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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막부의 성격과 메이지유신, 위인 료마에 대하여
1. 도쿠가와 막부의 성격 2. 도구가와 막부 붕괴과정과 메이지유신
[기타] * 일본인과 경영철학 * 2011.청천산악회, 하계일본 등산, 사진지상보고 (시모노세키 일원)
자료 정리 : 이재익 (학정, 시인)
[ 내용 소개 ]
나는 2011년 8월 18일 저녁부터 21일 아침까지, 왕복 부관 훼리 배편으로 내가 소속하는 청천산악회(동아고 동문산악회) 참가자 88명의 일원으로 하계 일본 등산을 다녀왔다. 시모노세키 근교의 추길대(아키요시다이) 등산과 시모노세키 일원을 관광하면서 역사적 의의가 깊은 3곳에 주목하였다.
첫째로, 일제강점기부터 다녀온 관부연락선의 關에 해당하는 것이 부산과 가장 가까운 지역인 시모노세키(下關)항이라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고 그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었으며, 일본 내해로 들어가는 입구 관문역할을 하는 곳이라 하여 관문대교가 있었다.
둘째로, 관문대교 가까운 바닷가에 한일의원 연맹에서 세운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를 발견하고, 조선통신사들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숙하며 쉬고, 저 관문대교 밑의 바다로 세도나이카이라고 하는 좌측에 혼슈, 우측에 큐슈, 시코쿠라는 큰 섬 사이의 수로 바다길을 계속 항해하여 오사카까지 가서 육로로 교토나 도쿄까지 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서 조선통신사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볼까 한다.
셋째로, 관문대교와 조선통신사 기념비가 있는 부근 도로 건너에 [일청강화기념관]이 있었다. 자세히는 둘러보지 못했으나 이 건물의 의미는 청일전쟁(1894~95)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마무리 짓는 강화조약을 바로 이곳에서 맺었다. 그래서 [시모노세키조약]이라고 한다.
넷째로, 시노모세키의 옛날 중심지인 ‘장부’라는 거리에는 ‘功山寺’라는 절이 있었고, 절은 비어 있으며, 관광자원으로만 활용되고 있었다. 그 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장부 거리의 입구에 안내판이 있었는데, 메이지유신(1868)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정치적으로 적극 지원한 豊永長吉의 생가가 보존되고 료마도 안내하는 것이었다.
최근 조선일보에서 대담한 일본의 석학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郞) 명예교수는 “지금 일본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리더다. 다양한 회사와 다양한 지식이 있지만, 그것을 종합할 수 있는 리더 혹은 프로듀서, 프로젝트 리더가 필요하다.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나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혼다자동차 창업자처럼 지(知)를 종합할 수 있는 리더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토로했듯이 료마는 메이지유신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일본의 선각자적 위인이다.
따라서 본 자료 이번호에서는, 일본의 도구가와 막부정권이 무너지고,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알아보고, 노나카 교수가 말하는 오늘의 일본과 경영문제도 함께 싣고, 이번 시모노세키 여행에서 의미있었던 사진들도 간추려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일본역사] 1. 도쿠가와 막부의 성격
▣ 토요토미 세력 일소
100여년 동안의 내란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일본은 임진왜란을 文祿 ; 분로구, 정유재란을 慶長 ; 게이쬬의 役이라고 칭한다.]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1598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왜군은 패퇴하였고, 이후 후계자 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정치적 공백은 토요토미의 고위 封臣인 도구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메꾸어갔다. 천황이 있는 교토(京都)를 떠나 장래 東京이 되는 에도(江戶)에 막부정권 수도를 건설했다. 성은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1600년에 경쟁자들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15년 후에는 대판성(大阪城 ; 오사카)을 함락하여 잔여 세력을 제거했다. 조선과 전쟁을 일으킨 것은 토요토미이며, 자신들은 무관하다고 하면서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여 스스로의 정권의 권위를 높였다.
▣ 중앙집권적 봉건제도와 쇄국정책
이후 제도적으로 철저를 기해서 200년간의 평화와 안정의 기틀을 다졌다.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중앙의 인접 지역에는 자녀 혈족을 분봉하고, 지방은 세습적인 다이묘(大名)라는 제후(영주)들에게 분봉하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다이묘들에게 자치권을 주었으나, 성곽 건조나 수리는 엄격히 제한하였고 가족중에 인질을 에도에 두어야 하고, 다이묘 자신도 영지와 수도를 오가며 거주하게 하여 철저히 세력을 견제하는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천황들과 천왕의 조정 신하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경제적 대우를 했다. 쇼군(장군)의 칭호로 다스렸는데, 장군이란 천황의 군대 대원수격이었다. 행정은 다이로(大老), 로쭈(老中)같은 자문을 두고, 무사겸 행정관, 농, 공, 상으로 4계급화했다.
도구가와 정권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썼다. 도구가와 정권시대, 1637년~38년에 기독교계 농민 3만6천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기독교인과의 전쟁에서 이들을 한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세를 펴지 못했다.
1636년에 일본인이 국외에 나가는 것과 국외로 나간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모두 금지하였고, 2년 후에는 큰 선박 건조까지도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그러나 나가사키(長琦)의 한 작은 섬만을 봉창으로 열어 네덜란드인과 교역하고 문물을 접촉했으며 그렇게 해서 받아들인 서양문화를 난학이라고 한다.
▣ 엄격한 사회 통제로 유순한 국민성을 만들어
엄격한 사회통제정책 속에서 평화가 지속되었으며, 단 한번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1701년과 1703년에 47인의 낭인(로닌 ; 주인 없는 무사)들이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에도(江戶)의 소봉신이 더 큰 봉신 사람들에게 참을 수없는 모욕을 당하자, 소봉신은 괴롭힌 사람을 죽였고, 결국 소봉신은 자결 명을 받았다. 소봉신의 가신들인 47인의 낭인들은 주인을 몰락시킨 봉주에게 복수를 했는데, 이 47인의 낭인들도 결국 행정당국으로부터 자결의 명을 받아 사라졌다.
도구가와 정권의 통제정책으로 16세기에 전쟁과 모험을 좋아하던 일본인들이 19세기에는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의존적이고, 유순한 국민으로 바뀌었다. 일본인들은 자신이 판단해야 하는 경우는 비교적 당황하는 편이다. 행동형태가 적용이 안 되는 경우는 잘 흥분하여, 국내에서는 예절, 온순한 속성이 정복자로서 해외에 있을 때는 잔인하고, 폭행을 자행하는 경향이다.
도구가와 정권은 17세기 초부터 정상적인 사회와 경제발전을 저지하고, 낡아빠진 봉건적 속박, 반동적 정치 사회제도를 19세기 중기까지 거의 원형대로 보존했다.
▣ 민족의식의 발전과 神道
전국토가 다수의 봉건영지로 분할되어 있었지만 국민은 강력한 민족의식을 발전시켰다. 도구가와 시대 이미 발전한 민족의식은 일본이 단시일내에 현대화 할 수있는 발판이 되었다. 중국이 극동에서 문명의 발상지이며 일본은 중국문명의 분가이던 후진 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열등감에서인지 일찍이 민족의식과 일본적인 것을 자랑으로 삼는 태도를 발전시켰다.
도구가와 시대 정치적인 통일과 강력한 반외국정책에서 온 완전한 고립은 민족주의의 급속한 성장을 초래했다. 도구가와 정권이 유교를 보호하였지만, 유교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일본 역사적 연구, 신화와 설화연구 까지도 촉진하였다.
일본은 神에서 기원한 나라이며 神을 조상으로 하는 황실이 만세일계(萬歲一系)라고 믿으며, 일본 고유의 덕이라고 자랑한다. 신도(神道) 승려들은 민족의식을 육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세기 동안 神道는 불교에 눌렸다. 신도의 여러 신은 만유의 불교신들의 지역적인 표시라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점차로 신도는 여러 가지 불교와 중국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고유한 신도가 외래의 불교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러, 신도와 불교관계의 세력의 우열 관계가 점차 뒤집어졌다. 신도적 사고로는 불교와 중국적 세력이 미치기 이전의 시대를 오히려 '황금시대' 라고 회고, 자찬하고 신도는 메이지시대 일본 국교화 되었다.
신도 종파는 모두 불교의 여러 개념과 방법을 기본원리로 채택하면서도 차별화 해나갔다. 불교가 하류계급에게 정신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증거이다. 2세기 전에 창설한 神道 13종파는 오늘날 신도수가 일천만이상이다.
▣ 상인계급과 서민문화 발달
지배계급은 상인들을 최저 계급에 두었지만 상인들의 활동은 활발했다. 에도와 오사카에는 미곡시세가 매일 변동하는 미곡거래소가 생기고, 신용문서가 사용되었으며, 미쓰이(三井) 상업 가문도 생겼다. 무사 지배계급은 상인들을 천시하였지만. 자신들도 상인들에게 빚을 지거나, 경제적으로 의존하였고, 점차 상인이 전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해 갔다. 상인들의 후원하에 서민 문예, 예기 서민문화가 발달해갔다. 회전무대를 사용하기까지한 연극인 가부기(歌舞技), 아주 짧은 단가 하이쿠(俳句), 판화는 일본 문화의 특징을 이루었다. 도자기, 직물, 칠기, 인쇄술, 지도제작, 포술, 제련술, 의술 등도 발달하였다. ●
[일본역사] 2. 도구가와 막부 붕괴과정과 메이지유신
▣ 서양열강의 위협
막부가 쇄국 정책을 강경하게 고수하고 있을 무렵, 산업혁명을 이룩하여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열강들이 새로운 상품 시장을 구해서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강화하고 있었다.
영국은 1840년 청을 아편전쟁으로 굴복시켜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항시키고, 홍콩을 영유했다. 미국과 프랑스도 청의 패배를 계기로 중국에 진출했다. 미국은 1848년 태평양 연안에 도달했고, 러시아도 청에 압박하여 186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한 후 동아시아 진출의 근거지로 삼았다.
각국 정권은 열강에 대항하기보다 요구에 굴북해서 권력의 연명을 꾀했으므로 외국의 침략에 반대하는 국민들 사이에 불만을 샀다. 1851년 중국에서는 청조타도를 부르짖는 태평천국의 난이 14년 동안이나 계속된 끝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도움으로 겨우 진압했다. 인도에서는 1857년~1859년에 걸쳐 영국군의 인도인 용병(세포이) 반란을 계기로 한 반영운동이 일어나는 등 19세기 중엽부터 아시아에서는 대규모 민족운동이 잇따랐다.
▣ 일본의 개국 ; 1854년 미일화친조약 체결
도구가와 막부는 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것을 알자 즉각 종전의 이국선 타불령(異國船 打拂令)을 고쳐 1842년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을 내리고 외국배에 식량과 땔감 및 식수 등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쇄국정책은 고수하여 네덜란드 국왕의 개국 권고도 거절했다.
미국은 대 중국무역에서 영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태평양횡단 항로의 개설을 강하게 바라고 있었으며, 북태평양에서의 포경사업을 의한 보급기지 또는 피난처로 일본을 개국시킬 필요를 느껴 1853년 페리제독을 사절로 파견했다.
페리제독이 1853년 7월 동경만에 입항하여 미국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며 개국과 통상을 요구하고, 다음해 봄에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류큐로 물러났다. 막부는 혼란에 빠졌고, 600년 군사정권 처음으로 천황에게 견해를 물었다. 물론 천황과 국민들은 개국에 반대가 많았다.
미국의 개국 요구를 받아들였을 때 노중(老中 ; 로우츄우)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전례를 깨고 이 사실을 천황의 조정에 전달했으며, 여러 영주(大名 ; 다이묘)들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이 사실은 그 때까지 정치권 바깥에 있었던 조정을 정치권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게 되었고, 여러 영주들이 막부 정치에 개입하는 계기를 제공하여, 막부 권력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그 다음 해인 1854년에 페리가 다시 함대를 이끌고 내항했을 때, 근대적 장비를 갖춘 흑선(黑船 ; 구로후네)의 위력에 굴복해서 가나가와(神奈川)에서 일미화친조약 맺고 시모다(下田) 하코다테(箱館)의 두 항구를 열어 미국배의 기항과 영사의 주재를 마지못해 승인했다. 이어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화친 조약이 맺어져서 쇄국정책은 무너졌으며, 국제관계가 진일보하였다.
▣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정쟁 격화
미일화친조약에 따라서 시모다(下田)에 1856년에 부임한 첫 미국 총영사 해리스는 에도에서 노중 홋다 마사요시와 회견하고, 세계 대세를 설명하며 무역개시를 요구하고 일본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 결과 막부는 1858년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고 가나가와 하코다테(箱館) 니이가타(新瀉) 효고(兵庫) 나가사키의 다섯 항구의 개항을 약속했으면, 요코하마(橫濱)에 상사를 차렸다.
개항의 조치에 대해서 빈발이 심해서 수상이 암살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으나 이미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어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조약을 맺었다. 이들 조약은 개항장에 설치된 외국인 거주구역 이외에서의 상업활동은 제한하였지만 외국인에게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한 것, 관세는 일본과 상대국의 협정에 의하도록 되어 있어 일본의 관세 자주권을 잃은 소위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서도 불평등조약의 개정에 오래 동안 소모적인 노력을 해야했다. 치외법권과 무관세, 이러한 불평등 요소들은 일본이 열강에게 당한 경험을 뒷날 1876년 일본이 조선에 강화도조약을 강요하여 그대로 이용했다.
▣ 도구가와막부 말기의 서양문화 수용
흑선의 위력을 목격한 후부터 막부와 여러 번(영주의 근거지)들은 서양의 근대적 기술을 받아들여 군사력을 충실히 할 필요를 통감했다. 근대 과학의 학습을 한층 조직적으로 수용하여 1857년에 막부는 번서조소(蕃書調所 ; 동경대학 전신이 됨)를 열어 천문학 물리학 화학 등 군사에 필요한 과학교육을 시작했다. 이런 것들은 군사적 목적에 한정되었지만, 메이지 정부 때 한층 더 대규모적인 서양 근대 문화 섭취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일본 정보는 캠페르나 시볼트의 연구를 통해 일찍 유럽에 전해져 있었지만, 일본문화가 유럽에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개국 후의 일이었다. 개항 후 우키요에 판화가 유럽에 수출되었고, 특히 1862년 런던.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되면서부터 서양 미술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네와 모네 등이 종래의 고전적 리얼리즘에 탈피하여, 밝은 색체와 화가의 자유로운 시점에서 그려지는 새로운 화풍으로서 후기 인상파 형성에 영양을 주었고, 고흐는 우키요에를 열심히 배워 강렬한 색체를 사용하여 표현한 개성적인 작품을 남겼다.
▣ 존왕양이운동과 공무합체파
막부가 위신을 잃어가자 서남의 웅번(雄蕃)들-사쓰마번(薩摩藩) 쵸슈번(長州藩)들은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올라와 국사에 유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분타파를 기대하며 시세에 눈을 뜬 하급 무사들의 발언권도 커져갔다. 그 대표적 인물은 쵸슈번(長州藩)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가쓰라 고고로오(桂小五郞), 사쓰마번(薩摩藩)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이었다. 이들은 호농 상인들과 협력하였다. 개항 이후 경제적 변동과 재정 부담으로 하층민들의 생활이 궁핍했고, 사회불안이 심각해 자신들이 주도해서 막부를 타도하고자했다.
여기에 대해 막부는 제일차 쵸슈정벌의 군대를 일으켰다.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개국 연합함대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하여 포대를 점령했다. 쵸슈번의 존왕양이파는 세력을 잃고 막부에 일단 항복했다.
천황이 이례적으로 장군을 교토로 호출하였고, 장군이 순순이 따랐다. 천황은 서양오랑케를 배척하도록 요구하면서 차츰 권위가 세워져 나갔다. 한편, 사쓰마번에서도 이보다 먼저 1862년의 나마무기 사건(사쓰마 번주 일행이 에도로부터 귀번 도중에 요코하마 교외 나마무기에서 영국인을 살상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영국 함대의 포격을 받아 살ㆍ영전쟁(薩英戰爭 ; 사쓰마-영국전)이 일어났다. 이들 사건을 통해서 쵸슈와 사쓰마 양번에서는 여러 외국의 힘을 알고 하루 빨리 막부를 타도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인식하였다.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영토 획득보다는 자유무역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여러 강국들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좋게도 경제 관계에서는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던 일본이 영토의 상실만은 면했다.
근대화에 뒤져 있었던 러시아가 쓰시마 점령을 시도한 적은 있었지만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일본을 개명시킴으로써 경제상의 이익을 크게 하고자 기대했다.
영국은 사쓰마번을 중심으로 하는 반막부 세력을 후원했고, 프랑스는 막부를 원조했다. 막부말기 막부와 반막부의 싸움은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이기도 했다.
▣ 도쿠가와 막부의 종언
얼마후 쵸슈번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와 가쓰라 고고로오(桂小五郞) 등이 번내의 타협파를 타도하고 번 전체를 통틀어 막부와 대항할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미 다카스기 등은 1863년 외국 군함에 의한 시모노세키 포격 때 신분질서를 초월하여 서민들을 모집해서 기병대를 편성하고 이들 군대도 편입하여 번의 군사체제를 정비하였다. 초슈번은 무사계급의식을 버리고 현대식 육군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막부와 쵸슈번은 1866년 다시 개전(제2차 長州정벌)하였다. 이 내란으로 경제가 혼란에 빠져 물가가 폭등하자 에도와 오사카 등지에서 요나오시(세상 바로잡기) 동요가 일어났다.
사쓰마번에서도 사이고(西鄕)와 오오쿠보(大久保) 등이 실권을 잡고 군비를 확충했는데, 현대식 소함대를 갖게 되었고 뒷날 일본제국 해군 창설을 지배하였다. 1866년 도사(土佐)의 번사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 1835~1867) 등의 仲裁에 의해, 이때까지 서로 반목했던 사쓰마와 쵸슈 양번이 반막부로 일치했다. 료오마의 중재로 두 번이 군사협력을 위주로 한 살ㆍ장동맹(사쓰마ㆍ`쵸슈 동맹)이 실현되었다.
제2차 쵸슈 정벌에는 친번(장군 근친이 다스리는 번)까지도 출병을 거부했고, 장군 이에모치(家茂)는 진중에서 병사하여 요시노부(慶喜)가 제15대 장군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쵸슈 출병은 중지되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고메이 천황(孝明 天皇)이 급사하고, 1867년에 1월에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이 황위에 올랐다. 오오쿠보와 사이고 등은 조정의 권위 회복을 바라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와도 연결하여 막부 타도를 계획했고, 그해 10월 마침내 막부토벌의 밀칙이 사쓰마 쵸슈 양 번에 내려졌다.
한편 도사번은 막부토벌의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요시노부(慶喜)에게 조정에로의 정권 반환을 권고했고, 요시노부가 이를 받아들여 대정봉환(大政奉還 ; 다이세이호오칸, 또는 태정봉환)을 청한 것이 바로 막부토벌의 밀칙이 내려진 바로 같은 날이었다. 이렇게 하여 약 700년에 걸친 무가 정치는 종막을 고했다.
* 일본은 무려 무신정권이 700년이나 계속되었다. 가마쿠라막부(우리나라 고려 때) → 아시카가막부(조선전기)→ 도구가와막부(조선후기) 군사정권이 무려 700년 계속된 나라는 세계에서 일본 뿐이다. 이런 연유로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이 체질화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군사정권의 순기능도 있는 것이니까.
▣ 메이지 유신 ; 봉건제도의 폐지와 근대 산업의 육성
1830년대 이후, 동요가 심해지고 있었던 막번 체제는 개국을 계기로 급속히 그 위기가 심화되어 마침내 붕괴되었다. 도쿠가와씨는 대정봉환 뒤에도 여러 대명 연합 정권의 우두머리로서 그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가 못했다.
도쿠가와씨의 세력을 일소하려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의 토막파(討幕派)는 1867년 12월 9일 천황의 이름으로 왕정복고의 대호령(大號令)을 발하여 신정권을 수립했다.
귀족이나 무사가 정권의 빌미가 된 섭정(攝政), 관백(關白) 등의 관직과 막부(幕府 ; 바쿠후)는 폐지되었고, 천황 아래 총재, 의정, 참여 등이 설치되었다. 1868년 1월 초 천황의 직접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인수하고, 명치시대 라고 명하였으며 명치시대는 1912년 명치 45년까지 계속되었다. 1868년 가을 수도를 교토에서 도구가와 막부의 정치 중심지였던 에도(江戶)로 천도하고 수도 이름을 도쿄(東京)라고 명명하였다.
신정부는 정치개혁을 추진함과 동시에 민심의 통제와 장악에 힘쓰면서 9개월에 걸친 내전(보신전쟁 무진전쟁)으로 구 막부세력을 일소했다. 막부의 해체에서부터 신 정권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의 과정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라고 한다. 다이묘들은 정치적으로는 세력이 미약하게 되었고 상공업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자본주의 발전에 활약하였다. 각종 근대개혁이 신속하게 추진되어 일본이 드디어 열강의 반열이 되어 제국주의를 노골화 해갔다. ●
[여백] [용어] ; 기업과 메세나
안평대군이 간밤에 꾼 무릉도원의 아름다운 절경을 화폭에 담아 세대를 이어 찬사를 받고 있는 조선 전기 화가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 천재적인 재능으로 서양의 문화예술계에 큰 획을 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같은 예술가들은 한시대의 문화예술을 창조하고 후대에 문화적 유산으로 가치를 영위할 수 있도록 예술가의 뒤편에는 언제나 말없이 든든한 후원자들이 존재한다. 기업의 문화예술에 대한 보호와 지원 할동을 의미하는 단어가 메세나(mecenat)이다.
즉, 기업들이 재단이나 후원회 등 문화지원 활동을 통해 공연, 문학, 미술 등 모든 분야 문화예술의 발전을 돕고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을 말하는데, 이는 기업의 사회적 의무를 충당함과 더불어 신뢰를 얻거나 이미지를 제고하는 수단으로 넓혀지기도 한다. 기업의 가치경영의 일환으로 현대문화예술계의 발전을 위해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다리가 되어주고 있다.
. [일본인] 일본인과 경영철학 ☞ 조선일보 [Weekly BIZ] 2011.07.09. 이지훈 경제부장이 일본의 석학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郞) 교수]와 대담한 내용의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郞·76) 교수는 히토쓰바시(一橋)대 명예교수로 일본의 경영 석학이며, 2008년에는 월스트리트저널이‘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구루(guru·사상적 지도자) 20명’에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 2011년 3·11 대지진 이후 일본이 세 번째의 '잃어버린 10년'을 맞는 게 아니냐는 비관론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노나카 교수는 일본의 숨은 힘을 은근히 자랑했다. 일본이 초식계(草食系)라면 한국은 육식계(肉食系)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육식계는 아니지만, 끈질긴 측면이 있다. 끊임없이 탁월한 전문기술자(쇼쿠닌, 職人)의 도(道)를 추구하는 강점이 있다.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좀처럼 흉내를 낼 수도 없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혁신을 매일 매일 축적해 매우 질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부품이나 소재 같은 게 매우 강하다. 그것은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니까.
-노나카 교수는 "일본이 초식계(草食系)라면 한국은 육식계(肉食系)라고 말한다. 일본이 초식계라니.... 선듯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삼성은 철저하게 일본에서 배웠다. 동시에 철저하게 분석했다. 삼성은 글로벌화와 스피드에서 일본을 넘어섰다. 지역전문가 제도까지 두면서 정말로 현장에 밀착했다. 일본은 글로벌과 현장의 지(知)에서 삼성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삼성의 약점은 '빨리빨리' 문화는 속도가 빠르면서 동시에 매우 엄격하다. 사람이 계속 긴장만 하면 피로가 오게 마련인데 앞으로는 어떨까 싶다. 한국이 철저하게 일본을 모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분석하며 디지털화·모듈화했다고 인정한다.
◇ 최근 일본 경제가 부진한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 디지털화와 모듈화다. 둘째, 스피드와 글로벌화다. 일본은 글로벌화에 늦었다. 글로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계 모두가 일본이 높은 품질을 자랑하는 고도의 상품을 원하는 것은 아닌데, 일본은 쇼쿠닌(職人 ; 전문기술자)의 관점에서 일본의 기준을 세계에 고집했다. '기술 오타쿠'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바람에 세계 시장과 눈높이가 맞지 않게 되어 고립됐다.
일본이 글로벌화에 늦었던 이유로 오만(傲慢)과 과거의 성공 체험이다. 성공이 실패의 원인이 된 셈이다. 일본의 부진을 가져온 바로 그 쇼쿠닌, 아날로그, 초식계 문화가 언젠가 다시 일본의 부흥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창업자를 중심으로 톱-다운(top-down)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빨랐던 반면 일본은 바텀업(bottom-up)구조라 속도가 느렸다. 그러나 그는 "혁신이라고 하는 것은 톱다운보다는 바텀업일 것이다.
◇ 일본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리더다.
지금 일본에는 다양한 회사와 다양한 지식이 있다. 그것을 종합할 수 있는 리더 혹은 프로듀서, 프로젝트 리더가 필요하다.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나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혼다자동차 창업자처럼 지(知)를 종합할 수 있는 리더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보충]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 1835~1867)는 1866년 도사(土佐)의 번사로 어려운 정치적국면의 仲裁자로 능력을 발휘했다. 도구가와 막부 말기에 반도구가와 진영을 결합시키고, 시류의 변화에 따라서 천황에게 정권을 자진 이양한 태정봉환을 유도한 업적이 있다.
료오마의 중재로 서로 반목했던 사쓰마와 쵸슈 양번이 반막부로 일치하여, 번이 군사협력을 위주로 사쓰마ㆍ`쵸슈 동맹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일본은 그 동안 '모노즈쿠리(장인정신)에서 '고토즈쿠리' 라는 애플과 같이 디자인·소프트웨어·서비스를 종합해 소비자에게 높은 가치의 체험을 주는 것'으로 옮겨가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보충] 본인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 리더 십이 부족해서 수상도 자주 교체되고, 천황제 하에서 수상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정치제도에서도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 일본식 경영의 부활을 믿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식 경영의 신화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미국식 경영은 왜 무너지고 있는가? 미국식 경영은 이익을 어떻게 극대화 하느냐 하는 경제학적인 사고인데, 무한경쟁이라고 하는 이상향이 있고,
거기서는 누구도 초과 이익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일부러 균형을 깨는 불완전 상태를 만들어 이익을 얻는다는 생각이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이라고 하는 게 바로 그렇다. 그러나 엔론에서 서브프라임까지 차례 차례 이런 생각이 파탄을 맞고 있다.
◇ 나(노나카 교수)는 '미덕(美德)의 경영'을 강조한다. 단순히 이윤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가치와 합치하는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 경영말이다.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다. 금전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가치가 될 수 없다. 공동체 속에서 탁월성(卓越性·excellence)을 무한히 추구하면서 자신을 완성시키는 과정, 그것이 경영이다.
◇ 경영이라고 하는 것은 비전(vision)이 있어야 한다. 비전이란 것은 좀 더 큰 사회적 관계라고 할까요. 공동선(共同善·common good)을 실현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개별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비전을 추구하는 결과로 공동선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결과적으로 이익으로 연결된다. 공동선을 추구하다 보면 이익으로 연결되는 이유 중 하나로 사회와의 관계성이 깊어지면서 혁신의 가능성이 커진다.
개별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다는 차원이 되면 사회와의 관계성이 매우 넓어지게 된다. 최근 이러한 것을 '에코시스템(eco system·생태계)'이라고도 표현한다.
◇ 기업과 사회의 관계성이 넓어짐에 따라 대중의 지식이 공유되고 융합돼 혁신의 가능성이 매우 커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보다 큰 이익을 창출할 가능성이 커진다. 세상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이 있으면 직원들도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는 동기부여도 된다.
GE에서는 에코매지네이션(ecomagination·환경친화적 상상력)이라는 말을 쓴다. 에콜로지(생태계)와 이매지네이션(상상력)을 결합한 용어이다. 이런 미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담은 표현이다. 이런 목표를 보면 직원들이 절로 동기부여가 되고, 큰 목표를 향해서 나서게 되면서 관계성이 커져 혁신(革新)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를 쓴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주의자다. 우리는 사회의 공동선에 영향을 받았고, 끊임없이 공동선을 증진해야 한다. 철학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계보를 잇고 있다.
◇ 미덕이란 무엇인가. 철학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프로네시스(phronesis)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공익을 위해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능력이다. 영어로 하면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 신중하게 실천하는 것(prudence)이 된다. 일본어로 한다면 현려(賢慮), 그러니까 미덕은 현자(賢者)의 사려분별을 뜻한다. 공동체의 선(善), 공동선(共同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덕은 가치다. 가치는 절대로 수단이 아니다. 가치는 그것 자체를 추구하는 것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이다. 행복이나 자기실현이 그렇다. 반대로 돈은 언제나 수단일 뿐이다. 절대로 가치가 아니다.
◇ 기업 이윤과 공동선은 공존할 수 있다. 대립과 모순이 생길 경우 높은 차원에서 대립을 융합하고,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신천지(新天地)가 열린다. 변증법을 거치면서 기업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어떤 미래를 만들겠다고 하는 비전이 중요하다.
미덕의 경영이란 기업이 번 돈으로 사회에 공헌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기업의 비전 그 자체가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다.
◇ 미덕의 경영 뿌리를 일본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미덕의 경영은 공동선을 향하여 탁월성을 무한히 높여가는 과정이다. 메이지유신 당시의 하급 무사들이 그랬다.
하급 무사들, 결코 지위가 높지 않은 중간관리자(middle manager)인 그들은 공동선을 위한 무한한 자기희생의 무사도(武士道)를 발휘했다. 사카모토 료마가 대표적이다.
◇ 미국식 경영이 기업을 '돈 버는 기계(money making machine)'로 취급했기 때문에 세상도,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들었다. 각자 이익 위해 달리면 모두 득 본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사태를 보라 ‘자유시장주의’는 거짓말이다.
미국은 원래 청교도정신이 강했다. 특히 동부를 중심으로 퓨리터니즘(puritanism)이 있었다. 일본의 쇼쿠닌(職人)처럼 투철한 장인정신을 가진 전문 기술자도 많았다. 그래서 물건을 남달리 잘 만들었다.
하지만 경제의 축이 제조업에서 금융업으로 옮겨가면서 암묵지를 잃어버리게 됐다. 암묵지는 기업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금융공학과 같이 IT 기술로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지식에만 몰두했다. 그러다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교수의 독특한 표현인 암묵지(暗默知)란 표현하기 힘든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지식, 뛰어난 요리사의 손맛과 같이 스스로 배우기도 어렵고, 남에게 전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암묵지의 축적은 시간이 걸린다. ]
◇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보이지 않는 신(神)의 손에 의해 사회의 이익으로 연결된다는 가설이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 애플과 같은 기업과 스티브 잡스와 같은 기업가가 있기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한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 기술과 인문학의 접점에 서 있는 회사다. 좋은 제품을 통해 좋은 문화를 온 세상에 퍼뜨린다. 좋은 문화를 온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좋은 제품을 만든다. 그게 애플의 비전이자 그들이 추구하는 공동선이다. 기술과 예술이 함께 있다.
애플은 아주 세밀한 것까지 알고 있는 쇼쿠닌(職人)이기도 하다. 그들의 디자인을 보세요. 아름다움이 들어있다. 아이팟(i-Pod)을 보세요. 액정, CPU(중앙처리장치), 소프트웨어라는 물건의 집합체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걸로 놀게 하고, 일하게 한다. 유니크한 경험이라는 가치를 물건 속에 담았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요. 돈 버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캘리그라피(calligraphy·서체)에 관심을 뒀었다. 이때 배운 서체를 애플의 폰트(font) 개발에 활용했다. 아날로그 지식이 디지털 지식과 결합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야말로 실천적 지혜를 가진 리더다. 스티브 잡스와 혼다 소이치로는 정말 닮은 점이 많다. ●
2011.청천산악회, 하계일본 등산, 사진지상보고
▣ 일본 시모노세키 근교의 산 ; 추길대(아키요시다이) 특징 ; 산은 높지 않았고, 화산 카르스트지형 국립공원 나무가 자라지 못해, 초원을 이룸.
▣ 일정 ; 2011. 08.18~21, 왕복 부관 훼리 배편
* 18일(목), 저녁에 출발, 배에서 1박, * 19일(금), 추길대 등산, 추방동 종유동굴 관람, 유모토 온천 1박 * 20일 각도(츠노시마) 유원지, 시모노세키 시내 일원 관람후 저녁배를 탐. * 20일 배에서 1박하고, 21일 아침 8시경 부산항에서 해산함,
부관훼리 배에서 바라본 새벽의 시모노세키항 전경,
角島(츠노시마) 진입 다리
츠노시마는 문주란이 자라며, 제주도와 비슷하나 규모가 작고, 아직 개발부진
유모토 온천마을, 일본은 오수가 개울이나 하천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하수로가 따로 있어서 개울이나 강이 맑고 깨끗하다. 개울가에 노천 족탕도 있었다.
임종성 박사와 이재익 시인 가족여행촌이라는 곳에서 출발하였다. 2011. 8월 19일(금), 시모노세키시 근교의 秋吉臺(아키요시다이)의 용호봉을 등산하다. 해발 425m 로 야산이다.
온 산에 화산석이 널려있다. 추길대 정상인 용호봉 3억년전 형성된 화산 카르스트지형으로 광활한 초원의 국립공원이다.
매년 2월 제3일요일에 이 산의 초원지대에 불을 놓아서, 초원으로 가꾼다. 우리나라도 창녕 화왕산 억새밭에 불을 질러서 가꾸는 것과 같다. 가을에 풀이 시들고 나면 돌들은 더 드러나 돋보인다.
나무는 귀해서 그늘이 없고, 산죽이 싱그럽다. 움푹 움푹 패인 곳은 화산 분화구였던듯...특별이 나무가 오목한 곳은 마치 오아시스를 연상한다. 언덕 위의 양떼같은 구름떼를 만났으나 날씨는 좋았다.
추길대 전망휴게소에 버스가 와서 기다렸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조금 내려가면, 이 산의 중턱에 추방동(秋芳洞 ; 아키요시도)이라는 종유동굴이 있었다.
종유동굴 추방동(秋芳洞 ; 아키요시도), 규모가 아주 크고 맞뚫린 동굴. 한쪽으로 들어가서 반대쪽으로 나온다. 굴속에는 계속 개울이 흘러서 마치 어두운 개울가를 걷는 기분. 일본의 전기사정이 안좋아서, 동굴의 조명은 대체로 어두워 제대로 경치를 보기가 어렵다. 아키요시도 종유동굴중에서 이곳이 최고다.
동굴내부는 아기자기한 멋은 부족하다. 그러나 동굴 규모가 엄청 넓어서 기어들어가거나 올라가고 내려가는 그런 불편은 없다. 개울이 흘러서 개울을 따라서 편하게 걸어 갈 수있다. 맞 뚫려서 공기도 탁하지 않다.
아키요시도 종유동굴, 굴이 맞 뚫려서 양쪽에서 입장할 수가 있다. 우리가 나왔던 출구.
시모노세키 功山寺 대웅전 격인데, 절은 관광자원으로만 개방 될 뿐, 실제로 운영되지 않고 대웅전 문이 폐쇄되어 있다. 한국 절에 비하여 미적 감각이 현저히 떨어 진다. 지붕의 처마 끝이 지나치게 뽀족하고 날카롭다. 이 절은 빈절이다. 일본에서 불교가 쇠퇴해지는 이유는 국수적인 신도의 발달 때문이다.
개방해 놓은 어느집 정원, 차도 파는 모양인데, 시간이 없어서.... 배롱나무꽃이 여름 정취를 잘 나타낸다. 아름다운 정원이지만, 그런데 너무 복잡하다. 여백이 없어서 아쉽다. 좁은 공간이니 어쩔 수는 없지만...
메이지 유신의 숨가빴던 순간을 회상할 수있는 역사적 편린을 이곳, 시모노세키의 옛날 시가지 장부에서 만나게 되어 뜻깊다. 메이지유신(1868)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정치적으로 적극 지원한 豊永長吉의 생가. 료마는 정치문제를 협상조정하는 타협의 명수.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 1835~1867)는 1866년 도사(土佐)의 번사로 어려운 정치적국면의 仲裁자로 능력을 발휘했다. 도구가와 막부 말기에 반도구가와 진영을 결합시키고, 시류의 변화에 따라서 천황에게 정권을 자진 이양한 태정봉환을 유도한 업적이 있다. 료오마의 중재로 서로 반목했던 사쓰마와 쵸슈 양번이 반막부로 일치하여, 번이 군사협력을 위주로 사쓰마ㆍ`쵸슈 동맹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내가 일본에서 유일하게 본 교회, 아주 작다. 교회가 거의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기독교인이 국민의 0.5% 정도라나...거의 믿지 않는다.
도구가와 정권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썼다. 도구가와 정권시대, 1637년~38년에 기독교계 농민 3만6천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기독교인과의 전쟁에서 이들을 한명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세를 펴지 못했다.
관문대교가 보인다. 저 관문대교를 통과하면서 일본의 내해 세도나이카이를 통과해서 오사카로 뱃길이 이어진다.
시모노세키 관문대교 부근 바닷가, 여기서 김종필 전 국무총리 이름을 만난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소원해진 두 나라 국교를 재개하고 문물을 교류하기 위해서 약 400년 전 17세기 초, 1607년부터 1811년 12회까지 파견되었다. 마지막이었던 제 12회째는 양국이 재정이 어려워 쓰시마까까지만 파견되었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였다. 그 뒤 육로로 교토나, 도쿄까지 갔다.
시모노세키의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한일의원연맹, 회장 김종필)
이 곳 시모노세키 항은 당시 지명으로 아카마가세키라고 했으며, 통사사 일행이 11회 오고 갈 때 경유지로 상륙하여 묵어갔다. 그것을 기념하여 한일의원 연맹 회장이신 김종필 전 국무총리 중심으로 통신사가 본토에 첫 상륙지인 아카마가세키의 부둣가에 건립하였다. 지금의 아카마 신궁은 당시는 아미타사(阿彌陀寺)로 통신사 접대소 또는 정사 (正使)의 숙박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일전쟁(1894~95)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과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이 바로 이곳,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이 건물은 [일청강화기념관]이다, 일본은 영광의 장소이고, 청 즉 중국은 치욕의 장소가 되는 곳이다.
이 아카마 신궁은 일본 국가신, 천황 조상신을 모시는 신도의 절이라고 보면된다. 그래서 여기는 뭣하러 오나, 하고 불편해 하는 분도 보았다. 사실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하나 있다. 이부근에 있는 바닷가에 조선통신사 상륙비가 있다
당시에는 신궁이 아니고 여기가 아미타사 라는 불교 사원이었는데. 우리 통사사 일행 특히 정사 부사급이 이 절에 숙소로 묵어갔다는 것이다. 우리 통신사의 그 노고를 생각하면서 여기를 방문하면 의미가 깊죠. 무려 11회의 통신사 들이 수백년에 걸쳐서 이따금씩.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엿보고, 이해내지 비판도 할 수있고.... 그런데 일본인들은 미적 감각이 참 떨어지는 것같다. 색상도 거북한 붉은 원색이고 지붕 모양이나 탑모양을 좀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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