'을 참조하라.
=====23:14
레위인에 관한 본 기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리울 정도로
위대했던 모세의 후손들이 일반 레위인과 동등하게 취급되고 특별한 권위나 특권을 지
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께 자신의 자손에 대한 축복을 간구했었
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해 주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후손들을 위한
어떠한 간구도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세속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요 하나
님의 성결한 일을 먼저 생각한 신앙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 - 본절과 더불어 모세는 모두 다섯 번에 걸쳐 '하나님의 사람'
이라는 칭호를 성경에서 얻고 있다(신 33:1;수 14:6;대하 30:16;스 3:2). 구약 시대
당시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이란 하나님께서 특별히 당신의 사자(使者)로 삼아
주신 자를 가리켰다. 신 33:1 주석 참조. 이로써 우리는 모세가 구약의 인물 중 하나
님의 마음에 부합되었던 가장 위대하고 경건한 인물이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참고로
다윗 왕은 이러한 칭호를 세 번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대하 8:14;느 12:24, 36).
=====23:15
모세의 아들은 게르솜과 엘리에셀이라 - 게르솜(Gershom)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서 낳은 아들로서 그의 이름의 뜻은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이다(출 2:22).
그리고 엘리에셀(Eliezer)은 모세가 출애굽한 이후에 낳은 아들로서 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이다(출 18:4).
=====23:16
본절 이하 20절까지는 그핫의 후손들에게 모두 9개의 반차가 할당되었음을 보여 주
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6-23 강해에 나오는 도표를 보다 참조하라.
스브엘 - 그는 하나님의 전(殿) 곳간을 맡는 책임자가 되었다(26:24). 한편 24:20
에는 아므람의 후손 수바엘(Shubael)이 언급되고 있는데 스브엘(Shebuel)과 동일 인물
인 것으로 추정된다. 24:20 주석 참조.
=====23:17
르하뱌라...르하뱌의 아들은 심히 많았으며 - '르하뱌'(* )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확장시키셨다'이다. 이러한 그의 이름은 그의 가문의 번성함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구약에서 자식의 중다(衆多)함은 하나님의 축복으로여겨졌다
(시 127:3-5).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르하뱌의 조상 모세를 기억하시고 그에게 많은 후
손들을 주셨을 것이다.
=====23:18
슬로밋 - 24:22에서는 슬로밋(Shelomith)이 슬로못(Shelomoth)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26:25, 26에 언급된 슬로못과는 다른 인물이다. 또한 본절의 슬로밋은 시므이
의 아들 슬로밋(9절)과도 구별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26:26 주석을 참조
하라.
=====23:19
여리야와 둘째 아마랴와 세째 야하시엘과 네째 여가므암이며 - 이들 네명의 이름이
24:23에 또다시 그대로 언급되고 있다. 그 곳에서 이들은 제사장을돕는 레위인들로
소개되었다. 한편 이 가운데 여리야(Jeriah)는 '여호와께서 보심'이란 뜻이며 아마랴
(Amariah)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란 뜻이다. 그리고 야하시엘(Jahaziel)은 '하나
님께서 보심'이란 뜻이며 여가므암(Jekameam)은 '사람들이 일어날 것임'이란 뜻이다.
=====23:20
족장 미가 -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뇨'이다. 그 역시 24:24에서 제
사장을 돕는 레위인으로 또다시 소개되었다. 참고로 그의 아들은 사밀(Shamir)이었다.
사밀은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인 중 한 명이다(24:24).
잇시야 - 미가의 형제 잇시야 또한 24:25에서 제사장을 돕는 레위인으로소개되었
다. 이로써 고핫(그핫) 자손 중 24반열에 오른 자는 스브엘(16절), 르하뱌(17절), 슬
로밋(18절), 여리야, 아마랴, 야하시엘, 여가므암(19절), 미가, 잇시야 모두 아홉 사
람이 된다. 16절 주석 참조.
=====23:21
본절 이하 23절까지는 므라리 족속에게 할당된 반차를 보여주고 있다. 므라리 족속
은 무시의 세 아들과 마흘리의 두 아들 도합 5명이 반차를 차지하였다.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요 - 전통적으로 므라리의 아들은 마흘리(일명 말
리)와 무시 두 명인 것으로 기록되어 왔다(6:19;민 3:33). 그러나 우리는 24:26에서
므라리에게 야아시야라는 아들이 한 명 더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므라리는 레
위의 셋째 아들이다(6절;창 46:11). 그 자손들은 성막과 관련, 성막 널판 및 그 부속
품을 관리하는 직무를 담당하였다(민 3:36).
엘르아살과 기스 - 다윗이 나눈 레위인의 24반열(6절)에 오른 마흘리의 두 아들이
었다.
=====23:22
엘르아살이...딸만 있더니 그 형제 기스의 아들이 저에게 장가들었으며 - 엘르아살
의 딸과 기스의 아들은 사촌 관계이다. 그러나 딸에게는 상속권이 없었던 당시의 법률
로 인해 엘르아살의 딸이 기스의 아들, 곧 친족에게로 시집가게 된것이다(민 36:6,
9). 왜냐하면 그렇게 하여 자기 족속의 기업이 다른 족속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룻 1:6-18 강해, '계대 결혼의 성경적 의의'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엘르아살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엘르아살 다음
대에 이르러서는 마흘리 가문에 주어진 반차는 오직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마흘리 가문에 있어서 반차는 오직 기스 한 가족만이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마흘리
가문에게 오직 반차 하나만 남게 되었다면 므라리 자손의 반차는 모두 넷이 되며 결과
적으로 7-23절에 나타난 레위인의 반차수는 23반차가 된다. 즉, 다시 말해서, 게르손
자손의 열 반차(7-11절), 그핫 자손의 아홉 반차(12-20절), 그리고 므라리 자손의 네
반차(21-23절) 도합 23반차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숫자는 24반차에서 하나가 모자라
는 숫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문맥에서 므라리의 아들 야아시야에 대한 기록이 생략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 26, 27절에서 야아시야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게 나오므로 이러한 주장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Keil, Payne, Lange). 즉 야
아시야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한 명에게 반차가 주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레위인의 반차는 모두 24반차가 된다.
=====23:23
마흘리와 에델과 여레못 세 사람이더라 - 본절의 므라리의 후손, 무시의 아들인 마
흘리(Mahli)와 21절의 므라리의 아들인 마흘리는 이름은 같으나 서로 다른 인물이다.
그런데 무시의 아들 마흘리 또한므라리의 아들마흘리와 마찬가지로 일명 말리
(Mahli)로도 불리웠다(6:47). 한편, 본절에 나오는 세 사람은 24:30에서 제사장을 돕
는 레위인으로 또다시 소개되었다.
=====23:24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이십 세 이상된 족장들이라 - 이미 3절 주석에
서 언급하였듯이 본래 모세 때에는 30세 이상된 레위인들만이 회막(會幕)의일을 할
수 있었다(민 4:3). 그러나 이후 곧 모세는 그 하한선을 25세로 낮추었으며(민 8:24)
다윗 왕은 20세로까지 낮추었다(27절). 다윗 왕이 이처럼 레위인이 봉사할 수 있는 연
령을 20세로 낮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앞으로 설치
될 영원한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22장)에서는 많은 봉사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다윗은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Payne). (2) 그리고 또다른 사람은 이제는 무거운 성막
이나 기구를 멜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즉, 광야 시대와 같이 많은 힘이요구되는
봉사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에(26절) 그 연령을 20세까지 낮춘 것이라고도 설명한
다(Keil). 그런데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두 가지 주
장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이는 본 문맥에서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23:25
평강을...주시고 - '평강을 주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누아흐'(* )는 '정
착하다', '쉬다'는 뜻으로 본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창
13:14, 15;26:2, 3)에 정착하게 하시고 그곳에 평안히 거하게 하셨음을 의미하고 있
다. 즉, 다윗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役事)로 말미암아더 이상
전과 같이 이방 족속들에게 쫓겨다니지 않게 되었음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안전한 정착 생활에 대한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
님께로 돌리고 있는 다윗 왕의 겸손한 인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나니 - 다윗 왕은 이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의 궤의 예루살
렘 운송(15, 16장)과 앞으로 건축될 예루살렘 성전(23장)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분명
하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영구히 거하시게 된 것은 결국 바알레
유다에 있던 하나님의 궤(삼하 6:2)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사건과 앞으로의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로써 하나님의 궤
는 더 이상 모세 시대와 같이 이리저리 운송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백성들은
오로지 한 장소, 곧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여호와를 경배하는 일에만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 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를 보다 참조
하라.
=====23:26
레위 사람이 다시는...멜 것이 없다한지라 -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 생활
을 하던 때에는 레위인들이 항상 성막과 그에 딸린 기구들을 수레에 싣거나 어깨에 메
곤 하여 운반하였었다(민3, 4장).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궤와 기구들이 예루살렘 성
전에 영구히 모셔질 것이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더 이상 이 거룩한 기구들을 운반할 필
요가 없게 되었다. 본절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의미한다.
=====23:27
다윗의 유언대로 -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과 신하들에게 남긴 유언
(遺言)은 28, 29장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본절에 따르면 그때 다윗은 성전에서 봉
사할 레위인의 연령을 20세로 낮추도록 다시금 지시하였음이 분명하다.
=====23:28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에게 수종들어 - 여기서 '아론의 자손'은 곧 제사장들을 말
한다.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레위인들(27절)은 바로 이 제사장들을 도와 제사에 관련
된 여러 가지 봉사의 직분들을 감당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민 8:14-22 강해, '레위
인의 2대 사역' 및 민 4:34-49 강해, '레위인의 이중 직무'를 보다 참조하라.
여호와의 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 레위인들이 이러한 장소들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마도 청소 등과 같은 궂은 일들도 하였을 것이다
(Lange). 왜냐하면 이어 나오는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이란 구절이 바로 이들
이 청소와 같은 궂은 일도 감당하였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23:29
진설병 - 진설병(陳設餠, showbread)에 관한 규례는 레 24:5-9에 상세히나와 있
다. 제사장들은 그 떡을 상 위에 차려놓는 일을 하였으며(레 24:8) 그 떡을 만드는 일
은 제사장들을 돕는 레위인들이 하였다. 한편, 진설병은 이스라엘, 곧 언약공동체를
상징하는 거룩한 떡으로서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리고 진설
되었던 떡은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레 24:5-9 주석
을 참조하라.
무교전병이나 남비에 지지는 것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소제(素祭)를 드릴
때 누룩을 섞지 않은 밀가루를 화덕에 구운 것이나 번철에 부친 것으로 드릴 수 있었
다(레 2:4, 5). 그때에 소제에 드릴 고운 가루를 굽거나 부치는 일역시 레위인들이
감당하였다. 레 2:1-3 강해, '소제에 대하여' 참조.
또 모든 저울과 자를 맡고 - 여기서 저울이나 자는 고운 가루나 기름, 포도주 등의
무게 또는 양을 측정하는 도구들이다. 제사장들은 소제에 사용될 고운 가루, 희생 제
물에 사용될 기름, 포도주 등을 정확히 측정하여 제사 때 드려야 했다(출 29:40). 그
런데 이때에 사용할 측정 기구들을 깨끗하게 보관해 두는 직무 또한 제사장들을 돕는
레위인들이 맡았었다.
=====23:30
새벽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축사하며 찬송하며 - 이는 성전에서 행할 악사들의
임무를 보여주고 있다. 즉 4천명의 악사들로 구성된 찬양대(5절)는 아침 저녁으로 드
려지는 제사 때마다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던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23:31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모든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 제사장들은 안식일과 매
월 초하루와 각종 절기 때마다 하나님께 번제(燔祭)를 드려야만 했다(민 28:9-29:39).
여기서 말하는 절기에는 이스라엘의 5대 축제, 곧 나팔절, 대속죄일,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이 포함된다. 특히, 후자의 세 절기 때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成人) 남
자들이 중앙 성소에 나아와 하나님께 보여야만 했었다(출 23:14-17;신 16:16).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참조.
항상 - 즉, 위에 언급된 날들이 임할 때마다 항상이라는 뜻이다. 그럴 때마다 레위
인들은 제사장의 일을 도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이 차질 없도록 보조하였다.
=====23:32
회막의 직무와...아론 자손의 직무를 지켜...수종드는 것 - 여기에 언급된 직무란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직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직무를 지켜수종든다는 말은
레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로서 제사장들을 돕는 일을 그들이 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사실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의 조력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주신 일종의 선물
이었다(민 18:6). 한편 본절에서 '회막의 직무'란 하나님의 장막(후에는 예루살렘 성
전)에서 행하는 제반 임무를 가리킨다. '성소의 직무'란 하나님의 장막 내의 성소(the
Holy Place) 안에서의 일과 번제단에서의 일 등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아론 자손의
직무'란 바로 제사장의 직무를 가리킨다.
역대상 제 24장
=====24:1
본절 이하 19절까지는 제사장의 24반차를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다윗 왕은 아론
자손을 각 가문의 우두머리에 따라 24반열로 구분한 다음 그 반열의 수에 맞추어 제사
장들을 24반차로 조직하였던 것이다(Curtis, Lange).
아론 자손의 반차 - 아론에서부터 시작되어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기까지계속적으
로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였던 아론 자손들의 계보(系譜)는 이미 6:3-15에서살펴보았
다. 그러므로 본문(1-19절)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그 부분을 참조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4:2
나답과 아비후가 그 아비보다 먼저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레 10:1-3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보면, 이들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에 타 죽고 말았음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여기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상기 시키는 이유는 (1) 하
나님께 제사드리는 자는 오직 그분께서 계시하신 말씀과 방법에 절대 순응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2) 또 여호와 앞에서의 범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밝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을 파괴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또 어떤 자
들은 아무 죄악이나 무작정 용서하시는 우유 부단하신 분으로 여기기도 한다. 물론 하
나님의 속성은 사랑으로 대표되지만, 그분의 법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엄정하고 단호
한 심판이 불가피하게 임할 수 밖에 없다. 즉 성도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공
의라는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과 항상 동시에 행해진다(렘 46:28). 한편, 나답과 아비
후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은 민 3:4에 기록되어 있다.
엘르아살과 이다말 - 이들은 형들의 죽음으로 인해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된 인물들
이다. 특히 이들 중 엘르아살(Eleazar)은 아론이 죽은 후 대제사장직을 승계하였다(민
20:22-29). 그러한 그는 모세의 계승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며(민 27:22, 23) 가
나안 땅에 들어간 후 여호수아와 거의 동시에 죽었다(수 24:29-33). 다음으로 이다말
(Ithamar)은 회막 건축 때 회계를 맡은 인물로서(출 38:21) 엘리 대제사장의 조상이
다. 그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6:3 주석을 참조하라.
=====24:3
엘르아살의 자손 사독과 이다말의 자손 아히멜렉 - 사독(Zadok)과아히멜렉
(Ahimelech)은 다윗 왕 말기의 대제사장들이다. 다윗 왕 초기에는 본래 엘르아살의 후
손 사독과 이다말의 후손 아비아달(Abiathar)이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였으나(삼하
15:24;20:25) 아비아달이 늙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아들 아히멜렉이 그
의 대제사장직을 승계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 사독과 아히멜렉은 다윗 왕이제사장의
24반열 제도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 각기 자기 집안의 대표자로서 영향력을행사하였
다. 즉 다윗은 중앙 성소의 제사장직과 관련된 난제를 이 두 사람과 함께 숙고하였고,
제사장직을 수행할 사제들의 명단을 분류하였다. 한편 다윗이 이처럼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을 세밀히 분류한 것은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 집중된 벅찬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
행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어떤 면에서 제사장직과 같은 고위직을 한 사람이 계속 담당
한다면 이와 관련된 부정이 자행될 수 있다. 실상 이런 비리는 신약 시대에사두개파
같은 이익 집단을 발생시켰다. 요컨대 다윗이 레위인들을 이렇게 분류한 것은 분파 의
식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 각자의 맡은 직무를 감당하여 성전 내에서
예배를 제대로 수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의
교회 역시 많은 직분이 어우러져 한몸을 이룬다(롬 12:4, 5;고전 12:12). 우리는 24반
열의 분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직분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24:4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 족장이 이다말의 자손보다 많으므로 - 본절은 당시 엘르아살
자손들의 가문 수가 이다말 자손들의 가문 수보다많았다는 의미이다(Keil, Lange,
Curtis). 즉, 여기서 족장이라는 말은 이들의 종가(宗家)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당
시 존재하고 있었던 각 가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사
장의 24반차는 레위 지파의 24반차와 그 조직 과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레위 지파의 경우에는 그들의 종가에 따라 24반열이 조직된 반면
(23:24) 제사장의 경우에는 현존하는 그들의 가문의 숫자에 따라 24반열이 조직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구 비례제에 따른 대표 선임을 연상케 하는 제사장 반차 조직은 엘
르아살 가문과 이다말 가문 모두가 충분히 수긍할 만한 합리적 방법이었음에 분명하
다.
=====24:5
이에 제비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 '제비뽑기'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
들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다. 이러한 제비뽑기에 관
한 자세한 사항은 민 26:52-56 강해. '제비뽑기'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에서 '나누었
으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흐레쿰'(* )은 3인칭 복수 형태로서 이
동사의 주어가 다윗과 함께 사독과 아히멜렉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다윗 왕은 사독
과 아히멜렉(3절)의 입회하에 공정하게 제비를 뽑게 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여기서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다'는 말은 엘르아살 자손과 이다말 자손 간에 어떠한 차
별도 없이 동등한 입장에서 제비를 뽑게 하였다는 말이다. 즉, 다시 말해서 이들은 서
로 동등한 지위에서 24반열의 순번을 정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상과 같이 비록 엘르아
살이 아론을 계승하여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했을지라도(민 20:22-29) 다윗 왕은 엘르
아살의 자손들과 이다말의 자손들에게 차등을 두지 않고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엘르아살 자손들에게 할당된 반차의 수가 이다말 자손들
에게 할당된 반차의 수보다 많았던 것(4절)은 다만 당시 존재했던 가문의 숫자의 차이
로 말미암은 것이었지 결코 다윗 왕이 그들을 차별함으로 인해 비롯된 결과가 아니었
음을 알 수 있다.
성소의 일을 다스리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다스리는 자 - 여기서 '성소의 일을 다
스리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다스리는 자'는 동의 반복법적(同義反復法的) 표현으로
서 궁극적으로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말이다(Keil, Barnes, Bertheau). 따라서 본절
을 통해 우리는 당시 엘르아살 자손들, 이다말 자손들에게 각각 한 명씩의 대제사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 때에 아비아달 가문의 제사장직이 폐위되므로 인
해 이다말 자손들의 제사장직이 끊기었다(왕상 2:26, 27). 그것은 바로 엘리 제사장
집안의 죄악 때문이었다(삼상 2:27-36).
=====24:6
서기관 스마야가...그 이름을 기록하여 - 여기서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는 말은
제비뽑아 추첨된 이름들을 그 순서에 따라 기록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제비뽑기는
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이 모인 가운데 공개적으로 공정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거
기에는 권력을 등에 업은 부정이나, 기득권 주장이나 청탁이 통할 수 없었다. 여기서
서기관 스마야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 서서 이 모든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이
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순서를 정해 받은 제사장들은 자신의 직분에 따라 정해진 날짜
에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으며, 나답과 아비후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명심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임해야 했었다(롬 12:1;요 4:23).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서 한 집을 취하고 이다말의 자손 중에서 한 집을 취하였으니
- 혹자는 본절을 가리켜 엘르아살 자손의 16반차 중 8반차와 이다말 자손의 8반차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제비 뽑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Payne, Keil). 만일 그렇
다면 엘르아살 자손의 나머지 8반차는 위의 16반차가 끝난 후 나머지 반차를 제비로
결정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본절과 관련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즉 이다말 자손이 제비 하나를 뽑는 동안 엘르아살 자손들은 제비 두 개를 뽑아 서로
공평하게 24반열을 결정지었다는 주장이다(P.C. Barker). 위의 두 견해 중 본문의 문
자적 해석에 보다 부합되는 것은 첫번째 주장이다. 그렇지만 두번째 경우도 전혀 가능
성이 없는 주장은 아니니 참조하라.
=====24:7
여호야립 -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싸우신다'이다. 9:10에도 여호야립
(Jehoiarib)이란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인물로서 본절의 여호야
립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두 사람을 한 혈통에 속한 자로 보고
있으니 곧 선조와 후손의 관계이다(Bertheau, P.C. Barker).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9:10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마카비상 2:1;14:29에는 여호야립이 후에 마카비
(Maccabee) 가문을 탄생시킨 반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커
티스(Curtis)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그때 당시에 여호
야립의 반차가 역사적으로 큰 활약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정확한 고증(考證)이 힘든 유대 전승(傳承)에 관련된 일이니 무어라 단정하기 어렵다.
여다야 - 성경에는 여다야(Jedaiah)의 후손들 역시 포로기 이후에 바벨론에서 예루
살렘으로 돌아와 제사장의 반차를 계속 유지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느 12:6, 19).
한편 시기적으로 포로기 이후에 관한 기록인 9:10에는 여다야의 이름이 여호야립의 이
름보다 오히려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기록의 순서는 아마도 포로기 이후 여다
야가 여호야립의 반차보다 앞의 반차를 차지했기 때문일 것이다(Payne).
=====24:8
하림 - 이 반차의 이름이 스 2:39;느 10:5;12:15에 언급되어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하림(Harim)의 후손들이 포로기 이후에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제사장 반차를 유지한 사
실을 알 수 있다.
스오림 - 이름의 뜻은 '보리'이다. 그런데 본절 외에는 다시금 언급되지 않고 있으
므로 그나 그의 후손에 관한 행적을 달리 알 수 없다.
=====24:9
말기야 - 이와 동일한 이름이 9:12에도 언급되어 있다. 거기에서 그는 제사장 아다
야의 증조부로 소개되었는데 이로써 우리는 포로기 이후에도 말기야(Malchijah)의 반
차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혹자는 말기야 가문을
말룩(느 10:4;12:2), 또는 말루기(느 12:14) 가문과 동일시 여기기도 하는데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어쨌든 말기야의 후손들이 포로기 후기에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제사장
의 반차를 유지한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
미야민 - 그의 후손 역시 느10:7;12:5 등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미야민
(Mijamin)은 일명 미냐민(Minjamin)으로도 불리운 것 같다(느 12:17, 41).
=====24:10
학고스 - 스 2:61, 62에 따르면 학고스 자손들은 바벨론 포로기이후에제사장의
반열에서 자기 가문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한 탓에 제사장 직분을 수행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학고스의 후손들은 제 1차 포로 귀환 때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에 귀
환했으나 제사장의 반열을 다시 조직할 때 다른 반열에 통합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이
름으로 개칭되었을 것이다.
아비야 - 유일하게 신약 성경(눅 1:5)에 나오는 반열의 이름이다. 즉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바로 이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다. 이 반열의 이름이 느 12:4,
17;10:7에 또다시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비야(Abijah)의 후손들이 포로기 이
후에 귀환하여 제사장 반차를 계속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24:11
예수아 - 예수아(Jeshua)라는 이름이 느 7:39;스 2:36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름만
같을 뿐 본절의 예수아와는 동명 이인(同名異人)인 듯하다. 즉 포로기 후기의 예수아
는 여다야 반열(7절)의 후손일 뿐 본절의 예수아와는 무관한 것 같다. 따라서 본절의
예수아를 느 7:39;스 2:36에 언급된 '예수아의 집'의 조상이라고 하는 주장(Curtis,
Pulpit Commentary)은 옳지 않은 듯하다.
스가냐 - 이와 동일한 이름이 느 12:3에 언급되어 있다. 한편 느 12:14;10:4에는
스바냐(Shebaniah)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스바냐는 스가냐(Shecaniah)와 동일 인물일
뿐 필사자의 오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이로써 우리는 포로기 후기에도 여전히
스가냐의 후손들이 제사장의 반차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24:12
엘리아십 - 포로기 이후의 대제사장 가운데서도 엘리아십(Eliashib)이란 이름을 찾
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본절의 엘리아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느 3:1).
야김 - 이름의 뜻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이다. 그런데 본절 외에는 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곳이 없다.
=====24:13
훗바...예세브압 - 이들의 이름 또한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한
편 '훗바'는 '여호와께서 덮으심'이란 뜻이며 '예세브압'은 '아버지의 자리'라는 뜻이
다.
=====24:14
빌가 - 느 12:5에는 그의 후손으로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빌가(Bilgah)가 언급
되어 있다. 그는 일명 빌개(Bilgai)로도 불리운 듯하다(느 10:8).
임멜 - 동일한 이름이 9:12에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임멜의 반차가 포로 이후에
도 매우 유명한 반차였음을 시사해 준다. 이와 관련 우리는 스 2:37에서 임멜 자손
1,052명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임멜 자
손 역시 학고스 자손과 마찬가지로 포로기 후에 제사장 보계(譜系)에서 자기 가문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한 탓에 제사장 직분을 수행치 못하였다(스 2:59, 62). 아마도 이
반차 또한 다른 반차에 통합되었든지 아니면 다른 이름의 반차로 개명되었을 것이다.
10절 주석 참조.
=====24:15
헤실...합비세스 -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본절 외에 달리 언급된 곳이 없다. 물론
헤실(Hezir)이란 이름이 느 10:20에서 느헤미야의 언약서에 인친 백성의 두목 이름으
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절의 헤실과는 무관하다.
=====24:16,17
브다히야...가물 - 이 가운데 야긴(9:10;느 11:10)을 제외한 세 사람의 이름은 제
사장의 반열로는 다른 곳에서 다시금 언급되지 않고 있다.
=====24:18
들라야 - 스 2:60에 의하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 중에 들라야의후손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아시야 - 동일한 이름의 소유자가 느 10:8에 언급되어 있다. 그는 느 12:5에 나
오는 마아댜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24:19
이와 같은 반차로...수종들었더라 - 24반열로 조직된 제사장들은 각기 순번을 좇아
한 주일씩 돌아가며 봉사하였다(왕하 11:9). 한편 이러한 제사장의 24반차 제도는 신
약 시대에까지 지속되었는데(눅 1:8)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더불어 끝나고 말았
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20-31절 강해, '제사장 제도의 변천 과정'을
참조하라.
아론에게 명하신 규례 -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론 가문을 제사장 가문으로 세우시
면서 주신 '제사장 직무 규례'를 가리킨다(출 28:40-43;29:29, 30;30:7-10;민 8:2, 3
등). 제사장들이 이러한 규례를 좇아 직무를 수행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여호와의 진노
를 면치 못하였다. 본장 1-19절 강해, '규례대로 행한 봉사' 참조.
=====24:20
레위 자손 중에 남은 자 - 이들은 비록 아론의 자손은 아니지만여호와의 전에서
아론의 자손(제사장)을 도와 수종든 레위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 문맥에 소개된
레위인들은 레위인 전체 인원(23:3) 중 일부분이며 뒤이어지는 두 장에서 그 나머지
레위인들의 임무가 소개되고 있다.
아므람의 아들 중에는 수바엘이요 - 본절 이하 25절까지는 그핫 족속의 아홉 반차
를 재차 소개한 내용으로서 이러한 내용은 23:12-20의 반복이다. 그런데 23장에서는
그핫 족속의 반차 이전에 게르손 족속의 9반차가 소개되었는데(23:7-11) 본장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게르손 족속의 반차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한편,본절에서 아므람
(Amram)은 그핫(고핫)의 네 아들 중 맏아들이다(6:18). 그리고 아므람의 아들로 소개
된 수바엘(Shebael)은 실제로는 모세의 장자 게르솜의 아들 스브엘(Shebuel)과 동일
인물로서 아므람의 증손이다(23:16). 그는 스브엘 가문의 머리가 되었으며레위인의
24반차 중 하나를 차지하였다. 23:16 주석 참조.
예드야 - 이와 동일한 이름이 27:30에 단 한번 언급되고 있다.거기에서 예드야
(Jehdeiah)는 다윗 왕의 재산을 관리한 관리로 소개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본절의 예
드야와는 다른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24:21
르하뱌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중에 족장 잇시야요 - 르하뱌(Rehabiah)는 모세의 둘
째 아들인 엘리에셀의 후손이다(23:17). 그런데 다윗 왕대에 이르러 르하뱌 족속의 대
표자는 잇시야(Isshiah)가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잇시야는 웃시엘의 아들 잇시야(25
절;23:20)와는 구별되니 착오치 말아야 한다.
=====24:22
이스할의 아들 중에는 슬로못이요 - 이스할은 그핫의 둘째 아들이다(출 6:18). 그
리고 슬로못(Shelomoth)은 슬로밋(Shelomith)의 약간 변형된 형태의 이름이다(23:18).
슬로못의 아들 중에는 야핫이요 - 야핫(Jahath)은 다윗 왕 때에 슬로못 족속의 지
도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게르손의 후손인 야핫(6:20,43)과는 분명히 구별된
다.
=====24:23
헤브론의 아들들 - 헤브론은 그핫의 셋째 아들이다(출 6:18). 그리고 그의 네 후손
들의 이름은 이미 23:19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문맥상 본절의 내용은 미비한 듯하
다. 왜냐하면 다른 레위 족속의 경우에는 다윗 왕 때에 활약한 지도자의 이름이 소개
되었으나(21, 22, 24, 25절) 오직 헤브론 족속의 경우에는 다윗 왕 때의 인물이 소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헤브론의 네 아들 여리야와 아마랴, 야하시엘 그리고
여가므암에 대해서는 23:19 주석을 참조하라.
=====24:24
웃시엘 - 그는 그핫의 넷째 아들이다(출 6:18).
미가의 아들 중에는 사밀이요 - 미가는 레위인의 24반차 중 하나를 차지한 레위인
의 족장이다(23:20). 그리고 그의 후손 사밀(Shamir)은 다윗 왕 때에 활약한 그 반차
의 지도자이다.
=====24:25
잇시야의 아들 중에는 스가랴며 - 잇시야(Isshiah) 역시 그의 형 미가(24절)와 함
께 레위인의 24반차 중 하나를 차지한 족장이다. 그리고 그 후손 스가랴(Zechariah)는
다윗 왕 때의 인물이다. 한편 성경에 나오는 스가랴란 동명 이인은 무려 29명에 달하
니(5:7;9:21, 22;15:18;26:11;27:21;대하 17:7;26:5;35:8;스 8:3;10:26;느 11:5) 서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4:26
므라리 - 저자는 레위의 둘째 아들인 그핫의 후손들의 반차를 상술한 후(20-25절)
이제 본절에서부터 31절에서는 므라리 후손들의 반차를 상술하고 있다.
마흘리와 무시요 야아시야 - 마흘리와 무시는 이미 23:21에서 소개 되었으나 여기
서는 야아시야가 첨가되고 있다. 따라서 23:21에서는 야아시야(Jaaziah)가 생략된 것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야아시야가 보다 이전의 기록(출 6:19;민 3:33)에
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들이 인정해야 할 사항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종
합해 볼 때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야아시야는 마흘리, 무시의 형제는 아
니었으나 그의 후손인 것 같다. 그리고 이후 그가 많은 자식을 낳고 큰 가문으로 성장
하게 되자 마흘리, 무시와 더불어 레위인의 반차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 아들에 해당하는 말인 '벤'(* )은 '후손'으
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Payne).
=====24:27
야아시야에게서 난 자는 브노와 소함과 삭굴과 이브리요 - 이들 야아시야의 네 아
들 중 한 명에게 레위인의 한 반차가 할당되었으리라는 점은 이미 앞장에서 살펴본 바
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3:22 주석을 참조하라.
=====24:28
엘르아살은 무자하며 - 므라리 자손 마흘리의 아들 엘르아살(23:21)이 무자(無子)
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반차가 할당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의 딸은 그의
형제 기스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자기 족속의 기업이 다른 족속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23:22 주석 참조.
=====24:29
여라므엘 - 이름의 뜻은 '여호와여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그는 마흘리의 둘째 아
들인 기스의 가족을 대표하는 다윗 왕 때의 지도자이다.
=====24:30
무시의 아들은 마흘리와 에델과 여리못이니 - 23:23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부분 역시 므라리의 셋째 아들인 무시 계통의 족장들만을 밝혔을 뿐 다윗 왕 당시
의 대표자들을 밝혀주고 있지는 않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3:23 주석을 참
조하라.
=====24:31
그 형제 아론 자손처럼 제비뽑혔으니 - 본절은 제사장의 24반차가 제비로 결정된
것처럼 레위인의 24반차도 제비로 결정되었음을 보여 준다. 5절 주석 참조.
장자의 종가와 그 아우의 종가가 다름이 없더라 - 이는 게르손, 그핫, 므라리 족속
에 속한 가문들이 아무런 차별이 없이 동등하게 교대로 봉사하였음을 의미한다(Keil,
Lange). 즉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봉사함에 있어서는 장자(長子)의 가문이나 차자, 막
내의 가문 모두 똑같은 권리와 의무에 입각해 주어진 직무를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처
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세속적 차원의 계급을 형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다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이다.
역대상 제 25장
=====25:1
본장은 다윗 왕이 4천명의 레위인 찬양 대원(23:5)을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반차에
맞추어 24반차로 편성하는 장면이다. 이 찬양 대원들은 대개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
손들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 혹자는 여기서 '군대 장관'이 '예배 담당자'를 가
리킨다고 주장한다(Myers).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레 핫차바'(* )는 대부분의 경우 '군대의 지휘자'를 의
미하고 있기 때문이다(출 12:17, 41). 물론 '사르'(* )는 '다스리는 자'를, '차
바'(* )는 '봉사'(민 8:25), '군대', '용사'(신 20:9;삼하 3:23)를 의미하므로
'사레 핫차바'를 '봉사의 두목들'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럴 경우 이들은 다윗
의 통치에 조력(助力)한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23:2
에선 '이스라엘 모든 방백'으로 24:6에선 그냥 '방백'으로 불리웠다. 그렇지만 '사레
핫차바'를 '예배 담당자'로 해석할 수는 없다(Keil, Payne). 아무튼 다윗이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이처럼 자기 독단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신하들과 의논한 것은 참으로
그가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 한 선왕(善王)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 아삽과 헤만과 여두
둔은 성가대의 우두머리로서 각기 게르손, 그핫, 므라리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
들의 족보에 대해서는 6:33-47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다윗 왕은 이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에 모셔온 직후 이들에게 찬양대를 맡기
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다. 그 중에 아삽의 찬양대는 예루살렘,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봉사하였고(16:4, 5) 헤만과 여두둔의 찬양대는 기브온 산당에서 봉사하였다
(16:39-42).
수금과 비파와 제금 - 역대기에서 이 세 악기는 종종 함께 언급되고 있다
(13:8;16:5;대하 5:12;29:25). 여기서 수금은 모든 악기 중 가장 고귀한 악기로 간주
된 현악기로서 손가락이나 채로 연주되었다. 그리고 비파는 현이 12개인 현악기이며
제금은 박자를 맞추는 데 사용된 일종의 심벌즈와 같은 타악기이다. 이 악기들은 역대
기에서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어졌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16 주석을 참조하라.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 여기서 '신령한 노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니
베임'(* )은 '예언하다', '대변하다'는 뜻의 동사 '나바'(* )에
서 파생한 용어이다. 본래 '나바'라는 동사의 의미는 '부글부글 넘치다', '끓어 오르
다'라는 뜻으로 선지자나 시인, 또는 악사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감동된 말씀을 쏟
아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성가 대원들이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
함은 그들이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크신 감동을 받아 감동된 노래, 감동된 시구(詩句)
를 쏟아내었음을 의미한다.
그 직분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 여기서 말하는 수효는 7절의 이백
팔십 팔인을 가리키는 것이기 보다는 아삽의 네아들(2절), 여두둔의 여섯 아들(3절),
그리고 헤만의 열 네 아들(5절), 곧 24반차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Curtis). 왜냐하면 나머지 찬양 대원들은 모두 이들의 수하에 소속되어 직임을 감당
하였기 때문이다. 7절 주석 참조.
=====25:2
삭굴 - 느 12:35에는 포로 귀환 이후의 그의 후손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성전
에서 나팔부는 직무를 맡았던 것으로 나와 있다.
아사렐라 - 14절에 나오는 여사렐라(Jesharelah)와 동일 인물이다. 참고로 아사렐
라(Asharelah)는 '하나님께 정직한'이란 뜻이며 '여사렐라'는 '하나님께서 채우셨다'
란 뜻이다.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신령한 노래를 하며 -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는 말의 의미
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삽의 찬양대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찬송하였는
데 시편에 기록된 아삽의 찬송만도 12편에 달하고 있다(시 50, 73-83편). 한편, 본장
에는 여두둔의 아들들과 헤만의 아들들의 명수가 각기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다(3, 5
절). 이에 반해 본절에서 아삽의 아들들의 수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점은 특이하
다.
=====25:3
스리 - 11절에 나오는 이스리(Izri)와 동일 인물이다. 원래는 이름의 첫머리에 '요
드'(* )가 있었지만 필사시에 탈락된 듯하다.
여섯 사람이니 - 본절에는 여두둔의 아들이 여섯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실상은 5명의
이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는 한 명의 이름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락된
한 명의 이름을 17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은 시므이(Shimei)이다. 이와 관련
70인역(LXX)에서는 17절을 근거로 하여 본절에다 시므이라는 이름을 첨가해서 기록해
놓고 있다.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 이는 곧, 여두둔의 지도하에 수금으로 찬양
했다는 말이다. 한편 여두둔(Jeduthun)은 일명 에단(Ethan)으로도불리웠는데(6:44)
'에단'이 본 이름이며 '여두둔'은 별명인 것 같다. 6:44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에단은
유다 지파 세라의 후손으로서 시 89편의 저자인 것으로 추정되는 에단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 같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6 주석을 참조하라.
신령한 노래를 하며 - 여두둔의 찬양대가 찬양한 노래는 성경에서 시 39편, 62편,
77편을 들 수 있다.
=====25:4
웃시엘 - 18절에 나오는 아사렐(Azareel)과 동일 인물이다. 참고로 '아사렐'은 '하
나님께서 도우심'이란 뜻이며 웃시엘(Uzziel)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란 뜻이다.
스브엘 - 그는 20절에서 수바엘(Shubael)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
므람의 후손, 게르솜의 아들인 스브엘(일명 수바엘, 23:16;24:20)과는 분명히 구별된
다.
하나냐...마하시옷이라 - 본절에서 흥미로운 것은 헤만의 여섯째 아들인하나냐로
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열넷째 아들까지 그 이름을 나열시켜 볼 때 그 이름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멋진 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들 아홉
명의 아들들이 가진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이름 뜻
여섯째 - 하나냐 여호와여, 은혜로우소서
일곱째 - 하나니 나에게 은혜로우소서
여덟째 - 엘리아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아홉째 - 깃달디 내가 찬양하난이다
열째 - 로암디에셀 그리고 도우심을 찬양하나이다
열한째 - 요스브가사 비록 외로운 처지에 있을 지라도
열두째 - 말로디 나는 선포하나이다
열세째 - 호딜 가장 높은
열넷째 - 마하시옷 환상들을
=====25:5
헤만...나팔을 부는 자며 - 여기서 '나팔을 부는 자'는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볼 때
헤만의 아들들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헤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나팔을
부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림 케렌'(* )은 다음과 같이 두 가
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혹자는 이 말을 '나팔을 들어올리다'(To lift up the
horn)는 뜻으로 해석하는 데 반해(Bertheau, Barnes) 다른 이들은 '권세를 높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Keil, Kittel, Benzinger). 하지만 이상의 두 견해 중 후자의 해석을
취함이 옳다. 왜냐하면 '케렌'(* )이란 용어는 성경 전체에서 살펴볼 때 권세를
상징하는 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창 22:23;출 27:2;욥 16:15;시 18:2;22:21;89:17;렘
17:1;애 2:3, 17;슥 1:18, 19, 21 등). 그리고 '케렌'이 '높이다'는 뜻의 '하림'과 결
합되어 사용되었을 때 그 의미는 '어떤 자의 권세를 높이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삼
상 2:10;시 89:18;92:10;148:14;애 2:17). 따라서 본절의 '나팔을 부는 자'란 오역이
며 이에 해당하는 올바른 해석은 '뿔을 높이신 자'이다. 더욱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헤
만의 뿔을 높이셨다는 사실은 본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중다(衆多)한 아들들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헤만의 가문은 악사들의 반
차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헤만과 시 88편의 저자인 '에스
라인 헤만'은 서로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왕상 4:31을 참조해 볼 때 '에스라
인 헤만'은 2:6에 나오는 유다 지파 세라의 후손 헤만과 거의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6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제'
(* )는 '환상을 본 자'란 의미이다. 삼상 9:9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왕의
선견자'라 함은 하나님과 왕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왕에게 전달해 주는 자를 가리킨
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아삽(대하 29:30)과 여두둔(대하 35:15)도 선견자로 소개되었
다. 그러나 이들은 악사들이었으므로 선견자 갓이나 나단 선지자와 같이 중요한 시기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전문 선견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영
에 감동된 찬송시를 통해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5:6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 여기서 '이들'이란 헤만의 아들들(4, 5절)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2-5절에 소개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아들들 모두를 가리키
는 말로 이해하여야 한다(Lange).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에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
이 함께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 이들 세 악사들은 다윗으로부터
성가대 대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받고서는 철저하게 다윗 왕의 지시하에 활동하였다
(6:31-33, 39, 44). 그러나 이는 질서를 세워 효율적으로 성가대가 운영되게 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었지 다윗이 성가대를 통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오해
가 없어야 할 것이다. 6:32 주석 참조.
=====25:7
저희와 모든 형제...의 수효가 이백 팔십 팔 인이라 - 288이라는 숫자는24반차에
12를 곱한 숫자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아들들 24명(9-31절)
이 각각 11명의 찬양 대원을 거느려 각 반차가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
다(Lange, Pulpit Commentary, Curtis). 한편, '익숙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
빈'(* )은 '가르치다', '설명하다'는 뜻인 동사 '빈'(* )의 사역형 분
사로서 '가르치는 자', 곧 '선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세 악사의 아들들
을 포함한 288명은 여호와를 찬송하기 위해 뽑힌 다른 레위인들을 가르치는선생들이
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다윗이 소집한 레위인의
총수는 모두 4천명이었다(23:5).
=====25:8
큰 자나...제자를 무론하고 일례로 제비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 이는 곧 다윗 왕이
소집한 사천 명의 찬양 대원 모두가 예외없이 그리고 아무런 차별없이 찬양대의 24반
차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찬양 대원들 중에는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만도 288명이나 되었다(7절). 그러나 그들을 포함한 모든 찬양 대원들
은 24반열의 순서를 결정함에 있어서 아무런 차별없이 제비를 뽑아 정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봉사함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는 은혜를 시사해 준다(고전
12:4-31).
=====25:9
요셉 - 아삽의 둘째 아들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더하실 것이다'는 뜻이다.
그달리야 - 여두둔의 맏아들이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심'이다.
=====25:10
삭굴 - 아삽의 맏아들로서 '순결'이라는 뜻이다.
=====25:11
이스리 - 여두둔의 둘째 아들로서 3절에서는 '스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이스리'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형성하셨다'이다.
=====25:12
느다냐 - 아삽의 셋째 아들로서 '여호와께서 주시다'는 뜻이다.
=====25:13
북기야 - 헤만의 맏아들로서 '여호와의 그릇'이라는 뜻이다.
=====25:14
여사렐라 - 아삽의 막내 아들인데 2절에서는 일명 '아사렐라'로 기록되어 있다. 한
편 '여사렐라'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채우셨다'는 뜻이다.
=====25:15
여사야 - 여두둔의 셋째 아들로서 '여호와께서 구원하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는 엘리에셀의 후손 여사야(26:25)와는 구별된다.
=====25:16
맛다냐 - 헤만의 둘째 아들이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다. 한편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성가 대원 중에서도 맛다냐란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느 11:17).
=====25:17
시므이 - 여두둔의 막내 아들로서 '들어주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3절에서는 그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
=====25:18
아사렐 - 헤만의 셋째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도우심'이라는 뜻이다. 그는 4절에서
일명 '웃시엘'로 불리우고 있다.
=====25:19
하사뱌 - 여두둔의 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라는 뜻이다.
=====25:20
수바엘 - 헤만의 넷째 아들로서 4절에서는 일명 '스브엘'로 기록되어 있다. '수바
벨'이란 이름은 '오 하나님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25:21
맛디디야 - 여두둔의 다섯째 아들로서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이름을 바벨론 포로 귀환민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스 10:43).
=====25:22
여레못 - 헤만의 다섯째 아들로서 '높은 곳들'이라는 뜻이다.
=====25:23
하나냐 - 헤만의 여섯째 아들로서 '여호와여 은혜로우소서'라는 뜻이다. 한편 우리
는 이 이름과 관련,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의 세 친구 중 한 명인 하나냐(단
1:6, 7)를 기억할 수 있다.
=====25:24
요스브가사 - 헤만의 열한번째 아들이다. 이름의 뜻이 비교적 긴데 곧 '하나님께서
외로운 처지에 있게 하심'이다.
=====25:25
하나니 - 헤만의 일곱째 아들로서 '은혜로우심'이란 뜻이다. 한편 바벨론 포로 귀
환민들이 예루살렘 성곽 재건을 마친 후 봉헌식을 할 때 나팔를 잡은 레위인 중 한 명
의 이름 또한 하나니였다(느 12:36).
=====25:26
말로디 - 헤만의 열둘째 아들로서 그 이름은 '내가 선포하나이다'는 뜻이다.
=====25:27
엘리아다 - 헤만의 여덟째 아들로서 그 이름은 '하나님은 아신다'는 뜻이다. 한편
'엘리아다'의 축약형은 '엘랴다'인데 다윗의 아들 중 한 명이 이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삼하 5:16).
=====25:28
호딜 - 헤만의 열셋째 아들로서 '풍부함'이란 뜻이다.
=====25:29
깃달디 - 헤만의 아홉째 아들로서 '내가 찬양하나이다'라는 뜻이다.
=====25:30
마하시옷 - 헤만의 열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은 '환상들'이라는 뜻이다.
=====25:31
로암디에셀 - 헤만의 열째 아들로서 '내가 도우심을 찬양하나이다'라는 뜻이다.
역대상 제 26장
=====26;1
문지기의 반차가 이러하니라 - 1-19절은 레위인의 24반차(23장), 제사장의 24반차
(24장), 그리고 찬양대의 24반차(25장)에 이어 네번째로 문지기의 반차를 기록한 내용
이다. 이러한 문지기에 대한 기록은 본장 이외에도 9:17-27;15:23,24;16:37-39;23:5
등에 나타나 있다. 특히 23:5에 보면, 다윗 왕이 성전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소집한
문지기의 수가 4천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지기들은 앞으로 건축될예루살렘
성전의 입구와 곳간들을 지키게 하기 위해 다윗 왕이 소집한 자들이다.
고라 족속 아삽의 자손 중에 고레의 아들 므셀레먀 - 고라는 레위의 둘째 아들 그
핫의 후손으로서 아론의 대제사장직을 탐내다가 저주를 받은 인물이었다(민 16:9,
10). 그러나 그때에 그의 아들들은 저주에서 면제되어 므셀레먀(Meshelemiah)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다음으로 고라의 후손 아삽(Asaph)은 9:19에서 '에비아삽'으로 기록
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서는 필사자의 실수로 '에비'가 빠진듯 하다(Lange). 한편,
'므셀레먀'(* )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와 동
일한 이름이 9장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므셀레먀 가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
시대에도 여전히 문지기 반차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
한 내용은 9:21 주석을 참조하라.
=====26:2,3
스가랴...엘여호에내 - 므셀레먀의 맏아들인 스가랴(Zechariah)로부터 엘여호에네
(Eliehoenai)에 이르는 므셀레먀의 일곱 아들은 모두 성전 문지기의 24반차에 올라 있
다. 본장 1-19절 강해, 도표 참조. 그런데 9절에 의거하면 비단 이들 뿐 아니라 므셀
레먀의 형제까지 합하여 므셀레먀 가족 중 성전 문지기의 반장(12절)으로 활약한 자들
은 모두 18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므셀레먀 가문이 성전 예배를 위한
문지기 반차에서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증거해 준다.
=====26:4
오벧에돔 - 이는 또 다른 고라의 후손으로서(1절) 일전에 웃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이후 그 대신 언약궤를 충성스럽게 돌보아 하나님의 복을 받은인물이다
(13:13, 14). 그러한 그는 다윗 왕이 그의 집에서 언약궤를 모셔다가 다윗 성으로 운
반할 때 악사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나(15:18, 21) 그의 본 직무는 문지기
였다. 때문에 여기서도 다윗 왕에 의해 다시금 문지기로 발탁된 것이다. 실상 하나님
의 언약궤가 다윗 성에 옮겨진 이래 그와 그의 가문은 언약궤를 모시는 회막의 문지기
로 활약하여 왔었다(16:38). 그러나 이 오벧에돔(Obed-edom)은 다윗 왕의 유명한 악사
인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는 다른 인물임을 기억해야 한다(15:24;16:38). 한편 7절
에 이르기까지 언급되고 있는 오벧에돔의 일곱 아들과 장자(長子) 스마야의 여섯 아들
을 합한 13명은 모두 성전 문지기의 24반차에 올라 있다. 본장 1-19절 강해, 도표 참
조. 그렇지만 이들외에도 성전 문지기의 반장으로 활약한 자들이 많았으니 모두를 합
하여 오벧에돔 가문 출신들은 62명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8절). 이는 곧 문지기 직
무에 있어서 오벧에돔 가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 준다.
=====26:5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며 -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
셨다는 말은 이전부터 나타난다(13:14;삼하 6:11). 즉 웃사 사건 이래 오벧에돔이 정
성껏 하나님의 언약궤를 관리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베푸셨던 것이다. 그런
데 여기서 '복을 주셨다'는 말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에 후손들,
특히 경건한 아들들을 많이 주셨음을 뜻하는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실제로 그
의 아들들 또는 후손들이 문지기 24반차 중 13반차를 차지한 것(4-7절)으로 보아 이러
한 해석은 거의 확실시 된다. 따라서 이 문구는 헤만에게 '나팔을 부는 자'라는 말이
적용된 경우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25:5 주석 참조. 거기에서 헤만은 악사
의 24반차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26:6
그 아들 스마야도...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 - 여기서 '다스리는 자'라는 말은 그
가문의 우두머리 또는 족장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큰 용사'란 말은 싸움을 잘하는
용사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지기들을 잘다스리는 탁월한 행정가였다는의미이다
(Keil). 때문에 NIV 성경은 '다스리는 자'를 '지도자'(leaders)로, '큰 용사'를 '능력
자(capable men)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26:7
능력이 있는 자니 - 여기서 '능력이 있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일'(* )
은 '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의로운', '고상한', '정직한'이란 의미도 가지
고 있다(창 47:6;왕상 1:52). 그런데 여기서는 전자보다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볼 때 본절은 '고상한 성품이 있는 자', 또는 '의로운 자', '정직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26:8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 - 여기서는 앞절에 언급된 능력이 과연 어
떤 종류의 능력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본절에서 '능력이 있다'는 말과 '그 직
무를 잘한다'는 말이 함께 병행되어 있어서 능력이란 곧 문지기의 직무를 잘 감당하는
능력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절 주석 참조. 다시 말해 오벧에돔의 자손들
은 고상하고 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맡은 바 문지기의 직분을 잘 수행하였던 것이다.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 이 명이며 - 12절에 의거할 때 이들은 모두 문지기의
반장으로 활약하였던 자들임을 알 수 있다. 4절 주석 참조.
=====26:9
또 므셀레먀의 아들과 형제 십 팔인은 능력이 있는 자며 - 므셀레먀의 가족에 대해
서는 이미 1-3절에서 언급하였다. 그런데도 본절에서 또다시 그의 가족에 대해 언급하
고 있는 것은 다소 자연스럽지 못한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그의 가족의
수를 다시금 기록한 것은 고라 자손의 총수를 밝히기 위함이었다(Pulpit Commentary).
즉, 오벧에돔이나 므셀레먀는 모두 고라의 후손이다. 이에 오벧에돔 가족의 수(8절)를
언급한 저자는 다시금 므셀레먀의 가족 수를 언급함으로써 고라 가문에 속한 문지기의
총수를 밝힌 것이다. 오벧에돔의 가족 수 62명과 므셀레먀의 가족 수 18명을 합하면
고라 가문의 문지기 총수는 모두 80명이다.
=====26:10
므리라 자손 중 호사 - 호사(Hosah)는 그의 형제 오벧에돔 및 고라 자손오벧에돔
과 함께 다윗 성에 모신 언약궤를 지킨 문지기였다(16:38). 한편 므라리(Merari)는 레
위의 셋째 아들로서 고핫의 형제이다(6:1).
시므리는 본래 맏아들이 아니나 그 아비가 장자를 삼았고 - 시므리가 맏아들이 아
니면서도 맏아들이 된 것은 아마도 호사의 맏아들이 일찍 조사(早死)하여 후사를 남기
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Curtis). 이런 까닭에 호사는 자기의 가문 중 가장
경건하고 영리한 시므리를 장자로 삼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는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시므리(Shimri)란 이름의 뜻은 '조심스
러운'이다.
=====26:11
호사의 아들과 형제가 십 삼 인이더라 - 호사의 아들 중 문지기의 반차에 오른 자
는 모두 4명이다. 본장 1-19절 강해, 도표 참조. 그렇지만 본절은 이들을 합해 호사
가문중 문지기의 반장으로 활약한 자들은 모두 13명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호사 가
문에 속한 문지기 반장 13명과 고라 가문에 속한 문지기 반장 80명을 합하면 모두 93
명이 된다. 바로 이 93명은 4천명에 달한 레위인(문지기)들(23:5)을 다스리고 관할하
였었다. 한편, 93명이던 이들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문지기들은 포로 귀환 후에는 무
려 212명으로 늘어났었다. 9:22 주석 참조.
=====26:12
이상은...그 형제처럼 직임을 얻어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자라 - '이상'이란 위
에 언급된 93명의 레위인 문지기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형제'는 제사장, 악사 등
의 직분을 맡은 레위인들(24, 25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이들 문지기들이 다른
직분을 맡은 레위인들과 같이 직임을 얻어 성전에서 섬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26:13
각 문을 지키기 위하여 - 이는 문자적으로 '문과 문을 지키기 위하여'란 말이다.
즉, 이 말은 성전으로 이르는 동서남북 4대 문을 포함한 모든 문을가리키는 말이다
(Lange). 이 같은 사실은 14-18절에 나오는 '동방', '남방', '서방', '북방' 그리고
'큰 길' 등과 같은 말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무론대소하고 다 제비뽑혔으니 - 여기서 '무론대소'란 나이의 많고 적음을 지적하
는 말이 아니고 각 가문에 속한 자손들의 수의 차이을 지적하는 말이다. 즉, 오벧에돔
에 속한 자손의 수는 62명이었던 반면에 호사의 자손들은 불과 13명이었다(11절). 그
러나 이 같은 숫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평하게 제비를 뽑은 것이었다. 한
편, 이전에 제사장들이나 성전 레위인들, 그리고 악사들의 경우에는 교대의 순번을 정
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었다(24, 25장). 그러나 본절 이하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문지기의 경우에는 근무할 장소를 결정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제비를 뽑았다는 사실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다윗 왕이 어느 가문에
도 특혜를 주지 않았고 오직 근무 장소에 대한 결정권을 하나님께만 맡겼다는 것을 보
여준다. 24:5 주석 참조.
=====26:14
셀레먀는 동방에 당첨되었고 - 셀레먀(Shelemiah)는 므셀레먀(Meshelemiah)의 축약
된 형태의 이름이다.참고로 '셀레먀'는 '여호와의 친구'란 뜻이며 '므셀레먀'는 '여호
와는 나의 구원'이란 뜻이다. 1절 주석 참조.
그 아들 스가랴는 명철한 의사라 - 여기서 '명철한 의사(議士)'에 해당하는 히브리
어 '요에츠 베세켈'(* )은 '지혜로운 충고자', 곧 탁월한 모사(謨
士)를 의미한다. 그러나 스가랴(Zechariah)가 다윗 왕에게 어떠한 정책적인 조언을 했
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다.
제비뽑으니 북방에 당첨되었고 - 이처럼 부자지간인 므셀레먀와 스가랴는 각기 동쪽
과 북쪽의 문을 맡았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두 문은 오벧에돔과 호사가 맡았다(15,
16절).
=====26:15
그 아들들은 곳간에 당첨되었으며 - '곳간'은 제사에 쓰이는 거룩한 물건들을 보관
해 두는 장소이다(느 12:25). 즉 이곳에는 제사에 필요한 성전 기구들 이외에 밀가루,
포도주, 기름, 소금, 연료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예물등이 보관되었다
(29:7, 8). 이 곳간은 성전 남쪽 문 옆의 뜰 안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같이 풍요한
곳간은 저 하늘의 하나님의 집의 풍족함을 예시해 준다(말 3:10-12). 그리고 그 안에
영원한 생명과 지혜, 지식의 곳간이 있어 헤아릴 수 없는 풍요함을 담고 있는 참된 성
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시켜 준다(요 4:13, 14;골 2:3).
=====26:16
숩빔 - 숩빔(Shuppim)이란 이름은 위에서 언급한 24명의 명단(1-11절)에나타나지
않는 이름이다. 혹자는 숩빔이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므라리 가문 출신의 또
한명의 우두머리 문지기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Payne). 그러나 또 한 명의우두머리
는 본 문맥에서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본 문맥에서는 다만 24반차에 해당되는 이름들
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추측은 옳지 않다. 한편 우리는 이 숩빔이란 말을
앞에 나오는 '곳간'이란 말의 한 음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곳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숩핌'(* )인데 이 말의 한 음절인 숩핌이 필사자에 의해 다
시 한 번 본절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Keil). 이렇게 볼 때 숩빔(숩핌)이
란 말은 본절에서 필사자에 의한 실수라는 의미외에 아무런 의미도갖지 않게 된다
(Keil, Lange).
큰 길로 통한 살래겟 문 - '살래겟'(* )은 '던지다', '내보내다'는 뜻의
동사 '솰라크'(* )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혹자는 이 문이 '금지된 문', '피난
문'이란 의미로서 위기시 긴급히 피난할 수 있는 문이었다고 한다(Bottcher,
Thenius). 그러나 이 문이 과연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편 이
문이 큰 길로 통하여 있었다는 말은 이문이 예루살렘성읍 아래에서두로베온
(Tyropoeon) 계곡을 통과해 모리아 산(Mt. Moriah)의 높은 고지에 이르는 바로 그 윗
길에 위치해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Payne, Curtis). 그리고 여기서 '큰 길'이란
원어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란 의미이다.
곁에 있어 서로 대하여 파수하였으니 - 이는 원어상으로 직역하면, "파수하고 그
옆에서 파수하고"란 말이다. 따라서 혹자는 '서로 대하여(마주보고) 파수하였다'는 본
절을 호사에게 적용시켜 해석한다(Bertheau). 즉, 살래겟 문 앞에서와 서쪽 문 앞에서
파수하는 것이 호사의 임무였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해석은 서쪽 문과 살래겟 문
을 서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쪽 문과 살래겟 문이 서로 다른 문이라는 증
거를 본 문맥에서 찾아볼 수 없다(Keil). 이 때문에 혹자는 본절이 모든 문들을 지키
는 모든 문지기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Clericus). 즉, 문지기
들이 요소 요소에서 파수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본절이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
리는 이러한 해석을 비교적 무난한 해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
석은 이어지는 구절의 내용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26:17
동방에 레위 사람이 여섯이요 - 다른 문에는 네 명의 문지기가 세워진 반면 동방의
문에만 여섯 명의 문지기가 세워졌다. 이는 그마만큼 동쪽의 문이 가장 중요한 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Panye).
북방에 매일 네 사람이요 - 이 네 사람과 동방의 문을 지킨 여섯 사람을 합치면 열
사람이 된다. 동방과 북방의 문은 므셀레먀 가족의 책임이었으니(14절) 결과적으로 므
셀레먀 가족은 열 곳의 위치를 파수하였던 셈이다.
남방에 매일 네 사람이요 곳간에는 둘씩이며 - 원문에는 곳간이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둘이란 숫자 역시 두 번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우리는 곳간이 두 곳에 있었으며
여기에서 두 명씩 모두 네 명이 지켰음을 알 수 있다(P.C. Barker, Payne). 이렇게 볼
때 오벧에돔의 가족 중에서는 남방의 네 사람을 포함하여 매일 여덟 명의 문지기들이
직무를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26:18
낭실 서편 큰 길에 네 사람이요 낭실에 두 사람이니 - 여기서 낭실(court)은 살래
겟 문 근처에 있는 작은 방, 곧 성전의 식량과 도구들을보관하는 방을의미한다
(Lange). 이 곳에 두 사람이 있었고 서쪽 문, 곧 살래겟 문 곁에 네 사람이있었으니
호사 가족 중에서는 매일 여섯 사람이 그 직무를 수행하였던 셈이다(16절). 한편 이러
한 숫자들은 각 가족의 문지기들이 24반차의 제도에 따라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사
실을 보여준다. 즉, 므셀레먀 가족에서 10명, 오벧에돔 가족에서 8명, 호사가족에서
6명 등 모두 24명의 문지기들이 각기 맡은 위치에서 봉사하였던 것이다. 물론 24명의
문지기들이 매일 봉사할 수는 없었으므로 다른 문지기들과 교대하였음이 분명하다. 하
지만 문지기의 교대는 제사장이나 악사들, 성전 레위인들이 교대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후자의 사람들은 24교대제로 한번씩 돌아가면서 임무를 수
행하였으나 문지기들은 한번에 24명씩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문지기의 24
반차의 개념은 다른 성전 봉사자들에게 있어서의 24반차 개념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13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6:20
아히야 - 아히야(Ahijah)라는 이름은 본절 이하에 나오는 사람들과는 달리 23:7-23
언급된 레위인 족장들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은 이름이다. 따라서 본절의 아히야를
고유 명사로 취급하지 않는 견해가 있다. 즉 70인역(LXX)에서는 '아히야'(* )
가 '그들의 형제'(* , 아델포이 아우톤)로 번역되어 있
다. 70인역의 역자들은 '아히야'(* )를 '그들의 형제'라는 의미의 '아헤헴'
(* )의 변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어 성경 중에도 이러한 견해
를 취하는 것이 있으니 곧 NIV이다.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 - 여기서 '하나님의 전 곳간'은 제물과 제사에 사용
되는 거룩한 도구들을 보관해 놓는 창고를 의미한다. 15절 주석 참조. 그리고 '성물
(聖物) 곳간'이란 다윗 왕과 그의 신복들이 전쟁시 획득하여 성전건축을 위해 하나님
께 드린 전리품들을 보관하는 창고를 가리킨다(26, 27절).
=====26:21
라단 - 라단(Ladan)은 게르손의 아들 립니의 후손이다. 이에 대해서는 23:7 주석을
참조하라.
여히엘리 -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이다. 그는 23:8에서 여히엘
(Jehiel)로도 불리우고 있다.
=====26:22
여히엘리의 아들은 스담과 그 아우 요엘이니 - 스담(Zetham)은 한글 개역 성경에
세담(23:8)으로도 언급되어 있다. 한편 본절에서 스담과 요엘은 여히엘리(Jehieli)의
아들로 언급되었지만 23:8에는 이들이 여히엘리의 형제로 나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여히엘리를 라단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볼 경우 그 같은 차이점은 전혀 문제되지 않
는다. 즉, 당시 라단 가문을 대표할 수 있는 세력있는 인물은 여히엘리라는인물로서
여히엘리(21절)라는 이름이 곧 라단의 가문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스담과 요엘이 그의 후손으로 소개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한편 이와 같은 사실은
스담과 요엘이 여히엘리의 지도하에 여호와의 전 곳간을 맡았음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Payne, Keil).
=====26:23
아므람 자손과 이스할 자손과 헤브론 자손과 웃시엘 자손 - 이 네 이름들은 그핫의
네 아들들의 이름이다(6:2). 여기서 이 이름들이 열거된 것은 그핫 가문을 보다 상세
히 소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6:24
스브엘은 곳간을 맡았고 - 게르솜의 자손 스브엘(Shebuel)은 성전 레위인의 24반차
중 하나를 맡은 가문의 조상이기도 하다(23:16). 그는 일명 수바엘(Shubael)로도 불리
웠던 것 같다(24:20). 한편 스브엘 가문은 곳간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본절만으
로는 어떤 곳간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26:25
엘리에셀 - 모세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모세가 출애굽 후 낳은 아들인 것으로 추
정되는데 이름의 뜻은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다. 23:15 주석 참조.
=====26:26
슬로못 - 이름의 뜻은 '화평케 하다'이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슬로못은 엘리에
셀의 아들 르하뱌의 후손이다. 따라서 성전 레위인 중 게르손의 여섯번째 반차인 슬로
못(23:9)과 또 이스할의 후손이자 그핫 족속의 반차인 슬로못과 혼동해서는안 된다
(23:18;24:22).
성물의 모든 곳간을 맡았으니 - 여기서 '곳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츠로트'
(* )는 이미 20절에 나온 말로서 흔히 '보물 창고'를 의미한다(왕상
7:51;14:26). 그리고 '성물'이란 하나님께 드려진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
물의 모든 곳간'이란 다윗 왕과 그의 신하들이 외국과의 전투에서 얻은 보화들을 하나
님께 드려 따로 보관해 놓은 장소를 의미한다. 20절 주석 참조. 한편, 다윗 왕이 전리
품 중 좋은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사실에 대해서는 18:11과 삼하 8:10-12을 보
다 참조하라.
=====26:27
노략하여 얻은 물건 - 고대 세계에서 전투 결과로 얻게 된 전리품들은 승전국의 왕
이나 전투 지휘관 혹은 전투에 참여한 군사들에게 배분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
는 결코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싸우지 않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움에 임해야 했기
때문에 궁극적 승리자는 천부장도, 백부장도, 왕도 될 수 없었으며 오직 여호와 하나
님이실 따름이다. 따라서 모든 전리품은 여호와의 소유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호와
의 물건을 취한 아간의 범죄를 기억하여(수 7:1-21)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가이사
의 가이사에게 돌리는 믿음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마 22:17-21).
=====26:28
선견자 사무엘과...요압이 무론 무엇이든지 구별하여 드린 성물 - 여기에 언급된
인물들이 언제 어떠한 물건들을 하나님께 바쳤는지는 성경상에 기록이 되어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다윗 왕에게 이양(移讓)된 이들의 전리품들을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하나님께 바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26:29
그나냐 - 그나냐(Chenaniah)는 다윗왕이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올 때 언약궤를
운반하는 일의 총책임자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15:22 주석 참조. 그는 하나님의 은총
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밝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와 그의 아들들이 이번에 사법(司
法) 책임자로 다윗 왕에 의해 발탁된 것이다.
이스라엘 바깥 일을 다스리는 유사와 재판장 - 유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테르'
(* )는 주로 '관리', '공무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글쓰다'는 의미의
아카드어 '사타루'(sataru)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때 이 용어는 '서기관'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두 의미 중 서기관이란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재판장과 함께 사법적 직무를 수행하면서
재판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수적인 율법 해석의 기능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신
16:18 주석 참조. 즉 이처럼 재판하기에 앞서 율법을 해석하는 직무는 모세때부터 이
미 설정된 중요한 직무였다(신 17:9). 그리고 재판장은 이들의 율법 해석을 근거로 하
여 재판을 하였다. 한편, '이스라엘 바깥 일'이란 성전 내에서 드리는 예배 의식 이외
의 다른 일을 의미한다.
=====26:30
헤브론 자손 중에 하사뱌 - 하사뱌(Hashabiah)는 27:17에서 그무엘의 아들로서 레
위 사람의 관장으로 다시금 소개되고 있다. 그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곳 주석
을 참조하라.
요단 서편 - 곧 가나안 땅을 의미하는 말이다(수 5:1;22:7). 성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리킬 때에는 이처럼 '요단 강 건너편의 서쪽 땅'이란 표현을 곧잘 사용하
였다.
이스라엘을 주관하여 - 여기서 '주관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쿠다'(*
)는 방문, 시찰, 계산, 돌봄, 감독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여기
서는 '감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용어의 가장 보편적인 개
념은 왕에게 종속된 백성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왕으로부터 권세를 위
임받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사뱌와 그의 용사 일천 칠백 명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임무를 행사하기 위해 왕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 어떠한 임무란 다음에 나타나 있다.
여호와의 모든 일과 왕을 섬기는 직임 - 추측컨대 이는 성전을 위한 성전세와 왕을
위한 세금을 받아들이는 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Curtis, Pulpit Commentary). 이러한
해석은 위에서(20, 26절)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보관해 두는 성물 곳간에 대해 이미
언급한 사실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
=====26:31
헤브론 자손 중에 여리야 - 여리야(Jeriah)는 헤브론 자손 중에 성전 레위인의 24
반차 중 하나를 차지한 인물이다(23:19). 본절에 의거하면 그와 그 가족들은 요단 동
편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이 위에 있은 지 사십 년에 - 이는 곧 다윗의 통치 마지막 해를 가리킨다. 다
윗은 40년 동안 재위(在位)하였는데 7년 6개월 간은 유대 지파만을, 나머지 33년 간은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하였다(삼하 5:4, 5).
길르앗 야셀에서 그 족속 중에 구하여 큰 용사를 얻었으니 - 길르앗 야셀(Jazer in
Gilead)은 요단 동편 갓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으로 이곳에는 레위인의 성읍이 있었다
(6:81;수 21:39). 다윗 왕은 이곳에서 여리야가 족장으로 있는 큰 용사들의 집단을 발
견하고 이들을 요단 동편의 감독들로 발탁하였던 것이다.
=====26:32
그 형제 중 이천 칠백 명이 다 용사요 족장이라 - 여기서 '형제'에 해당하는 히브
리어 '아흐'(* )는 같은 동족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리야가 거느린 이천
칠백 명의 용사는 모두 여리야의 친족들인 셈이다. 한편, 요단 서편, 곧 가나안 땅에
서 봉사하던 감독들은 1,700명에 불과한 반면(30절) 두 지파 반밖에 살고 있지 않던
요단 동편에서는 2,700명의 감독이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대해 혹자(Curtis)는 다윗 왕이 길르앗 지역의 중요성에 대해 그마만
큼 인식했다는 사실을 이 숫자가 밝혀주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곳
이 이방인과의 접촉이 많았던 변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많은 감
독들이 선정되었다고도 추론해 볼 수 있다.
역대상 제 27장
=====27:1
23-26장에서 성전 예배를 위한 다윗 왕의 조직 정비에 대하여 기술한 저자는 이제
본장에서 이스라엘 내의 일반 업무를 위한 다윗 왕의 조직 정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
다. 이러한 본장에서 우리는 다윗 왕이 그의 말년에 종교적인 분야 뿐만 아니라 이스
라엘의 일반적인 분야까지 완전히 조직을 정비하여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나라를 물려
주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왕을 섬기는 유사들 - 추측컨대 이는 군대의 지휘관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들은 12반으로 나뉘어진 상비군을 훈련시켰을 것이다.
달마다 체번하여 들어가며 나왔으니 - 이는 각기 차례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려 병
영(兵營)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일종의 상비군 제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절 이하에
의거해 볼 때 이러한 상비군의 교대는 매월 초에 이루어졌던 듯하다(왕하 11:5, 7, 9;
대하 23:4, 8과 비교).
=====27:2
정월 첫반의 반장은 삽디엘의 아들 야소브암이요 - 야소브암(Jashobeam)은 다윗의
피난 시절 당시 시글락에서 다윗과 합류한 자로서(12:6) 다윗 왕의 첫 삼인의 두목으
로 활약하였다. 11:11 주석 참조. 한편, 삼하 23:8에서 그는 '요셉밧세벱', 곧 밧세벱
에 거주하는 자로 소개되었는데 아디노(Adino)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었다.
=====27:3
저는 베레스의 자손으로서 - 야소브암의 조상 베레스(Perez)는 유다의 넷째 아들이
었다(2:3, 4). 이 베레스 가문은 역사상 유다 지파 중 가장 탁월한 가문이 되었다(느
11:4-6). 이로써 우리는 정월 반장인 야소보암이 유다 지파 중 가장 탁월한 가문의 출
신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다윗 왕도 이 가문의 출신이었다(마 1:3-6).
=====27:4
이월반의 반장은 아호아 사람 도대요 - 여기서는 도대(Dodai) 뒤에 ' 의 아들 엘
르아살'이란 말이 생략되었음이 분명하다(Lange, Pulpit Commentary, Keil, Curtis).
왜냐하면 11:12과 삼하 23:9에서는 다윗의 용사 3인 중 한 사람이 '아호아 사람 도도
(또는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엘르아살은 다윗 왕
이 승승 장구하던 때의 용사였으므로 다윗 왕의 말년에 그의 아버지가 군사의 반장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미글롯이 그 반의 주장이 되었으니 - 미글롯(Mikloth)이라는 이름은 8:32, 9:37
에서 베냐민 지파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은 사울 이전의 계보
이므로 그곳에 나오는 미글롯이 본절의 미글롯과 같은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한편, 주장(主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 )는 군대의 지휘자나 대
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아마도 미글롯은 엘르아살의 휘하에서 2월반을 지휘한 군장이
었거나(Keil), 또는 2월반의 행정을 맡은 행정 장관이었을 것이다(Payne).
=====27:5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 브나야(Benaiah)는 다윗 왕의 둘째 삼인 중 한
사람으로서 모압의 용맹스런 용사 둘을 죽이고 함정에 빠진 사자를 때려 잡는 등 큰
일을 행한 용사였다(11:22, 23). 그는 다윗을 위해 세운 공을 인정받아 왕의 근위대인
그렛과 블렛 부대의 대장으로 일하였다(11:25;삼하 8:18;20:23). 이후 그는솔로몬에
의해서도 군대장관으로 발탁되었는바 그의 능력이 출중(出衆)하였음을 보여준다(왕상
2:35). 한편, 브나야의 아버지 여호야다(Jehoiada)는 다른 곳에서 아론의 집 족장으로
소개되어 있다(12:27). 그러나 다윗 당시에 대제사장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사람 뿐이
었으므로(삼하 15:24, 35) 그곳의 '족장'이나 본절의 '대제사장'이라는 용어는 모두
'제사장'을 뜻하는 말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12:27 주석 참조.
=====27:6
삼십 인 위에 있으며 - 30인 제도는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직후 조직한 군
사 제도이다. 다윗은 그 동안 자신을 위하여 전쟁터에서 헌신, 봉사, 충성하였던 뛰어
난 용사들 30명으로 이를 구성하였다. 삼하 23:24-39 주석 참조. 그런데 브나야가 삼
십인 위에 있었다는 말은 그가 삼십 인보다 뛰어난 용사였다는 사실과 그가 삼십 인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
그 반열 중에 그 아들 암미사밧이 있으며 - 이는 브나야의 아들이 3월반에 속하여
그의 아버지와 함께 크게 활약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암미사밧(Ammizabad)은
미글롯의 경우(4절)와 마찬가지로 브나야 휘하에서 군장이나 행정 장관의 역할을 수행
하였을 것이다.
=====27:7
아사헬이요 그 다음은 그 아들 스바댜니 - 아사헬(Asahel)은 다윗의 30인 용사 중
그 이름이 첫번째로 거론된 자로서(삼하 23:24) 요압의 동생이자 다윗 왕의 조카였다.
그러나 그는 다윗 왕인 이스라엘을 통일하기 전에 이미 아브넬에 의해 살해되었다(삼
하 2:18-23). 때문에 실제적으로 아사헬은 다윗 왕이 그의 말년에 조직한 군대 조직의
반장(班長)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사헬을 4월 장관으로 소개한 것은 그의
가문 중 한 사람이 반장으로 발탁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지 이미 죽은 아사헬을 지시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되어야 한다(Pulpit Commentary). '그 다음은 그 아들 스바댜
니'라는 문구가 이와 같은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본절은 4월
반장에 아사헬의 아들 스바댜(Zebadiah)가 발탁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
편, 스바댜가 이처럼 4월 반장에 발탁된 것은 순전히 그의 아버지 아사헬의 공을 다윗
왕이 인정한 때문일 것이다.
=====27:8
이스라 사람 삼훗 - 본서 11:27과 삼하 23:25에서는 삼훗(Shamhuth)이 '하롯 사람
삼훗'으로 소개되어 있다. 즉, 삼훗은 하롯 출신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11:27 주석 참
조. 그렇다면 여기서 '이스라'(* )는 지명이 아닌 셈이다. 왜냐하면 그의 출
신 지명은 하롯으로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를
'세라'(* )의 변형으로 본다(Payne, Lange, Keil). 실상 우리는 이스라와 세라
가 같은 어근(* , 제라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스라 사람'이란 삼훗이 세라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세라
(Zerah)는 유다의 다섯째 아들로서(2:4) 베레스 가문과 함께 이스라엘에서탁월성을
발휘한 가문이었다. 한편, 삼훗은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명으로도 활약했었다(삼하
23:25).
=====27:9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 - 이라(Ira) 역시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
다(11:28;삼하 23:26). 그는 드고아 사람이었는데 드고아(Tekoa)는 베들레헴 남쪽 8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산지의 한 성읍이다. 11:28 주석 참조.
=====27:10
에브라임 자손에 속한 발론 사람 헬레스 - 헬레스(Helez)란 이름의 뜻은'강한'이
다. 그 역시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11:27;삼하 23:26). 그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27 주석을 참조하라.
=====27:11
세라 족속 후사 사람 십브개 - 후사(Hushah)라는 지명은 유다 지파의 족보를 다룬
4:4에서 발견된다. 그렇지만 그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후사 사람 십브개(Sibbecai)는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사람으로서(11:29)게셀에서
블레셋 족속과 전쟁할 때 거인족의 아들 삽을 쳐 죽인 예가 있다(20:4;삼하 21:18).
그런데 그의 이름 '십브개'(* )가 삼하 23:27에서는 '므분내'(* )로
잘못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오월 장관 삼훗(8절)과 같이 세라의 후손이었다.
=====27:12
베냐민 자손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 - 아나돗(Anathoth)은 예루살렘 북쪽 4km 지점
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 이곳에는 레위인의 거주지가 있었다(수 21:18;왕상
2:26;렘 1:1). 이곳 출신인 아비에셀(Abiezer) 역시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
는데(11:28;삼하 23:27) 므낫세 자손 아비에셀(7:18)과는 구별된다.
=====27:13
세라 족속 느도바 사람 마하래 - 느도바(Netopha)는 베들레헴 남동쪽에 위치한 유
다의 성읍이다(2:54;9:16;스 2:22;느 7:26). 마하래(Maharai)는 이곳 출신으로 유다
지파의 세라 족속(8, 11절)이었으며 역시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11:30;
삼하 23:28). 한편 본장에는 마하래 외에도 또 한 사람의 유명한 느도바 출신 용사가
언급되고 있는데 곧 15절의 헬대이다.
=====27:14
에브라임 자손에 속한 비라돈 사람 브나야 - 에브라임 지파의 땅인 비라돈
(Pirathon)은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나블루스(Nablus)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오늘날의 페라타(Ferata) 마을이다(삿 12:13). 그런데 이곳 출신의 브나야(Benaiah)
또한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하나였다(11:31;삼하 23:30).
=====27:15
옷니엘 자손에 속한 느도바 사람 헬대 - 여기서 옷니엘(Othniel)은 이스라엘 최초
의 사사 옷니엘을 가리킨다(삿 1:13;3:9-11).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이자 사위였으며
유다 지파에 속한 자였다. 4:15 주석 참조. 따라서 옷니엘 자손인 헬대(Heldai)는 유
다 지파 사람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헬대 역시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사람으로서
10월 장관 마하래와 함께 느도바 출신이었다(13절). 그런데 그의 이름이 11:30에서는
'헬렛'으로 삼하 23:29에서는 '헬렙'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한편 이상에서 소개된 12
명의 반장들을 지파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유다 지파에서 일곱명(야소브
암, 아사헬의 아들 스바댜, 삼훗, 이라, 십브개, 마하래, 헬대), 레위 지파에서 한 명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베냐민 지파에서 두 명(엘르아살[?], 아비에셀), 에브라임
지파에서 두 명(헬레스, 비라돈 사람 브나야)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유다 지파가
상비군 조직에 있어서 단연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바벨론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왕국의 후손들에게 유다 왕조의 탁월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을 것이다. 따
라서 본서 저자는 은연 중에 본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독자(讀者)들인 귀환민들에게
유다 왕조의 정통성 내지는 탁월성을 밝혀줌으로써 유다 왕조 재건에 대한 용기를 심
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27:16
이스라엘 지파를 관할하는 자 - 지금까지(1-15절) 이스라엘의 상비군 제도를 언급
한 저자는 이제 본절 이하 24절까지에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관할한 관장들을 소개
하고 있다. 여기서 '관할하는 자', 곧 관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 )
는 '지도자', '우두머리'를 뜻하며 각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관장들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밝혀 주고 있지 않은 고
로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제도는 각 지파 내의 여러 가지 일들을 원만하게 처
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윗 왕이 세운 행정적인 조직이었을 것이다(Keil,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서 갓 지파와 아셀 지파의 관장은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본서 저자인 에스라가 이에 대해 알 수 없었거나 아니면 후대의 필사자의 실수로 본문
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Payne). 또한 여기에 열거되고 있는 지파들의 이름은
창세기에 기록된 순서대로(창 49:3-27) 열거되지 아니했고 다소 특이한 방법으로 열거
되었다. 즉, 저자는 앞 부분에 레아의 아들들인 여섯 지파(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
다, 잇사갈, 스불론)를, 그리고 그 다음에 라헬에게 속한 여섯 지파(납달리, 에브라
임, 므낫세 반, 므낫세 반, 베냐민, 단;이중 납달리와 단 지파는 라헬의 시종 빌하의
소생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저자가 이러한 기록 방식을 채택하였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본서 저자가 어떤 의미에서든 레아의 소생과 라
헬의 소생을 구분지으려 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27:17
레위 사람의 관장은 그무엘의 아들 하사뱌요 아론 자손의 관장은 사독이요 - 다른
지파의 관장은 오직 한 명씩이었으나 유독 레위 지파에는 이처럼 두 명의 관장이 임명
되었다. 즉, 아론 자손, 다시 말해서 제사장 가문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사독과 그 나
머지 레위인들을 대표하는 하사뱌였다. 이와같이 레위 지파에만 유독 두 명의 관장을
임명한 것은 그마만큼 다윗 왕이 레위 지파의 임무인 제사직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
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사독(Zadok)에 대해서는 6:8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다음으로 레위 사람의 관장 그무엘의 아들 하사뱌(Hashabiah)는 그핫의 셋
째 아들인 헤브론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그는 요단 서편, 곧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
성들로부터 성전세와 기타 국가의 세금을 받아들이는 감독의 직책을 맡은 인물이다.
26:30 주석 참조. 그런데 혹자(Barker)는 본절의 하사뱌를 게르손 자손으로 보기도 하
는데 확실치 않다.
=====27:18
다윗의 형 엘리후 - 유다의 관장인 엘리후(Elihu)는 다윗의 형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다윗의 가족을 소개하고 있는 2:13-15에는 엘리후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다. 따라서 엘리후는 다윗의 친형제가 아닌 먼 친척 관계에 있는 형이거나, 아니면 그
이름과 유사한 다윗의 맏형 엘리압(Eliab, 2:13)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실상 엘리압이 이새의 장자이므로 유다 지파의 관장으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
었다고 생각해 볼 때 엘리후는 엘리압이라는 이름의 약간 변형된 형태라는 추론은 가
능하다(Keil, Lange, Payne). 이에 따라 70인역(LXX)은 아예 엘리후를 엘리압으로 번
역해 놓고 있는 실정이다.
미가엘의 아들 오므리 - 오므리(Omri)에 대하여 달리 알려진 바는 없다. 대신 미가
엘(Michael)이라는 이름은 7:3에서 잇사갈의 후손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본절
의 '아들'이란 말은 문자적 의미보다는 '자손', '후손'이란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27:19
오바댜의 아들 이스마야 - 이스마야(Ishmaiah)라는 이름은 12:4에서 다윗의 삼십
용사와 관련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본절의 이스마야가 그와 동일 인물인지는 분
명치 않다.
=====27:20,21
므낫세 반 지파...길르앗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 - 므낫세 지파에 관장이 두 명이
임명된 것은 이 지파가 요단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어 거주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중
길르앗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는 곧 요단 동편에 거주한 무리들을 의미한다(민
32:33-42). 따라서 앞에 기록된 므낫세 반 지파는 자연적으로 요단 서편, 곧 가나안
땅에 거주한 무리들(수 17:5-13)을 의미하게 된다.
베냐민의 관장은 아브넬의 아들 야아시엘이요 - 여기서 아브넬(Abner)은 사울 왕의
사촌이자 이스보셋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인 것으로 추정된다(Payne, Pulpit
Commentary). 이 아브넬에 대해서는 삼하 2:8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아브넬의 아들
야아시엘은 다윗의 삼십 용사 중 한 사람인 므소바 사람 야아시엘(11:47)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27:22
단의 관장 - 단은 라헬에 속한 야곱의 아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이었으나 이
처럼 가장 마지막에 소개되고 있다. 16절 주석 참조. 즉 서열상으로만 따진다면 단은
납달리보다 먼저 소개되어야 마땅했다(창 30:1-8). 이와 관련 단 지파는 우상을 가장
많이 숭배했던 지파였으므로(삿 18:1-31) 저자인 에스라가 의도적으로 맨 나중에 기록
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7:23,24
본문에는 이미 21장에서 기록된 바 있는 다윗 왕의 인구 조사가 다시 한 번 언급되
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와는 약간 달리 본문에서 저자는 다윗 왕의 인구 조사 행위를
어느 정도 변호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다윗 왕조가 한 때
저지른 불명예를 극소화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십세 이하의 수효는 다윗이 조사하지 아니하였으니...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음이라 - 저자 에스라는 다윗 왕이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인구 조사를 명하
였을지라도 이십 세 이하의 인구는 조사하지 않게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러한 다윗 왕의 조치는 그가 악을 행하였던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만
큼은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이스라엘
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창
15:5;22:17). 이 언약대로라면 다윗 당시의 이스라엘의 인구는 이미 도저히 계수될 수
없는 중다(衆多)한 무리임에 틀림없다. 다윗은 이와 같은 믿음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무리를 계수하지 아니하였으며 단지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만을 계수
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Keil, Payne, Bertheau, Lange).
요압이 조사하기를 시작하고 끝내지 못하여서 - 이는 요압이 다윗의 인구 조사 명
령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인구 조사를 게을리한 것을 가리킨다. 즉, 그때 요압은
의도적으로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수효는 계수치 아니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서는 21:6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 일로 인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한지라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21:7-14
과 삼하 24:12-17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사흘 동안 온 이스라엘
땅에 온역 재앙을 발하시니 죽은 자의 수가 칠만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수효를 다윗 왕의 역대 지략에 기록하지 아니하였더라 - 이처럼 조사된 이스라
엘의 인구수가 공식 기록에 등재되지 않은 까닭은 이번의 인구 조사가 하나님의 뜻하
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21:1-8). 한편 이처럼 조사된 수효를 역대 지략에 기록하
지 않도록 지시한 자는 틀림없이 다윗 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그 수
효를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범죄 이후 다윗 왕의 믿음을 또다시 보여주는 것이다. 왜
냐하면 이러한 조치는 다윗이 자신의 과거 행위를 부끄럽게 여긴 증거요, 또한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 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역대 지략'은 성경의
역대기와는 다른 이스라엘의 왕실 일지이다. 왕상 14:19 주석 참조.
=====27:25
지금까지는 다윗의 상비군 조직(1-15절)과 행정 조직(16-24절)이 언급되었다. 그러
나 이제 본절 이하 31절까지에서는 다윗 왕에게 할당된 재산을 관리하는 왕실 재정 관
리들의 이름들이 소개되고 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대개 왕실의 재정은 국민 세금으
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기 쉬웠다. 그러나 다윗 왕은 왕실의 재정
을 국민의 세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기에게 할당된 기업을 통해서 얻은 산물(産物)로
크게 충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스마엣 왕의 곳간을 맡았고 - 여기서 '곳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차르'
(* )는 '창고'라는 의미 외에도 '보물', '보배'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
다(왕상 7:51;대하 11:11). 그런데 '왕의 곳간'은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들을 보관해
두는 성물 곳간(26:20)과는 다른 것으로 순전히 왕의 사유 재산을 보관해 두는 창고이
다. 당시 이 같은 왕의 곳간은 다음에 나오는 '산성의 곳간'과는 달리 예루살렘 왕궁
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다음으로 이 곳간의 책임자인아디엘의 아들 아스 마엣
(Azmaveth)과 동일한 이름이 11:33에도 언급되어 있다. 만일 그가 본절에 언급된 아스
마엣과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며 바후림 사람, 곧 베냐
민 지파에 속한 바후림 출신자인 셈이다. 11:33 주석 참조.
웃시야의 아들 요나단은 밭과 성읍과 촌과 산성의 곳간을 맡았고 - 본절은 왕의 소
유지가 이스라엘 각처에 흩어져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왕은 이렇게 흩어진 각 지역
으로부터 특산물들을 공급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산성의 곳
간'이란 이 특산물들을 보관해 두는 창고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창고들은 전략적
인 목적으로 유사시 사용할 군량이나 무기를 보관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한
편 여기에 나오는 웃시야(Uzziah)가 다윗의 삼십 인 용사 중 한 사람인 웃시야(11:44)
와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27:26
글룹의 아들 에스리는 밭가는 농부를 거느렸고 - 25절에 언급된 두 사람은 이미 저
장해 놓은 물건을 감독한 사람들이지만 이제 본절에서부터 30절에서 소개되는 자들은
그 물건을 생산해 내는 사람들 또는 생산지를 감독한 사람들이다. 그중 먼저 본절의
'밭가는 농부'는 왕에게 고용된 소작농을 의미한다. 이처럼 당시 농업 인구가 존재했
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제까지의 유목(遊牧) 생활이라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농업을
주 산업으로 한 안정된 사회로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물론 다윗이 주변국
들에 대하여 거둔 군사적 승리의 결과이다(18-20장). 한편, 글룹(Chelub)과 동일한 이
름은 유다 지파의 족보를 기록한 4:11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그를 본절의 글룹과
동일 인물로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
=====27:27
라마 사람 시므이 - 구약 성경에서는 라마(Ramah)로 불리우는 지명이 약 다섯 군데
나온다(수 18:25;19:29;삿 4:5;삼상 7:17;왕상 15:17-22). 따라서 본절만으로는 어느
곳의 라마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카일(Keil)은 이를 베냐민 지파내에 있었
던 라마(수 18:25)로 추측하기도 한다.
스밤 사람 삽디 - 스밤(Shepham)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유다 지파의 네게브 지방에 위치한 성읍으로 추정된다(민 34:10, 11). 이와 관련 카일
(Keil)은 과거 모세의 12 정탐꾼들이 정탐하다가 막대기에 꿰어 둘이 메어갈 정도로
큰 포도송이를 발견하였던 곳인 에스골 골짜기(민 13:23, 24)가 바로 이 스밤 부근이
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27:28
게델 사람 - 게델(Geder)은 유다의 저지대인 쉐펠라 지역에 위치한 유다성읍이다
(수 12:13). 구약 성경에서 '그데라'(수 15:36), '그데롯'(수 15:41) 또는 '그돌'(수
15:58) 등으로 언급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게델'인 것으로 추측된다.
평야 - 이는 히브리어로 '쉐펠라'(* )인데 유다 지파와 지중해 사이에 위
치한 기름진 땅을 가리킨다. 이곳은 블레셋 해안 평야와 유다 산지 사이에 위치했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쉐펠라'는 욥바에서 가사에까지 형성되어 있었다. 신 9:1 주석
참조.
감람나무와 뽕나무 - 감람나무는 팔레스틴의 특산품으로 가장 쓸모있는나무이다
(삿 9:8, 9). 이 나무의 열매는 식용으로 이용되었으며 특히 올리브 기름(감람유)을
짜는 데 사용되었다(출 27:20). 그리고 뽕나무도 가나안 백성들에게 크게 유용한 나무
로서 팔레스틴에 대단히 많았다(왕상 10:27;대하 1:15). 그 열매는 먹을 수있었으며
나무는 목재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레 23:33-44 강해, '팔레스틴의 식물'
을 보다 참조하라.
요아스는 기름 곳간을 맡았고 - 이는 감람나무 열매에서 짜낸 기름을 요아스가 창
고에 보관해 관리하였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본절의 요아스(Joash)가 누구인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에 속한 용사로서 시글락에 도피한 다윗을 도왔
던 요아스(12:3)가 아닌가 추측된다.
=====27:29
사론에서 먹이는 소떼를 맡았고 - '사론'(* , 솨론)은 지중해 연안에 펼
쳐있는 해안 평야로서 욥바로부터 북쪽으로 갈멜에까지 위치하였다. 이곳은 대단히 비
옥한 초목 지대였기 때문에 소들을 사육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요단
동편에 위치한 '사론 평야'(5:16)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5:16 주석 참조.
=====27:30
이스마엘 사람 오빌은 약대를 맡았고 - '오빌'(* )이란 이름은 형태상
으로 볼 때 아람어에서 비롯된 것 같다(Curtis, Keil). 이와 관련 혹자(Barker)는 '오
빌'이 '약대 관리인' 또는 '약대 감시자'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스마엘
사람들이 약대를 잘 다루었기 때문에 다윗 왕은 이스마엘 사람인 오빌을 약대 사육의
책임자로 임명하였을 것이다.
메로놋 사람 - 메로놋(Meronoth)은 기브아 근처였던 것으로만 추정될 뿐 그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도 이 지명이 언급되고 있
음을 볼 수 있는데 곧 느 3:7에서이다.
하갈 사람 야시스는 양떼를 맡았으니 - 하갈 사람(Hagerite)이란 아브라함의 첩 하
갈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길르앗 동쪽 지역에 거주하였으나(5:10) 다윗 왕에게
정복된 후 다윗 왕의 통치 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유목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5:10 주석 참조.
=====27:31
다윗 왕의 재산을 맡은 자들이 이러하였더라 - 25-30절에 나오는 다윗 왕의 재산을
맡은 자들은 모두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서 기자는 12라는 숫자와 그 복합
수를 매우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23-28장에서 아래와 같은 예가 발견된다. 성가대 총
원 288=24X12(25:7), 레위인 24,000=2,000X12(23:4), 관리와 재판관
6,000=500X12(23:4), 24반열=2X12(24:18), 용사 2,700=225X12(26:32), 병사 24,000=
2,000X12(27:1), 12장관(27:15). 아마도 이는 히브인들에게 있어 12라는 수가 '완전'
을 상징하는 수였기 때문인 듯하다.
=====27:32
본절 이하 마지막 절까지에서는 다윗 왕의 중요한 모사(謨士)들과 군대 장관 등이
소개되고 있다.
다윗의 아자비 요나단 - 여기서 '아자비'(uncle)로 번역된 히브리어 '도드'(*
)는 실제로는 '사랑하는 자'(The beloved)를 의미하는 말로서(아 1:13;2:8;사
5:1) 연인, 또는 친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에 소개된 요나단(Jonathan)이
반드시 다윗의 삼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여기서 요나단은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Jonadab)을 가리키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본절에 기록된 사실대로 대
단히 지혜로운 자였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삼하 13:3, 32에 잘 나타나 있
다. 따라서 본절의 '아자비'는 '조카'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Lange, Curtis).
서기관 - 여기서는 왕실 공문서를 관리하는 자를 가리킨다(Wood).
학모니의 아들 여히엘은 왕의 아들들의 배종이 되었고 - 여기서 '왕의 아들들의 배
종(陪從)이 되었고'라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왕의 아들들과 함께 하였다'는 말이다.
이는 곧 여히엘(Jehiel)이 왕의 아들들의 가정 교사였음을나타내는 말이다(Curtis,
Lange).
=====27:33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가 되었고 - 아히도벨(Ahithophel)은 다윗 왕이 그의 생전에
가장 신임했던 뛰어난 모사였다. 실상 그의 말은 다윗 왕에게 있어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비교될 만큼 권위있는 것이었다(삼하 16:23). 그러나 그는 말년(末年)에 압살
롬의 반역에 가담하였다가 결국에는 자살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삼하 17:23).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 - 아렉(Arech)은 베냐민과 에브라임 지파의 경
계지에 위치한 성읍으로 벧엘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수 16:2). 그리고 이
곳 사람 후새(Hushai)는 다윗 왕과 절친한 친구로서 압살롬의 난 때에 다윗 왕을 위해
큰 공을 세운 모사였다(삼하 15:32). 한편, 벗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아'(* )
는 '친구'라는 뜻과 함께 고문(顧問)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27:34
브나야의 아들 여호야다와 아비아달은 아히도벨의 다음이 되었고 - 브나야
(Benaiah)는 이미 5절에서 다윗의 상비군 반장으로 언급되었으니 참조하라. 한편 여호
야다(Jehoiada)는 브나야의 아버지의 이름과 동일하다. 이는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그대로 그의 이름이 된 때문이다(Lange). 다음으로 아비아달(Abiathar)은 다윗 왕이
사독과 함께 세운 대제사장이다(삼하 15:35). 여호야다와 아비아달은 아히도벨이 자살
하여 죽은 후(삼하 17:23) 그의 뒤를 이어 다윗 왕의 모사가 된 것이다.
요압 -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그를 추종하였으며 다윗 왕국을
확장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자이다. 이 요압(Joab)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삼하
2:18 주석을 참조하라.
역대상 제 28장
=====28:1
본장과 마지막 장은 23장에서 시작된 성전 봉사자와 국가 지도자들의 직무 위임 장
면의 연속으로 다윗 왕의 마지막 유언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구체적인 여호와 경
배를 위하여 레위 지파를 조직화한 다윗 왕은 여기서 다시 한번 백성들과 솔로몬에게
이 거룩한 사역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모든 신하들 앞에서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함으로 인해 성전 건축이라는 대업을 솔로몬에게
위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방백 - 여기에 나타난 '방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 )
는 '주권을 소유하다', '통치하다'를 뜻하는 '사라르'(* )에서 유래한 말로 '어
느 지위나 계층의 수령', '장관', '대장'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는 다음에 이어지
는 이스라엘의 모든 신하들과 관료들을 총칭하는 말로 이해되는 것이다(Barker).
각 지파의 어른 - 각 지파를 관할한 관장(官長)을 말한다. 이들의 명단이 27:16-22
에 소개되었다.
체번(替番)하여 왕을 섬기는 족장들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 - 여기서 족장들이란
다윗 왕이 조직한 군대의 각 반장들을 의미하는데(27:1-15) 특히 천부장과 백부장들은
반장의 지휘하에 있었던 군 지휘관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이 체번했다는 말은 열
두 명의 군대 장관들이 돌아가면서 근무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과 왕자의 산업과 생축의 감독 - 왕과 왕자의 모든 재산을 관리한 관리들을 말한
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미 27:25-31에 소개되었다.
환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리스'(* )는 '머리 중의 하나'라는 뜻
의 아카드어 '사레시'(sa resi)에서 유래한 말로서 '궁중 관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환관'이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환관은 거세된 남자를 일컬음인데 다윗
왕이 환관을 채용했다는 것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모세 율법에
이러한 일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레 22:24;신 23:1). 또한 요셉의 기사에서 나
오는 애굽의 관리들에 대해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모두중책을역임했던
바로 왕의 중요한 관리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뿐만 아니라 환관이 이
같은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Pulpit Commentary). 따
라서 이 용어는 '궁중 관리' 혹은 '곳간 관리'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창 37:36;삼상
8:15;Keil, Lange).
장사 - 이는 전쟁 영웅으로서 관직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
서 뿐만 아니라 왕궁에서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다(Keil). 한
편, 70인역(LXX)에서는 이를 '힘있는 자', 곧 '투스 뒤나스타스'(*
)로 번역하였다.
용사 - 30인의 용사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진다(Pulpit Commentary).
예루살렘으로 소집하고 - 왕정 체제하에서 민주적 의결 회의는 사실상 무시되기 십
상이다. 왜냐하면 모든 결정권이 왕의 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서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이는 이스라엘이 다윗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왕국
이라기보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신앙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서의
많은 부분 속에서 이스라엘 전체 회의를 소집한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3:1;24:3;25:1). 이는 사사 시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지파 연맹의 전통을 받아들인
이스라엘 정치의 한 특성을 말해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다윗의민의
(民意) 수렴을 입증해 주는 사례이다.
=====28:2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 당시 다윗 왕은 연로하여 일어설 힘이 없었으나 이스라
엘 모든 방백들에게 중요한 선언을 하기 위해 특별히 일어선 것이다(Pulpit
Commentary, Lange, J. Wolfendale). 또한 일반적으로 왕이 방백들에게 중요한 일을
선포할 때는 옥좌에 앉아서 발표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그는 자신의 마지막 가장 중대
한 유언을 역설(力說)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섰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인
해서 다윗은 (1)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를 종식시키기 위한 확고한 태도를
표명했고, (2) 이 모임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진 신성한 회의임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奉安)할 전 - 여기서 다윗 왕은 하나님의언약궤를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속죄소'(贖罪所), '시은소'
(施恩所)를 가리키는 말이다(11절), 즉, 속죄소나 시은소는 언약궤의 금덮개를 말하는
데 그 위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인 영광의 구름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발등상이라
고 불리워진 것이다(출 25:20-22;삼하 6:2). 그리고 '봉안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누하'(* )는 '쉬다', '정착하다'는 뜻의 동사 '누아흐'(* )의 명
사형이다. 따라서 '언약궤를...봉안할 전'이란 곧 '언약궤를 영원히 정착시켜 놓을
전'이란 의미의 말이다. 한편,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언제나 쉽게 옮길 수 있었던 장
막(출 25:1-9;30:11-16, '성막 건축에 소용된 재료')과는 대조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J. Wolfendale).
=====28:3
너는 군인이라...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 다윗 왕은 전쟁을 수없이 치른 군인이
었으므로 평화의 상징인 성전을 건축하기에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말
이다. 22:8 주석 참조.
=====28:4,5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선택한 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
기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라는 점에 그 초점이 맞
추어져 있다. 여기서 다윗 왕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의 과정을 살펴보면, (1)
유다 지파(5:2;창 49:8), (2) 이새의 집(삼상 16:1), (3) 다윗(삼상 16:13), (4) 솔로
몬(17:11-14;22:9, 10)의 순이다. 참으로 다윗 왕은 이러한 사실을모든 방백들에게
알림으로써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결코 권력층의 합의에 따라 되어진 일이 아
니고 여호와께로부터 비롯되어진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8:5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 - 다윗 왕은 지금까지 자신이 통치하여 왔고 앞으로 솔로
몬이 통치할 이스라엘을 가리켜 '여호와의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이 일
반 국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주권자가 되시는 신정 국가라는 사실을 다윗
왕이 인정한 것이다(Barker, O. Zockler). 그 뿐만 아니라 다윗 왕은 이러한 사실을
방백들에게 주지시킴으로 이스라엘의 왕은 힘의 원리에 의해 왕위에 오르는 자가 아니
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
는 심오한 사상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29:23;롬 13:1-6). 그래서 본절은 특별히 이
러한 다윗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신정 국가'를 나타내는 말인 '여호와의 나라'
(* , 말쿠트)를 사용한 것이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위'에 해당하는 히브
리어는 '키세'(* )이다. 그런데 이 말은 '꽉 채우다', '단장하다', '덮다'를 뜻
하는 '카사'(* )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 어떤 것으로 덮인 '자리', '의자', '보
좌' 등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위'는 단순한 왕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의 능력과 그의 인도하심으로 덮인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새 - 하나님께서는 비단 이스라엘의 왕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사용하셔서 당신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시는 것들을 이끌고 가
신다. 그래서 이 세상의 왕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임과 동시에 대행자인 것이다(삼상
12:14;롬 13:1-6).
=====28:6
본절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다윗 언약의 내용 중 일부에 해당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2:10 주석을 참조하라.
내 아들을 삼고 나는 그 아비가 될 것임이라 - 이 말은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내용이 다윗 언약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비단 다윗, 솔로몬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된 자들은 모두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요 1:12;갈 3:26).
=====28:7
저가 만일 나의 계명과 규례를...오늘날과 같이 하면 - 다윗 언약(위에 언급된)이
성취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런데 이 조건은 신명기의 기조(基調)와 일치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기 위해 인간이 지켜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다. 22:13
주석 참조. 한편, 성경에는 본절 이외에도 수 백여 가지의' 하면'이라는 조건문이
나타나 있다(출 12:23;21:5;레 5:1;신 28:1, 9, 15, 58 등). 이같이 조건문을 제시함
으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를 요구한 것은 축복이 그 어떤 행위에 의해서 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그 규례와 계명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28:9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섬길지어다 - 이스라엘 방백들에게 믿음의 권고를
한 다윗 왕은 이어서 솔로몬에게 자애로운 부성(父性)을 가지고 마지막 권고를 하고
있다. 여기서 '네 아비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다윗을 환난 중에 건지시고 마지막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말이다(삼상 18:12, 14;시 16:8,
9). 그런데 다윗이 솔로몬에게 하는 이러한 교육은 일찍부터 히브리인들이자식에게
교육시킨 신 6:4-9(일명 쉐마 본문) 말씀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에서는 자식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이
있었다(신 6:1, 2). 그래서 지금 다윗은 생을 마감하고 정리하는 입장에서 솔로몬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권고는 20절에서 또 한번 더 강조
된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다윗 왕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알라고 권고하
고 있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야다'(* )가 대단히 독특하다. 즉, 이
말은 단순히 이성으로 인식하는 이성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혹은 '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聯合)을 통하여 하나님을 안다
는 것을 가리킨다. 즉, 이 용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굴복과 그분의 계명을 순종함을
통하여 깨닫는 인격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삼상 2:12;욥 18:21;시 36:10;
잠 3:6;호 5:4;6:3).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지식은 다음에 이어지는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
게 볼 때 '안다'는 말과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온전한 마음'이란 문자적으로 '온 마음'
(all of hearts)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누어지지 아니한 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쁜'이란 '자원하는', 또는 '즐겨하는'이란 의미로, 의지가 결단된 상태를 가리킨
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난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은 '나누어지지 않은 한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 다윗 왕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구하고 섬겨야
할 근본 이유를 여기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란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삼상 16:7;시 7:10;139:1).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 이는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고 신뢰해서 그를 찾으
면 그의 도우심과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로 오직 솔로몬이 찾을 분은 여호와하나님이
라는 사실을 나타낸 말이다(대하 15:2;시 9:10;렘 9:24).
=====28:10
그런즉 너는 삼갈지어다 - 여기서 '삼갈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는 문자적인 의미로는 '눈으로 보다', '경험하다', '주지하다', '주의를 기울이
다'를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도 종종 사용되었
다. 즉, 이 용어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믿음으로
깨닫고 수용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사 6:10;52:10, 15;대하26:5;시 63:2;69
:23).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내
용이다. 솔로몬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수용해야 했던
특별한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 명백히 밝혀져 있다. 즉,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하
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일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받
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28:11
본절 이하 19절까지는 성전 건축의 설계와 계획에 대하여 다윗 왕이 솔로몬에게 설
명하는 장면이다.
전의 낭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울람'(* )인데 이 말은 성전 정
면에 위치한 현관(vestibule of the temple)을 의미한다(왕상 6:3;대하 3:4). 그런데
이것의 규모에 대해서는 성경에서조차 약간씩 차이가 있는 듯하다. 즉, 왕상 6:3에서
는 그 장이 이십 규빗으로, 왕상 7:6에서는 장이 오십 규빗, 광이 삼십 규빗으로, 대
하 3:4에서는 장이 이십 규빗, 고가 일백 이십 규빗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는 성
경의 저자들이 잘못 해독했거나 오기(誤記)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
서는 숫자를 히브리어 알파벱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낭실은 성전의 동쪽에
만들어져 있었다(Barker).
그 집들 - 이것은 낭실의 집들이 아니라 성전 안에 지어질 집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총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Lange).
곳간 - 보물을 쌓아두는 '보물 창고'이다(스 7:20;에 3:9;4:7).
다락 - 지성소 위에 있는 다락방을 가리킨다(대하 3:8, 9).
골방 - 문자적으로는 '안쪽에 있는 방'이라는 뜻으로 성소 안에 있는 방들을 말한
다(Keil).
속죄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벧 학캅포레트'(* )는 문자
적으로 '죄를 덮는 집', '속죄하는 집'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는 실제적으로 시은소가
있는 언약궤를 모신 지성소(至聖所)를 가리키는 말이다(Payne, Keil). 그리고 또한 속
죄소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언약궤 위의 공간을 의미
했었다. 이 공간은 사람이 임의로 한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이었다. 그
래서 속죄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형상에도 구애 받으심 없이
항상 그들 가운데 계신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식양을 그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 여기서 식양(式樣)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브
니트'(* )가 '본보기', '양식'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에(출 25:9) 여기서
는 '설계도'를 뜻한다고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Curtis, Keil). 한편,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의 설계도를 그리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19절에 잘 설명되어 있다.
=====28:12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 - 여기서 '성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
)는 (1) '마음', '정신', 또는 '사람의 영'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2) '하나님
의 영'으로 볼 수도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혹자는 (1) 번의 경우를 취하여 '다윗의
마음 속에 있었던 모든 식양'으로 해석하고자 한다(Keil, Bertheau). 그러나 이와 같
은 해석은 다윗 왕이 솔로몬에게 지금 전해주고 있는 설계도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그려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19절의 내용과 배치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어를 (2)
번의 경우로 해석하여 본 문맥을 번역해야 할 것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신의 거주지인 신전을 범 우주 질서를 상징하는 소우주라고 생각했
다. 그러므로 신(神) 자신이 성전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를 직접 하달했다고 한
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신전을 신성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전설에 불과하며, 참 신
이신 여호와께로부터의 직접적 계시와는 엄연히 구별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관하여 이미 모세에게 계시한 바 있거니와(출 25:9), 성전 건축에 즈음하여서
는 다윗에게 계시로 그 양식을 보여주셨던 것이다(Wycliffe).
여호와의 전의 뜰 - 이곳이 분명하게 성전 내의 어느 뜰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성
전 안에 있는 뜰들의 전체를 총칭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성전 안에는 제사장의
뜰, 이방인의 뜰, 남자와 여자의 뜰 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대하 4:9).
사면의 모든 방 - 성전 뜰의 사면에 있었던 방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 - 하나님의 전 곳간은 제사에 사용되는 거룩한 도구
들을 보관해 놓는 창고를 가리키고 성물 곳간은 백성들이 헌납한 보물들을보관하는
창고를 의미한다(26:20).
=====28:13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과...모든 그릇 -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의 설계도에 대
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제사장과 레위의 반열이 언급되어지는 것이 조금은 이
상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언급이 12절의 내용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고 볼 때 무난
한 해석이 가능하다. 즉, 12절에서 다윗 왕은 여호와의 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을
말하였는데 그곳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본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이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Curtis). 사실 그곳에서 제사장들과레위인들
은 반열의 순서대로 머물면서 제사에 관한 모든 일(제물을 드리는 것, 무교병을 만드
는 것 등)과 성전의 그릇들을 보관하는 일들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
에 계속 이어지는 '식양'이라는 말은 본절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제사장
과 레위인들의 봉사에 관계된 내용이 성전 건축의 설계도에 들어갈 리 만무하기 때문
이다. 따라서 혹자는 이 용어가 12절의 내용에 연결되어져야 할 것이라고주장한다
(Curtis). 사실 원어상으로 살펴볼 때 '식양'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타브니트'(*
) 11, 12절에서는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사용 되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
문에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서에서 '식양'이라
는 말을 첨가한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행동 방침'이나 '행동거지'를 나타내기 위
해서 그렇게 한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비단 한글 개역판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
성경에서도 이러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courses'를 첨가시켰고(KJV), 'concerning
the work '를 사용했다(Living Bible).
섬기는 모든 일 - 성전은 거룩한 곳이므로 거기서는 밖에서 행동하듯 하나님을 섬
길 수 없었다. 따라서 성전내에서의 예배에는 정해진 율례가 있었다. 이 율례는 신령
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최소한의 요구라 할 수 있다(삼
상 15:22). 그러나 유대인은 겉으로 드러난 예배의 형식만을 중요시함으로써 율례를
알려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간과하고 말았다(마 6:1, 6).
=====28:14
금의 중량과...은의 중량을 정하고 - 성전에서 사용될 금그릇과은그릇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각 그릇의 금과 은의 무게를 다윗 왕이 정하여 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
윗 왕은 각 그릇들의 무게를 임의로 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은 대로
정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기구의 식양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모세 때에
도 이미 주어진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출 25:9).
=====28:15
금의 중량과...은의 중량을 각기 적당하게 하고 - 역시 금등대와 은등대에 들어갈
금과 은의 무게를 다윗 왕이 상세히 정하여 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언급된
금등대는 성경의 다른 곳(출 25:31, 39;37:23;삼상 3:3)에서도 나타나나, 은등대에 관
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이 없다(J. Wolfendale).
=====28:16
진설병의 각 상을 만들 금의 중량을 정하고 은상을 만들 은도 그렇게 하고 - 위와
마찬가지로 진설병을 차려놓는 각 상을 만드는데 들어갈 금과 은의 양을 다윗 왕이 정
하여 준 것이다. 대하 4:8에는 솔로몬이 만든 열개의 금상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은상은 뜰 안에 놓여졌고 제사장들의 방 안에는 은촛대가 세
워졌다고 한다(Lange). 한편, 출 25:23-28에는 진설병을 놓을 상을 만드는 방식이 기
록되어 있다. 거기에 보면, 먼저 조각목으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금을 입히고 금테
를 두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본절에 언급된 진설병은 고운 가루로 구워 만든
열 두 덩이의 떡으로 각 덩이는 10분의 2 에바(Ephah)였다. 이것은 성소 안에 있는 상
위에 두 줄로 늘어 놓던지 혹은 쌓아 놓는다. 이 떡을 굽고 진설하는 일은 그핫 자손
이 맡고 있었는데(9:32) 그들은 매 안식일마다 새 떡을 성소로 가지고 왔으며 묵은 떡
은 성소 안에 있는 제사장들이 먹었다(레 24:5-9).
=====28:17
고기 갈고리 - 희생 제물을 들어올릴 때 사용하는 갈고리를 말한다(출 27:3;38:3;
민 4:14;대하 4:16). 좀더 정확히 말해서 이것은 고기를 요리할 때 사용하는 도구
(Lange)였을 뿐만 아니라 삶는 데도 사용되었던 새살 갈고리이다.
대접 - 이는 '뿌리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자라크'(* )에서 파생된 명사
로 희생 제물의 피를 담아 제단에 피를 뿌릴 때 사용된 대접이다.
종자 - 포도주나 독주를 붓는 의식인 전제(奠祭)에 사용된 잔을 의미한다(출
25:29;37:16;민 4:7).
금잔 곧 각 잔...또 은잔 곧 각 잔 - 여기서 '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포르'
(* )는 특히 역청으로 '덮다', '덧 칠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파르'(* )
에서 파생된 명사로 '도금된 그릇'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잔'이라는
말 대신에 '도금된 그릇'으로 번역되어야 옳다고 생각된다(Lange, Keil, Curtis;스
1:10;8:27).
=====28:18
향단 - 제사장이 여호와께 매일 분향하는 곳이다(출 30:1-10;대하 26:16).
타시는 처소된 그룹들 - '타시는 처소'란 곧 여호와의 병거(Chariot)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이해할 때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즉,
본 표현에서 여호와께서는 병거를 타듯이 그룹을 타신다고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시
18:10;겔 1장) 여기서는 그룹들과 병거가 동격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혹자의 주장대로 이 말은 그룹이 병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룹이 여
호와의 병거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Barker).
금의 중량을 정하여 주니 - 향단과 그룹들을 만드는 데 드는 금의 무게를 다윗 왕
이 정하여 준 것을 말한다. 참으로 다윗은 성전의 모양과 그 내부의 설계에까지, 그리
고 성전에서 사용되어질 기구에까지 아주 세심하게 솔로몬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 그룹들은 날개를 펴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덮는 것이더라 - 모세 때부터 두 개의
그룹들은 언약궤의 뚜껑, 곧 시은소 위에서 마주 대하도록만들어졌다(출 25:18-20;
37:7-9). 이것들의 모습은 그 날개를 위로 펴서 시은소를 위에서 덮고 있는 형태를 취
하 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에 나타나 있는 그룹이 언약궤 위에 있는 그룹보다 더 큰
그룹이라고 주장한다(대하 3:10-12;Wycliffe). 그러나 이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여
타의 자료는 없는 듯하다.
=====28:19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알게 하셨느니라 - 모세(Moses)가 호렙
(Horeb) 산에서 성막과 거기에 들어갈 기구들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처럼(출 25:40)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한 상세한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을 말하는 내용이
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 왕의 경우가 모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세는 계시받는 내용
을 다만 말로써 전달한 반면 다윗 왕은 그 계시의 내용을 글씨로 옮겨 솔로몬에게 전
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본서의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하
다', '새기다', '묘사하다'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타브'(* )를 이곳에 쓴 것
이다. 한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모세와 다윗이 서로 다르게 반응한 것은 모세 때의
성막보다 솔로몬 때의 성전이 규모 면에서나 구조 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
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본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손이 임하여'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동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 중 하나이다(왕하 3:15;겔 1:3;3:14;Curtis,
Keil, Pulpit Commentary).
=====28:20,21
본절은 다윗 왕이 솔로몬에게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최후의 권고이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게 이 일을 행하고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 여기에 나타난
다윗 왕의 권고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권면
하신 내용(수 1:5, 9, 18)과 유사한 점이 있다. 즉,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셨듯이 다윗 왕은 새로이 출범하는 젊은 솔로몬 왕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권고는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함께 하
실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8:6).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이 있으니...모든 장관과 백성이 온전히 네 명령 아래
있으리라 - 여기서 다윗 왕은 위로 하나님 뿐만 아니라 아래로 그의 모든 신하들과 백
성들이 다 솔로몬의 협력자가 되어줄 것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솔로몬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한편, 다윗이 솔로몬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 임마누엘:무슨 일을 시작하든 그 일의 기반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성공한다는 것은 다윗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신념이었
다. 그런데 이미 그는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함께 해주시리라 확신하고 있던터였으므
로 이처럼 자신있게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여기서 다윗은 엄청난 인력과 물
량이 필요한 성전 건축으로 인하여 흔들릴지도 모를 이스라엘의 경제력을 염려하지 말
라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약한 자를 안위하시며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살전 5:14).
사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추진해 갈 때 그 일에 필요한 자질이나 경비 등을 인간
의 좁은 생각으로 헤아려 지레 포기할 때가 많다. 그러나 담대할 것은, 하나님의 일은
당신께서 친히 담당하시며 일의 성취를 주관하시기 때문이다(히 13:5). (2) 온 백성들
의 지지: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자에게 인간 관계는 염려할 것이 못된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 한 솔로몬을 도와 성전을 건축할 태세를 갖추
고 있었다(왕상 1:37). 때문에 솔로몬이 백성들의 지지하에서 안정된 정치를 구사할
수 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한 자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
련하시며 그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신다(수 1:8;빌 4:7).
=====28:28
이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타'(* )는 어떤 '특정한 시간 후'를 나타
내는 '에트'(* )에서 파생한 말로 '이제부터는', '지금 당장', '곧장'이라는 의미
이다. 그래서 이 말은 다윗의 말을 들은 직후에 곧바로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지켜 행
하라는 의미이다.
우리 하나님의 들으시는 데서 - 여기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곧 선악간의 증거자가 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너희의 선행에 대한 증거자가 되시도록'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Keil).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 여기서 '구하여'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 '다라쉬'(* )는 '주의하여 찾다'(to seek with care), '조사하
다', '묻다'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주의해서 살펴보고 그 참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라는 의미의 말이다. 또한 본절에 나와 있는 '지키기로 하라'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 )는 '주의 깊게 수행하다',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키다', '준수하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계명과 그 뜻을 살피고 또 그 계명의 뜻을 힘써서 지키라는 의미가 되
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권고는 모세의 설교에 나타난 축복과 저주의 원리와 맥을 같
이 하는 것이다(신 30:15-20).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 여기서 '이 아름다운 땅'이란 하나님
께서 선물로 주신 '가나안 복지'를 가리킨다(신 4:22). 다윗 왕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
성들이 하나님의 계명만 바로 지키기만 한다면 가나안 땅에서 영원히 복을 누릴 것이
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확신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언약(17:14)
과 아울러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
여 나온 것이었다.
역대상 제 29장
=====29:1
온 회중에게 - 온 회중이란 28:1에 기록된 대로 다윗 왕이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지목하고 또한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위해 불러모은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과 백성의
대표자들을 말한다.
내 아들 솔로몬이...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 성전 건축이 다윗
왕에게 부과된 임무가 아니고 솔로몬에게 부과된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이 성
전 건축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준비하게 된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다윗 왕은 이전에 솔로몬과 단독으로 면담하였을 때에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많은 준비를 하였노라고 밝힌 바 있다(22:5). 그러나 22: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특별
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택하사 성전 건축의 과업을 이루게 하셨다고 다윗은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22:5에서는 언급되지 아니한 '선택하다', '지정하다', '요구하다'란 뜻
을 지닌 히브리어 '바하르'(* )가 여기에 사용된 것이다. 한편, 솔로몬은 여기
에서 다윗 왕이 말한대로 자신의 '여리고 연약함'을 깨달아 왕상 3:7에서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라고 고백한다.
전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비라'(* )인데 이 말이 사용된 용례
들을 살펴보면 이 용어는 대단히 웅장하고 거대한 궁전을 가리키고 있다. 즉, 이 말이
사용된 에 1:2, 5;2:3, 5, 8;3:15;단 8:2 등을 살펴보면, 이 말은 바사의 수산궁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인접해 있는 모든 부속 건물들까지도 포함한 거대한 하나의 왕궁 단지
(團地)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느 2:8에서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단어는 성곽과 집을 포함한 요새화된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하비
라'(* )라는 용어는 특별히 웅장한 모습의 성전을 묘사하는 말임에 틀림없
다(Curtis, p,. 301;Pulpit Commentary). 한편, 다윗 왕이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된 성전에 해당되는 용어 '바이트'(* ) 대신에 '하비라'(* )를
사용한 것은 이 성전을 건축하는 역사(役事)가 어리고 연약한 솔로몬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대역사임을 회중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29:2
힘을 다하여 - 이와 의미가 유사한 구절로 22:14의 '환난 중에'를 참조하라.
마노 - 이 진귀한 보석인 마노(stones of onyx)는 제사장의 에봇과 흉패에 장식했
던 것으로(출 25:7;35:9,27) 성경에 의하면, 이것의 원산지는 에덴 동산의 하윌라
(Havilah) 강이다(창 2:11, 12).
박을 보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루임'(* )은 '채우다', '가득
하다'는 뜻의 동사 '몰라'(* )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사장의
옷이나 기타 여러 기구들에 장식된 보석을 의미하는 말이다.
꾸밀 보석 - '꾸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푸크'(* )는 '색깔있는', '그려진'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왕하 9:30;사 54:11;렘 4:30). 따라서 이는 문자적으로 '색깔
있는 돌'을 의미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대리석이라고 생각하나(Gensenius) 이 보다
는 이 돌을 여인들이 눈에 칠했던 안티모니(L. antimony)의 돌과 같이 색깔있는 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Ja-mes Wolfendale).
채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크마'(* )는 '얼룩 덜룩한 색을 넣다',
'수놓다'를 의미하는 '라캄'(* )에서 파생된 말로 '다양한 색깔을', '얼룰 덜룩
한 빛깔', '자수를 놓은' 등의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채석은 '여러 가지 빛을 내는
그리고 그러한 무늬가 있는 돌'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이
모자이크 자갈이었다고 주장한다(Payne). 그런데 이 히브리 용어는단지 본문에서만
돌에 적용되었지 다른 곳에서는 자수, 의복, 독수리 날개 등에 사용되어졌다(겔
17:3).
다른 보석 - 여기서 다른 보석이란 바른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보석'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에벤 이카라'(* )는 문자적으로 '희귀한 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희귀한'에 해당하는 '이카라'(* )는 단순히
어떤 '무거운 것'을 의미했었는데 이것에서 '귀중한', '값비싼'이란 의미가 생겼기에
이를 보석을 생각한 듯하다. 사실 솔로몬은 본절에 언급된 이 값비싼 돌로 성전의 벽
을 장식하였다(삼하 12:30;왕상 7:9;10:2;대하 3:6;9:1;욥 28:16;잠 1:13;3:15;사
28:16;겔 28:13;단 11:38).
화반석 - 히브리어로 '아브네 샤이쉬'(* )인데 여기서 '샤이쉬'
(* )는 '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화반석은 흰대리석을 의미한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이러한 것 때문에 혹자는 이를 '설화 석고'로 이해한다
(J. Wolfendale).
=====29:3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드렸노니 - 다윗 왕은 지금까지 모은 전리품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개인 재산까지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Barker, J. Wolfendale, Wycliffe).
=====29:4
오빌의 금 - 오빌이 오늘날의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으로 추측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증거를 가진 주장은 하나
도 없다. 하지만 오빌은 순도 높은 금의 산지로 고대에 알려졌었다(욥 22:24;28:16;시
45:9;사 13:12). 따라서 오빌의 금은 가장 값지고 귀한 금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혹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오빌의 금을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가져온 것으로 이해하나
(J. Wolfendale) 이 또한 확정적인 자료가 없는 것이다.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 1 달란트(talent)는 약34kg에해당하는
무게이기 때문에 금 삼천 달란트과 은 칠천 달란트를 무게로 환산하면 금은 약 102톤
에 해당되며 은은 약 238톤에 해당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22:14를 참조하라. 한
편, 본문에 언급된 '천은'에서 '은'을 수식하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크'(* )를
번역한 용어이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의 원래의 뜻이 '추출하다', '깨끗하게 하다',
'정제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본절에 나타난 이 '천은'은 '잘 정련된 은',
즉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영역 성경이 이를
'choice silver'(잠 8:19), 'refined silver'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KJV).
모든 전 벽에 입히며 - 다윗 왕이 바친 사유 재산이 쓰인 용도를 말하고 있다. 여
기서 '전(殿)'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티임'(* )은 성전 안에 있는 중요한
건축물들을 가리킨다(Lange, Curtis). 그래서 본절은 성전 안에 있는 중요한 건축물에
대해서는 모든 벽에다 금.은 칠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대하 3:4-9에 보
면, 솔로몬은 다윗 왕이 바친 정금으로 낭실 안, 대전 천장과 지성소, 지성소의 다락
들을 금으로 입혔다.
=====29:5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라
는 말은 곧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Keil). 왜냐하면 '채워'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 '마레'(* )는 '충만하다', '가득하다', '봉헌하다', '완성하
다' 등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는 성직에 임명되는 후보들에게
사용되어진 말로서 이는 자신이 '헌신적으로 드려지는 예물'임을 자각케 하기 위해서
였던 것 같다(Payne, Wycliffe).
=====29:6
왕의 사무 감독 - 왕의 재산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왕의 가축을주관하는 사람들
(28:1)로서 이들에 대한 명단은 27:25-30에 나온다. 한편 혹자는 '사무'(work)라는 말
이 보다 일반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굳이 본절이 왕의 산업과 가축을 주관하는 자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Barker)하나 구체적인 자료는 미비하다.
=====29:7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다릭 일만과...철 십만 달란트를 드리고 - 다윗 왕의 요구에
응하여 모든 방백들이 각기 자기의 재산을 바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즉시에 현물로
바친 것은 아니고 다윗 왕 앞에서 모든 방백들이 작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많은 물
건들을 즉시에 바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Lange). 한편, 다릭(daric)이란 말은 히브
리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가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쓰던 화폐 단위로 다리오 1세
가 최초로 발행한 페르시아의 금화로 이것의 무게는 약 130g에 해당한다(Payne). 그런
데 다윗의 통치 기간(B.C. 1010-970)과는약 500여년의 차이가 나는 다리오 1세
(Darius I, B.C. 522-485) 때 통용되던 화폐의 단위로 환산해서 언급한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다. 즉 역대기의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좀더 빠르고 나은 이해를 위
해 포로기 때에 익숙해진 바사(페르시아)의 동전으로 다윗 때 드려진 성전 봉헌물들을
환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산된 다릭(daric)과 달란트(talent)를 합해서 볼 때 다
윗의 방백들이 헌납한 금의 중량은 약 190톤에 달했으며 은의 무게는 375톤에 달했다.
이는 다윗 왕이 개인적으로 바친 금 은의 무게에 비하면 1.5배 가량 되는양이다(4
절). 그밖에도 방백들은 엄청난 양의 놋과 철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처럼 다윗 한 사
람의 모범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방백들이 크게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
었던 것이다.
=====29:8
무릇 보석이 있는 자는 게르손 사람 여히엘의 손에 부쳐...드렸더라 - 즉, 여히엘
이 모든 방백들로부터 작정한 보석을 수거하여 여호와의 전 곳간에 드린 것이다. 여히
엘은 다윗 왕이 말년에 여호와의 전 곳간을 맡긴 인물이며 성전 레위인의 24반차 중
첫반차의 우두머리이다(23:8). 그런데 이 여히엘이 26:21에서는 '여히엘리'로 나오고
있으나 이는 이명 동인(異名同人)으로 간주함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히브리어 원전
에는 '그 자신과 함께'라는 의미의 '잇토'(* )가 기록되어 있으나 역문에는 생
략되어 있다. 즉, 히브리 원문대로 그 의미를 고려해 볼 때 본절은 이들은 보석을 드
릴 때 자신의 마음과 정성까지도 하나님께 바쳐드렸던 것이다.
=====29:9
성심으로 - 문자적으로 '완전한 마음으로'이다. 즉, 아까워하거나 마지 못해 하는
마음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와 헌신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드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완전한', '충만한', '준비된'이란 뜻을 가진 '솨렘'(* )
과 '마음', '마음의 중심' 등을 의미하는 '레브'(* )를 붙여 써서 이를 표현한 것
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문자적으로 '큰 기쁨으로 기뻐하였다'이다(습
3:17). 한편 이러한 본절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야할 것이
다. 즉 우리는 (1)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이 마음에
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
23:26)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2) 우리의 몸도 바쳐야 한다. 우리의 영혼 뿐 아니
라 우리의 육체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고전 6:15, 19;엡 5:30).이와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헌은 우리의 몸과 마음, 재능, 재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유를
즐거이 드리는 것이다.
=====29:10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 본절 이하 19절까지는 다윗 왕이 하나님
께 드린 감사의 기도이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 때인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
도를 올린 것은 자신이 마음 속으로 염원한 간절한 소원이 곧 이루어질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다윗 왕의 평생 소원은 여호와의 궤를 모실 성전을 건축하여 여호와
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업을 위해 솔로몬을 예비하셨기에
다윗은 그 일이 성취되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
이 자신을 본받아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께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죽은 이후
곧 여호와의 성전이 성공적으로 건축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로 인해 다윗
은 감사의 기도를 여호와께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구절에 언급된 '우리 조상
이스라엘'은 족장 야곱을 지칭하는 말이다(Payne, Lange, Keil, Wycliffe). 그런데 다
윗 왕은 여기서 족장 야곱이 비록 인격적으로는 부족한 위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
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의 모든 소원을 이루신 형편이 다윗 왕 자신과 유사하다고 생각
하고 지금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소원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32:10을 비교하고 본장 18절을 참조하라.
=====29:11
본 구절에 나타난 다윗 왕의 기도는 주기도문(마 6:9-13;눅 11:2-4)의 결론 부분을
마치 확장한 내용인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Payne). 참으로 다윗 왕은 그동안 하나
님께서 그에게 베풀어 주셨던 크신 역사들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主權)하
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의 대적을 굴
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만드셨으며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성취해 주셨기 때문이다. 실로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힘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다윗 왕은 주기도문의 마지
막 결론 부분의 내용과 유사하게 모든 권세와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Keil).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또 다시 다윗 왕의 독특한 국가관, 곧 신정적
(神政的) 국가관을 발견할 수 있다.
광대하심 - 멀리 있는 이방 나라들까지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다윗 왕은 여호와의 광대하신 속성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서의 기자는 다
윗의 기도를 기록하면서 본절의 본 표현에 '위대한', '능력있는', '장엄한' 등을 의미
하는 히브리어 '게두라'(* )를 사용한 것이다.
권능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부라'(* )는 '힘', '용맹', '승리'
라는 뜻으로 특히 '왕권'(royal power)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이 용어는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는 왕적 권능을 표현하는 말이다.
영광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프아라'(* )는 '아름답게 하다',
'장식하다'라는 뜻의 동사 '파아르'(* )의 명사형으로 '아름다운 것', '자랑할
만큼 영화로운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히브리의 원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어떠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시 29편;57:11;96:3).
이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차흐'(* )는 '영속하다'(be perpetual),
'뛰어나다'는 뜻의 동사 '나차흐'(* )의 명사형으로 이 말은 '광휘', '탁월함',
'영광', '승리', '내구력'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여
호와의 주권을 주제로 다루고 있으므로 다른 뜻을 가리킨다고 보기 보다는 '탁월함',
'승리' 등의 의미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 여기서 '높으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트
나세'는 '들어올리다'는 뜻의 동사 '나사'의 재귀적 사역형 분사로 이는 '스스로 일어남'이란 뜻이다. 곧 여호와께서는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아 높여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크신 역사를 통해 직접 높아지게 되신다는 뜻이다. 또한 본절에 표현된 만유의 머리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모든 만물의 제 1원인자, 또는 최고의 권위자이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 나타난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최고 권위자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역사를 통해 당신의 이름을 높이신다는 의미이다. 즉, 주께서는 이 세상의 주권자이시기에 당신께서 공의와 사랑에 기초해서 이 세상의 역사를 섭리해 만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케 하신다는 말이다.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 다윗 왕은 말년에 엄청난 부귀를 누렸다. 그는 이 모든 부귀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부와 귀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롬11:36) 성경에서는 함께 언급되어 나타나는경우가 많다(잠 3:16;8:18;대하 18:1;17:5;왕상 3:13).
만유의 주재가 되사 - 주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셀'은 '통치하다','지배하다','다스리다'라는 뜻의 동사 '마샬'의 명사형으로 '통치자','주권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이를 '통치자'로 번역한 것이다.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 다윗 왕의 개인적인 체험으로 비롯된 신앙 고백이자 구속사에 나타난 절대 진리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대한 명백한 권리를 가지시며 우주 만물의 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다.
=====29:13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찬양하나이다 - 여기서 '감사하오며'나 '찬양하나이다'는 원문상으로 볼 때, 현재 분사형이기 때문에 '계속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본 구절은 '계속해서 감사하며 찬송할 것이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윗 왕이 이처럼 현재 분사형을 사용해서 계속적인 의미를 나타낸 것은 성전 건축으로 인하여 앞으로 여호와께 대한 경배가 계속될 것임을 내다보았기 때문이었다.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 즉,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여호와께 드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겸손한 고백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이처럼'이란 말은 위에서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성전 건축을 위해 다윗 왕과 그의 모든 방백들이 힘써 그의 재물들을 여호와께 바친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다. 한편, 여기에서 '힘이 있었나이까'라는 말을 히브리 원어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능력','수단','권력'을 의미하는 '코흐'와 '에워싸다','유지하다','할 수있다'란 뜻의 '아차르'가 합성된 설의법 문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다윗의 신앙이 나타난 부분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언급되어 있는 대목은 왕상19:4;단10:8,16 등이다.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 여호와께로부터 받은것을 다시금 되돌려 드렸을 뿐이라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여기서 모든 것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다는 다윗의 청지기적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눅 17:10;시24:1). 또한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위대한 신앙의 표현으로서 참다운 물질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물을 단지 보관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라는사실을 명심해야 마땅하며 또한 재물을 영원한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눅12:42, 43). 모름지기 인간이 지닌 모든 소유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 여기서 '나그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르'는 '외인''이방인','타국인','손님'을,'우거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샤브'는 원주민 또는 단순한 숙박인과는 구별되는 '이국 거주자','체류할 땅을 소유하지 않은','임시 노동자'(레 25:23, 35;시 39:12)를 가리킨다. 즉, 이 두 용어는 모두 어느 한 곳에서 영구히 거주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고 언젠가는 떠날 운명에 처한 '임시 체류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다윗이 인생을 가리켜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함으로 비유한 것은 인생이 거하는 이 땅이 그 자신의 소유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영원히 거할 터전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즉, 이 땅의 임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인생은 그 땅의 사용권을 여호와로부터 얼마동안 허락받은 것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 여기서 '머무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크웨'는 두가지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물같은 것을 '한데 모아 머물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며(창 1:10;레11:36), 또 다른 하나는 '소망'이라는 뜻이다(스10:2;렘 14:8;17:13;50:7). 그래서 영역 성경인 KJV과 RSV는 이를 '머무름'으로 번역했고, NIV에서는 이를'희망'(hope)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문맥상으로 살펴볼 때 본 구절에서는 이를 '소망'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본 구절은 '이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으므로 이 땅에서는 생을 계속 유지할 소망이 없다'는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유사한 성경 구절들 곧 '헛되고 헛되도다'(전1:2), '잠간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약 4:14),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등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이나 왜소함을 나타내주는 것이지 결코 허무 의식이나 염세주의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역사관과 인생관은 긍정적이고, 낙관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9:16
모든 물건 - '물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몬'은 '큰 소리로 말하다','외치다','떠들썩하다'란 의미의 '하마'에서 유래한 말로 '소음','많은 군중','풍요','많이 저장해 놓은 물건' 등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이 여기서는 '많은 재물', 혹은 '돈더미'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전 5:9).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이를 '비품','용품'(store),'물건'으로 번역한 것이다.
=====29:17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 여기서 '감찰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한'은 '검사하다','시험하다','조사하다'란 뜻으로 '본래의 속성을 알아보기 위해 시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진실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시험해 보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절과 같이 '마음'이라는 용어와 함께 이 단어가 쓰인 경우는 본절 외에도 렘 11:20;12:3;17:10;잠 17:3 등 많이 있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 여기서 '정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솨르'는 '곧다','평탄하다','바르다','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다'란 뜻의 '야솨르'에서 유래한 말로 '똑바름','공평','옳음' 등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은 바른 마음으로 즉 자기의 소유를 드린다는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주의 것을 다시금 주께 드린다는 바른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다는 말이다.
=====29:18
우리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 즉,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을 표현한 구절이다. 이처럼 주 여호와를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곳은 왕상 18:36;대하 30:6 등 여러 곳이 있다. 이 외의 것은 10절을 참조하라.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 여기서 '이것'이란 하나님의 것을 단지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진실로 다윗 왕은 이러한 바른 마음의 구조가 그의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영원히 계속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한편, 본절 '생각하게'에서 '생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체르'는 '결정하다','형성하다','주조하다'란 뜻의 '야차르'에서 유래한 말로 '형태', '마음', '빚어진 어떤 것'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절의 '생각하게'란 '여호와께서 인간의 마음을 틀로 빚어 언제나 하나님을 앙망하며 경외케'라는 말이다.
그 마음을 예비하여 - 이는 백성들의 마음을 주께서 정직하게 준비시켜서 당신의 사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이다(17절).
=====29:19
정성된 마음 - '정성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렘'은 '완벽한'(perfect), '완전한'이란 뜻이기 때문에 '정성된 마음'은 '혼합하지 아니한 마음' 또는 '순전한 마음'을 가리킨다. 이는 곧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청종할 수 있는 자의 근본 마음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욥 1:1;2:3).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정성된 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조화와 화평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요인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완벽한 마음이란 하나님과 어울릴 수 있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하는 완전한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 앞에서 언급된 완벽한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 되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마음이란 곧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좇는 마음'인 것이다. 한편, 본절에 표현된 '계명','법도','율례'라는 말이 시119편에서는 '법','증거','율례','계명','판단','말씀','규례','법도' 등으로 열거되어 있다.
이 모든 일 -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말이다. 그런데 다윗 왕이 특별히 여호와의 계명을 온전히 따르는 완벽한 마음을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솔로몬이 앞으로 대업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 '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비라'는 하나의 부속 건물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웅장한 모습의 성전'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29:20
머리를 숙여 여호와와 왕에게 절하고 - 감사 기도를 마친 후 다윗 왕이 요구한 대로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절하지 아니하고 다윗 왕에게도 역시 절하였다. 이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였음을 백성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절은 '경의를 표하여 몸을 굽히다', '머리를 숙여 절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카다드'를 '제물을 죽이다','제물을 바치다'란 의미의 '쉐히타'와 결합하여 사용해서 경배의 대상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29:21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 여기서 '제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바힘'은 곡물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동물 제사', 또는 '피흘림의 제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제 - 희생 제사의 한 방법으로 제물 위에 포도주나 독주를 따라붓는 의식이다(출29:40;30:9;레 23:13). 그런데 이는 단독으로는 드려질 수 없는 것으로 번제 도는 소제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이다. 한편 이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상징한다(빌 2:17;딤후 4:6).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 여기서 온 이스라엘을 위해 풍성한 제물을 드렸다는 말은 앞의 번제를 끝내고 또다시 화목제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다윗 왕은 모임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화목 제물을 나누기 위해 풍성한 제물을 준비하고 화목제를 올렸던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레위기 서론, '7.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를 보다 참조하라.
=====29:22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더라 - 곧 화목 제물을 무리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 구절을 단순하게 잔치를 벌였던 것으로 해석하나 여기에서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다는 말은 화목 제물을 나눈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잔치를 배설하고 먹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케 된 것을 생각하며 화목 제물로 무리들 사이에 친교를 나눴다는 말이다. 한편 본서에는 다윗이 백성과 함께 축제를 벌인 사실이 몇 차례 기록되어 있다(12:39;16:2, 3). 이처럼 본서 기자가 즐거운 잔치의 모습을 자주 기록한 것은 다윗시대의 황금기를 귀환민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려는 의도였다고 짐작된다.
무리가...다시 왕을 삼아 기름을 부어 - 솔로몬이 두번째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는 순간이다. 다윗 왕은 이전에 솔로몬을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한 바 있다(23:1). 그러나 이번에는 그보다 더 완전한 형식을 갖추어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다. 즉, 이전에는 단지 다윗 왕이 솔로몬을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할 뿐이었으나 이번에는 솔로몬이 무리들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었다. 한편,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는 본절의 상황은 왕상 1:32-39에 보다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왕상 1장의 기록으로 볼 때, 솔로몬의 공식적인 즉위식은 솔로몬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던 그의 이복 형 아도니야의 음모 때문에 다윗 왕의 임종 전에 서둘러 거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이 같은 왕상 1장의 사건을 생략해 버리고 다만 솔로몬이 즉위한 사실만을 단순히 기록해 놓음으로 다윗 왕가의 부정적인 측면을 배제시켜 포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 저자의 의도를 나타냈다.
사독에게도 기름을 부어 제사장이 되게 하니라 - 다윗 왕 시대에 대제사장은 아비아달과 사독 두 사람이었으나 솔로몬이 왕위에 즉위하는 시점에서는 오직 사독만이 대제사장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이는 아비아달이 솔로몬의 즉위를 반대하고 아도니야의 편에 가담하였다가(왕상1:7)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 직에서 파면당하였기 때문이었다(왕상 2:26, 27). 반면 사독은 솔로몬을 지지하여 제사장에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은 장본인이었다(왕상1:39). 그런데 사독이 전부터 대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음 받은 까닭은 그의 정통성을 재확인할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이다말 계통의 후손인 엘리 가문의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끝이 났으며(삼상2:30-34) 새로운 사람을 선택해서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되었다(삼상2:35).
=====29:23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주신 위에 앉아 - '여호와께서 주신 위'는 원문상으로 '여호와의 보좌'를 가리킨다. 그런데 솔로몬이 여호와의 보좌 위에 앉았다는 말은 무엇보다도 (1) 그가 여호와의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말이며 아울러 (2) 그가 여호와의 언약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것은 28:5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다윗이 죽기 전에 솔로몬이 실제로 왕권을 행하였다는 것은 왕상 1:43-43을 참조하라.
=====29:24
다윗 왕의 여러 아들이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니 - 여기서 '복종하니'는 문자적으로'...아래에 손을 두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손'은 종종 '권세', '세력'을 상징하였다(욥 27:11). 따라서 본절에서 '손을 솔로몬 아래에 두었다'는 말은 자신의 세력을 솔로몬의 통치권 아래에 두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 왕의 이 같은 말은 여러 아들이 솔로몬의 왕권을 인정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혹자는 이 구절에 아도니야의 반역 사건이 암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왕권을 부정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반역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공직에서 완전히 은퇴해 사생활만을 갖은 인물이므로(왕상1:53) 본절에 그의 반역 사건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리고 혹자는 솔로몬에게 복종한 다윗의 여러 아들 가운데는 특히 반역에서 실패한 아도니야가 있었다고 주장)하나 그에 대한 분명한 자료는 없는 듯하다.
=====29:25
그 전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뛰어나게 하셨더라 - 여기서 '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프네'는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즉, (1) 그 첫째는 시간적인 의미로 어떤 시간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을 뜻한다. 그런데 이 첫번째 의미를 택할 경우 본 구절에 언급된 '그 전 이스라엘 모든 왕'은 사울 왕과 다윗 왕을 지시하게 된다. 즉 다시 말해서 솔로몬은 사울 혹은 다윗 왕 보다 뛰어났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단지 이전의 두 왕보다는 이스라엘 전체 왕에 비해 더욱 뛰어난 왕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실제 역사상으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대하 1:12). (2) 이 용어의 두번째 의미는 '보다'로 취할 수 있다(창11:8;레 16:14, 15). 이 의미를 취할 경우 본 구절은 '이스라엘 모든 왕은 솔로몬보다 더 탁월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히브리어 원문은 대부분의 영역과 한글 개역의 역문과는 달리 부정문으로 구성되어 있음). 실제로 구약에 언급된 솔로몬에 대한 많은 사실을 종합해 보거나 내용상으로 살필 때 이 후자의 해석은 전자의 해석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진다. 한편 솔로몬이 왕이 된 것도 또한 그가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도 탁월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다. 또한 그가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과 '부와 영광'을 갖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였다(왕상3:12, 13).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 안에 거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
=====29:26
이새의 아들 다윗...왕이 되어 - '이새의 아들'이란 표현이 다윗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예를 구약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 표현이 사울과 다윗의 원수들에게서 사용될 때는 다윗에 대해 조롱과 멸시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쓰였다(삼상 20:27, 30, 31;22:7, 8;25:10;삼하 20:1;왕상 12:16;대하 10:16). 그러나 이 말은 때가 이르러 다윗의 명예와 영광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크게 애용되었다(삼하 23:1;대상 10:14;시 72:19). 특히 메시야의 사상을 충분히 반영한 상태에서 기록된 이사야서에는 이 용어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적인 미래의 왕을 예언하는 데 사용되었다(사 11:1, 10). 그런데 메시야 사상을 표현함과 더불어 그리스도가 이새의 뿌리에서 난다고 하는 예언 가운데 굳이 이새가 언급되었던 것은 다윗이 영광스런 왕이 되기 이전의 상태, 즉 비천한 자의 아들이었던 때를 강조하여 메시야 또한 비천한 상태에서 태어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그리고 바울도 구약의 메시야 예언과 예수가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새의 뿌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롬 15:12). 한편, 본절에서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고 언급된 것은 다윗의 계보를 언급했던 본서 기자의 기억(2:13-15)이 반영된 것임과 동시에 훨씬 후대까지 이스라엘 전사회에 만연했던(요 4:25, 26) 메시야 사상에 대한 반영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역사상 그 후기에 저술된 것으로 간주된 본서(약 B.C. 450년경)가 메시야 사상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서 그런 것 같다. 즉, 본서는 '종말 의식'과 '메시야 사상'을 충분히 반영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과 같은 책과는 다른 저술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언급한 선지서들은 당시에 만연해 있던 '종말 의식'을 강조해 '메시야 사상'을 역설하는데 그 중점을 두었지만 본서는 바벧론으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 유행처럼 흐르고 있던 종말 사상과 메시야 사상을 의도적으로 반영치 않은 듯하다.
=====29:27
헤브론에서 칠 년을 치리하였고 - 삼하 5:5에서는 다윗의 통치 연수를 보다 정확하게 헤브론에서의 통치 기간이 7년 6개월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본절과 같은 이러한 표현은 3:4;왕상 2:11에도 나타나 있다.
=====29:28
나이 많아...부하고 존귀하다가 - 정계에서 은퇴한 다윗의 삶은 본절에서 역대기 기자가 표현한 대로 순탄한 생활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 직전에 아들들의 싸움을 목도했을 뿐만 아니라(왕상 1:50-53) 임종시에는 원수에 대한 저주(왕상2:9)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열왕기서에 나타난 다윗의 말년의 이미지는 본절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기자들간의 저술 관점으로 이해하면 별 문제가 없다.
=====29:29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 - 역대기 저자가 다윗 왕과 관련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인용한 자료들이다. 즉, 본절에 나타난 사무엘의 글은 사무엘서 전반부에 속하는 삼상 1-24장인데 이에는 다윗의 일부 행적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삼상 후반부와 삼하 일부분에 기록된 다윗의 행적이 나단과 갓에 의해서도 기록되었다고 하나 이들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대하9:29). 한편 '선지자'나 '선견자'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사용되었다. 즉, (1)'로에'는 원래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점차 '진실된 것만을 바라보다','식별하다', '인식하다', '조사하다'란 뜻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 말이 성경에서는 흔히 '선견자'(seer)로 번역되었으나(29절;삼상 9:9),'선지자'(나비)라는 명칭이 아직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던 시기에 사용된 명칭이다. 그런데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측면에 강조점을 둔 고대적인 명칭이다. (2) '호제'는 '로에'와 더불어 '선견자'로 번역되는 말이다(25:5;삼하 24:11;왕하 17:13;대하 9:29;사 29:10;암 7:12;미 3:7). 그런데 이 용어는 '이상을 보는 사람', '응시자', '예견자'를 뜻하는데 정신적(영적)인 것을 '인지하는', '지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명칭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신령한 환상을 보아 하나님의 의지나 뜻을 인지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3) '나비'는 '말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의 동사 '나바'에서 파생된 말로 '선지자'나 '감동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특별히 이 말은 '예언'(단 9:24) 및 '대언자'(출 7:1)로 번역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선지자'로 번역된다. 그리고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측면을 강조한 율법적이고 선지자적인 명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그 초기에는 선견자와 선지자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듯하다. 즉, 다시 말해서 사무엘 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에는 선지자와 선견자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듯하나 그 이후에는 그 의미가 분명히 구분되어 사용되어진 듯하다. 한편, 선견자는 문자적으로 '보는 자'를 의미하며, 선지자는'선포자'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것은 삼상 9:9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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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부과'는 '힘', '용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 용어는 다윗 왕의 용맹스러운 행적을 가리키고 있다.
저와 이스라엘과 온 세상 열국의 지난 시사 - '시사'란 히브리어로 '이침'인데 이는 '역사의 흥망 성쇠', '사건들'을 의미하기 때문에(욥24:1)여기서는 다윗이 주변 국가와 벌였던 전쟁 기록 및 외교 관계 등의 역사적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온 세상 열국은 다윗 왕이 정복한 나라들, 곧 블레셋과 에돔, 모압,암몬 등을 가리킨다(대하12:8;17:10;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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