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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느헤미야2장1~20절
제목 : 재건의 여정을 시작하다
아닥사스다 왕은 술 관원인 느헤미야가 얼굴에 수심이 있음을 보고, 그 이유를 물은 다음 느헤미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을 중건할 것을 허락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들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이 소식을 들은 대적 산발랏과 도비야가 근심합니다.
느혜미야는 몇 사람을 데리고 은밀히 예루살렘 성벽을 시찰한 다음 성 재건에대한 계획을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알립니다.
이에 대해 백성들은 호응하나 대적들 즉 산발랏, 도비야, 게셈이 함께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사업을 방해합니다.
1. 예루살렘 중건 요청(1~10절)
1)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1~8절)
(1)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제20년 니산월에 왕 앞에 나갑니다(1절)
“[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 - '니산월'은 유대 종교력으로 정월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하나니'등이 페르시아에 도착했던 '기슬르 월' 9월입니다(1:1). 그렇다면 1:1의 '기슬르 월'이 '아닥사스다 제 이십 년'이었다고 할 경우, 본절의 '니산 월'은 '아닥사스다 이십 일 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본절에 '이십 년'이라고 표기된 까닭은, 그 당시 느헤미야가 왕의 재위년수를, '디스리 월'(양력으로 9-10월)부터를 새해로 간주하는 유대 민간력을 좇아 계산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슬르'(1:1)이나 본절의 '니산 월'은 동일한 년도에 속하는 셈이 됩니다.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 이것은 그 당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문구입니다.
사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와 같은 잔치를 매우 자주 베풀었었습니다(에1:3; 5:6). 또한 이것은 고대 중근동 국가들의 일반적 관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바벨론에서의 월동을 마치고, '니산 월'(양력으로 3-4 월), 즉 봄이 되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있던 '수산 궁'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입니다(1:1).
아무튼 왕이 베푼 잔치는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1:11).
한편, 느헤미야는 민족적 재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그토록 가슴 아파 하면서도 결코 성급하게 서두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요청을 올릴 가장 적절한 기회를 찾으면서 계속 하나님께 기도해 왔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 어떤 이들은 바사 왕실에 술 관원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술을 올릴 차례가 온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 이것에 대해서는
⓵ 여기의 '없었더니'(로)를 '진실로'(루)로보고 '진실로 내가 그의 면전에서 근심했었다'라고 하는 해석,
⓶ '왕의 앞에서'(레파나이우)를 '전에'(레파님)로 보고 '내가 전에는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해석,
⓷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유지하되 '왕의 앞에서'(레파나이우)의'왕'을 비인칭으로 번역한 '그것'으로 보고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그 소식 앞에서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해석,
⓸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인정하여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⓵⓶⓷ 의 견해는 모두 맛소라 본문의 수정을 주장하지만 그것을 입증치 못한다는 점에서 ⓸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의 이 문구는 느헤미야가 그 전에는 항상 밝은 얼굴로 자기의 소임을 다했음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느헤미야의 수심 있는 얼굴을 보고 왕이 근심이 있느냐고 묻습니다(2절)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의 기도(1:11)가 응답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사실 술 관원이 흥(興)을 최고조로 돋우어야 할 직책에 있으면서 도리어 연회장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을 주최한 왕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왕이 느헤미야에게 연민어린 관심을 보인 것은,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결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근심(로아으) - 이는 앞의 '수심'과 어근에 있어서는 동일하며, 전 7:3에서는 '슬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 본절은 느헤미야가 왜 이 같은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⓵ 왕이 연회장내에서 느헤미야가 슬픈 얼굴을 한 것으로 인해 진노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⓶ 왕이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 오히려 진노하지 아니할까 하는 염려 등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수심'에 대한 왕의 반응이 사뭇 동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⓶의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왜 자신의 간청에 대해서 아닥사스다가 진노 할 것으로 염려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사업이 아닥사스다의 명령에 따라 그의 즉위 초기에 중단됐음을 느헤미야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스4:11, 21). 따라서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노라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요구하는 일은, 곧 아닥사스다에게 그가 내렸던 이전의 명령을 번복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또한 이는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라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 부담이 뒤따랐습니다.
(3)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아타까운 형편을 아룁니다(3절).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고대 중근동의 왕들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찬사형의 인사입니다(왕상1:31;단24:4;3:9;5:10;6:6,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사에 왕의 호감을 사려는 느헤미야의 의도가 담겨 있음을 배제 할 수는 없습니다,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 - '조상들의 묘실', 즉 '조상의 무덤'은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시 되었습니다.
특히 왕족 및 귀족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언급은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성읍' 곧 '예루살렘'을 외부의 침입로 부터 보호받아야 할 곳으로 간주토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 따라 '예루살렘'(스 4:20 )이라는 고유 지명 대신 '성읍'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여기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면,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전에 사마리아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그곳에 성벽 쌓는 일을 중지시켰던 사실을 쓸데없이 상기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본 문구는 느헤미야가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그의 조상들이 예루살렘에살았었음 암시해줍니다(1:6).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 '황폐하고'(하레바)는 '말라불다' 혹은 '죽이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레브'에서 온 형용사로서, 인간 혹은 자연의 피조물 등이 특별한 원인에 의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시 106:9; 사 19:5; 34:10; 렘 26:9; 겔 6:6).
또 '불탔사오니'(에클루 바에쉬)는 문자적으로 '불에 의해서 먹혔다'의 뜻으로서 1:3의 '소화되었다'(니체투 바에쉬) 보다 강조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4) 왕은 무엇을 원하느냐 묻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짤막하게 기도를 올립니다(4절)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간청할 기회를 주기 위한 질문입니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이미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라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黙禱)하고. -여기서 '묵도하고'(에트팔렐)는 '간청하다' 혹은'기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랄'의 재귀적 강의형으로서, 간절한 소원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을 가리킵니다(삼상 1:17; 왕상 8:33; 왕하 19:20; 20:2).
느헤미야의 이 같은 기도는
⓵ 자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며,
⓶ 전달된 자신의 소원이 왕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가납될 수 있기를 바래서 드려졌음이 분명합니다.
(5)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을 재건하는 일을 허락해줄 것을 아룁니다(5절).
“[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 이것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했던 것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다른 것들은 '성 중건'의 부차적 요소들일 뿐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성벽의 복구'를 뜻합니다(3절).
(6) 왕이 보내기를 좋게 여기십니다(6절)
“[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왕이 국사(國事)와 관련된 귀빈을 맞이하고 있을 때는 '왕후'가 내전(內殿)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자리였던 관계로 인하여 '왕후'도 왕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왕후'는 관례적으로 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왕의 발(足)곁에서 왕의 얼굴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으며 왕과 왕비가 이런 자세로 있는 동안 신하들은 그 주변에 모여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본절에서 '왕후'가 함께 있었음을 특별히 밝힌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⓵ 왕이 느헤미야에게 호의적 반응을 보인데는 '왕후'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
⓶ 느헤미야가 왕으로부터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기 위한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 '왕후'라는 장애물이 있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
⓷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자신의 소원을 알린 곳은 연회장이 아닌 은밀한 장소에서 였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 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첫째, '왕후'는 왕의 명령이 있을 경우 왕과 함께 연회장에 참석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매우 보편적이었으며(에 1:11),
둘째, 아닥사스다 당시에는 여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으며,
셋째, 느헤미야 항상 왕궁에 거하므로 왕의 처첩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넷째, 5절과6절은 왕이 왕후가 있었을 내전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추측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⓵의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는 듯합니다.
한편 '왕후'(쉐갈)에 대해서는
⓵ 이와 동일한 아람어 단어가 왕의 첩들을 의미한다는 사실(단 5:23)에 근거하여 왕의 많은 첩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소유한 여인이라는 견해.
⓶ 이 '히브리 단어가 시 45:9에서는 첩이 아닌 왕비를 가리키고 있음을 근거로 해서 아닥사스다 왕의 유일한 정비(正妃)였던 '다마스피아')라는 견해등으로 그 해석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첫째, '쉐갈'이라는 히브리 단어의 시편에서의 용례 둘째, '다마스피아'라는 왕후가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해주는 문헌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⓶의 것이 더 타당합니다.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음을 극명히 보여줍니다.
즉,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보내기를 아쉬워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 문구는 동의적 대구법의 표현 방식입니다.
따라서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와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데 소요되는 전(全)기간을 묻는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이러한 반복적 표현을 써서 느헤미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기한을 정하고. - 이처럼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가 다시 올 날을 직접 정하지 않고, 느헤미야에게 직접 정하도록 한 것은 느헤미야에 대한 세심한 배려임이 분명합니다(본 단락 주제 강해, '에스라 느헤미야의 약사'참조).
(7) 예루살렘 여행에 필요한 사항들을 왕에게 요청합니다(7절)
“[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
강 서쪽 총독들. - 여기의 '총독들'(파하 우오트)은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관리를 가리킵니다(스 8:36).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는 이러한 관리들이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 에스라의 경우와는 달리 느헤미야는 다분히 정치적인 명목으로 귀환을 요청하고 있습니다(스 7:10과 비교).
따라서 그는 팔레스틴으로 가는 여행길에 페르시아의 지방 관리, 특히 사마리아 관리로부터 적대적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자신에 대한 적대 행위를 피하기 위해서 필요 적절한 증표를 왕에게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8) 느헤미야의 요청에 대해 왕은 호의적으로 반응합니다(8절)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
왕의 삼림 감독 아삽. - 여기의 '삼림'(파르데스)에 대해서는
⓵ 레바논의 삼림,
⓶ 예루살렘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페르시아 왕의 정원,
⓷ 유다 왕가의 왕실 재산(대상 27:28) 이었던, 평지의 감람 나무 밭 등의 세 가지 해석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성전공사를 위하여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를 들여 온일이 있었으며(왕상 5:6; 스 3:7),
둘째,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새로이 복구하기 위해서(3절) 필요한 막대한 양의 목재는 레바논 산지를 제외하고는, 적당한 조달처가 없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셋째, 건축용으로 적절한 나무는 오직 레바논 산지에서 벌목되는 백향목 뿐이라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⓵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⓵ 삼림 감독이었던 '아삽'이 히브리식 이름의 소유자라는 점, ⓶ '삼림'이라는 단어가 고대 아리안어에서 온 것으로서 자연림이 아닌 울타리나 담장 등으로 둘러 싸여 있는 숲이 울창한 공원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는 점 등이 제시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반론은
첫째, 페르시아 왕이 멀리 유다 땅에 개인적인 공원을 두었을 가능성은 문헌적 입증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희박하며,
둘째,'아삽'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말'(馬)을 뜻하는 폐르시아어 '아스파'에서 파생된 페르시아식 이름 '아스바다'(에 9:7)와 유사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타당성이 약합니다.
성전에 속한 영문. - 여기의 '영문'은 성전 북쪽에 위치했었던 요새 혹은 망대입니다. '하나넬 망대'(3:1)는 바로 이것의 한 부분으로 추측됩니다.
이것은 성전의 보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후대에 들어서서는, 바로 이 자리에 헤롯왕에 의해서 '안토니아 영문'이 세워졌었습니다.
성곽 - 성곽 건축에 목재가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다만 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필요하였을 것이며 '성곽'에 속한 여러 '문'(門)을 세우는 데 필수불가결 하였을 것입니다(3:3, 6).
아무튼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목재가 '성곽' 건축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증거는 대단히 많습니다.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내가 들어 갈수 있는 한집을 위하여'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거할'(보)이 특정한 임무의 수행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는 점(대상 12:17, 23, 38; 16:33; 19:3)에서 볼 때, 여기의 '집'은 총독의 관저로 사용할 처소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새로이 지어질 '집'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추측하건대 느헤미야는 자신의 형제 '하나니'(1:2)와 더블어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됐을 때 머무를 처소에 대해서도 상의를 하였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집을 수리해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 느헤미야가 왕의 질문(4절)에 대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필요한 것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닥사스다왕이 수산궁에 없는 동안(1:1) 하나님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기도를 했음(1:4 - 11)은 물론이고 그 성벽 재건을 위한 구체적 계획까지 세워 놓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느헤미야의 여정(9~10절)
(1) 왕의 호의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9절)
“[9]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
본절의 내용과 왕의 허락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요세푸스는 그 기간을 무려 5년으로 잡습니다(Ant. X i 5).
그러나 몇 달 간의기도(2:1)와 안타까운 마음의 간청을 했던 느헤미야가 5년씩이나 참고 기다렸으리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극히 짧은 기간 내에 페르시아를 떠났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입니다.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 이 같은 모습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거절했던 에스라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대조됩니다(스 8:22).
그러나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길에 폐르시아 군대를 대동한 것은 그가 에스라보다 불신앙적 이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느헤미야의 역할이 에스라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즉,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이라는 자격(5:14)으로 예루살렘에 간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율법 교육을 목표로 했던 에스라의 신앙적 차원의 여행과는 표면적으로는 달랐습니다(스 7:10).
틀림없이 아닥사스다 왕은
⓵ 느헤미야가 자신의 '술관원'이라는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이며,
⓶ 유다 지역의 총독이라는 중대한 직분을 부여받은 자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여 호위병들을 딸려 보냈을 것입니다.
(2) 느헤미야 일행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심히 근심합니다(10절)
“[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본절과 같은 이방인들의 반응은, 성전 재건 사업에의 참여 요청이 거부된 사건(스4:1-6)이 있은 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냉전 상태가 매우 심화되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 - 애굽 남부 지역인 '엘레판틴'에서 발굴된 문서에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서 언급되며 또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문서에 나타나는 두 아들의 이름에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뜻하는 어미(語尾)가 달려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점(13:28)에서,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와를 섬겼던 자들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에(스 4:1, 2)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지녔던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호론'은 윗 벨호론과 아랫 벨호론(수 16:3, 5)중 어느 하나를 의미합니다. 이곳은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산발랏'은 바벨론식 이름으로서, '신(月神)이 생명을 주신다'의 뜻입니다.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 - 여기의 '종'(에베드)은 '신하' 혹은 '부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인물이었던 셈이 됩니다(6:17,18). 한편 '암몬 사람'은 반드시 '도비야'가 암몬 지역 출신이었거나 혹은 암몬 땅에 살고 있었음을 의미치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비야'는
⓵ 대제사장과 친밀하게 연락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되며(13:4),
⓶ 암몬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 갖는 유대식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도비야의 조상이 '암몬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무난하겠습니다.
심히 근심하더라. - 사마리아 총독의 이같은 반응은
⓵ 성벽재건의 방해 공작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에 따른 두려움,
⓶ 예루살렘의 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가 유다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할 가능성에 따른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2. 무너진 성벽 시찰(11~16절)
1)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3일 동안 휴식을 취합니다(11절)
“[11]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
머무른 지 사흘 만에 - 이같이 예루살렘 도착 후 '삼 일'을 쉰 까닭은
(1) 오랜 여행에 따른 심신(心身)의 피로를 풀며,
(2) 예루살렘의 정확한 상황을 청취하며,
(3) 도모하려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일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에스라에게서도 발견됩니다(스 8:15, 32).
2)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조용하게 행동하기를 시작합니다(12절)
“[12]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의 성벽 재건 계획이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알려질 경우 그 사업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거나 그 대적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해 올 것을 염려하여 취해진 조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심지어 자신의 동족에게 까지 말하지 아니한 까닭은, 그들의 상당수가 '산발랏' 및 '도비야'와 결혼 등 이모저모로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18; 13:28).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 간접적인 보고로만 들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직접 확인파악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밤에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이런 확인 활동이 '산발랏'과 '도비야'와 내통하고 있던 유대인에 의해서 감지되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두어 사람'은 문자적으로 '소수'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등을 가리킬 것입니다(1:2).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 오직 '느헤미야'만이 '짐승'을 탄 것은, 최대한으로 대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짐승'(베헤마)은 일반적으로는 '말'과 '나귀' 모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콧소리를 심하게 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느헤미야가 탄 '짐승'은 나귀였을 것입니다.
3) 느헤미야 일행은 골짜기 문에서 출발해서 용정, 분문, 샘문, 왕의 못까지 갔고 그곳부터는 길이 없어 계곡을 따라서 성벽을 살핀 후 다시 골짜기 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13~15절)
(1)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습니다(13절)
“[13]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 여기의 '골짜기 문'은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한 문(門)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필 이 문을 택한 이유는 그 지경이 가장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용정(龍井)으로 분문(糞門)에 이르는 동안. - 여기서 '용정으로'는 문자적으로 '용정의 앞쪽으로'입니다.
이 '용정'은 힌놈의 골짜기와 기드론계곡의 합류점에서 남쪽으로 약 210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욥의 우물'(Jod's well)로 추측됩니다.
한편, '분문'은 '골짜기 문'에서 약 450m, 즉 1천 규빗의 거리에 있었습니다(3:13).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의 최남단에 위치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나온 온갖 쓰레기, 심지어는 성전의 희생 제사 때 나온 짐승의 똥까지 이문을 통해서 힌놈의 골짜기에 버려졌었습니다(롑 7:31, 32).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 이같이 느헤미야가 직접 확인한 상황은 '하나니'의 보고 내용과 동일합니다(1:3).
(2) 샘문과 왕의 못에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었습니다(14절)
“[14]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
앞으로 나아가. - 우측, 즉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 보면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 '샘문'은 '분문'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m 정도에 위치했으며 그 바로 앞에는 '실로암못'이 있었습니다(서론 도표, '성벽 재건의 모형도' 참조).
한편 '왕의 못'은 3:15에서는 '셀라 못'으로 지칭되고 있는 '실로암 못'입니다.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 이는 그곳이 무너져 내린 성벽의 잔해및 온갖 쓰레기 등으로 메워져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통하여 본절의 이 기록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3)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습니다(15절).
“[15] 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 느헤미야가 나귀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간 것을 가리킵니다.
즉 그가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기드론 시내 쪽으로 내려간 후 그 시내를 따라서 북쪽으로 향했음을 가리킵니다.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으나. - 이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가지 않았음을 시사해줍니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에는 생략되었으나 느헤미야가 성벽 탐사를 계속 진행하여 끝까지 다 돌았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즉, 성벽의 북쪽과 북서쪽은 그다지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절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느헤미야가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까지 살펴봄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중도에서 돌아온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북쪽 성벽 지역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느헤미야 일행이 눈에 띌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추측 때문입니다.
4) 느헤미야는 자신과 일행이 그날 밤에 했던 일에 대해서 비밀에 부칩니다(16절).
“[16]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느헤미야의 조사 활동이 이처럼 비밀리에 진행 됐던 까닭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벽 재건 계획이 누설될 가능성이 매우 큰 때문이었습니다(12절참조 ).
방백들(세가님) -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 의미를 정의하기 곤란합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회중들에 의해서 선출된 백성의 대표들로 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스9:2에서는 '두목'이라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방백'(사림)보다는 한 계급 낮은 신분으로 묘사됩니다(스 9:2). 한편, 이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 - 이들은 당시 유다공동체를 구성했던 대표적인 네 계층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의 '유다 사람'은 반드시 유다 지파 사람만을 의미치 않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유다 지파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구수에 있어서 가장 컸던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이처럼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포로 후 시대라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행정 및 경제의 측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중 종교적 세력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암시되는 듯합니다.
한편 '귀인'(호림)은 그 문자적 의미로는 '자유로운 자'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이었으며 또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갖고 있던 신분 정도로 추측될 뿐입니다. 또한 '방백'은 본절 초두의 '방백'과 동일합니다.
이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행정 분야를 관장하던 신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 일하는 자들. - 성벽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한자들을 가리킵니다
3. 성벽 재건 촉구(17~20절)
1) 느헤미야의 결단과 백성들의 동의(17~18절)
(1) 백성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을 밝힙니다(17절)
“[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
본절과 같은 느헤미야의 발언(發言)이 암행 탐사가 있었던 때로부터 얼마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 행해졌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후삼일 간 숙고할 기회를 가졌었고(11절), 직접적인 자신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 모든 정황을 파악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암행탐사 그 다음 날에 본절과 같은 발언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당한 곤경 - 여기서 '우리'는, 귀환한지 3일 밖에 되지 않은 느헤미야가 본토의 유대인들과 깊은 연대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곤경'(하라아)은 1:3에서는 '환난'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성벽을 갖고 있지 못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방인들의 상습적인 노략으로 인해 처하게 된 어려운 상황을 가리킵니다(1:3).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 유다의 다른 주요 성읍들은 나름대로의 방어용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오직 유다의 심장부이자,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만 방어용 성벽이 없어 노략을 계속 당한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주민 뿐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백성들에 까지 수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2)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간증하고 그것이 나타나게 된 것을 밝힙니다(18절).
“[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토륵 한 신앙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스 7:6).
왕이 내게 이른 말씀.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케 한 정치적 원동력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을 주저하고 있었던 현실상의 이유는
⓵ '산발랏'과 같은 사마리아 관리의 방해(스 4:7 - 16),
⓶ 사마리아 관리의 참소에 따른 아닥사스다 왕의 성벽재건 중지령(中止令 )등의 정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벽 재건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느헤미야에 대해서 아닥사스다 왕이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은 상당한 용기를 불어 넣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2-9절).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 이는 문자적으로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들의 손을 스스로 강하게 했다'의 의미입니다(삼하 2:7).
본절은 성벽 재건 사업이 미미하기는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해줍니다(JB).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성벽 재건을 시도했었습니다(스 4:12).
2) 대적들의 조소(19~20절)
(1) 대적 들이 비웃으며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고 합니다(19절)
“[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 - 이들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라비아 사람 게셈. - '아라비아 사람'은 앗수르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단 동부 지역의 지배 계급이었습니다(본 단락 주제 강해, '아라비아 사람' 참조).
한편 '게셈'이라는 이름은 애굽 땅에서 발견된 B. C. 5세기말 경의 것으로 추정 되는 은 그릇에 그 아들 '카이누'와 함께 여신 '한-일라트'(Han-'ilat)에게 헌신한 자로서 새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람어 비문에서는 '게달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요단 동쪽및 남쪽지역을 다스리던 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게셈'이 '도바야'와는 달리 '산발랏'의 휘하에 있었던 한 관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6:2에서 이 '게셈'이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에게 대면(對面) 요청을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자명해집니다.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시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무기입니다.
즉, 하나는 '조롱'이며 또 하나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업신여기고'(얄라구)는 '조롱하다'등의 뜻이 있는 '라아그'의 사역형으로서, 마땅히 귀중히 여겨져야 할 어떤 대상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킵니다(대하 30:10; 22:7; 잠 17:5).
한편,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일찍이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 관원들의 참소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복구사업을 중지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협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사업은 중지령을 내렸던 아닥사스다 왕의 새로운 허락과 명령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느헤미야는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용기를 얻습니다(20절)
“[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산발랏 등의 적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사항(7-9절)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태도는 인간의 어떠한 훼방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반영합니다.
아울러 산발랏 일당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느헤미야에게 허락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느헤미야가 이미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산발랏 일당은 도리어 왕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자 기를 썼던 셈이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 이 같은 느헤미야의 확신에 찬 응답은
⓵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보호하고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과
⓶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던 실제적 체험(1:11)에 근거하였습니다.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할 하등의 명분이나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스 4:2,3).
여기서 '기업'(헬레크)은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관련해서 사용된 법정적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용어는 자신의 반역 의사를 표명할 때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삼하20:1; 왕상 12:16) 볼 때, 여기의 '기업도 없고'는 산발랏 등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에 절대적으로 참여할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권리'(체다카)는 행정 구역으로서의 유다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는 법적 권리를 가리킵니다.
앞의 '기업'이 시민권의 문제와 관련 있다면, 이것은 행정권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명록'(지카론)은 종교적 의식에의 참여권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고 기다리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신중하고 설득하고, 절망하고 분노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특히 준비된 일꾼을 쓰십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동역, 그리고 방해 앞에 또 흔들림 없는 귀한 일꾼이 우리 안에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주께서 쓰시는 준비된 일꾼이 됩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느헤미야를 형통하게 하셔서 왕의 신임과 호의를 얻게 하십니다(1~6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에서 형통하기를 기도했고(1장 11절), 하나님은 그를 왕의 최측근인 술 관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왕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간절한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했기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느헤미야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느헤미야는 자신의 수완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의지합니다(2~4절18절).
그는 수심의 이유를 묻는 왕의 질문에 크게 두려워합니다.
페르시아에 충성해야 할 관리가 패망한 조국을 근심하는 일이 어떤 위기로 이어질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수산 궁에서 에스더 왕비가 ‘죽으면 죽으리라’ 고백한 것처럼, 담대한 마음으로 자신의 근심을 털어놓습니다.
예루살렘 재건이라는 확실한 신념이 있었기에 담대하게 고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절실한 필요가 있었기에 그 짧은 순간에도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합니다.
2)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돕는 가운데, 느헤미야의 손도 부지런히 움직입니다(5~9,11~16절).
느헤미야는 조서와 건축 자재와 호위할 군대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먼저 예루살렘 성을 꼼꼼히 시찰합니다.
열정만 있고, 기도만 한다고 일이 성사되지는 않습니다.
기도했기에 더 신중하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고, 더 성실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3) 느헤미야가 재건의 당위성(17절)과 가능성(18절)을 들어 호소했고, 백성들은 ‘일어나 건축하자’며 열렬히 반응했습니다(17,18절).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이라면 그곳에 하나님의 선한 도움의 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4) 선한 일은 늘 악인의 방해를 받습니다(19,20절).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업신여기고 비웃어도 도리어 당당할 수 있습니다.
악행으로 비난받는 일은 부끄러워하되, 선한 일로 시기와 미움 받는 일에서는 물러서지 맙시다.
기도
공동체-공동체의 현실을 바로 보게 하시고, 재건을 향한 믿음과 용기를 갖게 하소서.
열방-2018년 9월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80여 개의 교회가 도움과 지원을 통해 온전하게 복구되며 이전보다 더 강건한 교회로 세워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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