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는 동안 후회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미련은 남아있다.
나는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거나 비굴하게 살지는 않았다.
너무나 강직한 내 성격 때문이었을까?
68.1.15.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1 전라북도지방공무원(익산군 황등면)으로
임용되었지만 공무원신원조회를 거치지 아니하고 임용했다는 사유로 전라북도의
감사에 지적되어 임용이 취소되고 신원조회를 거쳐 7.1일자로 재임용되었는데
2달간의 월급을 반납하라는 익산군수 명령에 대하여 나는 하자있는 행정행위를 한
사람은 임용권자인 당신이지 내가 아니며 나는 당신 임용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근무
하였음으로 반납할 수 없다며 정면으로 투쟁하다가 그해 12.1자로 사직을 하고,
국가공무원(운수행정직)으로 임용되어 광주역에 근무하게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는 72.4.1 국가공무원(일반행정직)으로 병무청에 임용되어 3번째로
직장을 옮겼으며 전 경력을 인정하여 조건부해제와 동시 행정서기로 승진해 주겠다며
5만원을 요구했지만 나는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는 근무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당시 상공부로 전출을 희망했으나
상공부로의 전출을 동의하는 조건으로 30만원을 요구했지만 나는 그 요구를 거부하였고,
결국 상공부로의 전직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행정서기로 진급함에 있어서 4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이다.
3달 월급정도면 행정서기로 진급할 수 있었고 2냔정도의 월급액이면 상공부로의 전출이
가능하였음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에 4년이 라는 시간을 허비하였으니
바보가 아니었을까?
행정서기에서 행정주사보로 진급할 때도 남들은 인사를 해야 인사가 이루워 진다며 인사를
해야 한다는데 나는 이를 거부하고 승진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투쟁하다가 또다시 선두
주자인 동기보다 2년이나 늦게 진급하게 된 것이다.
전체의 공직생활에서 아마도 6년이라는 시간은 불의와 타협하지 못해 허비하게 된 것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올림픽 기간 중에 다른 부처로 옮겨 엄청난 고생을 한 후 6급 행정주사로
진급을 하고 다시 병무청에 전입하였지만 그 텃세로 많은 고전을 하게 되었다.
6급에서 근무성적평정을 “수”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내신점수 93점”으로 사무관 승진시험을
보게 되었다. 나는 단 한번만 승진시험을 보겠다고 다짐하였지만 막상 1번은 내신 성적이
103점이었으니 무려 10점 차이였다. 시험문제 50개중 6개 이상을 더 맞아야 내가 그 사람을
제치고 합격할 수 있는 점수 차이었던 것이다.
어쨋던 사무관 승진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기관에 진급했고 입사
동기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만 3급 부이사관으로 퇴직을하였지만, 내가 그 6년이라는 허송
기간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2급 이사관까지를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70-90년대의 정착되지 못한 인사제도가 남긴 비애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동조한 많은 동료직원들이 숙정되고 정직하다고 할 수 있는 직원들만 살아
남았지만 그 후유증은 너무나도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죽을 때까지도 미련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살아온 내 공직생활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정도를 걸은 것이며 그렇기에 “홍조근정훈장” 도 받은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