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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른신학 바른신앙 원문보기 글쓴이: 이성민
여호수아(1): 요단강을 건넘 (1:1-5:12) | ||||||||||||||||||||||||||||||||||||||||||||||||||||||||||||||||
2.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 3. 여호수아서의 기록 시기 4. 여호수아서의 내용 개관
첫째 이야기: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1:1-5:11) 1. 요단강 도하 지시(1장) (참고 자료: 지도보기) 1-1. 선물로서의 땅(1:1-6)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특별한 임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 명칭이다. 모세의 임종 시기는 B. C. 1405년경으로 추정된다(대하 6:1). 모세의 죽음은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인 34장에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호수아서를 모세오경에 연결시켜줄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서가 모세 오경의 계속임을 보여주고 있다. '시종'('메솨레트')이란 말은 주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본문에서는 개인적인 업무 보좌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보좌관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 이를 '부관'으로 번역하여 그 의미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 사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기 전 모세의 부관으로서 이스라엘의 제 2인자로 활약하였다(출 24:13;33:11; 민 11:28; 신 1:38). 여호수아가 성경 역사의 표면에 처음 나타나기는 출애굽 직후 아말렉과 맞붙은 르비딤 전투(출 17:8-16)에서였다. 그후 그는 시내 산에서 보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모세와 동행을 했으며(출 24:13,14), 가나안 정탐 시에는 갈렙과 함께 신앙적인 보고를 하였다(민18:8;14:6-9). 이와 같이 여호수아는 모세를 보좌하면서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쌓아갔다. 마침내 모세 말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세의 후계자로 지명하셨으며(민 27:15-23; 신 31:3,7,14), 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출 17:9; 민 13:16 참조). 아마도 여호수아는 모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통해 지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2).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3),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4)."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을 건널 것을 지시하셨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선물이며, 동시에 자신의 약속을 변치 않고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준다'(노텐)는 말은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지금 막 주시려고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미 약속하신 대로 그들이 발로 밟는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은 과거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내용(신 11:24,25)을 상기시키심으로써, 약속을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여 주셨다(Goslinga). 가나안을 차지하는 것은 미래에 속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주었다'(네타틴)고 완료형을 사용함으로써 가나안을 이미 주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시키시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이 없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 안에서 이미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4절은 장차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땅의 경계가 제시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은 남쪽으로는 가나안 동남쪽에 위치한 신(Zin) 광야, 서쪽으로는 해지는 편인 대해(지중해), 동쪽으로는 큰 강(유브라데 강), 그리고 북쪽으로는 레바논 산맥이 그 경계를 이루고 있다. 헷 족속은 가나안 7족속 중의 하나로(신 1:7), 이전부터 가나안 땅에 거주해 왔던 큰 족속이었다(창 23:3,4; 26:34; 27:46). 이 족속은 본래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로서(창 10:15) B. C. 2000년경에 이미 소아시아 전역에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발전하고 있었다. 그후 이들 족속은 가나안 땅으로까지 들어와 가나안 정복 당시에는 상당히 넓은 영토에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헷 족속의 온 땅'은 가나안 영토를 의미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여기 제시된 가나안 영토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비로 차지하였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5),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6)."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너를 능히 당할 자'라는 말은 원래 '네 앞에 설 수 있는 자'란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설 수 없듯이, 여호수아 앞에 아무도 대적하여 설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확신을 주신 것은 곧 전개될 가나안 정복 전쟁시 무수한 원수들과의 전투가 있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계셨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동행해 주실 것이다. 모세의 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목격한 여호수아는 지금 이 말씀을 통해 큰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적들이 여호수아를 당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약속의 말씀을 남기셨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마 1:23)사상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하나의 큰 주제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일평생 떠나지 않고 그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친히 약속해 주셨다. < 적용 및 교훈 > 2. 지도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격려(믿음)
'강하게 하라'('하자크)는 말은 손에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하며 '굳건하라'는 말이고, '담대히 하라'('아마츠')는 말은 '무릎에 힘이 있는 상태'를 말하며 '용기를 가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된 땅을 상속받도록 할 사람이라고 강조하신다. 이 땅은 이미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땅이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승리와 형통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바로 모세가 명한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치우친다'는 말('수르')은 '빗나간다', '방향을 돌이킨다' 말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명한 말씀을 준수하되 그것으로부터 이탈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말씀을 준수할 때에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형통한다'는 말('사칼')은 '번영한다', '성공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하신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말은 '잊지 않도록 항상 외우라'는 의미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떠난다'는 말('무쉬')은 '어기다', '벗어나다'라는 뜻으로서, 계속적으로 말씀 안에 거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지시하신다. 묵상한다는 말(하가)은 생활에서의 적용 및 실천을 하기 위해서 율법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시편 기자도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말하였다(시 1:2). 하나님은 이 명령이 바로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을 상기시킨다. 여호수아는 이 명령이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만 확인하면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적용 및 교훈 > 2. 말씀 준수의 결과(형통)
* 백성에 대한 지시(10-11)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백성의 유사들을 회집시켰다. 유사들(쇼테림)은 '글쓰는 사람' 또는 '서기관'을 뜻한다. 이들은 군사 지도자들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회집시켜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또 중요한 일들을 기록(記錄)하는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들(officers)을 말하는 것 같다. 여호수아는 유사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진을 두루 다니며 요단 강을 건널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전하라고 명령했다. '두루 다닌다'('아바르'는 말은 '지나지 않는 곳이 없도록 돌아다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전하는 소식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야 하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양식을 예비하도록 지시했다. 이 양식은 일종의 군량미(軍糧米)로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있어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의 소산(所産)을 먹기 전까지 만나를 계속 공급하셨다(5: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식을 준비하게 하신 것은 1)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사람 사는 땅'(출 16:35)에 이르렀으며, 2)전쟁의 소란 중에 준비된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이제 3일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대한 지시(12-15)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은 두 지파 반(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도 요단 건너편의 가나안 전쟁에 참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들은 요단 동편 땅을 다른 지파들보다 먼저 차지한 대신에 가나안 본토 정복 사업에 선봉에 서야 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다른 지파들도 모두 자기의 땅을 얻게 될 때까지 선봉에 함께 싸울 것을 부탁했다. 4:13에 의하면 요단을 건너 전쟁에 참여한 두 지파 반의 수는 4만 명으로 나타난다. (민 26:7,18,34)에 의하면 이들 지파 중 20세 이상으로서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총 11만명이었다. 따라서 7만명은 처자와 가축을 보호하고 그들이 분배받은 요단 동편 땅을 지키기 위해 뒤에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Keil & Delitzsch). 무장하라는 말(하무쉼)은 '다섯'을 말하는 하메쉬란 말에서 파생된 말로 '임전 태세를 갖추다'란 의미이다. 이 말의 의미로 인해 학자들 중에는 두 지파 반이 다섯 열로 부대를 편성했거나 아니면 다섯 명이 한 조(組)가 되는 전투대형을 갖추었을 것으리고 주장하기도 한다(de Vaux).
요단에서 기업을 먼저 얻은 두 지파 반의 대표들은 여호수아가 명한 모든 것을 행하고, 그가 가라고 하는 모든 장소에 기꺼이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두 번이나 나오는 '모든'(콜)이란 말이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으나 원문에는 포함되어 있다('명하신 모든 것은... 보내시는 모든 곳에는...). 이것은 두 지파 반의 대표들이 자기들이 모세와 더불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그 약속을 수행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실 것과, 모든 백성이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후계자에게 용기를 가질 것을 부탁하였다. < 적용과 교훈 > 2. 여리고 정탐(2장) 2-1. 여리고 정탐 꾼 파견(1) 여호수아는 싯딤에 진을 친 후에 은밀하게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여리고 성과 그 땅을 정탐하게 하였다. 싯딤은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이루는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인데, 두 줄기의 개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진(陣)을 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싯딤의 본래 이름은 아벨싯딤 이었으며, 이 곳은 요단 동편 12km지점에 있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내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다. 여호수아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 파견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민 13:8) 그는 정탐꾼이 겪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알지 못하게 추진한 것은 그들이 좋지 못한 보고를 하게 되면 모세 때처럼 낙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고 지시했다. '엿보다'는 말('라아')은 '주의 깊게 보다', '조심스럽게 관찰한다'는 말이다. 그 정탐꾼들은 그 성에 들어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머물렀다. 본문에서 기생이라고 번역된 말('조나')은 '간음하다', '매춘하다'를 뜻하는 '자나'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므로 라합은 창녀였음이 분명하다. '기생의 집'은 각양 각색의 사람이 모여 사담을 나누는 곳이었기 때문에 여리고 주민의 민심이나 정치, 군사적 동태를 파악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그리고 기생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15절) 성을 조망하거나 쉽게 탈출할 수 있는 곳이었다.
* 정탐꾼을 구한 기생 라합(2-7)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침입했다는 소식은 금방 여리고 왕의 귀에 들어갔다. 당시 중. 서부 팔레스틴 지역은 명목상 애굽의 지배하게 있었지만, 실상은 애굽의 왕권이 이 지역에 대해서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Leon Wood). 당시의 가나안은 각각 그 자체의 왕들을 가진 성읍 국가(City States)구성되어 있었다(12:9; 삿 1:7). 여리고 왕은 이런 여러 왕들 가운데 하나로서 여리고를 다스렸던 통치자였다. 정탐꾼이 성에 들어가자마자 여리고 왕이 그 소식을 보고 받은 것을 보면 여리고의 병사들이 그 성을 매우 철저하게 경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요단 강 가까이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조만간 요단 강을 건너 진격해 올 것이라는 첩보를 받고 비상 경계를 했을 것이다(Calvin).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그녀의 집에 들어간 사람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그녀의 집에 들어간 사람은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침입한 첩자라는 것을 밝혔다. '탐지한다'는 말(하파르)은 '깊이 파다', '구석구석 수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합은 그 소식을 듣고 두 정탐꾼을 은밀하게 숨겨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자기 집에 온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는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그녀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자기도 모르지만 해질 무렵에 집을 떠났기 때문에 급히 따라가면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녀가 정탐꾼을 속이기 위해서 재치를 부린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그냥 모른다고 했었다면 군사들은 그녀의 집을 수색하게 되었을 것이다. 라합의 이러한 거짓말에 대한 평가는 각각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라합의 거짓말은 신앙과 믿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죄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Lange, Woudstra, Holwerda).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라합의 거짓말은 방법을 보면 죄가 되지만, 그 동기는 신앙적이었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다고 한다(Augustine, Calvin, Keil). 신약 기자들은 라합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히 11:31; 약 2:25). 그러나 그녀가 사용한 방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로 볼 때에 우리는 라합이 사용한 방법, 곧 그 거짓말까지 의로운 행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라합은 그 정탐꾼들을 지붕 위에 이미 숨기고 있었다. 지붕('가그')은 '건물의 가장 높은 곳'을 뜻하는데, 대개 고대 근동 지방의 지붕은 뾰족하지 않고 평평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휴식, 담소, 기도 등의 활동을 할 수 있었다(Lange). '삼대'는 '삼 줄기'를 말하는데, '삼'은 물 속에서 자라는 식물로, 보통 그 줄기의 길이가 0.9-1.2m이다. 따라서 햇볕에 말리기 위해 지붕 위에 널어놓은 삼대는 정탐꾼을 숨기기에 적합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 p. 34). 라합의 말을 들은 군사들은 정탐꾼을 잡기 위해 신속하게 성문을 나와 요단 나루턱까지 달려갔다. '나루터' 앞에 관사('하')가 있는 것으로 보면 이 나루터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던 여리고 근처의 나루터였을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 p. 35). 여리고 군사들은 자기들이 나간 후에 곧 성문을 닫았다. 성문을 이렇게 민첩하게 닫은 것은 정탐꾼들이 성내에 남아 있을 경우, 그들이 도주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Keil). * 라합의 고백: 정복에 대한 확신(8-11) 여리고 성의 군사들을 따돌리는 데에 성공한 라합은 두 정탐꾼이 잠들기 전에 지붕으로 올라갔다. 당시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상 지붕은 평평했으며 외부 층계로부터 올라갈 수 있었다. 이 지붕은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했던 관계로 빨래거리나 곡식, 그리고 삼대 등을 건조시키는데 적합했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이 곳이 시원했기 때문에 흔히 이 지붕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라합은 두 정탐꾼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여리고 땅을 이스라엘 백서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 여인 기생 라합의 입에서 나온 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여정, 그리고 요단 동편 아모리 족속 정벌 사건 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신의 능력이 이미 가나안인들에게 까지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Knobel). 그러나 이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에 관한 지식은 영원토록 계시는 인격적인 유일 신이라기 보다는 능력이 탁월한 히브리인들의 민족 신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 가나안인들 대부분은 여호와를 경외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라합은 여호와의 전능성을 믿었으며(11), 나아가 그 믿음에 근거하여 여호와께 은혜를 구할 만큼 여호와의 자비하심도 알고 있었다(12-13). 이로 인해 라합은 결국 믿음의 소유자로 후일 인정받게 있었다(히 11:31; 약 2:25). 라합은 이 땅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며 마음에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라합은 이스라엘을 "너희"라고 부르고 여리고 백성을 '우리"라고 부름으로써 두 민족간에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심히 두려워했던 것(민 13:33)과는 반대로 이제는 가나안 거민이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간담이 녹는다('무구')는 말은 '녹아(물갈이)흘러 내린다'(7:5)는 말인데,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이 말 앞에 '간담이'라는 말은 삽입하여 그 의미를 살리고 있다. 라합은 여리고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1)홍해 물을 마르게 한 사건(출 14:15-22)과 (2) 요단 동편의 아모리 두 왕이 전멸 당한 사건(민 21:21-35)이었다. 전멸시킨 일(헤헤람템)은 '저주하다', '완전히 파괴시키다'를 뜻하는 동사 '하람'에서 파생되었다. 이 동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로 인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철저히 파괴하여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Lange). 이 단어는 여호수아의 군대가 진멸한 거의 모든 도시들에 대해 적용되었다.(여리고, 6:21; 아이, 8:26; 막게다, 10:28; 하솔, 11:11등). 마음이 녹았다('마사스')는 말은 큰 공포나 두려움으로 인해 완전히 절망하는 것을 말한다(5:1;7:5; Carr).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는 말은 '영혼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로서, 대항하거나 싸울 용기를 상실했다는 것을 말한다(NTV). 라합은 오직 여호와만이 상청하지에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위로는 하늘에 계시고,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KJV, RSV, NTV)이란 말이다. 라합은 여호와께서 온 우주에 계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 라합의 요청과 정탐꾼들의 언약(12-14) 라합은 이미 여리고 성의 점령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구원을 받을 길을 준비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첩자들을 구원해 준 대신에 그들이 성을 점령할 때에 자기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살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선대한다'('헤세드')는 말은 상호 체결한 언약 관계에 충실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 말에는 자비와 친절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 라함은 자기 가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자기 목숨만을 구하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갖지 않았으며, 믿음으로 자기의 가족과 친척까지 구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려는 여리고 군사의 칼로부터 두 정탐꾼의 생명을 구해준 대신에, 이스라엘 군대의 칼로부터 자신과 그 가족들의 생명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이 일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가 이렇게 신의 이름으로 서약을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 군대가 성읍을 맹공격하다 보면 전쟁의 열기 때문에 혹시라도 약속한 바를 잊고 지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으로 맹세할 경우, 신을 맹세의 보증인으로 삼는 결과가 되어 그 맹세의 신빙성과 성결성이 보증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그 맹세를 어겼을 경우, 신이 친히 그 위증에 대한 책임을 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Calvin).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어떤 중요한 일을 서약하거나 확증할 때 그들이 믿는 신(神)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녀는 정탐꾼들에게 진실한 표를 요구했다. 진실한 표(오트 에메트)는 '진리의 증표'(a true token, a sure sign)란 말로서 이 증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는 맹세 자체를 가리킨다(Woudstra, Keil). 이와 같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은 자기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종종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그 가족과 친족 전체가 구원을 받게 되는 일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들은 만일 라합이 끝까지 신의를 지키고 이 일을 여리고 군사들에게 고발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생명을 대신해서라도 그녀와 그 가족을 지켜줄 것을 맹세했다. 그 들은 맹세의 보증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했다. 정탐꾼들은 라합이 그 일을 '누설치 않을 경우'를 조건으로 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녀를 보호할 것을 여호와 앞에 성실하게 맹세하였다. 인자하고 진실하게(헤세드 웨에메트) 대한다는 말은 약속한 한 대로 그녀를 구원해 줄 것을 말하고 있다. * 구원을 위한 약속(15-22) 라합은 그 약속을 믿고 두 정탐꾼을 성벽을 타고 줄로 달아 내려 도망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러한 일은 그녀의 집에 성벽 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서 고고학자 가스탕(J. Garstang)의 "여리고 발굴"(1930-1936) 보고에 의하면, 여호수아 당시의 여리고 성은 4.5m 간격의 두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때문에 두 성벽 사이에 큰 대들보를 올려놓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라합의 집도 분명 이러한 집들 중의 하나로서, 아마 그 집 들창이 외곽 성벽 쪽으로 나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바깥 벽 쪽으로 나 있는 집의 창문을 통해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城)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정탐꾼들이 잡히지 않도록 3일을 산에 가서 숨었다가 그 후에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을 추격하던 군사들이 2-3일 동안 철저하게 그 지역을 수색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여리고 북서쪽 지역에는 해발 450m가량의 산이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는 또한 많은 바위 및 동굴이 있어 은신처로서 적격이었다(Woudstra, J.P. Free). 따라서 라합은 정탐꾼들을 이곳으로 도피시켰을 것이다. 오늘날 일대 지역은 '예벨 콰란탈'(Jebel Qarantal)로 부르는데, 흔히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장소로 추정되기도 한다. 정탐꾼들은 라합이 그들에게 신실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그녀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1)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달 것 두 정탐꾼들은 그녀가 이러한 조건을 이행되지 못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서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Keil). 붉은 줄은 정탐꾼들을 달아 내린 '줄'을 말한다(Luther, Keil).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고 또한 라합과 그 권속을 구하게 될 이 붉은 줄에 특별한 생명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 같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 붉은 줄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 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 붉은 줄의 의미를 출애굽 직전 문설주에 뿌려진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Matthew Henry). 실로 성경 전체의 사상을 통해 볼 때 '붉은 색'은 생명과 구원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C. Vonk). 초대 교회의 교부 오리겐(Origen, 185? - 254?)은 라합의 가족들이 오직 집안에 있을 때에만 구원이 약속된 사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원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약속을 어겼을 때에는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갈 것이요'(레 20:9)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서, 곧 이 말은 '죽음에 대한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 또는 '너의 잘못(죄) 때문에 네가 죽는 것이다'란 뜻이다. 허물이 없다는 말('나카')은'짐을 벗다', '자유케 되다', '무죄하다'등의 의미이다. 즉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제시한 세 가지 조건중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을 경우,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의무'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님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대로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곧 바로 그들을 달아 내렸던 붉은 줄을 창가에 매어두었다. 이러한 라합의 모습은 즉각적이고 전적 순종의 모습이 돋보이고 있다. .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은 이러한 믿음과 즉각적인 순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합은 자신과 자신의 권속이 멸망으로부터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스라엘에 대한 전적 순종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라합의 이러한 순종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믿고 주님을 믿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으로 인해 라합은 결국 그리스도의 족보로 편입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마 1:5). 두 정탐꾼은 라합의 말을 좆아 사흘을 사에 숨어 있다가 이스라엘 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색을 하던 여리고 군사들은 정탐꾼들을 찾기 위해 '모든 길을 수색하다' 그들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여리고 성에서 요단 강까지의 거리는 불과 13km이며, 도보로는 3시간 남짓 소요되는 거리이다. 이 일대를 삼 일 동안이나 샅샅이 뒤졌다는 사실은 정탐꾼들을 체포하기 위해 여리고 성의 군사들이 안간힘을 썼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큰 실수는 정탐꾼들이 숨어 있는 '산'이 아닌 '길'만 뒤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흘 동안 산 속에서 꼼짝 말고 숨어 있으라는 라합의 충고(16절)가 주효했음을 알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정탐꾼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여리고 수색대들의 판단력과 눈을 닫아 버리셨다.
두 정탐꾼은 3일이 지난 후에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요단 강을 건너서 여호수아에게 가서 그들이 여리고 성에서 조사한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본문에서 "고했다'는 말(사파르)은 '조사하다', '쓰다', '수를 센다'는 말로서 이 말은 정탐꾼들이 보고 겪은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샅샅이 보고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보고한 내용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여리고 성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고 내용은 오래 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했던 보고 내용과 같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가나안 온 땅을 자기의 손에 붙이셨다고 보고했다. '붙였다'('나탄')는 말은 '주다', '양도하다', '위임하다' 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와께서 이 모든 땅을 우리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뜻이다. 정탐꾼들은 그 성 사람들이 이로 인해 간담이 넉았다고 보고했다. 두 정탐꾼이 이처럼 자신 있게 보고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라합의 정보(9, 11절)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간담이 녹았다는 말은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상황을 묘사할 때에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구체적인 신체 부위를 들어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표현하는 수사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 요약 및 교훈 > 3. 요단강 도하(3-5:1) 3-1. 요단 도하 준비(1-6)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여호수아는 대사(大事)를 앞두고 항상 최선을 다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 일찍 진을 정리하고 싯딤에서 출발하여 요단 강 가에 도착해서 그 곳에 진을 치고 그날 밤을 지냈다. 본문에서 떠났다고 번역된 말(나사)은 '천막 말뚝을 뽑다', '출발하다', '여행하다'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천막 생활을 하며 유랑하던 이스라엘 백서들의 역사적 생활 무대와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들은 다음 여행지로 갈 때에 천막 말뚝을 뽑아 천막을 걷어내고 다음 출발지로 향했다. 그리고 '유숙한다'('룬')는 말은 어떤 장소에서 밤을 보내려고 숙박하는 것을 말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곳에서 3일을 보냈다. 그들은 요단 강가에서 3일을 유숙하면서 요단 강 도하를 위해 마무리 준비를 하며 여호와의 지시를 기다렸다. 3일 후에 유사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면 그 뒤를 좆으라고 전달했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는 '법궤'(레 16:2), '증거궤'(출 30:6), '여호와의 궤'(수 4:11), '하나님의 궤'(삼상 3:3), '주의 능력의 궤'(대하 6:41)등으로 불렀다. 이 궤 속에는 십계명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담겨져 있었다(히 9:4; 왕상 8:9). 이 언약궤를 운반할 경우에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들이 직접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다(민 4:4-15). 그러나 특별히 중요한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직접 운반하기도 했다(신 31:9; 왕상 8:3, 6). 하나님은 중요한 행진을 하실 때에 한상 언약궤를 앞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뒤를 따르게 하셨다(민 10:33-36). 이러한 행진 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영적 싸움은 하나님의이도를 따를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 전령자들은 언약궤와 백성들의 사이가 약 2000규빗쯤 되게 하라고 전달했다. '상거'라는 말은 '멀리 나가다'는 뜻을 가진 '라하크'에서 파생한 형용사로 본문에서는 '...만큼의 거리거 떨어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보통 한 '규빗'은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거리를 말하며 약 45cm가 된다. 그러므로 2000 규빗은 약 900m 정도의 거리인데, 이 거리는 요단 강의 바깥 둑, 곧 엘 그호르(el-Ghor)에서 강바닥, 곧 에즈 조르(ez-Jor)에 이르는 거리이다. 이는 제사장들의 발이 강가에 닿았을 때(8절) 백성들은 여전히 바깥 강둑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이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언약궤를 따라가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에 대해 경외심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Calvin). 한편 후일 유대 랍비들은 본절에 언급된 바 백성들과 언약궤 사이의 거리를 근거로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허용 거리를 산출하기도 했다. 언약궤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법궤 운반시 웃사(Uzzah)가 무분별하게 법궤에 손을 댔다가 죽은 사건(삼하 6:6, 7)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가까이 했다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5).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행하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6)." 요단 강 도하를 앞두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 성결케 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서 성결은 의복을 세탁하거나(출 19:10, 14), 옷을 갈아입거나(창 35:2), 또는 여인을 멀리하는 것(출 35:2)과 같은 행위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그러한 준비를 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여호수아가 명령한 성결은 영적인 성결의 자세를 가다듬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Keil & Delitzsch,).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성결케 해야 하는 이유는 내일 그들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성결케 할 것을 지시하고,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 서서 나아갈고 명령을 했다. 본문에서 '앞서 행한다'는 말('리프네')는 단순히 '앞에서'(before) 행하라'는 뜻보다는 '선두에 서서 행하라"는 뜻이 더 강하다. 넘실대는 요단 강물에 첫 발을 내디디는 일은 큰 믿음과 용기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상징인 언약궤가 있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 하나님의 지시(7-8) 하나님은 모세가 죽은 후에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나타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통해서 용기를 주셨다(1:9).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다시 한번 그에게 크신 능력의 말씀으로 여호수아를 격려해주셨다. 왜냐하면 이 일은 큰 용기와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부터 여호수아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대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홍해 도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증거 했듯이(출 14:31), 요단 강 도하 사건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Keil & Delitzsch). 하나님께서는 요단 물가에 도착하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요단 강에 들어서라고 명령하라고 하셨다. 홍해 도하 기적 때에는 모세의 역할은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가리키고 전진할 것을 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단 도하에서의 여호수아의 역할은 제사장들에게 명령을 내려 앞으로 각 하는 일이었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들어서라'는 말('아마다')은 '서다', '머무르다'란 의미로서, 이 말은 제사장들이 요단 강에 들어가서 계속 서 있으라는 것을 말한다. * 여호와의 지시를 백성들에게 전함(9-13)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소집했다. '이리 오라'는 말('고슈')는 '끌어당기다', '가까이 가다'란 의미로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여호수아가 전할 말씀의 중요성을 암시하며, 백성들은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마 여호수아가 이 말을 전한 것은 백성의 대표자였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 여호와는 이방의 신과 같이 돌이나 흙으로 만들어 세운 신이 아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도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있는 7족속을 쫓아내심으로 자신이 살아 계신 분임을 나타낼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에 들어설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각 지파에 한 명씩 12명을 선택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온 땅의 주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을 밟고 멈추는 순간에 흐르던 요단강이 그치고, 위에서부터 쌓이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당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신을 민족신 내지는 지역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느 한 지역(민족)에서 다른 지역(민족)으로 들어갈 경우에 그 지역(민족)의 신을 따라 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여기서 하나님을 온 땅의 조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요단 강 도하 사건을 통해서 바다와 강들도 자신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실 것이다. 요단강은 헬몬 산 부근의 4개의 수원(水原)에서 시작되므로 '위'는 곧 '헬몬 산에서부터 발원하는 곳'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끊어지고 쌓여 선다는 말은 (출 15:8)에 나타난 홍해의 기적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여기서 '끊어지다'('카라트')는 말은 '자르다', '분리하다'의 뜻으로서, 흘러내리던 요단 물이 분리되어 그 아래의 물과 합쳐지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쌓이다'('나다드')는 말은 멈춘 물이 점차 산처럼 쌓여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선다'('아마드')는 말은 마치 사람이 자기의 몸을 일으켜 세우듯 물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서 계속 불어났음을 나타낸다. * 요단 도하 작전(14-18)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을 건너기 위해서 장막을 거두고 그 곳을 출발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그들 앞에 서서 요단 강을 햐해 나아갔다. 이 일이 일어난 때는 출애굽 때와 같은 시기인 니산월(우리 달력으로는 3, 4월경) 10일이었다. 이 무렵의 팔레스틴은 많은 강수량으로 인해 호수나 강들이 최고 수위(水位)를 기록할 때였다. 그러므로 원래 이 때에는 많은 사람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는 일이 매우 힘든 때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때에 처자식과 가축을 거느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을 건너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전능하심을 증거해 주셨다. 출애굽이나 홍해 도하 사건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된 것처럼, 요단 도하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힘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계속될 것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모맥'(牟麥)은 '밀과 보리'를 뜻한다.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여리고 지역은 태양력 4, 5월경에 밀과 보리를 추수한다. '언덕'(가다)은 퇴적 작용으로 생긴 강의 양쪽 자연 제방을 가리킨다. 그리고 '넘친다'(말라 알)는 말은 단순히 물이 제방에 가득 찬 것이 아니라 가득 차서 물이 범람하는 것을 말한다(Keil & Delitzsch). 실제로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북쪽 헬몬 산의 눈이 녹게 되며, 또한 봄비가 내리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는 최고 수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요단 강물은 크게 불어 그 깊이는 3-4m, 그 넓이는 30m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J. P. Free, Archaeology and Bible History). 그러므로 이렇게 요단 강물이 만수가 되어 사해로 흘러갈 때에는 요단 강의 가장 좁은 나루터도 걸어서는 건널 수가 없게 된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실행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강둑을 넘칠 정도의 거센 물결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과감하게 요단 강에 들어섰다. 그들의 이러한 용기는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에서 가능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물에 잠길 때에 즉시 요단 강물은 멈추고 말았다. 하나님은 기적을 이루실 때에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첫째는 자연을 이용한 기적이고, 둘째는 순수한 초자연적인 기적이다. 자연을 이용한 기적은 애굽에 내린 10대 재앙이나(출 12:29, 30), 여호수아 때에 태양과 달이 멈춘 사건(수 10:12-15)과 히스기야 때에 일영표 위의 해 그림자가 10도를 물러난 사건(왕하 20:8-11)을 들 수 있다. 학자들은 요단 강물의 멈춘 사건에 대하여 자연을 이용한 기적이었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담 근처에는 오늘날에도 큰 절벽이 있는데, 그 절벅은 가끔 지진 등으로 인해 바위가 무너져 내려 요단 강물을 정지하게 한다고 한다. 실제 그러한 일이 A. D. 1267년 12월에 일어나 16시간, 그리고 A. D. 1927년 7월에 일어나 21시간 30분 동안 요단 강물의 흐름을 막는 일이 발생했다(J.P. Free, en-Nuwairi). 어쨌든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강물에 닿자마자 흐르던 강물을 멈추게 핫고, 그 물이 뒤로 물러나 쌓이게 하셨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과 가축들이 건너는데 필요한 시간을 생각하면 요단이 멈춘 시간은 잠시동안이 아니라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요단 강은 흐르던 물이 그치고 그 물이 위로부터 쌓이는 바람에 일종의 역류현상이 일어났다. '사르단'(Zarethan)은 여리고 북방 약 20km 지점의 요단 강에 있는 성읍이다. 강물은 이 곳에서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바닥'에 굳게 서있었다(Keil)('마른 땅'은 '물기가 없는 땅'을 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다 건널 때까지 자기가 선 자리를 확고 부동하게 지키고 있었다. 멈추었던 물이 다시 흐르게 되면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바라보면 담대하게 믿음으로 요단 강을 건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를 200만으로 추산하고(민 26:51), 그들이 행군의 폭을 1-2km 정도로 했다고 가정할 때에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반나절(half a day) 정도가 된다(Keil & Delitzsch). < 요약 및 정리 >
* 기념의 돌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3) 마침내 온 백성이 요단강을 모두 건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게 되자 여호수아에게 열 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선출하도록 지시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사장들이 서 있던 곳에서 각각 하나씩 돌을 취하여 오늘 밤 그들이 야영할 곳에 보관하도록 지시하셨다. 하나님은 이 돌들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요단 강을 건넌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도록 지시하셨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 가운데 굳게 서는 순간 강물이 갈라졌고 강바닥은 말랐기 때문에 그곳에는 평상시에는 볼 수 없었던 큰 돌들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돌들을 취하게 하심으로 그 강이 갈라졌었다는 것을 증거하게 하셨다. 그리고 각 지파에 한 사람씩 돌을 취하게 하신 것은 모든 지파가 이 일에 증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 모든 이스라엘 지파가 이 일에 증인이 되었음을 증거하게 하셨다. * 기념 비를 세움(4-9)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한 사람씩 선발을 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정해진 사람들이었다(3:12).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돌을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매라고 지시했다. 여호수아는 이 돌들이 그들 중에서 표징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표징'이란 말('오트')은 '표시한다', '나타낸다'는 뜻인 '우트'의 파생어이며, 이 말은 '기념' 또는 '증거'를 의미한다.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서 한 개씩 위한 12개의 돌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넌 일을 푸대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후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돌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 의미를 잘 설명해 주도록 지시하였다. 출애굽 사건과 마찬가지로 요단 강 도하 사건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기념비적인 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그 일을 기억시켜야만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당시에 큰 돌기둥은 증거물이나(24:26, 27; 삼상 7:12), 죽은 사람을 위한 기념비(왕하 23:17; 겔 39:15)로 세워졌다.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돌기둥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념물로 드려지기도 했는데(창 28:18-22; 사 19:19), 이 경우에는 대부분 그 장소에 종교적인 이름이 붙여졌다(창 35:7). '기념'이란 말('직카론')은 어떤 사실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거나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생각나게 하는 '기념일'이었다면(출 12:14), 길갈에 세운 '열 두개의 돌'은 요단 강 도하를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물'이었던 것이다(20-2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요단 강에 들어가서 열 두 개의 돌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나왔다. 그리고 그 돌을 그들이 야영할 곳에 갖다가 보관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다.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서 돌 12개를 취하게 한 후에 여호수아는 물이 흐르는 요단 강 바닥에 또 다른 열 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웠다. 따라서 기념비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숙한 길갈에 도 세워졌고, 제사장들의 발이 섰던 곳에도 세워졌다. 이러한 행동은 이중적인 증거를 세움으로써 그 증거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제사장들이 섰던에 세운 열두 돌은 물이 다시 흘러 넘칠 때에 곧 잠겨 버리게 되기 때문에 기념비를 세운 의의를 분명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단강 가운데 세워진 열두 돌은 비록 보이지는 않는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간직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갈갈에 세워진 기념비를 볼 때마다 요단 강 중앙에 세워졌던 기념비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혹 강물의 수심이 낮아질 때면 그 기념비의 꼭대기가 보이게됨으로서 그러한 효과를 배가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Calvin).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강둑까지 넘쳐흐르는 모맥 거두는 시기(3:15)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돌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수아 기자는 이 때에 세운 돌들이 이 책을 쓸 당시까지 그대로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요단 도하 사건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한 일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요단 도하가 끝남(10-14)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건널 때까지 요단 강 가운데에 언약궤를 멘 채로 서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건너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만일제사장들이 그 발을 강에서 떼었다면 그 물은 다시 흐르게 되었을 것이다. 여호수아 기자는 요단 강 도하 사건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요단 강 도하 사건이 이미 모세를 통해서 약속된 일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다'는 말('탐맘')은 '완성하다', '일을 멈춘다'란 뜻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다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밝게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강을 건너는 동안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한 곳에 굳게 서서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의 힘이 빠지지 않도록 서둘러 강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마지막으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요단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널 때에는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받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半) 지파도 모세와 맺은 약속대로 요단 서편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넜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넌 두 지파 반의 숫자는 4만명 가령이었다.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너서 함께 싸우기 위해서 여리고 평지에 진을 쳤다. 여리고 평지 는 요단 강 서쪽에 있는 초원 지대를 말한다(Keil). 이곳은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여리고 성의 근처의 저지대로서 그 폭은 도보로 약 3, 4 시간 걸릴 정도였다.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의 선봉대는 바로 이 곳에 진을 쳤다. 이 일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르 크게 보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도하 사건을 통해서 모세의 후계자로서의 지도자적 위치를 공고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게 하다'는 말('가달')은 '명예와 인격을 높인다', '자랑스럽게 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3:7; 대상 29:12). 하나님은 요단 강 도하의 이적을 통해 여호수아의 지도자적 권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 요단 물이 다시 흐르게 되다(15-18)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백성들이 모두 강을 건넌 후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요단 간에서 올라오게 하셨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제사장들에게 전달하였으며, 이 명령을 들은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멘 채로 요단 강에서 올라왔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에서 나와서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강의 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물은 다시 언덕에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뚜렷히 시사해 준다. 1) 요단강 도하 사건은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Matthew Henry). '도로'라는 말은 '돌이키다', '제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슈브)이며, 흐르다는 말은 '간다'('얄라크)는 뜻이다. 그러므로 도로 흘렀다는 말은 '자기들이 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말한다. * 이적의 의미(19-21)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 강을 건너고 길갈에 진을 친 날은 정월 십 일이었다.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40년이 되는 날에서 4일이 모자라는 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전에 애굽에서 나오기 위해서 이 날에 유월절 어린양을 예비하였다(출 12:3). 그러므로 여기 이처럼 정확한 날짜가 서술된 것은 유월절 규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5:10). '정월'은 히브리어로 '아빕'월인데, '아빕'은 이미 익었으나 여전히 푸른 색깔을 띤 부드러운 보리를 의미하는 말이다(출 13:4). 그리고 이 시기는 '모맥 거두는 시기'(3:15)와 일치하는 시기로 오늘날의 3월말-4월초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이 달은 니산'(Nisan)월로 부리어졌다. 하나님께서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그들이 가나안에서 유월절을 예비하고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성별된 민족임을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출애굽 때의 유월절을 기억하게 하심으로써 그 구원이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던 것이다. 길갈은 '굴린다'는 뜻을 가진 동사 '갈랄'의 파생어이며, 이 명칭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함으로써 과거 애굽에서 겪은 노예의 수치를 모두 굴려 버렸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었다. 이 곳은 요단 강 언덕으로부터 약 8km 가량 떨어진 곳이었는데, 이 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진을 친 첫 숙영지이며, 동시에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교두보였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가나안 정복 전쟁은 물론, 사사 시대 및 초기 왕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 길갈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중심지로서 중요한 성읍으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요단 강에서 취하여 온 12개의 돌을 길갈에 세웠다. 그기 이 곳에 12개의 돌을 세운 목적은 이스라엘 전체 12지파로 하여금 여호수아 시대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요단 강 도하의 이적을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이적을 기억하고 찬양하며 기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호수아는 후일에 이 돌을 세운 의미에 대해서 후손들이 묻게 되면, 그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도록 지시했다.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는 가정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였다. 특히 히브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가정 교육이 매우 중요시되었다(출 12:26, 27;신 6:20-25). 하나님은 가정이 여호와 신앙 교육의 산실이자 언약 전승의 핵심 처소가 되도록 지시하셨다. 여호수아는 요단 강을 거너 이적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건넌 이적과 비교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길이 열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이적을 베푸신 목적도 같았다. 여호수아는 요단 강 도하의 이적의 의미를 두 가지로 요약해 주고 있다. 1) 땅에 사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함(출 14:4,18), 땅의 모든 백성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의 거민을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길갈의 기념비는 동서 고금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명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도 포함된다.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호와의 손은 강한 손이다. 하나님의 손은 악인들을 심판하고 의인들을 붙들어주신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이적을 행하신 목적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케 하려는데 있었다. 왜냐하면 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잠 1:7;9:10). * 가나안 주민들의 반응(5: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건널 때까지 요단 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는 소식은 곧 요단 서편에 거하는 모든 아모리 족속의 왕들과 해변에 거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의 왕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심히 놀라며 낙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모리 사람은 산지에 살고 있었으며, 가나안 사람은 평지에 살고 있었다. 가나안의 모든 거민들은 이미 출애굽 사건과 요단강 동편의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이 전멸 당한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살 고 있는 요단 서편으로 도하했다는 소식은 두려움에 더 큰 두려움을 더해주었다. < 요약 및 적용 > 4. 가나안에서 성결케 함(5:2-12)-할례와 유월절 준수 4-1. 할례(5:2-9)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때에 여호수아에게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지시하셨다. 이 때는 가나안 거민들이 심히 낙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공격하기에 좋은 시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격하기보다 먼저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셨다. 부싯돌('추르')은 '단단한 돌', 또는 '반석'이나 '바위'를 말한다. B. C. 13-15세기 당시에는 청동 제품들이 돌로 만든 기구들을 대신하여 널리 사용되었고 그 후에는 곧 철을 사용하게 그러나 할례 의식만은 고대 관습을 따라 부싯돌을 사용하였다. 40년 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다가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에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4, 5절). 따라서 할례의 명령은 가나안에 도착한 세대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례를 받았던 것과 같이 후손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시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할례'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대한 증거였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표시였다(창 17:9-14).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서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할례산은 '언덕'을 뜻하는 '기브아'와 '포피'(包皮)를 뜻하는 '아를라'의 합성어이다. 이 말은 할례를 실시한 후 베어낸 포피(양피)를 이곳에 묻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었다(Keil). 이와 같이 할례 의식이 다시 시행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는 새롭게 회복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을 했다. 그러므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이러한 불순종의 사건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언약의 징표'인 할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으며, 그 당시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광야에서 방황을 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불순종하던 당시에 20세 이상 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죽고 새로운 세대로 교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대는 그 동안 할례를 받지 못했다. 새로운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에게 내려졌던 징계가 거두어질 때까지 할례 받는 일이 일시적으로 보류되었던 것이다.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서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9)."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카일(Keil)은 당시 할례를 받은 수효를 대략 70만 명 가량으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약 60만 명이었으며, 전체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 중 남자와 여자가 숫자가 같았다면 남자는 약 100만 명 정도 되었다. 그 중에서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4:29) 당시 20세 미만이었던 남자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길갈에서 할례를 받을 대상자는 대략 7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한 후에 그 상처가 나을 때까지 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애굽의 수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애굽에서의 노예 신분으로서 당한 수모를 가리킨다(Bright). "굴러가게 했다"는 말은 애굽의 속박 생활로 인한 모멸, 혹은 출애굽을 하고서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조롱하던 애굽인들의 비난을 멀리 굴려버렸다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대로 요단 강을 건너 길갈에서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받음으로 이러한 모든 모멸, 수치, 비난, 힐책 등을 멀리 내어버렸다는 뜻이다(Calvin, Keil, Lange).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 달 14일 저녁에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출애굽의 구속을 기념하는 유월절 행사는 아빕월 십 사일 저녁(출 12:6)에 지켰으며, 유월절의 밤을 포함한 그후 7일간 지키는 절기를 '무교절'이라고 불렀다.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길갈에서 지킨 유월절은 세 번째로 시킨 것이 된다. 첫 번째는 애굽에서 출애굽 직전에 지켰고(출 12:3-28), 두 번째는 시내 광야에서 시내 산을 떠나기 직전에 지켰다(민 9:1-5). 그후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4:26-35)이 일어났고, 그후로는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그 저주의 38년 기간 동안에는 할례 없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월절 역시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L. Wood, Keil). 왜냐하면 할례는 유월절 예식의 참여를 위한 전제 예식이었기 때문이다(출 12:48; Woudstra). 그러나 저주의 기간이 지나고, 요단 도하 후 길갈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할례를 받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이제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서 근 40년간 유보되었던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유월절 이튿날, 즉 아빕월 15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땅 소산 ,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그 땅 소산은 가나안 땅에서 추수된 식물을 뜻한다(Keil).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도하할 당시는 보리 추수기였다(3:15). 무교병과 볶은 곡식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먹은 식물인데, '무교병'(無敎餠)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말하며, '볶은 곡식'은 '볶다' ,'굽다',를 뜻하는 '칼라'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문에는 '곡식'이란 말이 없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다. '만나'(Manna)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할 때 그들에게 주어진 광야의 음식이요, 하늘의 음식이었다(출 16:15 주석 참조).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이르러 그 땅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나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자마자 만나가 그쳤다는 기록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 만나는 우연적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에 의해 주어졌다. 2) 자연적인 방식으로 곡식이 주어지게 되면 만나와 같은 초자연적이고 이적 적인 식량을 받을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 요약 및 적용 > 3. 유월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