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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제 21장
=====21:1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여호사밧의 죽음은 여호람의 틔치 헹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여호람은 여호사밧이 사망하기 4년전부터 그의 부친과 함께 섭정을 해
오다(Payne) 여호사밧이 장사되던 해인 B.C. 848년에 드디어 단독 통치자가 되었던 것
이다. 이제 여호람은 그의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21:2,3
여호사밧은 왕위에 오를 여오람을 제외한 여섯 아들들에게 많은 은금과 보물을 주
었고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다스리게 했다. 우리는 여호사밧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툴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조
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사랴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여호사밧의 아들 중 두 사람의 이름이 동일한 것으
로 나타난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서 전자의 아사랴는 '아자르야'(* )로,
후자의 아사랴는 '아자르야후'(* )로 나타난다.
유다 왕 여호사밧 - 히브리 원문에는 '이스라엘 왕 여호사밧'으로 되어 있다. 역
대기 저자가 유다 왕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기록한 이유를학자들은 다음과 갈이 추
측한다. (1) 여호사밧이 하나님 백성의 참된 왕이었기 때문이다(Keil). (2)역대기저
자가, 사용한 자료를 그대로 반영시켰기 때문이다(Williamson).
=====21:4
그 모든 이유와...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 여호람이 이들을 살해한 이유는 다음
과같다. (1) 그들이 여호람과 그의 아내의 우상숭배를 반대했기 때문이다(13절, Keil,
Zockler). (2) 그들이 여호람의 폭군적인 행동을 경계했기 때문이다(S. Oettli).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여호람은 그들을 그의 정적(政敵)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살해했을 것이다. 그는 여호사밧과는 달리 북 이스라엘 왕들처럼 폭군이었다.
=====21:5
예루살렘에서 팔 년을 치리(治理)하니라 - 이 팔 년은 공동 섭정을 한 것을 제한
그의 통치 기간(B.C. 848-841)을 가리킨다. 이 통치 기간은 유다에 있어서 비극 그 자
체였다. 한편, 그가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소비한 시간과 심
한 중병으로 오년간 앓은 것을 제외하면 그의 통치 기간은 그리 긴 것이 아니었다.
=====21:6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 여호람은 선왕(先王)들인 아사와 여호사
밧의 선한 길을 좇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북이스라엘 왕들처럼 행했다. 그원인으로
서 역대기 저자는 여호사밧의 결혼 동맹(18:1)의 실책을 지적한다. 아합의 딸 아달랴
가 여호람의 아내가 되어 그 남편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쳐 다윗 왕가를 아합 왕가와
같이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여호람의 잘못된 혼인으로 말미암아 유다 왕국의 통치
의 반신정 통치의 성격을 띄게 된다. 여기서 참된 혼인의 중요성을 배워야 할 것이다.
=====21:7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음은 - 여호람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
했다. 즉, 그는 유다를 우상 숭배하는 나라로 이끌어 갔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하나님
은 다윗과 세우신 언약(삼하 7:13-16) 때문에 '다윗의집' 곧 다윗 왕가를 멸하지 않겠
다고 하신다. 즉, 여호람에게는 형벌을 내리시겠지만, 그 왕위는 그의 아들로 이어져
다윗 왕가를 계속 존속시키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 왕조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단
명한 왕조들과 다른 점이다.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許)하셨음이더라 - 역대기 저자는 '등불'을 생명의 상징
으로 사용한다(욥 18:6;잠 13:9;24:20). 다시 말하면 다윗의 씨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삼하 7:12-17, Curtis).
=====21:8
여호람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 에돔은 다윗에 의해 유다의 속국이 되었다가(삼하
8:13, 14; 대상 18:11-13) 솔로몬의 통치 이후 잠시 독립을 했었던것으로학자들은
보고 있다(왕상 11:14 이하, Curtis). 그러나 여호사밧 때에 다시 유다의 속국이 되었
다가(20:36의 에시온게벨은 에돔 땅이다) 여호람 때에 다시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게 되었다. 이로 보아 유다는 여호람의 악정으로 인하여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대외적으로도 그 면모를 크게 잃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 이는 에돔이 여호사밧에 의해 파견된 유다의 섭정왕
(왕상 22:47)을 죽이고 그들이 스스로 왕을 세웠음을 가리킨다.
=====21:9
자기를 에워싼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쳤더라 - 여호람은 에돔을 쳐서 다시
속국으로 삼기 위하여 출정 (出征)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에돔 군사에포위되어
사경(死境)에 몰리게 되었던 바람에 일어나서 에돔의 포위망이 약한 곳올 쳐서 가까
스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여호람의 대(對) 에돔전(戰) 실패가 에돔으로 하여
금 완전한 독립을 얻도록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1:10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여 - 립나는 블레셋 근방 유다의 남서 변방 지역에 있는 라
기스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도시이다(수 15:42;대상 6:57). 한때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도시이며 도피성(수 12:15;21:13) 중의 하나였던 이곳이 유다를 배반한 이유는 아마도
이웃에 있던 블레셋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립나가 하나의독립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블레셋의 한 도시로 편입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후에 앗수르의 산
헤립이 립나를 장악한 일이 있다(왕하 19:8).
이는 저가...여호와를 벼렸음이더라 - 이것은 열왕기에 없는 역대기 저자의 독자
적인 주석이다. 즉, 유다가 속국들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여호람의배교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그의 왕후 아달랴가 유입한 이방 종교를 유다에 퍼뜨렸던 것이다.
=====21:11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젠'(* )은 직역하
면 그가... 음행케 하였다'가 된다. 이 '예젠'이라는 동사는 '음행을 하다', '간음하
다'라는 뜻의 동사 '자나'(* )의 히필형(Hiphil; 사역형 능동)으로서 영적 간음
행위, 즉 우상 숭배 행위를 가리키는 데도 쓰인다. 당연히 본절에서도 이와 같은 의
미로 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와 결혼한 신부들로 생각했고. 다른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은 간음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흑케 하였으므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흐'(* )는 '밀다', '강요하
다', '재촉하다'라는 뜻의 동사 '나다흐'(* )의 히필형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누구 누구를...하게끔 하였다는 뜻을 갖는다. 즉, 이는 여호람의 종교 정책에 따른 우
상 숭배의 강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21:12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 여기서 '엘리야'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는 다른 두 입장이 주장되고있다. (1)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디셉 사람 엘리야(Grove, Keil, Payne, williamson):이들은 편지를엘리야의 것으로
보는 데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을 때 보낸 것인지 승천 이후에 보내진 것인
지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2) 이스라엘의 선지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닌 다른
엘리야 선지자(Murphy, Curtis):이들은 그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가 편지 전달 당시에
살아있지 않았으며(왕하3:11), 그가 남왕국 유다와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1)의 견해를 취하는 보수주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2)의 견해를 거부한다. 첫째로, 엘리야가 남왕국 유다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왕상 19:3 이하). 둘째로, 엘리야의 승천 사건(왕하 2:11)은 여호람이 단독통
치자로 등극하고 아우들과 방백을 살해한 사건(21:4)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엘리야
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편지를 보낼 수 있다. 셋째로, 열왕기하 3:11에서 엘리사에
대한 언급은 그가 단지 엘리야의 조력자였음을 말하는 것이지 엘리야가 더 이상 땅에
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엘리야의 글은 여호람의 두 가
지 큰 실책에 대해 책망한 것이다. 즉, (1) 아합의 집을 좇아 우상을 숭배하며 백성으
로 그 죄에 빠지도록 미혹하였다. (2) 그 아우들은 살해했다. 이 실책에 대해 여호와
께서 보옹하신다는 것이다.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 역대기에서는 여
호사밧과 아사왕이 특별히 동일한 유형의선왕(善王)으로 언급되고 있다
(14:2;17:3;20:32).
=====21:13
아합의 집과 같이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초기에는 극히 일부에
서만 바알 숭배가 행해졌으나, 북왕국 오므리 왕조패에 이르러 그것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이세벨과 아합으로 인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바알 종교가 국교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극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서 기자는 아합의 가문을 바알 종교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 여호람이 그의 아우들을 죽인 것은 단지 그들의
소유가 탐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의 우상 숭배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실로 그들이 선한 아우들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편지에 이 살륙
사건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편지가 여호사밧 사후에 보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21:14
큰 재앙으로 치리라 - '재앙'(* ,막게파)은 '치명적인 타격', '전투에서 의학
살', '역병'의 의미로 쓰인다. 이 재앙이 그의 백성과 그의 자녀와 아내들과 그의 모
든 재물에 내려질 것이므로 온역이나 역병과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고 볼 수 없다. 따
라서 이것은 16,17절에 기록된 블레셋의 침입에 의한 손상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
다.
=====21:15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 이것은 여호람이 오랜 기간 동안 병을
앓다가 죽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19절). 여호람
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시내산 언약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는 그 신정 국가
의 왕으로서 백성을 언약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도록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고 통
치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방 종교를 도입하는 죄악을 범하였다. 그 결과 언약의
약속대로 그에게 저주가 임했던 것이다.
=====21:16
블레셋 사람...아라비아 사람 - 여호람의 부친 여호사밧에게 조공을 바쳐왔던 이 무
리들이(17:11) 이제 유다를 침략하였다. 역대기서에서 이들의 존재는 주로 팔레스타인
과 애굽사이의 접경 지대에 사는 유목민들로 나타나는데, 어느 때는 이스라엘 사방에
서 여호와의 행하심을 목격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14:14;20:29), 또 어느 때는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을 지팡이로 사용되기도 했다.
=====21:17
유다를 침노하여...탈취(奪取)하였으므로 - 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왕궁
의 모든 재물과 여호람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여 갔다. 여기서 '왕궁'에 대한 해
석은 두 가지가 있다. (1) 예루살렘에 있는 왕궁(Zockler,Curtis), (2)예루살렘이 아
닌 다른 왕궁(Keil, Williamson). 이중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첫째,
예루살렘의 왕궁과 성전의 보물이 탈취당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 여호와의
아들들이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번째 이유는 왕자들을 견고한 성읍에 거하
게 했던 당시의 관습과 연관되어진다(3절). 만일 여호람의 아들들이 예루살렘에 있었
다면 침략자들에게 잡혔다 하더라도 재물을 통해 교환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Williamson). 그러나 그들은 요새 성읍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살되고 말았을
것이다.
여호아하스 - 그는 22:1에서 '아하시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 두 이름은 '여호
와'의 이름과 '붙들다' 라는 뜻의 동사 '아하즈'(* )가 결합된 것으로서 두 이름
의 의미는 동일하나 두 단어의 결합 순서가 뒤바뀌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러한 징계 가운데서도 한 아들을 남기신 것은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
셨기 때문이며다윗의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7절).
=====21:18
능히 고치지 못할 병 - 이는 여호람의 병이 하나님의 형벌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궁
중의 의사들이 그 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치료법도 통하지 않
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1:19
여러 날 최후 이 년 만에 - 2년 동안의 병고(病苦)는 오히려 죽음 자체보다도 더
큰 형벌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는 날마다 더 심해지는 병을 앓으면서 무고한 형제들을
죽인 죄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저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 백성들은 이전의 왕이 죽을 때처럼 분향하지 않았
다. 그들은 여호람의 죽음에 애도조차 하지않았다. 이것은 여호람의 악정에 대한 벽
성들의 공개적인 불만의 표시였다.
=====21:20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 여기서 '아끼는 자 없이'란 구절을 많은 영역본
과 주석 학자들이 '애도하는 자 하나 없이' 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여호람이 죽었을
때 백성들은 분향도, 애호도 하지 않았으며 그의 시체를 열왕의 묘실에 두지도 않았
다. 그 이유는 그가 언약의 나라에서 왕으로서의 정당한 역할을 전혀 행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대하 제 22장
=====22:1
예루살렘 거민이...왕을 삼았으니 - 본절의 병행 구절인 왕하 8:24에는 아하시야가
어떻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에는 아하시야의
즉위 사건에 예루살렘 거민이 미친 영향이 암시되어 있다. 즉, 왕위 계승과관련하여
혼선이 있었다는 것이다(Keil, Zockler, Payne, Williamson). 아하시야의 모친인 아달
랴가 왕권을 장악하려는 어떤 계략에 대해 예루살렘 거민이 반대하고 아하시야를 적극
적으로 왕위에 계승시켰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추론의 타당성은 아하시야가 일년을
통치하고 죽자 그녀가 유다 왕가의 씨를 진멸시키려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10절).
아라비아 사람과 함께 와서 영(營)을 치던 부대가 - 이것은 여호람의 아들들이 진
영에 있을 때 아라비아 사람과 블레셋 사람의 침입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설명
해 주고 있다. 이것은 21:17에 있는 여호람의 아들들의 죽음에 관한 기록의 보충적 설
명이다.
=====22:2
사십 이 세라 - 왕하 8:26에는 아하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를 나이 이십이세라고
했다. 그런데 본절에는 '사십 이세'로 나타난다. 이것은 필사자가 '이십'을 '사십'으
로 오기한것으로 대부분의 주석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다. 아하시야의 부친여호람이
40세에 죽었는데)21:5) 1년을 다스리고 사망한 그의 아들이 42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오므리의 손녀더라 - 여기서 손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트'(* )는 '딸'이란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아달랴를 오므리의 딸이요, 아합의 누이(21:6과 비교하라)라고
주장한다(Hitzig). 그러나 여기서 아달랴를 오므리의 딸이라고 한 것은 오므리가 아달
랴의 부친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므리 왕가의 시조(始祖)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므리
는 아합의 부친이며 아달랴는 그의 손녀가 된다. 이런 때에 히브리어 '바트'(* )는
'손녀'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22:3
이는 그 모친이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 아달랴가 왕후로서 모든 세력을 잡
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를 조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아달랴는 배후에서 그의 아들
아하시야를 조정하여 유다를 더욱 바알 숭배로 몰아가려 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여인이 유다의 심장부, 곧 왕궁에 들어옴으로 유다는 그 존재의 성격을 상실하여 가고
있었으니 유다는 하나님의 소유요, 제사장의 나라요, 거룩한 백성의 성격을 거의 상실
한 지경에 이르렀다.
=====22:4
아합의 집 교도(敎導)를 좇아 - 이는 아달랴가 아합 종교의 전파를 위해 종교 지도
자들을 아하시야에게 보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아합의 집과 연혼한
것이(18:1) 얼마나 악한가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하시야는 다윗의 통치 성격을 가
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윗이 세운 모범,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을 철저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규정지어 가려 했던 통치 성격을 본받지 않고 도리어
배교(背敎)의 자리로 떨어진 아합의 통치를 본받았다. 비록 그가 형식상으로는 철저히
언약의 나라의 왕으로 군림했다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이방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22:5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 요단 동편에 위치한 길르앗 라못
은 레위 지파의 므라리 자손에게 분배된 성읍이다(수 21:38). 이 성읍은 남북 분열 이
후 아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B.C. 853년에 아합은 그곳을 되찾으려고 여호사밧과 연
합 공격을 했지만 도리어 전사(戰死)하고 말았다(18:34). 한편, 몇년 후에 아합의 둘
째 아들 요람이 그 성읍을 재탈환했지만 다시 하사엘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퇴각했
다. 이 시기에도 남왕국과 북왕국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서 군사 행동을 양국
이 함께 했음을 볼 수 있다.
아람 왕 하사엘 - 이 사람은 벤하닷 왕 수하(手下)에 있던 장군이었으나 역모를 꾀
하여 그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된 과정과 그의 잔인함에 대한
선지자 엘리사의 예언에 관해서는 왕하 8:12,13을 참조하라.
아람 사람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아람밈'(* )인데 히브리 원
문에는 이것의 단축형인 '하람밈'(*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무시한 70
인역에서는 '하람밈'을 '궁수들'이라고 번역했다.
요람 - 이 이름은 '여호람'(* )의 단축형이다. 따라서 여호사밧의 아들 유
다 왕 여호람과 아합의 아들 요람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인 셈인데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존귀하시다'이다. 성경에서는 이 두 이름이 서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22:6
이스르엘 - 이곳은 오늘날의 '제르인'(Zer'in)에 해당되며 므깃도와 벱세안(Beth-
shean) 사이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Curtis).이곳에도
북왕국의 왕족이 거처하고 있는 왕궁이 있었다.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가 이스르엘에 내려가서 - 여기서 '아사랴'(*
)는 '아하시야'(* )를 잘못 표기한 것이다(Keil, Curtis).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요람을 방문할 때 길르앗 라못(라마)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갔
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왕하 9:14,15에 따
르면, 요람이 이스르엘로 치료하러간 이후에도 이스라엘 군대는 예후와 함께 여전히
라마에서 하사엘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아하시야가 계속 하사엘과 싸
우다가 요람을 방문한 것인지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방문한 것인지 본문의 문맥
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한편, '내려가서'(* , 야라드)라는 단어가 예루
살렘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간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가 있다(Curtis). 어쨌든 아하
시야의 이 방문은 아합의 집과 관련있는 모든 왕족, 즉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왕족이
예후의 손에 참형을 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배반한 자들을 벌하시
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할 수 있다(7a절).
=====22:7
해를 받았으니 -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테부사트'(* )라는 명사이다. 이
말은 '파멸', '몰락'이라는 뜻이다. 아하시야의 패망은 하나님의 엄위로운 심판이었
다. 반면에 열왕기 기자는 이 사건을 신학적 해석을 가하지 않고 단지 역사적 사실로
보고한다(왕하 9:27).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그 사건을 하나님께로말미암은 것으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임을 지적한다.
임시의 아들 예후 - '임시'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님시'이다. 왕하 9:2에는
예후를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원문을 직역
하면 '님시의 아들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예후는 적어도 님시
의 손자임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더라 - 여호와께서 '아합
의 집'을 멸하시기 위해 어떻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셨는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왕하 9:1-10을 참조하라.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이 사실을 본문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
하면서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안식구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을 받은 예후가 아하시야를 죽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음의 8,9절에서는 주로 아하
시야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예후의 심판적 행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22:8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 - 학자들간에 해석상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형제의 아
들들'에 해당하는 '베네 아헤'(* )는 '형제의 아들들'(KJV, RSV, NASB, 한
글개역), '조카'(JB, 공동변역), '친척의 아들들'(NIV), '친척'(NEB) 등으로 번역된
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이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과 그 병행 구절인 왕하
10:13,14의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일단 동일인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이해하는 과정에는 차이가 있다. 카일(Keil)은 왕하의 '형제'(* , 아헤)를 아하
시야의 조카와 사촌으로 이해한다. 아하시야의 실제 형제들은 침략자들에 의해 이미
살해되었기 때문에(1절;21:17), '형제'라는 말은 조카와 사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왕기하와 역대하의 기록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문
제가 있다. 그것은 그 조카와 사촌이 과연 아하시야 왕을 섬길 수 있는(8절) 성년이었
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학자들은 본절의 '형제'(*
, 아헤)가 NIV에서처럼 '친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ayne,
Williamson). 그리고 역대기 저자가 열왕기 저자와는 달리 '아하시야의 형제들' 대신
에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로 바꾼 것은 그가 열왕기하에는 없는 사실 곧 아하시
야의 형제들이 죽었다는 점(1절;21:17)을 더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오해를 없애고 정확히 제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하시야의 형
제의 아들들'이란 아하시야의 조카와 사촌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아하시야의 친척의
아들들, 곧 그 왕을 섬길 수 있는 성년이 된 친척의 아들들을 뜻하게 된다. 따라서 열
왕기하의 기록도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22:9
열왕기하에는 역대기하와는 달리 아하시야의 죽음이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의
죽음보다 먼저 나온다(왕하 9:27;10:13,17). 이 차이는 역대기의 짧은 언급이 시간상
의 배열보다 주제상의 배열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역대기 기자는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의 죽음을 먼저 언급하고, 다음으로 아하시야의 죽음과 그의 장례와 왕
권의 약화를 차례로 언급하려는 목적 때문에 그순서를뒤바꾸었을 것이다(Keil,
Chronicles, p.407).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잡아다가 죽이고 - 이 언급은 열왕기하의 언급
(9:27,28)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하에 빠진 기사를
더 첨가시켜 보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 아하시야의 최후
행적을 추적한다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하시야는 예후의 추
격을 받고 사마리아로 대피하였으나 곧 예후의 부하들에게 발각, 체포되어 예후에게로
이송되어 오던 중, 이블르암 근처 구르 비탈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므깃도로 도망하였으나 그곳에서 절명(絶命)하였다(Keil, Kings,pp.343-344, Payne).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 - 이것은 아하시야의
뒤를 이을 마땅한 계승자가 없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아하시야의 모친 아
달랴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막을 만한 힘이 아하시야의 집에 없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22:10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殄滅)하였으나 - 여기서 '왕의 씨'라고 하면 왕위를 계
승할 자격이 있는 아하시야의 모든 아들들과 친척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때에 아하
시야의 친척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아라비아 사람들(21:16,17)과
예후(본장)에 의해서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2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시야
에게서 난 자식들은 모두 대단히 어렸을 것이다. 한편 아달랴는 그녀의 친정 아합의
집이 이미 멸망한 상태에서 정권을 잡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
려움 때문에 자신의 손자 손녀까지도 모두 살해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
다면 유다 백성들은 어린 왕자 하나를 왕위에 옹위(擁衛)하여 아달랴를 몰아내고 말았
을 것이다. 그러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요아스가 7살 되던 해, 즉 그로부
터 7년 후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서 유다 왕이 되었다. 이것은 다윗의 집과 맺으신
언약(21:7;삼하 7:14-16)에 신실함을 보이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22:11
왕의 딸 여호사브앗 - 여호사브앗은 여호람의 딸이며 아하시야의 누이이다. 그러나
아달랴가 아닌 다른 아내에게서 난 딸일 것이다. 그녀는 아하시야 집의 멸망을 막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왕궁에서 요아스를 훔쳐내어 유모와 함께 성전에 있는 침실에
숨겼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더라 - 제사장 여호야다가 대상 6장의 족보 가운데도 나타
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전까지는 그렇게 세력 있는 제사장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여호사브앗(열왕기에는 '여호세바')으로 인하여 여호야다는 후에 세력을 얻게
되었고 아달랴를 몰아내고 왕위를 복원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됨으로써 새로
운 세력으로 역사의 전면(前面)에 등장하게 된다.
=====22:12
하나님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7세였
다. 따라서 요아스가 태어난 지 몇 개월이 안되어 아달랴의 살륙 사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모세 시대의 유아 살해 사건(출 1:15-22)과 예수 시대의
유아 살해 사건(마 2:13-18)을 연상하게 된다. 이처럼 다윗의 씨에 대한 무서운 사단
의 공격 속에서도 그 씨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
님의 신실한 언약의 이행인 것이다.
역대하 제 23장
=====23:1
제 칠 년에 -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의 씨를 모두 진멸하려 했으나 하나님의 기이한
손길로 요아스는 보존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 대한 신실한
성취였다. 그런데 아달랴가 왕의 씨를 진멸하려 한 것은 다윗 왕가를 통해역사상에
전개시키려는 여호와의 경륜을 크게 대적하는 일이었다. 즉, 여호와께서 다윗 왕가를
통해 이 땅에서 드러내시려는 그의 통치의 성장과 활동을 사단이 아달랴를 통해서 저
지하고 파괴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런 흑암의 세월이 6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제
7년째로 접어들었다.
여호야다가 세력을 내어 - '세력을 내어'에 해당하는 '히트하자크'(* )는
여러 역본들에서 '힘을 내어', '용기를 내어'(KJV, RSV, NIV, 공동변역)등으로 번역된
다. 여호야다는 백성들이 아달랴의 악정(惡政)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용
기를 내었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 용기는 전적으로 백성의 지지를 바라보는 마음에
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백부장...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매 - 이 부분은 왕하 11:4을 보충 설명하는 곳
이다. 즉, 이름이 밝혀진 다섯 사람의 백부장은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
부장들이라는 것이다(Keil, Payne, Williamson, O.Zockler). 윌리암슨(Williamson)에
의하면 이 백부장들은 레위인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엘리사벱을 제외한 그들의 이름
이 제사장 또는 레위인의 명단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역대기 저자가 그들의 이름을
밝힌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 이외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기(6절) 때문에 성전에 들
어간 그들을 레위인으로 밝혀 아무 하자가 없었음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23:2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명을 받은 5명의 백부장들은 유다 모든 고을을 다니며 반정
(反正)의 거사(擧事)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 호소에 '이스라엘 족장들', 곧 유
다 왕국에 속하는 족장들이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예루살렘으로 모였다. 이 과정은 지
극히 비밀리에 수행되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왕위를 찬탈한 아달랴가 요아스의 즉
위식 행사를 목격하고서야 '반역이로다'(13절) 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이
다(Payne).
=====23:3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즉위(卽位)하여야 할지니 -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즉
위식에 즈음하여 공식적으로 반정(反正)의 정당성과 그 근거를 위와같이 제시하였다.
그는 반정을 함에 있어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움직였다. 이 지식은 여호와께서 다윗에
게 주신 약속이요, 이전에 주신 계시에 근거한(삼하 7:13-16)것이다. 그는 비록 요아
스가 어릴지라도 그만이 다윗의 자손이며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
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혁명을 추진하였고 유다가 모두 이에 동조하고 나
섰다.
=====23:4,5
여호야다는 반정의 정당성을 먼저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즉위식과 관련한 경호 배치
에 대해 명령을 내린다. 즉, 그는 안식일에 근무에 들어가는 자, 곧 안식일에 입번(入
番)하는 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 가운데 삼분의 일은 성전의 문들을 지키고 다른 삼분
의 일은 왕궁을 지키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기초문을 지키게 하였다.
문...왕궁...기초문 - '문'은 원문에 복수로 기록되어 있어 성전의 문들을 가리킨
다. '왕궁'은 단지 '왕의 집', 곧 성전에 있는 '왕의 방'을 가리킨다. 아달랴가 들어
올 수 있도록 이 왕궁은 열려져 있었다(12절). '기초문'은 열왕기에서 '수르 문'(왕하
11:6)으로 불린다. 이 문도 성전에 있던 문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Payne).
=====23:6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 여호야다는 제사장과 수종 드는 레위
사람(대상 23:28-32)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일체 여호와의 전에 들어오지못하도록
금했다. 그런데 왕하 11:4에는 여호야다가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
을 불러 여호와의 전(殿)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고
하라.
=====23:7
레위 사람은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 4,5절에 언급된 삼 대로 나뉜 경호원을 가리
킨다(Keil). 열왕기에서는 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나(왕하 11:8) 역대기 저자에 의
해 보충되어 밝혀진다.
다른 사람이 전에 들어오거든 죽이고 - 혹자는 이 명령이 왕하 11:8의 '너희 반열
을 침범하는 자는 죽이고'라는 명령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역대기의
명령은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 열왕기의 명령은 호위병들의 반
열을 침범하는 자가 왕을 시해하러 왔기 때문에 죽이라고 한 것으로 보이기때문이라
는 것이다(Curtis). 그러나 이 주장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본절과 열왕기의 기록은
서로 다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역대기 저자가 성전의 신성성
(神聖性)에 관심을 두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너희 반열을 침범하는 자는 죽이고'라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 뿐이다. 그런데 반열을 침범하는 것, 곧 반열에 접근하는 것
은 새로 즉위한 요아스 왕을 살해할 목적으로 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만일요아스가
성전내에서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서 피를 흘리는불상사가
되므로 성전의 신성성을 해치는 셈이다. 즉, 역대기 저자는 여호야다의 명령이 이 사
실에 더 집중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부각시킨 것이다. 성전의 신성성이 지켜지면 요아
스 왕의 살해도 자연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된다.
왕의 출입할 때에 시위(侍衛)할지니라 - 요아스 왕이 성전과 왕궁을 출입(出入)할
때를 가리키지 않고, 성전과 성전 뜰을 출입할 때를 의미한다(Keil). 그렇다면 '시위
할지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유'(* )는 이런 출입시에 경호원은 각자 배치
된 자리에서 근무를 바로 수행하라는 뜻이 될 것이다.
=====23:8
레위 사람과 유다 무리 - 병행 구절인 왕하 11:9에서는 '백부장들'로 나타난다. 그
러나 이 '백부장들'이 '레위 사람과 유다 무리'와 동일한 대상일 수 없다. 이처럼 역
대기 저자가 열왕기 저자와 달리한 것은 여호야다가 이스라엘 족장들의 지지를 받았다
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출번(出番)하는 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함마흐레코트'(* )
이다. 이들은 다윗이 제정한(대상 24-26장) 성전 봉사의 임무를 맡았던 반열을 의미한
다(Keil).
=====23:9
여호야다가...주고 - 여호야다는 백부장들에게 성전 안에 소장되어 있던무기들을
나누어 주고 무장하게 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무장하지 않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
게 주어졌을 것이다.
다윗 왕의 창과 큰 방패와 작은 방패 - 혹자는 이것들이 모두 다윗 자신의 창과 방
패였으며 매 대관식 때마다 성전에 소장되어 있던 이것들을 사용했다고주장한다
(Ewald). 그러나 그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며 오히려 다윗 왕이 하닷에셀의 종들에게서
노략한 '금방패'(삼하 8:7)였다고 보는 주장이 더 타당하다(P.C.Barker).
=====23:10
또 백성들로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 왕하 11:11에는 '호위병이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된 '백성들'중에는 비 레위 지파 족장들(2절)과,
여호야다와 언약을 한 5명의 백부장이 충실하다고 여긴 왕의 호위병도 포함되었을 것
이 분명하다(Payne).
왕을 호위하되 - 이 도열(堵列)은 왕을 둘러싸는 것, 성전 우편에서부터좌편까지
단과 전(殿)곁에 서게 한 것을 가리킨다.
=====23:11
무리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 병행 구절에는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왕하 11:12)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여호야다' 대신에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은 다윗 왕권의 회복이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된 것
임을 직접적으로 밝히려는 저자의 의도 때문이다. 반면 열왕기에서는 여호야다가 백성
의 지지를 얻어 반정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그 대표자만 거론되고 있을 따름이다.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 율법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에두트'(*
)이다. 이 말은 '증거'(KJV, RSV), '언약의 사본'(NIV, a copy of the
covenant), '율법'(JB), '율법책'(공동번역)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커티스(Curtis)
는 이 말이 왕권을 상징하는 '팔찌'(* , 체아두트)라는 말을 오기(誤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에두트'(* )
가 문자적으로는 '증거'라는 뜻이지만, 역대기가 기록될 당시에는 '언약', 곧 율법을
의미하였다.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율법서의 사본을 왕에게 주도록 한 신 17:18을 염두
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JB 난하주).
=====23:12
백성들이 분주하며 - 왕하 11:13에는 '호위병과 백성의 소리'로 기록되어 있다. 역
대기 저자는 그들도 모두 포함하여 '백성들'이라 칭하였다.
=====23:13
왕이 전 문 기둥 곁에 섰고 - 병행구절인 왕하 11:14에는 '구례대로 대(臺) 위에
섰고'로 기록되어 있다. 해석상 어려운 곳이다. 여러 역본에 의하면, 열왕기는 '규례
대로 기둥 곁에 서 있고'(KJV, RSV, NIV, JB), '규례대로 단에 서 있고'(NEB)로 각각
번역된다. 그리고 본절은 '입구 그의 기둥 곁에 서 있고'(KJV, RSV, NIV), '입구 단
위에 서 있고'(NEB), '기둥 곁 입구 그곳에 서 있고'(JB) 등으로 번역된다. 영역본들
은 대체로 기둥 곁에 서 있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JB 난하주에서는열왕기하
의 그곳을 해석하기를 "성전 입구에 있는 두 기둥 중 하나 곁에 왕을 위해 마련한 장
소"였다고 주장한다.
노래하는 자는...찬송을 인도하는지라 - '노래하는 자'는 레위인들이었다(5:12,13;
대상 25:7,8). 여기서 우리는 역대기 저자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활동에 더욱 주의하
여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왕기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
=====23:14
반렬(班列) 밖으로 몰아내라 - 여기서 반렬(* , 세데로트)은 왕을 호위하
고 있는 군사들의 열(Barker), '성전의 경내'(벌게이트 라틴어 역본)로 해석된다. 전
자의 해석도 무시하기 어려우나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Payne).
=====23:15
왕궁 마문 어귀에 - '마문'(馬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으나 성전
구역을 벗어나 왕궁과 통하는 문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에
서는 저를 죽이지 말라"고 명했기 때문에 성전 구역을 벗어난 곳임이 분명하다. 이 마
문이 느헤미야 시대에 복원된 성전 구역 남동쪽 모퉁이에 위치한 마문(느 3:28)과 관
련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나 확정키는 어렵다.
=====23:16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 본절에서는 여호야다가 핵심이 되어 언약을 새롭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언약의 핵심은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여호야다는 이런 사실을 회복함으로써 유다 백성으로 하
여금 언약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였다. 실제로 언약은 아달랴가 연혼 정책(18:1)에 의
해 여호람의 왕비가 됨으로써 유다에서 파기(破棄)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하
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유다를 다시 언약의 나라로 회복시켜 놓은 것이다.
=====23:17
여호야다가 언약을 새롭게 하고 언약 갱신의 의식을 거행한 수 바로 이어 그는 그
의식이 유명무실한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행동을 취하였다. 그 첫째 조치는 바알 종교
를 없애는 것이었다. 본절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온 국민이 바알의 당을 부수
고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23:18
직원을 세워 - 병행 구절인 왕하 11:18과는 달리 직원(관리)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
역대기 저자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가 율법대로 지켜
지게 하기 위해서 임명된 관리였다.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살피는 자"(대상 23:4)로
서 이들은 제사장을 도와 제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대상
23:28-32). 또한 그들은 다윗이 정한 규례대로 즐거이 부르고 노래하며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를 드릴 임무를 맡은 자들이었다. 이렇게 여호와의 전에 직원을 세운
것은 언약 갱신(16절)에 따른 자연스런 후속 조치이다. 여호야다가 제사 제도를 모세
의 율법과 다윗의 정한 바대로 회복시키려 한 것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회복시
키려 한 일종의 종교 개혁이었다.
=====23:19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 문지기는 다윗이 정한 규례에 의하면
세번째 계열의 사람들이다(대상 23:5). 그들은 성전 동, 서, 남, 북의 문과 곳간을 지
키는 자들이었다(대상 26:12-19).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 여기서 부정한 자는 단순히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한 자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한다(Curtis).
=====23:20
왕을 인도하여 - 왕의 대관식(戴冠式) 도중 아달랴의 개입으로 중단되었던 행사가
11절에 이어 다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기름부음 받은 새 왕이 보좌에 앉게
됨으로써 사실상 반정(反正)은 종결되었다.
윗문으로 좇아 - 여기서 '윗문'이란 성전의 문이다(27:3). 한편 열왕기에서는 '호
위병의 문 길'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 성전과 왕궁을 서로 잇는 통로였을
것이다.
=====23:21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 - 아달랴는 이미 성전으로부터 도피하다 왕궁 마
문(馬門) 어귀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기록된다(15절). 그렇다면 이 기록은 아달랴의
죽음을 다시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재언급한 이유는 요아스 왕의 즉위와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을 되찾은 사실을 마귀의 앞잡이아달랴의 죽음과
대비시키려는 저자의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대하 제 24장
=====24:1,2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을 치리하니라 - 요아스 왕의 통치 기간은 B.C. 835년부터
796년까지 40년 동안이며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
했다. 그때까지 그로 하여금 정직한 왕으로 살게 하였던 힘은 바로여호야다의 교훈
(왕하 12:2)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24:3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 여호야다는 마치 요아스의 아버지된 심정으로 요
아스에게 아내를 선택해 주었다. 이렇게 여호야다가 왕의 아내를 선택함에 있어서 혼
신의 정성을 다 쏟은 것은 요아스가 고아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아달랴와
같은 악한 여인과의 결혼으로 인한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 왕통을 이어감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호야다는 그의 개혁 과정에서 왕가의 풍습에 일부일처제의
원리를 확고히 세우지는 못하였다.
자녀를 낳았더라 - 왕족이 거의 멸절된 상태에서 자녀를 낳는 일이 요아스 왕에게
는 중요한 일이었다.
=====23:4
중수(重修)할 뜻을 두고 - 요아스가 집권 초기에 여호와의 전을수리하고자 했던
것은 그 동안 아달랴의 악정 하에서 성전이 많이 파괴되었고 성전의 모든 성물이 바알
들에게 드려졌기 때문이었다(7절).
=====23:5
제사장과 레위 사람 - 열왕기하에는 '제사장'만이 등장한다(왕하 12:4). 성전에 관
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레위인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역대기 저자는 이
일에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 열왕기하에서는 예루살렘 성 이외의 성읍에서 돈을 거두
었다는 언급이 없으나 역대기 저자는 유다 여러 성읍에서 직접 돈을 거두어 오도록 왕
이 명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역대기 저자의 기록이 보다 구체적임을 알
수 있다.
레위 사람이 빨리 하지아니한지라 - 요아스가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성전 수리를
명하였으나 그의 재위 23년까지 성전은 수리되지 않고 퇴락한 상태 그대로 있었다(왕
하 12:6).
=====24:6
어찌하여...아니하였느냐 - 요아스 왕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성전 보수 공사의
책임을 맡겼으나 이 공사가 지연되자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질책하였다.
요아스는 제사장, 레위 사람 모두의 무책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제사장이 받은 질책
은 열왕기하에만 나타난다(왕하 12:6,7). 이 차이점, 곧 역대기 하에서 제사장이 언급
되지 않는 것에 대해 혹자는 역대기 저자가 다른 자료에 근거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
라고 주장한다(Rudolph).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역대기 저자는 사건의 전모를 알
고서 열왕기하에 언급되지 않은 사실을 보충시켜 사건 전체를 균형있게 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목숨을 걸고 반정(反正)을 일으켰고 개혁을 추진시켰음
에도 성전 보수 공사의 일에는 힘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요아스의 계
획이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신앙의 한계 때문이었는
지는 알 수 없다. 성경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인물일지라도 연약성을 가지고 있
는 것으로 나타난다.
=====24:7
본절은 왜 성전 중수가 필요하였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달랴의 아들들
이 하나님의 전(殿)을 부수고 성전의 성물까지 바알들을 위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아달랴의 아들들 - 이 '아들들'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비유
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전자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죽임을 당한 아
하시야의 아저씨와 형제들을(Keil) 가리키고(21:4;22:1), 후자의 의미로 이해하면 '아
달랴의 추종자'(Barnes, NEB), 또는 그녀의 '제사장들'(Oettli, Benzinger)을 가리킨
다.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 '깨뜨리고'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원형은 '파라츠'(*
)이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주로 두 가지 뜻으로 번역된다. 즉, 하나는 '깨뜨리다'
(KJV, JB), 다른 하나는 '부수고 들어가다'(RSV, NIV, NEB, 공동번역)로 나타난다. 근
래에는 후자로 번역되는 것이 지배적이다.
모든 성물을 바알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 - 아달랴는 여호와의 전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금그릇 은그릇 등을 바알을 숭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에 대
하여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호 2:8)라고 기록한다.
=====24:8
한 궤를 만들어...전 문밖에 두게 하고 - 새로운 계획이 왕에 의해 제시된다. 그것
은 궤를 만들어 성전 문밖에 두고 모세의 정한 세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이전의 것(5,6절)과 다른 방식이었다. 이전에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여러
성읍에 돌아 다니면서 성전 보수를 위해 세를 거두는 방식이었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
다. 한편, 본절과 열왕기하의 기록에는 차이점이 있다. 즉, 궤가 어디에 위치하였느냐
하는 문제다. 왕하 12:9에 의하면 궤는 '여호와의 전문 어귀 우편 곧 단 옆에'둔 것으
로 기록되어 있으나 역대기 저자는 '여호와의 전 문밖에' 두게 하였다고 기록한다. 그
러나 열왕기하의 상세한 기록에 따라 '단 옆' 곧 '번제단 옆'에 놓인 것으로 보는 것
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손에서 은을 받아 그 궤에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왕하 12:9). 그렇다고 양자의 차이를 모순이라고 단
정할 수는 없다. 주석학자들은 역대기 저자가 '전 문밖에'라고 고쳐 기록한 이유에 대
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으나 그 설명의 불충분성 때문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을 따름이다.
=====24:9
이 명령은 이전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5,6절). 그러나 이제 왕
이 직접 유다와 예루살렘에 반포하여 정한 세를 여호와께 드리라고 명령한다.
=====24:10
모든 방백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 열왕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본절에서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활동에 얼마나 적극적
으로 참여하였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마치기까지 - 이것을 히브리 원문에 따라 직역해 보면 '그 궤에 가득차기까지'이
다. 방백들과 백성들은 왕의 뜻을 기꺼이 받들어 그 궤가 가득찰 때까지 계속해서 헌
금하였고, 그 궤를 비우고 다시 그곳에 궤를 갖다 놓으면 또 그 궤를 채웠다(11절).
=====24:11
왕의 유사(有司) - '유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페쿠다'(* )는 '소집', '돌
봄', '관리', '직분'이라는 뜻의 여성 명사로서 왕의 일을 처리, 관리, 보호하는 일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고정된 직책이 아니라 임시로 어떤 목적을 위해 세운
직책을 가리키는 듯하다. 즉, 이들은 요아스 왕이 헌금 관리를 위하여 특별히 세운 관
리였을 것이다.
왕의 서기관과 대제사장에게 속한 아전 - 왕의 서기관은 헌금 액수를 기록하고 문
서화하여 보관하는 업무를 수행한 듯하며(왕하 12:10 주석 참조), 대제사장의 아전은
그 돈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전 간역자에게 주어 인건비로 사용케 하는 역할을 담당한
듯하다(12절).
때때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욤 베욤'(* )은 '궤에 돈이
가득 찼을 때마다'라는 뜻이다(Keil).
=====24:12
여호와의 전 간역자(幹役者) - 왕하 12:11에는 '여호와의 전을 맡은 자'로 표현되
어 있다. 즉, 이는 성전 수리를 위하여 고용된 석수, 목수, 철공장, 놋공장들을 지휘
하는 총책임자를 가리킨다.
=====24:13
수리하는 역사가 점점 진취(進就)되므로 - 여기서 '수리'에 해당되는 히브리 단어
'아루카'(* )는 '시간이 오래 걸리다'라는 뜻의 동사 '아라크'(*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연장'(prolongation)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종
종 '회복', '수리'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느 4:7;사 58:8;렘 8:22;30:17;33:6).
따라서 이 '아루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이 회복되고 진척되는 모양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임이 분명하다.
=====24:14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으니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하 12:13에는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고'로 기록되어 있다. 본절은 모든 사업을 다 필역한 후에 그 '남은 돈'으로 그
릇을 만든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열왕기 기자는 성전 수리 사업이 한창 진행 중에 있
는 동안에는 결코 다른 목적으로 그 궤의 돈을 사용치 못하도록 하여 일의 진행을 신
속히 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드리는 그릇 - 이것은 번제에 직접 쓰이는 그릇들, 즉 지성소 안에 있는 제단
그릇과 주발 및 금은 숟가락을 가리킨다(민 4:12). 이 그릇들은 성전 업무에 쓰이는
그릇, 제사장들이 쓰는 다른 그릇들이나 잔과 구별된다(출 25:29). 한편 본래의 제사
드리는 그릇들은 아달랴에 의해 바알 숭배에 사용됨으로 더럽혀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이렇게 새롭게 제사에 쓰일 그릇들을 만듦으로써 여호와께 대한 예배 업무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절 끝부분에 '항상 번제를 드렸다'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완전한 제사 회복을 의미한다.
=====24:18
여호야다가...죽을 때에 일백 삼십세라 - 비평학자들은 여호야다의 나이 130세에
대해 의문점을 시사한다(Myers, Curtis). 그러나 이 장수는 축복의표지(Williamson)
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여호야다를 통해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그를 오랫 동안 살
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24:19
무리가 다윗 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 여호야다는 왕이 아닌 자로서 유
일하게 열왕의 묘실에 안치되었다. 아마 그가 요아스의 목숨을 구하여 다윗 왕권을 잇
게 하고 성전을 정결케 하며 여호와 숭배를 회복하였기 때문에 이런 특별한 영예가 그
에게 주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여호야다의 위치가 왕에 버금가는 위치였고 왕의
외척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대우를 하였을 것이다. 또 130세나 되는 그의 많은 나이도
존경의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24: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 여호야다의 죽음은 요아스의 통치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되
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에는 정직히 행하였다(2절). 또한 여호야다가
사는 모든 날에는 여호와의 전에서 항상 번제가 드려졌다(14절). 그러나 이제 여호야
다가 죽자, 유다 방백들이 요아스를 우상 숭배에로 유혹하였다.
유다 방백들이 와서 - 이들은 그동안 여호야다로 인하여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실
현할 수 없었던 파당(a Party)이었을 것이다(Curtis). 그들은 아달랴 생존시 바알을
숭배하던 자로서 바알 숭배를 회복하려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파당이
집권 세력으로 부상(浮上)하기 위하여 '우상 숭배'를 주장한 것은 그것이 당시 국제
정세에 대처하는 데 보다 용이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24:18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 - 아세라 목상에 대해서는 14:3의 주석을 참조하
라. 그리고 여기서 우상이란 아세라 목상과 깊은 연관이 있는 주상들(14:3)을 가리키
는 듯하다(Curtis).
=====24:19
선지자들 - 이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를 '스가랴'(Barker), 또는 '요엘'(Zockler)로
추정하나 단정키는 어렵다.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 여호와께서는 종종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의 실수와 죄
악을 경계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시는데 이것은 자기 백성들을 향한 자비임과 동
시에 자신들의 죄악을 핑계치 못하게 하는 저주가 된다.
=====24:20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 학자들은 마 23:35에 언급된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
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를 본절의 스가랴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Barker, Zockler). 그렇다면 스가랴는 여호야다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일 가능성이 크
며 이는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감동시키시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브솨'(* )는 '옷 입히다'라는 뜻
의 동사 '라바쉬'(* )의 완료형 3인칭 여성 단수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하나님의
신이 스가랴를 옷 입히셨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성령에 감동된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스가랴가 온전히 성령에 감싸여 성령의 도구가 되었다는 뜻을 나타낸다
(대상 12:18 주석 참조).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 스가랴가 백성들에게 설교할 때 서 있었던 위치는 백
성들보다 높은 장소였던 것 같다. 백성들은 바깥 뜰에 있었고 제사장인 그는 안뜰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21절) 안뜰은 바깥 뜰보다 높아서 백성들이 잘 바라볼 수
있었다.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 이는 스스로 축복의 길을 버리고 저주의 길을 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한편, 스가랴가 예언할 이 때에 이미 '전쟁의 소문들'이 횡행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Barker).
=====24:21
전(殿) 뜰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 요아스는 무리의 꾀임에 빠져 의로운 스가랴를
돌로 처죽이도록 명하였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였거나(레
24:16), 몰렉에게 자녀를 바쳤거나(레 20:2), 아들이 아비에게 완악하고 패역하였거나
(신 21:20,21), 간음을 하였을 경우에 이런 형벌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스가랴
는 이런 종류의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교의 길을 걷고 있는 요아스와 대
립된다는 이유로 처형된 것이다. 언약의 나라에서는 왕권이 최종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가 최종적이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왕권은 그 자체가 육적이요, 세상적이요,
이방적이다. 요아스는 언약의 나라의 왕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유다를다스려야
한다는 본연의 자세를 완전히 상실한 자였다.
=====24:22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 '은혜'는 히브리어로 '헤세드'(* )이며 여기서는 세
속적 의미의 구출(Williamson), 즉 목숨을 구출받은 사실(22:10-12)을 뜻한다.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 여기서 '감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다라쉬'(* )는 죄를 찾아 응징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혹자는 선지자인
스가랴가 어떻게 복수와 저주의 기도를 할 수 있는가 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특히 스
데반의 기도(행 7:60)나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기도(눅 23:34)와 비교해 볼때 이런
스가랴의 기도가 매우 부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요아스 왕과 스
가랴 사이에 올바른 공의의 판단을 구하는 기도이며, 백성들에게 공의가 가리워지지
아니하고 명백히 나타나기를 요구한 기도로 판단된다(대상 28:9;시 130:3;잠 16:2;렘
11:20).
=====24:23
일 주년 후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리트쿠파트 핫솨나'(*
)이다. 이것은 '그 해 마지막에'(KJV, RSV), '그 해가 바뀔 무렵에'(NIV, VEB,
공동번역)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이 '일 주년 후에'로 번역한 것에는 미
흡한 점이 있다. 일 주년 후란 만 1년이 지난 시점을 말하기 때문이다.
=====24:24
심히 큰 군대를 그 손에 붙이셨으니 - 침략한 아람 군대는 적은무리였고 유다는
'심히 큰 군대'였음에도 여호와께서 이 유다 군대를 아람 군대에 붙이시므로 유다는
패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이 여호와께 속해 있음
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다(20:15).
=====24:25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 요아스가 아람 군대의 침략으로 큰 부상을 입
자, 그 신복들은 이를 호기(好機)로 삼아 침상에 누워있는 그를 살해하였다. 그들의
모반의 명분은 스가랴의 피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명목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25:3,4).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원수 갚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며 정당한
사법적 절차를 걸친 형집행이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아스는 하나님 앞
에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열왕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 이 사실은 요아스의 통치에 대한 유다
백성들의 역사적 평가가 어떠했으며 역대기 저자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24:26
시므앗의 아들 사밧 - 왕하 12:21에는 사밧이 '요사갈'로 기록되어 있다.
시므릿의 아들 여호사밧 - 병행 구절에서 여호사밧은 '소멜'의 아들로 나타난다.
소멜은 시므릿의 아버지요 시므릿은 여호사밧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있다(Payne). 그렇
다면 여호사밧은 소멜의 외손이 되는 것이다.
=====24:27
요아스의 중대한 경책(警責)을 받은 것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19,20절의 예언으
로 생각하고 있고(Payne), 또 다른 사람들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바친 조공과 뇌물에
대한 경책(왕하 12:18)이라고 생각한다(Zockler).
열왕기 주석 - 왕하 12:19에는 '유다 왕 역대지략'이라고 되어 있다. '주석'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드라쉬'(* )는 '보다 기초적인 왕궁 연대기에 대한
해석'(Payne)을 뜻한다.
역대하 제 25장
=====25:1
이십 구 년을 치리하니라 - 아마샤는 유다의 제9대 왕으로서 B.C. 796-767년까지
다스렸다.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 여호앗단은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위해서 선택해
준 두 명의 아내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4:3). 그녀가 예루살렘 사람이라
는 사실은 여호야다가 요아스의아내를주의깊게 선택하였다는것을 보여 준다
(Barker).
=====25:2
아마샤의 통치에 대한 총평이다. 그의 통치 성격은 병행 구절인 왕하 14:3,4에 더
상세히 나타난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다윗 왕의 훌륭한 통치에
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통치는 부왕(父王) 요아스의 통치와 비슷하였다. 그 역시 산
당을 제하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다.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 역대기 저자가 아마샤의 통치 후반부를 한마
디로 평가한 표현이다. 그는 이런 평가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그자료를제시하였
다. 즉, 아마샤는 에돔 정벌시 세일 자손의 우상을 가져 왔고 그것을 숭배하였다(14
절). 또한 그는 선지자의 권고도 듣지 아니하고 에돔 신들을 의지하였다(20절).
=====25:3
그 나라가 굳게 서매 - 나라가 굳게 섰다는 사실을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모반(謨叛) 세력(24:25)의 약화와 아마샤의 왕권 강화를 들 수 있다. 요아스를 죽인
신복들의 추종 세력과 왕위를 새로 이은 아마샤의 추종 세력 사이에는 정치적 갈등,
힘의 갈등이 존속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마샤가 반대 세력을 처단할수 있을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2)유다가 등을 돌린 에돔을 정벌할 수 있을 정
도의 경제력과 군사력(5,6절)을 갖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3)아마샤의 통
치 성격이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
것은 모반자들의 재판과 용병 10만을 돌려 보낸 사실(10절)에서 엿볼 수 있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 다윗도 기름부음 받은 사울 왕을 해(害)하였
다고 말한 아말렉 소년을 처형하였다(삼하 1:5-15).
=====25:4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 동양에서는 모반자의 일가 전체까지 죽여 후환
을 없애는 예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아마샤는 부왕을 살해한 자들만 처형하였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감정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법적 처리를 하였다.
그는 '모세 율법책에 기록한 대로' 곧, 신 24:16에 근거하여 형을 집행하였다. 신명기
의 이러한 법 정신, 즉 범법(犯法) 행위에 대한 사법적 형집행 원리에 있어서 범법자
만 처벌한다는 정신은 고등한 것이다. 이러한 법 정신은 반(反)국가 단체에 가담, 협
력하였을 경우 그 자녀와 친척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의 형법 현실에 비추
어 볼 때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25:5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되 - 이러한 군대 조직에 대해서는 민 1:2-2:34을 참조하
라. 아마샤는 지금까지 국내의 혼란으로 약화되었던 군대를 다시 강화하고 조직화하였
다.
삼십 만을 얻고 - 이는 아사의 군대 58만(14:8)과 여호사밧의 군대 116만
(17:14-19)에 비해 오히려 작은 수이다. 이러한 병력의 감축으로 인하여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로부터 10만의 용병을 사들였다.
=====25:6
은 일백 달란트 - 1달란트는 약 34kg이므로 이것은 약 3.4톤에 해당되는 엄청난 양
이다.
=====25:7
어떤 하나님의 사람 - '하나님의 사람'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선지자를 지칭하는 일
반적인 칭호이다(Curtis). 모세(30:16;신 33:1;수14:6;대상 23:14;스 3:2), 다윗
(8:14;느 12:24,36)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 표현하기도 했으며, 삼손의 부친
마노아의 부인은 천사를 가리켜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삿 13:6,8). 그러나 위의 경우
를 제외한 일반적인 용법에서는 선지자를 지칭한다(삼상 2:27;9:6;왕상
12:22;13:1,26;17:18,24;20:28;왕하 1:9등).
이스라엘 군대로 왕과 함께 가게 마옵소서 - 하나님의 사람은 아마샤에게 이스라엘
의 용병을 에돔 정벌에 쓰지 말 것을 권고한다. 그는 그 이유로서 두 가지를 제시하였
다. 본절에 그 첫 번째 이유가 나오는데,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아니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다 왕 아비야가 북왕국 여로보암과 더불어 싸울
때 밝혀진 것으로(13:4-12) 유다가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윗 왕통을 잇고 있으며 여호
와를 예배하는 나라이지만, 북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시지 않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온 에브라임 자손 - 이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에브라임 지파
는 북이스라엘의 최고 지파이기도 하고 그 영토도 북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선지자들은 종종 북이스라엘을 가리켜 '에브라임'이라 호칭하였다(사
9:9;17:3;28:3;호 14:8).
=====25:8
하나님의 사람은 여기서 용병을 쓰지 않아야 할 두 번째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유다 군대가 용병 대신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용병을 쓰는 것
은 아마샤에게 믿음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보다 우
월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마샤 왕을 대적 앞에 엎드러지게 하실 것이다.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 이는 '만일 왕이 이
스라엘 군대와 함께 전쟁에 나간다면 아무리 용감하게 싸운다해도 하나님께서는 왕을
원수 앞에서 패하게 하실 것입니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카일(Keil)은 전통
적인 이러한 해석에 반대한다. 그는 주절(主節)에서 동사 앞에 부정사 '로'(* )를
삽입하여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면 그것은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
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대적 앞에 엎드러지게 아니 하시리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아마샤가 이스라엘과 함께 나가지 아니하고 힘써 싸운다면 패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뜻
이 된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과 많은 역본(KJV, RSV, NIV, NEB, JB, 공동번역)들은
이러한 카일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입장을 취한다 할지라도 그
근본 취지는 변치 아니하며 아마샤의 믿음을 촉구하는 데 모아지고 있다.
=====25:9
어찌 할꼬 - 아마샤는 선지자의 충고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눈앞의 손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것인가 하는 일대 선택의 기로에 처하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더 풍성히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어 눈앞의 손실을 기꺼이 감
수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25:10
심히 노하여 - 이들이 분노한 것은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용병들은 비록 삯을 받고 고용되긴 했지만 그들이 전쟁에 참여할 때는 많은 전리품 등
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지 못한 데 대하여 분노한 것이다(Curtis). 그래
서 그들은 유다 성읍을 노략하였다(13절).
=====25:11
담력을 내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트하자크'(* )는 '강하게 되
다'라는 뜻의 동사 '하자크'(* )의 히트파엘형(Hithpael:강조형 재귀)으로서 '스
스로 강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외형적인 군비(軍備)보강 등에 의하여 강해진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용기를 얻은 것을 가리킨다.
염곡 -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4:7 주석을 참조하라.
=====25:12
바위 꼭대기 - 왕하 14:7의 '셀라'는 '바위'라는 뜻의 히브리어 '셀라'(* )를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셀라'는 에돔의 수도인 듯하며 오늘날의 '페트라'(Petra)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4:7 주석을 참조하라. 이 지역은 곧
에돔 사람들에 의해 재탈환되었다(28:17;사 16:1,2;암 1:11).
=====25:13
사마리아에서부터 벧호론까지 - 아마샤가 돌려 보낸 용병들은 사마리아까지 되돌아
갔으나 곧장 다시 돌이켜 사마리아와 벧호론 사이에 있는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유
다 사람 3천을 죽였다. 이때 이들은 아마샤가 자신들을 단순히 되돌려보낸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이같은 약탈 행위를 저지른 것 같이 생각된다. 한편 벧호론의 위치에 대
해서는 대상 7:24 주석을 참조하라.
=====25:14
세일 자손의 우상들 -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에돔 사람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이 무엇
인지 성경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유다 왕 아마샤가 패배시킨 나라의 신들을 섬기기 위해 그 우상들을 가져왔다는 점이
다. 그는 그 우상들의 화려하고 웅장한 외형에 현혹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승리에 도취되어 여호와를 잊는 만심(慢心)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25:15
저 백성의 신들이...구원하지 못하였거늘 - 세일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 ,
엘로헤)이 다신임은 (1)복수형 명사에서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하나님'
(* , 엘로힘)도 복수로 나타내어 그 광대함이나 웅장함을 표현하므로 명확하지
는 않다. (2)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명사의 서술 동사인 '구원하다'(* , 히찔
루)가 3인칭 복수형인 것을 보면, 분명히 '신들'이 광대함이나 웅장함을 나타내는 복
수형이 아니고, 숫자적으로 복수인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아마샤는 다신교
배경에서 온 우상들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섬기려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를 면치 못
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만 구원자이시며, 그 신들은
자기 백성인 세일 사람들을 아마샤의 손에서조차 구원하지 못한 무능한 신임을 지적하
면서 아마샤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다.
=====25:16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謨士)를 삼았느냐 - 여기서 '우리'는 왕과 그 신하들을 가
리킨다. 그리고 이 구문의 의미는 '어찌하여 네가 우리의 일을 간섭하느냐'이다. 아마
샤의 이 반박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을 뿐
만 아니라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매우 교만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25:17
상의하고 - 이는 '모사를 구하고', '충고를 받아들여'라는 뜻으로서 아마샤가 선지
자의 경고를 거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였음을 가리킨다.
오라 서로 대면하자 - 이는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에게 보내는 정식 선전포고문이
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의 약탈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대가를 요구하기 위하
여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상대를 위축시키려 했을 것이다. 이때 아마샤가 북이스라엘
왕에게 요구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혹자는 18절에 나오는 우
화(寓話)를 근거로 결혼 동맹을 요구하였다고 추측한다(Curtis). 그러나 18절의 우화
가 실제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요아스의 무분별한 행동을 지
적하기 위한 풍자적인 표현법으로 보인다.
=====25:18
본절의 우화는 아마샤를 모욕하기 위한 것으로서, 요담의 비유와 유사하다(삿 9:7
이하). 여기서 풍자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나무들'을 의인화시켰는데 가시나무는 유다
를,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지칭하여 요아스는 결코 아마샤가 이스라엘과 대등한 관계로
대면할 수 없다고 비꼬아 말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4:9 주석을 참
조하라.
=====25:19
어찌하여 화를 자취(自取)하여 - 이는 24:20의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라는
말과 의미가 동일하다. 이는 순리에 어긋나게 교만하여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결국 파
멸할 수 밖에 없다는 뜻으로 요아스가 아마샤를 따끔하게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25:20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 이 구절은 역대기 저자가 14-16절과연관지어
언급한 해석으로 보인다. 교만하여져서 마음이 굳어진 아마샤는 결국 선지자의 예언
(16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마샤에게 강퍅
한 마음을 넣어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다. 즉, 아마샤의 교만
과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 두신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완악해진 그는 선지자의
예언(16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25:21
유다의 벧세메스 - 요아스가 유다의 중심부를 치기에 가장 유리한 고지이면서 유다
땅이었던 벧세메스에 올라왔다는 것은 이 전쟁이 북왕국에 의해 먼저 시작된 것임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래서 커티스(Curtis)는, 왕하 14:11은 북이스라엘이 먼저 전투를
시작한 것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선전 포고문을 받은 뒤
일단 유다 왕 아마샤에게 경고하고, 아마샤가 자긍하고 있는 틈을 타 기습적으로 공격
하였을 것이다. 한편, 벧세메스의 위치에 대해서는 왕하 14:11 주석을 참조하라.
=====25:22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 이는 모든 병사들이 놀라 자기 집으로 도망간 것을 가
리킨다(10:16;왕상 8:66). 이처럼 아마샤의 군대는 전의(戰意)를 상실하여 뿔뿔이 흩
어지고 말았다.
=====25:23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 '에브라임 문'은 '베냐민 문'이라고 불리
우기도 하는데 예루살렘 성읍 북쪽에서 에브라임 땅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그리고 '성
모퉁이 문'은 옛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다메섹으로 통했다. 이처
럼 북이스라엘의 군대는 북쪽으로 향해 있는 모든 벽을 헐어 버리고, 유다 왕 아마샤
를 포로로 잡았다. 즉, 유다는 이스라엘의 세력권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기타 성문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병행 구절인 왕하 14:13 주석을 참조하라.
=====25:24
오벧에돔의 지키는 모든 금은 -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의 전(殿) 안에 있는
모든 금은과 기명들을 '오벧에돔'이 지키던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왕하 14:14에
는 그런 표현이 없다. 한편 대상 26:15에 따르면, '오벧에돔'의 가문은 레위 지파로서
성전의 곳간을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아마샤를 잡아갔다가 다시 본국
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간 것 같다(Josephus). 따라서 볼모
로 잡혀간 사람들은 왕의 자녀들이거나 왕족일 가능성이 크다(Barker). 이와같이 이스
라엘이 유다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간 것은 유다가 다시는 이스라엘에 대해대항하지
못하게 하고, 또 이스라엘이 유다의 내정(內政)을 간섭하겠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25:25
아마샤가 십 오 년을 생존하였더라 - 이스라엘에게 패한 후유증으로, 아마샤의 세
력은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죽은 이후에도 그 세력은
회복되지 못하였고, 온갖 음모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 15년의 기간은 아마 그에게
있어 형벌과 같았을 것이다.
=====25:26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 - 왕하 14:18에는 '유다 왕 역대지략'이라고 기록되어 있
는데 이는 주요하게 사용된 역사 자료들로 보이며(O.Zockler, Curtis), 이 두 자료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Curtis).
=====25:27
아마샤가 돌이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 이것은 무리들이 아마샤를 대항하여 모
반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모반이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역대기 기자는 말한
다.
무리가 저를 모반한 고로 - 여기서 '무리'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요아
스 통치 말기부터 아마샤의 통치 때까지 유다를 집권한 방백들에 대항하여 반감을 품
고 있던 무리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 그 세력을 상실한 제사
장들과 레위인들(24:15-19)과 의로운 백성들이 바로 그 무리들인데 이들은 유다를 '제
사장의 나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래서 일찍이 16세로 부친과 함께 통치를 시작한
어린 웃시야를 완전한 통치자로 옹립시키고자 했을 것이다(Curtis). 그리고아마샤가
이렇게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교만해져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래서 역대기 기자는 이것을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린' 시기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다.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 라기스는 예루살렘의 남서쪽 약 40km지점에 위치한 요새
로서 여로보암 때로부터 애굽인을 막는 중요한 기지로 사용되어 왔다(11:9). 한편 아
마샤가 이곳으로 피신한 것은 이미 위태해진 왕권을 회복시키려는 시도 때문이었거나
(Payne), 아니면 다급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
객에게 살해됨으로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25:28
유다 성읍에 장사하였더라 - 병행 구절인 왕하 14:20에는 '다윗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역대기 필사자의 실수인 것으로 추측된다(Barker, Keil, Curtis). 한편
앗수르 왕 에살핫돈(Asarhaddon)의 비문에는 유다 왕 므낫세가 '유다 성읍의 왕'이라
고 표기되어 있다(Curtis). 여기서 우리는 '유다 성읍'이 바로 남유다의 수도였던 예
루살렘을 가리키고, 후대에는 '다윗성'이라는 이름 대신 '유다 성읍'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Payne).
역대하 제 26장
=====26:1
유다 온 백성이...왕을 삼으니 - 본절에서 '유다 온 백성'이 왕위 계승 사건의 주
체로 등장한 것이 좀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유다 온 백성'은 아마샤에 대
하여 모반(謨叛)을 일으킨 무리들을 지칭하며(25:27),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의 즉위가
모든 백성의 환호를 받았음을 시사해 주기 위하여 이같이 기록하였을 것이다. 일반적
으로 왕위 계승 문제를 백성들이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대기에는 직접적으로
(23장), 또는 간접적으로 백성들이 왕위 계승에 관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고 백성들이
왕위 계승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태도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22:1;23:21;왕하
11:20).
웃시야 - 열왕기에서는 주로 '아사랴'(왕하 14:21)로 쓰고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통상 웃시야는공식적인
왕명으로, '아사랴'는 본명으로 쓰였다고 생각한다(Keil, Barker). 솔로몬의 경우에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공식적인 왕명이 었으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여디디야'라고
불리웠다(삼하 12:24,25).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4:21 주석을 참조하
라.
=====26:2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 '엘랏'(왕하 14:22)이라고도 불리우는 엘롯은
다윗 시대 이래로 유다에 복속된 에돔 땅이었다(8:17). 이는 여호람 때에 에돔의 반란
으로 잃었다가(21:8-10), 웃시야의 부친 아마샤에 의해 다시 찾은 땅이다(25:14). 그
리고 유다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로 이 땅은 거의 방치 상태에 있다가 웃
시야에 의해 비로소 건축되고 유다 성읍의 일부가 된 것이다.
=====26:3
예루살렘에서 오십 이 년을 치리하니라 - 웃시야가 통치한 기간은 B.C.791년부터
739년까지이다(Payne, Wood). 그의 부친 아마샤가 24년간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고, 웃
시야는 그의 아들과 함께 12년을 통치했다(Wood). 따라서, 웃시야가 단독으로 통치했
던 기간은 16년 정도가 된다.
여골리아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콜르야'(* )는 케레(Qere:읽히
는 것)로서, 많은 사본들과 왕하 15:2에서도 동일하다. 케티브(Ketib:쓰여지는 것)는
모음만 바꾸어서 '예킬르야'라고 표기한다. 그런데, 개역 성경 왕하 15:2에서의 '여골
리야'와 다르게 '여골리야'로 표기된 것은 번역상의 오류인 것같다. 그리고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강하게 만드신다'이다.
=====26:4
정직히 행하며 - 왕하 15:4에서는 그가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山堂)은 제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고 기록하
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의 실수들을 후반에 기록하여 둠으로써(16절),
웃시야가 전반적으로 선한 왕이었음을 강조하는 듯하다.
=====26:5
하나님의 묵시(黙示)를 밝히 아는 스가랴 - 이 선지자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가 없으며, 단지 본절을 근거로 하여 그가 웃시야 왕의 조언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묵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르오트'(* )가 어떤 자질이나 활
동만을 의미한다고 킴취(Kimchi)는 언급했다. 그러나, 이는 '비르아트'(* )
에 대한 철자법 실수로 보인다. 따라서, 70인역과 다른 고대 역본들은 본절을 해석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교훈을 주는자 스가랴'로 해석한다(Keil).
=====26:6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 웃시야는 여호람 때에 유다를 침공하며 예루살렘을 약탈하
였던(21:16,17)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 출전하였고, 이전쟁에서
블레셋의 주요 성읍 가드, 야브네, 아스돗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아스돗 땅과 블레
셋 땅 여러 지역에 새롭게 성읍을 건축하였는데, 이는 웃시야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
하였음을 보여준다(Keil).
가드성 - 이 성은 본래 블레셋의 주요한 다섯 성읍들 가운데 하나로(삼상 6:17),
초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대상 7:21).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30여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기름진 평야 지대이기 때문에 르호보암 때에는 가드가 전략적으로
도 중요하게 취급되었다(11:8). 하지만, 이 성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Payne).
야브네 - 성경에서는 단지 이곳에서만 언급되어 있으며, 수 15:11의 얍느엘이 동일
지명인 것으로 추측된다(Crutis). 그리고 오늘날은 '예브나'(Yebna)로 알려져 있으며
욥바의 남쪽 19.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헬라어 지명은 '얌니아'(Jamnia)로 알려져
있는데 유대 역사상 마카비 시대 이후에 부각되어 나타난다(마카비상 4:15). 또한 예
루살렘 몰락후(A.D. 70년)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유대인의 종교적 민족적
중심지가 되었다(Jewish Encyclopedia).
아스돗성 - 이는 욥바와 가사 중간에 있는 유명한 블레셋 성읍으로 오늘날에는 '에
스돗'(Esdud)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에서 4.8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해안 도시로
(Curtis) 개역 성경의 행 8:40에는 '아소도'로 표기되어 있다.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 가운데 성읍들을 건축하매 - 웃시야는 이 성읍들을 정복
한 후에 이 지역을 다스리고 또 더 나아가 이 지역에 성읍들을 건축하여 전초 기지로
삼았는데, 이는 블레셋의 다른 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고, 그 통로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Barker).
=====26:7
구르바알 - 이곳의 위치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혹자는 이 문자의
판독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Curtis). 아람어 성경에는 이 지명이 '게
랄'(Gerar)로 번역되어 있고 70인역에는 에돔 족속의 수도인 '페트라'(Petra)로 번역
되어 있다. 그러나 '페트라'보다는 오히려 탈무드가 제시한 대로 '게랄'(그랄, 창
20:1)이라 할 수 있다(Keil, Zockler). 한편, '구르바알'의 뜻은 '바알의 거처'인데
이곳에 바알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인 것으로 추측된다(Barker).
마온 사람 - 이는 사해의 남동쪽, 에돔의 동쪽 변방에 거주했던 사람들로서(대상
4:41), 세일 산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세일 산 사람과 동일시 되는 경우
도 많았다(20:1).
=====26:8
암몬 사람이...조공(朝貢)을 바치매 - 본절과 7절의 문맥은 서로 연관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웃시야가 정복한 지역은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인데 조공을
바친 족속은 그와 반대편인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몬 족속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
다. 70인역에서는 암몬 대신 '마온'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인정하는 학자들도 많
다(Benzinger, Zockler).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절이 그대로, '암몬'을 가리킨다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많은데(Keil, Kittel), 그들은 웃시야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
몬 족속까지 정복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10절에 '평지'(mishor)가 나오는데 이곳은 본래 르우벤 지파의 땅으로서 이스라엘이
모압과 암몬에게 빼앗긴 것을 웃시야가 다시 정복했다는 것이다. 위의 두 견해 중 '암
몬'을 '마온'으로 보는 전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1)문맥의 흐
름상 '마온'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2)암몬과의 싸움은 후에 요담에 의해서 치
러지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27:5).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 이것은 웃시야의 세력과 영향력이 얼마나 확대되
었는가를 나타내 보여 준다.
=====26:9
본절은 웃시야가 나라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성채의 벽과 문들에 망대를 세
워 예루살렘을 더욱 요새화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성 모퉁이 문 - 이는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문이다(25:23).
골짜기 문 - 이는 일반적으로 성의 서쪽 야파(Jaffa)문이라고 본다(Robinson,
Keil). 그러나 성의 남서쪽 모퉁이 문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느 2:13;3:13;Guthe,
Mitdell).
성굽이 - 이것은 '모퉁이'(corner) 또는 '모서리들'(angles)을 가리키며 의미상 성
벽이 굽어져 있는 여러 곳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Benzinger), 여기서는 특
정한 한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며, 동북쪽 모퉁이일 것으로 보인다(BDB). 이에 대한 보
다 자세한 내용은 느 3:19,20,25 주석을 참조하라.
=====26:10
거친 땅에 망대를 세우고 - 여기서 '거친 땅'은 사해 서편에 있는 유다 광야를 가
리키며, 망대가 세워진 곳은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추측된다. 웃시야 왕은 국가의 주
요 소득원이 되는 가축을 주위 유목민들의 강탈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망대들을 이곳에
세웠는데, 이 망대는 전시(戰時)에 피난처로도 용이하게 사용되었다.
물 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 '물 웅덩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로트'(* )
는 '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사람과 동물들을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물저장 탱크
를 가리키는 듯하다(Curtis).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 여기서 평야(Shephelah)는 지중해 근방에
있는 저지대를 가리키며(1:15;9:27;대상 27:28) 평지(mishor)는 아르논과 요단 동편의
헤스논 사이에 있는 평평한 지역을 가리킨다(신 3:10;4:43;수 13:9;렘 48:8,21). 그런
데 이 평지는 8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암몬 족속의 정복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고 단
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웃시야가 암몬 족속이 차지한 이 땅의 많은 부분을빼앗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본절의 '평지'가 요단 동편 땅 만을 지칭하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Curtis).
여러 산과 좋은 밭 - 여기서 '좋은 밭'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카르멜'(* )은
고유 명사로 '갈멜 산'을 가리키기도 하고(수 12:22;암 1:2), 보통 명사로 '비옥한
땅'을 뜻하기도 하는데(사 29:17;32:15), 여기서는 '비옥한 땅'을 뜻한다(Zockler).
웃시야 왕은 산과 밭에 농사 짓기를 크게 장려하였는데, 이같이 강력한 중농 정책(重
農政策)을 실시한 왕을 다윗 가계의 왕들 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6:11
왕의 장관 하나냐의 수하에 속하여 - 이 군사를 뽑는 일은 서기관 여이엘과 영장
마아세야의 임무였으나, 이 군대의 지휘는 하나냐에게 맡겨졌다.
=====26:12
족장 - 유다나 이스라엘의 군대 편성은 가계별로 이루어졌으며, 한 가계의 지휘는
족장의 손에 맡겨졌다(대상 9:33).
모두 큰 용사요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기보레 하일'(* )
은 '용감한 용사', '영웅'을 뜻하기도 하지만 재산이 많아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
키기도 한다. 그런데 족장이 단순히 용감한 용사를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여
기서는 한 가계(家系) 내(內)의영향력있는 지도자를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Davidson, Curtis).
=====26:13
그 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 오백명이라 - 족장의 수는 2600명이고 군대 수는
307,500명이었다. 이것은 아마샤의 군대보다 7,500명이 더 많은 수이다(25:5).
=====26:14
방패와 창 - 14:8;17:17;대상 5:18을 참조하라.
투구 - 겔 27:10;38:5 등에서 창, 방패와 함께 언급되어진다(삼상 17:5;사 59:17;
렘 46:4).
갑옷 - 18:33과 삼상 17:5,38;왕상 22:34;느 4:16등을 참조하라.
활과 물매 돌 - 주로 베냐민 사람들이 사용하던 무기였으며 이들은 간편한 차림으
로 전쟁에 참여했다(14:8;삿 20:16;대상 12:2).
=====26:15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創作)하여 - 이는 분명히 새로운 형태의 무기가 기술
자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본절의 설명에 의하면, 이 무기는 망대나 성곽 위
에 세워진 일종의 투석기(投石機)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이전에 이러
한 무기가 사용된 적이 없으며 성경에도 그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당시 애굽이나 앗
수르에서는 많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혹자는 이 무기가
유다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무기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분명히 유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무기였을 것이다. 벤징거
(Benzinger)는 이 무기들이 주로 방어용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 이렇게 웃시야가 군대를 강하게 하고 군
사 시설을 잘 정비함으로 인하여 이후 유다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예로서
(1)히스기야가 블레셋을 크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웃시야의 강력한 군사 정책의 결
과였다. (2)앗수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을 때, 히스기야가 잘 막아낼 수있었던것
은 웃시야에 의해 만들어진 강력한 방어 시설 덕택이었다. (3)이사야의 예언들을 살펴
보면, 아하스 당시에 유다가 상당히 번영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 또한 웃시야
의 영향이다(Curtis). 한편,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이러한 업적의 결과
들이 여호와의 '기이한 도우심'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을 전제로 덧붙이고 있다.
=====26:16
저가 강성하여지매 - 본절을 유도하는 접속사 '우'(* )는 전(前)절과 역접 관계로
'그러나'라고 해석할 수 있다(KJV, NIV, RSV, NEB, JB). 이것은 지금까지의 웃시야의
선정과는 반대로 이제부터 교만하여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삶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
다. 그리고 그러한 교만한 삶은 군사적, 경제적 권력을 얻게 되면서 시작된다. 따라
서, 그는 그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종교까지 자신의 권력에 통합시키려 했던 것 같다.
향단(香壇)에 분향하려 한지라 - 이러한 종교적 예배 행위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
졌었고, 아론의 자손들, 즉 제사장들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출 30:1-10;민
16:40;18: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가 향단에 분향하려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당시 애굽이나 근
동의 왕들은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겸하고 있었다. 웃시야가 보기에는 그것이 중앙집권
을 강화하고 나라를 확고하게 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웃시야
는 두 직분을 겸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를 이방의 나라와 같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2)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대왕이 되려는 야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는 이 두 왕들처럼 대제사장 직분까지도 행함으로써 스스로 위대한 왕이 되고자 했
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그는 다윗과 솔로몬의 대제사장직 사역을 잘못 이해하
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윗과 솔로몬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역에 따라
성전 봉헌 때의 봉헌 기도, 제사장의 반차 제정, 희생제 등과 같은일들을행하였을
뿐 분향이나 지성소의 출입과 같은 제사장들의 고유한 업무를 침해한 것은 아니기 때
문이다. 이러한 오해도 역시 그의 교만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6:17
제사장 아사랴 - 아사랴에 관해서는 본문 이외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한편 그
가 제사장이었는지 대제사장이었는지는 분명히 단정지을 수 없으나, 20절에 '대제사
장'이란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야다의 경우와 같이(24:6 주석 참조) 그의 역할
상 '대제사장'이라는 존칭이 주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Zockler). 한편 카일(Keil)은
그가 대상 6:36에 언급된 아사랴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나, 그는 다윗 시대의 제사
장 헤만(대상 6:33)의 조상이므로 결코 동일 인물이 될 수 없다.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 인 - 제사장 아사랴가 이끌고 온 제사장 80인은
모두 용맹한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용맹한'(* , 하일)의 의미는 제사장 가운데
'신실한 자', '세력있는자', '유지'(有志)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사랴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대표자들을 대동하여 웃시야 왕의 월권(越權) 행위를 막고자 했음이 분명
하다.
=====26:18
웃시야 왕을 막아 - 여기서 '막아'에 해당하는 히브리 본문의 원뜻은 '웃시야의 얼
굴을 대면하고 섰다'이다. 즉, 이것은 단순한 경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저지하였음을 가리킨다.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 이는 단순히 웃시야의 명예와 영광이 더 이상
하나님에 의해 증대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Zockler)가 아니라, 웃시야의 모든 행위
가 여호와에게서 옳다 인정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6:19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문둥병이 발한지라 - 제사장들이 율법의 규례를 상기
시키면서 죄악을 지적하였으나, 웃시야는 도리어 분노하면서 분향하는 일을계속하려
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문둥병에 결리고 말았다. 이처럼 제사장의 권위에 도
전하고 또한 성전을 모독하다가 비침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로는 나답과 아비후(출
6:23;레 10:1,2), 고라 자손들(민 16:1-3,28-35), 웃사(삼하 6:6,7)등이 있다.
=====26:20
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 문둥병은 웃시야를 전에서 몰아낼 가장 확실한 구실이 되
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는 항상 성 밖으로 격리 수용시켜서,
성전이 든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든지 일체 접근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레
13:46).
=====26:21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므로 - 문둥병자가 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행
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따로 특별히 마련된 별궁에 격리 수용되어 있었다. 여기
서 '별궁'(* , 베트 하하프쉬트)에 해당하는 부분의 자세한 내용은
병행 구절인 왕하 15:5의 주석을 참조하라. 그가 이처럼 별궁에 격리 수용된 것은 더
이상 여호와의 전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6:22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 - 선지자 이사야(사 1:1;6:1)는 주로 히스기야 왕 시
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웃시야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주로 전승이나 자료를 통해 썼
을 것이다(Barker). 혹자는 이 기록이 이사야의 독립적인 한 작품이 아니라 '이스라엘
과 유다 열왕기'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Bertheau, Zockler).
=====26:23
저는 문둥이라 하여...장사하니라 - 병행 구절인 왕하 15:7에는 단순히 그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본절에서
는 보다 상세하게 '열왕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 열조의 곁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그가 문둥병자였기 때문에 왕의 가족 묘실 안에들어가지 못하고
따로 그 묘실 곁에 만든 묘실에 장사되었음을 가리킬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장사는
이전의 여호람(21:20)이나 요아스(24:25)의 경우처럼 불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이였기 때문에 다른 열왕들과는 달리 '그곁에' 묻히게 되었다.
역대하 제 27장
=====27:1
나이 이십 오 세라 - 그가 약 10년 정도를 그의 부친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다는 사
실로 미루어, 그는 35세 때부터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 육 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16년은 웃시야가 섭정한 기간도 포함하고 있다.
여루사 - 이 이름의 히브리어 표기는 '예루솨'(* )인데 왕하 15:33에는
끝 자음이 알렙(* )이어서, '예루솨'(* )로 되어 있고(BHS), 몇몇 사본들에
서는 역대기 본문과 일치한다(BHS Appartus).
사독의 딸이더라 - 이 사독이 대상 6:12에 기록된 대제사장 사독일 가능성이 있는
데(Curtis), 요담의 부친 웃시야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26:16-19) 정책적으로
사독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고, 반면에 제사장들의 간섭에 의해 제사장의 딸과 결
혼하였을 수도 있다(24:3).
=====27:2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정직히 행하였으나 - 요담이 통치하던 기간 중 상당히
오랜 동안 웃시야가 살아 있었다. 요담의 부친 웃시야는 비록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였지만(26:21),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Leon Wood). 따라서 요담은 웃
시야의 많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당
한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고, 요담은 아버지의 모습을 접하
면서 하나님께 대해 더욱 정직하게 행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 맛소라 본문(MT)에는 본 구절 앞에 '단지'
(only)라는 뜻을 가진 부사, '라크'(* )가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행하였)으
나'로 번역된 이 접속사가 앞 문장과 대조를 이루게하여 요담이 웃시야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행하였지만, 예외적으로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범죄하는 일 만큼은 삼가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 병행절인 왕하 15:35에서는 "백성이 오
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당 제사를 '사악
을 행하였다'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역대기 저자가 이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는지 발
견하게 된다.
=====27:3
전 윗문 -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베냐민의 윗문'(렘
20:2)이라고도 불리워진다(Benzinger). 그리고 또 23:20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문
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 뜰로 통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문은 아마샤 왕 때 헐린
것으로 보여진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와 전쟁하던 아마샤가 사로잡히고,예루살렘
성벽이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이 헐렸는데, 이 때에 윗문
도 무너졌을 것이다(25:23;왕하 14:13). 그리고 이때 무너진 성벽의 많은 부분은 요담
의 부친 웃시야에 의해 거의 보수되었고(26:9), 요담도 웃시야의 건설 정책(26:9f.)을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오벧성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펠'(* )의 원뜻은 언덕, 낮은 야산을 가
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3:1) 남쪽경사지를 그렇게
불렀다(33:14;느 3:26,27;11:21). 어떤 학자들은 이 성을 다윗성과 동일시하지만(G.A.
Smith), 오벧성은 다윗성과는 분명히 다르며, 다윗성이 있는 언덕의 북동쪽 지점에 위
치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후기 유다 왕들이 요새화하려 했던 곳이다.
=====27:4
유다 산중에 - 여기서 '산'은 평지 또는 저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서 요새화
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성읍들은 산지나 산지의 숲 속에 세워졌다(사 2:15;호 8:14).
영채(營寨) - 이에 해당하는히브리어 '비라니요트'(* )는 '성'
(castle) 또는 '궁'(palace)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상 11:16의 '영채'(* , 네
치브)나 삼하 11:11의 '영채'(* , 숙코트)와는 달리 여기서는 '요새'라는 의미
에 더욱 가깝다(Lange, Keil & Delitzsch). 따라서 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가 숙
영(宿營)할 수 있는 요새를 가리킨다. 수풀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는 그만큼 위
장이 잘 되어 있어서, 적의 공격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할 수 있
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망대 - 이것은 적의 침공을 사전에 발견하여 대비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적의 동태
를 감시하여 대비하는 데 용이했다(14:7;26:9;삿 8:9). 이와같이 웃시야 때로부터 계
속되어 온 건축 사업은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앗수르의 위협과, 북이
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 이 기록이 열왕기에는 없다. 부친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군사력과 명예를 배경으로하여, 요담은 정복 사업을 계속 추진
했다. 웃시야는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등 요단 서편 지역을 주로 정복한 반면, 요
담은 반대편인 요단 동편 지역의 땅을 차지했다(Kittel). 한편 혹자는 요담이 암몬과
싸운 이유를 암몬 자손이 웃시야때부터 바쳐오던 조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다(Barker, Keil).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명백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요담이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추진한 정복 사업의 결과로, 암
몬과 싸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 - 요담이 암몬으로부터 이렇게 많은 양의 밀과 보리를
조공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암몬 족속의 주산물의 밀과 보리였으며 그 땅이 매우
비옥하였음을 입증해 준다(Barker). 3년 동안 계속해서 바쳐진 이 밀과 보리는 아마
군량미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더 이상 암몬 족속이 조공을 바
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독립하였거나, 아니면 요담 말년에, 유다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암몬 족속이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이 시기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실(왕하
15:37)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조공에 대해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 7:1-8:8). 한편 역대기 저자가 르신과 베가의 침략에 대해 전혀 언급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아해 한다. 그 이유는 베가와 르신의 침략이 요담과 아하스 때
두번 있었던 것처럼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왕하 15:37;16:5). 그러나 왕하
15:37의 기록과 16:5의 기록이 각각 다른 사건을 가리키지 않으며 그 사건은 아하스
때에 있었음이 분명하다(사 8:6ff.).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아람.이스라엘동맹군의
침략과 요담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열왕기 저자가 같은 사건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하여 기록한 것은 요담과 아하스
가 섭정 통치를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더욱이 왕하 15:30에서는 '요담 이십
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본장에서는 '16년을 치리했다'(1절)고 기록되어 있
음을 볼 때, 섭정을 했다는 증거는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아람.이스라엘 동맹군이
공격했던 시기는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을 하고 있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러한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아하스의 범죄 때문일 것이다.이에 대한 내용은 왕하
15:30 주석을 참조하라.
=====27:6
요담이...점점 강하여졌더라 - 본절은 역대기 저자가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실제적으로도 요담의 왕국이 강하여졌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즉, 요담이 통치하던 시기에 유다의 관할 아래 있던 에
시온게벧에서 그의 공식적인 인장(印章)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Payne).
=====27:7
모든 전쟁 - 역대기 저자는 본장에서 요담의 사적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
편 웃시야가 말년에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동맹군(26:11ff.)을
요담이 맡았을 것이다(26:21). 이는 요담이 그때부터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딜리(Thiele)는 앗수르의 연대기를 근거로 하여 B.C.743년경에 디글랏
빌레셋 3세에 의해 유다가 패퇴되었다고 제안하는데(Payne), 역대기 기자는 이러한 패
전 사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어떠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 왕하 15:36에는 '유다 왕 역대 지략'이라고 기록되어
'이스라엘'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문은 역대기 기자의 규칙적인 관습에 의한 것이며
(16:11, Williamson), 열왕기서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에 해당한다(Curtis).
=====27:8
본절은 1절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글의 형식상 이러한 반복이 생긴 것 같다. 즉, 1
절은 통치 서론으로서, 8절은 통치의 결론으로서 기록된 것이다. 또한 28:1의 표현과
명확하게 대조하기 위해 반복한 것 같다.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 육 년이라 - 딜리(Thiele)는 베가 17년(B.C.743)부터
요담이 그의 아들 아하스와 섭정하였고,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이 실제로는20년간이
라고 한다. 이는 왕하 15:30에서 '요담 이십 년'이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요담 20년은 그의 아들 아하스가 24세 되던 때이다(자세한 내용은 왕하 16:2의 주석을
참조하라). 뿐만 아니라, 혹자는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시대 가운데 4년 동안은 그
들이 모두 살아 있어서, 3대에 걸친 섭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ood).
=====27:9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8절의 논의가 타당한 것으로 볼 때, 본문은 아하
스가 웃시야와 요담의 섭정을 함께 받았다가(Wood), 요담의 섭정을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역대하 제 28장
=====28:1
아하스 - 아하스의 공식적인 통치 기간은 B.C. 735년에서부터 B.C. 716년까지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움켜잡다'란 뜻을 지닌 '아하즈'(* )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으
며, '여호아하스'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디글랏 빌레셀의 연대표에는 '야우
하지'(Yauhazi)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하스'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앗수르 식으
로 표현해서 그런 것 같다.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 이는 다윗과 같이 여호와를 의뢰하며 통치자가 행
할 마땅한 도리를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도모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그는 이방신을 섬기며, 이방 나라인 앗수르
의 제국적인 힘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16절).
=====28:2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 이는 아하스가 유다를 제사장의 나라요,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나라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역사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북이스라엘 왕들이 저질렀던 동일한 오류와 배도
(背道)의 길로 나아갔음을 보여 준다.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 이것은 왕하 16장에는 없는 기록이다. 아하스는 유
다 열왕들 가운데 최초로 우상을 부어 만드는 범죄를 저질렀다(P.C. Barker). 이러한
아하스의 우상 숭배에 관해서는 사 2:8-18,20을 참조하라.
=====28:3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 왕하 16장에서는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
는다. 한편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오늘날의 '에르 라
바비'(er-Rababi)로 추정된다(Curtis). 여기에서 인간 희생 제사가 시행되었었다(렘
7:31).
그 자녀를 불사르고 - 아하스가 자기 자녀를 희생 제사로 드린 사실로 보아 이방의
종교 의식이 도입되었음이 분명하다(왕하 16:3 주석 참조). 커티스(Curtis)는 이러한
인간 제물의 유형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고자 했던 것(창 22장)과 입다의
맹세(삿 11:30,34ff.)에서 찾고자 하나, 결과적으로 두 사건 모두 실제로 인간 희생
제사가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아하스 이전에는 이러한 제사가 언급된 적이전혀 없
고, 아하스 이후에 므낫세가 인간 제사를 시행하였다(33:6;왕하 21:6). 그리고 유다
말기에도 적잖이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Curtis). 그런데 이러한 인간 제사는 여호
와께 대하여 악한 행위로 규정되었다(왕하 17:17;21:6;23:10;시 106:37,38;렘
7:31;19:5;겔 16:20,21;미 6:7). 그리고 모세 율법으로는 사형에 해당되는 가증한 일
이었다(레 20:1-5).
=====28:4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 이는 열왕기와 예레미야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신
12:2;왕상 14:23;왕하 16:4;17:10;렘 2:20;3:6,13). 그리고 '푸른 나무'라는 표현은
단순히 나무의 색이 푸르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상태나 크기에 있어서 멋지고
우람한 나무를 의미한다(Curtis). 따라서, 이는 자연 숭배를 말하는 것이고, 역대기
기자는 이것이 하나님께 정죄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가 이러한 자연 숭배의 제례를 시행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거역 행위였다.
=====28:5
아람 왕 - 왕하 16:6에는 '아람 왕 르신'으로 나타나 있다.
저희가 쳐서...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 왕하 16:5에는 르신과 베가가 아하스를 이
기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사실들을 볼 때 유다가 크게
패하였음이 분명하다. 이 두 사실을 서로 조화시켜 볼 때, 르신과 베가는 아하스의 왕
궁이 있는 예루살렘까지는 점령하지 못하였지만(사 7:1), 엘랏을 비롯한(왕하 16:6)
많은 성읍들을 점령하고, 유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붙이시매 - 본절에서 아람 왕과 북이스라엘 왕의 공격은 각
각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나라가 동맹하여 함께 공격한 것이다. 그러
나 공격의 방법이나 시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으며, 하나의 지휘 체제로 연합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지형상으로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서로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동맹 맺기가 쉬웠을 것이다.
=====28:6
하루 동안에 용사 십 이만 명을 죽였으며 - 역대기만이 이렇게 자세하게살륙당한
자의 수를 밝히고 있는데, 혹자는 이것이 '미드라쉬'(Midrash)의 특징이라고 본다
(Curtis). 그러나 역대기 저자가 '하루 동안'이라는 기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것
이 여호와의 징벌로 인한 살륙임을 극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120,000명을 120 '엘레프'(* , 천)로 나타낼 수 있는데, 이 '엘레프'란 단어는
'특별히 훈련된 용사들', 즉 '모든 용감한 사람들'(all valiant men, NASB)이라고 해
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Payne). 따라서, 십 이만 명의 용사가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타격적으로 중요한 전투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며, 패배를 예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8:7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 - 여기서 특별하게 '시그리'라는 용사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그 당시 대단한 위세를 떨쳤던 영웅으로서, 특별히 유다와의 전쟁에
서 큰 공훈을 세운 이스라엘의 장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왕의 아들 마아세야 - 이는 아하스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
이다. 왜냐하면 20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스가 그의 즉위 1년에 발생한 이 전쟁에서 무
기를 들 만한 큰 아들을 두었을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왕이나 궁전에 속한 어떤 특별한
직책을 가리킨다는(18:25) 것이다(P.C.Barker). (2)아하스의 삼촌이나 형제라고 추측
하여 왕족에 해당된다고 본다(Keil, Curtis). 어쨌든 '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왕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거나, 왕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궁내 대신 - 이에 대해서는 왕상 4:6;왕하 18:18을 참조하라.
총리 대신 -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미쉬네 함멜렉'(* )을 직역
하면 '왕의 바로 다음 사람'이다. 이 직책에 대하여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어떤
중요한 일에 왕을 대신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고관인 듯하다. 이처럼 궁궐의 중
요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그당시 아하스 왕의 신변에 매우 위급한 상
황이 닥쳤음을 보여 준다.
=====28:8
그 아내와 자녀 합하여 이십 만명을 사로잡고 - 페인(Payne)은 "이백 명의 알루프
(alluphs)와 그 아내와 자녀를 사로잡고"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제안한다(6절 주
석 참조). 이처럼 유다가 매우 중요한 전투력을 빼앗긴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공격
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예화 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는 거의 황폐한 지
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선지자 오뎃의 표현 가운데(9절), "노기(怒氣)가
충천하여 살륙하고"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 군대의 잔인성을 알 수 있
다. 이스라엘이 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노를 품고 잔인하게 행한 이유는 짐작컨대 당시
르신과 베가가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유다를 동맹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아하스가 이
를 거부하고 오히려 앗수르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카
일(Keil)은 이러한 북이스라엘 군대의 만행을 에브라임 사람들의 잔인성(왕하 15:16)
으로 설명하고 있다.
=====28:9
그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 이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서 여호
와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오뎃 - 이 선지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15:1,8에 동일한 이름을 가
진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는 이 선지자 보다 약 130년 전의 인물로서 동일 인물은 아
니다.
유다를 진노하신 고로 너희 손에 붙이셨거늘 - 이것은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징벌하
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비록 이스라엘이 유다에 승리는 했
지만 선지자의 경고를 받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28:10,13).
너희 노기가 충천하여 살륙하고 - 이는 북이스라엘 군대가 유다에 대한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온갖 잔인함으로 무자비하게 살륙을 행하였음을
지적하는 구절이다. 한편 극한 범죄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창 18:20,21과 스 9:6을
참조하라. 결국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무절제한 살륙을 자행함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그리고 그
러한 그들에게 여호와의 진노가 임박하였다는 것이다(11절).
=====28:10
노예를 삼고자 - 유다 백성이 동족(同族)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노예로삼으려는
북이스라엘의 그릇된 행위에 대해 선지자 오뎃은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처럼 이스라엘이 오뎃에게 비난받는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신 것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너
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고 선지자가 반문했을 때, 그 말의 의미
는 죄인이 죄인을 징벌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고자 했던 무리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말씀과 흡사하다(요 8:1-11). (2)
동족을 노예로 삼으려 한 것은 엄연히 율법에 어긋난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스
라엘에서는 동족을 학대하거나 노예로 삼는 일이금지되어 있었다(레 25:39,46;신
28:68). 물론 이방인의 습성으로 인해 여호와의 율법을 소홀히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
서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은 당연지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본다면, 역대기 저자가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백성으로, 유다의 동족이며 형제
로 표현한 것은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일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백성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엿볼 수 있다.
=====28:11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 여기서 '임박하였느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론'(* )은 '빨갛게 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하라'(* )에서 온
말로서 부글부글 끓어서 넘칠 것 같은 급박함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하
나님께서는 진노받아 멸망하기에 마땅한 자들도 성급히 징계치 않으시는데, 그만큼 하
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극렬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로 참으신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의 인내가 한
계에 도달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는 경계의 선포이다.
=====28:12
에브라임 자손의 두목 몇 사람 - 사건의 서술상 선지자 오뎃의 선포 후에(11절) 즉
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본절에 기록된 네 사람은 선지자 오뎃
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일어나...막기'까지 하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는 북왕조가 이미 타락해 있다는 것
을 암시하고 있다(Williamson). 한편 역대기 저자는 분열 왕국 시대 이후 하나님의 계
시 역사에서 잠정적으로 사라졌던 북이스라엘 10지파를 부각시키고 있다. 즉, 에브라
임의 두목들의 행동을 인상적으로 기술하여 북이스라엘도 회개함으로 여호와께 돌아올
것이라는 소망을 보여 준다. 따라서 중요한 전환기에 그들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사실로 보여진다.
=====28:13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함이로다 - 여기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트'
(* )는 '과녁을 빗나가는 것', '발을 헛디디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율법을
오해하거나, 그릇되이 해석하여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쉐마트'(* )는 어떤 인격체를 분노케 하여 발생
하는 감정상의 죄책 뿐만 아니라, 범죄가 드러나 유죄라고 판결받은 상태도 가리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유죄로 정
죄되기에 충분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포에 대해이스라엘
백성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유다 백성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28:14
이에 병기를 가진 사람이...온 회중 앞에 둔지라 - 포로들을 사마리아까지 호송해
온 이스라엘 병사들은 에브라임 자손의 두목들의 설득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베가의
군대가 설득을 받아들이고 포로와 노략물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형제애(8절) 때문
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Payne), '에브라임의 두목'(12절)이라는 권위가 크게 작용
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포로를 돌보고 돌려보내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15절)이라고 재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군사들은 포로들을
돌려 보내는 것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협조적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러한 관용을 받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 떠나지 않았음을 경험했을 것
이다.
=====28:15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쉐르 닉크부 브쉐모
트'(* )는 '앞 구절에서 언급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라, 일반적으로 '유명하거나, 특별히 어떤 일을 위해 지명되어 있던 자들'을 가리킨
다(31:19;대상 12:31;16:41). 따라서 여기에는 12절에서 이름이 열거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한 자들도 포함된다(Keil, Lange, Williamson). 한편 이들은 포로들
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발라주고, 약한 자는 나귀
에 태워 여리고로 돌려 보냈다. 이와같이 원수에게 조차 사랑을 보이라는 율법(출
23:4;잠 24:17;25:21;마 5:44)은깨어 있는 지도자들에의해서지켜졌던 것이다
(Payne).
종려나무 성 - 이는 여리고를 지칭하는 별명(別名)으로(신 34:3;삿 1:16;3:13), 베
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땅이었다(수 18:21).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린 후에 - 당시 여리고는 북왕국의 영토이긴 했으
나, 남유다와 매우 인접해 있던 곳으로 보인다(Curtis). 그래서 여리고 성에서 포로들
을 유다 백성에게 돌려보내기가 손쉬웠을 것이다.
=====28:16
아하스 왕이...도와주기를 구하였으니 - 아하스는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의 침략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이미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블레
셋과 에돔까지 반란을 일으키자, 이번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도움을 구하였다. 뿐만 아
니라, 아하스는 앗수르의 '왕들'(NIV 난하주)에게 굴복하였다. 이러한 아하스의 태도
를 선지자 이사야는 사악한 일이며 믿음 없는 태도라고 규정하고, 유다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사 7:4-7). 그러나 아하스는 이 말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
하는 대신 앗수르의 힘을 의뢰하려 하였다.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신실한 왕을 도
우신다고 기록하고 있다(14:11;18:31;25:8;26:7,15;32:8;대상 5:20). 그런데 본문에서
는 아하스가 신앙이 결핍되어 있음을 21절과 23절에서 보여주고 있다(Williamson). 한
편 아하스가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합리적으로 이해하
고 있었던 결과로 여겨진다. 당시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의 지휘아래 팽창 정책을 재
개(再開)하여 수리아와 팔레스틴의 군소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여대제국을 이루었
고, 그 세력이 계속 뻗어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로 볼 때,아하스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하스
의 이러한 판단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즉, 그는 제국을 형성
하고 있는 앗수르가 당연하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것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였던 것이
다. 결국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판단으로 도움을 요청하여 앗수르 군
대가 왔으나, 앗수르 왕은 도리어 유다를 협박하여 막대한공물을요구하였다(20,21
절). 뿐만 아니라, 자기 민족인 북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하였고(왕하 17:6), 유다 역시
산헤립의 군대에게 황폐케 되는 결과(왕하 18:13)을 초래했다(Payne).
=====28:17
에돔 사람이 다시 와서 - 여기서 '다시 와서'라는 표현은 에돔의 이전 공격
(21:8ff.)을 암시하거나, '또 다른', '그 위에'의 뜻으로,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에 더하여 에돔 사람이 쳐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Curtis). 에돔은 유다를 침
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Keil, Payne) 보충적인 자료는
왕하 16: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에돔'(*
;BHS Apparatus, LXX, Vulgata;왕하 16:6 주석 참조)에 돌리고"라는 구절은 아람
왕 르신과 동맹한 에돔이 독자적으로 엘랏을 공격하였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왜냐하면
아람 왕 르신이 있던 다메섹은 엘랏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공격하기가 매우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돔은 처음에는 약간의 아람 군대의 도움을 입어 그들의 영
토였던 엘랏을 회복하였고, 또다시 르신이 이끄는 아람 정규군과 합류하여전면적인
공격을 하였다가 앗수르의 군대를 만나 아람 왕 르신이 죽게 되었을 것이다.
=====28:18
벧세메스 - 대상 6:59 주석 참조.
아얄론 - 대상 6:69 주석 참조.
그데롯 - 이는 오늘날의 '카트라'(Katra)에 해당되며, '얍네'(Jobneh)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수 15:41과 비교해 보라.
소고 - 11:7 주석 참조.
딤나 - 이는 오늘날의 '티브네'(Tibne)이며, 벧세메스 근방에 위치해 있다(수
15:10).
김소 - 오늘날의 '짐수'(Jimzu)이며, 릿다(Lydda)의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
한다. 한편, 유다가 에돔과 블레셋에게 이처럼 많은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역대기에서만 발견된다.
=====28:19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 역대기 저자는 특별한 경우에
유다 왕을 가리켜 이스라엘 왕이라 칭하기도 했다(11:3;12:6;19:8;21:2,4). 그러나 여
기서는 아하스의 행실을 비꼬기 위하여 우상으로 더럽혀진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의
미로 표현한 듯하다(Zockler, Keil). 또한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였다'는 진술은 유
다 왕으로서는 그처럼 여호와께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상을 섬기지 않았을 것이
라는 풍자적 표현이다.
유다를 낮추심이라 - 여기서 '낮추심이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히케니아'(*
)는 '굴복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카나'(*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유다가 그들의 속국이었던 에돔에게 굴복하게 된 것은 매우 큰 수치이고,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28:20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군박하였더라 - '군박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라르'
(* )는 적대적인 감정으로 억압하는 것을 뜻한다. 아하스 왕의 요청에 의하여 유다
에 온 디글랏 빌레셀은 구원자나 조력자라기 보다는 제국의 힘을 배경으로 약소국의
소유물과 재물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제국주의적 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따라서 돕기 위해 불려온 앗수르 군대는 압제자로 변하여, 유다 나라의 중
요한 재물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열왕기 저자는 앗수르의 협박에 의한 탈취에 대
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7:17ff.) 유다가 앗수르
에 의하여 적잖이 고통을 받은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28:21
아하스가...취하여 - 여기서 '취하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할라크'(* )는
'약탈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Vulgata, Lange). 따라서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뇌
물을 주기 위하여 성전과 왕궁의 재물을 탈취하다시피 모았을 뿐만 아니라, 왕궁에 거
처하는 고관들의 재물까지도 빼앗아 앗수르 왕에게 건네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
하여 그는 권세의 상징인 앗수르 왕에게 환심을 사고자 노력하였을 것이다.
유익이 없었더라 - 이것은 디글랏 빌레셀의 압력이 계속되었음을 뜻한다(Curtis).
그런데 왕하 16:9에 따르면, 앗수르 왕이 아하스의 요청을 받고 다메섹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르신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유다는 아람의 공격으로부터 피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실제적으로 앗수르의 큰 도움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
대기 저자는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이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디글랏 빌레셀이 아람을 공격한 것은 비록 아하스의 요
청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하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앗수르 제국의 세
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하스의 요청은 앗
수르가 아람을 공략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만들어 준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나서
앗수르는 유다를 침입하고 있는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 같은 국지전(局地戰)에 대해서
는 소홀히 하면서, 오히려 유다에 대해서 계속 협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한 것이다. 이
처럼 앗수르가 아하스를 협박했다는 역사적 증거로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1)디
글랏 빌레셀의 비문에 보면, 앗수르 왕은 유다 왕 아하스에게서 뿐만 아니라 블레셋과
에돔에게서도 공물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Zockler). 이 사실은 아하스가 앗수르에
게 도움을 구한 결과, 유다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제국주의적 착취에 시달리
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2)왕하 16:18에는 아하스가 앗수르 왕을 인하여 낭실을 여호
와의 전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낭실은 아하스가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왕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에 사용했던 통로이다. 그런데 앗수르 왕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자 이 통로가 전략적으로 아하스 왕 자신을 잡는 데 사용될까 두려워 낭
실을 성전 안으로 옮기게 되었다(왕하 16:18 주석 참조).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디글랏 빌레셀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자 했으며, 아하스는 앗수
르의 무력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Keil).
=====28:22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 여기서 '곤고할 때'란 아하스가 디글랏 빌
레셀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를 정점으로 하여, 그 이후에 있었던 모든 외세의 침
공시를 가리킨다.
=====28:23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 왕하 16:10에 따르면, 아하스는 당시 다메
섹을 장악하고 있던 디글랏 빌레셀을 접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갔다(왕하 16:10 주
석 참조). 그리고 거기에서 디글랏 빌레셀이 숭배하던 우상을 본따서 제사장 우리야가
단을 쌓았고,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유다로 돌아와 이 우상에 제사하였다. 한편 본문에
서는 '다메섹의 신들'을 '아람 열왕의 신들'과 동일시하는 반면에 바네스(Barnes,
Cambridge Bible)는 이를 '앗수르 열왕의 신들'이라고 번역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B.C. 732년에 앗수르에 의해 다메섹이 멸망했기 때문에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를 점령했던(5절) 기간은 매우 짧다. 따라서 '앗수르의 열왕'이라는 표현이 더 적
합하다고 할 수 있다(Curtis).
=====28:24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 왕하 16:17에 따르면 아하스는 "물두멍 받침의 옆
판을 떼어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두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여호와의 전 앞에 있던 놋단도 옮기고, 다메섹 단의
형식을 따라 만든 큰 단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했다(왕하 16:14,15). 이러한 그의 이방
신 숭배는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종교적으로 보완하려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다른 신의 어
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전면적으로 이방신을 섬기기 시작
하였고, 이러한 종교 정책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냄으로써 호
감을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호와의 전(殿) 문들을 닫고 - 아하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성전으로 통하는 낭실
(왕하 16:18)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21절 주석 참조), 우상 숭배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성전에서는 더 이상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가 시행되지 않았다. 한편여기서의
'여호와의 전'은 성전 건물 전체를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주요한 장소,
즉 성소와 지성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소와 지성소에서의 여호와 경배는 중단되었지
만, 성전 안에 있는 제단에서는 이방신에 대한 제사가 계속 치러 졌음을 알수 있다
(Keil). 이처럼 닫혀진 문은 히스기야 때에 다시 열린다(29:7 참조).
=====28:25
산당을 세워 - 우상 숭배하는 왕들에 의하여 산당은 종종 혼합주의의 본산지가 되
었다. 본문에서도 아하스는 다른 신에게 분향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
켰는데 이로써 우리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28:26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왕기 - 이와 병행 구절인 왕하 16:19에는 '유다 왕 역대지략'
이라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추가되는 것은 역대기 기자의 일반적인 경향이다(역
대기 서론 참조).
=====28:27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이사야 선지자가 '블레셋을 치던 막대기'라고 표현한(사
14:28,29)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죽은 해에 아하스도 죽었다(Payne). 한편 그 열조와
'함께' 잤다는 표현은 아하스가 열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과 대조되고 있
다(Payne).
열왕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 자신의 사악함 때문에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
한 왕들 중에는 여호람(21:10), 요아스(24:25) 등이 있다. 그리고 웃시야도 자신의 죄
로 인하여 발병한 문둥병 때문에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했다(26:23). 므낫세의 죽음
도 참조하라(33:20). 한편, 역대기 저자는 아하스 역시 그의 배교(背敎) 때문에 열왕
의 묘실에 들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는 듯하다(Williamson). 이와같이 역대기 저자는
왕들의 선악(善惡)간의 판단을 그의 마지막 죽음에 관한 묘사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역대하 제 29장
=====29:1
히스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은 공식적으로 B.C. 728년에
서부터 B.C. 687년까지이다(왕하 18:1-3 주석 참조). 한편, 그의 42년간의 통치 기간
에는 그가 병에서 회복되어 수명을 연장 받은 15년도 포함되어 있다.
=====29:2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 여대기에서 통치에 대한 평가를 말할 때 '다윗
의 모든 행위와 같이'라고 평가받은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야(34:2) 뿐이다.
=====29:3
원년(元年)정월에 - 이것은 히스기야의 통치 첫해, 니산월(태양력으로는 3, 4월)을
가리킨다. 이는 히스기야가 통치권을 맡은 해라기 보다는, 단독으로 통치권을 받았던
해인 B.C. 725년에 해당되는 것이 확실하다(Payne).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 여호와의 전 문이 폐쇄된 것은 히스기야의 부친인 아하
스 왕이 통치하던 때였다(28:24), 여호와의 전 마당에 다메섹 신들의 우상을 세워 성
전을 더럽혔다.반면에 경건한 히스기야는 실질적인 통치권을 부여받자 마자, 성전을
복구하고 우상을 척결하는 일을 시작했다.
수리하고 - 왕하 18:16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그 당시 여호와의 전 문과 기둥에 금
을 입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29:4
1-3절은 히스기야가 성전을 정결케 한 사건을 총괄적으로 요악한 것이고, 본절부
터 19절까지는 성전을 정결케 하는 과정을 사건 서술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편 광장에 모으고 -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대체적
으로 성전의 동편 외곽지에 있는 광장일 것으로 추측한다(Keil). 이곳은 스 10:9의
'하나님의 전(殿) 앞 광장'이나, 느 3:26;8:1, 3, 16에 기록된 '수문(수문) 앞 광장'
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히스기야 당시 제사장들과 레윈인들의 모임은 주
로 성전 안뜰에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므로(Bertheau, Benzinger) 왜 하필이면 백성
들이 모이는 곳인 이 외곽지의 광장에서 모였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역대기 기
자는 '동편 광장'은 성전을 벗어나 수문으로 나가는 광장이며, 이곳에서 백성들이 곧
잘 모였고, 성전이 닫혀져 방치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 무리가
거기에서 모였다고 생각하였다(Curtis). 또한, 이 광장은 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데
용이했을 것이고, 성전 마당조차 우상 숭배로 많이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모
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5,15,1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가운데 우상으로 더럽혀져 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모였을 가능성도 크다.
=====29:5
너희는 성결케 하고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의 일을 수행할 때, 몸을 정결케
하는 일은 규례에 따른 의무였다(대상 15:12, 14). 이처럼 히스기야가 성전을 성결케
하기 위하여 성결의 법에 다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게 먼저 자신들을 성결케 하라고
명령한 것은 여호와를 향한 신실함과 경외심의 표현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
워하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성결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히스
기야는 이스라엘 전체의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절대
적이라는 이해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 하라 - 여기서 '그 더러운 것'(* , 한닛다)
은 '불결함'을 가리키는데, 이는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다메섹 단의 모양대로 만든 제
단을 비롯해서, 온갖 우상 숭배를 위해 사용된 기구들과 그에 관계된 불결함을 가리킬
것이다. 유사어로 16절에 '더러운 것'(* , 핫투므아)이 나오는데 이 또한
우상의 가증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조치는 곧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라는
것으로 간주되엇으며,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첫 행동 지침이었다. 한편 본절에
서 '성소'(* , 하코데쉬)는 성전 내부의 건축물만을 가리키지 않고, 성전 전체
구석구석을 의미하는 것이며(Curtis), 성전 제사와 관련되는 모든 장소와 사람, 그리
고 성전 기구들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29:6
우리 열조(列祖)가 범죄하여 - 여기서 '우리 열조'란 아하스와 그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구체적인 범죄 내용은 7절에 소개되고 있다.
얼굴을 돌이켜 - 성경에서 '얼굴'은 항상 인격의 표현으로 '인격적인 관계'와 연관
되어 나타나며, 상대에 대한 인격의 총체, 즉 마음의 표현을 나타낸다. 따라서 '얼굴
을 돌이켜'라는 표현은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며, 여호와에게서 그 마음이 떠
났음을 나타낸다.
여화와의 성소를 등지고 - 이것은 성전 제사를 폐하고, 우상 숭배한 사실을 가리킨
다. 그리고 삶의 방식까지도 우상을 섬기는 적극적인 표현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29:7
낭실(廊室) 문을 닫으며 - 28:24 에 따르면 아하스는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여
호와께 대한 모든 성전 예배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그러나 왕하 16:10-16에는 아하스
가 여호와의 전 마당에서 계속해서 번제를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Curtis). 그러
나 역대기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아하스의 번제는 다메섹의 신들에게 드려진
것이요. 여호와께 드려진 번제 라고 할 수 없다(Keil).
=====29:8
여호와께서...내어 버리사 - 이는 유다가 아하스 치하에서 아람과 이스라엘에 의해
곤욕을 치른 것과 블레셋과 에돔으로부터 당한 수치스러운 패배, 그리고 앗수르의 디
그랏 빌레셀에게 당한 군박(窘迫) 등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유다가 범죄로 인하여
겪게 된 고난을 내버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에 해당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
의 선하심에 근거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 - 28:19에서는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
추심이라'고 이와 유사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 세 단어들은 불같은 여호와의 진
노하심과 심판하심으로 당하는 극심한 고통을 나타내는데(Curtis),이는 선지자들의
말 가운데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며, 특히 예레미야가 많이 사용했다. 이에대해서는
신 28:25;렘 15:4;19:8;24:9;25:9,18;29:18;51:37;겔 23:46;미 6:16 등을 참조하라.
=====29:9
본절에 대해서는 28:5, 8, 17을 참조 하라.
=====29:10
언약을 세워 - 본절에는 여호와와 언약을 세우기 위해 히스기야가 성전을 성결케
했다고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히스기야가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언약
의 의무를 수행한다는 의미는 갖는다(Williamson,Curtis). 15:12;23:16;34:31;왕하
23:3 등에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마음이 내게 있노니 - 이것은 성전을 향한 히스기야의 열정을 표현한 말로서 이는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품었던 다윗의 열정과 유사하다(6:7;대상 22:7;28:2).
=====29:11
게으르지 말라 - '게으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틸솰루'(* )는 '움츠리
다'라는 뜻의 '솰라'(* )의 나팔(niphal,단순수동) 동사 미완료형으로서, 본
구절은 '너희 자신을 움츠리지 말라'또는 '방심하지 말라'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방
종하는 가운데 참여치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욥 27:8). 이는 중요한 시점에서 규모없
이 아무렇게나 행동하거나, 어리석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는 듯하다.
이미 너희를 택하사 - 이것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이미 율법
에 명시한 바(신 10:8)와 같이 특별히 구별된 직분자임을 가리킨다(26:18;대상
23:13). 따라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위치를
알게 하여,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역할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하
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29:12
본문에서 그핫과 므라리와 게르손의 자손들을 열거함은 레위 족속 전체를 언급하는
것과 다름없다(대상 6:1,16-19). 그런데 각 자손들 가운데 2명씩 열거한 것은 적어도
그들이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거나, 의도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새의 아들 마핫 - 이 사람의 이름은 그핫 자손 사무엘의 계보에 나타난다(대상
6:35).
아사랴의 아들 요엘 - 마핫과 동일한 계보에서 언급되고 있다(대상 6:36).
압디의 아들 기스 - 므라리 자손 에단의 계보에 나타난다(대상 6:44).
여할렐렐의 아들 아사랴 - 레위인의 족보에는 나타나는 여할렐렐(대상 4:16)과 본
문의 여할렐렐이 동일인인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아사랴는 31:13에서 하나님의 전을
관리하는 자로 나타난다.
심마의 아들 요아 - 게르손 자손의 계보에 나타난다(대상 6:20,21).
요아의 아들 에덴 - 레위인의 족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는 백성이 드린 예물을
그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다(31:12ff.).
=====29:13
엘리사반 - 이는 모세 시대의 그핫 사람들의 족장으로서(출 6:22;민 3:30;대상
15:8), 그핫, 므라리, 게르손과 동등한 위치에서 항상 독립된 계보로 소개되고 있다.
시므리 - 므라리의 자손 중 호사의 아들의 이름과(대상 26:10), 시므온 족속 중에
서(대상 4:37) 그 이름이 나타난다.
여우엘 - 레위인의 명단에 자주 나타나는 이름인데, 엘리사반과 함께 언급된 곳은
본문 밖에 없다(Curtis).
스가랴와 맛다냐 - 두 이름은 다른 곳에서도 아삽 자손의 계보 가운데 함께 나타난
다(20:14;느 11:17;12:35,41). 아삽은 헤만, 여두둔과 함께 노래와 음악을 맡은 족장
들이다(대상 25장).
=====29:14
여후엘과 시므이 - 이 두 이름이 헤만과 연관해서 나타난 곳은 이곳 뿐이다
(Curtis).
스마야 -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이름으로,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도 나온다(대상
9:16).
웃시엘 - 개인의 이름으로는 드물게 나타난다. 그리고 헤만 자손의 음악담당자로
이름이 나오고(대상 25:4), 레위 족속의 이름으로 나타난다(대상 15:10).
=====29:15
저희가 그 형제를 모아 - 여기서 '형제'란 레위 지파의 지도자 14명과 그의 가계에
속한 모든 레위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로 볼때, 히스기야의 개혁 운동은 모든 민
족들의 호응을 얻는 대역사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 히스기야의 명령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백성
들은 히스기야의 명령을 여호와의 명령과 동일하게 여겼음이 분명하며, 온 회중이 이
에 동의했을 것이 확실하다. 혹자는 어떤 선지자의 권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Barnes).
=====29:16
제사장들도 여화와의 전 안에 들어 가서 - 전절(前節)에서는 레위인들이 성전의 외
부와 건물 전체를 성결케 하였고(15절). 본절에서는 제사장들이 성전 내부, 즉 성소
와 지성소를성결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곳에는 재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그곳을 성결케 하였다고 기록하고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Barker,
Curtis, Keil).
레위 사람들이 취하여 - 여기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간의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
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드론 시내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5:16 주석과 왕하 23:4 주석을 참조하
라.
=====29:17
성결케 하기를 시작하여...마치고 - 처음 8일 간은 성전 마당에 잇는 것들을 깨끗
이 제거하여 태웠고, 그리고 도 8일 간은 성전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정결케 하여, 약
16일 만에 성결케 하는 일을 마쳤다. 이는 니산 월 14일에 시작되는 유월절과 이틀이
겹치게 된다((Barker). 따라서 유월절 절기를 염두에 두고 성전을청결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 여기서 '성결케 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다쉬
'(* )는 '구별하다', '성스럽게 지키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여호와의 전을 깨끗케 하는 작업을 통해서 그들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올 인정하였으며,
여호와 예배가 외적으로 회복되었음을 가리킨다.
=====29:18
안으로 들어가서..가로되 - 그들은 왕궁에 있는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서 모든 일의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떡을 진설(陳設)하는 상 - 이에 대해서는 4:19과 대상 28:16을 참조하라.
=====29:19
범죄할 때에 모든 기구 - 이것은 아하스가 훼파했거나, 내다 버린 전(殿)의 기구들
울 가리키는데(28:24), 구체적으로 놋제단과 놋바다, 그리고 놋대야 등이다(왕하
16:14,17). 본절은 이것들을 다시 수리하고 복구하여 원래 놓아야 할 위치인 여호와
의 단, 즉 빈제단앞에 두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29:20
성읍의 귀인들을 모아 - 여기서 귀인 들이란 주로 방백들(24:17;30:1-4)을 가리킨
다(Barker). 이렇게 귀인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국가적인 일이 있을 때 통례적으로
흔히 있는 일이다(Curtis).
=====29:21
본절에는 히스기야가 제사를 위해 드린 속죄 제물을 세부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과 어린 양 일곱 - 이것은 번제를 위한 제물이다(24
절). 반면에 숫염소 일곱은 속죄 제물이다(23절). 여기서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하
고 구별된 의미를 가진 수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의 수를 '일곱'으로 하고
있다(민 28:11 ff.; 겔 45:23). 한편, 이 두 종류의 제사는 성전을 성결케 하여 재봉
헌하는 의미를 지닌다(Curtis).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 일반적으로 번제는 여호와와 화해하기 위한 제물이
어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따라서 그의 구속함을 의미하며, 이는 제사장이 하나님
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도 행하여졌다(레 1:3, 4;14:20;16:24). 따라서 히스기야가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 제물을 삼은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위한
제사를 의미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총체적으로 여호와와 언약을 새롭게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구약시대의 예배에서 번제는 필수적이었다. 그것은 백성들의 일반적
인 죄를 용서해 주어 평안을 주는 기능을 가졌다.반면에 속죄제는 특정한 범죄를 용
서받기 위해 드려졌다(Curtis). 따라서 여기서의 제사는 단순히 성전의 재봉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하스 때에 이스라엘 전체가 범죄한 모든 일들에 대하여 하나
님께 사죄를 구하는 의미도 지닌다.
=====29:22
수소를 잡으매 - 제사장이 번제(燔祭) 의식의 규례를 따라 수소를 잡고 그 피를받
아 제단에 뿌리고, 또한 숫양과 어린 양도 그렇게 하였다.한편, 수소, 또는 수송아
지의 희생제사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출 24:5에서 발견되어지고, 출 29:1,3;레
4:3;8:2, 14 등에서도 발견된다.그리고 숫양의 희생 제사는 창 22:13에서 최초로 언
급되는데,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숫양으로 제사하였다.숫양의희생 제사는 출
29:15-21과 레 5:15;8:2, 22 등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어린 양의희생 제사는 출
12:3-7과 출 29:38 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29:23
속죄 제물로 드릴 수염소 - 숫염소는 일반적으로 번제로 드려졌다(레 1:10;3:12).
숫염소가 속죄제로 드려진 사실은 본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며, 그 이후에 스 8:35에
서 한번 언급되고 있다.
저희가 그 위에 안수하고 - 왕과 회중은 제사장이 이끌어 온 숫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어 속죄제의 의식올 거행했다.그런데 본래 제물로 드려지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
는 의식은 번제가 드려질 때 행하여 졌다(레 1:4). 그러나 여기서는 속죄제를 강조하
기 위해서 언급되었다(Curtis, Williamson). 즉, 아하스로 말미암아 저질러진 여호와
께 대한 범죄를 염두에두고,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구속을 강조함으로써 속죄제를 더
욱 의미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29:24
그 피로 속죄제를 삼아 단에 드려 - 속죄제의 피는 번제의 피와는 아주다르게 처리
된다. 즉, 번제의 피는 단에 뿌리는 반면에(22절), 속죄제의 피는 번제단 뿔에 손가
락으로 찍어 바르고 그 단 밑에 쏟아버렸다.(레 4:25, 34).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 여기서는 단순히 남유다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스라엘 12지
파 모두를 가리킨다(30:5). 이는 '유다를 위하여' 드런 것(21절)과 대조를 보이는데,
히스기야 왕은 속죄 받아야 될 대상을 북왕국까지 확대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와같이
히스기야의 속죄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시행되었다. 이는
예루살롑에 있는 성전이 전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소였기때문이다
(Keil).
속죄하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카페르'(* )는 '계속해서 덮어 버리
다'라는 뜻을 갖고 있고 주로 '보상하다'(atone), '화해하다'(reconcile) 등의 뜻으로
쓰였다(Barker). 이 단어는 '역청으로 칠하여 덮다', '구속하다', '화해하다'라는 뜻
을 가진 동사 '카파르'(* )의 피엘형(Piel;강조형 능동) 부정사이다. 이러한 제
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보게 하는 임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구약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희생 제물을 통한 구속으로 죄가 없다고 인정되었으며 이러한 속죄 제
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관계가 유지되었다.
=====29:25
본절은 히스기야가 전통에 따라 레위 사람들을 성전에 두어서 악기를 연주하게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윗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 대로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하여금
찬양케 하고 악기를 연주토록 한 사람은 다윗이었다(8:14).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사역에 선지자 갓과 나단이 관여했다는 언급은 본절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Curtis). 짐작컨대 갓과 나단은 성전 예배와 레위인들을 24반차로 나누는 일에
관여했을 것이다(대상 29:29).
이는...명하셨음이라 - 이 구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여호와의 손 안에서 그의
선지자들의 손으로 하신 명령 때문이라'(For in the hand of YHWH the command by the
hand of His prophets)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손'과 '그의 선지자의 손'은 설명적
동격이라고 볼 수 있는데(Keil), 이것은 선지자들의 중개에 의하여하나님의 명령이
수행되는 것을 뜻한다(Zockler).
그 선지자들로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는 '손'(* , 야드)이라는 말이 포
함되어 있는데, 이는 어떤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잡는 힘을 상징한다. 따라서 하나님
의 주권적인 지시 아래 모든 일이 수행되었음을 가리킨다. 한편,'선지자들'이라는
호칭 속에는 다윗이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8:14에서는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
람'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갓과 나단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
의 손, 권능 아래 있던 선지자들의 명령에 의해서 다윗이 이 일들을 수행하였기 때문
에 본절의 '선지자'라는 호칭은 다윗보다 선지자들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절은 하나님을 그 주체로서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9:26
다윗의 악기 - 이는 다윗이 만들어 예배에 사용케 했던 악기들을 가리키는데(대상
23:5), 앞절(25절)에서 열거한 악기들이다(대상 15:16 참조).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 본래 나팔을 부는 일은 제사장의 임무이다(5:12;대상
15:24;16:6).
=====29:27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르-야웨'(
)는 문자 그대로 '여호와의 노래'((NASB)를 의미하는데, 히스기야 당시에 정경화된 시
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Payne).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 문자적으로는 '다윗의 악기에 의하여'인데(Zockler), 이는
악기의 연주가 회중의 노래나 제사장의 나팔 연주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
다.
=====29:28
본절은 모든 회중들의 경배가 있으면서 노래와 나팔 연주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
다. 그런데 다윗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노래하는 자 중에
다윗의 악기를 연주하는 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23:12; 대상 25:1ff.).
=====29:29
엎드려 경배하니라 - 번제와 속죄 제사를 마치자, 왕과 그 함께 있는 자가 다 엎드
려 경배하여 예배의 절정을 이룬다. '경배하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쉥타하우'
( )는 단지 육체적인 자세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자세를 말한다. 즉, 이
는 존경과 경외가 커지고, 충성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심령에 큰 감흥이 있어서 우러난 행동일 것이다.
=====29:30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詩) - 이는 27절에서 이미 언급한 '여호와의 시'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즉, 히스기야 시대에 정경화되어 있던 시편들 가운데는 다윗의 시편
인 1권과 4권, 그리고 솔로몬의 시편인 2권(시 42-72편), 선견자 아삽의 시(시 50,
73-83편) 등이 포함된다(Payne). 역대기 저자는 본절에서 레위인들이 바로 이러한 시
편들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Keil). 한편 아삽을 '선견자'(
, 호제)라고 불렀는데, 성경에서는 아삽의 자손들이 성전 예배시에 노래하는 직분을
맡은 레위인으로 소개되고 있다(20:14;대상 6:39;15:19;25:1, 2;스 2:41;3:10;느
7:44;11:22;12:46). 이 선견자라는 칭호는 레위인 헤만(대상 25:5)과 여두둔(35:15)
에게도 주어졌다.
=====29:31
이에 히스기야가 일러 가로되 - 히스기야는 제사와 찬양, 그리고 온 회중과 왕의
경배를 마치자, 백성들로 하여금 화목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에 바치도록 권
고(勸告)했다.
너희가 이제 몸을 깨끗케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너희가 여호와께로 향한 너희 손을 가득 채웠으니'(you have filled
your hand to YHWH, Green)이다. 이 구문은 주로 무엇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봉헌하는
(consecrate) 의미로 사용되었다(Barker). 그런데 본문을 앞서 드린 제사와 연관지워
볼 때, 제사에 참여한 모든 회중과 제사장, 레위인이 성결케 되었음을 가리킨다.
제물과 감사 제물 - 여기서 '제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제바힘'( )은
희생 제물 전체를 가리키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화목제의 성격을 지
닌,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희생 제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레 7:11-21, 29-36).
'감사 제물'( , 토도트)은 이미 받은 어떤 특별한 은혜 때문에 희생제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예배가 다시 새롭게 시작된 것을 기뻐하여 드
린 제물을 가리킨다. 이 희생 제물은 기름을 떼어서 제단 위에서 태우고, 가슴과 오
른쪽 넓적다리 부분은 제사장에게 바치며, 나머지 부분은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먹게
되는데, 유월절 절기 때와 유사하게 치러 진다(Curtis). 본래 번제와 속죄제의 경우,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속죄제의 경우 태우지
않는 부분이 제사장에게 돌려졌으며, 더욱이 번제는 완전히 태워지는 것으로 그 제물
은 마음에 원하는 자만이 바칠수 있는 것이었다.
=====29:32
회중의 가져 온 번제물의 수효는 - 이렇게 회중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가져 온 번제
물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은 것은 당시에 회중들의 신앙이 얼마나 열정적이었고 순수하
였던가를 잘 말해준다.
=====29:33
또 구별하여 드린 - 여기서 언급된 동물들은 감사 제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감
사 제물들을 대부분 백성들이 먹고 즐겼을 것이다(Curtis).
=====29:34
그런데 제사장이 부족하여 - 레 1:6에 따르면 번제로 드릴 짐승을 잡고 그 가죽을
벗기며 각(脚)을 뜨는 일은 예배자들이 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이 일
을 제사장의 임무로 간주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레위기와의 차이에 대하여 보통
두 가지 견해가 지배적인데, 제물을 공적으로 드릴 때는 그 일을 제사장들이 수행하였
다고 보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일은 특징적인 제사장의 직무가 아니기 때문에 레위인
들이 도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Keil,Barker). 탈무드 문학에서는 제사장들이 도살자
들로 지목되고 있다(Curtis). 한편 당시 이 일을 맡아 볼 제사장들이 부족했던 것은
번제 제물의 수가 너무 많았거나(32,33절), (2) 아하스 왕이후로 우상 숭배로 한 제사
장들(28:24,25;왕하 16:15,16;18:4)이 히스기야 왕으로부터 직무 정지를 받아 그 수가
감소 되었기 때문인듯하다. 그래서 우상 숭배에 가담한 제사장들은 다시 성결함을 받
아야 했던 것이다(Zockler).
이는 레위 사람의 성결케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誠心)이 있었음이라 - 제사장들은
레위인들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그들이 국정(國政) 전반에 크
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기 때문에, 레위인들보다 오히려 덜 종교적이었을 것이다. 따라
서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도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제사장들이 비록 직분때문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했어도, 레위인들보다 성심이 부족했던 것은 그들이 아하스
의 우상 숭배에 더 많이 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Keil). 또한 혹자는 역대기 저자가
레위인들을 더 선호하고 제사장들을 싫어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Benzinger, Curtis).
=====29:35
본절에서는 위에 언급된 일 이외에 다른 많은 일들로 제사장들이 분주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제사장들은 단 위에 피를 뿌리고 제물을 태우는 일 외에 감사 제물과
화목 제물, 자원하는 번제물(31절) 등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번제 짐승의 가죽
을 벗기는 일까지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Curtis,Keil).
전제(奠祭) - 전제(the drink-offering)에는 포도주가 사용되었데 피를 붓는 것처
럼 제단 밑에 부었던 것 같다(민 15:1-16,Curtis).
순서대로 갖추어지니라 - 이것은 성전을 성결케 하고 재봉헌하는 일 뿐만 아니라
정규적인 성전 예배가 완전히 부활되었음을 가리킨다.
=====29:36
이 일이 갑자기 되었을지라도...기뻐하였더라 - 이것은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을 하
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은혜로 보고 그 일이 속히 이루어진 것을 히스기야와 백성들
이 기뻐하였다는 뜻이다(Curtis). 이와같이 사악한 아하스의 배교(背敎)로 인하여 우
상을 섬기던 상태에 있다가 여호와께 대한 열심과 충성의 상태로 급속하게변화될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하스 치하에서도 히스기야와 같은 신실한 자들을 예
배해 두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그들은 기뻐한
것이다. 이처럼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은 인간의 시각에서 볼 때는 갑작스럽게 된 일처
럼 보이나, 실제로는 오랜 준비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잠 16:1).
역대하 제 30장
=====30:1-27
본장은 히스기야가 성전 성결 사업과 재봉헌식을 마친 후에 지킨 유월절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열왕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역대기 저자의 독자적인 기록이다.
=====30:1
여기서는 2-9절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브라임과 므낫세 - 여기서 '온 이스라엘'의 동격은 '에브
라임과 므낫세' 이다. 즉, '온 이스라엘'은 북왕국의 10지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
절에 같은 의미의 두 단어, 즉 '온 이스라엘'과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함께 쓰여 있
어 좀 이상하게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두 거지 해석이 있다. (1) 북왕국에만 특별
히 편지를 보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Barker). 그러나 당시 왕들이 보발군에게 보
내는 것(6절)은 통상적인 연락 방법이었기 때문에 유다에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2) '에브라임과 므난세'를 비롯한 다른 지파들을 진술
하여, '온 이스라엘'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
(Keil). 이 주장은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유월절은 붑왕국 백성
들까지 참여하는 최초의 행사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대기 저자가 '유다'를 가리켜
'온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기 때문에(11:3 ; 12:1,6 ; 15:17 ; 21:4 ; 28:19,
27), 온 이스라엘을 유다로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렇게 두 번에 걸쳐 구체
적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에 보내고...편지를 보내어 - 전자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이슐라흐'(*
)는 '(사람, 물건 따위를)보냈다'는 뜻을 가진 동사 '솰라흐'(* )를 원형
으로 갖는다. 또한 후자의 동사 '카타브'(* )는 '편지를 쓰다'라는 뜻이다. 그
래서 혹자는 전자의 단어가 편지 없이 보발군만 보낸 것을 뜻하고, 후자의 단어는 편
지를 보낸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Barker). 즉, 유다에는 편지를 보내지 않고 보발군
만을 보냈고 이스라엘에게는 편지까지 써서 보발군을 통해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 두 단어는 서로 의미상 결합되어 '보빌군에게 편지를 주어 보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1) 6절에서 분명히 유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기
록하고 있고,(2) 유다에는 편지를 보내지 않고 북이스라엘에만 편지를 보낸 이유가 본
문 가운데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왕이 서신으로 각 성읍에 명령서를 보내는 것
은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통상적인 연락 방법인 것이다. 한편, 북왕국 백성들이 유월
절에 동참(同參)하는 것은 솔로몬 왕국이 여로보암에 의해 분열된 후 2세기 동안 금지
되었다(5절, 26절 ; 왕상 12:27f.).
유월절(逾越節)을 지키라 -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도록 선포한 때가 언제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1) 유월절 행사가 히스기야 통치 원년에 있었
다는 견해 : 이 견해의 근거는 (까)29장과 30장이 접속사 '와우'(* )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고, (다)3절에사 제사장의 수가 부족했다는 기록은 29:34과 동일한 시기에
있었던 상황이며, (따) 2절의 2월은 29:3, 17의 정월의 다음달임을 나타내며, (마) 히
스기야의 법으로 정해진 정월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2월로 연기한 사실등을 들고 있
다(Barker, Payne) (2)유월절 행사가 북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 있었다는 견해 :
이 견해의 근거는 (까) 성전 성결이 끝난 정월 17일부터 2월 14일까지의 기간은 유월
절을 준비하기에는 너무나 촉박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5절)
전 백성을 다 불러 모으는 데 3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북왕국
백성들이 그렇게 빨리 모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 호세아 왕이 유월절 행사
에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의 사신들을 비웃고 업신여긴(10절) 자들이 유월
절 행사 후 온 이스라엘의 우상들을 파괴할 때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따) 앗수르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기도 쉽고 또 그것이 자연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Caspari, Keil). 위
의 두 견해 가운데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10 히스기야의 명
령서(5-9절)에 북왕국의 멸망이 암시되어 있고, (2) 이 견해가 역사적인 사실성을 충
분히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후자의 견해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데, 살펴보면, (1) 왜 유월절이 다음 달로 연기되었느냐 하는 것이고(3절 주석 참
조), (2) 어떻게 그 당시까지 바알 숭배가 근절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왕국의 우상들까지 제거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31:1), 그것은 충분한 반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게 한 것은 히스기야가 즉위한
지 6년 뒤인, 사마리아 멸망(왕하 18:10)후임이 틀림없다(Keil).
=====30:2
이 월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 - 본래 율법에서 규정한 유월절은 정월(니산월)
14일부터 7일간 지키도록 되어 있다(출 12:1-28, 43:49 ; 민 9:1-14). 그러나 만일 시
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어서 정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다음 달(이야르월) 14일 해질 때에 유월절을 지키도록 했다(민 9:10, 12). 그
런데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의논하여 유월절을 다음 달로 연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에 대해 분명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역대기 제자는 (1) 성결케 한 제사장이 부족하
였고, (2)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절).
=====30:3
제사장이 부족하고 - 정규적인 유월절 때인 니산월(정월) 14일까지 성전 성결 사역
을 마치지 못한 것을 보면 (29:17), 그때부터 이미 제사장이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
다. 그 후에 성전 제사를 치룰 때에도 역시 제사장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29:34).
이처럼 제사장이 부족했던 이유는 당시 유다의 제사장들 만으로 북왕국을 포함한 전국
민의 유월절 행사를 치르어야만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신당에서 우상을 숭배
하던 제사장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한 고로 - 여기서 '백성'은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전체
백성을 가리킨다. 당시 백성들이 모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10절을 볼때 북왕국의 역사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30:4
이 일을 선히 여기고 - 왕과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이 공동 의회를 연 결과,
유월절을 이월로 연기해도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민 9:6-13), 유월절을
이월에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와같이 왕이나 특권을 한 지배자에 의해서 독단적으
로 일이 결정되지 아니하고, 방백들 뿐만 아니라, 온 회중과 더불어 합심하여 합의한
것을 볼 때, 히스기야의 개혁이 얼마나 민주적이며, 의로웠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
다.
=====30:5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 이것은 왕국이 분열되기 이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이
스라엘 전국토를 지칭하는 경계선이다(대상 21:2).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북이스라엘
의 존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북왕국이 이미 멸망
(滅亡)했다는 것을 보여준다(6절). 그뿐 아니라, 히스기야의 통치 영역이 북이스라엘
까지 확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래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 여기서 '오랫동안'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라
로브'(* )이다. 이는 전치사 '르'(* ; to)와 '다수', '위대함', '큼'등의 뜻을
지닌 명사로 '로브'(* )가 결합한 것으로 부사구이다. 그런데, 이 부사구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되어 진다. (1)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 '오랫 동안'이라는 뜻으로 해
석하는 경우(KJV, 한글개역 ; Rashi, Wette, Luther) : 이 경우는 유월절이 왕국 분단
이후로 오랜 기간 동안 지켜지지 않았음을 뜻하게 된다. (2) 양을 나타내는 부사로 '
군중들 가운데', '무수한 대중에 의해서'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RSV, NIV, NEB ;
Keil, Barker, Zockler) :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이는 많은 무리들이 규정된 대로 그
것을 지켜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SV, for they had not kept it in great numbers
as prescribed)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전자의 견해보다 더욱 타당하다. 왜냐하면 히
스기야가 통치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유월절을 치르지 않았다고 보기가 어려
우며(Keil), 이전의 선한 왕들, 즉 아사, 여호사밧, 웃시야 등에 의해서도 유월절은
지켜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유월절을 지
킬 수 없었고, 따라서 매우 많은 무리가 유월절을 지켜본 적이 없었으므로 히스기야가
브엘세바에서부터 단에 이르기까지 포고령을 내렸다고 해석될 수 있다.
=====30:6
보발군(步撥軍) - 이들이 왕의 친위대(12:10)인지, 왕궁 수비대인지는 분명치 않
다. 어쨌든 보발군의 임무는 왕의 포고령이나 편지를 각 지방의 방백들과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에 3:13, 15; 8:14의 '역졸'과 비교).
왕과 방백들의 편지 - 왕의 편지 뿐만 아니라 방백들의 편지도 전달되었는데, 아마
방백들의 편지는 북왕국 백성들에게 '형제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왕의 편지만 전달되었다면, 히스기야의 통치를 거부하는 북왕국의
백성들이 크게 반발(反撥)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 이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호칭인데, 내용상 북이스
라엘에 초점이 및추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많은
백성이 잡혀간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유다 백성 뿐만 아니라 북 이스라엘에 남
아 있는 자들에게 '너희 열조와 형제'처럼 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7절f.)권유
하고 있다.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 - 확실히 이 구절은 북왕국이 앗수
르 왕 살만에셀(Shalmaneser)과 사르곤(Sargon)에 의해 멸망하였다는 사실(B.C.
722-721)을 전제로 하고 있다(왕하 17:6참조). 여기서 살만에셀은 3년간 사마리아를
포위(包圍)했던 왕이고(왕하 17:5). 사르곤(B.C. 722-705)은 사마리아를 완전히 점령
한 왕이다.(사 20:1). 한편 살만에셀의 아들 사르곤의 기록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은 27,290명이었고, 그 이전에도 디글랏 빌레셀 왕에 의해서 많은 포로
들이 잡혀갔다(왕하 15:29 ; 대상 5:26).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잡혀간 후, '남은 자'는 히스기야 왕의 부분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으므로 그 '남은
자'들에게까지 편지가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30:7
너희 열조와 너희 형제같이 하지 말라 - 여기서 '너희 열조'는 앗수르 왕, 불이나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대상 5:26), 또
'너희 형제'는 사마리아 멸망 당시 사르곤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가리킨다
(Keil) 따라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자로 간주되었고, 그들은
남유다의 백성과 동일하게 언약의 백성으로 이해된 것 같다.
=====30:8
목을 곧게 하지 말고 - 열왕기의 느헤미야 기자도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여로보암 시대 이후 북왕국 백성들이 목을 곧게 하였기(왕하 17:14 ;
느 9:16) 때문이라고 각각 기술하고 있다. 이는'남은 자'들 역시도 여호와께로 돌아
오지 않는다면 심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 귀순하여 - '귀순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누- 야드'(* )
의 원뜻은 '손을 내어 주다'(give a hand, Green)이다. 이는 자신을 온전히 여호와께
맡김으로 충성하겠다는 사약(誓約)을 뜻한다(왕하 10:15 ; 스 10:19 ; 겔 17:18). 이
와 동일한 단어가 대상 29:24에서는 '복종하다'로 번역되었다.
=====30:9
너희가 만일...돌아오면 - 본절은 왕상 8:50을 반복한 것으로(Williamson), 포로된
자들이 다시 본향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먼저 남은 자들의 회개가 있어야 함을 말하
고 있다. 한편 본절과 8절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6:24, 25).
또한 이는 모세에 의해 선포된 예언(레 26:40-42)에 근거한 것이다.
=====30:10-12
히스기야의 초청(招請)에 대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
다.
=====30:10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 스불론은 아스라엘 북쪽 경계 지역인 단으로부터 남으로
약 40km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본래 단에까지 이르러 유월절을 선포하라는 명령(5
절)에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스불론 북쪽
에 있는 단이나 납달리 지방의 주민들은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
에 거주자들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왕하 15:29). 따라서 '스불론'만을 언급하게 된 이
유는 보발군이 단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갔다 하더라도 아무런 성
과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저희를 조롱하여 비웃었더라 - 이런 일은 유다가 멸망하던 당시에도 있던
일로서(36:16),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30:11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 여기서'아셀'은 북쪽 경계선 지역이 아니라 보다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Zockler).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롱하며 비웃었지만, '몇 사람'은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30:12
하나님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 '하나님이 감동시키사'에 해당하는 히
브리어 '하예타 야드 하엘로힘'(* )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손이 있었다'(RSV, The hand of God was)는 뜻이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
님의 권능과 주줬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자에게는 진노(震怒)를 베푸심을 나타낸다(스 8:22). 그런데 구약 성경의 '
야드 야웨 하예타 브'(* ; 여호와의 손이 ~안에 있다. The hand
of YHWH was in)라는 구절에서의 '하나님의 손'은 주로 자법적인 형벌을 의미한다(출
9:3 ; 신 2:15).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미하는 것이고(Keil), 하나님
께서 주권적으로 유다 사람들에게 선한 뜻을 품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 한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 - 29:15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는 유다 백성들이 하
나님의 규례(規例)와 말씀에 준한 히스기야의 명령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여기고 받아
들였음을 가리킨다. 한편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비데바르'(* )는 '
대로'에 해당하는 전치사'브'(* ; in, by)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말씀'(*
, 데바르 : 연계형)은 단수로 쓰였는데, 이는 29:15의 복수형 '여호와의 말씀'(개
역, the words of YHWH)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the words)을 인성화(人性化 :
hypostatization)하는 예이다. 즉, '말씀'은 대부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
는 영(spirit)으로 생각되어졌다(삼상 3:21 ; 왕상 13:1, 2, 5, 9, 17, 18, 32 ;
20:354, Curtis). 이러한 '말씀의 인성화' 개념은 신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곧
'태초에'('E* ' , 엔 아르케), '그 말씀'(* , 호로고스)이 계셨고
(요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 , 호 로고스
사륵스 에게 네토). 따라서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고 볼 수 있으며, 구약에 계시된 '그 말씀'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30:13
무교절 - 이 절기는 유월절과 동일시 되는데, 특별히 유월절은 첫날의 전야, 즉 14
일(레 23:5)을 가리키며, 그 날에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제가 드려지고, 그 다음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무교절을 지킨다. 그러나 '유월절'이라는 명칭에는 7일간의 무
교절이 포함되기도 하는데(신 16:2, 3 ; 겔 45:21-25), 그 이유는 유월절 음식 자체가
무교병이었기 때문이다(신 16:4). 이 절기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출
13:6-10)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이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키던 절기
가 있었는데(출 5:1 ; 10:9), 이것이 유월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IBD). 혹자는 유월절이 본래 유목민들의 축제였고, 무교절은 가나안의 농업 축
제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이 두 축제를 하나로 결합시켰다고 본다
(Welhausen, Curtis). 이는 셈족 문화 가운데 나타난 유사한 의식에 대한 고고한적 지
식을 근거로 하여 가설을 세워서 재구성하였을 뿐이며, 사실과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
다(IBD). 단지 여기서는 무교절과 유월절이 동일시 되고 있을 뿐이며, 신약에서도 이
두 절기는 같은 절기로 인식되고 있다(막 14:1, 12; 눅 22:1).
=====30:14
제단과 향단들을 모두 제하여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이미 성전을 성결(聖潔)케
하였던 것처럼(29:15ff.), 백성들도 모인 후에 예루살렘 성읍을 성결케 하였다. 그들
은 예루살렘 성읍 구석구석에 이하스가 설치해 두었던 제단들(28:24f.)을 모두 제거하
여,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마찬가지로(29:16) 기드론 시내에 던졌다.
=====30:15
유월절에 양을 잡으니...부끄러워하여 - 백성들이 성읍을 정결케 한 뒤 드디어 유
월절 양을 잡으므로 모든 행사 준비를 완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은 여전히 지
체하여 자신을 성결케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29:34), 백성들의 종교적인 순수함과 열
정이 그들에게는 채찍이 되었을 것이다(Pavne). 한편 제사장들이 여태까지 자신을 성
결케 하는 하는 일을 지체하였던 이유는 예전에 우상 숭배에 관여했던 일로 인해 죄책
감에 사로잡혀 있었거나, 백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인 열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Zockler).
번제물을 가지고 - 번제는 백성들 자신의 속죄를 위한 대속물로서 특별히 유월절
어린 양을 드리는 제사이다. 이 제사의 특별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열 번째 재앙으로부터 구원하셨던 사건을 기념하고(출
12:27), (2) 모든 죄인들에게 대속의 희생 제사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상징하며(출
13:15), (3) 장차 모든 사람들의 구속주로서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궁극적인 구원
이 있음을 예표한다(고전 5:7).
=====30:16
규례대로 각각 자기 처소에 서고 - 유월절 양의 제사는 율례에 규정된 대로 진행되
었다.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위치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레
1:11-13에 따르면 제물을 드리는 자는 제단 북편에서 어린 양을 잡고,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리도록 되어 있다.
제사장이 레위 사람의 손에서 피를 받아 - 출 12:6에 따르면, 유월절 어린 양은 회
중(會衆)들을 잡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회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결치
못하였기 때문에(17절), 레위인들이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제사장에게 전해 주었다.
동일한 이유로 요시야 왕 때에도 유월절 양을 레위인들이 잡았다(35:11). 그리고 바벧
론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스 6:19, 20).
=====30:18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규적인
제사나 성결케 하는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의 상태에 있다고 간주되었
으므로, 법적으로도 부정한 상태대로는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다(민 9:6). 한편, 이
들이 유월절 규례에 따라 스스로 정결케 못한 이유는 아마 시간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
다. 보발군들이 히스기야의 초청장을 전하고, 또 초청장을 받아 그들이 서둘러 예루
살렘으로 왔다 할지라도 사실상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 촉박할 수밖에 없다(1-3절).
그러므로 본래 부정한 상태에 있던 그들이 스스로 성결케 하는 일은 시간적으로 불가
능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
도에 응답하셨다. 여기서 히스기야의 기도는 부정한 자들이 유월절 양의 피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중보적인 역할을 하였다.
=====30:19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 본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즉, 율법을 여자적(女子的) 으로 준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
정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찾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히스기야의 중보 기도 후에
'크게 즐거워'한 것을 보면, 그들의 결례로 인하여 죄책 가운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
고, 하나님께서는 기록한 규례보다 심령의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
다. 예수께서도 율법을 제정한 본래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바리새인을 비롯한
형식적인 종교인들을 향하여 참 믿음과 의(義)가 없음을 책망하셨다. 이는 믿음이 형
식보다 앞선다는 성경적 원칙(요 7:22f. ; 9:14ff.)을 뒷받침 해준다. 한편, '구하는
아무 사람'에게나 용서를 해달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함을 의미한
다(요 16:23 ; 엡 4:32). 이러한 배경하에서 십자가 우편에 있던 강도의 구원도 구속
자로 말미암은 이러한 은혜의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눅 23:40-43).
=====30:20
백성을 고치셨더라 - '고치셨더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 '라파'(* )는
엄밀한 의미에서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혹자는 실제적으
로 자신을 정결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 히스기야의
중보 기도로 치유함을 받았다고 주장한다(Bertheau). 그러나 여기서는 육체적인 질병
의 치유보다는 죄로 말미암은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
다(Keil, Curtis). 이 단어를 이와 같은 용례로 쓴 곳은 많다(시 41:4 ; 렘 3:22 ; 호
7:1).
=====30:21
크게 즐거워하며 - 주로 큰 절기나 새로운 언약적 사건들이 있을 때, 하나님의 백
성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을 표시하였다(23:21 ; 대상 29:22 ; 시 112:1). 예루살
렘에 모인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 간의 무교절을 지키면서, 자신들의 죄를 사해 주
시고 다시 언약의 백성으로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였다.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울려 - 이 악기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찬양하기 위해 사용되었
다(Keil). '큰 소리 나는 악기'에는 예배시에 사용되는 레위인들의 형악기, 제사장들
의 나팔, 시편을 노래하는 성가대의 찬양(29:25 - 28)이 포함될 것이다(Keil). 그리고
이와 같은 큰 성회는 무교절의 맨 마지막 날인 제7일째에 있었는데(레 23:6-8), 여기
서는 7일 동안 계속 있었던 것 같다.
=====30:22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여호와에
관하여 좋은 지혜를 소유한'이란 뜻이 된다. 이는 좀더 전문적인 지식과 연구를 통하
여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을 가리킨다(Keil).
위로하였더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아무개의 마음에 말했다
'(spoke to heart of someone, Green)이다.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和睦祭)를 드리고 - 음식을 통하여 사람들과의 교제 뿐만 아
니라 하나님과의 화목도 증진하게 된다. 이는 또한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 6:35)로 말미암은 진정한 화목을 예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
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됨의 증표이며, 영원한 세계에서 갖게 될 기쁨의 잔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 여기서 '감사하였더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미
트외딤'(* )은 '던지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야다'(* )의 히트파엘
(Hitpael)형인 '히트왓다'(* ; 고백하다, 찬양하다)의 분사 남성 복수
형이다. 따라서 '고백하였다'(KJV, LB, NEB), '찬양했다'(NIV, JB, 공동번역),'감사했
다'(NASB, RSV 개역, 현대인의 성경)등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
들이 '감사하였다'에 동의 한다(Keil, Lange, Curtis).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그 열조
의 하나님이 되셔서, 언약을 깨지 않았음을 보여 주시는 것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고백
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30:23
다시 칠일을 지키도록 결의하고 - 온 회중이 결정하여 절기를 한 주 더 연장시켜 2
주 동안 계속 절기를 지켰다. 이와 유사한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奉獻式) 때에도 그
행사가 2주 동안 계속되었는데(7:8-11), 그 때에도 백성들의 자발적인 결의에 의해서
연장되었다.
=====30:24
본절에 해당하는 히브리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 )로 시작된다.
따라소 본절은 유월절 행사가 한 주간 더 연장된 이유들이 서술되고 있다(Keil,
Zockler, Payne).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왕과 방백들이 회중에게 준 제물용 가축들
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온 회중이 다시 칠일을 지키기로 결의'한 것은 자발적이
고, 신앙 고백적인 감사의 표현이었지만, 이처럼 연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풍부한 음
식이 제공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절은 밝히고 있다. 이처럼 많은 제물을 백성들을
위해 내놓음으로 온 백성들의 기쁨이 더하였고, 지속적으로 좋은 인상이 남도록 하였
을 것이다.
성결케 한 제사장도 많았는지라 - 이미 성결함을 받은, 많은 제사장들은 그처럼 많
은 제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Keil, Curtis). 이는 연장된 주간에 제사가 새로이 치
루어졌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절기의 첫 주간에 제물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는 의
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유월절 행사를 열지 못한 이유가 '성경케 한 제사장'의 부
족 때문이었는데(3절), 연기된 유월절을 준비하면서, '성결케 한 제사장들'이 충분하
게 확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0:25
본절에서는 유월절에 참여한 구성원들을 설명하고 있다. 즉, (1)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을 포함한 유다 백성들, (2) 북왕국에서 온 백성들, (3)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나그네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나그네들'(* , 게림)은 유다와 북 이스라
엘에 있던 개종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Curtis)는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한 듯하고,
사실상 '게림'이라는 말은 '거류민', '체류자'를 뜻하는 것이며(Barker), 15:9에 의하
면 그들(개역 성경에는 '우거하는 자'로 번역됨)은 에브라임, 므낫세, 시므온 출신으
로 언급되어 있다(Zockler). 솔로몬 시대에는 이방인들이 부역자로 쓰이기 위해 모여
졌는데(2:17 ; 대상 22:2), 여기서는 이들이 유월절 규례에 따라 유월절에 참예하고
있다(Curtis). '나그네'는 바벧론 포로로 잡혀가기 이넣에는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면
서, 이스라엘 종교를 받아들인 '체류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떠돌이 부랑자와 달리
유월절에 동참할 수 있었다(Williamson).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 자들은 그
혈통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속(救贖)이 적용되었다.
=====30:26
솔로몬 때로부터...없었더라 - 이는 이 축제가 솔로몬의 성전 봉헌의 축제에 비할
만큼 성대하였음을 보여 주며, 그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에서 돌이켜 여호와 하나
님께로 돌아왔으며, 그로 인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하여 '큰 희락'은 회중들
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고, 우상들을 깨뜨리는 결과(31:1)를 가져오게 하는 진정한 회
복이었다. 또한, 외형적으로 보아도 절기의 기간을 2주로 연장한 것이나, 참가자의
수, 그리고 기쁨의 크기등에서 과히 솔로몬의 축제와 비견할만 했다는 것이다.
=====30:27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 대부분의 역본들에게서는 본문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사이에 연결사 '와우'(* ; and)가 나온다(70인역, 벧게이트, 수리아역, 아라
비아역 등). 하지만, 맛소라 본문(MT)에는 연결사 '와우'(* )가 없어서 '레위인 제사
장들'(Levitical priests, 레위인이면서 제사장인 사람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JB ;
Keil, Williamson, Barker, Payne). 따라서, 이 사람들은 레위인 전체을 말하지 않고
제사장들을 말한다(신 17:18 ; 수 3:3).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은 제사장들에게 있었다
(민 6:23-26 ; 대상 23:13).
축복하였으니...상달(上達)하였더라 - 제사장들이 축복하는 것으로 유월절 행사가
끝나는 것 같다(31:1). 그리고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하였다는 역대기 기자의 진술은
이 유월절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응답의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Zock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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