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스라1:5-11(구711P)
제목:고레스의 선언
5.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6.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7.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8.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9.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예배의부름:에스라1:1-4
신앙고백:(사도신경)
찬 송:37장(통37장)
성경봉독:에스라1:5-11
말씀선포:고레스의 선언
합심기도:주기도:찬양:(찬양하라)
할렐루야! 7월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거룩한 성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시고 치유와 감동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제목}***“고레스의 선언”
"참 신이신 하나님"
1.예언을 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2.이방의 왕들까지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3.여호와의 백성의 삶에 간섭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하십니다"
1.응하게 하셨습니다.
2.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3.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세우시고 그 예언의 성취를 위해 타 민족 왕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의지대로 감동시키셨습니다.
이렇듯 능력있는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 여러분은 의심하거나 조급해 한적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진정 믿으십니까?
그러면서도 실상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이웃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하기를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십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레스의 선언"(에스라 1:5-11)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내용을 봅니다.
Ⅰ. 고레스의 선포는 다른 면에서도 성공을 가져왔습니다.
1. 그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하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올라갔습니다(5절).
그 지도자들은 유대와 베냐민의 "족장" 들, 곧 재능이 탁월하고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형제들보다 높은 권위에 있었기 때문에, 의무 이행에도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예상되는 바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시온을 향하여 얼굴을 돌린 첫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선한 사업이든 그것을 성취시키고자 한다면, 사역자들로 지도자를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제사장들 레위인들과 더불어 동반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올라갈 마음을 주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해방을 선포하도록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신 바로 그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도 움직여 그 해방의 혜택을 취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만군의 주의 영으로 되기" 때문입니다(슥 4:6). 어떤 자들에게는 바벨론에 머물고자 하는 유혹이 컸을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안전하게 정착했고, 그 이웃과 마음도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가 좋사오니" 라는 말을 할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가려는 용기를 막는 것들이 많았고 또 컸을 것입니다. 그 여행은 길고, 그들의 처자식들은 여행에 익숙치 못했으며, 그들의 고향 땅은 오히려 그들에게 낯선 땅이 되었고, 그리고 가는 길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땅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자기들을 쉽게 희생시킬 수 있는 그런 원수가 사면에 둘러선 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바벨론에 머물거나 적어도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얼음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노상에 있을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과 은총을 통해서, 커다란 야망을 그들에게 채워주셨고, 자유에 대한 자기들의 땅에 대한 아름다운 애착을 가지게 하셨으며, 자기들의 신앙에 입각하여 자유롭고 공공연히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그들 멋대로 버려 두시어 그들의 육정을 따르게 하셨더라면, 그들도 바벨론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시온을 향하는 마음을 두셨고, 이방 나그네들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묻는 마음을 주셨습니다(렘 1:5).
그들은 새로운 세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를 떠나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과 같은 형편에 놓였습니다(히 11:8).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든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요, 그가 그 일을 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우리에게 의욕을 주시고 또 일을 행하도록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이 땅을 향해 있고, 이 땅의 것들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위로 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십니다.
복음의 초청도 고레스의 선언과 같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눅 4:18).
죄의 불의한 지배 아래 얽매인 자들,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 돌아가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 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초청은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고" (고레스에게 준 권세보다도 훨씬 큰 권세입니다. 2절),
"하나님의 전을 세울" 책임, 곧 세상에 교회를 세우는 일, 사람들 가운데 나라를 세우라는 책임을 주셨다고 밝히셨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바벨론에 머물기를 택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사랑하는 자들이요 거룩한 삶을 위해 난관을 극복하려는 모험을 하지 않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실망되는 모든 일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전을 세우기로" 작정하며,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신앙의 나라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세상과 육신에서 벗어나게 하신 자들이요, "주의 권능의 날" (시 110:3)에 기꺼이 들어 세우실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멸망하더라도, 하늘의 가나안은 충분히 보충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고레스가 유대인들의 이웃 족속들에게 그들을 도우라는 명령을 하자, 그들은 그대로 행했습니다(6절).
유대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여행을 돕기 위해 물품을 공급했고, 그들의 집과 하나님의 전을 세우는 일을 돕기 위해 또 물건들을 공급했습니다.
모세의 성막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노획물로 세워졌고,
첫 번째 성전이 이방인 노동자들로 말미암에 건축되었듯이, 둘째 성전은 갈대아인들의 헌물들로 채워졌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때가 오면 이방인들도 교회로 들어가리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곳에서는 이방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라도 언제나 자기 백성에게 친절을 베풀게 하시며, 그들이 약하게 했던 자들의 손을 그들을 통해 다시 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땅이 그 여인을 도왔다" 고 했습니다. 함께 오지 아니하고 뒤에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그의 전을 향한 사랑으로 헌물을 바친 것 외에도, 혹자가 말한 바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 신의 권능으로 마음에 감동을 받은 바셀론 사람들이 바친 헌물도 많았습니다.
Ⅱ. 고레스 자신이 이 선언을 지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의 진실성을 보이기 위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했을 뿐 아니라 성전의 그릇들을 되돌려 주었습니다(7, 8절).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봅시다.
1. 하나님은, 성전의 기구들이 상실되거나 녹혀져 다른 기구들과 혼합되어 분별할 수도 없게 되도록 버려두지 않고, 모두 그대로 내어 놓을 수 있도록 그 기구들에 대해 용의주도한 섭리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비의 그릇", "존귀한 그릇" 에 대해서도 그러한 배려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에 대해서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시고 그들이 하나도 멸망하지 않도록 지키신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딤후 2:19, 20).
2. 비록 그 기구들이 우상의 신당에 놓여 있었으며, 어쩌면 우상 섬기는 일에 사용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하나님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되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되찾으실 것이다. 무장한 군사에게서 빼앗은 노획물은 그 정복자를 위해 쓰이게 될 것입니다.
3. 유다는 포로 상태에 있으면서도 방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룹바벨과 동일한 인물로 생각되는 세스바살이 여기에서
"유다 목백(牧伯)" (영어로는 방백)이라 불리었습니다.
갈대아인들은 그를 "세스바살" 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시련 속의 기쁨"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 중에서는 "스룹바벨" 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의미는 "바벨론의 나그네" 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고, 조세푸스(Josephus)가 말한 바와 같이, 비록 그가 바벨론 왕국의 시위 대장이었지만 예루살렘을 자기 고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돌보았습니다.
아마도 자기를 다윗집에 속한 자로 고용했던 여호야김이나 여고니야가 죽은 후부터 자기 백성들에게 어떤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4. 성전 기구들이 계수되었습니다(8절).
그리고 세스바살은 그것들을 예루살렘으로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습니다(11절).
성전이 건축되면 그 안에 비치할 많은 기구를 가지게 되자, 그들은 성전을 세울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소의 기물들처럼, 하나님의 규례가 비록 신약 성서의 바벨론에 의해 부패되고 속되게 될는지는 모르나, 때가 되면 그것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미와 본래적 위치로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도 중 극소량이나 극미한 것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감동하시면"
고레스는 BC 539년에 천하의 대 제국인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샤의 대왕입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옛날 바벨론이 예루살렘에서 잡아 온 이스라엘 포로들은 자기나라로 돌아가라고 해방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기 훨씬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이스라엘이 범죄 했기 때문에 바벨론에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을 예언하게 하셨고, 그 바벨론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70년 뒤에 다른 나라에 정복될 것이라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렘25:11,12, 29:10).
이사야 선지자를 시켜서 예언하신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었습니다.
이사야는 BC700년경에 예언한 사람인데, 사44:28, 45:1-3에 보면, 이스라엘을 잡아간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돌려보낼 사람은 고레스라고 이름까지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을 ‘나의 종’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150년 뒤에나 있을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사람의 이름까지 밝히면서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주관자이십니다.
오늘은 말씀은 여섯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1. 감동을 받은 고레스 왕 (1- 4, 7-11).
고레스는 어느 날, 내가 어떻게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 분명하고 거기에는 분명한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옛날 바벨론 왕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성전을 헐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레스는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거기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나와 나의 왕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명령하게 됩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깨닫게 하시자 그 감동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감동이란 마음에 부딛쳐 오는 깨달음이나 가슴을 두드리는 신령한 권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마음이라는 것을 주셨고, 그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여 당신의 뜻을 행하십니다. 사람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 마음을 자기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노래도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저질러 죄를 지으며 후회스런 길을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거나 선한 생각을 넣어 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순종하여 따라가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즉시 순종합니까? 미적미적 하다가 받은 감동을 사라지게 합니까?
감동을 받지 않은 것처럼, 못들은 척, 못 느낀 척 합니까?
감동에 순종하는 사람은 생각지 않은 복을 누리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지만, 감동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사람은 힘든 삶을 살게 되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며 선한 길을 제시하시면, 민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레스 왕은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였습니다.
2. 감동을 받은 이스라엘의 행동 (5 이하)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만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포로 되어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을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하셨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고레스의 명령을 들은 바사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기쁨에 가득차서 열심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국을 떠나온 지 70년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때까지 노예나 포로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폭넓은 정치인이어서, 포로로 끌려왔다가 총리가 된 다니엘에게서 보듯이 포로출신도 능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6.25때 북에서 피난 온 분들 중에는 믿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한에 와서 자리를 잡고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유대인은 율법 지키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는 달리 대부분 성공하였을 것이고, 이미 기반을 다 닦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닦아놓은 기반을 다 버리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생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들은 주시는 감동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선교의 명령은 누구나 다 받은 명령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은 열두 제자에게만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주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은 모든 신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명령을 자기에게 하신 명령으로 알고 전도에 생명을 바칩니다.
오지에 선교사로 나가서 자기 평생을 터도 안 나는 일에 바칩니다. 그러나 누구는 평생을 가도 전도 한사람도 안하고 선교를 위해서 선교헌금 한 번도 힘써 하지 않고, 하는 체 하기만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는 사람과 감동을 받고도 받지 않은 체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선교사가 된 사람들은 우리와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반응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감동을 받고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모른 체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저요,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서 그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나섰습니다. 그들이라고 그 일이 어려운 줄 모르겠습니까? 아무 연고도 없는 그 땅에 가서 사는 일이 어찌 부담스럽지 않고 두렵지 않겠으며 어찌 노후가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자식 교육 망칠까 염려 되지 않겠습니까? 서울에 살면서도 남들 다 보내는 학원 한 두 개만 덜 보내도 자기 자식 망치는 것 같아서 강남으로 이사를 가려고 그렇게 머리를 싸매서 강남 집값 올려놓는데, 선교사라고 자기 자식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오지로 눈물 짜는 자식들 앞세우고 간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지는 대개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테러가 빈번합니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위험한 일에 누가 망설임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이 그 마음에 감동을 주어 명하신 일이기에 순종하지 않으면 자기 생명의 주인 앞에서 도리가 아니기에 순종하여 나간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감동에 반응하는 바른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선교지에 나가지 못하면, 나대신 나간 사람들 돕도록 선교헌금이나 좀 하자는 데도, 목사가 권면을 하고 성령이 마음에 감동을 주셔도 왜 우리는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주머니가 열리지 않습니까?
마음이 강퍅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감동을 주셔도 마음에 굳은살이 박혀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말씀하려면 하시오, 나는 내 맘대로 살렵니다.’ 이렇게 고집 부립니다.
자기만 안하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누가 남보다 선교헌금 좀 많이 작정 하는 것 같으면 은근히 비웃으면서, “김 집사는 요즘 돈 좀 버나보지? 내년에 집 산다는 소문 있대?” 하면서 비웃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목사가 지난해보다 좀 더 낫게 하자, 작정서의 한 칸 더 올라가자고 하면, “목사님, 돈 얘기 작작하세요.” “지금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 줄이나 아세요? 목사님 돈 벌어 봤어요?” 라고 속으로 대꾸나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발로 차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바사에서 겨우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터전 다 털어버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려고 감동에 순종하여 일어섰습니다.
감동을 주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감동을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감동을 받은 바사의 사람들 (6)
하나님이 일찍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되돌려 보내는데 쓰시려고 준비시킨 당신의 종 고레스 왕도 아니요, 당신이 선택하시고 번성케 하시고 훈련시킨 당신의 백성도 아닌 바사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씀이 6절에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러 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금 은 패물과 짐승들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움직여 지진이 발생하게도 하시고, 바다가 움직여 파도가 일어나게도 하시며, 바람이 움직여 태풍이 불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만드신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야 마음과 귀가 없는 땅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줄 모르고 감동을 받을 줄 모른다면 죽은 영혼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사람들이 그동안 자기의 종처럼 부려먹다가 자기들에게서 해방되어 떠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은금패물과 의복과 요구하는 것을 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때도 이미 하나님이 그렇게 하리라고 예고하셨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이 아닌데도,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러 간다니 그 선한 일에 나도 좀 보태야지 하는 마음에서 아마 귀한 보물들을 주었을 것입니다.
저도 농촌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믿지 않는 이웃들이 교회의 일에 보태라고 돕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불신자들이 교회행사에 오실 때에는 봉투에 돈을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불신자도 움직입니다. 지금도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면 순종합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열심히 출석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감동을 주실 때 마음과 행동이 움직여야 합니다.
4. 우리는 어떻게 감동에 반응해야 합니까?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설교를 듣다가 말씀에 따른 깨달음과 감동이 오는 대로 순종하고, 어떤 것은 직접 묻거나 가르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거기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밤새 머리 싸매고 고민 안 해도 하나님이 준비하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한번 살아볼 생각 없으십니까? 그게 잘 사는 것입니다.
5. 성령의 감동은 기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어느 날 모세가 선 맞은편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떨기나무란 물기하나 없는 마른 가시덤불 뭉치입니다.
불만 닿으면 순간적으로 호르르 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덤불에 불이 붙었으니 금새 불이 사그라지고 말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불이 한참 동안이나 탔는데도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희안했습니다.
모세가 보니 하도 희안해서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하나님이 그를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40년 전에 네가 뭐랬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나는 여기 왕궁에서 호강할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하는 사람이야, 나는 고난을 받더라도 저들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야’ 그랬었지?
그런데 그때 너는 나를 의지하고 그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배운 학문과 무술과 왕궁에서 얻은 지위와 권력으로 해보려고 했었지, 그러다가 한번 실패하고는 포기하고 도망쳤지. 그리고 곧장 여기로 와서 지난 40년을 숨어 산거지, 그런데 그 40년이 평안 하더냐? 보람이 있었냐?”
하나님은 모세가 미디안에서 허송한 지난 40년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애굽으로 가서 40년 전에 하려던 그 일을 마무리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나는 못합니다. 이미 실패한 것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역부족입니다.
나 말고 다른 적임자를 찾아서 보내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모세를 설득하며 감동을 주십니다. “너는 지난 40년처럼 계속 이렇게 살겠다는 거냐? 양심의 괴로움을 계속 놔두고 살겠다는 거냐? 계속해서 네 사명을 외면하고 이렇게 살겠다는 말이냐?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40년 전에 다 깨닫고도 40년 세월을 허송하고도 계속 이대로 살겠다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서 네가 할 일을 해라” 이런 말씀입니다.
모세는 결국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고, 결국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습니다.
성령이 감동하시는 때는 내가 다시 일어설 때가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는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시는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건이 안 되어서, 준비가 안 되어서, 하려고 하다가 그만 둔 일, 가슴 속에만 묻어 두고 지내온 그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우면서도 그냥 덮어두고 살아온 사명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감동하는 순간은 우리에게 다시 그것을 감당할 기회가 왔다는 뜻입니다. 감동주실 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6.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으면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갑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설교하자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가정과 직장과 사회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교회에는 갈 데 올 데 없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이것을 본 성도들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각자 물건들을 가져와서 서로 나누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이 감동이 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는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아마 자기는 가족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어서, 누구에게 쫓겨나거나 핍박을 받을 일이 없었나 봅니다.
그것만도 감사했습니다. 게다가 남들은 그동안 물질적으로 가난하게도 살고, 건강문제로 고생하는 가정도 많고, 자식문제로 고생 많이 하는 가정들도 너무 많은데 자기 가정은 그동안 너무 복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복을 누렸구나,” 게다가 지금도 그에게는 적지 않은 재산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별것 아니지만 지금 당장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은 식사를 당장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누군가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야 저들이 목숨을 이어가고 옷을 갈아입지 않겠는가? 나에게 지금 이렇게 넉넉한 재산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런 때에 저들을 도와주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닐까?” 이런 감사한 생각이 바나바의 마음에 가득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딴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밭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습니다. 바나바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 즉시 실천했습니다.
이 바나바는 나중에 바울사도를 예루살렘 교회로 인도하여 소개한 사람이고, 안디옥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교회를 개척했고, 바울과 함께 최초로 세계선교사로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바나바가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여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는 모습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보았습니다. 그들도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그들도 교회로 몰려드는 부양해야 하는 경제력이 없는 새 식구들의 형편을 알고 있었고 그들도 자기들이 뭔가 도와야 한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상의를 했습니다.
“여보, 우리도 밭을 팔아서 바나바처럼 신입교인들 부양하는데 쓰도록 교회에 바칩시다.” 이들 부부에게도 성령의 감동이 있었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일단 순종하여 행동에 돌입했습니다. 그런데 밭을 팔아 손에 돈을 쥐고 나니까 마음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이었습니다.
“야, 너 그거 다 헌금하면 너희 장래 대책은 있어? 남들 생각만 하지 네 자식 생각은 안 해? 네가 그렇게 부자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자선 사업가였어? 분수에 맞게 살아, 바나바는 본래가 부자고 너는 그게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그냥 한꺼번에 다 헌금을 해?” 그렇게 생각하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하긴 그래, 맞아 우리 장래 생각도 해야지, 우리 애들 몫도 조금 남겨 놓아야지, 남 도우려다 나중에 내가 남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그런 생각이 마음에 꽉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밭을 판돈의 반절을 나누어서 얼른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추어 놓고 반만 가지고 사도들에게 갖다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단번에 알아보고 하나님의 성령을 속였다고 책망 하였고 그 책망을 받는 순간 아나니아 삽비라는 즉사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경고가 되었다는 기록이 사도행전 5장에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감동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동이 오는 순간에 악령의 속삭임도 동시에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무리 강하게 나를 일깨운다 할지라도 즉시 순종하지 않으면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갈 기회만 주는 것입니다.
히 4:2에 “들은 바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고 하였고,
약 4:7-8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결론}***
"성령이 감동하시면"
1. 감동을 받은 고레스 왕 (1- 4, 7-11).
2. 감동을 받은 이스라엘의 행동 (5 이하)
3. 감동을 받은 바사의 사람들 (6)
4. 우리는 어떻게 감동에 반응해야 합니까?
5. 성령의 감동은 기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6.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으면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갑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즉시 순종해야 하고, 사단의 속삭임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받으며 행복한 오늘을 살고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에스라1:5-6절입니다. 오늘 주일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시고 치유와 감동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