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석년(염제신농씨)
신농(神農)은 천지(天地)의 도(道)를 알고 인성(人性)에 밝아서 천하(天下)를 가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백성들이 나물 먹고 물마시며, 나무 열매를 따먹고 소라[蠃],조개[蚌] 따위의 고기를 먹고 살았었는데, 신농은 인민(人民)이 많아서 그것으로는 오래 먹고 살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백성에게 오곡(五穀)심는 것을 가르치고 뇌사(耒耜)와 서호(鉏鎒)를 만들어서 풀밭을 개간하게 한 연후에 오곡이 흥성하게 되었다. 영을 내리기를,
“장부(丈夫)들이 장성하여 경작(耕作)을 아니하면 천하에 주리는 자가 있을 것이고, 부인(婦人)들이 많이 있으면서 길쌈을 아니하면 천하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그래서 신농이 몸소 농사짓고 후비(后妃)가 몸소 길쌈하여 천하에 솔선하였다.
《본초(本草)》라는 한 책은 상고(上古) 때에 신농씨(神農氏)가 저술한 것으로, 역대의 명의(明醫)가 편찬(編撰)한 것이다. 대체로 초목(草木),금석(金石),조수(鳥獸),충어(蟲魚) 등 모든 종류로 의약(醫藥)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실려있으므로, 의가(醫家)의 근본(根本)이며, 학자(學者)가 제일 먼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의서는 신농(神農)이 짓고 황제(黃帝)가 강론(講論)하여 이윤(伊尹)이 전하였으며 게다가 주자(朱子)도《소학(小學)》속에 의술(醫術)을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기재하였다.
신농씨(神農氏)는 옛날 황제의 이름인데 처음으로 쟁기와 보습[耒]을 만들어서 천하를 이롭게 하였고, 처음으로 약방문을 만들었다.
선농제(先農祭):고려,조선조때 동교(東郊)의 제단에서 농업의 창시자인 신농씨(神農氏), 후직씨(后稷氏)에게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빌던 제사.
매년 경칩(驚蟄)후 첫 해일(亥日)에 행하였음.
농사를 장려하기 위하여 임금히 친히 나와 지내는 제사. 이른 봄 즉 경칩(驚蟄)뒤 첫 해일(亥日)에 그 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동대문 밖 보원동동(普院東洞)에 있는 선농단(先農壇)에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동대문 밖 지금 제기동에 선농단(先農壇)을 쌓고, 그 앞에 적전(籍田)을 설치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임금이 친히 선농제를 지내고 적전을 친경(親耕)할 때에는, 유생과 노인, 기생들이 노래를 불러올리고, 기타 각종 연예를 거행하는 큰 행사였다. 해마다 하는 것이 정례(定禮)이나 흉년이 들거나 일이 있으면 친행(親行)하지않는 경우가 많았다.
선농단(先農壇)【신농(神農)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후직(后稷)을 배위(陪位)로 했다.】
《사략(史略)》에 복희(伏羲)는 뱀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했고, 신농(神農)은 소의 머리였다.
제왕(帝王) 태호(太昊)는 1백19년간 재위하였고, 신농씨(神農氏)는 1백40년간 재위하였으며, 헌원씨(軒轅氏)는 1백11년의 수를 누렸고, 금천씨(金天氏)는 1백세였고, 제곡씨(帝嚳氏)는 1백5세, 도당씨(陶唐氏)는 1백16세,
유우씨(有虞氏)는 1백10세였으며, 하우씨(夏禹氏)· 은탕씨(殷湯氏)도 모두 1백여세였습니다.
수성(須城)에서 당요(唐堯)에게 제사하고 활현(滑縣)에서 전욱(顓頊)에게 제사하고 호현(鄠縣)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하고 형하(滎河)에서 상탕(商湯)에게 제사하는 것과, 우순(虞舜)의 사당이 또한 영원(寧遠)에 있는 것
정위(精衛)가 동해를 메우려는 마음:옛날 염제(炎帝)의 딸 여와(女娃)가 동해에서 놀다가 빠져 죽어 정위(精衛)라는 새로 변하였는데, 항상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웠다는 고사(故事).
정위(精衛)에게 바다를 메우게 하는 것: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임. 여름을 맡았다는 신(神)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어 정위라는 새가 된 뒤, 늘 서산(西山)에서 나무와 돌을 물어다 동해에 빠뜨리면서 바다를 메우려 했다는 전설이 있음. 《산해경(山海經)》 북산경(北山經).
태종 29권, 15년(1415 을미/명 영락(永樂) 13년) 3월 15일(계축) 2번째기사
의학제조에게 약방서를 고찰하게 하니《본초》에 대해 상언하다
의학제조(醫學提調)에게 명하여 의사(醫士)가 읽고 있는 방서(方書)를 고찰하게 하였다. 이에 제조가 아뢰었다.
“《본초(本草)》라는 한 책은 상고(上古)때에 신농씨(神農氏)가 저술한 것으로, 역대의 명의(明醫)가 편찬(編撰)한 것입니다.
대체로 초목(草木),금석(金石),조수(鳥獸),충어(蟲魚)등 모든 종류로 의약(醫藥)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실려있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의가(醫家)의 근본(根本)이며, 학자(學者)가 제일 먼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의학을 배우는 자로 하여금 먼저《본초》를 익히게 하고,
또 의학을 취재(取才)할 때에도 제일 먼저 이 책을 강(講)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먼저 약리(藥理)를 밝힌 뒤에 방서를 읽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命醫學提調, 考察醫士所讀方書。 於是, 提調啓曰: “《本草》一書, 上古神農之所著, 歷代明醫之編撰。 凡草木、金石、鳥獸、蟲魚等庶類, 可以爲醫藥者, 無不該載, 醫家之根本, 學者之先務也。 使學醫者先習《本草》, 又於醫學取才時, 首講此書, 使之先明藥理, 後及方書。” 從之。
태종 31권, 16년(1416 병신/명 영락(永樂) 14년) 6월 27일(정해) 2번째기사
예조에서 아뢴 대로 전조 팔위의 수릉을 각각 2호씩 두게 하다
명하여 전조(前朝) 팔위(八位)의 수릉(守陵)을 각각 2호(二戶)씩 두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삼가 고전(古典)을 상고하니, 당(唐)나라에서는 고신씨(高辛氏)와 제요(帝堯),제순(帝舜),하우(夏禹),은탕(殷湯),주문왕(周文王),주무왕(周武王),한고조(漢高祖)의 묘(廟)를 세우고 춘추(春秋) 두 철에 제향을 드렸고,
송(宋)나라 건덕(乾德) 4년에는 태호(太昊),염제(炎帝),전욱(,頊),고신(高辛),당요(唐堯),우순(虞舜),하우(夏禹),은탕(殷湯),주문왕(周文王),주무왕(周武王),한고조(漢高祖),후한(後漢)세조(世祖),당고조(唐高祖),당태종(唐太宗)에게 각각 수릉(守陵) 5호(五戶)씩을 주어 그 밖의 역사를 면제하고, 봄,가을에 봉사(奉祀)하였고, 역대제왕(歷代帝王)의 능(陵)에서 초채(樵採)3876)하는 것을 주(州),현(縣)에서 항상 금지하였습니다.
《홍무예제(洪武禮制)》에는 역대 제왕의 능침(陵寢)에서 봄, 가을의 2중월(仲月)3877)에 제사를 드립니다.
빌건대, 고제(古制)에 의하여 전조(前朝)의 팔위(八位)에서 이미 정해진 의식(儀式)에 의하여 다만 봄, 가을의 2중월(仲月)에만 제사를 드리고, 또 그 능총(陵塚)에 수릉(守陵) 2호(二戶)를 주어 모두 다른 역사를 면제하고
항상 초채(樵採)를 금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註3876]초채(樵採): 나무꾼이 나무를 하는 것 註3877]중월(仲月): 봄 2월과 가을 8월.
○命置前朝八位守陵各二戶。 禮曹啓: “謹稽古典, 唐立高辛氏、帝堯、帝舜、夏禹、殷湯、周文王ㆍ武王、漢高祖之廟, 以春秋二時致享。 宋乾德四年, 太昊、炎帝、(顓顓)〔顓頊〕、高辛、唐堯、虞舜、夏禹、殷湯、周文王ㆍ武王、漢高祖、後漢世祖、唐高祖ㆍ太宗, 各給守陵五戶, 蠲其他役, 春秋奉祀歷代帝王陵, 州縣常禁樵採。 《洪武禮制》, 歷代帝王陵寢, 以春秋二仲致祭。 乞依古制, 前朝八位, 依已定儀式, 只於春秋二仲致祭, 又於其陵塚, 給守陵二戶, 皆免他役, 常禁樵採。” 從之。
세종 29권, 7년(1425 을사/명홍희(洪熙) 1년) 윤7월 6일(계묘) 3번째기사
성절사통사 조충좌등이 예부에서 자문과 조서를 받아오다
성절사통사(聖節使通事) 조충좌(趙忠佐)등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한 벌과 조서(詔書) 초백(抄白) 두 벌을 가지고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였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대명행재예부(大明行在禮部)는 시호(諡號)를 높이는 일로써 홍희(洪熙) 원년 7월12일 아침에 본부(本部)관원이 서각문(西角門)에서 제주(題奏)하여 본월 초2일에 인종경천체도순성지덕홍문흠무장성달효소황제(仁宗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欽武章聖達孝昭皇帝)라는 시호를 올렸습니다.
조선국왕에게 자문으로 알리는 것이 합당하므로, 성지(聖旨)를 받들어 외방에 이자(移咨)하는 격식(格式)에 따라 본국(本國)에서 보내 온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 맹사성(孟思誠)에게 부칩니다.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거든 알아서 시행하도록. 그리 아시오 ”하였고,
조서에는,
“천운(天運)을 받들어 이은 황제는 조하노라.
짐은 생각하노니 성신(聖神)의 도(道)는 명호(名號)만으로 말할 수 없고, 공덕(功德)의 높음은 반드시 찬술(贊述)로서 형용(形容)된다.
이러므로 황(皇)에는 복희(伏羲), 신농(神農)이라는 호가 있었고, 제(帝)에는 요(堯)와 순(舜)이라는 칭(稱)이 있었다.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음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라.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대행황제(皇考大行皇帝)께서는 예성(睿聖)하신 자질(資質)을 품수하셨고, 명성(明誠)하신 덕을 갖추시었다.
저궁(儲宮)에 정위(正位)하시기 20여 년에 지극한 효성은 신명(神明)께 통했고, 아름다운 소문은 원근(遠近)에 사무쳤다.
보위(寶位)에 이어 올라 공경하게 큰 업을 받드시고, 천심(天心)을 본받아서 혜택을 널리펴시어, 크게 만물을 소생(蘇生)시키고 밝게 우주를 일신(一新)하셨다. 다스림을 극진히 하고 교화를 일으켜서 문아(文雅)를 숭상하고, 무사(武事)를 신중히 닦으니 사방에 걱정이 없고, 천하가 어진 데로 돌아와서 편안하게 태평을 누리더니, 불행히도 겨우 한 해를 넘기자 문득 승하(昇遐)하시니, 사해(四海) 억조 백성이 아버지상을 당한 듯하였다.
슬프다. 나의 망극한 애통으로 이 승통(承統)하는 처음을 당하니, 진실로 공경하게 받드는 마음에 감히 추숭(追崇)하는 의식(儀式)을 뒤로 하랴.
삼가 조정에 있는 문무 모든 관원에게 명하여 옛 예문(禮文)을 상고하고 시호를 천(薦)하도록 논의하니, 지공(至公)한 도리임에 중론(衆論)이 다 같았다. 이에 7월 초2일에 천지, 종묘, 사직에 고하고 책보(冊寶)를 받들었다.
황고대행황제의 존시(尊諡)는‘경천체도순성지덕홍문흠무장성달효소황제’이시며, 묘호(廟號)는 ‘인종(仁宗)’이라고 올리었다.
아아, 하늘과 짝하는 것은 오직 덕이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은 오직 효라. 광화(光華)는 만년토록 나타나려니와 계술(繼述)은 아직 긴 세대(世代)에 남았도다. 중외에 포교하여 다 듣고 알게 하노라 ”했고,
또 딴 조서에는,
“천운을 받들어 이은 황제는 조하노라. 인정(仁政)하는 급무(急務)는 친친(親親)이 첫째이고, 예전(禮典)에 숭상하는 바는 존존(尊尊)이 큰일이라. 짐이 대업(大業)을 이어받고 억조 민중(民衆)에 군림(君臨)하여 이에 효리(孝理)에 정성을 다하고, 이에 화원(化源)을 일찍 바르게 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을 보좌하고 내정(內政)을 밝히시어 육궁(六宮)의 아낙의 규범을 넓히시고, 천하의 어머니의 표를 보이신지라, 깊은 어짐과 두터운 은택이 나의 몸에 미치어서, 길러 주신 은혜가 높았고 교훈하신 길이 넓었으니, 구로(劬勞)하심이 지극하여 성취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천하의 지극한 봉양(奉養)을 바치려 함에 있어서 반드시 천하의 높은 칭호를 극진히 해야 하리니, 삼가 존호(尊號)를 ‘황태후(皇太后)’라 올리었다.
그리고 종묘의 제사는 상성(相成)하는 예가 중하고, 덕화(德化)가 행하는 것은 부부(夫婦)에서 비롯하나니, 국법을 상고하여 비(妃) 호씨(胡氏)를 책봉(冊封)하여 황후(皇后)로 삼았다.
대저 나라의 근본이 가정에 있음은 원래부터 떳떳한 인륜의 소중함에 매인 것이요, 위에서 후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거느려야 지극한 다스림에 이를 수 있느니라. 중외에 포고하여 다 듣고 알게 하노라”하였다.
충좌가 계하기를,
“절일사(節日使)가 북경(北京)에 도착하기 전에 대행 황제가 붕어하였다는 것을 듣고 곧 상복을 입고 곡림(哭臨)하였습니다. 3일 만에 제도(帝都)에 도착하여 예부에 표문(表文)을 바치니, 예부에서 표문과 방물을 대행 황제의 빈소(殯所) 앞에 바치었습니다.
중화인(中華人)에게 붕어한 연고를 물었더니, 혹은 벼락을 맞았다 하고,
혹은 병으로 돌아갔다 하면서 잘 말하지 않더이다.
유조(遺詔)는 황후의 소위라 하더이다”하였다.
○聖節使通事趙忠佐等齎禮部咨一道及詔書抄白二道, 回還復命。 其咨曰:
大明行在禮部爲尊諡事, 洪熙元年七月十二日早, 本部官於西角門題奏: “本月初二日, 恭上仁宗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欽武章聖達孝昭皇帝尊諡, 合咨朝鮮國王知會。” 奉聖旨是欽此, 除欽遵外, 移咨付本國。 差來判左軍都摠制府事孟思誠, 齎捧回國知會施行, 須至咨者。
其詔曰:
奉天承運皇帝詔曰: 朕惟聖神之道, 不可以名言, 功德之隆, 必形諸贊述。 是以皇有羲、農之號, 帝有堯、舜之稱, 國有常典, 古今一揆。 恭惟皇考大行皇帝稟睿聖之資, 備明誠之德。 正位儲宮二十餘年, 至孝通于神明, 令聞孚于遠邇。 嗣登大寶, 寅奉鴻圖, 體天之心, 弘敷惠澤, 溥昭蘇於萬彙, 煥寰宇之一新。 致理興化, 敦尙文雅, 愼修武事, 四境無虞, 天下歸仁, 安于熙皞, 不幸踰歲, 奄屆賓天, 四海兆民, 如喪厥考。 嗟予罔極之慟, 屬玆繼統之初, 諒由敬承之心, 敢後追崇之典, 謹命在廷文武群官, 稽古禮文, 議薦諡號, 至公之道, 衆論攸同。 乃於七月初二日, 祗告天地、宗廟、社稷奉冊寶。 恭惟皇考大行皇帝尊諡, 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欽武章聖達孝昭皇帝, 廟號仁宗。 嗚呼! 配天惟德, 尊親惟孝。光華宣著於萬年;繼述尙存於永世。布告中外,咸使聞知。
又詔曰:
奉天承運皇帝詔曰: 仁政之務, 親親爲先; 禮典所崇, 尊尊爲大。 朕纉承鴻業, 君臨兆庶。 肆用惇于孝理, 爰肇正於化源。 恭惟聖母輔翼先朝, 昭明內政, 弘六宮之壼範; 表四海之母儀。 深仁厚澤, 施及眇躬, 隆鞠育之恩。 廣訓迪之道。 劬勞備至, 以底成立。 玆方奉天下之至養, 則必極天下之尊稱。 謹上尊號曰皇太后。 乃若宗廟之祀, 禮重相成, 德化之行, 始於夫婦。 用稽國典, 冊妃胡氏爲皇后。 夫國之本在家, 元屬彝倫之重, 上以厚率下, 庶臻至理之隆。 布告中外, 咸使聞知。
忠佐啓曰: “節日使未及到北京, 聞大行皇帝崩逝, 卽服喪服, 哭臨三日。 至帝都, 進表于禮部, 禮部聞奏, 以表及方物獻于大行皇帝殯前。 問崩逝之故於華人, 或云天震之, 或云病而崩, 諱之也。 其遺詔, 皇后所爲也。”
세종 60권, 15년(1433 계축/명선덕(宣德) 8년) 6월 11일(임진) 3번째기사
《향약집성방》이 완성되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되었다.
권채(權採) 에게 명하여 서(序)를 짓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신농(神農)과 황제(黃帝) 이후 대대로 의관(醫官)을 두어 만백성의 병을 맡아보게 하였다.
유명한 의사가 병을 진찰하고 약을 쓰는 데는 모두 기질에 따라 방문을 내는 것이요, 처음부터 한 방문에만 구애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백리나 천리쯤 서로 떨어져있으면 풍속이 다르고, 초목이 생장하는 것도 각각 적당한 곳이 있고, 사람의 좋아하는 음식도 또한 습성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성인(聖人)이 많은 초목의 맛을 보고 각 지방의 성질에 순응하여 병을 고친 것이다.
오직 우리나라는 하늘이 한 구역을 만들어 대동(大東)을 점거하고, 산과 바다에는 무진장한 보화가 있고 풀과 나무에는 약재를 생산하여 무릇 민생을 기르고 병을 치료할 만한 것이 구비되지 아니한 것이 없으나, 다만 옛날부터 의학이 발달되지 못하여 약을 시기에 맞추어 채취하지 못하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고 먼 것을 구하여, 사람이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니, 이는 7년병에 3년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을 뿐만아니라, 약은 구하지못하고 병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민간의 옛 늙은이가 한 가지 약초로 한 병을 치료하여 신통한 효력을 보는 것은, 그 땅의 성질에 적당한 약과 병이 서로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천리를 멀다 하지아니하고 펴지못하는 무명지를 펴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인데, 하물며 나라안에서 나가지아니하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랴! 알지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다.
예전에 판문하(判門下) 권중화(權仲和)가〈여러 책을〉뽑아 모아서《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을 짓고, 그 뒤에 또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등과 더불어 약국 관원에게 명하여 다시 여러 책을 상고하고, 또 동인(東人)의 경험을 취하여 분류 편찬하고 목판으로 간행하니, 이로부터 약을 구하기 쉽고 병을 치료하기 쉬우므로,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방서(方書)가 중국에서 나온 것이 아직 적고, 약명이 중국 과 다른 것이 많은 까닭에, 의술을 업으로 하는 자도 미비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였다. 우리 주상전하께서 특히 이에 유의하여 의관(醫官)을 골라서 매양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서 방서를 널리 구하게 하고, 또 황제에게 신주(申奏)하여 대의원(大醫院)에 나아가서 약명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으며, 선덕(宣德) 신해년2107) 가을에 집현전직제학 유효통(兪孝通), 전의(典醫) 노중례(盧重禮), 부정(副正) 박윤덕(朴允德)등에게 명하여 다시 향약방(鄕藥方)에 대하여 여러 책에서 빠짐없이 찾아내고 종류를 나누고 더 보태어 한 해를 지나서 완성하였다.
이에 구증(舊證)은 3백38가지인데, 이제는 9백59가지가 되고, 구방(舊方)은 2천8백3가지인데, 이제는 1만7백6가지가 되었으며, 또 침구법(針灸法) 1천 4백76조와 향약본초(鄕藥本草) 및 포제법(炮製法)을 붙여서 합해 85권을 만들어 올리니, 이름을 ‘향약집성방’이라 하였다.
간행하여 널리 전하려고 할 때 권채에게 명하여 서(序)를 짓게 하였다.
신 채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임금의 도(道)는 인(仁)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인도(仁道)는 지극히 크며, 또한 여러 가지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주상 전하께서 거룩한 덕으로 지극히 훌륭한 정치를 일으켜 위(位)를 지키고 정령을 내는데 오로지 이 도의 큰 것에 따르고 있거니와, 의약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까지 이와 같이 힘을 쓰니, 인정(仁政)의 본말(本末)과 크고 작은 것을 남김없이 다한 것이라 하겠다.
또 옛 임금이 혹은 몸소 약을 조제하고, 혹은 수염을 잘라 약에 타서 은혜가 한 사람에게 미친 것도 후세에서 오히려 칭찬하는데, 한 번 의서(醫書)를 편찬하여 널리 치료하는 방법을 보이고 역조창생에게 은혜를 주고 만세에 덕택을 베푸는 것과 어찌 같으리오.
그 규모와 시설은 실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지금부터 이 장서로 인하여 약을 먹어 효력을 얻고, 앓는 사람이 일어나고 일찍 죽는 것이 변하여 수명(壽命)을 얻고 무궁토록 화기(和氣)를 얻게 하는 것이 어찌 성조(聖朝)의 어진 마음과 어진 정치에서 나온 바를 알지 못하리오”하였다.
註2107]선덕(宣德) 신해년:1431 세종13년. 선덕은 명나라 선종(宣宗)의 연호(1426∼1434)
○《鄕藥集成方》成, 命權採序之, 曰:
自農、黃而下, 代有醫官, 以掌萬民之疾, 而名醫師之診病用藥, 皆隨氣施巧, 初非拘以一法。 蓋百里不同俗, 千里不同風, 草木之生, 各有所宜, 人之食飮嗜欲, 亦有所習, 此古昔聖人嘗百草之味, 順四方之性而治之者也。 惟我國天作一區, 據有大東, 山海寶藏之興、草木藥材之産, 凡可以養民生, 而療民疾者, 蓋亦無不備焉, 但自古醫學疎廢, 採取不時, 忽其近而求之遠, 人病則必索中國難得之藥, 是奚啻如七年之病, 求三年之艾而已哉! 於是藥不能得, 而疾已不可爲也。 唯民間故老, 能以一草療一病, 其效甚神者, 豈非宜土之性, 藥與病値而然也, 夫不遠千里, 求伸無名之指者, 人之常情也, 況不出國中, 而可以療疾者乎, 人患不知耳。 昔判門下臣權仲和嘗加採輯, 著《鄕藥簡易方》, 其後又與平壤伯趙浚等, 命官藥局, 更考諸方, 又取東人修驗者, 分門類編, 鋟榟以行。 自是藥易求而病易治, 人皆便之。 然方書之出於中國者尙少, 藥名之異於中國者頗多, 故業其術者, 未免有不備之嘆。 恭惟我主上殿下, 特留宸慮, 命揀醫官, 每隨使如京, 廣求方書, 且因申奏, 就太醫院, 考正藥名之謬。 宣德辛亥秋, 乃命集賢殿直提學兪孝通、典醫正盧重禮、副正朴允德等, 更取鄕藥方編, 會諸書搜檢無遺, 分類增添, 歲餘而訖。 於是舊證三百三十八, 而今爲九百五十九, 舊方二千八百三, 而今爲一萬七百六。 且附以針灸法一千四百七十六條、鄕藥本草及炮製法, 合爲八十五卷以進, 名曰《鄕藥集成方》, 刊行廣傳, 命臣採序之。 臣採竊念君上之道, 莫大於仁, 而仁道至大, 亦有幾多般乎! 今我主上殿下, 以盛德興至治, 守位發政, 全體此道之大, 至如藥醫濟民之事, 拳拳若此, 可見仁政本末, 巨細兼盡而無遺矣。 且古之人主, 有或躬自調藥, 或剪鬚和藥, 惠及一人者, 後世猶稱之, 豈若一修醫書, 廣示方論, 加惠兆民, 施澤萬世哉! 其規模設施, 實相萬也。 自今伊始, 因此方書, 飮餌得效, 起呻吟變札瘥, 以致登壽城, 召和氣於無窮者, 寧不知聖朝仁心仁政之所自歟,
세종 105권, 26년(1444 갑자/명정통(正統)9년) 윤7월 25일(임인) 1번째기사
옛 성현들의 예를 들어 백성들이 부지런히 농사에 힘쓸 것을 하교하다
하교(下敎)하기를,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인데, 농사(農事)하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서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오직 그것은 백성을 살리는 천명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勞苦)를 복무(服務)하게 하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誠心)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하여 그 생생지락(生生之樂)을 완수(完遂)하게 할 수 있겠는가?
저 옛날 신농씨(神農氏)같은 이는 처음으로 쟁기와 보습[耒]을 만들어서 천하를 이롭게 하였고, 소호씨(少昊氏)는 구호(九扈)3795)에게 명령하여 농사를 맡게 하였다.
이것은 고대(古代)의 성군(聖君)이 하늘의 뜻을 이어 지극히 바른 도(道)를 세워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천명을 수행한 것이다.
요(堯)임금은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령하여 공경하여 백성에게 농사짓는 때를 주게 하였으며, 순(舜)임금은 십이목(十二牧)에게 의논하기를, ‘먹는 것은 오직 농사의 때를 지키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하후씨(夏后氏)는 구혁(溝洫)3796)에 진력(盡力)하였고, 상(商)나라의 조상은 세민(細民)의 의지하는 바를 알았었다.
주(周)나라에 이르러서는 농사로써 나라를 개척하였으니 《시경(詩經)》의 빈풍편(豳風篇)의 시에서나,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의 저작에 있어서 농사의 힘들고 어려움을 정성껏 마음에 지니지 않은 것이 없어서 깊이 다스리고 오래도록 편안한 왕업(王業)을 이루었다.
훌륭하게도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는 자주 조서(詔書)를 내려서 해마다 나무 심기를 권하고 조세를 감하며 농경지를 주니, 나라안이 은성하고 부유하였으며, 당(唐)나라의 고조(高祖)는 목재(牧宰)에게 조서를 내려 힘써서 간이하고 고요한 행정을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시(農時)를 잃지않게 하였고, 태종(太宗)은 매양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영위(營爲)하는 데에는 농사 때를 잃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된다’하였으니, 그가 쌀 한 말에 3전(錢)하는 실적(實績)을 이루게 한 것이 어찌 그 인유(因由)한 바가 없었겠는가?
송(宋)나라의 제도에는 권농사(勸農司)를 두고, 연말에 그 성적에 따라 상벌(賞罰)을 시행하였으며, 또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매년 술을 준비해 가지고 들에 나가서 부로(父老)들을 맞이하여 보고 농사에 힘을 다하라는 뜻을 타이르게 한 것은, 아마 또한 여기에 보는 바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운(天運)에 순응하여 나라의 터전을 열으시매, 제일 먼저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 내어 농사의 이(利)를 누리게 하였으니, 그 농사를 권장하신 조목이 법령에 갖추어 있다.
태종(太宗)이 왕업을 계승하시어 더욱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을 더욱 힘쓰셨다. 특히 어리석은 백성들이 심고 가꾸는 방법에 어두운 것을 염려하셔서 유신(儒臣)에게 명령하여 우리나라 말로 농서(農書)를 번역하게 하여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하시고 후세에 전하였다.
과덕(寡德)한 내가 왕업을 계승하여서는 밤낮으로 겁내고 두려워하노니,
우러러 전대(前代)때에 이러하였음을 생각하고 오직 조종(祖宗)을 법으로 한다. 돌아보건대, 농무(農務)는 마땅히 백성에게 가까운 관리에게 책임을 맡겨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을 신중히 선택하여 임명하고 친히 격려하고 효유하였다. 또 차례로 주현(州縣)에 물어서 그 땅에서 이미 시험한 결과를 모아서《농사직설(農事直說)》을 만들어 농민들로 하여금 훤히 쉽게 알도록 하기에 힘썼으며, 혹이나 농사에 이(利)로울 만한 것은 마음을 다하여 연구하여 거론(擧論)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힘을 다하고 땅에는 버려 둔 이(利)가 없게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백성들에게는 저축할 여유가 없어서 한번 흉년이 들면 문득 굶주린 얼굴들을 하니, 이것이 어찌 아전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들어 힘써 종사하지 않음이 적기 때문이겠는가? 내가 매우 염려하는 바이다.
일찍이 옛날의 어진 수령들을 살펴보건대, 한편에서 이(利)로운 일을 일으켰을 때에 백성이 실지의 혜택을 받은 것은, 부지런히 노력(勞力)하여 이루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공수(龔遂)가 발해(渤海)의 수령이 되어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힘써 권장하였는데, 백성들이 도검(刀劍)을 차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그것을 팔아서 소와 송아지를 사게 하였으며, 봄에는 밭에 나가 일하기를 권하고 겨울에는 곡식들을 거두어 모으게 하니, 백성들이 다 부유하고 충실하게 되었다. 소신신(召信臣)은 남양(南陽)의 수령이 되었을 때에 백성을 위하여 이(利)되는 일을 하기를 좋아하여 몸소 경농(耕農)을 권장(勸奬)하느라고 들에 나다니면서 편안히 앉아 있는 때가 적었다.
가다가 물이나 샘을 보면 도량을 만들어 관개(灌漑)를 넓히니, 백성들이 그 이(利)를 얻어서 농사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임연(任延)이 구진(九眞)의 수령이 되니, 그곳의 풍속은 사냥을 생업(生業)으로 하고 소를 부려 농경(農耕)하는 것을 알지못하여 번번이 곤핍(困乏)하게 되므로, 이에 농기구(農機具)를 주조(鑄造)하여 개간(開墾)을 가르치고, 해마다 개간을 넓히니 백성들이 자족자급(自足自給)하게 되었다.
신찬(辛纂)은 하남(河南)의 수령이 되어서 농상(農桑)을 독려하고 권장하되, 친히 스스로 살펴보고 부지런한 자에게는 포백(布帛)과 물화(物貨)를 주어 돕고, 게으른 자에게는 죄를 주었으며, 주문공(朱文公)은 남강(南康)의 수령이 되었을 때에, 게시문(揭示文)을 인쇄하여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였는데,〈그 게시문에는〉갈아엎고, 시비(施肥)하고 씨를 뿌리며, 제초(除草)하는 절차에서부터 삼과 콩을 심는 법과 제방과 못을 수리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술하지않은 것이 없어서 순순(諄諄)히 타이르며, 때로는 친히 들을 순시(巡視)하고 가르친대로 하지않은 자는 처벌하였다.
모든 이런 일들이 어찌 그렇게 해야할 이유없이 번거롭고 소요(騷擾)함을 좋아서 하였겠는가?
대체로 보통 사람들의 심정은 그것을 거느리면 스스로 힘쓰고, 놓아두면 게을러지는 것이다. 선철(先哲)이 말하였기를, ‘일명(一命)의 벼슬3797)을 받는 선비라도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두면, 남에게 반드시 구제함이 있다’고 하였다.
하물며 지금의 감사와 수령의 책임을 맡는 자는 다할 수 있는 권한(權限)을 잡고 있어서 한 지방의 기쁨과 슬픔이 그 한 몸에 달려 있음이겠는가?
만약 성심으로 어루만지고 불쌍히 여긴다면 어찌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겠는가? 대체로 말해서, 농가(農家)의 일이란 것은 농사의 시기를 일찍 시작한 자는 수확도 또한 이르고, 힘을 많이 들인 자는 수확도 또한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농정(農政)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오직 그 적절한 시기를 어기지 않고, 그 농사에 바칠 힘을 빼앗지 않는 데에 있을 뿐이다.
온갖 곡식은 심고 씨뿌리는 것이 각각 그 때가 있는 것이니, 적어도 때를 한번 잃어버리면 해가 다하도록 다시는 따라갈 수 없다.
백성의 몸은 이미 하나이니 힘을 둘로 나눌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을 빼앗는 일이 관(官)에 있다면 어찌 농사에 힘쓰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인사(人事)를 이미 다하였다면, 비록 천운(天運)이 동반(同伴)되지 않더라도 또한 그 재해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이윤(伊尹)의 구전제도(區田制度)3798)와 조과(趙過)의 대전제도(代田制度)가 바로 그것이다. 근일에 경험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정사년에 후원(後苑)에 농사짓는 것을 시험하여 사람의 힘을 더 할 수없이 다 하였더니 과연 가뭄을 만나도 한재(旱災)를 일으키지 않고 벼가 매우 잘되었었다.
이것은 우연히 천재를 만나더라도 사람의 힘으로 구제할 수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전(傳)에 말하기를,‘백성의 살아가는 길은 부지런한데 있고, 부지런하면 빈핍(貧乏)하지않는다’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는 말하기를,‘게으른 농부가 스스로 편안하여 힘써 수고로움을 짓지아니하고 밭이랑에서 일하지아니하면, 피와 기장을 가리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비로소 차라리 근로(勤勞)에 지나칠지언정, 태타(怠惰)한데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겠다. 그러나 백성이 부지런히 힘쓰고자 하더라도, 관에서 권하고 시킴이 성실하지아니하면 그 힘을 발휘할 곳이 없을 것이다.
또 망종(芒種)이라는 절후(節候)는 사람의 힘이 넉넉하지못하여 비록 다 일찍 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만약 이 때만 잃지않는다면 오히려 가을에 곡식이 성숙할 가망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특히 망종이라는 절후를 한정으로 하여 늦어서 실농하기 보다는 이 때를 잃지말고 파종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이 때를 기다려서 파종(播種)하는 시기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농서(農書)에서도 또한 대개 일찍 파종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수령들은 예전의 상습(常習)에 익숙하여져서 비록 파종때를 당하고도 스스로 말하기를, ‘망종(芒種)이 아직 멀다’고 하고는, 모든 농지(農地)에 관계되는 소송사건을 즉시 처결(處決)하지아니하며, 종곡(種穀)과 양곡(糧穀)의 진대(賑貸)등의 사무를 항상 빨리 처리하지아니하여 번번이 시기를 늦추어 버리곤 한다.
혹은 수령이 비록 감사에게 보고하여도, 감사는 호조에 이첩(移牒)하고, 호조에서는 의정부에 보고하며, 의정부에서는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해야 하므로, 전전해서 서로 문서(文書)를 왕복하고 있는 동안에 망종(芒種)은 이미 지나가고 만다.
어떤 이는 농경의 적절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고 한갓 권과(勸課)한다는 이름 얻기만 꾀하여 너무 일찍 심기를 독려하기 때문에, 종묘(種苗)가 살지 못하여 도리어 농사를 해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참으로 절후(節候)의 이르고 늦은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의 계획이 어설퍼서 일이 시기를 잃게 하는 자도 또한 있다.
이래서야 어찌 근심을 나누어 백성을 사랑하는 자의 도리일 수 있겠는가? 누구든 나와 함께 착한 정치를 같이 하려는 자들은 나의 위임한 뜻을 본받고, 조종(祖宗)의 백성에게 두텁게 하신 법을 준수(遵守)하며, 전현(前賢)들의 농사를 권과(勸課)한 규범(規範)을 보고, 널리 그 지방의 풍토(風土)에 마땅한 것을 물으며, 농서(農書)를 참고하여 시기에 앞서서 미리 조치하되, 너무 이르게도 말고 너무 늦게도 하지 말라.
더구나 다른 부역을 일으켜서 그들의 농사시기를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니, 각각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이 근본을 힘쓰도록 인도하라.
밭에 일하여 농사를 힘써서, 우러러 어버이를 섬기고, 굽어 자녀를 길러서 나의 백성의 생명이 장수(長壽)하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근본을 견고하게 한다면, 거의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며, 예의를 지켜 서로 겸양(謙讓)하는 풍속이 일어나서, 시대는 평화하고 해마다 풍년은 들어 함께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壬寅/下敎曰: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農者, 衣食之源, 而王政之所先也。 惟其關生民之大命, 是以服天下之至勞。 不有上之人誠心迪率, 安能使民勤力趨本, 以遂其生生之樂耶, 若古神農, 始爲耒耟, 以利天下; 少昊命九扈, 以掌農事, 此聖神所以繼天立極而爲億兆立命者也。 堯命羲、和, 敬授人時; 舜咨十二牧, 食哉惟時; 夏后氏盡力乎溝洫; 商宗知小人之依; 至于周家, 以農事開國。 《豳風》之詩、《無逸》之作, 無非拳拳於稼穡之艱難, 以成長治久安之業, 其盛矣哉, 漢文帝數下詔書, 歲勸種樹, 減租賜農, 海內殷富; 唐高祖詔牧宰, 務從簡靜, 使不失時。 太宗每謂群臣曰: “營衣食, 不失時爲本。” 其致斗米三錢之效, 豈無所由! 宋制置勸農司, 歲終賞罰, 又令州縣每歲載酒出郊, 延見父老, 諭以竭力耕田之意, 蓋亦有見於此歟, 洪惟我太祖應運開基, 首正田制, 拯民塗炭, 俾享耕鑿之利, 其勸課之條, 具在令甲。 太宗繼述, 益勤播獲之功, 特慮愚民昧於樹藝之宜, 命儒臣, 以方言譯農書, 廣布中外, 以傳于後。 寡予承緖, 夙夜兢惕, 仰惟前代時若, 惟祖宗是憲, 顧以農務, 當責近民之官, 是用愼簡, 親加勉諭。 且令逮訪州縣因地已試之驗, 輯爲《農事直說》, 務使田野之民曉然易知, 儻可以利於農者, 靡不悉心究擧, 期於人盡其力, 地無遺利, 而民無蓄積之餘, 歲一不登, 輒有飢色, 是吏奉吾敎不力, 而從事焉尙寡也, 予甚慮焉。 嘗觀古之賢守, 能興利一方, 而民受實惠者, 莫不以勤勞而成。 龔遂爲渤海, 務勸農桑, 民有帶持刀劍者, 使買牛犢, 春勸趨田, 冬課收斂, 民皆富實。 召信臣爲 南陽, 好爲民興利, 躬勸耕農, 出入阡陌, 稀有安居, 行視水泉, 開通溝瀆, 以廣灌漑, 民得其利, 莫不力田。 任延爲九眞, 其俗以射獵爲業, 不知牛耕, 每致困乏, 乃令鑄作田器, 敎之墾闢, 歲歲開廣, 百姓充給。 辛纂爲河內, 督勸農桑, 親自檢視, 勤者資以帛物, 惰者加罪。 朱文公之爲南康也, 印榜勸民, 自犂翻糞種芟草之節, 以至種麻豆修陂塘之事, 莫不開具, 諄諄曉諭, 時親巡野, 罰不如敎。 凡此豈無自而好爲煩擾哉, 蓋常人之情, 率之則自力, 縱之則惰窳耳。 先哲有言: “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必有所濟。” 矧今任監司守令之責者, 皆操可致之柄, 一方休戚, 係于一身, 若心誠撫恤, 何古人之不可及哉, 大抵田家之事, 趨時早者, 所得亦早; 用力多者, 所收亦多, 故農政所重, 惟在不違其時, 不奪其力而已。 百穀種蒔, 各有其時, 時苟一違, 終歲莫追。 民旣一身, 力不可分, 奪之在官, 豈可責之力田, 苟人事旣盡, 則雖天運之不齊, 亦可禦也。 若伊尹之區田, 趙過之代田是已。 以近日所驗言之, 歲丁巳, 於後苑試治田極人力, 果遇旱不能爲災, 禾頗稔熟。 是則偶爾天災, 其以人力而可救也審矣。 《傳》曰: “民生在勤, 勤則不匱。” 《書》曰: “惰農自安, 不愍作勞, 不服田畝, 越其罔有黍稷。” 乃知寧過於勤勞, 不可失之怠惰也。 第民欲勤力, 勸課不實, 則無所施其力矣。 且云芒種者, 人力不贍, 雖不能皆早, 若及此時, 則猶有秋成之望, 故特限節候, 以示與其晩而失業, 不若及此時之爲愈也, 非謂必待此播種之期也。 《農書》亦云: “大率欲早。” 今之守令, 狃於故常, 雖當播種之時, 自謂芒種猶遠, 凡干土田訴訟, 未卽處決, 穀種口糧賑貸等事, 常不汲汲, 每失稽緩。 雖或守令申報監司, 監司移牒戶曹, 以報政府, 政府具由以啓, 轉相往復之際, 芒種已過。 或不識耕稼之宜, 徒務勸謀之名, 督種太早, 苗不得生, 反以害農者有之。 或未能眞知氣節之早晩, 自計疎虞, 以失事機者, 亦有之, 豈分憂字民之義乎, 凡與我共聖者, 其體予委任之意, 遵祖宗厚民之典, 視前賢課農之規, 廣詢風土所宜, 參以《農書》所載, 預期措置, 毋太早毋太晩, 尤不可興務以奪其時, 各盡乃心, 導民務本, 服田力穡, 仰事俯育, 以壽我民命, 以固我邦本, 庶幾家給人足, 蔚興禮讓之風; 時和歲豐, 共享熙皞之樂。
세종 47권, 12년(1430 경술/명선덕(宣德) 5년) 2월 19일(경인) 5번째기사
예조에서 의례 상정소와 함께 의논한 박연이 상서한 조건에 대해 아뢰다
예조에서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함께 의논한 봉상판관(奉常判官) 박연(朴堧)이 상서(上書)한 조건(條件)을 아뢰었다.
박연 이 말하기를,
‘종묘(宗廟)의 음악은 이 앞서는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 모두 무역궁(無射宮)1449)만을 사용하니, 양(陽)은 있어도 음(陰)은 없었습니다.
옛날 제도에 의거하면 아래에서는 무역(無射)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협종(夾鍾)을 노래하였습니다. 협종과 무역은 묘(卯)와 술(戌)로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 선왕(先王)이 죽은 사람의 혼령에게 제향하는 음악인 것입니다.
사직(社稷)의 음악은 이보다 먼저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 모두 대주궁(大簇宮)만을 사용하였으니 역시 순수한 양(陽)뿐이었습니다.
옛날 제도에 의거하면 아래에서는 대주(大簇)를 연주하고 위에서는 응종(應鍾)을 노래하였습니다. 대주(大簇)와 응종(應鍾)은 곧 인(寅)과 해(亥)로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 선왕(先王)이 지기(地祇)에게 제사하는 음악인 것입니다.
석전(釋奠)의 음악은 앞서는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 모두 남려궁(南呂宮)만을 사용했으니 화합함이 없었습니다. 옛날 제도를 살펴보면, 아래에서는 고선(故洗)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남려(南呂)를 노래하였습니다.
고선(姑洗)과 남려(南呂)는 곧 진(辰)과 유(酉)이므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서 옛 사람이 사망(四望)1450)에 제사지내고 성현(聖賢)에게 제사지내던 음악인 것입니다.
원단(圓壇)의 제사는 곧 환구(圜丘)이니,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는 예(禮)입니다.
제후(諸侯)는 상시로 제사지내는 법이 없사온데, 우리나라에서는 옛적부터 이를 행하였사오니 예(禮)가 아니었삽고, 또 그때 쓰는 음악도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주궁만을 사용했사오니 전혀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영락 병신년 무렵에 문정공(文定公) 조용(趙庸)이 예조판서가 되어 이를 아뢰고 개정하여 제사는 기우제(祈雨祭)로 바꾸고, 노래는 운한편(雲漢篇)1451)을 사용하되, 음악은 아래에서는 황종(黃鍾)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대려(大呂)를 노래하여, 주나라의 육합(六合)제도를 회복하였습니다.
황종과 대려는 곧 자(子)와 축(丑)이므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서 선왕(先王)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는 음악인 것이니, 이는 그 율려(律呂)가 소리를 합하는 법은 이미 그 당시에 쓰임이 보아 원단(圓壇)의 의식이 나타나 있으나, 다만 다른 제사의 음악에 편입(編入)되지 못한 것이 유감된 일입니다. 이제 신이 어명을 받자와 모두 다 개정한 것은 진실로 아무런 증험(證驗)도 없이 감히 이 같은 억설(臆說)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농(先農)과 선잠(先蠶)의 음악은 앞서는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주궁을 사용했사오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옛 제도를 써서 아래에서는 고선(姑洗)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남려(南呂)를 노래하여, 석전(釋奠)의 악과 같이 했사옵니다.
이는 곧 진(辰)과 유(酉)의 합으로 옛 사람이 성현(聖賢)에게 제사지내던 음악인 것입니다. 풍운뢰우(風雲雷雨)의 음악은 모두 대려궁을 사용했사온데, 이는 순수한 음(陰)뿐이었사온즉, 천신(天神)에게 제사하면서 순수히 음률(陰律)을 사용한 것은 더 마땅치 않습니다.
이제 옛 제도에 의거하여 아래에서는 황종(黃鍾)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대려(大呂)를 노래하여 원단(圓壇)의 음악과 같이 했사옵니다. 이는 곧 자(子)와 축(丑)의 합한 것으로서 선왕(先王)이 천신(天神)에게만 제사지내는 음악인 것입니다.
산천(山川)의 음악은 유빈(蕤賓)을 연주하고 함종(函鍾)을 노래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홍무예제(洪武禮制) 주현(州縣)의 의식을 의거하여 풍운뇌우(風雲雷雨)와 단(壇)을 같이하여 제사지내기 때문에, 천신(天神)에게만 제사하는 황종(黃鍾), 대려(大呂)의 궁(宮)만 사용하게 되니 두 편을 다 같이 높이지않기 때문입니다.
우사(雩祀)의 음악은 앞서는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 다 같이 대주궁(大簇宮)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한 잘못입니다.
옛 제도에 찾아보아도 역시 어떤 율(律)을 사용했다는 글귀는 없사오나,
이는 여섯 위(位)의 신(神)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문헌통고(文獻通考)》와 월령(月令)1452)과《공자가어(孔子家語)》등 글에 찾아보면,‘구망(句芒), 욕수(蓐收), 현명(玄冥)은 소호씨(少皞氏)의 아들이요, 축융(祝融)은 전욱씨(顓頊氏)의 아들이요, 후토(后土)는 공공씨(共工氏)의 아들인 구룡(句龍)이며, 후직(后稷)은 주(周)나라의 시조(始祖)이오니, 이 여섯 분은 살아서는 상공(上公)이 되고 죽어서는 귀한 신령이 된 것이다’하였습니다.
그 근본을 살펴보면, 상세(上世)의 성현(聖賢)의 신(神)은 반드시 석전(釋奠)과 선농(先農)의 예(禮)와 같이 고선(姑洗),남려(南呂)의 율(律)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온데, 다만 진양(陳暘)1453)의 악현도(樂懸圖)중에는 고(鼓)는 영고(靈鼓)를 사용한다고 하여 마치 지기(地祇)의 제사와 비슷하게 하니 의심스럽습니다. 지기 제례(地祇祭例)로 한다면 반드시 대주(大簇)와 응종(應鍾)의 율(律)을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신(迎神)의 음악은 각기 그 소속된 바가 있으니, 천신(天神)에게 하는 제사에는 환종궁(圜鍾宮)을 사용하여 여섯 번 변하나니, 곧 《주관(周官)》에 이른바,‘그 음악이 여섯 번 변하면 천신(天神)이 모두 내려와서 예(禮)를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기(地祇)에게 하는 제사에는 함종궁(函鍾宮)을 사용하여 여덟번 변하나니, 곧《주관(周官)》에 이른바,‘그 음악이 여덟번 변하게 되면 지기(地祇)가 모두 나와서 예(禮)를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 귀신에게 하는 제사에는 황종궁(黃鍾宮)을 사용하여 아홉번 변하나니, 곧《주관(周官)》에 이른바,‘그 악이 아홉번 변하게되면 사람 귀신에게 예(禮)를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영신(迎神)의 음악은 소속되는 음률을 가리지않고 다만 응안(凝安), 경안(景安)등의 곡명(曲名)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고, 또 여섯번, 여덟번, 아홉번 변하는 법을 알지못하여, 매양 제사에 신(神)을 맞이할 때에는 모두 황종(黃鍾) 일궁(一宮)만을 연주하여 삼성(三聲)으로 그치는데, 어떤 때는 이성(二聲)으로 그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성(一聲)으로 집례(執禮)의 말에 따라 그치기도 합니다.
지금 선왕(先王)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두 개정(改正)하여 아래와 같이 조목별로 아뢰나이다.
종묘(宗廟)에서 영신(迎神)하는 음악은 황종궁(黃鍾宮)을 사용하여 아홉번 변하게 할 것이니, 황종(黃鍾)은 곧 북방 자위(子位)의 음률로서, 《주례(周禮)》주(註)에 이르기를,‘황종(黃鍾)은 허성(虛星), 위성(危星)의 기(氣)에서 나나니, 허성, 위성은 종묘(宗廟)에 당하는 까닭으로 성(聲)의 유(類)로써 이를 찾게 된다‘고 하였으며,
진씨(陳氏)1454)는 말하기를,‘죽은 사람이 머리를 둔 방위이기 때문에 이 궁(宮)을 사용하여 사람 귀신을 오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음악이 아홉번 변하는 것은 자(子)의 수(數)가 원래 아홉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궁(宮)을 옛 사람이 인궁(人宮)이라이른 것입니다.
석전(釋奠),선농(先農),우사(雩祀)도 이와 같으니 모두 사람 귀신에게 제향(祭享)하는 까닭입니다. 사직(社稷)에서 영신(迎神)할 때에는 함종궁(函鍾宮)을 사용하여 여덟 번 변하게 할 것이니, 대개 함종(函鍾)은 곧 곤(坤)의 윗자리인 미위(未位)의 임종률(林鍾律)인 것입니다.
《주례(周禮)》의 주(註)에 이르기를,‘임종(林鍾)은 미곤(未坤)의 자리[位]에서 나나니 동쪽 정성(井星)의 밖은 곧 천사(天社)이다’하였으며,
진씨(陳氏)는 말하기를,‘그 신(神)이 만물(萬物)을 기르는 까닭으로 이 궁(宮)을 사용하여 지기(地祇)를 나오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음악이 여덟번 변하는 것은, 미(未)의 수(數)가 원래 여덟인 까닭입니다.
산천제(山川祭)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역시 이 궁(宮)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산천이 지기(地祇)에 속하는 까닭입니다. 이 궁(宮)을 옛적 사람이 지궁(地宮)이라 이르고 함종(函鍾)이라고 명칭한 것은, 곤(坤)이 널리 함유(含有)하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단(圓壇)의 풍운뢰우신(風雲雷雨神)을 맞이할 때에는 환종궁(圜鍾宮)을 사용하여 여섯번 변할 것이니 환종(圜鍾)은 곧 진방(震方)의 윗자리인 묘위(卯位)에 해당한 협종률(夾鍾律)인 것입니다.
《주례(周禮)》주(註)에 이르기를,‘협종(夾鍾)은 방성(房星),심성(心星)의 기(氣)에서 나나니, 방성, 심성은 천제(天帝)의 명당(明堂)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진씨(陳氏)는 말하기를,‘제(帝)가 진방(震方)에서 나오는지라, 그러므로 이 궁(宮)을 사용하여 천신(天神)을 내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음악이 여섯 번 변하는 것은 묘(卯)의 수가 원래 여섯인 까닭이니,
환종(圜鍾)으로 명칭한 것은 천체(天體)가 원래 둥근때문에 이 궁(宮)을 옛적 사람이 천궁(天宮)이라고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神)을 전송(餞送)하는 음악은 다만 소속된 궁(宮)만 사용하되 한번 변하고 그치나니, 이제 아래에 열거합니다.
종묘(宗廟),선농(先農),선잠(先蠶),석전(釋奠),우사(雩祀)등의 제사에는 다 같이 황종(黃鍾) 일성(一成)1455)을 사용하고, 원단(圓壇) 풍운뢰우의 제사에는 다 같이 환종궁(圜鍾宮) 일성(一成)을 사용하고, 사직(社稷),산천(山川),성황(城隍)에는, 산천(山川)은 사직(社稷)과 같이 함종궁(函鍾宮) 일성(一成)을 사용할 것이며, 성황(城隍)에는 예전에는 음악을 사용했다는 글이 없으나, 이제 위의 말씀한 조목들을 참작하여 다 그들대로 따르기를 청합니다. 다만 우사(雩祀)의 음악은 반드시 고선(姑洗), 남려(南呂)의 음률을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악현(樂懸)의 제도는 원래 십이신(十二辰)에서 법을 한 것이니,
일신(一辰)마다 편종(編鍾) 1가(架)와 편경(編磬) 1가(架)를 설치하고,
또 편종과 편경의 사이에 종(鍾) 하나와 경(磬) 하나를 설치하되,
자위(子位)에는 황종(黃鍾)의 소리로 하고, 축위(丑位)에는 대려(大呂)의 소리로 하고, 인위(寅位)에는 대주(大簇), 묘위(卯位)에는 협종(夾鍾), 나머지 위(位)들도 다 이와 같이 할 것이니, 이것은 선왕(先王)의 제도로서 음양(陰陽)에 법을 취하여 세밀(細密)함이 이와 같으니, 이에 증감(增減)할 수 없는 것이온데, 우리나라에서는 헌가악(軒架樂)은 일위(一位)마다 다만 편종(編鍾)과 편경(編磬)만을 설치하고 위(位)에 따라 본율(本律)에 해당한 종(鍾)은 없으니, 선왕(先王)이 법을 취한 뜻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이를 갖추어 주조(鑄造)하여 옛날의 제도를 회복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제 옛날의 제도를 살펴보건대, 이경(離磬)과 박종(鎛鍾)을 십이신(十二辰)의 위(位)에 갖추되, 궁현(宮懸)과 헌현(軒縣)에만 사용하고 삼신(三辰)의 위(位)는 궐한다고 하였으니, 이 설(說)은 좇지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선농(先農)의 음악은 모두 토고(土鼓)를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노고(路鼓)를 사용하오니, 이는 제도가 아닙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예운(禮運)1456)의 주(註)에는「토고(土鼓)는 흙을 쌓아서 만든 북이다」하였고,《주례(周禮)》의 주(註)에 두자춘(杜子春)1457)이 말하기를,「질[瓦]로써 변죽[匡]을 삼고 가죽을 메워 면(面)을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진양(陳暘)은 예운편(禮運篇)의 말로써 근거를 삼고 자춘(子春)의 설(說)은 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악(雅樂)의 악기(樂器)로서 토음(土音)에 속(屬)한 것은 모두 질로써 만들었으니, 훈(塤)과 부(缶)의 유(類)가 모두 이것입니다.
상고(上古)의 흙을 쌓아 만든 북을 본뜰 수 없다면, 아직은 자춘(子春)의 말대로 질로 변죽을 만들고 가죽을 씌워 면(面)을 삼아 상고(上古)의 토고(土鼓)에 대용(代用)한다고 한 이 말을 살펴서 이에 따르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당상(堂上)의 음악은 먼저 부(拊)를 칠 것이니, 부(拊)란 악기는 노래를 먼저 부르는데 소용되는 것입니다.
진양(陳暘)은 말하기를, 「당상(堂上)의 음악이 시작될 때 기다리는 바는 곧 부(拊)이요, 당하(堂下)의 음악이 시작될 때 기다리는 바는 곧 고(鼓)이니, 대개 당상은 문안[門內]을 다스리는 것으로 부(拊)로써 하고, 당하는 문밖을 다스리는 것이므로 고(鼓)로써 하나니, 안은 부자(父子)이요, 밖은 군신(君臣)으로 사람의 큰 윤기(倫紀)라, 이것을 악이 실상(實像)으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당상(堂上)의 음악은 부(拊)가 없어서는 아니 되겠사온데 지금은 없사옵니다. 그 만드는 법을 상고해 보니, 《주례(周禮)》의 도설(圖說)과 진양(陳暘)의 글과 임우(林宇)의 악보(樂譜)는 그 그림과 논설이 같지 않으므로, 그 중 한 가지 설(說)에 의거하여 제조해 쓰고자 하여, 이제 부(拊)의 악기 모양을 살펴보아도 체제(體制)를 정하기가 어려우니, 그것은 제조하지 아니하는 것이 옳겠습니다’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주례(周禮)》의 춘관(春官)을 살펴보면,「북치는 사람이 진고(晉鼓)로 금주(金奏)를 친다.」금주(金奏)는 편종(編鍾)을 치는 것이다.고 하였는데,《주례도(周禮圖)》와 진씨(陳氏)의 《예서(禮書)》와 《악서(樂書)》중에는 현고(懸鼓)의 형상을 그리고 말하기를,「현고(懸鼓)는 곧 진고(晉鼓)이다.」 그것은 악(樂)을 진행(進行)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진고(晉鼓)라 하였으며, 그리고 매달기 때문에 현고(懸鼓)라 하였다고 하였으며,
진양(陳暘)은 인하여 말하기를,「궁현(宮懸)은 네 모퉁이에 설치하고, 헌현(軒懸)은 세 위(位)에 설치한다」고 하였으며, 순자(荀子)1458)는 말하기를, 「모든 악(樂)의 군왕(君王)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제 아악(雅樂)의 대고(大鼓)는 이 북을 모방하여 만든 것인 듯하오나, 그 형상과 제도는 주관(周官)의 운인(韗人)1459)의 설(說)과는 합하지 않으며, 또 그것은 다만 하나만을 만들어서 한 모퉁이에 치우쳐 놓고, 또 매달아 놓지않으니, 제도가 아닙니다.
이제 갖추어 만들기를 모두 주(周)나라 제도와 같이 하여 쓰게 하소서.
이제 헌현(軒懸)에 설치한 바 뇌고(雷鼓), 영고(靈鼓), 노고(路鼓)를 살펴보면 모두 소리가 나지않으며, 지금 쓰는 대고(大鼓)는 송나라 사람이 산고(散鼓)라고 하는 것인데, 그 후에 진고(晉鼓)로써 대신하였사오니, 송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진고(晉鼓) 하나를 쓰게 하소서’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질장구[缶]가 악기(樂器)로 된 것은 요(堯)임금 때부터 시작되었사온데, 역대(歷代)로 폐하지않았고, 진(秦)나라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를 숭상하여 써서 한갓 악현(樂懸)의 악기가 될 뿐만아니라, 온 세상이 모두 이를 좋아하였으니, 성음(聲音)과 절주(節奏)가 없이 어찌 세속(世俗)에서 이렇게 숭상하였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쓰는 질장구는 그 모양이 그림과 같지않으며, 또 두드려도 소리가 전혀 나지아니하고 다만 헌가(軒架)중에서 항렬(行列)만 갖추고 있을 뿐이므로, 질장구를 만드는 장인[缶工]의 유(類)를 흘공(歇工)1460)이라고 이르게 되니, 기만(欺慢)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봅니다.
예전 글을 잘 상고해보면, 당나라 영태(永泰)1461) 초년에 사마도(司馬滔)가 광평악(廣平樂)을 마련하여 올렸는데, 여덟 질장구로써 황종(黃鍾) 일운(一均)의 소리를 갖추었다고 하고, 송나라 때에는 민간(民間)에서 아홉개의 질항아리[甌]를 사용하여 오성(五聲)1462),사청(四淸)의 소리를 맞추었다고 하였으니, 헌가(軒架)중에 열개 질장구의 소리를 십이율(十二律)로 나누어 소리를 내는 것이 역시 어려움이 없을 듯하며, 또 흙으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 중에는 두드려서 소리가 나지않는 것도 있고, 소리가 매우 맑고 조화되는 것도 있으며, 소리가 높은 것도 있고, 소리가 낮은 것도 있으니, 대개 소리가 나고 아니나는 것은 곧 질그릇의 잘 익고 익지않은 것이기 때문이며,
소리의 높고 낮은 것은 악기의 두껍고 얇음과 깊고 얕은 관계입니다.
지금 성(城)밖의 가까운 땅 마포(麻浦) 강가에 다행히 질그릇 굽는 곳이 있사오니, 질그릇 잘 굽는 사람을 선택하여 인력(人力)도 공급하고 품삯도 주어서 역사(役事)를 맡기고, 음률을 알고 사리(事理)를 잘 아는 사람을 시켜 조석으로 왕래하면서 질그릇 만드는 것을 친히 감독하게 하되, 반드시 모양이 도본(圖本)과 합치하고 소리가 음률과 조화(調和)되게 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 악기가 만들어진 후에는 여러 악공(樂工)이 각기 자호(字號)에 따라서 서로 쳐서, 열개의 질장구 소리가 저절로 한 음악을 이룬 후에 항렬(行列)에 넣어서 여러 소리에 맞춘다면, 소리와 소리가 서로 응하여 매우 조리(條理)가 있게 될 것이오니, 신은 이를 한번 시험하기를 원합니다.
질나발[塤]의 악기는 예전에는‘길이가 3치반이고, 둘레가 5치반이라’고 하였는데, 진양은 말하기를,‘밑이 편평하고 구멍이 여섯개 있는 것은 물[水]의 수(數)이요, 가운데가 비고 위가 뾰족한 것은 불의 형상이다’하였으니, 질나발은 물과 불이 서로 합하여 악기가 되었고, 역시 물과 불이 서로 조화되어 소리를 이루게 되었으니, 그 제작한 법이 모두 근거가 있으므로 함부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악현(樂懸)에 쓰는 바, 질나발은 그 제도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으니 치수에 맞추지 않았으며,
혹은 위와 아래가 모두 뾰족하기도 하고, 위와 아래가 모두 둥글기도 하여, 밑이 편평하고 위가 뾰족하다는 제도에 어긋나고, 또 질을 구워 만든 솜씨가 매우 거칠며, 구멍을 뚫은 것도 전혀 법에 틀렸사오니, 율과 성(聲)이 조협(調協)되기를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선현(先賢)들의 도설(圖說)에 의거하여 고쳐 만들어서 쓰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제향(祭享)에 쓰는 북은 뇌고(雷鼓), 영고(靈鼓), 노고(路鼓)의 세 가지가 있으니, 진양(陳暘)은 말하기를,‘우레[雷]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에,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뇌고(雷鼓)를 쓰고 영(靈)은 땅의 덕이기 때문에 지기(地祇)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영고(靈鼓)를 쓰고, 길[路]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사람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노고(路鼓)를 사용한다’고 하였사오며, 신이 옛 사람의 헌가도(軒架圖)를 살펴보니,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뇌고(雷鼓) 세 틀[三架]를 쓰고, 지기[地祇]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영고(靈鼓) 세 틀을 쓰고, 사람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노고 세 틀을 쓴다고 하였사온데, 이제 종묘(宗廟)의 헌가(軒架)에는 노고(路鼓)를 사용하되 세틀로 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꼭 옛 제도에 합당하오나, 사직(社稷)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영고(靈鼓) 세틀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온데, 도리어 뇌고(雷鼓) 한 틀만을 사용하고, 원단(圓壇) 풍운뢰우(風雲雷雨)의 제사에는 반드시 뇌고(雷鼓) 세틀을 사용하여야 옳을 것이온데, 도리어 뇌고(雷鼓) 한 틀만을 쓰게 되어서 저것과 이것이 서로 바꾸어져서 이름과 실상이 들어맞지 아니하고, 또 결점(缺點)이 있사오니, 어찌 성조(盛朝)에서 이러한 잘못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말씀에 의거하여 수(數)를 맞추어 제작하여 각기 같은 유(類)를 진설하고 연주하게 하시기 원하옵니다. 천신(天神)에게 제사할 적에는 묘궁(卯宮) 환종(圜鍾)의 음률을 사용하여 음악은 여섯 번 변하는 것을 사용하고, 북은 여섯 면(面)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선천(先天)의 수(數)에 묘(卯)가 그 육(六)을 얻은 때문이며, 지기(地祇)에게 제사할 적에는 미궁(未宮) 함종(函鍾)의 음률을 사용하여, 음악은 여덟번 변하는 것을 사용하고, 북은 여덟면(面) 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선천(先天)의 수(數)에 미(未)가 그 여덟을 얻은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진양(陳暘)의 이 설(說)은 근거가 있는 듯합니다.
《주례(周禮)》주(註)에 정사농(鄭司農)1463)의 말을 인용하여,‘뇌고(雷鼓)가 여섯면(面)이라’한 것은 진씨(陳氏)의 말과 같으며, 또 정강성(鄭康成)1464)의 말을 인용하여,‘뇌고(雷鼓)는 여덟면(面)이고, 영고(靈鼓)는 여섯면(面)이라’고 하였사온데, 이제 봉상시(奉常寺)의 서열도(序列圖)는 진씨(陳氏)의 말은 상고하지않고 다만 정강성(鄭康成)의 말에만 의거하여 도(圖)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두 북이 바뀌어졌사오니 진씨의 말에 의거하여 이를 고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헌가(軒架) 삼면(三面)에 편종(編鍾)의 자리가 아홉인데, 구가(九架)안에 각기 십이율(十二律)의 종(鍾)을 매달아 합계 1백8개가 되어야만 본율을 갖출 수 있고, 중성(中聲)이 만약 사궁(四宮)의 맑은 소리를 겸하게 되면,
틀마다 각각 4개씩을 보태어 모두 1백 44개가 되어야만 수효가 차게 되며, 합제(合祭)하게 되면 이것의 갑절로 하여 모두 2백 88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편종(編鍾)의 원 수효는 다만 2백86개인데, 신이 이제 중국의 방향(方響), 소관(簫管)등 악기를 가지고 음률을 교정(校正)하니, 그 중에 황종(黃鍾)에 꼭 합하는 것이 10개, 대려(大呂)에 꼭 합하는 것이 11개, 협종(夾鍾)에 합하는 것이 7개, 고선(姑洗)에 합하는 것이 7개, 중려(仲呂)에 합하는 것이 9개, 유빈(유賓)에 합하는 것이 13개, 임종(林鍾)에 합하는 것이 19개, 이칙(夷則)에 합하는 것이 14개, 남려(南呂)에 합하는 것이 21개, 무역(無射)에 합하는 것이 26개뿐이고, 그 나머지 1백36개는 모두 다 음률에 맞지 않습니다.
이제 입용(入用)되는 수(數)를 계산한다면, 황종(黃鍾),대주(大簇),중려(仲呂),유빈(蕤賓),이칙(夷則),응종(應鍾)이 겨우 한 제사의 현악(懸樂)에 족하고, 대려(大呂),협종(夾鍾),고선(姑洗)은 한 제사의 소용에도 모자라며, 다만 임종(林鍾),남려(南呂),무역(無射)은 두 제사를 아울러 지낼 때라도 그 수가 족합니다.
그 갖추지못한 틀은 제사지내는 날에 부득이 협조(協調)되지않는 종(鍾)을 겸해 진설하여 아울러 이를 행하게 되는 터이오니, 영녕전(永寧殿)의 악은 율에 맞는 종(鍾)이 없어서 곡조(曲調)를 이룰 수 없으므로, 한두 틀[架]의 교정된 것을 나누어다가 전면(前面)에 설치하고, 맞지않는 것은 종묘의 뜰에 바꾸어 들여 넣었으므로 두 제사의 음악이 모두 순수하고 바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있는 수(數)대로 종을 다 두드려 친다면, 소리가 서로 섞여져서 사음(邪音)과 정음(正音)이 어지럽게 울리니 화협될 까닭이 전혀 없으므로 정률(正律)로만 연주하고, 나머지는 모두 매달아두기만 하고 치지는 아니하오니, 이것도 또한 소신(小臣)의 망령된 계교이오나, 지난 날의 사음(邪音)과 정음(正音)이 섞여져 연주되는데 비하오면 조금 나은 편입니다.
바라건대 이제 갖추어 주조(鑄造)하여 일대(一代)의 음악을 바로잡아 만세(萬世)에 전하도록 하소서.
또 당상(堂上)의 특종(特種)과 특경(特磬)은 옛날 제도로는 소리 중의 황종(黃鍾)이 정음(正音)이온데, 이제 보옵건대 종묘(宗廟)의 특종(特種)은
중려(仲呂)소리이고, 여러 제사에 쓰이는 것은 고선(姑洗)소리이오며, 특경(特磬)도 역시 그 음(音)은 살펴보지도 않고 당경(唐磬) 한개[枚]로써 마음 내키는 대로 사용하게 되니 고쳐 만들게 하되, 반드시 소리는 황종(黃鍾)에 맞도록 한 후에 쓰도록 하기를 원하옵니다.
신은 또 망령되이 계획하옵기를, 모든 쇠로 만든 악기는 두터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소리가 낮게 되오니, 그 소리가 낮은 것은 다시 높게 할 도리가 없지마는, 소리가 높은 것은 그것을 갈아서 얇게 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바라건대, 유기장(鍮器匠) 3, 4명만 주시면 먼저 특종(特種) 한 개를 갈아 깎아서 시험한 후에 이것에 준하여 교정(校正)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화협(和協)되지않는 편종(編鍾) 1백36개도 또한 안쪽을 갈아 깎아서 끝내 음률에 맞도록 하여 쓰면, 일은 조금 쉬워지고 제악(祭樂)은 거의 갖추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牘)이라는 악기는 대[竹]로 만드는데, 길이가 7자[尺]요, 속은 비고 밑이 터지며, 그 끝에는 두 구멍이 있고 채색으로 그림을 그려서 장식을 하고, 땅을 내리쳐서 소리를 내어 춤추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조(調)에 맞추게 하는 것인데, 지금 아악(雅樂)의 독(牘)은 대로 만든 것은 옳지마는, 속을 파내지 않아서 마디마다 모두 막혔으니, 속이 비고 밑이 터졌다고 하는 제도에 벗어났으며, 또 두 구멍을 뚫지않고, 또 채색으로 그린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땅을 내리칠 때에 전혀 소리가 나지 아니하오니 본 제도에 매우 어긋납니다.
바라건대 도설(圖說)에 의거하여 고쳐 만들어 쓰게 하소서.
축(축)은 사방이 2자4치요, 속은 비고 사면(四面)을 빈틈없이 짜 붙이고, 가운데 한 구멍을 내어 막대기 자루가 드나들게 하고, 다시 다른 구멍은 없는 것이온데, 지금 아악(雅樂)의 축(柷)은 이미 막대기 자루가 드나들 구멍이 있는데도 또한 옆에 구멍을 뚫어서 둥글고 크기가 주먹이 들어갈 만한데, 도설(圖說)을 상고해 보면 이와 같은 모양으로 된 것은 없으니 모두 개정(改正)하시되, 이제 위의 말[說]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옳사오니 반드시 따라야 하겠사오며, 다만 당종(唐鍾)만은 갈아 깎지말게 하시기 바라옵니다’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경석(磬石)을 얻기는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질로 경을 만든 것은 역시 부득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 소리는 건방(乾方)에 속하니 입동(立冬)의 소리요, 흙 소리는 곤방(坤方)에 속하니 입추(立秋)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질로써 돌을 대신하게 되니, 이는 곧 팔음(八音)1465)의 제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지금 남양(南陽)의 돌을 얻으니 그 소리가 매우 맑고 화평하여 당경(唐磬)보다 못하지않사온 즉, 이는 곧 성조(聖朝)의 시절에 응하여 나온 물건으로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진심(盡心)으로 쪼고 갈아서 크게 갖추어지기를 바라옵니다마는,
이를 갈고 다듬기가 쉽지 않으므로 반드시 오랜 시일이 걸려야만 비로소 갖추어지게 될 것이오니, 그것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반드시 전일에 쓰던 질로 만든 경을 쓰게 하소서.
이제 질경을 살펴보니, 음률에 맞는 것은 드물고, 또 소리가 아니 나는 것도 많고 수효도 역시 넉넉하지 못하오니, 반드시 음률에 가까운 것을 골라 남겨두고, 나머지는 곧 갖추 만들게 하여 돌경이 완성될 때까지 사용하게 하시기 원하옵니다.
생(笙)이라는 악기는 간방(艮方)에 속한 소리인데, 그 제도는 길고 짧은 여러 피리가 가지런하지않게 한개의 바가지속에 꽂혀있어, 마치 봄볕에 모든 생물이 돋아나는 형상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것이 물건을 생(生)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이를 생(笙)이라 부르고, 그것이 바가지를 몸으로 삼은 악기이기 때문에 이를 포(匏)라 부르게 되옵는데, 그것을 반드시 바가지[匏]로 만드는 것은, 박[匏]은 덩굴로서 땅에 있는 물건으로서 간방(艮方)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세에서 나무로 포(匏)를 대신하게 되니, 제작은 비록 정교(精巧)하오나 전혀 본 제도에 어긋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팔음(八音)중에서 나무소리는 손방(巽方)에 속하는 소리이니 입하(立夏)의 음(音)이고, 포(匏)의 소리는 간방(艮方)에 속하니 입춘(立春)의 음(音)인데, 나무로 박[匏]을 대신한다면 이것이 손방(巽方)의 음이 되겠습니까? 간방(艮方)의 음(音)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옳지못한 일이오니, 본 제도에 의거하여 만들게 하되, 다만 생(笙)을 만드는 포(匏)는 쉽사리 구할 수 없사오니, 작량(酌量)하여 형상을 그려서 서울과 지방에 널리 구하여 가을에 이르러 갖다가 바치게 하고,
이를 골라서 쓰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제 위의 말[說]들을 살펴보시고 꼭 따라주시되 반드시 포(匏)로 만들어 시험하게 하소서’하였다.
박연이 또 말하기를,
‘당상(堂上)의 등가(登歌)는 음률 맞추기가 퍽 어려우니, 한결같은 뜻으로 온통 마음을 기울여 쓰지 않으면 성공(成功)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좌우방재랑(左右房齋郞)을 두어, 좌방(左房)은 등가(登歌)의 자리를 갖추도록 하고, 우방(右房)은 문무(文舞)의 자리를 갖추도록 하며, 그들이 거관(去官)하는 법도 오로지 근무(勤務)한 날수의 많고 적음에만 의거하고, 가무(歌舞)를 잘하고 못함에는 관계하지 아니하므로, 그로 인하여 악을 익히는 데에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년 봄 초에 신등이 예조에 보고하고 위에 아뢰니, 제학(諸學)의 예(例)에 의거하여 시험을 보여 뽑아서 전진(轉職)하도록 허락하시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이 무리들이 어느 정도 스스로 힘쓸 줄을 알고 다투어 진취(進取)할 마음을 먹고 있사오나, 본래부터 음(音)을 알지 못하므로 귀머거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또 모두가 이전(吏典)으로서 거관(去官)한 사람들이라 나이 이미 때가 지났고, 생각이 여러 갈래로 갈리며, 또 도필(刀筆)1466)의 사무를 겸하고 있으므로, 저곳과 이곳의 일을 하게 되어 영사(令史)의 임무를 대신하니,
들락날락하게 되어 한 가지 일에만 전심할 수가 없사옵고, 제사 때가 임박해서야 비로소 한데 모이게 되오니, 이래서는 성공을 바라기 어렵습니다. 이제 예조에서 이러한 도필 재랑(刀筆齋郞)을 모두 본 소임에로 돌려보내어, 저희들의 하는 일에만 전심하게 하되, 다만 주자소(鑄字所)만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신이 보건대 등가(登歌)의 사람은 여러 악공(樂工)의 예(例)와는 달라,
그들의 연주하는 자리는 명궁(明宮)1467)의 실(室)과 가까우므로 더욱 신중히 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좌우방(左右房)을 물론하고, 그 중 나이 젊고 총민(聰敏)하며,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가리어 뽑되, 제사까지 아울러 합계 48명에, 후보자까지 아울러 모두 60여명을 뽑아 등가(登歌)에만 전속(專屬)시켜, 드나드는 일이 없이 날마다 익혀서 먼저 통달한 사람에게 창(唱)을 인도하게 하여, 이에 견주어 금(琴),슬(瑟)에 있어 불협(不協)한 자를 편달(鞭撻)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의 망령된 생각에 모든 학술(學術)은 어릴 때에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오니, 현재의 재랑(齋郞) 외에 마땅히 양민(良民)의 자제(子弟)로서, 나이가 약관(弱冠)에 가깝고 글자도 좀 아는 사람을 뽑아 등가(登歌)의 부중(部中)에 넣어서, 날마다 예전에 배운 사람과 함께 읊고 노래하게 하면, 뜻과 생각이 갈리지않아서 하는 일에 반드시 전심학되고, 이것이 버릇이 되어 제 습성에 배게 되면 괴롭거나 배우기 어렵다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오며, 더군다나 어린 아이들은 음성이 맑기때문에 노래하기에는 더욱 적당하오니, 전하께서는 유의하시고 이를 재정(裁定)하시옵소서.
만약 그리하지 아니하신다면 모름지기 나이 어린 사람만을 뽑아서 이에 차정(差定)하게 하소서.
무무(武舞)의 법은 선왕(先王)이 난을 평정하신 공(功)을 상징한 것이므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옵니다.
그 면류관을 쓰고 방패를 잡은 것은 원래 옛날에 제왕(帝王)이 친히 춤을 추던 제도로서 그대로 고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예기(禮記)》에 상고하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무무(武舞)를 하는 사람은 형조와 의금부에서 거관(去官)한 사람들이 많이 섞이어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형옥(刑獄)에서 친히 도끼[鈇],작도[鑕]를 잡고 살륙(殺戮)하는 사이에서 늙었으므로, 그 습성과 소양(素養)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들이온데, 하루아침에 아악(雅樂)에 참예하여 청묘(淸廟)에 들어오니,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완만하고 거칠며, 얼굴 모양이 늙고 추한 것이 면류관을 쓰고 방패를 잡게 되니, 아주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신(小臣)이 악학(樂學)에 명을 받자온 후로부터 자제(子弟)들 중에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계속하여 갈아세우고, 없는 것은 그대로 아직 두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악(雅樂)의 춤추는 사람을 다시는 형관(刑官)을 지낸 사람을 섞어 붙이지말고, 자제(子弟)들 가운데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모두 다 삭제(削除)할까 하나이다.
이제 위의 말씀을 살펴보시고 옳게 여기시면, 재랑(齋郞)은 이조(吏曹)로 하여금 그 벼슬하기를 자원하는 사람중에서 나이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서 정하게 하시고, 무공(武工)도 또한 병조(兵曹)로 하여금 나이 젊고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차정(差定)하게 하소서’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일무(佾舞)의 자리는, 옛날 현인(賢人)의 도설(圖說)을 상고해보니 묘정(廟庭)의 가운데에 있고, 악현(樂懸)의 북쪽에는 있지않았사온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악현(樂懸)의 북쪽 섬돌의 남쪽에 설치하니, 이미 옛날 제도를 잃었고, 또 땅이 협잡하고 자리가 좁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면서 변화를 지을 도리가 없사오니 진실로 불편합니다.
악무(樂舞)의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법을 상고해보니 선유(先儒)가 말하기를,「표(表)를 일무(佾舞)추는 위치에 세우고, 춤추는 사람이 남쪽 표로부터 둘째 표를 향하면 일성(一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세째 표에 이르면 이성(二成)이 되고, 세째 표로부터 북쪽 표에 이르면 삼성(三成)이 되며, 이에 돌아서 남쪽으로 오되 북쪽 표로부터 둘째 표에 이르면 사성(四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세째 표에 이르면 오성(五成)이 되고, 세째 표로부터 남쪽 표에 이르면 육성(六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여섯 번 변하게 된다.
그러면 천신(天神)이 모두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천신에게 제사하는 환종궁(圜鍾宮)의 여섯번 변하는 춤인 것이다.
또 남쪽 표로부터 둘째 표에 다시 이르면 칠성(七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세째 표에 이르면 팔성(八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여덟 번 변하여 지기(地祇)가 모두 나오게 되니, 이것은 지기(地祇)에게 제사하는 함종궁(函鍾宮)의 여덟 번 변하는 춤인 것이다.
또 세째 표로부터 북쪽 표에 다시 이르면 구성(九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아홉번 변하여 사람 귀신에게 예(禮)를 올릴 수 있으니,
이것은 사람 귀신에게 제향(祭享)하는 황종궁(黃鍾宮)의 아홉 번 변하는 춤인 것이다」하였으니, 살피건대 이 네 표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는 절차가 곧 무무(武舞)의 법입니다.
문무(文舞)에 있어서는 명백한 논설(論說)이 없사온데, 선유(先儒) 가공언(賈公彦)1468)이 말하기를,「무무(武舞)에는 네 표가 있으니, 문무(文舞)도 또한 마땅히 네 표가 있을 것이다」하였으며, 진상도(陳常道)1469)의《예서(禮書)》에는,「가공언(賈公彦)의 말이 이치로 보아 그럴 것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을해년 겨울에 친히 대제(大祭)를 거행할 때에,
제조(提調) 정도전(鄭道傳), 민제(閔霽), 권근(權近), 한상경(韓尙敬)등이 함께 서명(署名)한 문안(文案)중에는, 문무(文武)의 두 춤이 각각 네 표로 하고 서로 거리를 4보(步)로 하여 법식(法式)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무(佾舞)를 추는 위치가 악현(樂懸)의 북쪽 언덕사이에 있게 되면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를 할 수 없으니, 옛 제도에 의거하여 일무(佾舞)를 추는 것은 뜰 가운데 위치를 정하여 여섯번 변하고, 여덟번 변하고, 아홉 번 변하는 절차를 다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두 가지 춤의 절차를 도설(圖說)에 상고하건대, 정(旌)이 한 개, 둑(纛)이 한 개, 휘(麾)가 둘로서 모두 일무(佾舞)를 추는 앞에 있어서, 춤추는 사람이 바라볼 수 있게 하기를 마치 군중의 군사들이 그 기(旗)와 휘(麾)를 바라보고 앉고 서고,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절차를 삼는 것과 같이할 것이온데, 이제 두 춤의 의식은 휘(麾)가 춤추는 사람의 뒤에 있어서 춤추는 사람은 이것을 볼 방법이 없으니, 악도(樂圖)에 의거하여 고쳐서 베풀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또 두 춤이 반드시 각기 의장(儀仗)이 있어야만 춤을 따라 인도할 것이온데, 지금은 다만 한 벌만 있어서 두 춤이 함께 사용하는 까닭으로, 춤추는 사람은 나오고 들어감이 있는데도 의장(儀仗)은 움직이지아니하고, 문무(文舞)에 들어가면 재랑(齋郞)이 이를 잡고, 무무(武舞)에 들어가면 무공(武工)이 이를 잡게 되니 진실로 불편하오니, 두 벌을 갖추어서 각기 그 춤을 인도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신등의 생각에는 일무(佾舞)를 추는 자리는 반드시 헌현(軒懸)의 자리를 다시 살핀 후에 또 다시 의논해야 될 것입니다.
이제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해 보면,「당(唐), 송(宋)의 제도는 둑(纛)을 잡은 두 사람은 문무(文舞)를 인도하고, 정(旌)을 잡은 두 사람은 무무(武舞)를 인도한다」하였사오니, 옛 제도에 의거하여 정(旌)과 둑(纛)을 각각 두 개씩 만들어서,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들어갈 때에 각기 따로 앞에서 인도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공인(工人)들의 제복(祭服)은 옛 사람들이 소중히 여겨 반드시 정결하게 하였으며, 무랑(舞郞)의 의복에 이르러는 먼 옛적의 제도는 비록 상고할 수 없사오나, 위(魏), 진(晉)시대만 해도 오히려 제악(祭樂)에 마음을 써서, 무무(武舞)는 평면(平冕)에 검은 의상(衣裳)을 입고, 또 백색깃[白領]에 소매있는 중의(中衣)와 또 붉은 빛[絳色] 합폭(合幅)의 바지와 짧은 옷이 있고, 또 흑색 가죽신(제(鞮)는 곧 신이다)이 있으며, 문무(文舞)는 관(冠)의 굴곡과 모양과 의복이 또한 같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악(懸樂)의 여러 악공(樂工)의 옷은 닷새[五升]의 굵은 베를 써 붉게 물을 들여 옷을 만들었으며, 무무(武舞)의 사람도 또한 닷새의 굵은 베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만들었으며, 문무(文舞)에는 엿새[六升]의 무명을 쓰되 붉은 물을 들여 옷을 만들었는데, 또한 겉옷 한 벌만 만들고 속에 입는 옷은 없으며, 재봉(裁縫)하기를 짧고 좁게 하여 짓는 법도 근거가 없어서, 소매는 손에도 미치지 아니하고, 옷자락은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아니하고, 소매도 한결같지 않아서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며, 이것을 걸쳐 입어도 속에 입은 평상복(平常服)을 가리지못하고, 또 신은 쇠가죽과 말가죽에 검은 물을 들여서 만들어, 옛 사람의 검은 가죽의 신을 대신했는데, 그것은 그대로 무방한 듯하나, 여러 번 비와 이슬에 젖었다가 마르면, 쭈그러져 모양이 변하여 공인(工人)이 제사 때에 발에 신을 수 없게 되어, 나쁜 신을 그대로 신고 뜰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버선을 벗고서 맨발에 신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어서, 무도(舞蹈)할 때에는 의장(儀章)이 통일되지 않고 더러운 옷이 드러나게 되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또 버선과 신의 수효도 겨우 한 제사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뿐이오니,
사시(四時)의 제사에 음악을 사용할 곳이 한 곳만이 아니옵고, 만일 제사마다 통용(通用)하게 된다면 해지고 더러워지기가 더욱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종묘(宗廟)에 붙여서 다만 임금이 친히 행하는 제사 때에만 사용하게 하고 다른 제사에는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여러 제사를 거행할 적에는 모두 옷은 있어도 버선과 신이 없어서 공인(工人)이 상시 신는 더러운 버선과 나쁜 신을 신고 마음대로 뜰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다 모르시는 것입니다.
신이 보오니, 전악서(典樂署)의 음악은 빈객(賓客)을 접대할 제 연향(宴享)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온데, 그 음악을 연주하는 공인(工人)은 아악(雅樂)의 옷과 신과 같이 허술하게 차린 사람은 없으며, 정재(呈才)의 의식이나 나례(儺禮)의 장식이나 처용(處容)의 복색같은데 이르러서는 극히 화려하여도 이를 사치스럽게 여기지않으면서, 신(神)을 섬기는 예(禮)에 이르러서는 거칠고 간략하기가 이 정도입니다.
비록 예(禮)는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하여야 한다고 하지만, 질박(質朴)한 것이 지나쳐서 도리어 야만스럽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국가가 부요하고 포백(布帛)이 묵어 쌓여있으니, 때때로 민간에 내어 팔아서 백성의 생계(生計)에 이롭게 하면서도 어찌 제복(祭服)의 비용에만 인색하겠나이까?
다만 아랫사람이 이러한 폐단을 위에 아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전하께서 이런 일을 알지못하셨을 뿐이오니, 집현전(執賢殿)에다 제악(祭樂) 공인(工人)의 복식(服飾)제도를 두루 상고하게 하신 후에 이를 개정(改正)하도록 하소서.
악현(樂懸)들의 악기들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 매우 많사오니, 악기를 매어다는 틀[架子]에 난봉(鸞鳳),충수(蟲獸)의 장식과 부고(缶鼓),도경(鼗磬),정적(旌翟),유소(流蘇)등의 종류는 한번 비와 눈을 겪을 때 그때그때 잘 조심하여 간수하고 보호하지않으면 젖어 떨어지고 빛이 바래어서 변하여 곧 지저분하게 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의 헌가(軒架)의 악기는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외에는 단지 한 벌만 갖추어 있어, 여러 제사에 통용(通用)하게 되어 운반하여 갔다왔다 옮겨오고 하는 등 제사 때마다 그리하는 까닭으로, 일 년도 지나지않아서 모두 다 파손(破損)되어 완전한 물건이 전혀 없게 되며, 그런대로 임시 수리한 것도 매우 추악하고 더러워졌으며, 또 본 물건을 잃은 것도 많으므로 더러는 물려받아서 수효를 채우게 되니, 이는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또 공인(工人)들의 제복(祭服)도 역시 한벌만 갖추어져 있어 제사마다 통용(通用)하게 되므로 너무나 많이 해지고 더러워졌사오니, 이제부터는 여러 곳 제소(祭所)에 각기 창고 하나씩을 세우고 모든 헌가(軒架) 중에 파손(破損)되기 쉬운 악기와 공인(工人)들의 제복(祭服)을 각각 갖추어 봉하여 간수하고, 때때로 햇볕에 쬐어서 그 쓸 때를 대비하게 한다면 의장(儀章)이 아주 깨끗하여 신명(神明)에게 접(接)할 수 있으며, 물건마다 완전히 구비되어 수리(修理)하고 보관하기에 힘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 신주(神主)의 독(牘)은 모두 봉상시(奉常寺)곳간 안에 들여놓았다가, 제사지낼 때에 노예(奴隷)가 짐져다가 바치게 되니 매우 설만(褻慢)하여 더욱 옳지못합니다. 이도 역시 곳간을 세워서 각각 간수하는 것이 좋겠사오니, 전하께서는 이를 재량하여 결정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제 위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와 다 옳다고 여기시오면 그대로 따라주소서’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예(禮)와 악(樂) 두 가지는 어느 한 쪽만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온데,
신이 보오니 제사마다 행사(行事)하는 의식에 예문(禮文)만은 갖추어져 있사오나 음악은 장절(章節)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예(禮)를 살피는 것은 눈이므로 사람이 쉽게 할 수 있지마는 악을 살피는 것은 귀이므로 음률(音律)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 처음과 끝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주례(周禮)》춘관(春官)에, 악사(樂師)가 종과 북을 연주하게 하여, 음악이 이루어지면 갖추어졌음을 고하게 되니, 이것은 신중(愼重)을 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신(神)을 맞이하는 음악을 살펴보면 여섯번 변하고, 여덟번 변하고, 아홉번 변하는 구별이 있사온데, 관헌(祼獻)의 음악은 매 위(位)마다 여덟 귀[句]로써 장(章)을 이루게 되니, 한번 변하는 것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벌써 맞이하는 신(神)이 틀려지고, 한 귀[句]라도 빠지면 벌써 칭송(稱頌)한 덕이 이지러지게 되나니 작은 흠점(欠點)이 아닙니다.
신이 보오니, 우리 조가(朝家)의 제향(祭享)의 의식은 집례자(執禮者)가 음악의 조리(條理)로써 절주(節奏)를 삼지않고 오로지 잔을 드릴 때의 형편에 따라 진행하여, 임금이 친히 행하시는 날에는 오히려 전하께서 오랫동안 예식에 수고로우실까 염려하므로 그 영신악(迎神樂)이 겨우 두세 번 변함에 이르게 되면 즉시 음악을 그치라고 하며, 관헌장(祼獻章)이 서너 귀[句]도 채 미치지않아서 역시 음악을 그치라고 하여, 한 번 제사지내는 안에 예절은 비록 정제(整齊)되었다해도 음악은 실로 전혀 글렀습니다.
성명(聖明)하옵신 시대에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예(禮)와 악(樂)이온데, 음악을 소흘히함이 이와 같사옴은 매우 부당합니다.
이제부터는 주관(周官)의 제도에 의거하여 아악령(雅樂令)으로 하여금 음악이 완전히 끝났음을 고한 뒤에야, 집례자(執禮者)가 악의 그침을 말하게 하옵소서. 지금 이 말씀을 살피시어 반드시 옛법대로 하게 하소서’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성악(聲樂)의 조화(調和)는 예로부터 어렵게 여겼습니다.
옛 사람들이 성음(聲音)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돌을 치는 것을 주장으로 삼고, 율관(律管)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기장[黍]을 쌓아 올리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사온데, 지금 하늘이 검은 기장을 내려서 지극히 화(和)한 감응(感應)을 보이시고, 땅은 석경(石磬)을 내어서 능히 화합(和合)한 단서(端緖)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반드시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율관(律管)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옛날을 상고해 보면, 주(周)나라는 유태(有邰)에서 검은 기장을 얻고서 음악이 조화(調和)되었으며, 한(漢)나라는 임성(任城)에서 검은 기장을 얻고서 옛날 것에 가깝게 되었고, 수(隋)나라는 양두산(羊頭山)의 기장을 얻었으나 조화(調和)되지 않았으며, 송나라는 경성(京城)의 검은 기장을 얻었으나 역시 맞지않았사오니, 이로써 보면 기장을 쌓아 올리는 법은 비록 방책(方策)1470)에 기재(記載)되었지마는 기장의 진품(眞品)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신이 지금 동적전(東籍田)에서 기른 것으로 쌓아 올려서 황종관(黃鍾管)을 만들어 불어보니, 그 소리가 중국의 황종(黃鍾)보다도 한 음률이 높으므로, 신은 아마도 땅이 메마르고 기후(氣候)가 가물어서, 기를 때에 화기(和氣)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다 같이 한 종자의 화곡(禾穀)으로도 남방의 쌀은 윤기가 나고 굵직굵직하며, 경기(京畿)의 쌀낱은 메마르고 자잘하며, 동북지경의 것은 더욱 메마르고 자잘하니, 기장의 굵고 잔 것도 꼭 이러한 것입니다.
신이 원하옵기는 남방의 여러 고을[州]에서 기른 기장을 모두 가져와서 세 등급으로 이를 골라 쌓아올려서 관(管)을 만들어, 그 중에 중국의 음(音)과 서로 합하는 것이 있으면 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律管)을 만들어 오성(五聲)을 조화(調和)시키면 자[度],되[量],저울[權衡]도 따라서 살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역대(歷代)로 음률이 마련할 때에 기장으로 하였으므로 일정하지 않았고, 또 따라서 성음(聲音)의 높낮이도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인데,
오늘날 중국의 음률은 오히려 참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기장이 도리어 진짜를 얻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음률과 자,되,저울을 같이하는 것은 곧 천자(天子)의 일이고 제후(諸侯) 나라에서 스스로 마음대로는 할 수 없으니, 만약 지금 검은 기장이 마침내 중국의 황종(黃種)이 합하지않는다면 아직은 임시(臨時)의 권도(權道)를 좇아 다른 종류의 기장을 빌어써서 쌓아 올려 율관(律管)을 만들어 중국의 황종(黃種)에 합치시킨 후에 법에 의거하여 가감(加減)하여 성률(聲律)을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율관(律管)을 만들지 않는다면 오음(五音)의 청탁(淸濁)도 참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사광(師曠)1471)과 같은 귀밝은 사람도 육률(六律)1472)로 하지않으면 오음(五音)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만세(萬世)에 내려가며 변하지 않을 옳은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것을 제작하는 데 있어 급무(急務)중에 큰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맡은 관원에게 의논을 내리시지 마시고 고요히 깊이 생각하시고 영단(英斷)을 내리시어 지체없이 시행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신은 혹시 중론(衆論)이 벌떼같이 일어나 희망을 달성하지못할까 걱정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어 옳다고 여기시거든 꼭 시험하소서’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재랑(齋郞)과 공인(工人)들은 음악을 익혀서 재주를 성취한 후에야 항렬(行列)에 갖출 수 있으니 하루라도 방임(放任)하여 쉬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이 무리들이 입속(入屬)된 후에는 혹은 말미를 받고는 기한을 넘기기도 하고, 혹은 상(喪)을 마치고도 돌아오지않기도 하며, 혹은 제 마음대로 도망해 숨기도 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조리 꾀를 피우면서 피하여 구실[役]을 면하고 출근하지않는 사람이 퍽 많사오나, 항상 죄를 논단(論斷)하여 형벌을 시행하더라도 채찍치는 것이 많아야 50도에 지나지않기 때문에, 열흘이나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또 다시 출근하지 않으니 완악(頑惡)함이 아주 심합니다.
언제든지 제사때만 되면 이전(吏典)이나 별군(別軍)이 일찍이 음악을 익히지도 않은 자가 수효만 채워 뜰에 들어오게 되니, 이것 또한 작은 흠절(欠節)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재랑(齋郞)이나 공인(工人)으로 아무 이유없이 출근하지않는 사람은 그 출근하지않은 날짜 수를 계산하여 그 수만큼 전의 출근한 날수에서 삭제(削除)하고, 그 형벌을 시행하는 법도 각 관서(官司)의 예(例)로써 시행하지말고, 역시 날 수의 많고 적은 것을 따져서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을 시행하게 하고, 그 중에 잘 근무(勤務)하고 학습에 힘을 써서 그 임무를 감내할 만한 사람은 사시(四時) 대제(大祭) 후에 별도 출근(出勤)으로 쳐서 가급(加給)하고, 그렇지못한 사람은 제일(祭日)의 출근(出勤)도 넣어주지 않음으로써 권장(勸奬)과 징계를 엄하게 할 것이니, 이렇게 하오면 재주가 있는 사람은 출근일수가 깎일까 두려워하여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익을 위하여 더 힘쓰게 되어, 매양 제사지낼 때를 당하면 모두 분주(奔走)히 제사에 나아와서 진취(進取)하려고 할 것이오며, 아무런 이유없이 출근하지않던 사람이라도 역시 앞으로는 부르지 않더라도 스스로 출근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고 선덕(宣德)3년 윤4월 초8일 이조(吏曹)에서 받자온 교지에 의거하여, 무공(武工)과 악공(樂工)도 역시 이 예(例)에 따르게 하소서’하였다.
박연이 또 말하기를,
‘악서(樂書)를 편집하는 한가지 일은 신이 매우 염려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쓰는 삼부(三部)1473)의 음악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정제되지 못하였사온데, 그 중에 아악부가 더욱 심합니다.
그 율려(律呂)의 제도와 가무(歌舞)의 규식(規式)과 금슬(琴瑟)의 보법(譜法)등의 정밀(精密)하고 미묘(微妙)한 곡절(曲折)은 함부로 허술하고 가볍게 논설을 세울 수가 없으므로, 여러 글을 두루 상고하고 한편으로 여러 사람의 말을 참고하여, 몸소 깨우쳐 마음에 그렇다고 인정이 된 후에 그림으로 그리고 논설로 나타내 적어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 찾아내고 풀어내어 알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인용(引用)한 여러 선유(先儒)들 중에 정사농(鄭司農)과 정강성(鄭康成)의 설(說)은 각각 장단점(長短點)이 있어서 근거를 삼기가 어렵겠고,
사마천(司馬遷), 두우(杜佑), 마단림(馬端臨), 진상(陳常), 진양(陳暘), 오원장(吳元章), 임우(林宇), 진원정(陣元靖), 회암(晦菴), 주자(朱子), 서산(西山) 채원정(蔡元正)의 설(說)이 의거(依據)할 만하므로, 이것을 참교(參校) 하여 정론(定論)을 세우고, 그 중간에 신의 의견을 곁들여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 설명하기도 하여 이를 보조(補助)하였으며, 또 그 당악(唐樂) 일부(一部)는 곧 중국 속부(俗部)의 음(音)이온데, 그 음악은 모두가 1백여 편(篇)이 되오나, 우리나라의 공인(工人)들이 해득(解得)하는 것은 겨우 30여곡(曲)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법(譜法)이 분명하여 찾아서 깨우칠 도리는 있으나,
다만 빠르고 느린 절조(節調)를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아직은 일단 그대로 함께 두어 음률을 아는 사람을 기다리어야 하겠습니다. 이 부(部)의 편찬 기록에는 별로 개정(改正)할만한 조건은 없사오나, 다만 편수(篇首)에 옛날 사람의 도설(圖說)과 역대로 경계하여 깨우쳐 주는 말을 얹어 적었고, 또 쓰이는 악기의 명수(名數)와 제작하는 형상을 다 자세히 갖추어 적어서 뒷날에 유실(遺失)되는 일이 있을까미리 방비하였습니다.
그 음악의 이름을 세상에서는 당악(唐樂)이라고 일컫는데, 당자(唐字)는 이미 한(漢), 당(唐)이란 당대(唐代)의 나라 이름으로 되었으니 역대(歷代) 중국의 음악을 모두 당(唐)으로 일컫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화악속부(華樂俗部)라고 고쳐서 일컫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우리나라의 악에 이르러서는 그 기물(器物)의 제도와 가사(歌詞)의 곡절(曲折)이 또한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여, 비록 예전의 보법(譜法)이 있더라도 사본(寫本)이 전하여 내려오다가 잘못 적은 글자를 거듭 이어받아 진(眞)을 잃게 되어, 옛적의 음악은 거의 다 잃어버리고 겨우 남은 것이 40여곡(曲)뿐입니다.
이제 거문고[玄琴]에 소속된 것으로 말씀드리오면, 그 타는 법은 알면서도 가사(歌詞)를 알지못하는 것이 있으니, 최자탁목(嗺子啄木), 우식다수희(憂息多手喜), 청평거사련(淸平居士戀)등이 이것이옵고, 또 보법(譜法)은 함께 다 있어도 그 빠르고 느린 절조(節調)를 이해하지못하며, 또 겸하여 가사(歌詞)까지도 잃은 것이 있으니, 노중선(露中仙), 상춘광(賞春光), 망춘천(望春天),낙춘천(樂春天),희춘원(喜春苑),상춘곡(賞春曲),장하편(長河篇), 진아우(陳鴉羽), 천쌍조(天雙鳥), 춘계인(春桂引), 운선곡(雲仙曲), 수선곡(壽仙曲), 실상곡(實相曲), 오목구묘(朽木狗墓)편(篇)등이 이것입니다.
또 가야금(伽倻琴)에 소속된 것으로는 눈죽조(嫩竹調), 하림조(河臨調)는 이름만 남아있고 곡은 전하지않으니, 이러한 잃어버린 여러 편(篇)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보법(譜法)이 남아있는 것은 그 가사(歌詞)의 구본(舊本)이 전사(傳寫)되어 사사로이 간직한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중외(中外)에 영(令)을 내려 우리나라의 옛날 노래와 악전(樂典)을 널리 구하여, 만약 상세하고 완전한 구본(舊本)을 자진하여 고하고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관직으로 상을 준다면, 예전 음악이 없어지고 빠진 것을 거의 찾아 채우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같이 한 후에 그 가곡의 가사를 추려 골라서, 그 중에 군신(君臣)의 도(道)가 합하는 것과, 부자(父子)의 은혜가 깊은 것과, 부부(夫婦)의 절의(節義)와, 형제의 우애(友愛)와, 붕우(朋友)의 신의(信義)를 읊은 것과, 빈주(賓主)간에 함께 즐기는 것이 다 성정(性情)의 바른 길로 나와서 인륜(人倫)과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들은 정풍(正風)으로 삼고, 그 남녀(男女)들이 서로 좋아하여 음란하게 놀고 간악(姦惡)하며 사욕(私欲)을 채우기에 부끄러움이 없어 강상(綱常)에 빗나감이 있는 것은 변풍(變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율조를 고르는 법과 소리의 높낮이는 본래 대금(大笒)으로 근거를 삼았사온데, 율려(律呂)에 소속되는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궁조(宮調)라고 일컫은 것은 실상은 궁(宮)이 아니며, 우조(羽調)라고 일컬은 것도 역시 우(羽)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이제 그 소리를 자세히 살펴 교정(校正)하여 율려의 이름으로 고치고, 지법(指法)과 육조(肉調)도 또한 어느 한 궁(宮)에 소속된 오음(五音)으로 밝히어 서로 문란하지 않게 하였사오니, 이것이 소신(小臣)이 오늘날에 편찬 기록한 대개(大槪)입니다.
다만 향악(鄕樂)에 소용되는 음률은 음악이 처음 시작하여 날 적에, 중려(仲呂)와 임종(林鍾)의 두 음률의 궁(宮)을 섞어 번갈아 사용하였사오니, 중려궁(仲呂宮)은 대금(大芩)의 둘째손가락 소리이고, 임종궁(林鍾宮)은 대금(大芩)의 세째손가락 소리이온데, 중려궁(仲呂宮)은 옛날 사람들이 흔히 쓰기를 꺼리었사오니, 이는 그 소용되는 소리가 모두 정률(正律)이 아닌 때문이었습니다.
임종(林鍾)은 원래 천지 본연(本然)의 치성(徵聲)이요, 또 소용되는 소리는 군신(君臣)에 관계되는 것으로 각각 정성(正聲)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곤방(坤方)의 토율(土律)로써 만물(萬物)을 함양(涵養)하고 사시(四時)에 붙여 왕성하여 항상 충화(沖和)한 기운(氣運)이 있으니, 이로써 궁(宮)을 삼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제로부터 연향(宴享)할 때에 향악(鄕樂)은 주로 임종(林鍾) 율에 맞추어 가사를 부르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음악의 이름을 세상에서 향악(鄕樂)이라고 일컫는 것도 또한 매우 상스러우니, 전하께서는 이를 고치시옵소서.
우리나라의 우조(羽調)는 곧 무역궁(無射宮)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무역궁(無射宮)의 황종(黃鍾)이 상성(商聲)이 되다’고 하였는데,
이는 임금의 소리가 도리어 신하에게 능멸을 당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쓸 수가 없사온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쓰기를 좋아하니 옳지못한 일입니다.
이제 편찬기록하는데 있어 우조(羽調)의 여러 소리를 깎아버리지 못하고 다만 옛날 현인(賢人)들의 학설(學說)만 갖추어 기록하여 음악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게 하여 감히 함부로 쓰지못하게 할 뿐입니다.
지금 앞에서 말씀드린 것을 자세히 살피시고 옳다고 여기시면 마땅히 이에 좇으소서’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바람,구름,우레,비의 제사를 지금은 산천(山川),성황(城隍)과 함께 한 단(壇)으로 만들어 행사(行事)하고 있으나, 바람,구름,우레,비는 천신(天神)에 속하고, 산천(山川)과 성황(城隍)은 지기(地祇)의 유(類)이므로, 그 기(氣)와 유(類)가 같지않고, 존(尊)과 비(卑)가 분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바람,구름,우레,비,산림(山林),천택(川澤)등 여섯 신(神)에게 모두 따로 단유(壇壝)를 세워서 제사지내고, 성황(城隍)의 신(神)은 주현(州縣)에서 제사지내는 외에 국도(國都)에서 지내는 제도는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단(壇)을 같이하는 제도는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모방하여 마련한 것이나, 홍무예제는 천자와 제후의 국도(國都)의 제도가 아니라 여러 지방의 부(府),주(州),현(縣)의 의식인 것입니다.
명나라에서 중국을 통일한 초기에 새로 부,주,현의 의례를 만들면서 주,현의 경비(經費)에 알맞도록 참작하여 권도(權道)로써 간략하게 기구(器具)도 사기와 질그릇을 쓰고, 진설(陳設)도 극히 간략하게 하느라고 이에 단(壇)을 같이하여 제사지낸다고 말한 것이오니, 국도(國都)의 제사는 반드시 그처럼 단(壇)을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홍무예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신주를 쓰는 법은, ‘모주(某州) 모현(某縣) 경내(境內) 산천(山川)의 신(神)’‘모주(某州) 모현(某縣) 성황(城隍)의 신(神)’이라하고, 바람,구름,우레,비의 신에게는 주현(州縣)의 이름을 달지않았으니 이를 삼가고 소중히 여기는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신주(神主)도 바람,구름,우레,비는 한 패(牌)에 같이 쓰고, 산천(山川)의 두 신(神)도 한 패(牌)에 같이 쓰는데, 성황의 한 신만은 따로 한 패를 만들었으니, 아마도 성황도 역시 두 신(神)이 되어야 할 것이지마는,
홍무예제에 있어서는 성황에 드리는 폐백은 다만 한벌만 사용하게 되니,
이로써 중국의 제도는 한 신(神)으로 여겨서 제사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설위(設位)하는 도식(圖式)은 단(壇)위의 북쪽가에서 성황신(城隍神)은 서쪽에 있고, 바람,구름,우레,비의 신(神)은 가운데에 있고, 산천(山川)의 신(神)은 동쪽에 있어, 모두 남향하여 한 줄로 자리를 잡았으니, 성황신이 가운데 있어 마치 높은 지위를 삼은 듯합니다.
또 행사(行事)하는 의식을 상고하여 보면, 제일 먼저 바람,구름,우레,비의 자리에 나아가고, 그 다음에 산천의 자리에 나아가고, 그 다음에 성황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니, 이로 보면 바람,구름,우레,비로써 정위(正位)를 삼아 가운데 자리에 있게 하고, 산천과 성황을 배위(配位)로 삼아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있게 한 것과도 같습니다만, 대저 신위의 설치는 한 줄이면 서쪽을 윗자리로 삼으니, 이는 신도(神道)는 남쪽을 향하여 오른쪽을 윗자리로 하는 까닭입니다.
배위(配位)를 마련함에는 동쪽은 높은 자리요, 서쪽은 낮은 자리이므로,
서로 향하여 앉게 함은 음양(陰陽)의 위(位)인 것입니다.
지금 보면 산천(山川)은 행례(行禮)를 중간에 하면서 자리가 끝에 있고,
성황(城隍)은 행례를 맨나중에 하면서도 자리가 위에 있으니, 꼭 이렇게 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배위(配位)를 마련할 적에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향하게 한 것이 의심 없을 것입니다.
이제 다만 그 도식에만 의거하고 행례의 절차는 상고하지 아니하고,
삼위(三位)의 신위(神位)를 한 줄에 설치하여 정위(正位), 배위(配位)의 구별이 없게되니, 낮은 성황신을 천신(天神)의 오른쪽에 있게 하였으니,
첫째로 옳지못한 일이며, 진설(陳設)하는 것으로 말하오면 바람,구름,우레,비 네신(神)의 위(位)에는 폐백은 네 벌을 쓰면서, 제상(祭床)은 하나이고 생(牲)도 또한 이와 같으며, 산천 두 신(神)의 위(位)에는 폐백은 두 벌을 쓰고 제상은 역시 하나뿐이며, 생(牲)도 또한 이와 같고, 성황 한 신(神)의 위(位)에는 생(牲)과 폐백과 제상(祭床)을 오로지 한 벌만 드리게 되니,
이는 네 신(神)에게 드리는 제찬(祭饌)이 두 신(神)에게보다 더 융숭(隆崇)하지않으며, 한 신(神)에게 드리는 제찬이 더 감한 것도 없는데, 그 드리는 물건이 유독 성황의 위(位)에만 풍성하게 되니, 둘째로 옳지못한 일입니다. 또 제사지내는 예(禮)로는 천신에게 제사지냄에는 축문과 폐백을 요대(燎臺)에서 불사르고, 지기(地祇)에게 제사지낼 때와 사람 귀신에게 제향(祭享)할 때에는 축문과 폐백을 준비한 구덩이에 묻으며, 또 그 쓰는 음악도 각각 소속된 음률이 있으니, 이는 선왕(先王)의 제도로 각각 마땅한 바를 따라 행하는 것이 마련된 제도입니다.
그러나 음악으로 유식(侑食)을 할 때에는 높은 위에 통속(統屬)시키는 것이 옳겠으며, 폐백으로 신(神)에게 예(禮)를 행함에는 천신(天神)과 지기(地祇)에게 바치는 것도 반드시 귀착(歸着)되는 향방이 있어야 될 것이니 한결같이 이를 불에 살라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제사에 있어서, 홍무예제의 의식에 의거하여 요대(燎臺)에 제문(祭文)과 일곱 신(神)에게 바치는 폐백과 축문을 모두 다 같은 방법으로 불에 살라버리는 것은 세째로 옳지 못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외람된 생각으로는, 홍무예제의 의식은 주(州),현(縣)에 이를 사용하더라도 오히려 인심(人心)에 합하지못할 뿐만아니라 국도(國都)의 제도에 있어서는 더욱 적당하지 않사오니, 예전 단(壇)에는 다만 바람,구름,우레,비 네 위(位)의 신(神)에만 제사하되, 그 생(牲)과 폐백과 찬구(饌具)는 마땅히 각각 진설하고, 산천은 따로 단소(壇所)를 만들어 제사지낼 것이며, 성황도 또한 산천의 단(壇)에 배위(配位)로 삼아 제사지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단(壇)을 같이하는 제도를 고치지않으면, 신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람,구름,우레,비의 네 신(神)을 정위(正位)로 삼아 남향되게 차리고, 산천(山川)의 두 위(位)는 동쪽에 있어 서향하게 하고, 성황(城隍)의 한 위(位)는 서쪽에 있어 동향하게 하여 배위(配位)로 삼아 제사지내게 하며,
남쪽에는 소대(燒臺)를 설치하고, 북쪽에는 묻는 구덩이를 파 놓아서, 제사를 마친 뒤에는 요대(燎臺)에 사르고, 구덩이에 묻는 예(禮)를 나누어 행하여 문란하지않게 할 것이며, 또 봄,가을의 여제(厲祭)때에는 성황에 고유(告由)하고 바람,구름,우레,비의 단(壇)을 정위(正位)로 삼아서 행사를 할 것이니, 대저 천신이 주장이 되는 단(壇)에서 성황이 남향하여 제사를 받게 하는 것은 아마 산천에 망질(望秩)1474)한다는 뜻에서 어긋난 듯합니다.
봄,가을에 지내는 정식 제사에 이미 성황의 신(神)을 존신(尊神)의 오른 쪽에 있게 하였고, 여제(厲祭)에 고유하였으며, 또 참람되이 천신의 자리에 있게 하였사오니, 무슨 예(禮)가 이렇습니까?
성황이 만약 정신(正神)이라면 어찌 예(禮)에 어긋나는 제사를 흠향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전하께서는 마음에 깊이 생각하시와 홀로 결단하시어 제사의 예전(禮典)을 바로 잡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산천과 성황은 따로따로 한 단(壇)을 만들어 바람,구름,우레,비와 더불어 위(位)를 같이하여 제사지내지 않게 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지금《문헌통고(文獻通考)》를 자세히 살펴보면, 동한(東漢)1475)에서는 병술일 바람의 신[風師]을 술방(戌方)의 땅에서 제사지내고, 기축일에 비의 신[雨師]을 축방(丑方)의 땅에서 제사지냈으며, 당(唐)나라에서는 입춘(立春) 뒤 축일(丑日)에 바람의 신[風師]을 국도성(國都城)의 동북방에서 제사지내고, 입하(立夏) 뒤 신일(申日)에 비의 신[雨師]을 국도성(國都城)의 남방에서 제사지냈으며, 송(宋)나라에서는 바람의 신을 서교(西郊)의 사당에서 입춘 뒤 축일(丑日)에 제사지내고, 비의 신을 북교(北郊)의 사당에서 입하 뒤 신일(申日)에 제사지냈는데, 비의 신과 우레의 신[雷師]은 단(壇)을 둘로 만들고 제단 둘레의 담은 같이하였으니, 그 뜻을 취함이 같지않아서 조대(朝代)마다 각기 다름이 있었습니다.
삼대(三代)1476)의 정삭(正朔)으로 말하더라도 주(周)나라는 자월(子月)1477)로 세수(歲首)를 삼고, 상(商)나라는 축월(丑月)1478)로 세수(歲首)를 삼았으며, 하(夏)나라는 인월(寅月)1479)로 세수(歲首)를 삼았으니, 성인(聖人)의 제도도 같지않았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명나라의 예제(禮制)에 의거하여 바람,구름,우레,비,산천,성황을 합하여 한 단(壇)으로 만들어서 제사지냈는데, 이것은 곧 시왕(時王)의 제도이며, 또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 되었사오니,
그전대로 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단(壇)과 제단 둘레의 담의 제도는, 단의 둘레에는 담으로 둘러 쌓고 사면에 담문을 두어서 항상 닫아두게 하여, 소,양,개,말등이 담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단(壇)을 지키는 사람은 늘 소제하고 삼가 수호하여야 할 것이온데, 이제 성밖에 있는 단(壇)은 바람,구름,우레,비의 단(壇)외의 나머지 다른 단은 모두 담이 없으므로, 소,양,개,돼지가 마구 돌아다니고,
또 단(壇)을 지키는 사람도 문서에 이름만 걸어두고 먼 곳에 살면서 잠시 다녀가기도 하며, 혹은 서울에 살아도 가난을 견디지못하는 실정입니다.
또 여러 단(壇)의 곁에는 자리를 잡고 살 만한 공한지(空閑地)가 없이 모두 공사(公私)간의 주인이 있는 전지(田地)뿐이라, 모여 살면서 단(壇)을 지키려 하여도 그러할 방법이 없으므로, 이름은 비록 단지기[壇直]라고 하지만 단(壇)에서 가깝게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사찰 적간(摘奸)할 때에 혹시 걸릴까 두려워하여 때때로 나와서 멀리 망을 보다가, 사찰이 온 듯하면 달려와서 단(壇)에 오르고 하다가도 시간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며, 또한 전연 오지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매 달마다 적발되어 벌을 받게 되더라도 도로 다시 그전처럼 됩니다. 우사단지기[雩祀壇直]도 도망해 숨어 보이지않으며, 선잠단지기[先蠶壇直]도 역시 몸을 드러내는 날이 없사온데, 그 정리(情理)를 살펴보면 곧 빈궁하여 능히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오니, 전하께서는 모든 단지기[壇直]를 여러 능(陵)의 수호군(守護軍)의 예(例)에 의하여 착실한 호구(戶口)를 찾아내어 각 단(壇)마다 그 수호(守護)하고 일을 치뤄 나가기에 알맞은 사람 수를 계산하여 단(壇) 곁에 모여살게 하고, 그들에게 밭을 주며 잡역(雜役)을 면제하여 주고, 또 여러 단(壇)에 명하여 각각 담[垣墻]을 쌓고 창고와 주방(廚房)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삼가 지키게 하고, 나무를 기르고, 잡초(雜草)와 더럽고 거친 것을 베고 치우며, 도적을 방비하여 생업(生業)을 편안하게 하여 주면, 단(壇)과 담이 완비(完備)되어 신(神)을 섬기는 예(禮)가 갖추어지게 될 것이오니, 이제 자세히 살펴서 마땅히 이 말씀을 좇으시와 각 단마다 단지기[壇直] 노자(奴子) 2호구(戶口)씩을 두고, 각기 밭 2결(結)씩을 주시고 잡역을 면제해주시되, 자원하는 사람이 있거든 양민과 천인에 구애될 것없이 들어주시기 바라나이다’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제단의 제도는, 그 단상(壇上)은 다만 신위(神位)와 전찬(奠饌)만 설치할 뿐이오니, 이를 종묘에 비하면 실(室)의 가운데와 같으므로, 사방이 모두 2장(丈) 남짓하여야 할 것이오니 이에 가감(加減)할 수 없으며, 그 단 아래는 모든 음악을 진설하는 곳이 될 것이니, 모두 두 개의 낮은 담[壝]을 설치하여(유(壝)는 제단의 둘레에 쌓은 낮은담이다. 정단(正壇)밑에 낮은단(壇)을 만든다)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의 구분을 분별하고, 등가(登歌)와 준소(樽所)의 자리와, 헌가(軒架)와 일무(佾舞)를 출 장소를 참작하여 한계를 만들되,
조금이라도 틀리며 그릇됨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이 사직단의 제도를 보건대, 예전 제도에는 사방이 2장 5척이며 높이가 3척이옵고, 단 아래에는 두 개의 낮은 담[壝]을 설치하여 모두 25보(步)로 한계를 삼았사온데, 우리나라의 사직단은 단하(壇下)에 낮은 담[壝] 하나만을 만들고 위, 아래의 구별이 없는 까닭으로, 제사지낼 때에 등가(登歌)의 금슬(琴瑟)을 탈 처소와 당상(堂上)에서 집례(執禮)할 자리를 베풀 곳이 진실로 없게 되어, 집례(執禮)와 공인(工人)이 모두 제단(祭壇) 신위(神位)의 앞으로 오르고, 준소(樽所)도 또한 단상(壇上)에 설치하게 되어, 예(禮)를 행할 즈음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이 예다운 행동을 잃게 되고, 터가 좁고 너무 가까와서 공인(工人)이 다 오르지 못하게 되매, 반은 단상에 앉고, 반은 단하에 일어서서, 앉은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는데도 선 사람은 하는 일이 없게 되니, 옛날 제도와 매우 어긋나서 예(禮)와 악(樂)이 모두 그 정도(正道)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사(雩祀)와 선농(先農)의 단(壇)도 역시 원래는 낮은 담[壝]이 둘이 있었사온데, 이제 다만 낮은 담 하나만을 만들었으니 따라서 폐스러움도 또한 같게 됩니다.
원단(圓壇)은 다른 곳에 비하면 공작(工作)이 정묘(精妙)하고 치밀하지마는, 그도 역시 옛적 제도를 상고하지 않아서 역시 낮은 담을 하나만 만들었사오니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또 그 앞뜰[前庭]이 이 단(壇)과 같이 좁은 곳은 없겠습니다.
산마루가 높고 기울어져서 다시 넓힐 땅이 없사오니, 만일에 다시 낮은 담의 수를 늘여서 그 제도를 갖추려고 비록 인력(人力)을 아무리 많이 허비하더라도 효과를 보기가 어려울 것 같사오며, 한번 빗물이 지나고 보면 도로 다시 흘러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오니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이를 개정(改正)하지 않으면 음악을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또 다른 곳보다도 심할 것입니다.
이제 보건대, 그 단(壇)의 아래에는 산봉우리와 언덕이 하나뿐이 아니오니, 살펴보아 그 우뚝하고 평탄하여 단과 담을 쌓기에 적당한 곳을 가리어서 돌을 옮겨다가 고쳐 쌓으면 일이 좀 쉬울 것이옵고, 그렇지 않으면 뒤 언덕의 돌을 한 7, 80척 가량을 깎아 내어서 평평하게 만들고, 단(壇)을 옮겨 북쪽으로 나아가게 한 뒤에 법대로 낮은 담을 만들고 돌을 쌓아 올려서 완전히 보수하여 다시 무너지지않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렵고 쉬운 것을 계산한다면 다른 언덕으로 옮기는 것만큼 편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람,구름,우레,비의 단(壇)의 담장과 낮은 담이 대략 옛 제도에 가까우나, 역시 음악을 사용하는 데 적당한 점을 살피지 않고 마련했으므로 헌가(軒架)와 일무(佾舞)를 추는 자리를 수효에 맞도록 진설하지는 못하겠사오니, 역시 마땅히 단(壇)을 옮겨 북쪽으로 물려 쌓고 낮은 담[壝]을 둘로 고쳐 만들어 행사(行事)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선잠단(先蠶壇)은 그 구조(構造)가 극히 허술하고, 그 길이와 넓이의 칫수가 제도에 맞지 아니하며, 지면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뭉우리돌[卵石]로 쌓아 올려 만들어서 높고 낮음이 고르지않을 수 없사오며, 또 토질(土質)이 척박하고 모래와 자갈이 쌓여서 뽕나무를 심어도 잘 되지않으니, 일찍이 제비(帝妃)의 혼령이 여기에 오르고 내림이 있었다고 어찌 말하겠습니까?
이제 만약 개정(改正)한다면 반드시 그전 터에 그대로 할 것이 아니오니, 우사(雩祀)와 선농(先農)의 곁에 조금 가까이 고쳐쌓고서, 세 단(壇)의 지키는 사람을 한 구역에 모두 모여살게 하고, 창고를 세워 기구(器具)를 간수하고 한 마음으로 보살펴 지키게 하면, 도적이 가까이 가지못하게 되어 신(神)과 사람이 모두 편안해질 것입니다.
한강(漢江)의 단(壇)은 비록 음악을 사용하는 곳은 아니오나, 터가 기울고 가파로우며, 옆이 밭아서 단(壇)의 터로는 마땅치 않고, 또 제작(制作)이 매우 거칠며, 높고 낮음과 넓고 좁은 것이 전혀 그 제도에 틀리온데 다행히 가까운 곳에 평탄한 언덕이 있사오니, 법에 맞도록 고쳐 다시 쌓는 것이 또한 옳겠습니다.
그 밖에 영성(靈星)인 노인성단(老人星壇)과 마조단(馬祖壇),마사단(馬社壇)등의 고쳐야하고 수리하여야할 곳이 한군데뿐이 아니오니, 신은 점차로 정리(整理)하여 결함이 없도록 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와 꼭 따라 주시고, 원단(圓壇)만은 살펴보고서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제사를 마칠 때는 요대(燎臺)를 바라보고, 묻는 구덩이를 바라보는 예(禮)가 있사온데, 요대(燎臺)는 단(壇)의 남쪽에 있고, 묻는 구덩이는 단(壇)의 북쪽에 있습니다.
지금 원단(圓壇)에는 요대가 있으나, 그 밖에 바람,구름,우레,비와 별을 제사지내는 단(壇)에는 요대를 만들지 않고, 다만 땅위에서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며, 묻는 구덩이는 종묘,사직외의 여러 제단에는 모두 설치되지 않았으므로, 제사를 지낼 때에 임시로 지면(地面)을 허비고 묻는 구덩이를 바라보는 예식(禮式)을 행하게 되오므로, 그 묻은 폐백은 얼마 아니지나서 즉시 도둑질하여 가게 되오니, 신(神)에게 올리는 뜻에 아주 어긋납니다.
그러하오니 여러 곳 제단에 일체로 법대로 묻는 구덩이를 설치하고 폐백 묻는 예식을 행한 뒤에는 사람을 시켜 지켜보게 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방비하다가, 후일에 제사지낼 때에 이르러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서 없거든 이를 죄 주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옛날의 제도를 잘 살펴보면 바다,산,강의 신(神)에게는 모두 사당집이 있어, 명궁(明宮),재려(齋廬),신주(神廚),신고(神庫)가 갖추지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정성과 공경함이 극진하였사온데, 신사(神祠)는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감히 아는 체할 바가 아니오나, 삼각산과 목멱산의 사당은 곧 도성(都城) 중의 사당으로서 단(壇)과 낮은 담[壝]은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그 구조(構造)의 제도를 보온 즉 다만 제묘(祭廟) 3칸(間)만 세웠사온데, 규모가 좁고 누추(陋麤)하며, 재려(齋廬)와 주방[廚]과 곳간[庫]이 전혀 건조(建造)되지 않았사오니, 제사지내는 날에 만약 바람불고 천둥치고, 비오고, 눈오는 변이 있으면, 제찬(祭饌)을 감독하여 마련할 적에 가리고 덮은 것이 없고, 향을 받은 대신(大臣)과 대감(臺監),향관(享官)들이 밤새도록 옷이 젖게 되오니 매우 미편합니다.
또 그 변(籩),비(篚),조(俎),두(豆)와 등(㽅),형(鉶),준(尊),탁자(卓子)등의 물건을 짊어지고 오르고 내리면서 제사 때마다 번갈아 돌려쓰게 되니 역시 매우 타당치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재려(齋廬)와 신주(神廚)를 세워서 비에 젖지않도록 준비(準備)하고, 신고(神庫)를 세워서 제기(祭器)를 각기 따로 간수하여 번갈아쓰지 못하게하고, 사당의 안에 면장(面帳)1480), 지의(地衣)1481),도벽(塗壁)등의 장식은 신(神)이 의지하는 곳이니, 도리상 마땅히 맑고 깨끗해야될 것입니다.
지금 진설한 것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찢어지고 더러워져서 신(神)을 공경하는 예(禮)에 부끄러움이 있사오니, 지금부터는 그 시일이 오래 되고 가까운 것을 참작하여 고치고 바꿔서 새롭게 하도록 하시기 바라오며, 신탁(神卓)의 설비는 전혀 전찬(奠饌)하는데 관계되오니 설만히 할 수도 없으며 더럽게 할 수도 없습니다.
신이 삼각산과 목멱산의 신위(神位),탁자(卓子)를 보오니, 삼각산 것은 거칠게 만든 널빤지상[板子床] 두개를 맞대어놓았으며, 목멱산 것은 상(床)을 만들지 않고 널빤지[木板子] 두 조각으로써 두쪽 마구리에 굄목을 받쳐놓았습니다.
이 두 사당의 신탁(神卓)이 법에 어긋남이 이와 같아서 이미 상(床)의 제도가 틀렸고, 또 칠을 하지 않았으므로 더럽고 때가 끼었으며, 또 진설(陳設)하는 데 있어서도 길이와 넓이가 넉넉하지 못하오니 진실로 설만함이 그지없사온 즉, 누가 성중(城中)에 나라 제사를 지내는 곳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겠습니까?
신이 이 폐단을 예조에 보고하고 선공감(繕工監)에 공문(公文)을 보낸 지가 이미 해포가 되었습니다마는, 영선(營繕)하는 일이 번다하여서 지금까지 고치지 못하였사오니, 속히 고쳐서 일체 진설(陳設)이 합당하게 되도록 하옵시고, 모든 기구의 만들고 꾸미기를 정밀히 연구하여서 하며, 홍색과 흑색으로 칠을 하여 이를 신고(神庫)에 잘 간수하고 아무 때에나 마구 내 쓰지 못하게 하며, 그 전에 쓰던 상(床)은 그대로 보존하여 상시에 쓰도록 하는 것이 또한 옳겠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어 마땅하다고 여기시면 좇으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1449]무역궁(無射宮): 12율(律)의 하나. 註1450]사망(四望) : 해,달,별,바다. 註1451]운한편(雲漢篇):《시경》대아(大雅)의 편명. 註1452]월령(月令):《예기(禮記)》의 편명(篇名). 註 1453]진양(陳暘): 송나라의 휘종(徽宗) 때 사람. 註1454] 진씨(陳氏): 진양(陳暘). 註1455]일성(一成): 한 장(章)을 마치는 것 註1456]예운(禮運):《예기(禮記)》의 편명(篇名).註1457] 두자춘(杜子春): 후한(後漢) 때의 사람 註1458]순자(荀子):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유학자 순황(荀況). 註1459]운인(韗人) : 북을 메는 장인(匠人). 註1460]흘공(歇工): 값싼 공인(工人)이란 말. 註1461]영태(永泰): 당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註 1462]오성(五聲):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오음. 註1463]정사농(鄭司農): 후한(後漢) 때의 유학자 정중(鄭衆).註1464]정강성(鄭康成): 후한 때의 정현(鄭玄). 강성은 그의 자(字). 註1465]팔음(八音): 여덟 가지의 악기. 곧 금(金)의 종(鍾), 석(石)의 경(磬), 사(絲)의 금(琴),슬(瑟), 죽(竹)의 적(笛), 포(瓠)의 생(笙),우(芋), 토(土)의 훈(壎),부(缶), 혁(革)의 고(鼓), 목(木)의 어(敔) 등을 말함. 註1466]도필(刀筆): 문서의 작성과 기록,전달,보관 등의 사무. 곧 아전의 사무 註 1467]명궁(明宮): 조현(朝見)을 받는 정전(正殿). 註1468]가공언(賈公彦): 당나라 고종(高宗) 때 사람 註1469]진상도(陳常道): 진상도(陳祥道)를 이름이니, 송나라 철종(哲宗) 때 사람 註1470]방책(方策): 간책(簡冊) 곧 서적. 註1471]사광(師曠): 춘추 시대 진(晉)나라 음악가. 註1472]육률(六律): 황종,대주,고선,유빈,이칙,무역 註1473]삼부(三部): 아악부(雅樂部),당악부(唐樂部),속악부(俗樂部). 註1474]망질(望秩): 산천(山川)을 바라보고 희생(犧牲),폐백(幣帛),위차(位次) 등의 차서(次序)를 맞추어 제사한다는 뜻. 註1475]동한(東漢): 후한(後漢). 註1476]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 註1477]자월(子月): 11월. 註1478]축월(丑月): 12월. 註1479]인월(寅月): 1월. 註1480]면장(面帳): 앞에 늘어뜨린 휘장 註1481]지의(地衣): 가장자리를 헝겊으로 꾸미고 연폭(連幅)하여 크게 만든 돗자리.
○禮曹與儀禮詳定所議奉常判官朴堧上書條件以啓:
堧云: “宗廟之樂, 前此堂上堂下, 皆用無射宮, 有陽而無陰。 今據古制, 下奉無射, 上歌夾鍾。 蓋夾鍾無射, 卽卯與戌陰陽之合, 而先王享人鬼之樂也。 社稷之樂, 前此堂上堂下, 皆用大蔟宮, 亦純乎陽也。 今據古制, 下奏大蔟, 上歌應鍾。 蓋大蔟應鍾, 卽寅與亥陰陽之合, 而先王祭地祇之樂也。 釋奠之樂, 前此堂上堂下, 皆用南呂宮, 無其合也。 今據古制, 下奏姑洗, 上歌南呂。 蓋姑洗南呂, 卽辰與酉陰陽之合, 而古人祀四望、祀聖賢之樂也。 圓壇之祭, 卽圜丘祀上帝之禮也。 諸侯無常祭之理, 我朝舊行之, 非禮也。 又其用樂, 堂上堂下, 皆用大蔟宮, 全非也。 去永樂丙申年間, 文定公趙庸爲禮曹判書, 啓聞改正, 祭以祈雨, 歌用《雲漢篇》, 其樂下奏黃鍾, 上歌大呂, 以復周室六合之制。 蓋黃鍾大呂, 卽子與丑陰陽之合, 而先王祀天神之樂也。 是其律呂合聲之法, 已見用於其時, 著在圓壇之儀, 但未編及於他祭之樂, 爲可恨也。 今臣承命, 悉皆改正 固非無是佐驗, 而敢爲是臆說也。 先農先蠶之樂, 前此堂上堂下皆用大蔟宮, 專無所據。 今用古制, 下奏姑洗, 上歌南呂如釋奠之樂, 此卽辰酉之合, 而古人祀聖賢之樂也。 風雲雷雨之樂, 此皆用大呂宮, 純乎陰也。 祀天神而純用陰律, 尤非所宜也。 今據古制, 下奏黃鍾, 上歌大呂如圓壇之樂, 此卽子丑之合, 而先王祀天神之樂也。 山川之樂, 奏蕤賓歌函鍾正也。 我朝據《洪武禮制》州縣之儀, 與風雲雷雨同壇而祭, 故只用祀天神黃鍾大呂之宮, 蓋無二尊故也。 雩祀之樂, 前此堂上堂下, 皆用大蔟宮, 全非也。 求之古制, 亦無用某律之文, 然此祭六位之神。 我朝據《文獻通考》、《月令》、《孔子家語》等書, 以爲句芒、蓐收、玄冥, 則少皡氏之子也。 祝融則顓頊氏之子也。 后土則共工氏之子句龍也。 后稷則周之始祖也。 此六者生爲上公, 死爲貴神。 原其所自, 上世聖賢之神, 當如釋奠。 先農之禮, 用姑洗南呂之律, 但陳暘《樂懸圖》內, 鼓用靈鼓, 似以地祇祭之爲可疑耳。 以地祇祭則當用大蔟應鍾之律, 迎神之樂, 各有所屬, 祀天神則用圜鍾宮六變, 卽《周官》所謂其樂六變, 則天神皆降, 可得而禮者也。 祭地祇則用函鍾宮八變, 卽《周官》所謂其樂八變, 則地祇皆出, 可得而禮者也。 享人鬼則用黃鍾宮九變, 卽《周官》所謂其樂九變, 則人鬼可得而禮者也。 我朝迎神樂, 不辨所屬之律, 而只以《凝安》、《景安》等曲名著之, 又不知六變、八變、九變之法, 每祭迎神, 皆以黃鍾一宮奏之, 三聲而止, 或二聲、或一聲, 因執禮之言而止之。 今據先王之制, 一皆改正, 條具如左。 宗廟迎神, 用黃鍾宮九變, 蓋黃鍾, 卽北方子位之律也。 《周禮》註云: ‘黃鍾生於虛危之氣, 虛危爲宗廟, 故以聲類求之。’ 陳氏以爲: ‘以其死者所首之方, 故用此宮以致人鬼。’ 其樂九變者, 子之數本九也, 故此宮, 古人謂之人宮。 釋奠先農雩祀同此, 皆享人鬼故也。 社稷迎神, 用函鍾宮八變, 蓋函鍾, 卽坤上未位林鍾律也。 《周禮》註云: ‘林鍾生於未坤之位、東井星之外, 卽天社也。’ 陳氏以爲: ‘以其神養萬物, 故用此宮以出地祇。’ 其樂八變者, 未之數本八故也。 山川用樂則亦用此宮, 屬乎地祇故也。 此宮, 古人謂之地宮。 以函鍾爲名者, 坤有含洪之義也。 圓壇風雲雷雨迎神, 用圜鍾宮六變, 蓋圜鍾, 卽震上卯位夾鍾律也。 《周禮》註云: ‘夾鍾生於房、心之氣。 房、心爲天帝之明堂也。’ 陳氏以爲: ‘以其帝出乎震, 故用此宮以降天神。’ 其樂六變者, 卯之數, 本六故也。 以圜鍾爲名者, 天體本圜也。 此宮, 古人謂之天宮。 送神之樂, 只用所屬之宮, 一變而止, 今列于下。 宗廟、先農、先蠶、釋奠、雩祀等祭, 同用黃鍾一成; 圓壇風雲雷雨等祭, 同用圜鍾宮一成; 社稷山川、城隍山川則同。 社稷用函鍾宮一成, 城隍則古無用樂之文。” 今詳右等條, 請皆從之, 但雩祀之樂, 宜用姑洗南呂之律。
堧又云: “樂懸之制, 本取法於十二辰, 每一辰, 設編鍾一架, 編磬一架, 又編鍾、編磬之間, 設一鍾一磬。 子位則黃鍾聲, 丑位則大呂聲, 寅位大蔟, 卯位夾鍾, 餘位如之。 此先王之制取法於陰陽, 詳密如此, 不可損益者也。 我朝軒架, 每一位只設編鍾編磬, 而無逐位本律之鍾, 有違先王取法之意。 願備鑄以復古制。” 今詳古制, 離磬鎛鍾具十二辰位, 用於宮懸軒懸, 闕三辰之位, 此說宜不從。
堧又云: “自古先農之樂, 皆用土鼓, 今用路鼓, 非制也。 謹按《禮運》註云: ‘土鼓, 築土爲鼓也。’ 《周禮》註杜子春云: ‘以瓦爲匡, 以革爲面。’ 陳暘則以《禮運》爲據, 而不取子春之說。 然雅樂之器、土音之屬, 皆以瓦爲之, 塤缶之類, 皆是也。 上古築土之鼓, 旣不能倣, 則姑依子春之說, 陶瓦爲匡, 冒革爲面, 以代上古土鼓之用。” 今詳此說, 從之爲便。
堧又云: “堂上之樂, 擊拊爲先, 拊之爲器, 其用先歌。 陳暘以爲: ‘堂上之樂所待以作者在拊, 堂下之樂所待以作者在鼓。’ 蓋堂上門內之治, 以拊爲之; 堂下門外之治, 以鼓爲之。 內則父子, 外則君臣, 人之大倫也, 而樂實像之。 以此觀之, 堂上之樂, 不可無拊, 今無之。 考其制作之法, 《周禮》圖說及陳暘之書、林宇《樂譜圖論》不同, 願依一說, 製造用之。” 今詳拊之爲器, 體制難定, 宜勿製造。
堧又云: “按《周禮》《春官》云: ‘鼓人以晉鼓鼓金奏。’【金奏, 擊編鍾也。】《周禮》圖及陳氏禮書樂書內圖懸鼓之狀, 以爲懸鼓, 卽晉鼓也。【以其進樂故謂之晉鼓, 以其懸設故謂之懸鼓。】陳暘因謂: ‘宮懸設之四隅, 軒懸設之三位。’ 荀子以爲: ‘衆樂之君。’ 今雅樂大鼓, 似倣此鼓爲之。 然其形制, 與《周官》《韗人》之說不合。 且只作一件, 偏置一隅, 又不懸設, 非制也。 願令備造, 一如周制用之。” 今詳軒懸所設雷鼓靈鼓路鼓, 皆不能聲。 今之所用大鼓, 宋人以爲散鼓, 其後代以晉鼓, 乞依宋制用晉鼓一。
堧又云: “缶之爲樂, 始自堯時, 歷代不廢, 至秦而尤尙用之。 不徒爲樂懸之器, 而擧世皆好之, 豈無聲音節奏, 而俗尙至此哉, 臣觀我朝所用之缶, 其形不類於圖, 又於扣擊, 全無聲韻, 軒架內徒備行列, 故缶工之類, 謂之歇工, 欺慢甚矣。 謹稽古書, 唐永泰初, 司馬滔進《廣平樂》, 以八缶具黃鍾一均之聲。 宋時民間用九甌, 含五聲四淸之聲, 則軒架內十缶之音, 分十二律爲聲, 似亦無難。 又凡土成之器, 有鼓之而無聲者, 有聲甚淸和者, 有聲高者, 有聲下者。 蓋聲之有無, 卽陶之熟與不熟也。 音之高下, 則器之厚與薄、深與淺也。 今於城外近地麻浦水邊, 幸有陶所, 願擇善陶者, 給力給料, 以任其役, 俾知音料事者朝夕往來, 親監陶造, 必以形與圖合, 聲與律和爲準, 器成之後, 衆工各持隨字互擊十缶之音, 自成一樂, 然後入於行列, 合之衆音, 則聲聲相應, 甚有條理。 臣願一試之。 壎之爲器, 古云: ‘長三寸半, 圍五寸半。’ 陳暘云: ‘平底六孔, 水之數也。 中虛上銳, 火之形也。 壎以水火相合而成器, 亦以水火相和而成聲。’ 其制作之法, 皆有所據, 不可妄作也。 今樂懸所用壎制, 或大或小, 或長或短, 不依分寸, 或上下皆銳, 或上下皆圓, 全失平底銳上之制, 陶造甚粗, 開穴全訛, 律聲調協, 安敢有望, 願依先賢圖說, 改造用之。 祭享之鼓, 有雷鼓、靈鼓、路鼓凡三樣也。 陳暘云: ‘雷, 天聲也, 故祀天神用雷鼓。 靈, 地德也, 故祭地祇用靈鼓。 路, 人道也, 故享人鬼用路鼓。’ 臣觀古人軒架圖, 祀天神用雷鼓三架, 祭地祇用靈鼓三架, 享人鬼用路鼓三架。 今宗廟軒架用路鼓三架, 正合古制。 至於社稷當用靈鼓三架, 而反用雷鼓一架, 圓壇風雲雷雨當用雷鼓三架, 而反用靈鼓一架, 彼此相易, 名實未符, 且有欠缺, 豈宜盛朝有此過擧乎, 願依古說備數制作, 各以其類, 陳而奏之。 祀天神用卯宮圜鍾之律, 樂用六變、鼓用六面者, 先天之數, 卯得其六故也。 祭地祇用未宮函鍾之律, 樂用八變、鼓用八面者, 先天之數, 未得其八故也。 陳暘此說, 似有據依。 《周禮》註引鄭司農云: ‘雷鼓六面。’ 與陳氏同。 又引鄭康成云: ‘雷鼓八面, 靈鼓六面。’ 今奉常寺序列圖〔序例圖〕, 不考陳氏之說, 只據康成之言爲圖, 故此二鼓易換。 願依陳氏之說改之。 軒架三面, 編鍾之位九, 而九架之內, 各懸十二律鍾, 總一百單八顆, 乃備本律。 中聲若兼四宮淸聲, 則每架各添四顆, 凡一百四十四顆, 乃足其數。 竝祭則倍之, 爲二百八十八顆也。 我朝編鍾元數, 只二百八十六顆。 臣今以中國方響簫管等器, 校正音律, 其正合黃鍾者十顆, 正合大呂者十一顆, 夾鍾七顆, 姑洗七顆, 仲呂九顆, 蕤賓十三顆, 林鍾十九顆, 夷則十四顆, 南呂二十一顆, 無射二十六顆而已, 其餘一百三十六顆, 皆未中律。 今以入用之數計之, 則黃鍾、大蔟、仲呂、蕤賓、夷則、應鍾, 僅滿一祭之懸, 大呂夾鍾姑洗則一祭之用, 亦未備焉, 但林鍾、南呂、無射, 則二祭幷行之數足矣。 其未備之架, 行祭之日, 不得已兼設不協之鍾, 至於竝行, 則永寧殿之樂, 無中律之鍾, 不得成調, 故分校正一二架, 設於前面, 不中者換入於宗廟之庭, 故兩祭之樂, 皆未純正。 若盡數扣擊, 則聲音錯雜, 邪正交喧, 全無諧協之理, 故只以正律奏之, 餘皆懸設而已。 此亦小臣之妄計也。 然比之往日邪正雜奏, 則小愈耳。 願命備鑄, 以正一代之樂, 垂之萬世。 又堂上特鍾特磬, 古制聲中黃鍾正也。 今觀宗廟特鍾, 則仲呂聲也。 諸祭所用, 則姑洗聲也。 特磬亦不審其音, 以唐磬一枚任意用之。 願令改造, 必聲中黃鍾, 然後用之。 臣又妄計, 凡金鑄之器, 厚則聲高, 薄則聲下。 其聲下者, 更無可高之理, 聲之高者, 磨削令薄, 實非難事。 願賜鍮匠三四名, 先將特鍾一顆, 磨削試驗, 然後依此校正可也。 其不協編鍾一百三十六顆, 亦皆磨削內面, 期於中律用之, 則庶爲功稍易, 而祭樂幾乎備矣。 牘之爲器, 用竹爲之, 長七尺, 虛中無底, 其端有兩竅, 畫彩爲飾, 築地取聲, 以節舞者之步。 今雅樂之牘用竹則是也, 而不刳裏面, 節節皆塞, 失虛中無底之制。 又不開兩竅, 且無畫彩, 築地之際, 全無聲韻, 甚違本制。 願依圖說改造用之。 柷方二尺四寸, 虛中而四面縫合, 中開一穴, 以受椎柄, 更無他穴也。 今雅樂之柷, 旣有椎柄之穴, 又於一旁開穴, 圓可容拳, 考之圖說, 未有如此樣者, 願須改正。” 今詳右等說爲是, 宜從之, 但唐鍾勿令磨削。
堧又云: “磬石之得, 自古爲難, 我朝瓦磬, 亦不得已也。 然石聲則爲乾方立冬之音, 土聲則爲坤方立秋之音也。 以瓦代石, 殊失八音之制矣, 今得南陽之石, 聲甚淸和, 不下唐磬, 此乃聖朝應時之物, 非偶然也。 庶幾盡心磨琢, 期於大備, 然攻治未易, 必經久乃備, 其未備之際, 應以前日之瓦磬用之。” 今詳瓦磬協音律者蓋少, 又多無聲者, 數亦未足, 宜擇近律者留之, 餘願卽令備造, 以待石磬之成。”
〔堧又云〕: “笙之爲器, 艮方之音。 其制則衆管參差, 植於一匏之中, 取春陽生物之象也。 以其有生物之義, 故謂之笙; 以其爲匏體之器, 故謂之匏。 其必以匏爲之者, 匏爲蔓生在地之物, 而艮之屬也。 後世以木代匏, 制雖精巧, 全失本制。 且八音之內, 木聲屬乎巽, 爲立夏之音也。 匏音屬乎艮, 爲立春之音也。 以木代匏, 則以爲巽音乎, 以爲艮音乎, 此不可之大者也。 願依本制爲之, 但制笙之匏, 未易卽求, 酌量圖形, 布求中外, 至秋輸納, 擇而用之。” 今詳右等說, 宜從之, 匏則宜制造試驗。
堧又云: “堂上登歌, 最難協律, 非專心致志, 必無成功之理。 我朝設左右房齋郞, 以左房備登歌之位, 右房備文舞之位。 其去官之法, 專憑仕日之多少, 不係歌舞之能否, 因以不勉, 故前年春初, 臣等報禮曹啓聞, 許依諸學例, 取才遷轉。 自後此輩稍知自勉, 競以進取爲計, 然素不知音, 與聾無異。 又皆吏典去官, 年已過時, 志慮多岐。 且兼刀筆之務, 彼此相役, 以代令史之任, 或出或入, 不得專心, 臨祭之時, 始合爲一, 以此責成難矣。 今禮曹將此刀筆齋郞, 盡還本任, 俾專所業, 但鑄字所未除耳。 臣觀登歌之人, 非衆工之例, 其奏技之位, 密近明宮之室, 尤不可以不謹重也。 願自今勿論左右房, 擇其年芳聰敏、容儀端潔者, 竝祭通計四十八人, 備闕幷六十餘人, 專屬登歌, 勿令出入, 每日(隷)〔肄〕習, 使先通者道唱, 比之琴瑟, 不協者撻之, 則成効可期也。 又臣妄謂凡學術, 不如敎之幼稚之時。 除見在齋郞外, 宜選中外良民子弟年才及冠, 稍知字書者, 入於登歌之部, 日與舊學嘔吟歌詠, 則志慮未分, 所業必專, 習與性成, 而無勤苦難成之患矣, 況童稚之輩, 音聲必淸於歌, 尤宜也。 願殿下, 留意裁之。 如又不然, 則須擇年幼者, 差屬之。 武舞之法, 象先王定亂之功, 所係至重。 其冕而摠干, 本古者帝王親舞之制, 因而不革者也。 考之《禮記》, 可見也。 今武舞之人, 多雜刑曹義禁府去官之徒, 此輩老於刑獄殺戮之間, 親執鈇鑕, 習以爲常, 養之不端者也。 一朝領在雅樂, 入於淸廟, 動止頑麤, 形貌老醜, 載冕摠干, 甚非所宜也。 故小臣受命樂學以來, 有子弟可代者, 續續代立, 無者仍存之。 願自今雅樂舞人, 更勿雜以刑官之人, 無子弟可代者, 悉皆削去。” 今詳右等說爲是。 齋郞則令吏曹擇定自願, 從仕人之年少穎悟者, 武工亦令兵曹, 擇年少可當者差定。
堧又云: “舞佾之位, 考之古賢圖說, 乃在廟庭之中, 不在樂懸之北, 我朝陳之於懸北階南, 旣失古制矣。 又地窄位狹, 無進退作變之理, 誠爲未便。 今考樂舞進退之法, 先儒謂: ‘立表於舞佾, 舞人自南表向二表爲一成, 自二表至三表爲二成, 自三表至北表爲三成, 乃轉而南, 自北表至二表爲四成, 自二表至三表爲五成, 自三表至南表爲六成, 則樂亦六變, 而天神皆降, 此祀天神圜鍾宮六變之舞也。 又自南表至二表爲七成, 自二表至三表爲八成, 則樂亦八變, 而地祇皆出, 此祭地祇函鍾宮八變之舞也。 又自三表至北表爲九成, 則樂亦九變, 而人鬼可得而禮矣。 此享人鬼黃鍾宮九變之舞也。’ 按此四表進退之節, 卽武舞之法也, 於文舞則未有明說。 先儒賈公彦以爲: ‘武舞有四表, 文舞亦應有四表。’ 陳常道《禮書》云: ‘賈公彦之言, 於理或然。’ 又我朝去乙亥年冬親行大祭時, 提調鄭道傳ㆍ閔霽ㆍ權近ㆍ韓尙敬等同署文案內, 文武二舞, 各爲四表, 相距四步爲式, 然舞佾在於懸北郊間, 無以爲進退之節。 願依古制, 舞佾陳於庭中, 以盡六變、八變、九變之儀。 二舞之儀, 考之圖說, 旌一、纛一、麾二, 皆在舞佾之前, 以爲舞者之觀望, 一如軍中卒徒、望其旗麾, 以爲坐作進退之節。 今二舞之儀, 麾在舞人之後, 舞者無可見之理。 願依樂圖改陳之, 又二舞當各有儀仗, 隨舞引導也。 今只備一件, 二舞共用, 故舞有出入, 而儀仗不動, 文舞入則齋郞執之, 武舞入則武工執之, 誠爲未便。 願備二件, 各引其舞。” 臣等以爲舞佾之位, 當更審軒懸之處, 然後更議。 今詳《文獻通考》, 唐、宋之制, 執纛二人, 引文舞, 執旌二人引武舞。 乞依古制製旌纛各二, 文武舞入時, 各別前引。
堧又云: “工人祭服, 古人重之, 必致精潔, 至於舞郞之服, 上古之制, 雖未可考, 魏、晋之時, 猶能致意於祭樂, 武舞則平冕黝衣裳, 又有白領袖中衣, 又有絳色合幅袴袾, 又有黑韋鞮,【鞮卽履也】文舞則冠委貌, 服亦同焉。 我朝懸樂衆工之服, 用五升麤布, 紅染爲衣; 武舞之人, 亦用五升麤布, 黑染爲衣; 文舞則用六升木緜, 紅染爲衣。 且只作外衣一件, 而無內著之服, 裁縫短窄, 製作無據, 袂不及手, 齊不及踝, 袖袂不一, 或博或狹, 至於穿着, 不掩常服。 又其所着之履, 以牛馬皮黑染爲之, 以代古人黑韋之鞮, 似亦無妨。 但屢經雨露, 乾縮失容, 工人臨祭, 不能容足, 有以所着惡靴入庭者, 又有赤足而着入者, 舞蹈之際, 儀章不一, 穢服呈露, 甚不可也。 且襪履之數, 僅滿一祭之用, 而四時之祭, 用樂處非一, 每祭通用, 則毁汚益甚, 故屬之宗廟, 只用親行之祭, 他未之及, 故諸祭之行, 皆有衣而無襪履。 工人以常着惡靴, 任意入庭, 此殿下之所未知也。 臣觀典樂署之樂, 爲接賓客宴享而設也。 其奏技之工, 未有如雅樂之衣履者, 以至呈才之儀、儺禮之飾、處容之服, 窮極華美, 不以爲侈, 至於事神之禮, 率略如此, 雖曰禮奢寧儉, 反爲質勝而野。 今幸國家殷富, 布帛陳積, 時使和賣, 以利民生, 豈於祭服之用, 獨吝乎, 第下之人, 未有以此弊上聞者, 故殿下未之知耳。 願令集賢殿, 徧考祭樂工人服飾之制, 然後改正之。 樂懸之器易毁者, 甚衆。 如樂懸架子鸞鳳蟲獸之飾、缶鼓鼗磬旌翟流蘇之類, 一經雨雪, 不謹藏護, 則彫零退色, 已爲不潔, 又況我朝軒架之器, 宗廟、永寧殿外, 只備一件, 諸祭通用, 輸轉往還, 每祭皆然, 故未經一年, 盡皆毁損, 全無完物, 隨宜緝理, 穢惡莫甚, 又多失本, 徵納充數, 非細患也。 且工人祭服, 亦備一件, 每祭通用, 損汚尤甚。 願自今諸處祭所, 各立一庫, 凡軒架易毁之器、工人祭服, 各備封藏, 時時暴曬, 以待其用, 則儀章明潔, 可接神明; 物物完具, 不費修營矣。 又其神主之櫝, 都入奉常庫中, 臨祭, 奴隷擔負而進, 甚爲褻慢, 尤不可也。 立庫各藏, 亦所宜也, 願殿下裁之。” 今詳右等說,皆是, 宜從之。
堧又云: “禮樂二者, 不可偏廢。 臣觀每祭行事之儀, 禮文獨備, 而樂不成章, 蓋禮之察在目, 人所易能也。 樂之察在耳, 非知音者, 無以辨其終始, 故《周禮》《春官》樂師令, 奏鍾鼓, 樂成則告備焉, 謹重之也。 今詳迎神之樂, 有六變、八變、九變之別, 祼獻之樂, 每位以八句而成章, 一變不具, 則已反所降之神; 一句有缺, 則已虧所頌之德, 非小欠也。 臣見我朝祭享之儀, 執禮者不以樂之條理爲節, 專以獻時事宜爲據, 至於親行之日, 則猶恐殿下久勞於禮, 其迎神之樂, 才至二三變, 而卽曰樂止; 祼獻之章, 未及三四句, 而亦曰樂止, 一祭之內, 禮雖整齊, 而樂實專差。 聖明之時所重者禮樂, 而樂之歇後如此, 非所宜也。願自今依《周官》之制,令雅樂令,樂成告備,然後執禮者乃敢發言。” 今詳此說, 宜仍舊。
堧又云: “聲樂之和, 自古爲難。 古人之論聲音, 則必以擊石爲主; 言律管, 則必以纍黍爲本。 今也天降秬黍, 以示至和之應; 地産石磬, 以兆克諧之端。 然今日所當先正者, 律管也。 稽之於古, 周得有邰秬黍而樂和, 漢得任城秬黍而近古, 隋得羊頭山黍而不協, 宋得京城秬黍而亦不中。 以此觀之, 纍黍之法, 雖載於方策, 得黍之眞, 最爲難事。 臣今印籍田所養纍, 爲黃鍾管吹之, 其聲高於中國黃鍾一律。 臣恐地塉年旱, 所養失和而然也。 臣因思之, 均是一種禾穀也。 南方之米, 光潤而肥大; 京畿之粒, 枯燥而瘦細, 至於東北之界, 則瘦細尤甚焉。 黍之大小, 應亦如之。 臣願悉取南方諸州所養之黍, 以三等擇之, 纍以爲管, 其間有如中國之音合者, 則三分損益, 以製十二律管, 以和五聲, 度量權衡, 因亦可察也。 但歷代制律, 因黍而不一, 聲音高下, 世世差異, 則安知今日中國之律, 爲非眞也, 而我朝秬黍乃得其眞也耶, 然同律度量衡, 乃天子之事, 非侯邦之所自專也。 若今秬黍, 終不協於中國之黃鍾, 則姑從權宜, 假用他鍾之黍, 纍成律管, 求協於中國黃鍾, 然後依法損益, 以正聲律可也。 今若不制律管, 則五音淸濁, 未免失眞。 孟子曰: ‘師曠之聰, 不以六律, 不能正五音。’ 眞萬世不易之論也。 此今日制作急務之大者也。 願殿下毋下有司, 潛思英斷, 勿滯施行。 臣恐衆論蜂起, 不得遂其志願也。”今詳此說爲是, 宜試驗。
堧又云: “齋郞工人之輩, 習樂成才, 然後可備行列, 不可一日放歇也。 今見此輩入屬之後, 或受由過限, 或喪畢不返, 或任意逃匿, 多般窺避, 彼此免役, 不仕者甚衆。 雖每論罪行刑, 用鞭多不過五十, 故未浹旬朔, 還復不仕, 頑惡莫甚。 每當祭時, 吏典別軍, 曾不習樂者, 充數入庭, 亦非小欠也。 願自今齋郞工人, 無故不仕者, 計其不仕日數, 準削前仕, 其行刑之法, 不以各司之例施之, 亦計日數之多少, 許用笞杖, 其中有能勤仕勉學, 能堪其任者, 四時大祭之後, 加給別仕, 其不能者, 不給祭日之仕, 以嚴勸懲。如此則有才者畏削而不怠,無才者因利而加勉,每當祭時,皆奔走赴祭,以圖進取,無故不仕者,亦將不召自至矣。”今詳此說,依宣德三年閏四月初八日吏曹受敎,武工樂工,亦依此例。
堧又云: “樂書纂集一事, 臣所極慮。 今詳我朝所用三部之樂, 皆未整齊, 而雅部尤甚焉。 其律呂制度、歌舞規式、琴瑟譜法等類, 精微曲折, 不可草草立說。 歷考諸書, 旁稽衆說, 體認有得, 然後圖形著論, 俾人人皆可尋繹而知之。 其引用諸儒, 則鄭司農、鄭康成之說, 互有得失, 似難爲據, 唯司馬遷、杜佑、馬端臨、陳常、陳暘、吳元章、林宇、陳元靖、晦菴朱子、西山蔡氏之說, 爲可據依。 就此參校, 以求定論, 其間附以所見、或圖或說以羽翼之。 其唐樂一部則乃中國俗部之音也。 其樂摠百有餘篇, 而我朝工人所解者, 只三十餘聲而已, 餘皆不曉。 然譜法分明, 有尋悟之理, 但未知急慢之節, 爲可恨耳。 姑幷存之, 以待知者。 此部纂錄, 別無改正條件, 只於篇首, 冠以古人圖說及歷代之規警之語, 又將所用樂器名數、制作形像, 纖悉開具, 以備後日之遺失, 其樂之名, 世稱唐樂。 唐字旣爲漢、唐之唐, 則歷代中國之樂, 皆以唐稱之, 其可乎, 願以華樂俗部改稱之。 至於我朝之樂, 其器物制度、歌詞曲折, 亦甚繁密, 雖舊有譜法, 書本相傳, 承誤失眞, 舊時之樂, 殆盡亡失, 僅存者四十餘聲耳。 今以玄琴所屬言之, 有知彈法, 而不知歌詞者, 如《崔子》、《啄木》、《憂息》、《多手喜》、《淸平》、《居士戀》等類是也。 又有譜法俱存, 而不解急慢之節, 兼失歌詞者, 如《露中仙》、《賞春光》、《望春天》、《樂春天》、《喜春苑》、《賞春曲》、《長河篇》、《陳鴉羽》、《天雙鳥》、《春桂引》、《雲仙曲》、《壽仙曲》、《實相曲》、《朽木》、《狗墓》等篇是也。 又伽倻琴所屬《嫩竹調》、《河臨調》, 空有其名, 而不傳其聲, 此等遺亡諸篇, 不可悉記, 然譜法尙存, 其歌詞舊本, 意必有傳寫私藏者焉。 願令中外悉求我朝舊時歌典, 如有詳悉舊本, 自告進呈者, 賞之以職, 則舊樂之缺, 庶可塡補矣。 如此, 然後擇其歌曲之詞, 其中君臣道合、父子恩深、夫婦節義、兄弟友愛、朋友講信、賓主同歡, 發於性情之正, 有關於人倫世敎者, 以爲正風, 其男女相悅、淫遊姦慝、逞欲無恥, 有愧於綱常者, 以爲變風。 其調弄之法, 聲音高下, 本用大笒爲據, 不知律呂之所屬, 其稱宮調者, 實非宮也。 其稱羽調者, 亦非羽也。 臣今詳校其聲, 改以律名, 其指法肉調, 亦明之, 以一宮所屬之五音, 使不相紊, 此小臣今日纂錄之大槪也。 但鄕樂所用之律, 則樂始調, 互用仲呂林鍾二律之宮, 仲呂宮則大笒二指聲也。 林鍾宮則大笒三指聲也。 仲呂宮, 古人多忌用之, 以其所用之聲, 皆非正律也。 林鍾則元是天地本然之徵聲, 又所用之聲, 君臣之際, 各得正聲。 且坤方土律, 涵養萬物, 寄旺四時, 常有沖和之氣, 用此爲宮可也。 願自今宴享鄕樂, 主用林鍾爲調, 樂名世稱鄕樂, 亦甚鄙俚, 願殿下改之。 本朝羽調, 乃無射宮也。 古人云: ‘無射宮, 黃鍾爲商, 此君聲反爲臣所凌, 不可用也。’ 我朝好用之, 非所宜也。 今於纂錄羽調諸聲, 不得削去, 但備載古賢之說, 使用樂者知其爲非, 而不敢逞用耳。” 今詳右等說爲是, 宜從之。
堧又云: “風雲雷雨之祀, 今與山川城隍共爲一壇行事, 然風雲雷雨, 天神之屬; 山川城隍, 地祇之類。 其氣類不同, 尊卑有別, 故古人於風雲、雷雨、山林、川澤等六神, 皆別立壇壝祭之, 城隍之神則州縣所祭外國都之制, 未有所考也。 我朝同壇之制, 乃倣《洪武禮制》爲之也。 然《洪武禮制》, 非天子、諸侯、國都之制, 乃諸路、府、州、縣之儀耳。 皇明混一之初, 新立府州縣之儀, 酌州縣經費之宜, 權時從簡, 器用瓷瓦, 陳設極簡, 而乃曰同壇祭之, 則國都之祭, 其不同壇必矣。 今詳《洪武禮制》, 其題主之法曰: ‘某州某縣境內山川之神, 某州某縣城隍之神。’ 於風雲雷雨之神, 則不係州縣之名, 謹重之也。 又其神主風雲雷雨, 共題一牌; 山川二神, 共題一牌; 城隍一神, 自爲一牌。 城隍疑亦爲二神, 然於《洪武禮制》, 城隍幣只用一件, 以此知中國之制, 以一神祭之。 其設位之圖, 則壇上北邊, 城隍居西, 風雲雷雨居中, 山川居東, 坐皆南面, 一行設之, 似以城隍爲尊也。 又考行事之儀, 則先詣風雲雷雨, 次詣山川, 次詣城隍, 又若以風雲雷雨, 爲正位居中, 而山川城隍作配, 分東西也。 大抵神位之設一行, 則以西爲上, 神道尙右故也。 作配位, 則東尊西卑, 相向而坐, 陰陽之位也。 今見山川, 其行禮在中, 而位居末, 城隍行禮在終, 而位居上, 必無是理, 其作配位, 東西相向無疑矣。 今只據其圖, 而不考行禮之節, 三位之神, 一行設之, 無正配位之別, 以城隍之卑, 居於天神之右, 其不可者一也。 以陳設言之, 風雲雷雨四神之位, 幣則用四, 而床則一, 牲亦如之; 山川二神之位, 幣則用二, 而床亦一, 牲亦如之; 城隍一神之位, 則牲幣與床, 專享一件。 是於四神所享之饌不加隆, 於二神一神之饌不加殺, 其所奠之物, 獨豐於城隍之位, 其不可者二也。 又祭祀之禮, 祀天神, 則祝幣燒於燎臺, 祭地祇享人鬼等祭, 則祝幣埋於瘞坎, 又其用樂, 亦各有所屬之律, 此先王之制, 各因所宜, 爲之定制也。 然樂以侑食, 則統於尊可也, 幣以禮神, 則天神地祇之贈, 宜各有所歸著, 不可一例燒之。 今於此祭, 依《洪武禮制》, 有望燎之文, 七神幣祝, 一樣燒之, 其不可者三也。 臣之狂僭, 以爲《洪武禮制》之儀, 用之州縣, 尙有不協於人心者, 於國都之制, 尤未爲的當也。 願舊壇, 只祀風雲雷雨四位之神, 其牲幣饌具, 宜各陳之。 山川則別爲壇所祭之, 城隍亦於山川之壇, 作配位祭之可也。 今若不改同壇之制, 則如臣所論, 風雲雷雨四神, 作正位南面, 山川二位吊西向, 城隍一位在選向, 作配位祭之, 而南置燒臺, 北開瘞坎, 祭畢之後, 分行望燎、望瘞之禮, 使之不紊。 又春秋厲祭之時, 城隍發告, 却於風雲雷雨壇, 作正位行事。 夫以天神作主之壇, 以城隍南面受祭, 恐違望秩之意。 春秋常祭, 旣以城隍之神, 居於尊神之右, 厲祭發告, 又僭居於天神之位, 是何禮耶, 城隍如其正神也, 豈享非禮之祭哉, 願殿下潛思獨斷, 以正祀典, 山川城隍, 別爲一壇, 不與風雲雷雨同位祭之, 不勝幸甚。” 今詳《文獻通考》, 東漢以丙戌日, 祀風師於戌地, 己丑日, 祀雨師於丑地; 唐立春後丑日, 祀風師於國城東北, 立夏後申日, 祀雨師於國城南; 宋兆風師於西郊祠, 以立春後丑日, 兆雨師於北郊祠, 以立夏後申日, 雨師、雷師爲二壇同壝, 其取義不同, 而代各有異。 以三代正朔言之, 周建子, 商建丑, 夏建寅, 聖人之制不同。 惟我太祖, 依《皇明禮制》, 風雲、雷雨、山川、城隍, 合爲一壇而祭之, 此乃時王之制, 且爲祖宗成憲, 仍舊爲便。
堧又云: “壇壝之制, 繚以周垣, 四置壝門, 常令關閉, 勿使牛羊犬馬之類, 得入其壝, 守壇者掃除謹護可也。 今城外之壇, 風雲雷雨壇外, 餘皆無墻, 牛羊犬豕, 縱橫聚散。 又其守壇之人, 只憑版籍之名定之, 或在遠方, 而暫來還去, 或雖居京, 而不堪貧窘。 且於諸壇之旁, 無閑隙可居之地, 皆公私有主之田也。 雖欲完聚守壇, 其計無由, 故名雖壇直, 未有近壇而居者也。 畏其糾摘, 時出望遠, 奔馳赴壇, 亦不及焉, 亦有全然不至者。 雖每月糾摘論罪, 還復如初。 雩祀壇直, 逃匿不見, 先蠶之直, 亦無見身之日。 原其情理, 乃貧乏不能自存者也。 願殿下諸壇之直, 依諸陵守護軍例, 推刷實戶, 每壇計其守護趨事之宜, 保聚壇旁, 給其田畝, 蠲免雜役, 又命諸壇, 各築垣墻, 立庫立廚, 使之謹守, 以養樹木, 以薙荒穢, 以防盜竊, 以安生業, 則壇壝完備, 而事神之禮得矣。”今詳宜從此說,每壇置壇直奴子二戶,各給分田二結,蠲雜役。有自願者, 不拘良賤聽。
堧又云: “祭壇之制, 其壇上則只設神位奠饌而已。 比之宗廟, 則室之中也, 方皆二丈餘, 不可損益。 其壇下則凡用樂之所, 皆設兩壝,【壝, 堳, 埒壇也, 正壇下作堳壇也。】以別堂上堂下之分, 酌登歌樽所之位、軒架舞佾之場, 爲之界限, 不可少有差誤也。 臣觀社稷壇制, 古制方二丈五尺、高三尺, 壇下設兩壝, 皆以二十五步爲界限。 我朝社稷之壇, 壇下只作一壝, 無上下之別, 故行祭之時, 登歌琴瑟之所、堂上執禮之位, 固無所施。 執禮及工人, 皆升於祭壇神位之前, 而樽所亦設於壇上, 行禮之際, 進退失儀, 地窄大逼, 工人不得盡登, 半坐壇上, 半立壇下, 坐者奏技, 而立者無爲, 甚違古制, 禮樂皆失其正。 雩祀先農之壇, 亦本二壝, 而只作一壝, 弊亦如之。 若圓壇則比之他所, 其工作精緻, 然亦不考古制, 亦作一壝, 已非也。 又其前庭, 未有如此壇之狹者, 山岡峻側, 更無開廣之地。 如欲更添壝數, 以備其制, 則雖極費人力, 似難見効, 一經雨水, 還復流缺, 非長久之計也。 若不改正, 則用樂之病, 又甚於他所矣。 今見其壇之下, 岡壠非一, 相其隆起平坦, 宜於壇壝處, 移石改築, 則爲功稍易矣。 不然則鑿平後岡之石七八十尺, 移壇就北, 然後如法制壝, 纍石完補, 俾勿更毁可也。 然計其難易, 不若移於他岡之便也。 風雲雷雨之壇, 垣墻壝埒, 略近古制, 然亦不審用樂之宜, 軒架舞佾, 不得備數陳之, 亦宜移壇就北, 改作二壝行事可也。 先蠶之壇, 營作極疎, 丈尺失制, 面勢欹斜, 卵石纍成, 高低不平, 不可不改也。 又土脈瘠薄, 沙碙積礫, 種桑不榮。 曾謂帝妃之靈, 陟降在玆乎, 今若改正, 則必不仍前基也。 願於雩祀先農之傍, 稍近改築, 而三壇之直, 一區完聚, 立庫藏器, 一心看守, 則盜竊不近, 而神人皆安矣。 漢江之壇, 雖非用樂之處, 傾危逼側, 不宜壇所。 又制作甚爲粗率, 高下廣狹, 全失其制, 幸於近地, 有平坦之岡, 依法改築亦可也。 其餘靈星、老人星壇、馬祖馬社等壇, 可改可修處非一。 臣願漸次正理, 俾無欠缺。”今詳宜從此說, 唯圓壇, 審視更議。
堧又云: “凡祭畢時, 有望燎、望瘞之禮, 燎臺則在壇之南, 瘞坎則在壇之北。 今於圓壇有燎臺, 其餘風雲雷雨及祭星之壇, 不作燎臺, 只於地上, 燒其祝幣。 瘞坎則於宗廟、社稷外, 諸處祭壇, 竝皆未設, 行祭之時, 暫破地面, 以行望瘞之禮, 其所瘞幣帛, 尋卽盜取, 甚違禮神之意。 願於諸處祭壇, 一切依法設之, 望瘞之後, 差人守視, 以防盜取, 及至後祭, 驗其有無, 無則罪之。 竊觀古制, 海岳瀆之神, 皆有祠廟, 明宮齋廬、神廚神庫, 無所不備, 所以致其誠敬也。 今其諸道神祠, 非奉常官之所敢知也。 三角、木覓之祠, 則乃城中之祠堂, 壇壝者, 不可不察也。 臣觀營構之制, 只立祭廟三間, 規模隘陋, 齋廬廚庫, 全未營造。 祭之日, 如有風雷雨雪之變, 則奠饌監造, 無所(疵)〔庇〕覆, 受香大臣、臺監享官徹夜霑濕, 至爲未便。 其籩篚俎豆、㽅鉶尊卓等物, 負持升降, 每祭互用, 亦甚未協。 願自今立齋廬神廚, 以備霑濕, 立神庫, 別藏祭器, 不得互用。 祠宇之內, 面帳地衣塗壁等飾, 依神之處, 理宜淸穆修潔也。 今陳設已久, 綻裂穢汚, 有愧敬神之禮。 願自今酌其日月久近, 改換重新。 神卓之設, 全係奠饌, 不可褻慢也, 不可穢惡也。 臣見三角、木覓神位之卓, 三角則麤作板床二隻竝設之, 木覓則不作床, 用板二葉支兩端設之。 二祠神卓不法如此, 旣失床制, 又不油漆, 汚穢塵垢, 又於陳設, 長廣不周, 誠爲褻慢。 孰謂城中國祭之所, 至於如此乎, 臣以此弊報禮曹, 移文繕工, 已有年矣。 然營繕事煩, 至今未改。 願令速改, 一依陳設之宜, 精究粧造, 紅黑着漆, 藏之神庫, 勿令常用。 其舊時之床, 仍存之, 以爲常用亦可也。”今詳宜從此說。從之。
문종 6권, 1년(1451 신미/명경태(景泰) 2년) 2월 5일(갑술) 2번째기사
선농제에 향축을 전하다
선농제(先農祭)1698)에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註1698]선농제(先農祭):중국 고대에 농사를 맡아보았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後稷)에게 지내던 제사
○親傳先農祭香祝.
문종 12권, 2년(1452 임신/명경태(景泰) 3년) 2월 10일(갑술) 2번째기사
선농제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다
선농제(先農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註3264]선농제(先農祭):동교(東郊)의 제단(祭壇)에서 신농씨(神農氏),후직씨(后稷氏)에게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지내던 제사
○親傳先農祭香祝。
세조 15권, 5년(1459 기묘/명천순(天順) 3년) 1월 27일(경술) 1번째기사
선농제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다
친히 선농제(先農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전(傳)하였다.
○庚戌/親傳先農祭香祝。
세조 19권, 6년(1460 경진/명천순(天順) 4년) 2월 12일(기미) 1번째기사
선농제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다
선농제(先農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己未/親傳先農祭香祝。
세조 23권, 7년(1461 신사/명천순(天順) 5년) 1월 21일(임술) 1번째기사
임금이 친히 선농제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다
임금이 친히 선농제(先農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전하였다.
○壬戌/上親傳先農祭香祝.
성종 33권, 4년(1473 계사/명성화(成化) 9년) 8월 14일(계유) 2번째기사
예조에서 풍운뢰우를 방위와 산천단에 제사지낼 것과 사당의 수리를 청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교(傳敎)를 받드니,‘윤대(輪對)한 자의 말에,「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감동되면 하늘의 변화는 위에서 응답을 하니, 여기서 느끼면 저기서 응하는 것이 이치의 상도(常道)인데, 근년 이래로 수한(水旱),풍재(風災)가 여러 번 일어나니, 이러한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어떤 일에 감응된 바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듣건대 우리나라는 옛날에 풍운뢰우(風雲雷雨)의 신(神)3329)을 각각 단유(壇壝)를 설치하여 제사(祭祀)하였는데, 중국의 예관(禮官) 서사영(徐士英)이 우리나라에 와서 풍운뢰우(風雲雷雨)를 한 단유(壇壝)에 합제(合祭)하라고 가르쳐준 뒤로 수한과 풍재가 계속하여 일어났다고 합니다.
사실상 재앙을 진압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방술임은 항간에 전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세종대왕조(世宗大王朝)에 예조판서 민의생(閔義生)이 이러한 뜻을 상언(上言)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원컨대 예조로 하여금 중국에서 풍사(風師),우사(雨師),운사(雲師),뇌사(雷師)를 한 제단에 합제(合祭)하는지의 여부를 상고하게 하고, 겸하여 역대에 별도로 네 단(壇)을 설치하여 각기 제사하였는지의 여부를 상고하게 하여, 만약 단을 별도로 하여 각각 제사한다면 그대로 별도로 제사하는 예전(禮典)을 좇아서 시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하였습니다.
본조(本曹)는 이에 의거하여 그 풍운뢰우(風雲雷雨)를 별도로 네 단(壇)을 설치하는 고제(古制)와 민의생이 상언한 사연(辭緣)을 예문관(藝文館)에 이문(移文)하여 상고(相考)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본관(本館)의 첩정(牒呈)내에는,‘월령(月令)중 입춘(立春)후 축일(丑日)에 풍사를 국성(國城) 동북(東北)에서 제사지내고, 입하(立夏)후 신일(申日)에 우사를 국성 서남(西南)에서 제사지내는데, 중국제도(制度)에는, 당(唐)나라는 한(漢)나라 성제(成帝)때와 같이 병술일(丙戌日)에 풍사를 술지(戌地)3330)에서 제사지내고, 기축일(己丑日)에 우사를 축지(丑地)333 1)에서 제사지내되, 희생(犧牲)은 양(羊)과 돼지[豕]를 썼으며, 송(宋)나라의 황우(皇祐)3332)때에는 풍사단(風師壇)을 정하였는데 높이가 3척(尺)이고 둘레가 33보(步)였으며, 우사단(雨師壇),뇌사단(雷師壇)은 높이가 3척(尺)이고 방(方)이 1장(丈) 9척(尺)이었으며, 송(宋)나라 정화(政和)3333)때에는 풍사단,우사단,뇌사단의 높이가 3척인데 네 곳에 계단이 나와있고 아울러 한결같이 담장[壝]이 25보(步)이었으며, 풍사단은 넓이가 23보이고, 우사단은 넓이가 15보이며, 운사단은 고제(古制)가 없다’고 합니다.
세종 18년(1436)에 민의생(閔義生)이 상서(上書)하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근년에 자주 한재(旱災)가 있었는데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도 잘못된 정치로 한재(旱災)와 수재(水災)를 초래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천변(天變)중 큰 것은 요(堯)임금 이나 탕(湯)임금도 면하지못하는 것인데 어찌 인사(人事)의 모모(某某)한 것을 가지고 한재가 감응하였다고 지목하겠습니까?
그러나 풍운뢰우(風雲雷雨)는 직분이 우택(雨澤)을 담당하는데, 본조(本曹)에서 제사를 지낸 예는 고전(古典)에 합당하지않은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살피건대, 주(周)나라 제도에는 입춘후 축일(丑日)에 풍사(風師)를 동북(東北)쪽에서 제사지냈고, 입하후 신일(申日)에 우사(雨師)를 서남(西南)쪽에서 제사지냈는데, 주(周)나라 이후 당(唐)나라, 송나라에서는 원조(元朝)에 이르기까지 풍사는 축지(丑地)에 제단을 쌓아 축일(丑日)에 제사지내고, 우사(雨師)는 신지(申地)3334)에 제단을 쌓아 신일(申日)에 제사지냈으며, 제사지내는 방법도 일찍이 고친 바 없고, 우리나라도 전조(前朝) 3335)로부터 국초(國初)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산천단(山川壇)은〈명(明)나라〉의 홍무(洪武)3년3336)에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도사(道士) 서사호(徐思昊)를 파견하여 제단을 송도(松都)3337) 남문(南門)밖에 설치하고 제사(祭祀)를 지내고 비(碑)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 ‘태화악신(太華岳神)및 제산지신(諸山之神),대남해신(大南海神) 및 제수지신(諸水之神)’이라하였고, 풍운뢰우(風雲雷雨),성황지신(城隍之神)에는 미치지못하였기 때문에,‘산천단’이라 하였고, 언제부터 풍운뢰우,성황을 합하여 제사지냈는지는 알지못하겠습니다.
이것은 곧 홍무예제(洪武禮制)중 주(州),현(縣)의 의식(儀式)이며 번왕(藩王)의 할 일이 아니므로, 그 뒤에는 풍운뢰우의 방위(方位)와 산천단(山川壇) 두 곳에 아울러 제사하고 폐지하지 않았는데, 신사년3338) 태종조(太宗朝)에 음사(淫祀)3339)를 혁파하라는 명이 있을 때에 첩제(疊祭)3340)를 의논하다가 마침내 방위(方位)에 대한 제사를 폐지하였습니다.
정현(鄭玄)3341)이 말하기를,‘풍사를 축지(丑地)에 제사하는 것은 방면(方面)을 택하기 때문이다’고 하였은 즉, 고인(古人)이 풍운뢰우를 제사함에 제단을 쌓되 방위가 있고 제사를 지냄에 날짜가 정해져있었으니, 어찌 뜻이 없었겠습니까?
신이 정미년3342)에 한재(旱災)로 인하여 구언(求言)3343)하였을 때 이렇게 상서하고, 상정소(詳定所)에 계하(啓下)하였으나, 의논이 분분하다가 끝내는 당시 왕의 제도라고 해서 고치지아니하였습니다. 지금 한재를 당하여 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 삼가 다음에 열거합니다.
1. 의논(議論)하는 자들은 말하기를,‘풍운뢰우(風雲雷雨)를 산천단(山川壇)에 합제함은 당시 왕의 제도이므로 고칠 수가 없다’고 하나,
신(臣)의 우견(愚見)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홍무(洪武) 때의 예제(禮制)에는 사직(社稷)에 배향(配享)이 없으나, 본조(本朝)에서는 국사(國社)에 후토신(后土神)을 배향하고 국직(國稷)에 후직신(后稷神)을 배향하였습니다.
또 홍무때의 예제에는 선농제(先農祭)3344),선잠제(先蠶祭)3345),우사(雩祀)3346),영성제(靈星祭)3347),노인성제(老人星祭)3348),선목제(先牧祭)3349),마조제(馬祖祭)3350),마사제(馬社祭)3351)등이 없으나, 본조(本朝)에서는 아울러 모두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유독 풍운뢰우(風雲雷雨)는 당시 왕의 제도라 하여 방위(方位)의 제사를 행하지않으니, 미편(未便)한 듯합니다.
홍무(洪武)18년3352)에 태조황제(太祖皇帝)의 성지(聖旨)내에 의식은 본속(本俗)의 법시구장(法寺舊章)을 따르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친왕구장(親王九章)3353)의 복식을 하사하였으니, 하필 홍무의 예제(禮制)중 주(州),현(縣)의 의식(儀式)을 예(例)로 삼아 준수할 것입니까?
1.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풍운뢰우를 이미 산천단에 제사하고 또 방위에 제사하면 제사가 겹치므로, 신(神)을 번독(煩瀆)하게 한다’라고 하였으나, 신의 우견으로써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직단(稷壇)에 후직(后稷)을 배향하고, 우사단(雩祀壇)에는 후토(后土), 후직(后稷)을 배향하며, 선농제(先農祭)에는 후직(后稷)을 배향하고, 산천(山川)은 북교(北郊) 및 산천단(山川壇)에 제사하고, 또 각지 명산대천(名山大川)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제사하니, 제사가 겹치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1. 옛부터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은 한 단(壇)에 함께 모시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풍운뢰우(風雲雷雨)를 성황단(城隍壇)에 합하고 단(壇)이 마을 가운데에 있으니, 제사지낼 곳이 아닌데 제사를 지내면 신(神)이 흠향하지 않을 듯합니다.
또 북교(北郊),악(岳),해(海),독(瀆),산천에 대한 제사는 잔을 드린 후에 재배(再拜)하였는데, 지금의 산천단은 잔을 드린 후에 재배가 없고, 또 천신은 폐백[幣]과 축(祝)을 요대(燎臺)에서 태우고 지신은 폐백과 축을 예감(瘞坎)에 묻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산천단의 제사는 끝난 뒤에 폐백과 축을 모두 태워버리니,
또한 옳지 못합니다.
1. 옛사람은 비를 근심하면 폐사(廢祀)를 수리하는데, 본조(本朝)에서는 기우(祈雨)가 극도에 이르면 마침내는 원단(圓壇)에 이르는데도 오히려 또한 수리하지 아니하니, 풍운뢰우의 방위(方位)제사는 예전(禮典)에서 궐(闕)한 듯합니다.
한나라의 대사(大事)는 제사(祭祀)와 병융(兵戎)에 있으므로 가벼이 할 수가 없습니다.
무릇 제향(祭享)은 오로지 정결(精潔)을 위주로 하는데, 지금 산천단을 보니 사면(四面)의 담장이 모두 무너져 금지하고 제한함이 없어서 소나 양,개,돼지가 들어가 더럽혀놓았는데, 기도(祈禱)한다는 통보가 있어야 갑자기 수리하여 깨끗하게 하니, 신을 공경하는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담장의 울타리 난간을 옛 제도에 의거하여 미리 수리해서 엄숙하고 청결하게 해두었다가 때에 따라 제사를 지낸다면 격향(格享)의 이치가 있을 것입니다.
신(臣) 등이 역대(歷代)를 상고하건대, 풍사(風師),운사(雲師)를 제사지내는 날짜와 방위(方位)가 각기 틀리므로 본받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홍무(洪武)의 예제(禮制)도 또한 주(州),현(縣)의 제도이며 제사(諸司)의 직장(職掌)및《황명일통지(皇明一統志) 》에 기록된 황성단묘(皇城壇廟)의 제도에는 모두 풍운뢰우를 한 단(壇)에 함께 제사지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조종(祖宗)때로부터 당시 왕의 제도에 의거하여 시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3329]풍운뢰우(風雲雷雨)의 신(神):바람,구름,우레,비를 맡아 보던 천신(天神). 고려,조선조 때 봄철과 가을철에 단(壇)을 쌓고 제사를 지냈는데, 서울 남교(南郊) 청파역(靑坡驛) 근방에 있었음. 註3330]술지(戌地): 서북쪽註 3331]축지(丑地): 북동쪽 註3332]황우(皇祐): 인종(仁宗)의 연호. 1049년∼1053년 註3333]정화(政和): 휘종(徽宗)의 연호. 1111년∼1117년註 3334]신지(申地) : 서남서쪽 註3335]전조(前朝): 고려. 註3336]홍무(洪武) 3년: 1370 공민왕 19년註3337]송도(松都): 개성 註3338]신사년: 1401 태종원년 註 3339]음사(淫祀): 사신(邪神)의 제사. 註 340]첩제(疊祭): 겹쳐지내는 제사 註3341]정현(鄭玄): 후한 말의 훈고학자. 註 3342]정미년: 1427 세종 9년. 註3343]구언(求言): 나라에 재앙(災殃)이 들 때 임금이 바른 말을 널리 구하던 일. 註 3344]선농제(先農祭): 신농씨(神農氏),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함. 註3345]선잠제(先蠶祭):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함 註 3346]우사(雩祀): 기우제(祈雨祭). 註3347]영성제(靈星祭): 농업신(農業神)에게 제사함 註3348]노인성제(老人星祭): 남극(南極)노인에게 제사함 註3349]선목제(先牧祭): 말을 처음 기른 선목에게 제사함 註3350]마조제(馬祖祭): 말의 수호신인 방성(房星)에게 제사함 註3351]마사제(馬社祭): 승마술을 시작한 마사에게 제사함 註3352]홍무(洪武) 18년: 1385 우왕 11년 註3353]친왕구장(親王九章): 임금 의복의 9가지 모양.
○禮曹啓: “今承傳敎: ‘輪對者有言: 「人事感於下, 則天變應於上, 此感彼應, 理之常也, 近年以來, 水旱風災之變屢作, 未知致此者爲某事所感也。 臣聞我朝在昔, 風雲雷雨之神, 各設壇壝以祭之, 中朝禮官徐士英到國, 敎之以風雲雷雨, 合祭一壇, 自後水旱風災, 相繼而作。 其實以鎭禳, 我國之術也, 諺傳久矣。 念我世宗大王朝禮曹判書閔義生, 將此意上言, 未蒙允兪。 臣願令禮曹, 考諸中朝, 風師、雨師、雲師、雷師, 合祭一壇與否, 兼考歷代別設四壇, 各祭與否, 若別壇各祭, 則姑從別祭之典試驗。」 本曹據此, 其風雲雷雨, 別設四壇古制, 及閔義生上言辭緣, 移文藝文館相考。 本館牒呈內: ‘月令立春後丑日, 祭風師於國城東北, 立夏後申日, 祀雨師於國城西南, 唐眺漢成帝時, 以丙戌日祀風師於戌地, 以己丑日祀雨師於丑地, 牲用羊豕, 宋皇祐, 定風師壇, 高三尺周三十三步, 雨師壇、雷師壇, 高三尺ㆍ方一丈九尺, 宋政和, 風、雨、雷師壇, 高三尺, 四出階, 竝一壝二十五步, 風師壇廣二十三步, 雨師壇廣十五步, 雲師壇則無古制。’ 世宗十八年, 閔義生上書曰: ‘竊惟近年頻有旱災, 臣反復思之, 未聞闕政可召旱災、水旱, 天變之大者, 堯、湯之所不免, 豈可以人事之某某, 指以爲旱災之應, 然風雲雷雨, 職司雨澤, 本朝致祀之禮, 恐未合於古典。’ 臣謹按, 周制立春後丑日, 祭風師於東北, 立夏後申日, 祭雨師於西南, 自周以後迄于唐、宋、以至元朝, 風師則丑地築壇, 丑日祭之, 雨師則申地築壇, 申日祭之, 祭之之法, 未嘗有改, 吾東方, 自前朝以至國初, 亦如之。 山川壇則洪武三年太祖高皇帝遣道士徐思昊, 設壇於松都南門之外, 致祭立碑, 其碑文曰: ‘大華岳神及諸山之神、大南海神及諸水之神,’ 無及於風雲雷雨、城隍之神, 故曰山川壇, 不知何時以風雲雷雨、城隍, 合而祭之。 此則《洪武禮制》州縣儀, 非藩王事, 自是厥後, 風雲雷雨方位及山川壇兩處, 竝行不廢, 歲在辛巳太宗朝, 命革淫祀之時, 議以疊祭, 遂廢方位之祭。 鄭玄曰: ‘祭風師於丑地, 就方面也’, 則古人於風雲雷雨之祭, 築壇有方, 致祭有日, 豈無其意歟, 臣於丁未, 因旱求言之時, 以此上書, 啓下詳定所, 議論紛紜, 終以時王之制不改。 今當旱災, 不敢含默, 謹列于後。 一, 議者曰: ‘風雲雷雨合祭於山川壇時王之制不可改’, 臣愚以謂不然。 《洪武禮制》, 於社稷, 無配位, 本朝則於國社, 配以后土, 國稷配以后稷。 又於《洪武禮制》, 無先農、先蠶、雩祀、靈星、老人星、先牧、馬祖、馬社等祭, 本朝則竝皆設壇致祭, 獨於風雲雷雨, 指以爲時王之制, 不行方位之祭, 恐爲未便。 洪武十八年, 太祖皇帝聖旨內, ‘儀從本俗法寺舊章’, 其後賜以親王九章之服, 何必以《洪武禮制》州縣儀, 爲例遵守乎, 一。 議者曰, 風雲雷雨, 旣祭於山川壇, 又祭於方, 則疊祭煩瀆’, 臣愚以謂不然。 本朝於稷壇配以后稷, 雩祀壇配以后土ㆍ后稷, 先農祭配以后稷, 山川則北郊及山川壇, 又於各處名山大川, 遣使致祭, 疊祭者非一矣。 一, 自古天神地祇, 未有雜處於一壇, 今以風雲雷雨, 合於城隍, 而壇在閭閻之中, 祭非其所, 恐神不享。 又北郊、岳、海、瀆、山川之祭, 獻爵後有再拜, 今山川壇, 獻爵後無再拜, 又天神, 則幣祝燒於燎臺, 地祇則幣祝, 埋於瘞坎禮也。 今山川壇祭畢後, 幣祝皆焚之, 亦爲未便。 一, 古人憫雨, 則修擧廢祀, 本朝於祈雨之極, 則終至圓壇, 尙且不擧, 風雲雷雨方位之祭, 恐爲闕典。 一國之大事, 在祀與戎, 不可忽也。 凡祭享, 專以精潔爲主, 今觀山川壇, 四面垣墻皆頹, 無有禁限, 牛、羊、犬、豕, 踐踏汚穢, 及其祈報, 卒然修淨, 恐非敬神之意。 今後垣壝欄, 依古制預先修治, 使之肅淸, 臨時致祭, 則庶有格享之理。 臣等參詳歷代祭風ㆍ雲師日及方位各異, 非徒取法爲難, 《洪武禮制》, 則亦是州縣之制, 若諸司職掌及《皇明一統志》記皇城壇廟之制, 而竝以風雲雷雨, 合祭一壇。 我朝自祖宗時, 依時(三)〔王〕之制, 行之已久, 依舊例施行。” 從之。
성종 39권, 5년(1474 갑오/명성화(成化) 10년) 2월 19일(갑술) 1번째기사
선농제의 향축을 전하다
친히 선농제(先農祭)3748)의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註3748]선농제(先農祭): 려,조선조때 동교(東郊)의 제단에서 신농씨(神農氏),후직씨(后稷氏)에게 농사가 잘되게해달라고 빌던 제사. 매년 경칩(驚蟄)후 첫 해일(亥日)에 행하였음.
○甲戌/親傳先農祭香祝。
성종 51권, 6년(1475 을미/명성화(成化)11년) 1월 25일(을해) 3번째기사
선농에 제향하는 의식
향선농의(享先農儀)4916)는 이러하였다.
제향전 6일에 예조(禮曹)에서 계문(啓聞)하여 재계(齋戒)하기를 청하면,
전하(殿下)께서 3일동안 별전(別殿)에서 산재(散齋)4917)하고, 2일동안 치재(致齋)4918)하는데, 1일은 정전(正殿)에서 1일은 재궁(齋宮)에서 한다.
제향 전 3일에 적전령(籍田令)이 청상(靑箱)으로써 구곡(九穀)의 종자와 종륙(種稑)4919)의 종자를 받들어 내전(內殿)에 올리고, 전 2일에 왕비(王妃)가 내명부(內命婦)를 거느리고 전하에게 바치면, 다음날에 적전령(籍田令)에게 주어서 경적하는 일을 기다리게 한다.
진설(陳設)은 제향전 3일에 전설사(典設司)에서 대차(大次)를 동쪽 유문(壝門)밖에다 길북쪽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시신(侍臣)의 막차(幕次)를 대차(大次)의 뒤에다 남향하여 설치하는데, 제향관(諸享官)의 막차는 재방(齋坊)의 안에, 배향관(陪享官)의 막차는 그 앞에다 땅의 형편에 따라서 모두 북향하여 설치한다.
2일전에 전사관(典祀官)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단(壇)의 내외(內外)를 소제하고, 전설사(典設司)는 찬만(饌幔)을 동쪽 유문(壝門) 밖에 설치한다.
1일전에 전악(典樂)은 그 소속을 거느리고 등가악(登歌樂)을 단(壇) 위에다 남쪽으로 가까이 설치하고, 헌가(軒架)를 단 아래에 설치하는데 모두 북향하게 한다.
전사관(典祀官)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제신농씨(帝神農氏)의 신좌(神座)를 단위의 북방(北方)에다 남향하여 설치하고, 후직씨(后稷氏)의 신좌(神座)를 단위의 동방(東方)에다 서향하여 설치하는데, 자리[席]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집례(執禮)는 전하의 위판(位版)을 단(壇)아래 동남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음복위(飮福位)를 단(壇)위 남계(南階)의 서쪽에다 북향하여 설치한다. 찬자(贊者)가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진폐작주관(進幣爵酒官), 천조관(薦俎官), 전폐작주관(奠幣爵酒官)의 자리를 전하의 위판(位版)뒤 남쪽 가까이 서향하여 설치하고, 집사자(執事者)는 그 뒤에 위치하게 하는데, 매 품등(品等)마다 자리를 달리하고 모두 겹줄로써 향하게 하되 북쪽을 위로 한다.
감찰(監察)의 자리는 둘을 단(壇)아래에서 남쪽으로 가까이 설치하되 동서(東西)로 상향(相向)하게 하고, 집례(執禮)의 자리는 둘인데, 하나는 단(壇)위에, 하나는 단(壇)아래에 있게 하되 모두 동쪽으로 가까이 서향하게 한다.
찬자(贊者),알자(謁者),찬인(贊引)은 단 아래 집례의 뒤에 있게 하되, 조금 남쪽으로 하여 서향하고, 북쪽을 위로 한다.
협률랑(協律郞)은 단위에 서쪽으로 가까이 동향하여 위치하고, 전악(典樂)은 헌현(軒懸)의 북쪽에 북향하여 위치한다.
배향관(陪享官)의 자리를 설치하는데, 문관(文官)1품 이하는 동문(東門)안의 길남쪽에 있게 하되, 매 품등마다 위치를 달리하고 서향하여 북쪽을 위로 하며, 종친(宗親)과 무관(武官)1품 이하는 서문(西門)안에 문관과 마주 대하게 하되, 모두 매 품등마다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써 동향하여 북쪽을 위로 한다.
문외위(門外位)를 설치하는데 제향관(諸享官)은 동문(東門)밖 길남쪽에 자리한다.
문관1품 이하는 향관(享官)의 동쪽에서 조금 남쪽에 품등마다 자리를 달리 하고 모두 겹줄로써 북향하되 서쪽을 위로 하고, 종친과 무관1품 이하는 서문(西門)밖 길남쪽에 모두 품등마다 자리를 달리하고 겹줄로써 북향하게 하되, 동쪽을 위로 한다.
망예위(望瘞位)를 예감(瘞坎)의 남쪽에 설치하는데, 아헌관은 남쪽에 있어 북향하고, 집례(執禮),찬자(贊者),대축(大祝)은 동쪽에 있게하되 모두 겹줄로써 서향하고 북쪽을 위로 한다.
봉상시(奉常寺)에서 전하(殿下)의 경적위(耕籍位)를 남유문(南壝門)밖에 설치하는데, 동남쪽 10보(步)되는 곳에 남향하여 설치하되 땅의 형편에 따라 적당하게 한다.
전설사(典設司)에서 악좌(幄座)를 관경대(觀耕臺)위에다 남향하여 설치하고, 소차(小次)를 서계(西階) 아래에 조금 북쪽으로 남향하여 설치한다.
봉상시에서 전하(殿下)의 위판(位版)을 경적소(耕籍所)에 남향하여 설치하는데, 시경위(侍耕位)는 동계(東階), 서계(西階)아래에 있게 하고 북쪽을 위로 한다.
좌통례(左通禮),우통례(右通禮),알자(謁者),찬의(贊儀)의 자리는 동계(東階)에 있게하고, 또 찬의(贊儀)의 자리는 서계(西階)에 있게하되, 상향(相向)하여 북쪽을 위로 한다.
종경(從耕)하는 종친(宗親), 재신(宰臣)의 자리는 동남편에 있고, 제판서(諸判書)와 대간(臺諫)의 자리는 그 남쪽에 있게 하되, 모두 서향하고 북쪽을 위로 한다.
서인(庶人)의 자리는 그 남쪽에 조금 동쪽으로 10보(步)밖에 있고, 기민(耆民)의 배경위(陪耕位)는 또 그 남쪽에 있게하되, 모두 서향한다.
친경(親耕)할 쟁기의 자리[耒席]는 종친(宗親)의 북쪽에 조금 서쪽으로 남향하여 설치하고, 사복시(司僕寺)에서 친경(親耕)할 소[牛]는 친경위(親耕位)의 서쪽에서 조금 북쪽인 곳에 둔다.
전악(典樂)이 등가악(登歌樂)을 관경대(觀耕臺)위에 설치하고, 헌가(軒架)를 서인(庶人)의 경위(耕位) 서남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북향하게 한다.
봉상시(奉常寺)에서 경적사(耕籍使)의 자리를 친경위(親耕位)의 동쪽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봉상시정(奉常寺正)은 경적사의 동남쪽에 있고, 적전령(籍田令)은 봉상시정(奉常寺正)의 남쪽에 조금 뒤로 물러서 있는데, 모두 서향하고 북쪽을 위로 한다.
청상(靑箱)을 받든 관원은 그 뒤에 위치하고, 봉상부정(奉常副正)은 서인(庶人)이 위치한 앞에 위치한다.
주부(主簿)는 봉상부정의 남쪽에 조금 뒤로 물러 자리하는데, 모두 서향하고 북쪽을 위로 한다.
사복시정(司僕寺正)은 친경(親耕)할 소[牛]의 동쪽에 조금 앞으로 남향하여 자리하고, 기내(畿內)의 읍령(邑令)과 제현령(諸縣令)은 서인의 자리 동쪽에 서향하여 위치한다.
종경관(從耕官)은 친경위(親耕位)의 동쪽 분삽(畚鍤)4920)을 잡은 자의 서쪽에서 조금 북서쪽 위에 자리하는데 서쪽을 위로 한다.
또 종경(從耕)할 쟁기[耒耜]와 소[牛]를 각기 그 자리 앞에다 설치한다.
백관(百官)의 서립(序立)은 제집사(諸執事)의 뒤 조금 남쪽으로 자리한다.
제향하는 날 아직 행사(行事)하기 전에, 전사관(典祀官)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축판(祝版) 각 하나씩을 신위(神位)의 오른편에 올려놓고, 폐비(幣篚) 각 하나씩을 준소(尊所)에 진설하고, 향로(香爐), 향합(香合)과 초[燭]를 신위앞에 진설한다.
다음에 제기(祭器)를 설치하는데, 매위(每位)에 변(籩) 10개가 왼편에 있게 해서 세 줄로 하되, 오른편을 위로 한다.
【첫째 줄에는 형염(形鹽)을 앞에 놓고, 어수(魚鱐),건조(乾棗),율황(栗黃)은 다음에 놓으며, 둘째 줄에는 진자(榛子)를 앞에 놓고, 능인(菱仁),감인(芡仁)은 다음에 놓으며, 세째 줄에는 녹포(鹿脯)를 앞에 놓고, 백병(白餠),흑병(黑餠)은 다음에 놓는다.】
두(豆) 10개는 오른편에 있게 해서 세 줄로 하되, 왼편을 위로 한다.
【첫째 줄에는 구저(韮菹)를 앞에 놓고, 탐해(醓醢),청저(菁菹),녹해(鹿醢)는 다음에 놓으며, 둘째 줄에는 근저(芹菹)를 앞에 놓고, 토해(兎醢),순저(筍菹)는 다음에 놓으며, 세째 줄에는 어해(魚醢)를 앞에 놓고, 비석(脾析),돈박(豚拍)은 다음에 놓는다.】
조(俎)가 3개인데, 둘은 변(籩) 앞에 있고, 하나는 두(豆) 앞에 있다.
【변 앞의 조(俎) 하나에는 우성(牛腥)을 채우고, 하나에는 양성칠체(羊腥七體)를 채운다. 칠체(七體)는 양비(兩髀),양협(兩脅)과 등심[背]인데, 비(髀)는 양단(兩端)에 놓고, 견(肩)과 협(脅)은 다음에 놓으며, 등심[背]은 중앙에 놓는다. 두(豆) 앞의 조(俎)에는 시성 칠체(豕腥七體)를 담는다.】
두(豆) 오른편에는 조(俎)가 3개이다.【하나는 소[牛]의 익힌 장(腸),위(胃),폐(肺)를 담고, 하나는 양(羊)의 익힌 장,위,폐를 담고, 하나는 돼지[豕]의 익힌 살고기[膚]를 담는데, 돼지를 앞에 놓고, 양,소는 다음에 놓는다.】
보(簠),궤(簋)가 각각 2개로서 변(籩),두(豆) 사이에 놓는데, 보를 왼편에 놓고, 궤를 오른편에 놓는다.【보(簠)에는 도(稻),양(梁)을 담는데, 양은 도 앞에 놓으며, 궤(簋)에는 서(黍),직(稷)을 담는데, 직은 서 앞에 놓는다.】
등(㽅),형(鉶)이 각각 3개로서 보,궤 뒤에 놓는데, 형은 앞에 놓고, 등은 그 다음에 놓는다.【등(㽅)에는 대갱(大羹)을 담고, 형(鉶)에는 화갱(和羹)을 담는데, 모활(芼滑)을 더한다.】
작(爵)은 3개로서 보,궤 앞에 놓는다.【각기 점(坫)이 있다.】
정배위(正配位)에 각기 희준(犧尊) 2개,【하나는 명수(明水)를 담고, 하나는 예제(醴齊)를 담는다.】상준(象尊) 2개,【하나는 명수(明水)를 담고, 하나는 앙제(盎齊)를 담는다.】 산뢰(山罍) 2개를 설치하는데,【하나는 현주(玄酒)를 담고, 하나는 청주(淸週)를 담는다.】세 줄로 하고,【첫째 줄에는 희준이요, 둘째 줄에는 상준이요, 세째 줄에는 산뢰이다.】 모두 작(勺)과 멱(羃)을 얹어 놓되, 단(壇) 위의 동남쪽 모퉁이에 놓게 하되, 북향하게 하는데 서쪽을 위로 한다.【배위(配位)의 준(尊),뇌(罍)는 아울러 정위(正位)의 준,뇌 동쪽에 있다.】
복주작(福酒爵)과 조육조(胙肉俎) 각 하나를 정위(正位)의 준소(尊所)에 설치하고, 또 정위(正位)의 조(俎) 하나를 찬만(饌幔)안에 설치하고, 어세(御洗)를 남계(南階)의 동남쪽에 북향하여 설치한다.
아헌(亞獻),종헌(終獻)의 세(洗)를 또 동남쪽에 모두 북향하여 뇌(罍)를 갖추되, 세(洗)의 동쪽에 놓게 하여 작(勺)을 얹어 놓고, 비(篚)는 세(洗) 서남쪽에 늘어 놓되, 수건[巾]을 담아 놓는다.
제집사(諸執事)의 관세(盥洗)를 아헌,종헌의 세(洗) 동남쪽에 북향하여 설치하고, 집준자(執尊者), 집뢰자(執罍者), 집비자(執篚者), 집멱자(執羃者)는 준,뇌,비,멱의 뒤에 자리하게 한다.
註4916]향선농의(享先農儀): 선농(先農)에 제향하는 의식. 註 4917]산재(散齋): 제사가 있기 전에 행하는 재계(齋戒)의 하나. 치재(致齋)하기 전에 4일 내지 2일 정도 조상(弔喪),문병(問病)을 하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고 형살(刑殺)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음 註4918]치재(致齋): 제사를 지내기 바로 앞서 제소(祭所)에서 행하던 재계(齋戒). 산재(散齋)한 뒤에 하는 재계로서, 제관(祭官)이나 집사관(執事官)들은 모두 제소(祭所)에서 제향에 관한 일만을 맡아 보았음 註4919]종륙(種稑) : 올벼. 註4920]분삽(畚鍤) : 삼태기와 삽
○享先農儀。 前享六日, 禮曹啓請齋戒, 殿下散齋三日於別殿, 致齋二日, 一日於正殿, 一日於齋宮。 前享三日, 籍田令以靑箱, 奉九穀種稑之種進內, 前二日, 王妃率內命婦, 獻于殿下, 次日授籍田令, 以待耕事。 陳設, 前享三日, 典設司設大次於東壝門外道北南向, 設侍臣次於大次之後南向, 諸享官次於齋坊之內, 陪享官次於其前, 隨地之宜俱北向。 前二日, 典祀官帥其屬, 掃除壇之內外, 典設司設饌幔於東壝門外。 前一日, 典樂帥其屬, 設登歌之樂於壇上近南, 軒架於壇下, 俱北向。 典祀官帥其屬, 設帝神農氏神座於壇上北方南向, 后稷氏神座於壇上東方西向, 席皆以莞。 執禮設殿下位版於壇下東南西向, 飮福位於壇上南陛之西北向。 贊者設亞獻官、終獻官、進幣爵酒官、薦俎官、奠幣爵酒官位於殿下位版之後近南西向, 執事者位於其後, 每等異位, 重行西向北上。 監察位二於壇下近南, 東西相向, 執禮位二, 一於壇上, 一於壇下, 俱近東西向。 贊者、謁者、贊引在壇下執禮之後, 稍南西向北上。 協律郞位於壇上近選向, 典樂位於軒懸之北北向。 設陪享官位, 文官一品以下於東門之內道南, 每等異位, 重行西向北上, 宗親及武官一品以下, 於西門之內當文官, 俱每等異位, 重行東向北上, 設門外位, 諸享官於東門之外道南。 文官一品以下於享官之東少南, 每等異位, 重行北向西上, 宗親及武官一品以下於西門之外道南, 俱每等異位, 重行北向東上。 設望瘞位於瘞坎之南, 亞獻官在南北向, 執禮、贊者、大祝吊, 重行西向北上。 奉常寺設殿下耕籍位於南壝門外, 東南十步所南向隨地之宜。 典設司設幄座於觀耕臺上南向, 小次於西陛下稍北南向。 奉常寺設殿下位版於耕籍所南向, 侍耕位於東西階下北上。 左ㆍ右通禮、謁者、贊儀位於東階下, 又贊儀位於西階下, 相向北上。 從耕宗親宰臣位吊南, 諸判書臺諫位在其南, 皆西向北上。 庶人位在其南少東十步外, 耆民陪耕位又在其南皆西向。 設親耕耒席於宗親之北稍西南向, 司僕寺設親耕牛於親耕位之西稍北。 典樂設登歌之樂於觀耕臺上, 軒架於庶人耕位西南, 俱北向。 奉常寺設耕籍使位於親耕位之東南向, 奉常寺正在耕籍使東南, 籍田令在奉常寺正之南少退, 俱西向北上。 奉靑箱官位於其後, 奉常副正位於庶人位之前。 主簿位於副正之南少退, 皆西向北上。 司僕寺正位於親耕牛之東稍前南向, 畿內邑令及諸縣令位於庶人位之東西向。 從耕官位於親耕位之東, 執畚鍤者之西稍北西上。 又設從耕耒耜及牛, 各於其位之前。 百官序立位於諸執事之後稍南。 享日未行事前, 典祀官帥其屬入, 奠祝版各一於神位之右, 陳幣篚各一於尊所, 設香爐ㆍ香合幷燭於神位前, 次設祭器, 每位籩十在左, 爲三行右上【第一行, 形鹽在前, 魚鱐ㆍ乾棗ㆍ栗黃次之, 第二行, 榛子在前, 菱仁、芡仁次之, 第三行, 鹿脯在前, 白餠、黑餠次之。】 豆十在右, 爲三行左上【第一行, 韭菹在前, 醓醢、菁菹、鹿醢次之, 第二行, 芹菹在前, 兎醢、荀菹次之, 第三行, 魚醢在前, 髀析、豚拍次之。】 俎三, 二在籩前, 一蹟前。【籩前俎一實牛腥, 一實羊腥七體, 兩髀、兩肩、兩脅幷脊, 而脾在兩端, 肩、脅次之, 脊在中。 豆前俎實以豕腥七體。】 豆右之俎三【一實牛熟腸、胃、肺, 一實羊熟腸、胃、肺, 一實豕熟膚, 豕在前, 羊、牛次之。】 簠、簋各二, 在籩、豆間, 簠在左, 簋在右【簠實已、梁, 梁滓前, 簋實以黍、稷, 稷在黍前。】 㽅鉶各三, 在簠ㆍ簋後, 鉶居前, 㽅次之。【㽅實以大羹, 鉶實以和羹, 加芼滑。】 爵三, 在簠、簋前。【各有坫。】 正配位各犧尊二,【一實明水, 一實醴齊。】象尊二,【一實明水, 一實盎齊。】 山罍二,【一實玄酒, 一實淸酒。】 爲三行,【第一行犧尊, 第二行象尊, 第三行山罍。】 皆加勺ㆍ冪, 在壇上東南隅, 北向西上。【配位尊、罍竝在正位尊ㆍ罍之東。】 設福酒爵、胙肉俎, 各一於正位尊所, 又設正位俎一於饌幔內, 設御洗於南陛東南北向。 亞、終獻洗, 又於東南, 俱北向俱罍, 在洗東加勺, 篚在洗西南, 肆實以巾。 諸執事盥洗於亞、終獻洗東南北向, 執尊、罍、篚、冪者位於尊罍篚冪之後。
성종 51권, 6년(1475 을미/명성화(成化) 11년) 1월 25일(을해) 6번째기사
전폐의 의례
전폐(奠幣)는 이러하였다.
제향일(祭享日) 축시(丑時)전 5각(刻)에, 전사관(典祀官)이 들어와 찬구(饌具)를 담고 나서, 물러가 막차(幕次)로 나아가 그 복색(服色)을 갖추고 올라와서 제신농씨(帝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판(神位版)을 자리[座]에 진설한다.
찬인(贊引)이 감찰(監察)을 인도하여 동계로 올라가서 단(壇)의 상하(上下)를 조용히 살펴보고, 의식과 같지않은 것을 규찰(糾察)하고 돌아나온다.
전(前) 3각(刻)에 제향관(諸享官)과 배향관(陪享官)이 각기 그 복색을 갖추면, 인의(引儀)가 배향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모두 문외위(門外位)에 나아가고, 집례(執禮)가 찬자(贊者), 알자(謁者), 찬인(贊引)을 거느리고 동문(東門)으로 들어와서 먼저 단(壇)의 남쪽, 악현(樂懸)의 북쪽 배위(拜位)로 나아가 겹줄로 북향하고 서쪽을 위로 해서 사배(四拜)한다.
이를 마치면 각기 자리로 나아간다.
전악(典樂)이 공인(工人)과 이무(二舞)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자리로 나아간다. 인의(引儀)가 배향관(陪享官)을 나누어 인도하여 들어와서 자리로 나아가고, 알자(謁者)가 아헌관, 종헌관을 인도하고, 찬인(贊人)이 각기 제향관(諸享官)을 인도하여 동문(東門)밖의 자리로 나아간다.
좌통례(左通禮)가 대차(大次)앞에 꿇어앉아 중엄(中嚴)4922)을 계청(啓請)하면, 찬인이 감찰(監察), 전사관(典祀官), 대축(大祝), 축사(祝史), 재랑(齋郞), 협률랑(協律郞), 봉조관(奉俎官)과 집준자(執尊者), 집뢰자(執罍者),집비자(執篚者), 집멱자(執羃者)를 인도해 들어와서 악현의 북쪽 배위(拜位)로 나아가, 겹줄로 북향하고 서쪽을 위로 해서 입정(立定)한다.
집례가“사배(四拜)하라”하면, 찬자가 전창(傳唱)하여, 감찰 이하가 모두 네 번 절한다. 이를 마치면, 찬인이 감찰을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가고,
제집사(諸執寺)를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서 관세(盥帨)하게 하고, 이를 마치면 각기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전(前) 1각에 알자가 아헌관, 종헌관을 인도하고, 찬인이 진폐작주관(進幣爵酒官), 천조관(薦俎官), 전폐작주관(奠幣爵酒官)을 인도하여 들어와서 자리로 나아가고, 찬인이 재랑(齋郞)을 인도하여 작세위(爵洗位)로 나아가서 작을 씻고 작을 닦아 이를 마치면, 비(篚)에 넣어서 받들고 준소(尊所)로 나아가 점(坫)위에 놓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4923)을 아뢰면, 전하(殿下)가 곤면(袞冕)4924)을 갖추고 나오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는 보통때의 의식과 같다.
예의사(禮儀使)가 전하를 인도하여 동문(東門)밖에 이르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서 규(圭)를 올린다.
예의사가 규를 잡기를 계청하고,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정문(正門)으로 들어가 판위(版位)에 나아가서 서향하고 서면, 집례(執禮)가“예의사는 행사(行事)하기를 계청하라”하여, 예의사가 꿇어앉아“유사(有司)가 삼가 준비되었으니, 행사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아뢰고, 협률랑이 꿇어앉아 부복(俯伏)하였다가 휘(麾)를 들어 일으키면, 악공이 축(柷)을 쳐서, 헌가(軒架)에서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추는데,
이성(二成)을 연주하고 그친다.
집례가“사배(四拜)하라”하면, 예의사가 사배(四拜)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네번 절하고,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네번 절한다.
삼성(三成)을 연주하면, 협률랑이 휘(麾)를 눕히고, 악공이 어(敔)를 긁으면 악(樂)이 그친다.
근시(近侍)가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서 관세(盥帨)하고 나서 돌아와 시립(侍立)하면, 알자가 진폐작주관(進幣爵酒官)과 전폐작주관(奠幣爵酒官)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 관세하고 나서, 남계(南階)로 올라가 준소(尊所)로 나아가서 북향하여 선다.
집례가“예의사는 전하를 인도하여 전폐례(奠幣禮)를 행하라”하여,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하고, 규(圭)를 꽂기를 계청한다.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대야[匜]를 취(取)하여 가지고 일어나서 물을 붓고, 또 근시가 꿇어앉아 반(槃)을 가지고 물을 받는다.
전하가 손을 씻으면, 근시가 꿇어앉아서 비(篚)에서 수건을 취하여 올린다. 전하가 손을 닦고 나면, 근시가 수건을 받아서 비(篚)에다 놓는다.
예의사가 규(圭)를 잡기를 계청하고, 전하를 인도하여 남계(南階)로 올라가면, 등가(登歌)에서 숙안지악(肅安之樂)을 연주하고,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춘다.
제신농씨신위(帝神農氏神位)앞으로 나아가 북향하고 서면, 예의사가 꿇어앉아서 규(圭)를 꽂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꿇어앉아 규를 꽂게 되면,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꿇어앉는다.
근시한 사람이 향합(香合)을 받들고, 한 사람이 향로(香爐)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올린다.
예의사가 세번 상향(上香)하기를 계청하면, 근시가 향로를 신위 앞에 올려놓는다. 근시가 폐비(幣篚)를 진폐 작주관에게 주어서 진폐작주관이 폐백을 받들고 꿇어앉아서 올리면, 예의사가 집폐헌폐(執幣獻幣)하기를 계청하여, 폐백을 전폐 작주관(奠幣爵酒官)에게 주어서 신위 앞에 드린다.
예의사가 규를 잡고 부복(俯伏)하고 일어나 평신(平身)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잡고 부복하고 일어나 평신하고,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부복하고 일어나 평신한다.
전하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앞에 나아가서 동향하여 상향(上香)하고 전폐(奠幣)하기를 모두 위의 의식과 같이 한다.
이를 마치면 등가(登歌)가 그친다.
진폐작주관,전폐작주관이 모두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남계(南階)로 내려와서 제자리에 돌아간다.
등가(登歌)가 그칠 때를 당하여, 여러 축사(祝史)가 각기 모혈반(毛血槃)을 받들고 차례로 들어서 각기 섬돌[陛]로 올라가서 신위 앞에 드린다.
註4922]중엄(中嚴): 바깥 준비가 다 되어 임금의 거둥을 알리는 일. 중엄이 울리면 임금은 곧 거둥하였음. 註4923]외판(外辦): 임금의 거둥 때 의장(儀仗) 호종(扈從)들을 제자리에 정돈시키는 일을 말함. 註4924]곤면(袞冕): 곤룡포와 면류관.
○奠幣。 享日丑前五刻, 典祀官入, 實饌具畢, 退就次, 服其服升, 設帝神農氏、后稷氏神位版於座。 贊引引監察, 升自東陛, 安視壇之上下, 糾察不如儀者, 還出。 前三刻, 諸享官及陪享官各服其服, 引儀分引陪享官, 俱就門外位, 執禮帥贊者、謁者、贊引, 入自東門, 先就壇南、懸北拜位, 重行北向, 西上四拜。 訖各就位。 典樂帥工人、二舞入就位。 引儀分引陪享官入就位, 謁者引亞獻官、終獻官, 贊引各引諸享官, 就東門外位。 左通禮就大次前, 跪啓請中嚴, 贊引引監察、典祀官、大祝、祝史、齋郞、協律郞、捧俎官、執尊、罍ㆍ篚ㆍ冪者, 入就懸北拜位, 重行北向, 西上立定。 執禮曰: “四拜。” 贊者傳唱, 監察以下皆四拜。 訖, 贊引引監察就位, 引諸執事, 詣盥洗位盥帨, 訖, 各就位。 前一刻, 謁者引亞獻官、終獻官, 贊引引進幣爵酒官、薦俎官、奠幣爵酒官, 入就位, 贊引引齋郞, 詣爵洗位, 洗爵拭爵訖, 置於篚, 捧詣尊所, 置於坫上。 左通禮跪啓外辦, 殿下具冕服以出, 繖扇、侍衛如常儀。 禮儀使導殿下, 至東門外, 近侍跪進圭。 禮儀使啓請執圭, 禮儀使導殿下, 入自正門, 詣版位西向立, 執禮曰: “禮儀使啓請行事。” 禮儀使跪啓: “有司謹具, 請行事。” 協律郞跪俯伏, 擧麾興, 工皷柷, 軒架作景安之樂, 烈文之舞作, 樂二成。 執禮曰: “四拜。” 禮儀使啓請四拜, 殿下四拜, 在位者皆四拜。 樂三成, 協律郞偃麾, 工戞敔, 樂止。 近侍詣盥洗位, 盥帨訖, 還侍位, 謁者引進幣爵酒官、奠幣爵酒官, 詣盥洗位, 盥帨訖, 升自南陛, 詣尊所, 北向立。 執禮曰: “禮儀使導殿下, 行奠幣禮。” 禮儀使導殿下, 詣盥洗位, 北向立, 啓請搢圭。 近侍跪取匜興沃水, 又近侍跪取槃承水。 殿下盥手, 近侍跪取巾於篚以進。 殿下帨手訖, 近侍受巾奠於篚。 禮儀使啓請執圭, 導殿下陞自南陛, 登歌作肅安之樂, 烈文之舞作。 詣帝神農氏神位前, 北向立, 禮儀使啓請跪搢圭, 殿下跪搢圭, 在位者皆跪。 近侍一人捧香合, 一人捧香爐跪進。 禮儀使啓請三上香, 近侍奠爐于神位前。 近侍以幣篚授進幣爵酒官, 進幣爵酒官捧幣跪進, 禮儀使啓請執幣獻幣, 以幣授奠幣爵酒官, 奠于神位前。 禮儀使啓請執圭俯伏興平身, 殿下執圭俯伏興平身, 在位者皆俯伏興平身。 殿下詣后稷氏神位前, 東向上香奠幣, 竝如上儀, 訖, 登歌止。 進幣爵酒官、奠幣爵酒官降陛復位, 禮儀使導殿下, 降自南陛復位。 當登歌止時, 諸祝史各捧毛血槃, 各由其陛升奠於神位前。
성종 51권, 6년(1475 을미/명성화(成化)11년) 1월 25일(을해) 7번째기사
궤향의 의례
궤향(饋享)은 이러하였다.
전하가 이미 올라가서 폐백을 올렸으면, 찬인이 전사관을 인도하여 진찬자(進饌者)를 거느리고 주방(廚房)으로 나아가서 비(匕)로써 소(牛)를 확(鑊)에서 들어올려 생갑(牲匣)에 담고, 다음에 양,돼지를 들어올려 각기 생갑에 담아 가지고 들어와 찬만(饌幔) 안에 진설한다.
알자가 천조관(薦俎官)을 인도하여 나가서 찬소(饌所)로 나아가는데, 봉조관(捧俎官)이 이를 따른다.
전하가 폐백을 드리고 나서 자리로 돌아가기를 기다려, 집례가“찬(饌)을 올리라”한다.
알자가 천조관을 인도하여 제신농씨(帝神農氏)의 조(俎)를 받들고, 봉조관(捧俎官)이 각기 생갑을 받들고, 전사관이 찬(饌)을 인도하여 정문(正門)으로 들어간다.
조(俎)가 처음으로 문(門)에 들어오면 헌가(軒架)에서 옹안지악(雍安之樂)을 연주한다.
여러 축사(祝史)가 모두 앞으로 나아가서 모혈반(毛血槃)을 거두어, 동계(東階)로 재랑(齋郞)에게 주어서 내보낸다.
정위(正位)의 찬(饌)은 남계(南階)로 올리게하고, 배위(配位)의 찬(饌)은 동계(東階)로 올리게 하는데, 여러 대축(大祝)이 맞이하여 단상(壇上)으로 인도한다.
천조관이 제신농씨(帝神農氏)의 신위앞으로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아서 먼저 소를 올리고, 다음에 양을 올리고, 다음에 돼지를 올린다.
올리기를 마치면, 생갑(牲匣)의 뚜껑을 열고, 다음에 후직씨의 신위 앞으로 나아가서 동향하여 꿇어앉아 올리기를 모두 위의 의식과 같이 한다.
이를 마치면 주악(奏樂)이 그친다.
알자가 천조관 이하를 인도하여 동계(東階)로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여러 대축이 준소(尊所)에 돌아간다.
알자가 진폐작주관과 전폐작주관을 인도하여 올라가서 제신농씨 준소(尊所)로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하면, 집례가“예의사(禮儀使)는 전하를 인도하여 초헌례(初獻禮)를 행하라”한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남계(南階)로 올라가, 제신농씨 준소로 나아가 서향하여 서면, 등가(登歌)에서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고,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춘다.
집준자(執尊者)가 멱(羃)을 들고, 진폐작주관이 예제(醴齊)를 떠내면 근시가 작(爵)을 가지고 술을 받는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신위 앞으로 나아가서 북향하여 서면, 꿇어앉아서 규(圭)를 꽂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꿇어앉아서 규를 꽂으면,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꿇어앉는다.
근시(近侍)가 작(爵)을 진폐작주관에게 주어서, 진폐작주관이 작을 받들고 꿇어앉아서 올리면, 예의사가 집작헌작(執爵獻酌)하기를 계청하여, 작을 전폐작주관에게 주어서 신위 앞에 드린다.
예의사가 규(圭)를 잡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나 북향하고 꿇어앉기를 계청하면 주악(奏樂)이 그친다.
대축(大祝)이 신위의 오른편으로 나아가서 동향하고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이를 마치면 주악(奏樂)을 연주한다.
예의사가 부복(俯伏)하였다 일어나 평신(平身)하라고 계청(啓請)하면, 전하가 부복하였다 일어나 평신하고,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부복하였다 일어나 평신하면, 주악이 그친다.
다음에 후직씨의 준소로 나아가서 작헌(酌獻)하기를 모두 위의 의식과 같이 한다.
이를 마치면, 진폐작주관,전폐작주관이 모두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남계(南階)로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가면, 문무(文舞)가 물러가고, 무무(武舞)가 나오는데, 헌가(軒架)에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한다. 무자(舞者)가 자리를 정하고 서면 주악이 그친다.
처음에 전하가 장차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집례가“아헌례(亞獻禮)를 행하라”하고,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서 북향하여 서면,“홀을 꽂으라”찬(贊)하여, 손을 씻고 손을 닦게 한다.
이를 마치면,“홀(笏)을 잡으라”찬하고, 아헌관을 인도하여 동계(東階)로 올라가 제신농씨(帝神農氏)의 준소로 나아가서 서향하고 서면, 헌가에서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고, 소무지무(昭武之舞)를 춘다.
집준자(執尊者)가 멱(羃)을 들고 앙제(盎齊)를 떠내면, 집사자가 작(爵)을 가지고 술을 받는다.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신위앞으로 나아가서 북향하여 서게 하고,“꿇어앉아서 홀을 꽂으라”찬한다.
집사자가 작을 아헌관에게 주어서, 아헌관이 집작헌작(執爵獻爵)하는데,
작을 집사자에게 주어서 신위앞에 드리게 하면,“홀을 잡고 부복하여 일어나 평신하라”찬한다.
다음에 후직씨의 준소로 나아가서 작헌(酌獻)하기를 모두 위의 의식과 같이 하고, 이를 마치면 주악이 그친다. 인도하여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처음에 아헌관의 헌작(獻酌)이 장차 끝나려하면 집례가“종헌례(終獻禮)를 행하라”하여, 알자가 조헌을 인도하여 행례(行禮)하기를 아헌의 의식과 같이 하고, 이를 마치면 인도하여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알자가 진폐작주관(進幣爵酒官)과 천조관(薦俎官)을 인도하여 동계(東階)로 올라가서 음복위(飮福位)로 나아가 북향하여 선다.
대축(大祝)이 제신농씨의 준소로 나아가서 작(爵)을 가지고 상준(上尊)의 복주(福酒)를 떠내고, 또 대축이 조(俎)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신위앞의 조육(胙肉)을 덜어낸다.
집례가“예의사는 전하를 인도하여 음복위(飮福位)로 나아가라”하면,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남계(南階)로 올라가서 음복위로 나아가 북향하여 선다.
대축이 작(爵)을 진폐작주관에게 주어서, 진폐작주관이 작을 받들고 서향하여, 꿇어앉아서 올린다.
예의사가 꿇어앉아 규(圭)를 꽂기를 계청(啓請)하여, 전하가 꿇어앉아서 규(圭)를 꽂으면,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꿇어앉는다.
전하가 작을 받아서 다 마시고 나면, 진폐작주관이 빈잔을 받아서 대축에게 주고, 대축이 이를 받아서 점(坫)에 도로 놓는다.
대축이 조(俎)를 천조관(薦俎官)에게 주면, 천조관이 조(俎)를 받들고 서향하고 꿇어앉아서 올린다.
예의사가 조(俎) 받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조를 받아서 근시에게 주고,
근시가 조를 받들고 남계(南階)로 내려와서 문(門)을 나가 사옹원관(司饔院官)에게 준다.
진폐작주관과 천조관이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예의사가 규(圭)를 잡고 부복(俯伏)하였다 일어나 평신(平身)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규를 잡고 부복하였다 일어나 평신하면,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부복하였다 일어나 평신한다.
전하를 인도하여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가면, 집례(執禮)가“사배(四拜)하라”하여, 예의사가 사배(四拜)하기를 계청한다.
전하가 네 번 절을 하면,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네 번 절을 한다.
집례가“변(변),두(豆)를 거두라”고 하면, 여러 대축이 앞으로 나아가서 변, 두를 거두는데, 등가(登歌)에서 옹안지악(雍安之樂)을 연주한다.
거두기를 마치면 주악(奏樂)이 그치고, 헌가(軒架)에서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한다.
집례가“사배(四拜)하라”하면, 예의사가 사배하기를 계청하고, 전하가 네 번 절을 하면, 자리에 있는 자도 모두 네 번 절을 하는데, 주악(奏樂) 일성(一成)이 그친다.
예의사가“예(禮)가 끝났다”고 아뢰고, 전하를 인도하여 대차(大次)에 들어가 문(門)을 나가면, 예의사가 규(圭)를 놓을 것을 계청하여, 근시가 꿇어앉아서 규를 받는데, 산선(繖扇), 시위(侍衛)는 보통때의 의식과 같이한다.
전하가 대차(大次)에 들어가 면복(冕服)을 벗으면, 집례가“망예(望瘞)4925)하라”하고,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망예위(望瘞位)로 나아가서 북향하여 서면, 집례가 찬자(贊者)를 거느리고 망예위로 나아가서 서향하여 선다. 여러 대축이 비(篚)를 가지고 축판(祝版)과 폐백, 서직반(黍稷飯)을 취(取)하여 각기 그 섬돌로 단(壇)을 내려와서 구덩이에 놓는다.
집례가“묻어도 가하다”하면, 흙을 반구덩이 메우는데, 전사관(典祀官)이 감시(監視)한다.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고, 찬인(贊引)이 각기 제향관(諸享官)을 인도하여 나가고, 집례가 찬자를 거느리고 본위(本位)로 돌아간다.
인의(引儀)가 배향관(陪享官)을 나누어 인도하여 차례로 나가고, 찬인(贊引)이 감찰(監察)과 제집사(諸執事)를 인도하여 모두 악현(樂懸)의 북쪽 배위(拜位)로 돌아가 서게 한다.
집례가“사배(四拜)하라”하여, 감찰 이하가 모두 네번 절하고 나면, 찬인이 차례로 인도하여 나간다.
전악(典樂)이 공인(工人)과 이무(二舞)를 거느리고 나가고, 집례가 찬자, 알자, 찬인을 거느리고 악현의 북쪽 배위(拜位)로 나아가서 네번 절하고 나간다.
전사관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신위판(神位版)을 간직하고,
예찬(禮饌)을 거두고 내려와서 물러간다.
註4925]망예(望瘞): 제사를 끝마치고 축문과 폐백을 파묻을 때 헌관(獻官)과 집사(執事)가 이를 지켜보던 일을 말함.
○饋享。 殿下旣升奠幣, 贊引引典祀官, 出帥進饌者詣廚, 以匕升牛于鑊, 實于牲匣, 次升羊、豕, 各實于牲匣, 入設於饌幔內。 謁者引薦俎官, 出詣饌所, 捧俎官隨之。 俟殿下奠幣訖復位, 執禮曰: “進饌。” 謁者引薦俎官, 捧帝神農氏俎, 捧俎官各捧牲匣, 典祀官引饌, 入自正門。 俎初入門, 軒架作雍安之樂。 諸祝史俱進, 徹毛血槃, 自東陛, 授齋郞以出。 正位之饌升自南陛, 配位之饌升自東陛, 諸大祝迎引於壇上。 薦俎官詣帝神農氏神位前, 北向跪奠, 先薦牛, 次薦羊, 次薦豕。 奠訖, 啓牲匣蓋, 次詣后稷氏神位前, 東向跪奠, 竝如上儀。 訖, 樂止。 謁者引薦俎官以下, 降自東陛復位, 諸大祝還尊所。 謁者引進幣爵酒官、奠幣爵酒官, 升詣帝神農氏尊所, 北向立, 執禮曰: “禮儀使導殿下, 行初獻禮。” 禮儀使導殿下, 升自南陛, 詣帝神農氏尊所, 西向立, 登歌作壽安之樂, 烈文之舞作。 執尊者擧羃, 進幣爵酒官酌醴齊, 近侍以爵受酒。 禮儀使導殿下, 詣神位前, 北向立, 啓請跪搢圭, 殿下跪搢圭, 在位者皆跪。 近侍以爵授進幣爵酒官, 進幣爵酒官捧爵跪進, 禮儀使啓請執爵獻爵ㆍ以爵授奠幣爵酒官, 奠于神位前。 禮儀使啓請執圭俯伏、興、少退, 北向跪, 樂止。 大祝進神位之右, 東向跪, 讀祝文。 訖, 樂作。 禮儀使啓請俯伏、興ㆍ平身, 殿下俯伏、興ㆍ平身, 在位者皆俯伏、興ㆍ平身, 樂止。 次詣后稷氏尊所, 升獻竝如上儀。 訖, 進幣爵酒官、奠幣爵酒官皆降復位, 禮儀使導殿下, 降自南陛復位, 文舞退, 武舞進, 軒架作舒安之樂。 舞者立定, 樂止。 初殿下將復位, 執禮曰: “行亞獻禮。” 謁者引亞獻官, 詣盥洗位, 北向立, 贊 ‘搢笏’, 亞獻官盥手帨手。 訖, 贊 ‘執笏’, 引亞獻官, 升自東陛, 詣帝神農氏尊所, 西向立, 軒架作壽安之樂, 昭武之舞作。 執尊者擧冪酌盎齊, 執事者以爵受酒。 謁者引亞獻官, 詣神位前, 北向立, 贊 ‘跪搢笏。’ 執事者以爵授亞獻官, 亞獻官執爵獻爵, 以爵授執事者, 奠于神位前, 贊 ‘執笏俯ㆍ伏ㆍ興平身。 次詣后稷氏尊所, 酌獻竝如上儀。 訖, 樂止, 引降復位。 初亞獻官獻將畢, 執禮曰: “行終獻禮。” 謁者引終獻官, 行禮竝如亞獻儀。 訖, 引降復位。 謁者引進幣爵酒官、薦俎官, 升自東陛, 詣飮福位, 北向立。 大祝詣帝神農氏尊所, 以爵酌上尊福酒, 又大祝持俎, 進減神位前胙肉。 執禮曰: “禮儀使導殿下, 詣飮福位。” 禮儀使導殿下, 升自南陛, 詣飮福位, 北向立。 大祝以爵授進幣爵酒官, 進幣爵酒官捧爵西向, 跪進。 禮儀使啓請跪搢圭, 殿下跪搢圭, 在位者皆跪。 殿下受爵飮訖, 進幣爵酒官受虛爵, 以授大祝, 大祝受復於坫。 大祝以俎授薦俎官, 薦俎官捧俎西向, 跪進。 禮儀使啓請受俎, 殿下受俎, 以授近侍, 近侍奉俎, 降自南陛, 出門授司饔院官。 進幣爵酒官、薦俎官降復位, 禮儀吏啓請 ‘執圭俯伏、興ㆍ平身’, 殿下執圭俯伏、興ㆍ平身, 在位者皆俯伏、興ㆍ平身。 導殿下降復位, 執禮曰: “四拜。” 禮儀使啓請四拜。 殿下四拜, 在位者皆四拜。 執禮曰: “徹籩、豆。” 諸大祝徹籩、豆, 登歌作雍安之樂。 徹訖, 樂止, 軒架作景安之樂。 執禮曰: “四拜。” 禮儀使啓請四拜, 殿下四拜, 在位者皆四拜, 樂一成止。 禮儀使啓: “禮畢”, 導殿下, 還大次出門, 禮儀使啓請釋圭, 近侍跪受圭, 繖扇、侍衛如常儀。 殿下入大次, 釋冕服, 執禮曰: “望瘞。” 謁者引亞獻官, 詣望瘞位, 北向立, 執禮率贊者, 詣望瘞位, 西向立。 諸大祝以篚取祝板及幣、黍稷飯, 各由其陛降壇, 置於坎。 執禮曰: “可瘞。” 置土半坎, 典祀官監視。 謁者引亞獻官, (謁者)贊引各引諸享官出, 執禮帥贊者, 還本位。 引儀分引陪享官, 以次出, 贊引引監察及諸執事, 俱復懸北拜位, 立定。 執禮曰: “四拜。’ 監察以下皆四拜, 訖, 贊引引出。 典樂帥工人、二舞出, 執禮帥贊者、謁者、贊引, 就懸北拜位, 四拜而出。 典祀官帥其屬, 藏神位板, 徹禮饌以降, 乃退。
성종 51권, 6년(1475 을미/명성화(成化)11년) 1월 25일(을해) 8번째기사
경적의 의례
경적(耕籍)은 이러하였다.
처음에 전하가 대차(大次)로 돌아가면, 군신(群臣)이 각기 막차(幕次)에서 대기한다.
봉상시정(奉常寺正)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여러 쟁기[耒耜]를 잡은 자를 거느리고 먼저 자리[位]로 나아가고, 알자(謁者)가 시경(侍耕)하고 종경(從耕)할 제집사(諸執事)와 문무백관(文武百官)을 인도하여 모두 조복을 갖추고 차례로 들어와 자리로 나아간다.
전하가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오면,
헌가악(軒架樂)을 연주한다.
좌통례,우통례가 부축하고 인도하여 관경대(觀耕臺) 남계(南階) 아래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리면, 근시가 꿇어앉아 규(圭)를 올린다.
예의사(禮儀使)가 규(圭)를 잡기를 계청하고, 앞에서 인도하여 경적위(耕籍位)에 이르러 남향하여 서면, 주악(奏樂)이 그친다.
예의사가 경적례(耕籍禮)를 행하기를 계청하면, 적전령(籍田令)이 친경뢰석(親耕耒席)4926)의 남쪽으로 나아가서 북향하고 꿇어앉아, 부복(俯伏)하고 홀(笏)을 꽂는다.
씌운 것[韜]을 풀고 쟁기를 내어서 동향하고 서서 봉상시정(奉常寺正)에게 주면, 봉상시정이 근시(近侍)에게 주어 올리게 한다.
사복시정(司僕寺正)이 소[牛]를 올린다. 예의사가 규(圭)를 꽂고 쟁기받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규를 꽂고 쟁기[耒耜]를 받으면, 악(樂)을 연주한다. 근시 한 사람과 고품중관(高品中官) 두 사람이 같이 쟁기를 잡고, 사복시정이 고삐[轡]를 잡아, 5퇴례(五推禮)4927)를 마치면 악이 그친다.
예의사가 규(圭)를 잡기를 계청하고, 근시가 쟁기를 받아서 다시 돌리어, 차례로 적전령에게 주어서 다시 싸게한다.
전하가 처음 밭을 갈면, 제집뢰사자(諸執耒耜者)가 각기 종경자(從耕者)에게 주고,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관경대(觀耕臺)에 올라가면 악(樂)을 연주하는데, 남계(南階)로 다 올라가고 나면, 주악이 그치고, 등가(登歌)에서 악을 연주하여 〈전하가〉 자리[座]로 나아가 남향하면 주악이 그친다.
종경(從耕)하는 종친(宗親), 재신(宰臣)이 모두 쟁기를 잡으면 헌가(軒架)에서 악을 연주하고, 7퇴지례(七推之禮)를 행하고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가면, 악을 그친다.
제판서(諸判書)와 대간(臺諫)이 차례로 쟁기를 잡으면, 악을 연주하고, 9퇴(推)를 하고 나서 제자리로 돌아가면, 악을 그친다.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이 서인(庶人)을 거느리고 차례로 백묘(百畝)를 갈고 나면 바로 물러난다.
경적사(耕籍使)가 동계(東階)로 올라가서 악좌(幄座)앞으로 나아가 조금 동쪽으로 서향하여 서고, 배경(陪耕)하던 기민(耆民)이 대(臺)아래로 나아가서 북향하고 네번 절한다.
도승지(都承旨)가 좌전(座前)에 나아가서 북면(北面)하고 교지를 받들고 물러나서 남계(南階)의 동쪽에 이르러 서향(西向)하여 서서 선교(宣敎)하기를,“경로(敬勞)한다”하고, 물러간다.
좌통례가 교지를 받들고 서면(西面)하여 선교하기를,“기민(耆民)들을 경로한다”하면, 기민들이 네번 절하고 모두 물러나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예의사가 예필(禮畢)을 아뢰어, 전하가 남계(南階)로 내려오면, 등가에서 악을 연주하고, 단(壇) 아래에 이르면 악을 그친다.
예의사가 규(圭)를 풀고 승여(乘輿)하기를 계청하면, 헌가(軒架)에서 악을 연주하고, 대차(大次)에 이르러 내전으로 들어가면 악을 그친다.
시경(侍耕), 종경(從耕)하던 자와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모두 물러가고,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동륙(橦稑)4928)의 종자[種]를 받들고 경소(耕所)에 이르러 파종하는데, 부정(副正)이 주부(主簿)를 거느리고 백묘(百畝)마치는 것을 본다.
봉상시정이 일의 끝난 것[功畢]을 살피고 나서, 대차(大次)에 이르러 북면(北面)하고 아뢴다. 이를 마치면 모두 물러난다.
거가(車駕)가 환궁(還宮)한다.
註4926]친경뢰석(親耕耒席): 친히 쟁기로 밭을 가는 자리. 註 4927]5퇴례(五推禮): 다섯 번 미는 예(禮). 註4928]동륙(橦稑): 벼의 이름. 올벼.
○耕籍。 初殿下還大次, 群臣各俟于次。 奉常寺正具朝服, 率諸執耒耜者, 先就位, 謁者引侍耕、從耕諸執事及文武百官, 皆朝服, 以次入就位。 殿下具遠遊冠、絳紗袍, 乘輿以出, 軒架樂作。 左ㆍ右通禮夾引, 至觀耕臺南階, 下降輿, 近侍跪進圭。 禮儀使啓請執圭, 前導至耕籍位, 南向立, 樂止。 禮儀使啓請行耕籍禮, 籍田令進親耕耒席南, 北向跪, 俯伏搢笏。 解韜出耒, 東向立, 授奉常寺正, 奉常寺正以授近侍進之。 司僕寺正進牛。 禮儀使啓諸搢圭受耒, 殿下搢圭受耒耜, 樂作。 近侍一人與高品中官二人共執耒, 司僕寺正執轡, 五推禮畢, 樂止。 禮儀使啓請執圭, 近侍受耒耜, 復轉以次授之籍田令, 復于韜。 殿下初耕, 諸執耒耜者, 各授從耕者, 禮儀使導殿下, 升觀耕臺, 樂作, 升自南陛, 樂止, 登歌樂作, 卽座南向, 樂止。 從耕宗親、宰臣皆執耒耜, 軒架樂作, 行七推之禮, 退復位, 樂止。 諸判書、臺諫次執耒耜, 樂作, 九推訖復位, 樂止。 奉常寺副正帥庶人, 以次耕于百畝, 耕畢乃退。 耕籍使升自東階, 進幄座前, 稍東西向立, 陪耕耆民進臺下, 北向四拜。 都承旨進當座前, 北面承敎, 退之南陛之東, 西向立, 宣敎曰: “敬勞。” 退。 左通禮承敎, 西面宣敎曰: “敬勞耆民。” 耆民四拜, 皆退復位。 禮儀使啓禮畢, 殿下降自南陛, 登歌樂作, 至壇下, 樂止。 禮儀使啓請釋圭乘輿, 軒架樂作, 至大次入內, 樂止。 侍耕從耕者及文武百官皆退, 奉常寺正捧穜稑之種, 至耕所播之, 副正帥主簿, 視終百畝。 奉常寺正省功畢, 至大次, 北面啓。 訖皆退, 車駕還宮。
성종 51권, 6년(1475 을미/명성화(成化)11년) 1월 25일(을해) 10번째기사
선농제에서 축사재랑, 집준을 맡은 사람들에게 한 자급을 더하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선농제 축사(先農祭祝史) 이칙(李則), 이균(李鈞), 재랑(齋郞) 김여석(金礪石), 집준(執尊) 변우(邊佑), 윤간(尹侃), 봉조관(奉俎官) 민영견(閔永肩), 정옥(鄭沃), 김유악(金由岳), 이잠(李箴), 우수(禹樹), 아악령(雅樂令) 서징(徐澄), 장생령(掌牲令) 변철산(卞哲山), 작세관(爵洗官) 안선(安璿), 아헌관 관세(亞獻官盥洗) 손고(孫顧), 찬인(贊引) 최관(崔灌), 송영(宋瑛), 제감(祭監) 곽치희(郭致禧), 이기(李基), 수조관(受俎官) 신수근(愼守勤), 친경시적전령(親耕時籍田令) 송극창(宋克昌), 김준(金嶟), 전악령(典樂令) 박곤(朴), 예조정랑(禮曹正郞) 안처량(安處良), 김질(金耋), 좌랑(佐郞) 남제(南悌), 양자유(楊子由), 복승정(卜承貞), 기민양인(耆民良人) 차중부(車仲富), 오근중(吳近重), 고을생(高乙生), 김처상(金處商), 이을경(李乙京), 이연년(李延年), 오충(吳忠), 이휴(李休), 진귀달(陳貴達), 김예생(金禮生), 엄신(嚴信), 이수생(李水生), 엄용(嚴龍), 장효손(張孝孫), 전지(田地), 김권(金權), 사노(私奴) 최남재(崔南才), 강마지(姜麻只), 강소아(姜小兒)에게 각각 한 자급을 더하라.”하였다.
○傳旨吏曹: “先農祭祝史李則ㆍ李鈞、齋郞金礪石、執尊邊佑ㆍ尹侃、奉俎官閔永肩ㆍ鄭沃ㆍ金由岳ㆍ李箴ㆍ禹樹、雅樂令徐澄、掌牲令卞哲山、爵洗官安璿、亞獻官盥洗孫顧、贊引崔灌、宋瑛、祭監郭致禧ㆍ李基、受俎官愼守勤、親耕時籍田令宋克昌ㆍ金嶟、典樂令朴、禮曹正郞安處良ㆍ金耋、佐郞南悌ㆍ楊子由ㆍ卜承貞、耆民良人車仲富ㆍ吳近重ㆍ高乙生ㆍ金處商ㆍ李乙京ㆍ李延年ㆍ吳忠ㆍ李休ㆍ陳貴達ㆍ金禮生ㆍ嚴信ㆍ李水生ㆍ嚴龍ㆍ張孝孫ㆍ田地ㆍ金權、私奴崔南才ㆍ姜麻只ㆍ姜小兒各加一級。”
성종 51권, 6년(1475 을미/명성화(成化)11년) 1월 25일(을해) 11번째기사
선농제 아헌관 이정, 종헌관 신숙주등에게 각각 말 1필을 내려 주다
사복시(司僕寺)에 전지하기를,
“선농제아헌관(先農祭亞獻官)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종헌관(終獻官)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에게 각각 안구마(鞍具馬)4929) 1필(匹)을, 진폐주관(進幣爵酒官) 정효상(鄭孝常), 천조관(薦俎官) 이극증(李克增), 예의사(禮儀使) 이승소(李承召), 친경시좌우위장(親耕時左右衛將) 노사신(盧思愼), 임원준(任元濬), 판서(判書) 이극배(李克培), 대간(臺諫) 이서장(李恕長), 정괄(鄭佸), 도승지(都承旨) 신정(申瀞)에게 각각 말[馬] 1필(匹)을, 전폐작주관(奠幣爵酒官) 심한(沈澣), 단상집례(壇上執禮) 안관후(安寬厚), 승지(承旨) 유지(柳輊), 유권(柳睠), 이극기(李克基), 김영견(金永堅), 현석규(玄碩圭), 전사관(典祀官) 박계성(朴繼姓), 단하집례(壇下執禮) 김승경(金升卿), 대축(大祝) 성현(成俔), 유순(柳洵), 봉조관(捧俎官) 정윤각(鄭允恪), 재랑(齋郞) 윤사하(尹師夏), 협률랑(協律郞) 고태정(高台鼎), 찬자(贊者) 이계신(李繼信), 김신몽(金信蒙), 좌통례(左通禮) 박숙진(朴叔蓁), 우통례(右通禮) 신윤저(申允底), 알자(謁者) 이중석(李仲石), 윤사상(尹師商), 친경시시경내시(親耕時侍耕內侍) 안중경(安仲敬), 김결(金潔), 사복시정(司僕寺正) 정숙(鄭俶),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최경지(崔敬止), 봉청상관(奉靑箱官) 이병규(李丙奎), 알자(謁者) 남칭(南偁), 전악령(典樂令) 황효성(黃孝誠), 기읍령(畿邑令) 홍현정(洪顯廷), 김원신(金元臣), 권중린(權仲麟), 김사원(金嗣元), 협시(夾侍) 정석희(鄭錫禧), 강흡(姜洽), 정의(正衣) 황효의(黃孝儀), 예인호(艾仁浩), 예조참판(禮曹參判) 이극돈(李克墩), 정랑(正郞) 김수손(金首孫)에게 각각 아마(兒馬) 1필(匹)을 내려 주라”하였다.
註4929]안구마(鞍具馬):안장갖춘 말.
○傳旨司僕寺曰: “先農祭亞獻官月山大君婷、終獻官領議政申叔舟各賜鞍具馬一匹, 進幣爵酒官鄭孝常、薦俎官李克增、禮儀使李承召、親耕時左右衛將盧思愼ㆍ任元濬、判書李克培、臺諫李恕長ㆍ鄭佸、都承旨申瀞各馬一匹, 奠幣爵酒官沈瀚、壇上執禮安寬厚、承旨柳輊ㆍ柳睠ㆍ李克基ㆍ金永堅ㆍ玄碩圭、典祀官朴繼姓、壇下執禮金升卿、大祝成俔ㆍ柳洵、捧俎官鄭允恪、齋郞尹師夏、協律郞高台鼎、贊者李繼信ㆍ金信蒙、左通禮朴叔蓁、右通禮申允底、謁者李仲石ㆍ尹師商、親耕時侍耕內侍安仲敬ㆍ金潔、司僕寺正鄭俶、奉常寺副正崔敬止、奉靑箱官李丙奎、謁者南偁、典樂令黃孝誠、畿邑令洪顯廷ㆍ金元臣ㆍ權仲麟ㆍ金嗣元、夾侍鄭錫禧ㆍ姜洽、正衣黃孝儀ㆍ艾仁浩、禮曹參判李克墩、正郞金首孫各兒馬一匹。”
성종 72권, 7년(1476 병신/명성화(成化) 12년) 10월 21일(신묘) 8번째기사
박효원 등이 명군병, 선명후암군병, 현비병의 세 개의 병풍을 바치다.
병풍의 내용
이보다 앞서, 현명(賢明)한 임금과, 앞서는 현명했다가 암군(暗君)이 된 이와, 현비(賢妃)의 사적(事跡)을 세 개의 병풍6668)에 그려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제목(題目)을 나누어 시(詩)를 짓게하고, 또 장령(掌令) 박효원(朴孝元), 응교(應敎) 유순(柳洵), 진사(進士) 성담수(成聃壽)에게 명하여 사적과 시를 그 위에 쓰도록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효원등이 써서 바치니, 어의(御衣) 각각 한벌씩을 내리고 이어 선온(宣醞)6669)을 대접했다.
○명군병(明君屛)
신농도(神農圖)
신농(神農)은 천지(天地)의 도(道)를 알고 인성(人性)에 밝아서 천하(天下)를 가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백성들이 나물먹고 물마시며, 나무열매를 따먹고 소라[蠃],조개[蚌] 따위의 고기를 먹고 살았었는데, 신농은 인민(人民)이 많아서 그것으로는 오래 먹고살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백성에게 오곡(五穀)심는 것을 가르치고 뇌사(耒耜)6670)와 서호(鉏鎒)6671)를 만들어서 풀밭을 개간하게 한 연후에 오곡이 흥성하게 되었다. 영을 내리기를,
“장부(丈夫)들이 장성하여 경작(耕作)을 아니하면 천하에 주리는 자가 있을 것이고, 부인(婦人)들이 많이 있으면서 길쌈을 아니하면 천하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그래서 신농이 몸소 농사짓고 후비(后妃)가 몸소 길쌈하여 천하에 솔선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그 옛날 염제(炎帝)6672)가 천하를 다스리며,
신교로써 신공(神功)을 세웠네.
백성들의 배부름과 주림은 농사에 달렸으며,
세상사람 춥고 따뜻함은 여공(女工)에 달려있네.
옥이나 구슬비도 세상엔 소용없어,
농사짓고 길쌈함을 백성과 함께 했네.
천년을 두고 삼퇴례(三推禮)6673)를 다행히 보겠구나.
신농의 법을 취하여 시종을 보전하고 싶네.”하였다.【현석규(玄碩圭)】
제요도(帝堯圖)
제요(帝堯)는 황수(黃收)6674)와 치의[純義]6675), 동거(彤車)6676)와 백마(白馬)를 사용하고, 모자(茅茨)6677)를 가지런하게 자르지아니하고 흙으로 만든 계단이 세 층이었으며, 임금의 도리에 힘쓰면서 정사(政事)를 펴는 궁(宮)을 지어 구실(衢室)이라 하였으며, 비방(誹謗)하는 나무를 세워 온 세상 사람들이 하고싶은 말을 다할 수있게하고, 진선(進善)하는 기(旗)를 세워 온세상 사람들이 그 재주를 다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간고(諫鼓)6678)를 조정(朝廷)에 걸어두고 세상에서 임금의 잘못을 충간할 수 있게 하였다.
한 사람의 백성이 주려도 내가 주리게 했다고 여기고 한 사람의 백성이 추위에 떨어도 내가 춥게했다고 여기니, 그로 해서 백성들이 추대하기를 해와 달같이 하고 친하기를 부모같이 하였다.
어떤 노인(老人)이 땅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휴식하네. 밭에 농사지어 먹고 우물의 물길어 마시는데, 임금이 우리에게 무슨 힘이 되는가?”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날마다 눈이시게 옛 역사 읽어봐도,
제요(帝堯)같은 어진 성군, 세상에 다시없네.
흙 계단 띠 지붕의 검소한 생활이며,
비방하는 나무에다 간고(諫鼓)까지 설치했네.
온누리 화평케한 지극한 정치,
사악(四岳)6679)에게 모든 것을 자문하였네.
높고 넓은 그의 덕이 하늘처럼 커,
멀거나 가깝거나 한맘으로 귀의하네하였다.【홍응(洪應)】
제순도(帝舜圖)
제순(帝舜)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먼 곳 사람을 구휼(救恤)하고 가까운 곳 사람을 친하며, 묻기를 좋아하여 이언(邇言)도 살피기를 좋아하며, 나쁜 것은 덮어주고 좋은 것은 드러내주며, 양단(兩端)6680)을 잡아 그 중도(中道)를 백성에게 적용했다.
당시 해와 달이 유난히 빛나고 경운(卿雲)6681)이 모였다.
순(舜)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며 남풍시(南風詩)를 노래하기를,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불만을 풀어주도다. 남풍의 때맞음이여, 우리 백성의 곡식을 풍부하게 하여주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온 세상이 역수(曆數)6682)가 돌아옴을 칭송하니,
그 중화(重華)6683) 오래도록 높이높이 우러르네.
경운은 뭉게뭉게 천장(天丈)6684)에 드리우고,
서일(瑞日)은 찬란하게 진의(袗衣)에 비치도다.
많은 업적 이룩될 때 단면(端冕)이 장엄하고,
오현금을 타는 곳에 봄바람 살랑살랑.
남풍 한 곡조에 민온(民慍)이 다 풀리니,
넓고 큰 인덕(仁德)이 천하에 두루 찼네”였다.【홍귀달(洪貴達)】
대우도(大禹圖)
우(禹)는 오음(五音)으로 정사를 처리하였다.
종(鍾),고(鼓),경(磬),탁(鐸),도(鞀)를 매달아놓고 사방의 선비를 기다리는데, 순거(簨簴)6685)에 새기기를,
“과인(寡人)을 도(道)로써 가르치려는 자는 고(鼓)를 치고, 의(義)로써 논(論)하려는 자는 종(鍾)을 치고, 일을 고(告)하려는 자는 탁(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려는 자는 경(磬)을 두드리고, 옥송(獄訟)이 있는 자는 도(鞀)를 흔들라.”하였다.
한번 밥먹을 동안에 여남은 번씩 일어나고, 한번 목욕하는 동안에 서너번씩 머리를 움켜쥐고서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밖에 나가다가 죄인(罪人)을 보고서 수레에서 내려 사연을 물으면서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죄인이 도를 따르지않았는데, 군왕(君王)께서 어찌 하여 슬퍼하십니까?”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요(堯), 순(舜)때의 사람은 다 요, 순과 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가졌는데, 과인이 임금이 되고서는 백성이 각자가 자기의 마음으로 마음을 가진다.
그래서 슬퍼한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그 당시의 발자취가 천하에 두루두루,
갖은 고생 겪으면서 큰 업적을 이룩했네.
북과 종을 치게 하여 다스리는 도리,
도(鞀)와 탁(鐸)을 울리게 하여 민간 실정 펴게했네.
안타깝게 죄를 물어 깊은 사랑 남기었고,
토악(吐握)6686)하며 사람맞아 지성을 보이었네.
요, 순 때만 못하다고 수치로 여긴 마음,
지금까지 그 덕화를 이름하기 어려워라”하였다.【홍귀달(洪貴達)】
성탕도(成湯圖)
탕(湯)은 들에 나갔다가 야인(野人)이 사면(四面)에 그물을 펴놓고 축원하기를,
“천하 사방에서 모두가 나의 그물로 들어오라.”하는 것을 보고,
탕임금은 그물의 삼면(三面)을 제거하고 빌기를,
“좌(左)로 가고 싶으면 좌로 가고 우(右)로 가고 싶으면 우로 가고, 그렇지않은 자는 나의 그물로 들어오라.”하였더니,
제후(諸侯)들이 듣고 이르기를,
“탕의 덕(德)이 지극하다.”하고,
귀의(歸依)한 것이 40여 나라였다. 그 당시 7년이나 크게 가물었었는데,
태사(太史)가 점을 치고서 하는 말이,
“마땅히 사람을 제물로 기도해야 합니다”하니, 탕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를 비는 것은 백성을 위함인데, 만약 사람을 제물로 기도해야 된다면 내가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하고,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손톱 깎고 머리를 자르고 소거(素車)와 백마(白馬)로, 몸에 흰 띠[茅]를 두르고 몸소 희생(犧牲)6687)이 되어 상림(桑林)의 들에 나아가 기도하면서 여섯 가지 일로 자책(自責)하기를,
“정치를 절도(節度)있게 못했는가? 백성이 직업(職業)을 잃었는가?
궁실(宮室)이 사치스러운가? 여알(女謁)6688)이 기세를 부리는가?
포저(苞苴)6689)가 성행(盛行)하는가? 참부(讒夫)6690)가 번창하는가?”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방 수천리에 큰 비가 내렸다. 시(詩)에 이르기를,
“하(夏)나라 덕이 쇠할 때, 해도 망하고자,6691)
인심과 천명이 성탕에게 돌아갔네.
칠년의 가뭄에 백성 근심 간절했고,
여섯 가지 일 두려워하여 자신 책망 세밀했네.
한결같은 지성은 힐향(肸蠁)6692)이 감동하고,
온 들에는 단비가 흠뿍 쏟아졌네.
그물에 빌 때부터 어진 마음 커져서,
상나라의 혁엽(奕葉)6693)이 터전을 마련했네”하였다.【현석규(玄碩圭)】
상고종도(商高宗圖)
고종(高宗)은 즉위(卽位)하여 은(殷)나라를 부흥(復興)시키기를 생각하였으나 보좌(補佐)를 얻지못하여 2년이나 정사(政事)를 말하지않고 총재(冢宰)에게 재결(裁決)하게 하고, 국가의 기풍을 관찰하고 있었다.
고종이 꿈에 성인(聖人)을 얻었는데, 이름은 열(說)이었다.
그래서 꿈에 본 것을 가지고 신하와 관리들을 대조해 보았으나 모두 아니었으므로, 이에 그 모습을 그려서 그 형상을 가지고 백공(百工)을 시켜 시골에서 찾게하여 부암(傅巖)이란 바위 밑에서 열을 찾았는데, 같이 대화를 하여 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그를 등용하여 재상(宰相)을 삼았더니 은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시(詩)에 이르기를,
“높고 높은 탕왕의 덕 견줄 데가 없더니,
고종의 빛난 업적 전대에 못지않네.
삼년동안 말이 없이 치도(治道)를 생각했고,
어느 날 밤 뜻밖에도 대현(大賢)을 꿈꾸었네.
큰 솥을 조화시키는 양념이 되었으며,
넓은 내를 건너게 하는 수운(水運)역할하였네.
만약 서미(胥靡)6694)가 암혈(巖穴)속에 묻혔더라면,
은나라가 어떻게 육백년을 누렸으랴!”하였다.【홍귀달(洪貴達)】
주문왕도(周文王圖)
문왕(文王)때에 여상(呂尙)이란 이가 있었는데, 나이 80여세에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였다.
문왕이 사냥을 가려고 점을 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사냥할 것은 용(龍)도 아니며, 이무기[彲]도 아니며, 범[虎]도 아니며, 곰[熊]도 아니고, 왕자(王者)의 보좌(補佐)입니다”하였다.
드디어 사냥을 나가 반계(磻溪)에 이르러서 과연 여상을 만나 같이 수레를 타고 돌아와 스승을 삼았다. 일찍이 못을 파다가 썩은 뼈가 나왔는데,
명하여 장사(葬事)하게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하니, 문왕이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하(天下)의 주인이고 제후(諸侯)는 한 나라의 주인인데, 과인(寡人)은 진실로 뼈의 주인이다.”하고,
드디어 장사지내 주었다. 천하에서 그 말을 듣고,
“서백(西伯)6695)의 인덕(仁德)은 썩은 뼈에까지 이르렀는데, 하물며 산 사람이겠는가?”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주(周)나라의 기업(基業)조성 문왕 때 높았으니,
삼분한 천하에서 하나를 차지했네.
기산(岐山)까지 감화된 덕화에 봉황이 울었으며,
위수에 어린 상서는 보필을 얻었도다.
천자의 덕은 영대(靈臺)에서 전파되고,6696)
주역(周易)의 이치는 유리(羑里)에서 연구했네.6697)
묻지 말라, 생민이여. 성인 은혜입은 것을,
구원의 마른 뼈도 그 은혜 입었다네.”하였다.【김유(金紐)】
무왕도(武王圖)
무왕(武王)이 주(紂)를 칠 때 상교(商郊)에 진(陣)을 치고 하늘의 큰 명을 기다렸는데, 주가 저의 군사를 수풀처럼 거느리고 와서 목야(牧野)에서 마주쳤으나, 무왕의 군사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고 앞장선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쥐고서 뒤따른 저희 군사를 치면서 달아나니,
피가 흘러 방앗고가 뜰 정도였다.
한번 융복(戎服)을 입고 온 천하를 평정했는데, 이에 상(商)나라의 옛 정치를 되돌려주어 정치는 옛 법대로 따르게 하고, 기자(箕子)의 옥살이를 풀어주고 비간(比干)의 무덤을 봉해 주며, 녹대(鹿臺)의 재물을 흩어 주고,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어서 사해(四海)에 크게 나누어주니,
만백성이 열복(悅服)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천심과 인심에 순응하여 독부(獨夫)6698)를 문죄(問罪)하니,
앞섰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쥐고 달아났네.
땅속의 넋들도 응당 한을 풀었으며,
구속했던 충신들 모두 풀려났네.
말과 소는 목야로 돌려보냈고,
재물과 곡식은 외로운 백성에게 나눠주었네.
만약 기자(箕子)를 찾아 홍범(洪範)6699)을 전하지 않았다면,
이륜(彝倫)의 차례가 정해졌을까?”하였다.【이극배(李克培)】
한문제도(漢文帝圖)
문제(文帝)는 처음엔 대왕(代王)에 봉(封)해져서 대(代)에서 검박하게 지냈다. 주발(周勃)등이 이미 여러 여씨(呂氏)6700)를 주벌(誅伐)하고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천자(天子)로 세우려 할 때 왕이 송창(宋昌)에게 명하여 참승(驂乘)6701)케하고 장무(張武)등 6인에게 전거(傳車)를 타고 장안(長安)에 가게하고, 대저(代邸)6702)에 이르러서 천자에 즉위(卽位)하였다.
그날 저녁에 미앙궁(未央宮)에 들어가서 그날 밤 송창을 제수(除授)하여 위장군(衛將軍)을 삼아 남북군(南北軍)을 진무(鎭撫)케하고, 다시 전전(前殿)에 좌정(坐定)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천하(天下)에 대사(大赦)하였다.
원년(元年 B.C.179)에 천리마(千里馬)를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문제가 말하기를,
“앞에는 난여(鑾輿), 뒤에는 속거(屬車)로, 길행(吉行)은 하루에 50리, 사행(師行)은 하루에 30리를 가는 것인데, 짐(朕)이 천리마를 타고서 혼자 먼저 어디를 가겠는가?”하고,
그 말과 가지고온 도리비(道里費)6703)를 주고 하조(下詔)하기를,
“짐은 바치는 물건을 받지않을 것이다. 사방에 명하여 바치지말게 하라.”하였다. 조회 때마다 낭종관(郞從官)이 서소(書疏)를 올리면 연(輦)을 멈추고 그 말을 받아들이지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이 쓸 수 없으면 그냥 두고, 그 말이 쓸만하면 채택하여 칭찬하지않은 것이 없었다.
시(詩)에 이르기를,
“본래의 공검함이 백성에 임할 만한데,
더구나 교만과 사치를 받아들이지 않음에랴!
기이한 물건이 뜻을 빼앗지 못하고,
착한 말이라야 마음에 들어가네.
취화(翠華)6704)가 머무는 곳은 모두 아름다운 명,
단조(丹詔)6705)가 내리는 때엔 모두가 덕음이었네.
앉아서 제봉(提封)6706)을 이루어 부유함을 열었으니,
비로소 청정함이 백성을 깊이 감화시킨 줄 알겠네”하였다.【최숙정(崔淑精)】
당태종도(唐太宗圖)
태종(太宗) 때에 기내(畿內)에 황충(蝗蟲)이 있었다.
임금이 원중(苑中)에 들어갔다가 황충을 보고 몇 마리를 잡아서 빌기를,
“백성은 곡식으로 생명을 부지하는데, 네가 곡식을 갉아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장(肺腸)을 파먹어라.”하고,
그것을 삼키려 하니, 좌우에서 간(諫)하기를,
“그것은 악물(惡物)이니, 병환이 될까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짐이 백성을 위해 재앙을 받는다면 어떤 병인들 피하겠느냐?”하고,
드디어 그 황충을 삼켰는데, 그 해에 황충의 재앙이 없어졌다.
임금은 궁녀(宮女)가 너무 많이 깊은 궁중에 갇혀 있음을 민망하게 여기어,
“소제(掃除)하는 일외에 소용이 무엇인가?”하고서,
액정(掖庭)의 서문(西門)에 관리를 보내어 가려서 내어보내게 했는데,
전후(前後)하여 나간 것이 3천여명이었다. 또 임읍(林邑)에서 오색(五色)의 앵무(鸚鵡)를 바치고, 신라(新羅)에서는 미녀(美女) 2명을 바쳤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임읍의 앵무도 오히려 스스로 괴롭고 추운 것을 말하며, 제 나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친척을 멀리 떠나온 두 미녀이겠는가?”하고,
앵무와 함께 각각 사신을 딸려서 돌아가게 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업성(鄴城)6707)의 궁전에 석양이 비끼니,
진저(晉邸)의 풍운이 천하에 가득했네.
십만의 의병은 일표(日表)6708)를 따랐고,
삼천의 궁녀는 초방(椒房)6709)에서 나왔네.
고향그리는 농(籠)중의 새를 놓아보내고,
농사해치는 황충을 입으로 삼켰네.
이 모두 인의(仁義)를 힘써 행한 효과이니,
정관(貞觀)의 다스림6710)은 당(唐), 우(虞)6711)에 비등했네.”하였다.
【임원준(任元濬)】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오부차도(吳夫差圖)
오왕(吳王) 합려(闔廬)가 월(越)나라를 치니,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마주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영고부(靈姑浮)가 창으로 합려를 쳤는데, 합려가 그 상처의 병으로 죽으려 할 때 그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말하기를,
“월나라를 잊지말라.!”하였다.
부차가 왕이 되고서는 사람을 뜰에 세워 놓고 출입을 할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이르게 하기를,
“부차야, 너는 월왕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는가?”하면,
곧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감히 잊지않았습니다.”하고,
언제나 월나라를 보복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에 정병(精兵)을 모두 동원하여 월나라를 쳐서 부초(夫椒)에서 격파시켰다.
월왕은 이에 갑병(甲兵) 5천을 데리고 회계(會稽)에 서식(棲息)6712)하면서 서시(西施)를 바치고 군사가 물러나도록 청하니,
오왕이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허락했다【선명(先明)】
시(詩)에 이르기를,
“오나라와 월나라가 번갈아 서로 삼켜,
이기고 진 승부가 한 판국 그림이라.
두 나라 산하에 군대가 들끊었고,
선왕의 해골은 핏발로 얼룩졌네.
원수를 못갚으면 마음이 편할손가?
서로가 경계하여 변치 않길 맹세했네.
부초(夫椒)로 달려가서 설욕을 하였으니,
회계는 그 당시 안중에 없었네.”하였다.【서거정(徐居正)】
부차가 이미 서시(西施)를 얻고는 3백길[丈] 높이의 고소대(姑蘇臺)를 쌓고 그 위에서 잔치놀이를 하니, 오자서(伍子胥)가 간(諫)하기를,
“신(臣)은 오래지않아 이곳에 미록(麋鹿)이 놀게될까 걱정입니다”하였는데, 왕(王)은 듣지않고 촉루검(蜀鏤劍)으로 죽게하니, 죽어가면서 말하길,
“나의 무덤[墓] 위에 가(檟)를 심어서 기구(器具)6713)를 만들 수 있게 하고, 나의 눈을 뽑아 오나라 동문(東門)에 걸어두고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킴을 보게 하라”하니, 왕이 성을 내며 말하기를,
“나[孤]6714)는 대부(大夫)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하겠다.”하고,
오자서의 시체를 가져다가 치이(鴟夷)6715)에 담아서 강물에 던졌는데,
오나라가 마침내 월나라에게 멸망당했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부초에서 혈전하여 성공하고 돌아와,
미녀들을 데리고 높은 대에 노닐었네.
너울너울 춤추는 소매 하늘로 올라가고,
구성진 노래소리 기러기에 섞여오네.
그 당시 미인들은 적막하게 되었는데,
지금 강위에는 달만이 배회하네.
가련타, 그 옛날 동문에 눈을 매달라는 오자서도,
성난 파도되어 언덕을 치며 맴도네.”하였다.【유순(柳洵)】
한무제도(漢武帝圖)
무제(武帝)는 처음 즉위(卽位)하여, 현량(賢良)하고 방정(方正)하며, 직언(直言)으로 극간(極諫)하는 선비를 등용하려고 친(親)히 책문(策問)하였고,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 소진(蘇秦), 장의(張儀)의 말을 하는 자는 모두 파출(罷黜)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임금이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조관(趙綰)이 그의 스승 신공(申公)을 추천하니, 임금이 사자(使者)를 시켜 안거포륜(安車蒲輪)6716)을 받들고 비단에 구슬[璧]을 더하여 그를 맞이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지극한 말은 중론에서 듣고,
현량과의 책문(策問)으로 사방의 문을 열었네.
소진, 장의 배척하고 이단(異端)을 멀리하며,
주공, 공자 표장하여 유학을 숭상했네.
구휼하는 조서내려 은혜가 흡족했고,
폐백으로 어진이맞는 예절이 은근했네.
만약 힘써 실천으로 정치근본 삼았더면,
높은 업적 어이하여 한나라 명군에 그쳤으랴!”하였다.【임사홍(任士洪)】
무제는 방사(方士)인 공손경(公孫卿)의 말을 듣고, 장안(長安)의 감천(甘泉)에 비렴관(蜚廉觀), 계관(桂觀), 통천대(通天臺)를 짓게하고, 공손경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가지고 기구를 베풀어 놓고서 신인(神人)을 기다리게하며, 모든 궁실(宮室)을 넓히고, 백량대(柏梁臺)를 짓고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20장(丈)이고 크기는 7위(圍)이며, 구리[銅]로 만들었다. 위에 선인장(仙人掌)이 있어 이슬을 받는데, 거기에 옥(玉)가루를 타서 마시면 오래산다고 했다. 무제가 후씨(候氏)6717)에 가서 중악(中岳) 태실(太室)에 제(祭)를 지냈는데, 종관(從官)들이 산밑에서 만세(萬歲)소리 삼창이 들리는 듯하다하므로 조칙(詔勅)하여 태실사(太室祠)를 증축(增築)하게하였다.
그리고 동해상(東海上)에 순행(巡行)하여 신선(神仙)을 찾으며 태산(泰山)을 봉하고 숙연산(肅然山)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다시 동북(東北)으로 갈석(碣石)까지 갔다가 돌아왔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백척의 동대는 자줏빛 연기에 싸이고,
시신은 언제고 백량편(柏梁篇)6718)을 받드네.
신마(神馬)가 음보(音譜)전함6719)을 이미 즐겼는데,
흉노가 변경 침범함을 다시 한하였네.
제사파한 감천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약없는 봉도(蓬島)에서 신선을 찾을쏜가?
소고울리며 횡분(橫汾)한 즐거움6720)을 그 누가 알 것인가?
오늘날 다시 찾으니 옛일이 되었구려”하였다.【월산대군(月山大君)】
진무제도(晉武帝圖)
무제(武帝)가 처음 즉위(卽位)한 것은 위(魏)나라의 각박(刻迫)하고 사치(奢侈)한 뒤였으므로, 이를 인덕(仁德)과 검소(儉素)로써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수레끄는 소의 청사(靑絲)6721)로 된 가슴걸이가 끊어졌습니다.”하니,
명하기를,
“청마(靑麻)로 대치하라.”하였다.
또 태의(太醫) 사마정거(司馬程據)가 치두구(雉頭裘)를 바쳤는데,
무제는 궁전(宮殿)앞에서 불사르게 하고, 내외(內外)에 칙명(勅命)하여,
감히 이상한 기교(技巧)와 기이한 의복(衣服)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게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동작대(銅雀臺)는 기울어서6722) 왕기가 쇠하니,
진왕이 창업하여 정신을 차릴 땔세.
사치한 전조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였고,
어질고 검소함은 천하가 다 알았네.
꿩털의 갖옷은 불에 던지고,
푸른 실 가슴걸이를 새로 고쳐 갈았네.
석두성(石頭城)6723) 한구석에 항복의 기를 세우게 했으니,
성공한 그 의기를 버리지 마오.”하였다.【김흔(金訢)】
무제가 이미 오(吳)나라를 평정하고서는 자못 놀이를 일삼아 정사(政事)를 게을리 하였다. 손호(孫皓)6724)의 궁인(宮人) 5천명을 선발하여 궁(宮)에 들이게하여 액정(掖庭)6725)이 만인(萬人)이 될 정도였다.
늘 양거(羊車)를 타고서 마음내키는대로 다니며 편리한 대로 잔치를 베풀고 거기서 자기도 하니, 궁인(宮人)들이 저마다 댓잎을 문에 꽂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서 임금의 수레를 유도하였다.【후암(後暗)】시(詩)에 이르기를,
“금릉(金陵)6726)을 파하고부터 차츰 교만해져,
여색에 빠지므로 정사에 게을렀네.
오천명의 궁녀를 오궁(吳宮)에서 선발했고,
열둘의 누대는 진전(晉殿)에 드높았네.
짐연(鴆宴)을 베풂은 탐욕에서 온 것인데,6727)
양거가 가는 곳에 몇 밤이나 보냈던가?
유연(流連)6728)함은 원래 포상의 계획이 못되는 것,
오마(五馬)의 집안에 화는 끊이지않았네.6729)”하였다.【서거정(徐居正)】
당현종도(唐玄宗圖)
현종(玄宗)이 처음 즉위하여서는 풍속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하여 수레와 복식(服飾)을 제한하여 유사(有司)로 하여금 금은(金銀)의 완구(玩具)를 녹여서 군국(軍國)의 용도에 공급하게 하였으며, 주옥(珠玉)과 금수(錦繡)를 궁전앞에서 태우게 하였다.
또 주옥을 캐는 것과 조각을 하여 완구를 만드는 것을 금하였으며, 직금방(織錦坊)도 다시 폐지시켰다. 현종은 원중(苑中)에 보리를 심어놓고 황태자 이하를 거느리고 몸소 수확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종묘(宗廟)에 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손수하는 것이며, 또한 너희들로 하여금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하고,
이어 시신(侍臣)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말하기를,
“근년에 사람을 시켜 볏모[苗稼]를 순시하여 검사하게 했으나 대답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않은 것이 많으므로, 내가 직접 심어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또 《춘추(春秋)》에는 맥(麥),화(禾) 글자를 쓰지않았으니,
이는 어찌 옛사람이 중하게 여김이 아니겠느냐?”하였다.【선명(先明)】
시(詩)에 이르기를,
“처음에 임금이 되고선 승평에 뜻을 두어,
현단복 면류관으로 정사에 힘을 썼네.
뜰앞에서 구슬태워 검소한 덕을 밝히었고,
원중에 보리심어 제사에 이바지했네.
백년의 풍속이 마침내 귀화되어,
그 당시 황손도 농사를 이해했네.
끝까지 본심대로 욕심을 막았던들,
때묻지않은 그 마음이 자연히 밝았으리”하였다.【이극기(李克基)】
현종이 제위(帝位)에 있은 지 해가 오래되자 차차 사치의 욕심이 늘어나고 정사(政事)에 게을러져서 수왕(壽王)6730)의 비(妃) 양씨(楊氏)를 맞아들여 귀비(貴妃)를 삼고, 오로지 음악과 미색(美色)으로 즐겼다.
잔치[酺宴]를 할 때마다 먼저 태상아악(太常雅樂)으로 좌부(坐部), 입부(立部)6731)를 베푼 뒤에, 북과 취주악으로 된 호악(胡樂)6732)과 교방(敎坊)6733), 부현(府縣)의 산악(散樂)6734)과 잡희(雜戱)6735)로써 계속하였다. 또 산거(山車)6736)와 육선(陸船)6737)으로 악기(樂器)를 싣고 왕래(往來)하며, 또 궁인(宮人)을 동원하여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으로 춤추게 하였다.
또 무마(舞馬) 1백필(匹)로 하여금 잔을 물고 축수(祝壽)케하고, 또 물소[犀]와 코끼리[象]를 입장(入場)시켜 절도 하고 춤도 추게하니, 안녹산(安祿山)이 보고 기뻐하였다.
안녹산이 범양(范陽)에서 반역(叛逆)하자 임금이 재상(宰相)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니, 양국충(楊國忠)이 촉(蜀)으로 피난하자는 계책을 먼저 제안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옳게여겨, 오직 양귀비와 그의 자매(姊妹), 황자비(皇子妃)와 주황손(主皇孫), 그리고 친근한 환관(宦官)과 궁인(宮人)들만을 데리고 영추문(迎秋門)으로 나갔다.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장사(將士)들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모두 분노(憤怒)를 터뜨렸고, 진현례(陳玄禮)등은 화근(禍根)이 양국충때문이라 하여 그를 죽였다.
임금이 떠들썩함을 듣고 문에 나가 위로하고 대오(隊伍)를 수습하게 하였으나 군사(軍士)들이 응하지않았다.
임금이 고역사(高力士)를 시켜 이유를 물으니, 진현례가 대답하기를,
“양국충이 모반(謀叛)했으니, 귀비(貴妃)를 받들 수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陛下)는 은정(恩情)을 끊고 법을 바로잡으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짐(朕)이 마땅히 스스로 처리하겠다.”하였다.
고역사가 나아와 말하기를,
“장사(將士)가 이미 양국충(楊國忠)을 죽였는데 귀비(貴妃)는 폐하의 곁에 있으니, 그들이 어찌 감히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장사가 편안하면 폐하도 편안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이에 불당(佛堂)에서〈귀비를〉교살(絞殺)하게 하고 시체를 실어다 마외역 뜰에 두고서 진현례등을 불러 들어와보게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비로소 대오를 정돈하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양귀비가 궁중에 들어오면서부터
원앙전에 비단 장막이 항상 가려있었네.
호아(胡兒)가 목욕한 뒤에 추한소문 많았고6738),
척리(戚里)6739)가 교만해지니 일이 벌써 어긋났네.
비고(鼙鼓)가 홀연히 연새에서 일어나고,6740)
용여(龍輿)는 놀라서 금관성(錦官城)으로 향하였네.6741)
가련타, 예상곡을 즐기던 때에,
그 어찌 만리 피난길에 고생할 줄 알았으랴!”하였다.【이숭원(李崇元)】
당덕종도(唐德宗圖)
덕종은 양암(諒闇)6742)중에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예법에 따랐다.
이에 앞서 여러나라에서 길들인 코끼리를 여러번 바쳤는데, 임금이 말하길,
“코끼리는 사료(飼料)를 소비시키고 물성(物性)이 다른데,
무엇에 쓸 것인가?”하고,
명하여 형산(荊山)의 남쪽에 놓아주게 하였다.
그리고 표놜(豹貀), 투계(鬪雞), 응견(鷹犬) 따위도 모두 놓아주고,
또 궁녀 수백명도 내보내니, 중외(中外)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치청(淄靑)의 장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서로 돌아보고 말하기를,
“훌륭한 임금이 나왔다. 우리도 귀속할 수 있을까?”하였다.
또 조명(詔命)하기를,
“조집사(朝集使) 2명을 인솔하고 변방사람의 질고(疾苦)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진기한 짐승들을 길들여서,
먼 곳에서 중역(重譯)6743)을 거쳐 궁궐에 바쳤네.
천리밖에서 온 괴이한 물건 혐의쩍게 여겼으며,
백여명의 궁녀들을 모두 내어보냈네.
조야에서 서로가 성주라 일컬었고,
치청의 군사들은 깊은 인덕을 느끼었네.
조집사를 맞이하여 자문을 내리니,
사해의 궁한 백성 억울함을 걱정함이네.”하였다.【임사홍(任士洪)】
덕종(德宗)초년에 최우보(崔祐甫)가 정승이 되어 관대(寬大)함을 힘썼다. 그래서 당시에는 정치의 명성(名聲)이 널리 퍼져 정관(貞觀)6744)의 기풍(氣風)이 있다고 하였었다.
그런데 노기(盧杞)가 정승이 되고서는 의사(疑似)6745)함을 가지고 군신(群臣)을 이간(離間)시키고, 임금에게 권하여 아랫사람을 엄하고 각박하게 다스리도록 하니, 중외(中外)에서 실망하였다.
당시 양하(兩河)6746)에서 전쟁이 일어나 한달의 경비가 백만민(百萬緡)6747)이 넘어 국고(國庫)가 지탱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상(富商)의 돈[錢]을 조사하여 만민(萬緡)을 제하고 그 나머지를 차용하여 군용(軍用)에 공급(供給)하기로 하고, 장안(長安)의 상인(商人)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색출(索出)하여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면 문득 매를 때리니,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성이 그 때문에 파시(罷市)하고 서로 몰려와서 재상(宰相)이 탄 말[馬]을 가로막고 직접 노기(盧杞)에게 항의하니, 노기가 처음에는 그들을 위로하며 설득시키다가 막을 수 없는 형편이 되므로 말을 빨리 몰아 그 자리를 도망하였다.
경원(涇原)의 군사가 난리를 일으키자 임금이 봉천(奉天)으로 피난하였는데, 행궁(行宮)의 행랑[廡] 아래에다 각 도(道)에서 공헌(貢獻)한 물건을 쌓아놓고 현판을 달기를,「경림대영고(瓊林大盈庫)」라 하였다.
궁중(宮中)에서 외부의 물건을 살 때는 환관(宦官)을 시켜서 사오게하고 그를 궁시(宮市)라 하였는데, 남의 물건을 억지로 사면서 홍자색(紅紫色)으로 염색한 헌 옷과 낡은 비단을 척(尺), 촌(寸)쯤 찢어서 주고는, 이에 진봉문호(進奉門戶)6748)와 각가전(脚價錢)6749)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농부(農夫)가 나귀[驢]에 나무를 싣고가는데, 환관이 궁시라 하면서 나무를 뺏고 또 진봉문호를 요구했다. 농부가 말하기를,
“나의 부모와 처자는 내가 파는 나무로 생계를 이어가는데, 지금 이 나무를 너에게 주고 값은 받지않고 돌아가게하니, 네가 값을 주려고하지 않는다면 나는 죽을 뿐이다.”하고, 드디어 그 환관을 구타하였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근래에 비정(秕政)6750)이 처음보다 더 심하여,
뜻은 크나 재주가 없는데, 시기는 웬 말,
황옥(黃屋)6751)이 몽진함이 작은 일이 아닌데,
경림에 붙인 방은 누굴 위한 자랑인가?
상인의 돈 긁어들여 은혜는 별로 없고,
궁시를 베풀어서 원망을 많이 샀네.
이 마음의 어둡고 어리석음은,
노기의 간사함을 모른 것이네.”하였다.【서거정(徐居正)】
○현비병(賢妃屛)
주문왕후비도(周文王后妃圖)
주문왕(周文王)은 성덕(聖德)을 타고났고, 또 성녀(聖女)인 사씨(姒氏)를 맞이하여 비(妃)를 삼았다.
갈담시(葛覃詩)는 후비(后妃)가 자작(自作)한 것이다. 그 시에 이르기를,
“칡넝쿨 골짜기에 뻗어 그 잎새 무성하다.
꾀꼬리 날아 숲에 모여 사이좋게 지저귀네.
칡넝쿨 골짜기에 뻗어 그 잎새 더부룩하다.
이걸 베고 이걸 쪄서 가는 베짜고 굵은 베짜니 그 옷이 싫지않네.
사씨(師氏)6752)께 아뢰고 근친(覲親)가리라.
평복도 빨고 예복도 빨아,
이것 모두 빨아 놓고 부모님께 문안가려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주나라 후한 덕이 민심에 사무쳐서,
팔백년 기업이 이남(二南)6753)에서 비롯됐네.
문왕이 천명을 새롭게한 것을 알려면,
태사의 명성 계속됨을 보아야하리.
검소한 갈포는 천고에 빛나고,
종사(螽斯)6754)의 경사는 백명의 아들이네.
성모라야 성자를 낳을 수 있으니, 무왕의 장한 업적 지금까지 빛나네.”하였다.【이승소(李承召)】
주선왕강후도(周宣王姜后圖)
강후(姜后)는 어질고 덕이 있었다. 선왕(宣王)이 일찍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는데, 강후가 잠이(簪珥)6755)를 벗고 영항(永巷)에서 대죄(待罪)하면서 그 부모(傅母)를 시켜 왕(王)에게 말하게 하기를,
“첩(妾)이 재덕(才德)이 없어서 군왕(君王)으로 하여금 체통을 잃고 조회(朝會)를 늦게함으로써, 군왕이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덕(德)을 잃음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진실로 여색을 좋아하면 반드시 사치를 좋아하고 욕심내키는대로 하게됩니다. 난(亂)이 일어날 때에 그 난의 일어난 원인을 캐면 비자(婢子)에게서 일어났으니, 감히 비자의 죄를 청합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덕이 없어서 스스로 허물이 생긴 것이지 부인의 죄가 아닙니다.”하고,
곧 강후를 돌아오게 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여 아침일찍 조회하고
저녁 늦게 물러오게 되어서 드디어 중흥주(中興主)로 이름이 났다.
시(詩)에 이르기를,
“훌륭한 모든 신하가 모였다 돌아가고,
두어 길 아침해가 동위(彤闈)6756)에 올라왔네.
예로부터 여색을 즐김은 정치에 누가 되고,
편안함만 생각하면 화의 계기가 된다네.
자신이 죄책을 도맡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허물을 면케 했네.
혁혁하게 중흥한 그 업적은,
어진 후비가 잘못을 고쳐줌에 있었음을.”하였다.【박효원(朴孝元)】
제효공부인도(齊孝公夫人圖)
부인은 맹희(孟姬)이며, 예(禮)를 좋아하고 지조가 곧았다.
효공(孝公)이 낭야(琅琊)에 놀이를 갔을 때에 맹희가 따라갔는데, 수레가 달리다가 맹희는 추락하고 수레가 부서졌다.
효공이 사마입거(駟馬立車)로 맹희를 태워 오게하니,
맹희가 시어자(侍御者)로 하여금 장막을 베풀어 자신을 가리우게 하고,
부모(傅母)로 하여금 사자(使者)를 〈효공께〉보내어 아뢰기를,
“첩(妾)은 들으니,‘후비(后妃)가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안거치변(安車輜輧)6757)을 타며, 당(堂)에 내려갈 때는 반드시 부모나 아보(阿保)를 따르게하고, 진퇴(進退)를 하면 패옥(佩玉)을 울리며, 집안에서는 옷매무시를 단단히 하고, 들에서는 장막으로 가리운다’고 하니, 이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한결같이 하여 스스로를 단속하는 것입니다.
지금 입거(立車)에 덮개가 없으니, 감히 명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들에서 장막이 없으니, 감히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체통을 잃음이 많으니, 무례하게 살기보다는 일찍 죽는 것만 못합니다.”하였다.
사자가 달려와 고(告)하니, 공(公)이 다시 안거(安車)를 가져가게 했는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스스로 목을 매어달았었다.
부모가 구원하여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부모가 말하기를,
“사자가 왔고 수레에 덮개가 갖추어졌습니다.”하여,
맹희가 소생한 연후에 타고 돌아갔다.
시(詩)에 이르기를,
“당시의 군왕이 한가히 지내면서,
비빈을 데리고서 마음껏 노닐었네.
예사 때도 언제나 조행을 지킬텐데.
불시라고 그 어찌 예의를 벗어나료,
일찍이 이 몸은 가볍기가 잎새같음을 알았고,
예부터 큰 절개는 태산보다 중하다네.
늠름한 청풍은 영원히 어제처럼,
만대의 인간에게 완고함을 일깨우네.”하였다.【이파(李坡)】
초번희도(楚樊姬圖)
번희(樊姬)는 장왕(莊王)의 부인이다. 장왕이 즉위(卽位)하여 수렵(狩獵)을 즐겼는데, 번희가 간하였으나 듣지않으므로 이에 금수(禽獸)의 고기를 먹지 아니하니, 왕이 잘못을 고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였다.
왕이 어느 날 조회(朝會)를 늦게 파하였는데,
번희가 뜰에 내려가 영접하면서 묻기를,
“어째서 늦었습니까? 시장하고 피로하지 않으십니까?”하니,
왕이 말하기를,
“어진이와 대화하였으므로 시장하고 피로함을 모르겠소.”하였다.
번희가 말하기를,
“왕께서 어진이라고 한 이는 누구입니까?”하므로,
왕이,
“우구자(虞丘子)요.”하니, 번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왕이 묻기를,
“희(姬)가 웃음은 무슨 이유요,”하니,
대답하기를,
“우구자가 어질긴 어지나 충성스럽지는 못합니다.
지금 우구자는 초(楚)나라의 재상(宰相)이 된 지 10여년에 천거한 것이 자제(子弟)가 아니면 족형제(族兄弟)이지 어진이를 추천하고 불초(不肖)한 자를 물리쳤다함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어진이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어진이를 알고도 추천하지않았으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함이고,
어진이를 알지못하였다면 이는 지혜롭지 못함이니,
첩이 웃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우구자에게 그대로 이르니, 우구자가 자리를 옮겨앉으며 대답을 못하였다.
그리고 곧 피사(避舍)6758)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손숙오(孫叔敖)를 맞이하게하여 추천하니, 왕이 영윤(令尹)을 삼았는데,
초나라를 다스린 지 3년에 장왕(莊王)이 패왕(覇王)의 노릇을 하였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초왕(楚王)이 패왕노릇 한 것은 번희의 힘이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장왕이 호시(虎視)6759)하며 패권을 도모함은,
번희가 은밀히 내조한 공이었네.
짐승의 고기 한 점도 맛보지아니함은,
사냥만 즐기는 삼풍(三風)6760)을 경계코자 함이로다.
우구자가 어진이의 진로 막음을 비웃었는데,
감히 임금의 은총믿고 후궁을 함부로 대하랴!
손숙오를 맞아들여 영윤을 삼아,
훌륭한 임금되게하여 무궁토록 빛냈도다.”하였다.【이승소(李承召)】
한원제풍소의도(漢元帝馮昭儀圖)
소의(昭儀)는 선발(選拔)되어 궁(宮)에 들어왔다.
원제(元帝)가 어느 날 범기르는 우릿간에 가서 짐승들을 싸움시켰는데,
궁녀들은 모두 앉았었다.
곰이 우릿간에서 뛰어나와 난함(欄檻)을 잡고 어전(御殿)에 올라가려하니, 좌우의 귀인(貴人)들은 모두 놀라서 달아나는데, 풍첩여(馮婕妤)6761)가 곰을 가로막고 섰으므로 좌우 사람들이 곰을 때려 죽였다.
원제가 첩여에게 묻기를,
“사람의 심정으로는 누구나 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곰을 가로막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첩(妾)은 들으니,‘맹수(猛獸)는 사람을 만나면 멈춘다’고 합니다.
첩은 곰이 어좌(御座)에 이를까 염려되었으므로 몸으로 막았던 것입니다.”하니, 원제가 감탄을 하고 그로 인해 경중(敬重)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상림원 놀이에 훌륭한 일이 겹치니,
삼천의 미인들 구름처럼 따랐네.
우리에 있던 곰이 난함에 달려드니,
궁녀가 모두 놀라 정신없이 달아났네.
죽음을 무릅쓰고 짐승앞에 막아서니,
이 한몸 모두가 임금위한 충성일세.
구구한 보좌관들 얼굴이 두껍구나!
천자의 감탄이 풍소의(馮昭儀)에게 기울었네.”하였다.【박효원(朴孝元)】
한성제반첩여도(漢成帝班婕妤圖)
첩여(婕妤)는 훌륭한 재주로서 사리에 능통했다.
처음에 후궁(後宮)에 선발되어와서 소사(小使)가 되었었는데,
얼마 안되어 크게 사랑을 받아 첩여가 되었다.
임금이 후정(後庭)에 노닐면서 첩여와 함께 연(輦)을 타려고 하니,
사양하기를,
“옛 그림을 보건대 현성(賢聖)한 임금은 모두 명신(名臣)이 곁에 있었는데, 삼대(三代)6762) 이후의 못난 임금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 두었으니, 지금 함께 연을 탄다면 그와 같지 않겠습니까?”하니,
성제는 그 말을 옳게여겨 그만두었다. 태후(太后)가 듣고 기뻐하기를,
“옛날엔 번희(樊姬)가 있더니, 지금은 반첩여(班婕妤)가 있구나”하였다.
조비연(趙飛燕)의 자매(姉妹)가 총애를 받으면서 교만하고 투기하여 첩여를 참소하기를,
“사술(邪術)을 끼고서 저주(詛呪)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첩여를 돌아보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들으니, 죽고 삶은 명이 있고 부하고 귀함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올바름을 닦아도 오히려 복을 받지못하는데, 사술을 하여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가령 귀신이 앎이 있다면 신자(臣子)아닌 자의 허소를 받지않을 것이고, 만일 앎이 없다면 하소해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하니,
임금이 그 대답을 옳게여기고, 가엾게 생각하여 황금(黃金) 1백근을 하사(下賜)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연(輦)을 사양하던 때에는 임금의 은총이 융성하여,
한궁(漢宮)의 비빈들이 높은 풍도 사모했네.
한 점의 쉬파리가 깨끗한 몸에 생겼구나.
한 쌍의 비연(飛燕)6763)이 후궁에 들어왔네.
일찍이 죽고 삶은 천명임을 알았는데,
어찌 화와 복을 하늘에 빌겠는가?
황금을 헛된 상에 쓰지않는데,
장신궁(長信宮)은 해마다 무장이 비었네6764)”하였다.【강희맹(姜希孟)】
한명제명덕마황후도(漢明帝明德馬皇后圖)
황후(皇后)는 이미 궁위(宮闈)6765)의 황후가 되어서도 더욱 겸손하고 자숙하여 항상 대련복(大練服)을 입고 치마[裙]에는 단[緣]을 붙이지않았다.
초하루, 보름으로 여러 궁인들이 조청(朝請)6766)할 때의 황후의 웃옷[袍]이 거치른 것을 바라보고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여겼다가 가까이 가서 보고서는 웃었다. 황후가 겸사로 말하기를,
“이 비단은 특히 염색하기에 편의하기 때문에 입는 것이다.”하니,
육궁(六宮)이 모두들 탄식하였다.
황후는 길쌈하는 집을 만들어 탁룡원(濯龍園)안에서 누에를 기르며 자주가서 살펴보면서 그것을 오락(娛樂)으로 삼았다. 시(詩)에 이르기를,
“정숙한 규범은 부드럽고 곧으며,
황후의 높은 지위로도 조심하고 겸손했네.
화려한 의복 멀리하고 대련군을 입었고,
감옥의 죄수들도 황후의 인정에 감동했네.
언제나 검소한 덕은 궁중에서 먼저했는데,
어찌 사친에게 권세와 영화를 주었으랴,
이로부터 평생에 누에길쌈 중히 여겨,
어헌(魚軒)6767)이 때때로 탁룡원에 행차했네.”하였다.【노공필(盧公弼)】
당태종문덕장손황후도(唐太宗文德長孫皇后圖)
황후(皇后)는 천성(天性)이 인효(仁孝)하고 검소(儉素)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황제(皇帝)와 조용히 고사(古事)를 상의하면서 헌체(獻替)6 768)하여 도움이 된 것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혹 죄가 아닌 것을 가지고 궁인(宮人)에게 꾸중을 하면 황후도 겉으로 노여워하면서 직접 추국(推鞫)하기를 청하고, 구속하여 가두어 두라고 명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기다려 서서히 변명을 해주니, 그로 해서 궁중(宮中)에 형벌의 남용됨이 없었다.
임금이 어느 날 조회(朝會)를 하고 노여워하기를,
“이 촌늙은이를 꼭 죽이겠다.”하므로, 황후가 묻기를,
“누구입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위징(魏徵)이 늘 조정에서 나를 욕보인다.”하였다.
황후가 물러나와 조복(朝服)을 입고 뜰위에 섰으니,
임금이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황후가 말하기를,
“첩(妾)은 들으니,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하는데,
지금 위징의 곧음은 폐하(陛下)께서 밝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첩이 감히 하례하지 않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에 기뻐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문덕황후 겸손함은 타고난 천성이라,
함홍광대(含洪光大)함이 곤원(坤元)에 합하네.6769)
조용히 임금을 이해시켜 노여움 가시게 하고,
시서 읽기를 좋아하며 도의를 지키었네.
현상(賢相)이 빠짐을 보고 임종시에 천거하고,6770)
궁인이 꾸중받자 가두기를 자청했네.
만약 태후의 보필한 힘이 아니었다면,
간관(諫官)을 죽였다는 이름이 임금을 그르쳤으리”하였다.
【(손순효(孫舜孝)】
송인종광헌조황후도(宋仁宗光獻曹皇后圖)
황후(皇后)는 성품이 인자하고 검소하며 농사를 중하게 여겨 일찍이 금원(禁苑)에서 곡식을 심고 친히 누에를 길렀다. 경력(慶曆)6771)중에 위졸(衛卒) 몇 사람이 밤에 난(亂)을 일으켜 집을 넘어 들어와 침전(寢殿)을 두드렸다. 황후가 그 때 임금을 모셨었는데, 변(變)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임금이 나가려고 하니, 황후가 문을 닫고 가로막으며, 도지(都知) 왕수충(王守忠)을 급히 불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게 하였다.
황후는 도적이 반드시 불을 지를 것으로 예측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어 물을 가지고 그들의 뒤를 따르게 했는데, 도적이 과연 횃불을 들어 주렴[簾]에 불을 질렀으나 즉시 물을 부어 불을 껐다. 시(詩)에 이르기를,
“인자하고 순박함은 타고난 천성,
백성들의 어려움을 자신만은 알고 있네.
금원에 봄 깊으니 보리가 무성하고,
공상에 뽕잎이 다하니 누에가 다 자랐네.
간등(諫燈)6772)에서 벌써 간함을 들을 줄은 알았으나,
변을 당하고 바야흐로 기발한 지혜에 놀랐네.
천추에 끼친 자의 새로운 그림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리키며 거듭 감탄케하네”하였다.【박효원(朴孝元)】
송영종선인고황후도(宋英宗宣仁高皇后圖)
황후(皇后)가 신종(神宗)을 낳았는데, 신종이 즉위하고 높여서 황태후(皇太后)를 삼았고, 철종(哲宗)이 위(位)를 계승하고서는 태황태후(太皇太后)를 삼아 권세(權勢)가 청정(聽政)6773)과 같았다.
정시(廷試)에서 사람을 선발하는데, 유사(有司)가 천성(天聖)6774)의 고사(故事)를 따라 임금과 황후가 모두 전(殿)에 나오기를 청하니, 황후가 이를 만류하였다. 또 문덕전(文德殿)에서 책보(冊寶)6775)를 받으라고 청하니,
황후가 말하기를,
“모후(母后)가 당양(當陽)6776)함은 국가(國家)의 미사(美事)가 아니다.
더구나 천자(天子)의 정아(正衙)6777)에 어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감도 만족하다.”하고,
고사(故事)를 힘써 행하며 외가(外家)의 사은(私恩)은 억제하였다.
그리고 문사원(文思院)의 봉상(奉上)하는 물건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종신토록 하나도 취하지않으니, 사람들이 여자중의 요(堯), 순(舜)이라고 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천성의 유풍이 좋다할 게 못된다는,
선인황후 겸손함은 더할 수 없네.
수렴을 하면서 편전에 나아감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책보를 받는다고 정아에 나갈쏜가?
은전은 외척에게 이르지않았고,
공로는 마땅히 왕가에 있어야지.
여러 해된 새 법을 모두 제거했으니,
요, 순이라 일컬음이 그 어찌 과장이랴!”하였다.【노공필(盧公弼)】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성담수(成聃壽)는 천성이 담박(淡泊)하여 사물(事物)에 대하여 욕심내는 것이 없었다. 부모가 일찍 죽으니, 가산(家産)은 모두 아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태연하게 생활하였다. 어린 세 아우를 길러 혼인(婚姻)을 시켜주고 어루만지며 사랑하기를 부모 못지않게 하니,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였다.”
註6668]세 개의 병풍:세 개의 병풍이란 명군병(明君屛),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현비병(賢妃屛)을 말한다. 아래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註6669]선온(宣醞):임금이 내리는 술. 註6670]뇌사(耒耜):쟁기와 보습 註6671]서호(鉏鎒):호미 註672]염제(炎帝):신농씨(神農氏). 註6673]삼퇴례(三推禮):임금이 농사짓는 일을 솔선수범하는 뜻으로, 적전(籍田)에서 세 번 밭갈이하는 의식 註6674]황수(黃收):황색의 면관(冕冠) 註6675]치의[純義]:검은 색의 옷 註6676]동거(彤車):붉은 수레 註6677]모자(茅茨):띠로 엮어만든 지붕 註6678]간고(諫鼓):신문고(申聞鼓)같은 것.註6679]사악(四岳):요(堯)임금때 사방(四方)의 제후(諸侯)를 통솔하던 관직(官職) 註6680]양단(兩端):두 가지 일의 실마리 註6681]경운(卿雲):상서로운 구름註6682]역수(曆數):천명(天命) 註6683]중화(重華):순(舜)임금의 공덕(功德)을 칭송하여 일컫는 이름 註6684]천장(天丈):임금의 근위병(近衛兵).註6685]순거(簨簴):악기를 다는 틀 註6686]토악(吐握):토포악발(吐哺握髮)의 준말로, 밥을 먹거나 머리를 감을 때에 손님이 오면 먹던 밥을 뱉고 감던 머리는 움켜쥐고 나가서 마중함을 말함 註6687]희생(犧牲):제물 註 6688]여알(女謁):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믿고 권세를 부려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일 註6689]포저(苞苴):뇌물 註6690]참부(讒夫):아첨하는 무리 註6691]해도 망하고자: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걸(桀)은 폭군으로서, 해를 가리키며, “저 해가 없어져야 나도 망할 것이다.”했는데, 당시 백성들이 그의 폭정에 못견디어, “저 해는 언제나 없어질 것인가?”했다는 고사에서 인용이 된 말임 註6692]힐향(肸蠁):소리를 아는 벌레 이름으로, 영감(靈感)이 감통(感通)한다는 뜻으로 쓰여짐 註6693]혁엽(奕葉):누대(屢代)의 자손 註6694]서미(胥靡):부열(傅說)의 별칭 註6695]서백(西伯):문왕의 작호(爵號) 註6696]천자의 덕은 영대(靈臺)에서 전파되고:문왕(文王)이 영대(靈臺)를 지을 때 백성들이 그 덕에 감동되어 아들처럼 와서 도운 고사에서 온 말 註6697]주역(周易)의 이치는 유리(羑里)에서 연구했네:문왕(文王)이 주(紂)에게 감금되어 유리옥(羑里獄)에 갇혀있을 때《주역(周易)》을 연역(演譯)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 註6698]독부(獨夫):주(紂)를 가리킴 註6699]홍범(洪範):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으로, 우(禹)임금이 만든 것인데, 정치(政治),도덕(道德),천문(天文)등에 관한 내용임 註6700]여러 여씨(呂氏):당시의 외척(外戚) 세력자인 여산(呂産), 여록(呂祿)등을 가리킨 말 註6701]참승(驂乘):옆에서 왕을 모시고 탐 註6702]대저(代邸):대왕의 관저 註6703]도리비(道里費):오는 도중의 비용 註6704]취화(翠華):천자(天子)의 기치(旗幟) 註6705]단조(丹詔):임금의 조칙(詔勅) 註6706]제봉(提封):영지(領地), 즉 사경(四境)을 거느림 註6707]업성(鄴城):위(魏)의 서울 註6708]일표(日表):제왕(帝王)의 의표(儀表) 註6709]초방(椒房):후비(后妃)의 궁전(宮殿) 註6710]정관(貞觀)의 다스림:정관(貞觀)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연호(年號)로, 태종때의 정치를 말함 註6711]당(唐), 우(虞):요(堯)와 순(舜)의 시대를 함께 이르는 말 註6712]서식(棲息):궁실(宮室)을 갖추지못하고 움막에서 짐승처럼 생활함을 가리킴 註6713]기구(器具):관(棺)을 말함 註6714]나[孤]:왕이 자신을 일컫는 말 註6715]치이(鴟夷):말가죽으로 만든 큰 자루 註6716]안거포륜(安車蒲輪):부들로 바퀴를 싸서 편하게갈수 있게 만든 혼자타는 수레 註6717]후씨(候氏):지명(地名) 註6718]백량편(柏梁篇):백량대부(柏梁臺賦)를 말함 註6719]신마(神馬)가 음보(音譜)전함:한무제(漢武帝) 태초(太初)4년에 한혈마(汗血馬)를 얻고서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지은 고사가 있음 註6720]횡분(橫汾)한 즐거움:뱃놀이하며 즐겼다는 말로, 횡분(橫汾)은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에,‘중류를 가로질러[橫中流]……분하를 건너다[濟汾河]’란 말을 줄인 것임 註6721]청사(靑絲):푸른 무명실 註6722]동작대(銅雀臺)는 기울어서:여기서는 위(魏)나라가 망한다는 뜻으로, 동작대(銅雀臺)를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지었으므로 일컬어진 것임 註6723]석두성(石頭城):오(吳)나라 손호(孫皓)가 항복한 성(城) 註6724]손호(孫皓):오나라의 마지막 임금. 註6725]액정(掖庭):후궁 註6726]금릉(金陵):오나라 수도 註6727]짐연(鴆宴)을 베풂은 탐욕에서 온 것인데:진(晉)나라 선제(宣帝)가 현석도(玄石圖)에,“소가 말을 계승한다.[牛繼馬]”고 한 말을 믿고 우씨(牛氏)를 꺼려 어느날 그의 장수였던 우금(牛金)에게 짐주(鴆酒)를 먹여 독살(毒殺)시켰는데, 이는 우씨(牛氏)가 사마씨(司馬氏)를 대신하여 군주(君主)가 될까 의심한 때문이었음 註6728]유연(流連):유연황망(流連荒亡)의 준말로, 주색(酒色)과 수렵(狩獵)에 탐닉(眈溺)하여 반성(反省)할 줄 모른다는 말 註6729]오마(五馬)의 집안에 화는 끊이지않았네:진(晉)나라 선제(宣帝)가,“소가 말을 계승한다[牛繼馬]”고 한 현석도(玄石圖)의 말을 믿고 우씨(牛氏)를 꺼려 우금(牛金)을 짐살(鴆殺)시켰으나 선제의 손부(孫婦)인 공왕비(恭王妃) 하후씨(夏侯氏)는 끝내 소리(小吏) 우씨(牛氏)와 간통하여 원제(元帝)를 낳았다. 오마(五馬)는 원제의 5형제를 말하는데, 원제가 처음에는 낭야왕(琅邪王)으로 있으면서, 서양왕(西陽王), 여남왕(汝南王), 남돈왕(南頓王), 팽성왕(彭城王)등의 형제와 협력하여 마침내 제위(帝位)에 올랐다. 당시 동요(童謠)에,“오마가 강을 건너 한 말은 용이 되었네.[五馬渡江 一馬爲龍]”한 데에서 일컬어진 말임. 여기의 시에서는 사실상 무제의 대가 끊긴 것을 뜻한 것임 註6730]수왕(壽王):현종의 아들 註 6731]좌부(坐部),입부(立部):음악(音樂)을 양부(兩部)로 나누어 당하(堂下)에서 입주(立奏)하는 자를 입부기(立部伎), 당상(堂上)에서 좌주(坐奏)하는 자를 좌부기(坐部伎)라 함 註6732]호악(胡樂):호인의 음악 註6733]교방(敎坊):장악원(掌樂院) 註6734]산악(散樂):민간의 음악 註6735]잡희(雜戱):광대놀이 註6736]산거(山車):산 모양을 화려하게 꾸민 수레 註6737]육선(陸船):배모양으로 만든 꽃수레 註6738]호아(胡兒)가 목욕한 뒤에 추한 소문 많았고:호아(胡兒)는 안녹산(安祿山)을 가리킨 말로, 안녹산이 양귀비(楊貴妃)가 쓰는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한 것을 이름 註6739]척리(戚里):여기서는 양귀비(楊貴妃)의 형제(兄弟), 자매(姉妹)를 가리킴 註6740]비고(鼙鼓)가 홀연히 연새에서 일어나고:비고(鼙鼓)는 기병(騎兵)이 마상(馬上)에서 치는 북. 안녹산(安祿山)이 반역(叛逆)을 일으킴을 가리킨 말 註6741]용여(龍輿)는 놀라서 금관성(錦官城)으로 향하였네: 용여(龍輿)는 임금이 타는 수레. 당현종(唐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서촉(西蜀)으로 간 것을 말함. 註6742]양암(諒闇):거상(居喪) 註6743]중역(重譯):이중 통역. 제3국과의 언어가 통하지않아 이중통역을 거치는 일 註6744]정관(貞觀):당(唐)태종(太宗)의 연호 註6745]의사(疑似):분간하기 어려움 註6746]양하(兩河): 하남(河南)과 하북(河北) 註6747]백만민(百萬緡): 민(緡)은 돈꿰미의 단위. 註6748]진봉문호(進奉門戶): 궁에 바칠 물건 註6749]각가전(脚價錢): 심부름값 註6750]비정(秕政): 학정(虐政) 註6751]황옥(黃屋): 임금의 수레 註6752]사씨(師氏): 보모(保姆) 註6753]이남(二南):《시경(詩經)》국풍(國風)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키는데, 왕화(王化)의 기초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풍(詩風)이라하여 일컫는 말 註6754]종사(螽斯):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 한 번에 아흔 아홉개의 알을 낳는다하는데, 문왕(文王)의 아들이 아흔 아홉이므로, 비유로 일컬어지는 말 註6755]잠이(簪珥): 비녀와 귀고리 註6756]동위(彤闈): 궁궐(宮闕). 궁전(宮殿)을 붉게 칠하였으므로 일컬어진 말 註6757]안거치변(安車輜輧): 앉아서 타는 수레로, 덮개가 있는 것 註6758]피사(避舍): 피삼사(避三舍)의 준말로, 곧 상대에게 양보한다는 뜻임註6759]호시(虎視): 호시탐탐(虎視眈眈)의 준말 註6760]삼풍(三風):《서경(書經)》이훈(伊訓)에서 말한 세 가지의 나쁜 풍습. 즉 무풍(巫風), 음풍(淫風), 난풍(亂風) 註6761]풍첩여(馮婕妤): 첩여는 소의(昭儀)되기 전 직명 註6762]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 註6763]한 쌍의 비연(飛燕): 조비연(趙飛燕)의 자매를 가리킴 註6764]장신궁(長信宮)은 해마다 무장이 비었네: 반첩여(班婕妤)가 조비연(趙飛燕)의 질투를 피하여 장신궁(長信宮)에서 태후(太后)를 봉양(奉養)하고 있음을 가리킨 말 註6765]궁위(宮闈): 중궁(中宮) 註6766]조청(朝請): 조회(朝會)를 뜻한 말로, 봄에는 조(朝), 가을에는 청(請)이라 함 註6767]어헌(魚軒): 물고기 가죽으로 장식한 왕후의 수레 註6768]헌체(獻替): 임금에게 선(善)을 권함 註6769]함홍광대(含洪光大)함이 곤원(坤元)에 합하네: 황후(皇后)의 덕을 일컫는 말.《주역(周易)》곤괘(坤卦)에 있는 말로, 땅의 덕은 무엇이든 포용(包容)하지 않음이 없음을 뜻함인데, 여기서는 장손황후(長孫皇后)의 덕을 거기에 비한 것임. 註6770]현상(賢相)이 빠짐을 보고 임종시에 천거하고: 장손황후(長孫皇后)가 임종시에, 물러나있는 방현령(房玄齡)을 버려두지말라고 태종(太宗)에게 권유한 것을 말함 註6771]경력(慶曆): 인종(仁宗)의 연호 註6772]간등(諫燈):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망석(望夕)에 장등(張燈)을 하려하니, 조황후(曹皇后)가 이를 간하여 중지시킴을 말함 註6773]청정(聽政):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함 註6774]천성(天聖): 송(宋)인종(仁宗)의 연호 註6775]책보(冊寶): 옥책(玉冊)과 금보(金寶) 註6776]당양(當陽):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림 註6777]정아(正衙): 선정전(宣政殿)의 이칭(異稱).
○先是命採明君、先明後暗君、賢妃事跡, 畫爲三屛, 令文臣分題作詩, 又命掌令朴孝元、應校柳洵、進士成聃壽書事跡與詩于其上, 至是孝元等書進, 賜御衣各一領, 仍饋宣醞。
其明君屛。
《神農圖》: 神農知天地之道, 明於人之性, 以有天下。 古者民茹草飮水, 采樹木之實, 食蠃蚌之肉。 神農以謂人民衆多, 難以久養。 敎民種五穀, 爲耒耜鉏鎒以墾草莽, 然後五穀興。 令曰: ‘丈夫壯而不耕, 天下有受其飢者, 婦人豐盈而不織, 天下有受其寒者。’ 故神農親耕, 后親織, 以爲天下先。 詩曰:
“炎帝當年撫域中, 却將神敎立神功。 生民飢飽關農務, 天下寒溫在女工。 雨玉雨珠非世用, 親耕親織與民同。 千年幸覩三推禮, 願取神農保始終。”【玄碩圭。】
《帝堯圖》: 帝堯黃收純衣, 彤車白馬, 茅茨不剪, 土階三等勤於君道, 作布政之宮曰衢室, 立誹謗之木, 使天下得盡其言, 建進善之旌, 使天下得盡其才, 置諫鼓於朝, 使天下得攻其過。 一民飢, 曰我飢之也, 一民寒, 曰我寒之也。 由是百姓戴之如日月, 親之如父母。 有老人擊壤而歌曰: “日出而作兮, 日入而息兮。 耕田而食兮, 汲井而飮兮, 帝何力於我哉,” 詩曰:
“日日昏花史傳親, 聖中無若帝堯仁。 土階還有第茨儉, 謗木仍兼諫皷陳。 允協萬邦臻至理, 曰吁四岳動咨詢。 巍巍蕩蕩天爲大, 遐邇歸心無異人。”【洪應。】
《帝舜圖》: 帝舜畏天而愛人, 恤遠而親近,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時日月光華, 卿雲叢聚。 舜彈五絃之琴, 詠《南風》之詩曰: ‘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詩曰:
“海內謳歌曆數歸, 重華千載仰巍巍。 卿雲藹藹垂天仗, 瑞日輝輝照袗衣。 庶績凝時端冕儼, 五絃和處惠風微。 南薰一曲舒民慍, 皞皞熙熙遍九圍。”【洪貴達。】
《大禹圖》: 禹以五音聽治, 懸鐘、皷、磬、鐸、鞀以待四方之士, 爲銘於簨虡曰: ‘敎寡人爾者擊鼓, 論以義者擊鐘, 告以事者振鐸, 語以憂者擊磬, 有獄訟者搖鞀。’ 一饋十起, 一沐三握, 以勞天下之民。 出見罪人, 下車問而泣之, 左右曰: ‘罪人不順道, 君王何爲痛之,’ 禹曰: ‘堯、舜之人, 皆以堯、舜之心爲心, 寡人爲君, 百姓各自以其心爲心, 是以痛之,’ 詩曰:
“當年足跡遍寰瀛, 辛苦腁胝績用成。 擊皷撞鐘聞理道, 搖鞀振鐸達民情。 哀矜問罪存深愛, 吐握迎人見至誠。 恥俗不如堯、舜世, 至今功化妙難名。”【洪貴達。】
《成湯圖》: 湯適野, 見野人張網四面, 祝曰: ‘自天下四方, 皆入吾網。’ 湯乃去其三面, 祝曰: ‘欲左, 左, 欲右, 右, 不用命者, 乃入吾網。’ 諸侯聞之曰: ‘湯德至矣。’ 歸者四十餘國。 時大旱七年, 太史占之曰: ‘當以人禱。’ 湯曰: ‘吾所爲請雨者, 民也, 若以人禱, 吾請自當。’ 遂齋戒剪爪斷髮, 素車白馬, 身嬰白茅, 以身爲犧, 禱于桑林之野, 以六事自責曰: ‘政不節歟, 民失職歟, 宮室崇歟, 女謁盛歟, 苞苴行歟, 讒夫昌歟,’ 言未已, 大雨方數千里。 詩曰:
“夏德將衰日欲亡, 人心天命屬成湯。 七年荒旱憂民切, 六事兢皇責己詳。 一念至誠通肸蠁, 四郊甘雨澍汪洋。 自從祝網仁心大, 便做商家奕葉長。”【玄碩圭。】
《商高宗圖》: 高宗卽位, 思復興殷, 而未得其佐, 〔三〕年不言政事, 決於冢宰, 以觀國風。 高宗夜夢得聖人, 名曰說。 以夢所見視群臣百吏, 皆非也, 於是審厥象, 俾以形使百工營求之野, 得說於傅巖中, 與之語, 果聖人也。 擧以爲相, 殷國大治。 詩曰:
“湯德巍巍不可肩,高宗燁燁亦光前。三年不語心治道,一夜無端夢大賢 忽作鹽梅調巨鼎,便爲舟楫濟洪川。若敎胥靡終巖穴,殷社焉能六百年!”【洪貴達。】
《周文王圖》: 文王時有呂尙者, 年已八十餘, 釣於渭上。 文王將獵卜之, 卜人曰: “所獵非龍, 非彲, 非虎, 非熊, 而王者之輔也。” 遂出畋, 至磻溪, 果遇呂尙, 同車而歸, 立爲師。 嘗鑿沼得朽骨, 命葬之。 左右曰: “此無主矣,” 文王曰: “天子主天下, 諸侯主一國, 寡人固骨之主矣,” 遂葬之。 天下聞之, 曰: “西伯仁及朽骨, 況生者乎,” 詩曰:
“造周基業至文隆, 天下三分有一中。德感歧陽鳴有鳳,祥凝渭涘獵非熊。皇風時向靈臺播,易象曾從羑里窮。莫問生民游聖澤,九原枯骨尙恩蒙。”【金紐。】
《武王圖》: 武王代紂, 陳于商郊, 俟天休命, 紂率其旅若林, 會于牧野, 罔有敵于我師。 前徒(例)〔倒〕戈, 攻于後以北, 血流漂杵, 一戎衣天下大定。 乃反商政, 政由舊, 釋箕子囚封比干墓, 散鹿臺之財, 發鉅橋之粟, 大賚于四海, 而萬姓悅服。 詩曰:
“應順天人問獨夫, 倒戈攻北是前徒。 壤泉毅魄應銷恨, 縲絏忠臣得脫軀。 已放馬牛歸野牧, 更分財粟及民孤。 若非訪道傳《洪範》, 未識彝倫敍得無。”【李克培。】
《漢文帝圖》: 文帝初封代王, 守薄于代。 周勃等旣誅諸呂, 迎王立之, 王命(宋旦)〔宋昌〕驂乘, 張武等六人乘傳, 從詣長安, 至代邸, 遂卽天子位。 卽夕入未央宮, 夜拜宋昌爲衛將軍, 鎭撫南北軍, 還坐前殿, 下詔書赦天下。 元年有獻千里馬者, 帝曰: “鑾輿在前, 屬車在後, 吉行日五十里, 師行三十里, 朕乘千里馬, 獨先安之,” 於是還其馬與道里費, 而下詔曰: “朕不受獻也。 其令四方毋獻。” 帝每朝郞從官上書疏, 未嘗不止輦受其言, 言不可用置之, 言可用採之, 未嘗不稱善。 詩曰:
“由來恭儉足爲臨,況復驕奢不受侵。異物未能售喪志,善言方得沃虛心。翠葉停處皆休命,丹詔飛時盡德音。坐致提封開富庶,始知淸淨化民深。”【崔淑精。】
《唐太宗圖》: 太宗時, 畿內有蝗。 上入苑中見蝗, 掇數枝, 祝之曰: “民以穀爲命, 而汝食之, 寧食吾之肺腸。” 擧手欲呑之, 左右諫曰: “惡物或成疾。” 上曰: “朕爲民受災, 何疾之避,” 遂呑之, 是歲蝗不爲災。 上以宮女衆多幽閟可憫: “灑掃之餘, 亦何所用”, 於是遣官於掖庭西門簡出之, 前後所出三千餘人。 林邑獻五色鸚鵡, 新羅獻美女二人, 上曰: “林邑鸚鵡, 猶能自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 幷鸚鵡各付使者而歸之。 詩曰:
“鄴城宮殿已斜陽, 晋邸風雲滿八荒。 十萬義兵隨日表, 三千宮女出椒房。 放回思土籠中鳥,(含)〔呑〕却傷農口裏蝗。最是力行仁義效,致令貞觀比虞唐。”【任元濬。】
先明後暗君屛。
《吳夫差圖》: 吳王闔廬伐越, 越王句踐迎擊大敗之, 靈姑浮以戈擊闔廬, 闔廬病傷且死, 告其子夫差曰: “必毋忘越。” 夫差旣立, 使人立於庭, 苟出入必謂己曰: “夫差! 而忘越王之殺而父乎,” 則對曰: “唯。 不敢忘。” 常以報越爲志, 乃悉精兵, 以伐越, 敗之夫椒。 越王乃以甲兵五千, 棲於會稽, 進西施請退軍, 吳王乃許行成。【先明】 詩曰:
“吳曾呑越越呑吳,勝敗輸贏一局圖。兩地山河兵爛熳,先君髑髏血糢糊。讎如未復心寧忍,動必相箴誓不渝。直向夫椒能一雪,會稽當日目中無。”【徐居正。】
夫差旣得西施, 築姑蘇臺高三百丈 遊宴其上, 子胥諫曰: “臣恐不久爲麋鹿之遊。” 王不聽, 賜屬鏤之劍以死, 將死曰: “樹吾墓上以檟, 令可爲器, 抉吾眼置之吳東門, 以觀越之滅吳也。” 王慍曰: “孤不使大夫得有見也。” 乃取子胥之尸, 盛以鴟夷, 而投之於江, 吳終爲越所滅。【後暗】 詩曰:
“血戰夫椒得意歸,旋携春色上高臺。飄飄舞袖凌雲去,杳杳歌聲雜雁來。當日舘娃殊寂莫,至今江月獨俳徊。可憐千載東門目,猶作驚潮擊岸回。”【柳洵。】
《漢武帝圖》: 帝初卽位, 擧賢良方正直言極諫之士, 親策問之, 詔申、韓、蘇、張之言者皆罷之。 上雅尙儒術, 趙綰薦其師申公, 上使使者奉安車蒲輪, 束帛加璧迎之。【先明】 詩曰:
“至言當訪衆論聞,發策賢良闢四門。屛黜蘇張排異術,表章周孔右斯文。賑窮下詔仁恩洽,束帛徵賢禮意勤。若使力行爲治本,隆功何止漢明君!” 【任士洪。】
帝用方士公孫卿言, 令長安、甘泉作蜚廉桂觀、通天臺, 使卿持節設具而候神人, 益廣諸宮室, 起栢梁臺, 作承露盤, 高二十丈, 大七圍, 璘爲之。 上有仙人掌以承露, 和玉屑飮之, 云可以長生。 帝如候氏, 禮祭中岳太室, 從官在山下聞若有言萬歲者三。 詔加增太室祠, 遂東巡海上求神仙, 封泰山, 禪肅然。 復東北至碣石而還。【後暗】 詩曰:
“百尺銅臺入紫烟, 侍臣長奉《栢梁篇》。 已娛神馬傳音譜, 更恨匈奴賁戍邊。 祠罷甘泉還灑淚, 藥無蓬島可求仙, 誰知簫鼓橫汾樂, 今日重尋事已遷!”【月山大君。】
《晉武帝圖》: 帝初卽位, 承魏氏刻迫奢侈之後, 欲矯以仁儉。 有司言: “御牛靑絲靷斷”, 詔: “以靑麻代之。” 大醫司馬程據獻雉頭裘, 帝命焚之於殿前, 勅內外, 敢有獻異技異服者罪之。【先明】 詩曰:
“銅雀臺傾王氣衰, 晋王開創勵精時。 奢華欲矯前朝弊, 仁儉還應四海知。 已用雉裘投烈熖,更將牛靷替靑絲。石頭一片降幡竪,莫遣功成意氣。”【金訢。】
武帝旣平吳, 頗事遊宴, 怠於政事。 詔選孫皓宮人五千入宮, 掖庭殆將萬人。 常乘羊車, 恣其所之至便宴寢, 宮人競以竹葉揷戶, 鹽汁灑地, 以引帝車。【後暗】 詩曰:
“一破金陵氣轉驕, 色荒無乃倦臨朝。 五千歌舞吳宮選, 十二樓臺晋殿高。 鴆宴向來貪愒日, 羊車隨處幾經霄。 流連不是苞桑計, 五馬蕭墻禍不銷。”【徐居正。】
《唐玄宗圖》: 玄宗初卽位, 以風俗侈靡, 制乘輿服御金銀器玩, 令有司燒毁, 以供軍國之用, 其珠玉錦繡, 焚於殿前。 又禁採珠玉及爲刻鏤器玩, 復廢織錦坊。 帝於苑中種麥, 率皇子以下, 躬自收穫, 謂曰: “此將薦宗廟。 是以親之, 亦令爾等知稼穡之艱難也。” 因分賜侍臣等曰: “比歲令人巡檢苗稼, 所對多不以實, 故自種植以觀其成。 且《春秋》書無麥禾, 豈非古人所重也,”【先明】 詩曰:
“初臨九五志昇平, 端冕垂衣更勵精。 庭下焚珠昭儉德, 苑中種麥供粢盛。 百年流俗終歸化, 當日皇孫亦解耕。 畢竟操存能窒慾, 未塵心鑑自昭明。”【李克基。】
玄宗在位歲久, 漸肆奢慾, 怠於政事, 納壽王妃楊氏爲貴妃, 專以聲色自娛。 每酺宴先設太常雅樂坐部立部, 繼以皷吹胡樂敎坊府縣散樂雜戲。 又以山車ㆍ陸船載樂往來, 又出宮人舞霓裳羽衣。 又敎舞馬百匹銜盃上壽, 又引犀象入場或拜或舞, 安祿山見而悅之。 祿山叛於范陽, 上召宰相謀之, 楊國忠首唱幸蜀之策。 上然之, 獨與貴妃姊妹、皇子妃、主皇孫及親近宦官、宮人, 出迎秋門。 至馬嵬驛, 將士飢疲, 皆憤怒, 陳玄禮等以禍由楊國忠, 殺之。 上聞喧嘩, 出門慰勞, 令收隊, 軍士不應。 上使高力士問之, 玄禮對曰: “國忠謀叛, 貴妃不宜供奉。 願陛下割恩正法。” 上曰: “朕當自取之。” 高力士進曰: “將士已殺國忠, 而貴妃在陛下左右, 豈敢自安, 將士安, 則陛下安矣。” 上乃命縊殺於佛堂, 輿尸置驛庭, 召玄禮等入視之, 軍士皆呼萬歲, 始整部伍爲行計。【後暗】 詩曰:
“一自楊妃入禁圍, 鴛央金殿鎖羅幃。 胡兒浴後聲多醜, 戚里驕來事已違。 鼙鼓忽從燕塞動, 龍輿驚向錦城飛。 可憐耽玩霓裳日, 那料間關萬里歸!”【李崇元。】
《唐德宗圖》: 德宗在諒闇中, 動遵禮法。 先是諸國屢獻馴象, 上曰: “象費豢養, 而違物性, 將安用之,” 命縱於荊山之陽。 及豹貀鬪鷄鷹犬之類, 悉縱之, 又出宮女數百人, 中外皆悅。 淄、靑將士投兵相顧曰: “明主出矣! 吾屬猶反乎,” 又詔曰: “引朝集使二人, 訪遠人疾苦。”【先明】 詩曰:
“奇獸魁然性自馴, 遐方重譯獻楓宸。 尙嫌異物來千里, 幷出宮娥過百人。 朝野爭歡稱聖主, 淄靑相顧感深仁。 爲迎朝集垂淸問, 四海窮民恐未伸。”【任士洪。】
德宗初年, 崔祐甫爲相, 務崇寬大。 故當時政聲蕩然, 以爲有貞觀之風。 及盧杞爲相, 以疑似離間群臣, 勸上以嚴刻御下, 中外失望。 時兩河用兵, 月費百餘萬緡, 府庫不支。 括富商錢出萬緡者, 借其餘以供軍, 大索長安商賈所有貨, 意其不實, 輒加榜棰, 人不勝苦。 百姓爲之罷市, 相率遮宰相馬自訴, 盧杞始慰諭之, 勢不可遏, 疾馳得免。 涇原兵作亂, 上幸奉天, 於行宮廡下, 貯諸道貢獻之物, 榜曰瓊林大盈庫。 宮中市外間物, 以宦官爲使, 謂之宮市, 抑買人物, 以紅紫染故衣敗繒, 尺寸裂而給之, 仍索進奉門戶及脚價錢。 嘗有農夫以驢負柴, 宦者稱宮市取之, 又就索門戶。 農夫曰: “我有父母妻子, 待此然後食, 今以柴與汝, 不取直而歸, 汝尙不肯, 我有死而已。” 遂毆宦者。【後暗】 詩曰:
“年來秕政比初加, 志大才疎性忌何, 黃屋蒙塵非細事, 瓊林揭榜爲誰誇, 商錢取括寬恩少, 宮市開張斂怨多。 最識此心愚暗處, 不知盧杞是奸邪。”【徐居正。】
賢妃屛。
《周文王后妃圖》: 周文王生有聖德, 又得聖女姒氏以爲之妃。 《葛覃》之詩, 后妃所自作也。 其詩曰: “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萋萋。 黃鳥于飛, 集于灌木, 其鳴喈喈。 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莫莫。 是刈是穫, 爲絺爲綌, 服之無斁。 言告師氏, 言告言歸, 薄汚我私, 薄澣我衣。 害澣害否, 歸寧父母。” 詩曰:
“周家厚德在民心, 八百年基自二南。 要識文王新景命, 須看太姒嗣徽音。 儉昭絺綌輝千古, 慶篤螽斯則百男。 聖母也能生聖子, 丕承武烈照來今。”【李承召。】
《周宣王姜后圖》: 姜后賢而有德。 宣王嘗早臥晏起, 姜后脫簪珥待罪於永巷, 使其傅母通言於王曰: “妾之不才, 至使君王失禮而晏朝, 以見君王樂色而忘德也。 夫苟悅色, 必好奢窮慾。 亂之所興也, 原亂之興, 從婢子起, 敢請婢子之罪。” 王曰: “寡人不德, 寔自生過, 非夫人之罪也。” 遂復姜后而勤於政事, 早朝晏退, 遂成中興之名。 詩曰:
“濟濟群臣會且歸, 數竿朝日上彤闈。 由來樂色爲治累, 斗覺懷安是禍機。 直以此身當罪責, 庶敎君子免愆違。 須知赫赫中興業, 正在賢妃一格非。”【朴孝元。】
《齊孝公夫人圖》: 夫人孟姬, 好禮貞一。 公遊於琅琊孟姬從, 車奔, 姬墮車碎。 孝公使駟馬立車載姬以歸, 姬使侍御者舒帷以自障蔽, 而使傅母應使者曰: “妾聞妃后踰閾必乘安車輜輧, 下堂必從傅母阿保, 進退則鳴玉環佩, 內飾則結紐綢繆, 野處則帷裳擁蔽, 所以正心一意, 自斂制也。 今立車無輧, 非所敢受命者也, 野處無帷, 非所敢久居也。 二者失禮多矣, 無禮而生, 不若早死。” 使者馳以告, 公更取安車, 比其反也, 則自經矣。 傅母救之, 不絶。 傅母曰: “使者至, 輜輧已具。” 姬氏蘇, 然後乘而歸。 詩曰:
“當日君王自在閑, 故携妃嬪恣遊觀。 尋常每守操存地, 顚沛那踰禮義關, 早識此身輕似葉, 由來大節重於山。 淸風澟澟長如昨, 驚起人間萬代頑。”【李坡。】
《楚樊姬圖》: 樊姬, 莊王之夫人也。 莊王卽位好狩獵, 樊姬諫, 不止。 乃不食禽獸之肉, 王改過, 勤於政事。 王嘗聽朝罷晏, 姬下庭迎(日)〔曰〕, ‘何罷晏也, 得無飢倦乎,’ 王曰: “與賢者語, 不知飢倦也。” 姬曰: “王之所謂賢, 何也,” 曰: “虞丘子也。” 姬掩口而笑。 王曰: “姬之所笑, 何也,” 曰: “虞丘子, 賢則賢矣, 未忠也。 今虞丘子相楚十餘年, 所薦非子弟則族昆弟, 未聞進賢退不肖, 是蔽君而塞賢路。 知賢不進, 是不忠, 不知其賢, 是不智也, 妾之所笑, 不亦可乎,” 王悅以告虞丘子, 虞丘子避席不知所對。 於是避舍, 使人迎孫叔敖而進之, 王以爲令尹, 治楚三年, 莊王以覇。 史書曰: “楚王之覇, 樊姬之力也。” 詩曰:
“莊王虎視覇圖雄, 爲有樊姬密贊功。 獸肉不曾嘗一臠, 禽荒深欲戒三風。 笑他丘子防賢路, 敢恃君恩擅後宮, 迎得叔敖爲令尹, 使君榮顯耀無窮。”【李承召。】
《漢元帝馮昭儀圖》: 昭儀以選入宮。 帝嘗幸虎圈鬪獸, 後宮(曹從)〔皆坐〕。 熊逸出圈, 攀檻欲上殿, 左右貴人皆驚走, 而馮婕妤直當熊而立, 左右擊殺熊。 帝問婕妤: “人情皆驚懼, 何故當熊,” 對曰: “妾聞猛獸得人而止。 妾恐至御座, 故以身當之。” 帝嗟嘆, 以此敬重焉。 詩曰:
“上苑遊觀勝事重, 三千粉黛藹雲從。 圈熊忽逸來(樊)〔攀〕檻, 宮女皆驚走失容。 萬死獨能當獸立, 一身都是愛君忠。 區區傅輩顔堪厚, 天子咨嗟只屬馮。【朴孝元。】
《漢成帝班婕妤圖》: 婕妤賢才通辨。 始選入後宮爲小使, 俄而大幸爲婕妤。 帝遊於後庭, 嘗欲與婕妤同輦, 辭曰: “觀古圖畫, 賢聖之君, 皆有名臣在側, 三代之下末主, 乃有女嬖, 今欲同輦, 得無似之乎,” 帝善其言而止。 太后聞而喜曰: “古有樊姬, 今有班婕妤。” 趙飛燕姊妹有寵, 驕妬譖訴婕妤云: “挾邪詛祝。” 上顧問, 婕妤對曰: “妾聞死生有命, 富貴在天。 修正尙未蒙福, 爲邪欲以何望, 且使鬼神有知, 不受不臣之訴, 如其無知, 訴之何益, 故不爲也。” 上善其對而憐之, 賜黃金百斤。 詩曰:
“辭輦當時帝眷隆, 漢家妃嬪慕高風。 蒼蠅一點生昭質, 妖燕雙飛入後宮。 早斷死生緣賦命, 敢將禍福訴天公, 黃金不用施虛賞, 長信年年武帳空。”【姜希孟。】
《漢明帝明德馬皇后圖》: 皇后旣正位宮闈, 愈自謙肅, 常衣大練, 裙不加緣。 朔望諸姬主朝請, 望見后袍, 疎麤以爲綺縠, (執)〔就〕乃笑。 后辭曰: “此繒特宜染色, 故用之耳。” 六宮莫不嘆息。 后置織室蠶於濯龍中, 數往觀視, 以爲娛樂。 詩曰:
“從容閨範自柔貞, 坤極居尊戒滿盈。 衣斥奢華便大練, 獄因冤濫感皇情。 每將儉德先閨閫, 肯爲私親借勢榮。 自是平生重蠶織, 魚軒時向濯龍行。”【盧公弼。】
《唐太宗文德長孫皇后圖》: 皇后性仁孝儉素好讀書。 嘗與帝從容商略古事, 而獻替裨益弘多。 上或以非罪譴怒宮人, 后亦陽怒, 請自推鞫, 因命囚繫, 俟上怒息, 徐爲申理, 由是宮閫之中, 刑無枉濫。 上嘗朝怒曰: “會須殺此田舍翁。” 后問爲誰, 上曰: “魏徵每廷辱我。” 后退具朝服立于庭上, 上驚問其故。 后曰: “妾聞主明臣直, 今魏徵直, 由陛下之明故也, 妾敢不賀,” 上乃悅。 詩曰:
“文德謙恭稟性溫, 含洪光大合坤元。 從容啓沃雷霆霽, 好讀《詩》《書》道義存。 賢相見遺臨訣薦, 宮人當譴請囚原。 若非太后扶持力, 殺諫之名誤至尊。”【孫舜孝。】
《宋仁宗光獻曺皇后圖》: 皇后性慈儉, 重稼穡, 嘗於禁苑種穀親蠶。 慶曆中衛卒數人夜作亂, 越屋叩寢殿。 后方侍帝, 聞變遽起, 帝欲出, 后閉閤擁持, 趣呼都知王守忠, 使引兵入。 后度賊必縱火, 陰遣人挈水踵其後, 賊果〔擧〕炬焚簾, 水隨滅之。 詩曰:
“至仁純儉實天資, 民事艱難只自知。 禁苑春深分麥隴, 公桑葉盡長蠶絲。 諫燈已覺能回聽, 應變方驚喜出奇。 千載遺蹤新樣畫, 令人指點重嗟咨。”【朴孝元。】
《宋英宗宣仁高皇后圖》: 皇后生神宗, 神宗立, 尊爲皇太后, 哲宗嗣位, 尊爲大皇太后, 權同聽政。 廷試擧人, 有司請循天聖故事, 帝后皆御殿, 后止之。 又請受冊寶於文德, 后曰: “母后當陽, 非國家美事。 況天子正衙, 豈所當御, 就崇政足矣。” 力行故事, 抑絶外家私恩。 文思院奉上之物, 無問巨細, 終身不取其一, 人以爲女中堯、舜。 詩曰:
“天聖風流不是多, 宣仁謙抑更無加。 垂簾尙愧臨便殿, 受冊何心就正衙! 恩數未曾推外戚, 勳勞應已在王家。 年來新法除還盡, 堯舜稱名豈謾誇!”【盧公弼。】
【史臣曰: “聃壽性恬淡, 於物無所求。 父母早沒, 家産盡推與弟。 家甚貧窶, 處之晏如也。 幼孤三弟養育婚嫁, 撫愛不啻如父母, 人多稱之。”】
성종 83권, 8년(1477 정유/명성화(成化) 13년) 8월 4일(무술) 1번째기사
영의정 정창손이 석전의 예를 거행한 데에 대해 전문을 올리고 진하하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그 전문에 이르기를,
“도(道)가 소왕(素王)7723)보다 높은 이가 없어, 몸소 석채(釋采)7724)의 예(禮)를 행하셨습니다.
활쏘는 것은 군자(君子)와 같음이 있고, 비로소 벌주[角單]를 드는 의식을 거행하니, 기쁨이 신민(臣民)에게 넘치며, 일이 간책(簡策)에 빛났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온공(溫恭)함이 진실로 가득하여 바르게 도리에 통달하시고, 덕이 넓고 깊으시어 향사(享祀)하여 장양(將養)하시며, 정결한 제사(祭祀)의 의전(儀典)을 엄격히 하시어, 잔치하고 활을 쏘아 선발하는 시험의 규범을 회복(恢復)하시니, 우러러보기를 사방에서 용동(聳動)7725)하여, 풍교(風敎)가 백대(百代)에 더욱 나타나게 하시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등은 모두 용렬한 자질로서 다행히 창성한 때를 만나, 즐거워하고 윤비(倫比)7726)가 되어, 다시 주아(周雅)에서 노래를 이으며, 강녕(康寧)하시고 수(壽)하시기를 간절히 기주(箕疇)7727)에서 본받기를 빕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개 듣자니, 삼황(三皇)7728)이 위엄으로 제압함에 활과 화살을 이용하였고, 육예(六藝)7729)가 화용(和容)하였음은 모두 마시고 활쏘는 데[飮射]에서 말미암았으며, 사후(射侯)를 밝힌 것은 유우(有虞)7730)에서 비롯하였고, 선비를 뽑는 것은 주실(周室)에서 시작되었으니, 이는 삼사(三射)의 예(禮)를 숭상하고 오선(五善)7731)의 조목을 세웠던 것이다.
비록 변천은 혹 다르더라도 익히기에 태만함이 없었는데, 말세[叔季]에 내려와서 혹 강(講)함이 없었으니, 어찌 날로 주는 데에 겨를이 없어서, 시설(施設)하는데에 기다림이 있어서인가?
내가 어리고 덕(德)이 없는 몸으로 비서(丕緖)를 이어받아, 능히〈소임을〉짊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였는데, 오히려 조종(祖宗)의 신령에 힘입고 보필의 힘을 받아, 조정(朝廷)이 약간 화흡(和洽)하고, 변비(邊鄙)가 경급(警急)하지 아니하여, 중외(中外)가 편안한 지 대개 또한 여러 해가 되었으니, 마땅히 사후(射侯)를 하여서 덕(德)을 보여야 할 것이다. 어찌 양(羊)을 아껴서 예(禮)를 버리겠는가?
이에 길신(吉辰)을 택하여 문묘(文廟)에 이르러서 몸소 사채(舍菜)7732)의 예를 행하고, 겸하여 선비를 뽑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사단(射壇)에 나아가 물채(物采)를 갖추어 베푸니, 하관(夏官)7733)은 진퇴(進退)의 규범을 나누고, 영공(伶工)은《시경(詩經)》의 빈번(蘋繁)의 악절(樂節)을 아뢰었다. 주피(主皮)7734)의 능함은 다투지않으나 군자(君子)의 다툼은 볼 만하여,
군신(君臣)의 의(義)를 밝히고 백가지 예[百禮]가 차례를 세웠다.
더구나 이 예(禮)의 행함이 서민(庶民)에게 통달하여 향음(鄕飮)의 의식도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이니, 소재지(所在地)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은 그 내 뜻을 본받아, 이 한가한 때에 미쳐서 때때로 거행하여, 우리의 태평한 즐거움을 함께 하여 예양(禮讓)의 풍도를 흥기하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아아! 무(武)에 칠덕(七德)7735)이 있는 것은 보대(保大)하고 정공(定功)하는 그릇이 되는 것이며, 오병(五兵)7736)을 중히 하는 것은 포란(暴亂)을 금즙(禁戢)하는 것이니, 융기(戎器)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전례(典禮)의 옳은 말이겠는가?
아아! 그대 신서(臣庶)들은 나의 지극한 회포를 본받으라”하였다.
註7723]소왕(素王): 여기서는 공자(孔子)를 가리킴. 註7724]석채(釋采): 소나 양의 희생이 없이 채소만 올리고 지내는 간단한 석전(釋奠). 註7725]용동(聳動): 몸을 솟구쳐 움직임. 註 7726]윤비(倫比): 제배(儕輩). 註7727]기주(箕疇): 기자(箕子)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함. 註7728]삼황(三皇): 중국 고대의 천자(天子). 곧 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황제(皇帝) 또는 수인씨(燧人氏). 註7729]육예(六藝): 선비로서 배워야 할 여섯 가지의 일. 즉,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註7730]유우(有虞): 순(舜)임금을 말함. 註7731]오선(五善): 활을 쏘는 데에 있어서, 화지(和志),화용(和容),주피(主皮),화송(和頌),흥무(興儛)를 말함. 註7732]사채(舍菜 ): 석채(釋采). 註7733]하관(夏官): 병조(兵曹). 註7734]주피( 主皮): 화살로 과녁의 가죽을 쏘아 뚫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하는 것. 註7735]칠덕(七德): 무(武)의 일곱 가지 덕(德). 곧, 금포(禁暴),즙병(戢兵),보대(保大),정공(定功),안민(安民),화중(和衆),풍재(豐財)를 말함. 註7736]오병(五兵): 다섯 가지의 무기. 과(戈),수(殳),극(戟),추모(酋矛),이모(夷矛). 또는 궁(弓),수(殳),모(矛),과(戈),극(戟). 또는 도(刀),검(劍),모(矛),극(戟),시(矢)를 말함.
○戊戌/領議政鄭昌孫等上箋陳賀。 箋曰:
道莫尊於素王, 躬行釋采之禮。 射有似乎君子, 肇稱揚觶之儀, 喜溢臣民, 事光簡策。 恭惟主上殿下, 溫恭允塞, 齊聖廣淵。 我享我將, 式嚴禋祀之典, 以燕以射, 復恢選試之規, 觀瞻聳動於四方, 風敎益著於百代。 伏念臣等俱以庸質, 幸際昌辰, 於樂於倫, 歌再賡於《周雅》, 曰康曰壽, 祝切効於箕疇。
下敎曰:
蓋聞三皇威制利用弧矢, 六藝和容, 率由飮射, 明侯昉於有吳〔虞〕, 擇士徵於周室, 玆所以崇三射之禮, 立五善之目。 雖沿革或殊, 遵習無曠, 叔季以降, 莫之或講, 豈日給之不暇, 將施設之有待, 予以眇薄, 纉承丕緖, 懼不克荷, 夙夜祗畏。 尙賴祖宗之靈, 承弼之力, 朝廷稍洽, 邊鄙不警, 中外寧謐, 蓋亦有年。 宜射侯而觀德, 詎愛羊而去禮, 廼撰吉辰, 戾于文廟, 躬行舍菜之禮, 兼擧取士之儀。 爰就射壇, 備陳物采, 夏官分進退之規, 伶工奏蘋蘩之節。 主皮之能莫尙, 君子之爭可觀, 君臣明義, 百禮式序。 況斯禮之行, 達于庶民, 鄕飮之儀, 亦所當講, 所在監司守令, 其體予意, 迨此閑暇, 以時擧行, 同我大平之樂, 以興禮讓之風, 豈不美歟, 於呼! 武有七德, 所以保大定功, 器重五兵, 所以禁戢暴亂, 在詰戎而尙爾, 況典禮之可言, 咨爾臣庶, 體予至懷!
성종 128권, 12년(1481 신축/명성화(成化)17년) 4월 19일(계해) 6번째기사
주문사서장관 권건의 문견 사건
주문사서장관(奏聞使書狀官) 권건(權健)이 중국에서 보고들은 사건을 바치기를,
“1. 신등이 옥하관(玉河館)에 이르자, 정동(鄭同)이 즉시 금내(禁內)에서부터 말을 달려 이르러 먼저 전하(殿下)의 안부를 묻고, 다음에 특별히 진헌(進獻)할 물건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사신이 대답하기를,‘없다’고 하니, 정동이 발끈 성을 내어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하기를,‘내가 전에 본국(本國)에 이르러 전하와 재상과 직접 약속하였는데, 어찌하여 응낙(應諾)한 약속을 저버리는가?’고 하였습니다.
대답하기를,‘지난번에 대인(大人)이 돌아가고 성절사(聖節使) 한한(韓僴) 이 갈 때에 토산(土産)으로 요구하는 물건을 모두 성지(聖旨)에 의하여 준비하여 바쳤으므로, 다시 다른 물건을 바칠 것이 없다.
또 황제의 성감(聖鑑)께서 어떻게 여기실지 알지못하겠기에 감히 그리 하지 못한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비록 다른 물건이 없다고 하더라도 다시 바치는 데 무엇이 해롭겠는가?
대저 인자(人子)가 그 어버이에게 효도할 때 스스로 마땅히 그 마음을 다할 뿐이지, 어찌 그 어버이가 좋아할는지 싫어할는지를 묻겠는가?
황제가 본국(本國)에서 진헌(進獻)하는 바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물건을 중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곧 본국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본국에서 황제를 섬기는 것은 황제가 본국을 대접하는 뜻과는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전하의 허물이 아니라, 반드시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재상들의 논의가 자자(藉藉)하여 아마 이것을 가지고 선례(先例)를 만들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본국에서 지난해에는 매양 해청(海靑)을 바치고, 표리(表裏) 1벌을 하사(下賜)하면 또 즉시 사은(謝恩)하였으니, 그 노력과 비용을 따져볼 때 지금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지금 본국에서 황제를 섬기는 예(禮)가 이와 같으니 얼마나 박(薄)한가?
사신온 일을 장차 무슨 면목(面目)으로 황제에게 주달(奏達)하겠는가?
일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않는 것은 나에게 관계없으나, 두 노재상(老宰相)이 험한 길에 멀리 왔는데, 어찌 일을 이루어서 돌아가고자 아니하겠는가?’고 하므로, 사신이 말하기를,‘이미 잘못생각하였으니, 이를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만약 허락을 받고 돌아간다면, 마땅히 사은(謝恩)하는 예(禮)가 있을 것이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이를 주달(奏達)하기를,「조선(朝鮮)의 사신이 동팔참(東八站)에 여진(女眞)의 성식(聲息)11128)이 있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물건을 창탈(搶奪)당할까봐 두려워해서, 그 짐바리[駄]에 실었던 물건을 간추렸기 때문에 특별히 진헌(進獻)하는 물건을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한다면, 황제도 반드시 이를 믿을 것이다’하였습니다.
사신이 말하기를,‘이러한 말은 매우 좋다. 우리들이 사신온 일은 비단 고명(誥命)과 각궁(角弓)문제뿐만 아니라, 동팔참(東八站) 하나의 길이 적경(賊境)과 매우 가까워서 여러 번 길이 막히고 저지를 당하여 중국에 조공(朝貢)하는 것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신로(新路)를 열도록 청하려는 것이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그 이남에 과연 다른 길이 있다.
그러나 중국 조정에서 새 진(鎭)을 봉황산(鳳凰山)에 세우기로 의논하였으니, 신로(新路)의 청은 그다지 긴요(緊要)치 않다.
그러나 세자(世子)를 책봉(冊封)하기를 청하는 일은 큰 문제인데, 어찌하여 늦추는가?’고 하므로, 사신이 말하기를,‘지금 왕비(王妃)의 고명(誥命)을 청하기 때문에 겸하여 청할 수는 없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말하기를,‘지난해에 북경(北京)에 왔을 때 나로 하여금 사사로이 진헌(進獻)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차 어떻게 할까?’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지금 폐지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구례(舊例)에 의해야 한다. 그 진헌할 물목(物目)을 써서오라’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즉시 물목을 써서 보여주니, 정동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얼굴을 부드럽게 해서 말하기를,‘그 숫자를 정해서 오라. 부족한 것은 장차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충당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황제에게 바친 물목은 백저포(白苧布) 10필(匹), 흑마포(黑麻布) 15필, 인삼(人蔘),세죽선(細竹扇),소죽선(小竹扇),우롱자(雨籠子),도자(刀子),백후지(白厚紙),필묵(筆墨)과 여러 가지 음식물(飮食物)등이었는데, 정동이 백저포 10필, 흑마포 35필을 더하도록 하고, 또 스스로 녹면포(綠綿布) 10필, 수록면포(水綠綿布) 15필, 녹면주(綠綿紬) 10필을 추가하였습니다.
그 한씨(韓氏)에게 진헌(進獻)할 물목(物目)은 백저포(白苧布) 5필, 흑마포(黑麻布) 15필, 인삼(人蔘), 세죽선(細竹扇), 소죽선(小竹扇), 우롱자(雨籠子), 백후지(白厚紙), 필묵(筆墨)과 여러가지 음식물이었는데, 정동이 또 백저포 5필, 흑마포 10필을 더하도록 하고, 또 스스로 수록면포(水綠綿布) 4필을 추가하였습니다.
예궐(詣闕)하여 숙배(肅拜)할 때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진헌(進獻)할 물건을 가지고 동화문(東華門)으로 가서 올려 바쳤는데, 정동이 안에서부터 나와 이르기를,‘황제가 진헌(進獻)한 물건을 보시고 자못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였고, 정동이 또 사신에게 이르기를,‘성지(聖旨)로써 재상에게 사사로이 묻기를, 「왕비(王妃)가 이미 아들을 낳았는데, 무슨 과실(過失)이 있어서 이를 폐(廢)하는가?」고 하셨다’고 하므로, 사신이 대답하기를,‘폐비(廢妃)가 덕(德)을 잃은 짓이 자못 많아서 부득이 이를 폐하는 것이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내가 마땅히 들어가서 아뢰겠다’고 하고,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조금 뒤에 도로 나와서 말하기를,‘이미 아뢰었다’고 하였습니다.
정동이 또 말하기를,‘황제가 궁각(弓角)의 일을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궁각(弓角)은 본국(本國)의 토산(土産)이 아니기 때문에 이 앞서는 숫자의 다소에 구애하지아니하고 그 수매(收買)를 맡겼는데, 근래에 단지 매년 한 차례 수매(收買)를 허락하여 50부(副)를 넘지못하니, 용도에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다시 주청(奏請)하는 것이다」고 하였다’하였습니다. 사신 하나가 한씨(韓氏)앞에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그 사연에 이르기를, ‘조카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한명회(韓明澮)는 삼가 고모님 존전(尊前)에 배상(拜上)합니다.
조카는 지금 가슴에 품은 생각이 있어 좌우(左右)에 앙달(仰達)하여, 엎드려 부주(敷奏)하기를 희망합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성격이 패려(悖戾)하여 왕조모(王祖母)와 왕모(王母)에게 불순(不順)하고, 덕(德)을 잃는 짓이 상당히 많아 종사(宗社)를 능히 잘 받들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조모님과 어머님의 말씀을 받들어 종묘(宗廟), 사직(社稷)에 고(告)하고 궁밖의 사제(私第)에 폐(廢)하여 두었습니다.
돌아보건대 내조(內助)는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으므로, 부실(副室) 윤씨(尹氏)로써 왕비(王妃)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진주(陳奏)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러한 사유(事由)를 갖추어
어전(御前)에 곡진히 주달(奏達)하여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특별히 하사(下賜)하게 해주소서. 지극한 소원(所願)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본국이 3면으로 적의 침입을 받는데, 근일에는 두 번이나 본국(本國)에 조칙(詔勅)하여 야인(野人)들을 협공(挾攻)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흔단(釁端)이 생긴 것이 적지 않으므로 군사 방비(防備)를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활의 재료로 필요한 수우각(水牛角)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바가 아니므로 오로지 중국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건의(建議)하는 자가 「본국인(本國人)이 궁각(弓角)을 수매(收買)하여 야인(野人)들에게 전매(轉賣)한다」고 하였던 탓으로 인하여 비로소 금방(禁防)의 법을 세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야인(野人)들과 흔단(釁端)이 생긴 지는 이미 오래 되었는데, 어찌 감히 활의 재료를 판매하여 적인(敵人)을 돕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중국조정을 공경하고 섬겨서 은혜를 깊이 입었고, 여러 차례 서적(書籍), 악기(樂器)를 하사하였습니다.
또 화약(火藥)은 병가(兵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바인데도 홍무(洪武) 7년동안에 고황제(高皇帝)가 이를 의심없이 하사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폐하(陛下)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곡진히 은총을 베풀어서, 무릇 주달(奏達)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윤허(允許)를 내려 주었는데, 오로지 궁각(弓角)문제만은 금지를 하시니, 온 나라 신민들이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성화(成化)13년11129)에 사유를 갖추어 진청(陳請)하여 성은(聖恩)을 받게 되어, 매년에 한 차례씩 50부(副)를 수매(收買)하도록 허락하시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지극한 감격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궁장(弓張)11130)의 제조를 비록 많이 하지만 용도를 감당할 재료는 아주 적으며, 겸하여 또 쉽게 꺾어지거나 훼손(毁損)되는 지경에 이르니, 가지고 있는 50부(副)로서는 용도에 넉넉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아울러 이 뜻을 가지고 어전(御前)에 곡진히 진달(陳達)하여 특별히 허락해주시고, 지난해의 사례(事例)를 참작하여 매양 본국의 사신이 올 때마다 가지고 오는 값이나 돈의 다소에 따라서 숫자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수매(收買)하게 해주소서.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1. 2월 24일에 태감(太監) 강옥(姜玉)이 회동관(會同館)에 이르러 사신의 방(房)에 나와서 소합유(蘇合油) 1근(斤), 용뇌(龍腦) 1근을 특별히 주었는데, 모두 어봉인제(御封印題)11131)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르기를,‘내가 황제에게 아뢰기를,「본국에서 소합유(蘇合油)와 용뇌(龍腦)등의 약을 구하고자 하는데, 이를 구하여도 그 진짜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 재상이 신에게 부탁하여 간절히 이를 구하고 있습니다」고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마땅히 이를 주도록 하라」고 하고, 인하여 내탕(內帑)에 간직한 것을 내주면서 말하기를,「 한명회(韓明澮)에게 주도록 하라. 이어서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이 때문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머리를 조아리고 배사(拜謝)하니, 강옥이 인하여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서 대접하였습니다.
마포(麻布) 10필과 선자(扇子)와 우롱(雨籠)등의 물건을 회증(回贈)하였더니, 강옥이 말하기를,‘내가 감히 사사로이 받을 수는 없고, 장차 황제에게 바치겠다’고 하였습니다.
강옥이 가지고 온 술그릇에는 모두 어제시제(御製詩題)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은병(銀甁)의 시(詩)에 이르기를,
‘밝은 시대에 석덕(碩德)을 등용하니
보불(黼黻)11132)이 황제의 모유(謀猷)11133)를 돕네.
금달(禁闥)에는 한가한 겨를이 많아
황류(黃流)11134)를 옥구(玉甌)11135)에 따르노라’하고,
또 한 면의 글제에 이르기를,
‘내금(內禁)의 은총(恩寵)이 높아
은근히 그 공(功)을 협주(協奏)하네.
금준(金樽)11136)으로 아객(雅客)11137)을 맞이하니,
힘써서 단충(丹衷)11138)을 다하리’하고,
또‘잔대(盞臺)로 뜰에 향기가 가득하다[盞臺滿庭芳]’라는 글제의 사(詞)에 이르기를,
‘경사스런 기운이 널리 펴지니,
어진 사람과 뛰어난 인물일세.
더구나 사해(四海)에서 오는 손님을 맞으니,
이름난 집안 어진 선비는 타고난 자질일러라.
빛나는 도학(道學)으로
경사(經史)11139)를 궁구(窮究)하여 정통하네.
정체(政體)를 논하면 이전(二典)11140) 삼분(三墳)11141)이요
은총(恩寵)으로 발탁하니 항상 황제의 궁전을 모시네.
아름다운 모유(謨猷)를 내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니,
방현령(房玄齡)11142), 두여회(杜如晦)11143)와 동류(同流)인가 하노라’하고, 또 말하기를,
‘심상하게 직업(職業)을 닦아도
그 단충(丹衷) 해를 꿰뚫네.
계옥(啓沃)11144)하기에 부지런히 힘써
존심(存心)으로 아울러 자기를 다스리도다.
오로지 날로 새로와지기를 힘써서
어려서는 배우고,
어른이 되어서는 실천함이
의(義)와 예(禮)가 아님이 없도다.
옛날에 도견(陶甄)11145)함이 지극히 공정하여
치도(治道)를 미륜(彌綸)11146)하니,
사책(史策)에 훌륭한 신하들이 나타나 있네.’하고,
또 잔면(盞面)에 글제하기를,
‘이 시대에 태평(太平) 세월을 이루니
은택(恩澤)이 창생(蒼生)을 보호하네.
조섭(調燮)하는 일은 원로(元老)에게 돌아가고
공훈(功勳)의 이름은 백세(百世)토록 영광일세.’하고,
또 이르기를,
‘세상이 태평스러운 날을 만나니
사람들은 부귀(富貴)한 때를 만났도다.
공사(公事)의 여가(餘暇)에 정취(情趣)를 즐기고
시(詩)와 술에 기분 좋게 취하기를 즐기노라.’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註11128]성식(聲息):군사를 일으킨 소식. 註11129]성화(成化)13년:1477 성종8년. 註11130]궁장(弓張):활.註11131]어봉인제(御封印題):황제(皇帝)가 사용하는 약이나 물건을 봉(封)하여 싸고 인장(印章)을 찍고 제목을 쓴 것 註11132]보불(黼黻): 무늬의 하나. 곧 임금을 잘 도와주는 문무 신하 註11133]모유(謀猷):계책 註11134]황류(黃流):술의 이명 註11135]옥구(玉甌):술 그릇 註11136]금준(金樽):금으로 만든 술항아리 註11137]아객(雅客):손님을 존칭하는 말. 註11138]단충(丹衷):충성된 마음.註11139]경사(經史):경전(經典)과 역사(歷史). 註11140]이전(二典):《서경(書經)》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 註11141]삼분(三墳):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의 서(書) 註11142]방현령(房玄齡):당(唐) 태종(太宗)때 명신 註11143]두여회(杜如晦):당태종때 명신 註11144]계옥(啓沃):임금에게 충언(忠言)을 드림 註11145]도견(陶甄):도인(陶人)이 흙으로 와기(瓦器)를 만들듯이 성왕(聖王)이 천하(天下)를 잘 다스림을 비유한 것임 註11146]미륜(彌綸):천지(天地)의 도(道)를 인용하여 인도(人道)에 알맞게 보합(補合)함을 이름.
○奏聞使書狀官權健, 進聞見事件: “一, 臣等到玉河館, 鄭同, 卽自禁內馳到, 先問殿下安否, 次問別獻之物幾何。 使答曰: ‘無。’ 同, 艴然變色曰: ‘我前到本國, 與殿下及宰相面約, 何負諾耶,’ 答曰: ‘頃者大人之還, 及聖節使韓僴之行, 土産耍子之物, 俱依聖旨備獻, 更無異物。 且未知聖鑑何如, 未敢爾。’ 同曰: ‘雖無他物, 何妨再獻乎, 大抵人子之孝其親, 自當盡心焉耳, 安問其親之喜不喜乎, 帝之重本國所獻, 非重其物也, 乃所以重本國也。 本國之事帝, 殊異乎帝之待本國之意。 然此非殿下之過也, 必議政府諸相, 論議藉藉, 恐以此成例耳。 本國於先年, 每進海靑, 賜一表裏, 又卽謝恩, 較其勞費, 與今相去幾何, 今者本國事帝之禮, 如此其薄, 爲來事, 將何面目, 奏於帝乎, 事之成否, 不干於我, 兩老宰相, 間關遠來, 豈不欲成事而歸乎,’ 使曰: ‘業已錯料, 悔之無及。 今若蒙準而還, 當有謝恩矣。’ 同曰: ‘然則我當奏之曰: 「朝鮮之使, 緣東八站有聲息, 恐被搶擄, 簡其駄載, 故別獻之物, 不得齎來。」 云則帝必信之。’ 使曰: ‘此言甚佳。 俺等爲來事, 非徒誥命、角弓也, 東八站一路, 與賊境甚近, 屢被邀截, 有礙朝貢, 故欲請開新路。’ 同曰: ‘迤南果有他路。 然朝廷議建新鎭于鳳凰山, 新路之請, 不甚緊要。 但請封世子, 事之大者, 何緩也,’ 使曰: ‘今請王妃誥命, 故不可兼請爾。’ 同曰: ‘然。’ 使曰: “昔年赴京時, 令我私獻, 今將若何,’ 同曰: ‘今不可廢也, 當依舊例。 其書所獻物目來。’ 使卽書物目示之, 同怒稍弛, 和顔以言曰: ‘定其數以來。 不足者, 將以吾所有充之。’ 其獻帝所物目, 白苧布十匹、黑麻(希)〔布〕十五匹、人蔘、細竹扇、小竹扇、雨籠子、刀子、白厚紙、筆墨、諸色食物等件。 同令加白苧布十匹、黑麻布三十五匹, 又自以綠綿布十匹、水綠緜布十五匹、綠綿紬十匹加焉。 其進韓氏處物目, 白苧布五匹、黑麻布十五匹、人蔘、細竹扇、小竹扇、雨籠子、白厚紙、筆墨、諸色食物。 同又令加白苧布五匹、黑麻布十匹, 又自以水綠緜布四匹加焉。 詣闕肅拜, 使、副使齎獻物, 詣東華門上進, 同自內而來謂曰: ‘帝見獻物, 頗有喜色。’ 同又謂使曰: ‘聖旨私問宰相曰: 「王妃旣生子, 有何過失, 而廢之乎,’ 使答曰: ‘廢妃失德頗多, 不得已廢之。’ 同曰: ‘我當入奏。’ 卽入內, 少間還出曰: ‘已奏矣。’ 同又言曰: ‘帝問弓角事, 我對曰: 「弓角, 非本國土産, 故前此不拘多少, 任其收買, 近來只許每年一次收買, 不過五十副, 不裕於用, 故今復奏請耳。」’ 一, 使於韓氏前呈書契, 其辭曰: ‘姪男議政府左議政韓明澮, 謹拜上姑孃尊前。 姪男今有所懷, 仰達左右, 伏希敷奏。 竊惟廢妃尹氏, 性度違戾, 不順于王祖母及王母, 失德滋多, 不克共承宗祀。 殿下承祖母及母之敎, 告于宗廟、社稷, 廢置外第。 顧惟內助不可久缺, 以副室尹氏爲妃。 是用陳奏, 伏望具此事由, 曲達御前, 特賜誥命、冠服, 不勝至願。 且念本國三面受敵, 近日再勅本國, 夾攻野人。 因此構釁不淺, 兵備不可疎虞。 而弓材所需水牛角, 非本國所産, 專仰上國。 頃緣建議者以爲: 「本國人收買弓角, 轉賣野人」始立禁防。 我國與野人, 構釁旣久, 何敢販賣弓材, 以資敵人, 我國自祖宗朝以來, 敬事朝廷, 深蒙恩眷, 累賜書籍、樂器。 且火藥, 兵家所最重, 而洪武七年間, 高皇帝賜之不疑。 欽惟我陛下臨御以來, 曲施恩寵, 凡有所奏, 必賜允許, 而獨於弓角有禁, 一國臣民咸悶焉。 於成化十三年, 具由陳請, 獲蒙聖恩, 許於每歲一次, 收買五十副, 一國臣民, 不勝感激之至。 然弓張製造雖多, 堪用者鮮少, 兼又易致折毁, 所有五十副, 不裕於用。 伏望幷將此意, 曲達御前, 特許照依先年事例, 每於本國使臣之來, 隨所齎價錢多少, 不拘數收買, 不勝至願。’ 一, 二月二十四日, 太監姜玉, 到館就使房內, 付蘇合油一斤、龍腦一斤, 皆用御封印題。 謂曰: ‘我奏于帝曰: 「本國欲覓蘇合油、龍腦等藥求之, 未得其眞。 今來宰相, 依臣懇求。」 帝曰: 「當與之。」 因出內帑所藏曰: 「可付韓明澮。 仍宴慰之。」 我爲此而來。’ 使叩頭拜謝, 玉因盛設酒飯以饋。 回贈麻布十匹、扇子、雨籠等物, 玉曰: ‘我不敢私, 將獻于帝。’ 玉所齎酒器, 皆刻御製詩。 題銀甁詩曰: ‘明時需碩德, 黼黻贊皇猷。 禁闥多淸暇, 黃流注玉甌。’ 又題一面曰: ‘內禁恩寵隆, 慇懃協奏功。 金樽迎雅況, 黽勉盡丹衷。’ 又題 ‘盞臺滿庭芳。’ 詞曰: ‘景運誕敷, 賢才傑出。 況逢四海來賓, 名家賢士稟賦質。 彬彬道學, 窮通經史。 論政體二典三墳, 恩寵擢常侍楓宸。 展嘉猷代天理物, 房、杜擬同倫。’ 又曰: ‘尋常修職業, 丹衷貫日。 啓沃效勤, 存心幷治己。 惟務日新, 幼而學, 壯而行, 莫非義禮。 昔陶甄至公, 彌綸治道, 史策著良臣。’ 又題盞面曰: ‘維時致太平, 恩澤庇蒼生。 調燮歸元老, 勳名百世榮。’ 又曰: ‘世際雍熙日, 人逢富貴年。 公餘有淸趣, 詩酒樂陶然。’”
성종 174권, 16년(1485 을사/명성화(成化)21년) 1월 6일(기축) 2번째기사
부제학 안처량등이 풍속의 폐단과 최호원의 말이 허탄하고 망령됨을 진술하다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안처량(安處良)등이 와서 아뢰기를,
“신등이 전일 상소하여 풍속의 폐단과 최호원(崔灝元)의 말이 허탄하고 망령되어 병조(兵曹)에 마땅치 못하다는 것을 진술하였는데,
지금까지 명(命)을 듣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요즈음 경연(經筵)에 나아가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내 뜻을 밝히지 못하였다”하고는,
곧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그대들의 상소한 말이 옳다. 대저 풍속의 아름답고 악함은 위에 있는 사람이 몸소 실행하여 통솔하는 데 달린 것이다.
내가 덕이 없어 몸소 솔선하여 지도할 수 없었으니, 풍속이 허물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다만 그대들의 상소에 풍속이 임금에게 근본한다는 것만 개론(槪論)하고, 나의 어떤 일과 어떤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지적하지 아니하였으니, 사람으로서의 요(堯)순(舜)이 아니면 누가 능히 스스로 그 허물을 알겠는가? 내가 불러 묻는 의도는 그러한 것 때문이다”하니,
안처량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풍속의 폐단에 대한 말을 구하시므로, 신등이 널리 의논하여 위로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잘못된 일이 있었으면 하문(下問)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할 말을 다하였을 것인데, 어찌 한 생각인들 숨기고 침묵할 이치가 있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사이 최호원이 외방(外方)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다가 폐단이 있는 일을 많이 진술하였는데, 내가 시험해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려고 한다. 무릇 사람의 간사하고 정직한 것은 말하는 그 즉시에는 자세히 알기가 어려운 바이므로, 반드시 어떤 일에 시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이단(異端)과 오도(吾道)15744)는 형편이 서로 용납될 수 없으므로 이단이 없어진 뒤에야 오도가 시행될 수 있는데, 이단이 만약 성하면 아무리 오도를 행하려고 하더라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최호원이 아뢴바 비보(裨補), 수륙재(水陸齋)등의 일은 비록 선왕(先王)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하더라도 한때의 일일 뿐이며, 만세에 떳떳하게 행할 법은 아니니, 진실로 허탄(虛誕)하고 떳떳하지 못한 말이며,
우리 도(道)에 해로운 바가 크고 따라서 최호원의 마음이 바르지 못함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내가 관직을 파하고자 하나 다만 사람을 올리고 물리침을 가볍게 할 수가 없어서 대신들과 널리 의논하여 처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하나도 말하는 이가 없었는데 이제 그대들이 최호원을 간사한 사람이라고 배척하니, 최호원의 간사함을 말할 수 있는가?”하니,
안처량등이 대답하기를,
“최호원이 비록 문과(文科) 출신이기는 하나, 본래 방술(方術)15745)을 숭상하므로 그 때문에 사류(士類)에 끼이지 못하였으며, 선왕조(先王朝)에서도 술사(術士)로 대접하고 사대부(士大夫)로 대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육조(六曹)는 모든 관사(官司)의 장(長)이고, 이조(吏曹),병조(兵曹)는 바로 정조(政曹)15746)이므로, 그 선임(選任)이 더욱 중하니, 최호원으로서 마땅히 있을 바가 못됩니다”하였다.
전한(典翰) 정성근(鄭誠謹)이 아뢰기를,
“최호원의 심술이 바르지못하여 스스로 술사(術士)로써 처신하니, 사림(士林)에서 비웃을 뿐만 아니라, 비록 책을 끼고 다니는 보통 선비일지라도 모두 그 바르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성상께서는 높고 밝으셔서 환하게 비추어 보시므로, 간사함을 행하지 못하는데, 만약 한 번 그 꾀가 쓰여지면 잇달아 간사한 자가 괴탄(怪誕)한 말로 다투어 시험하고자 할 것이니, 그 해(害)를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륙재(水陸齋)등의 일은 바르고 떳떳한 도(道)가 아니며, 이제 최호원이 말한 도선(道詵) 탑묘(塔廟)의 일은 불경(不經)함이 심한 것으로서 임금 앞에 아뢸 수 없는 것인데도〈거리낌 없이 말했으니,〉이런 일로 보건대, 심술이 바르지 못함을 알 수가 있다.
전일에 벼슬을 제수할 때에 내가 전조(銓曹)15747)에 물었는데, 전조에서는 어찌하여 불가함을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대간(臺諫)에서도 어찌하여 말하지 아니하였는가?”하니,
좌승지(左承旨) 성건(成健)이 대답하기를,
“최호원은 드러난 악행(惡行)이 없으니, 대간이 말하지아니한 것은 아마 그러한 때문인가 합니다. 최호원이 술법(術法)을 숭상하는데, 지금 정조(政曹)에 있으니, 물망에 맞지 아니합니다”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안침(安琛)이 아뢰기를,
“최호원은 술사(術士)이므로 사류(士類)에서 배척하는데, 국가에서도 마땅히 술사로 대접해야지 정조에는 쓸 수 없습니다.
세조께서 안효례(安孝禮)를 부를 경우는 최호원이 함께 나와서 대답한 말은 우스갯 말이었으므로 선왕조(先王朝)에서도 사류(士類)로 대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하고,
신종호(申從濩)는 아뢰기를,
“최호원의 하는 바는 모두 좌도(左道)15748)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최호원의 아뢴 바를 보건대 마음이 바르지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개차(改差)15749)하라.
그리고 이같은 일을 홍문관에서는 말하는데,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은 하나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매우 유감스럽다.
대저 성인(聖人)이 아니면 그 허물을 스스로 아는 자가 드문데, 나의 실수한 바를 재상과 대간이 알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어야 한다.
홍문관에서는 이미 최호원의 일을 아는데, 대간만 알지못하는가?
임금은 반드시 그 신하의 마음을 알고, 신하는 반드시 임금의 뜻을 알아서 임금과 신하가 마음과 뜻이 서로 합하면 삼황(三皇)15750)의 다스림을 오히려 바랄 수 있을 것인데, 이제 내가 부덕(不德)하여 재상과 대간에서도 허물을 규탄하지 아니하니, 어찌 능히 치도(治道)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말로써 삼황의 정치를 행하려고 하더라도 어찌 능히 삼황의 다스림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세우(李世佑)가 아뢰기를,
“바야흐로 지금 풍속이 퇴패(頹敗)하였는데, 신이 듣건대 전적(典籍) 권호(權灝)는 그 아비를 농락해 꾀어서 그 형 권순(權順)의 죄를 나무라게 하여 탈적(奪嫡)15751)하였고, 그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일찍이 거적자리에 잠자면서 빈소(殯所)를 지키지도 아니하고, 서울 집에 물러가 있으면서 그 형을 배척하였으니, 이륜(彝倫)15752)을 상패(傷敗)함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권호는 문신(文臣)으로서 행하는 바가 저와 같은데 하물며 무지한 사람이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불효(不孝)하고, 불목(不睦)한 사람을 보건대, 모두 토지와 종으로 말미암아 소송하여 천륜(天倫)을 더럽히고 무너뜨리는 데 이른다.
나는 생각하건대, 만약 토지와 종이 아니면 반드시 이 폐단이 없을까한다”하고, 인하여 승지(承旨)에게 이르기를,
“권호를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국문(鞫問)하게 하라”하였다.
정성근이 아뢰기를,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는 비록 오활(迂闊)한 것이나, 또한 풍속을 바로잡는 한 실마리입니다.
국가에서 이미 여러 고을로 하여금 행하게 하여 영갑(令甲)15753)에 나타나 있으나 하나도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김종직(金宗直)이 일찍이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있으면서 향중(鄕中)에 행실이 있는 자를 골라서 향사례와 향음주례에 참여하게 하니, 그 선발에 참여하지 못한 자는 모두 부끄러워하여 권장하는 뜻을 품은 자가 많았다고 하니, 청컨대 이 법을 거듭 밝혀서 거행하게 하소서.
유향소(留鄕所)15754)는 국가에서 폐단이 생기는 것을 염려하여 혁파한 지 이미 오래인데, 이제 비록 회복하지는 않더라도 다만 향중에 덕망이 있는 한두 사람을 골라서 온 고을을 규찰(糾察)하게 하면 풍속이 저절로 바를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향사례와 향음주례는 근래에 국상(國喪)으로 인하여 거행하지못하였으나, 상을 마치면 법을 다시 밝혀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유향소는 국가에서 이미 없앴고, 또 새로 교정한 《대전(大典)》에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데, 하필 다시 세울 것인가?”하였다.
우부승지 이세우와 정성근이 아뢰기를,
“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인데, 근래에 해이해져서 떨치지 못합니다.
교수와 훈도(訓導)는 교양을 일삼지 아니하고 그 집에 물러가 있고, 유생(儒生)도 학업에는 게을리하고 날마다 놀이와 희롱을 일삼으며, 감사(監司)와 수령도 검찰(檢察)하지 아니하니, 매우 옳지못합니다”하고,
이세우가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및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보니, 경주교수(慶州敎授) 하형산(河荊山)은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유생이 책을 지고 와서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진주(晉州)는 예전에 인재(人才)의 소굴이라고 일컬었는데, 신이 노사신(盧思愼)과 더불어 진주에 이르러 유생을 불러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을 수 있는 자가 적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교양이 잘못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도감사(諸道監司)에게 유시(諭示)하여 엄히 고찰(考察)을 가하게하라”하였다.
註15744]오도(吾道):유교(儒敎) 註15745]방술(方術):음양잡술(陰陽雜術) 註15746]정조(政曹):인사 행정을 맡은 관청 註15747]전조(銓曹):이조 註15748]좌도(左道):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 註15749]개차(改差):벼슬을 바꿈 註15750]삼황(三皇):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 註15751]탈적(奪嫡):차자(次子)가 장손(長孫)을 누르고 장손 노릇을 함을 이름 註15752]이륜(彝倫):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떳떳한 도리 註15753]영갑(令甲):법령 註15754]유향소(留鄕所):여말선초(麗末鮮初)에 지방수령의 정치를 돕고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설치된 지방자치기관. 나라의 정령(政令)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를 막고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도와주었음
○弘文館副提學安處良等來啓曰: “臣等前日上疏, 陳風俗之弊及崔灝元語涉誕妄不宜兵曹, 至今未得聞命。 傳曰: “近因不御經筵, 未諭予意耳。” 俄而引見曰: “爾等之疏, 是矣。 大扺風俗美惡, 在上之人, 躬行以率之耳。 予以否德, 不能躬率以導之, 無惑乎風俗之陵夷也。 但爾等之疏, 槪論風俗之本於人主, 而不指摘予某事、某行之失, 人非堯、舜, 誰能自知其過, 予之延訪, 爲此爾。” 處良啓曰: “上曾以風俗之弊求言, 故臣等博議, 仰瀆天聰。 殿下如有過擧, 不待下問, 在所盡言, 安有一慮隱默之理,” 上曰: “近者灝元, 使於外方, 多陳弊事, 予欲試可以觀心術之如何。 凡人邪正, 於立談間, 所難悉知, 必措諸事業, 而後可知。 異端、吾道, 勢不相容。 異端熄, 然後吾道可行, 異端若熾, 則雖欲吾道之行, 不可得也。 今灝元所啓裨補、水陸等事, 雖曰: ‘先王之所行,’ 然一時之事, 非萬世常行之典, 實虛誕不經之說, 於吾道, 大有所害, 而灝元心術之不正, 卜此可知矣。 予欲罷官, 第以人物進退, 不可輕, 欲廣議大臣, 以處之。 大臣一無言者, 而今爾等以灝元, 斥爲姦人, 灝元之姦, 可得言歟,” 處良等對曰: “灝元雖出身文科, 然素尙方術, 以是士類不齒, 在先王朝, 亦以術士待之, 而不以士大夫遇之也。 六曹, 百司之長, 而吏、兵曹, 乃政曹也, 其選尤重, 非灝元所當居也。” 典翰鄭誠謹曰: “灝元, 心術不正, 自以術士處己, 非特士林嗤之, 雖挾冊之儒, 皆知其不正。 今聖上高明, 洞照邪慝, 不得售。 若一售其計, 則繼此爲姦者, 乃以怪誕之說, 爭欲試之, 其害可勝(導)〔道〕哉。” 上曰: “水陸等事, 非經常之道。 今灝元所言道詵塔廟之事, 不經之甚者, 而不可陳於君前者也。 擧此觀之, 則心術之不正, 可知矣。 前日除授時, 予問於銓曹, 而銓曹何不言不可乎, 臺諫亦何不言乎,” 左承旨成健對曰: “灝元無顯顯惡行, 臺諫之〔不〕言, 疑以此耳。 灝元尙術法, 今爲政曹, 未副物望也。” 左副承旨安琛啓曰: “灝元術士, 士類排斥, 國家亦當以術士待之, 不可用於政曹也。 世祖若召安孝禮, 則灝元竝進, 對說詼諧, 先王朝亦不以士類待之也。” 校理申從濩啓曰: “灝元所爲, 皆是左道。” 上曰: “以灝元所啓觀之, 心之不正, 可知。 其改差。 且如此之事, 弘文館言之, 而宰相、臺諫, 一無言之者, 深有憾焉。 大抵若非聖人, 自知其過者, 鮮矣。 予之所失, 宰相、臺諫, 知無不言可也。 弘文館旣知灝元之事, 則臺諫其獨不聞乎, 君而必知其臣之心, 臣而必知其君之意, 君臣情志交孚, 則三皇之治, 猶可想望矣。 今也予旣不德, 宰相、臺諫, 又不紏愆, 何能治道之有成乎, 雖以言語, 欲行三皇之治, 其能致三皇之治乎,” 右副承旨李世佑啓曰: “方今風俗頹敗。 臣聞, 典籍權灝, 弄誘其父, 數其兄順罪奪嫡。 其父死後, 曾不寢苫守殯, 而退處京家, 排斥其兄, 傷敗彝倫, 莫甚於此。 灝, 文臣也, 而所行尙如彼, 況無知之人乎,” 上曰: “予觀不孝、不睦之人, 皆由田、民而爭訟, 以至汚壞天倫。 予意 ‘若非田、民, 則必無此弊矣。’” 仍謂承旨曰: “灝, 令義禁府鞫之。” 誠謹啓曰: “鄕射、鄕飮酒之禮, 雖若迂闊, 亦正風俗之一端也。 國家已令諸邑行之, 著在令甲, 而一無行之者。 臣聞 ‘金宗直曾爲善山府使, 擇鄕中有行者, 許參鄕射、鄕飮酒之禮, 其不得與選者, 咸愧之, 多懷勸勵之志。’ 請申明擧行。 留鄕所, 國家慮其弊生, 革之已久, 今雖不復, 但擇鄕中有德望者一二人, 糾察一鄕, 則風俗自正矣。” 上曰: “鄕射、鄕飮酒之禮, 近因國喪, 未得擧行, 喪畢後, 申明擧行, 可也。 留鄕所, 則國家已革, 且於新校《大典》, 不錄, 何必復立乎,” 右副承旨李世佑及誠謹啓曰: “學校, 風化之源, 而邇來陵夷不振。 敎授、訓導, 不以敎養爲事, 退處其家, 儒生亦怠於所業, 日事游戲, 監司守令, 亦不檢察, 甚不可。” 世佑又啓曰: “臣嘗爲慶尙道都事及從事官, 見慶州敎授河荊山, 敎誨不怠, 隣邑儒生, 負笈來學者, 甚多。 晋州, 古稱: ‘人才之淵(數)〔藪〕,’ 臣與盧思愼, 行到晋州, 招儒生, 令製述, 能製者少。 此無他, 由敎養失其道也。” 上曰: “其諭諸道監司, 嚴加考察。”
성종 206권, 18년(1487 정미/명성화(成化)23년) 8월 5일(임신) 2번째기사
형조정랑 유양춘이 희우부를 올리다
형조정랑(刑曹正郞) 유양춘(柳陽春)이 희우부(喜雨賦)를 올렸다.
그 서(序)에 이르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지난 4월 18일의 의정부(議政府)에 내린 교지(敎旨)와 5월 13일 본부(本府)에서 번역하여 쓴 어비(御批)는 모두 지극한 충심(哀心)으로 간절하고 측은하게 여기시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이 스스로 전사(傳寫)하여 저의 방에 걸어놓고 아침, 저녁으로 꿇어앉아 읽노라면 감격하는 마음이 지극해졌습니다. 반복해서 사사로이 생각해 보건대, 성상(聖上)께서는 하늘이 내신 훌륭한 임금으로서 지극히 어질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분이신데, 하늘이 견책하여 고하게 된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여겨졌으니, 아마도 하늘이 인자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상의 마음을 견고해지게 한 것인 듯합니다.
하늘이 견책함으로 인하여 백성의 고통스러운 일을 찾으시느라 밤낮으로 걱정하고 수고하셔서, 날마다 공경대신(公卿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들과 더불어 빠짐없이 강구(講求)하고 검토하도록 하여 벌써 남김없이 소통시키고 씻어내게 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더욱 힘쓰시게 한 일입니다.
위로는 조정(朝廷)으로부터 아래로는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유식(有識)하거나 무식하거나 감동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모두들 우리 성상의 지극한 어지심과 지극한 정성이 이미 하늘의 듣는 바를 감동시켜 그 보응(報應)이 오게 됨을 서서 기다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과연 얼마 되지 않아 하늘이 큰 비를 내려 3일 동안이나 그치지 않으므로 조야(朝野)가 환호성을 올리며 모두들 풍년들고 즐겁게 될 상서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깊이 도운 일입니다.
경축(慶祝)하며 손뼉치고 싶은 마음이 지극하므로 드디어 희우부(喜雨賦)를 지어 성상께서 널리 탐문(探問)하도록 하신 분부를 선양(宣揚)하고자 하였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가뭄이 들던 끝에는 반드시 홍수가 날 염려가 있으므로, 오늘의 비가 혹시 장마가 져 손상이 된다면 반가운 비라고 할 수 없게 되리라고 여겨졌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것이 어찌 하늘이 보답하는 뜻이 되겠습니까, 서서히 비 오는 기미를 보다가 희우부(喜雨賦)를 짓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하늘의 운행(運行)과 비가 오는 계절이 빠르지도 않고 더디지도 않으며 거세게 오지도 않고 장마가 지지도 않으면서, 5월 하순(下旬)으로부터 7월 그믐까지 알맞게 내려 벼가 잘 자라도록 절도(節度)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온갖 곡식들이 이미 추수를 하게 되었는데, 전답에는 모맥(牟麥)이 떠내려가게 되는 수해도 없었고 곡식은 싹이 나서 손모(損耗)하는 일도 없었으며, 집에서 개구리가 새끼치게 되는 고통도 없었고 들판이 요수(遼水)에 잠기게 되는 근심도 없었으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하늘이 때에 맞게 비를 내리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이 우리 성상(聖上)을 따라 주는 것이나 성상께서 하늘에 대응(對應)해 나가시는 것이 모두 생생(生生)18649)의 지극한 덕에서 나올 것임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감히 즐겁게 여기며 부(賦)를 지어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통(感通)되는 이치를 질정(質正)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드디어 자묵객경(子墨客卿),한림학사(翰林學士)란 자칭(自稱)으로 문답을 설정하여 우리 성대(聖代)의 희우(喜雨)의 경사에 대한 부(賦)를 짓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런 어그러지고 망령된 참람한 짓은 마땅히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함을 잘 압니다마는, 단지 지극히 간절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이대로 그만둘 수 없기에 삼가 배수(拜手)하고 계수(稽首)하며 부(賦)를 올립니다”하고,
그 사(辭)에 이르기를,
“성화(成化)기원(紀元) 23년18650) 여름 5월 기망(旣望)18651)에 백성들이 바야흐로 목마르게 비를 기다리게 되어 흙에서 뿌연 먼지만 났었는데, 7일이 지난 신유일에 비가 내리고 정묘일에는 큰 비가 내려 온 나라의 밭에 두루 흡족하고 사방의 못이 가득 차도록 쏟아졌다.
이에 백성들은 들판에서 서로가 손뼉치게 되었고 군신(群臣)들은 대궐 뜰에서 서로 경하(慶賀)하게 되었는데, 모두들‘풍년이 들 것을 기필하게 되었다. 부쩍 자라나 성숙하게 되는 것은 곧 비의 공이지만, 누구의 힘으로 된 것이겠는가?’하여 모두 만세(萬歲)를 부르며 경축하였고, 모두들 말하기를,‘우리 임금의 덕택이다’하며 일제히 손을 올려 진하(陳賀)하였었다. 드디어 임금앞에 올려 알리니,‘옳지않다’고 분부하여 공을 하늘에 돌리고 드디어 남훈전(南薰殿)에 나아가 사농경(司農卿)을 불러 구농(九農)에 관한 정사를 강론(講論)하고 온갖 곡식이 번식하게 되는 것을 경축하시었다.
이에 자묵객경(子墨客卿)에게 명하여 만물의 성정(性情)도 고찰해보고 이기(二氣)18652)의 정독(亭毒)18653)도 탐구해보아 비의 공을 찬양하고, 하늘의 덕을 찬미하되, 마땅히 더없이 펼쳐서 서술(敍述)하여 임금을 위해 부(賦)를 짓도록 하였다.
자묵객경이 배수(拜手)하고 계수(稽首)하면서‘성상의 훌륭하신 명을 선양(宣揚)하겠습니다’하고, 삼가 부복(俯伏)하고서 조금 물러나와 붓을 잡아서 부사(賦詞)를 이어갔다. 드디어 부를 짓기를,
‘달은 유빈(蕤賓)18654)으로 옮아오고 해는 동정(東井)18655)에 있으며 창룡(蒼龍)은 한 중앙이 되고 주순(朱鶉)은 바야흐로 빨라졌도다.
이때에 백로(伯勞)가 서로 울고 남쪽들에서 기나긴 해를 맞이하게 되니,
바야흐로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계절이므로 전답 농사가 잘 익게 되기를 기약하였도다. 홀연히 여러달동안 민망하게 비를 기다려 운예(雲霓)18656) 바라보기를 애타게 하였지만, 대단한 가뭄은 혹독한 열기가 거세기만 하고 혹렬한 더위는 무덥게 사방에서 일어났도다.
화거(火車)를 달리며 형혹(熒惑)18657)을 참승(驂乘)시킨 듯하고 희화(羲和)18658)로 하여금 빨간 기를 흔들게 하는 듯하여, 그 기세 불꽃이 솟구치는 듯 활활거리고 그 기운 불길이 이글거리는 듯 대지를 말려 버렸도다.
불 우물이 끓어넘치는 듯 계곡은 고갈되었으며 우연(虞淵)18659)도 불타는 듯 몽범(濛氾)18660)이 붉어졌도다.
바위의 구멍에도 물줄기가 끊어지고 방죽[陂池]에는 수문(水門)이 드러났으며, 제승(堤勝)이 육지로 변하고 구회(溝澮)18661)가 마른 땅이 되어 버렸도다. 이럴 때에 비록 정국(鄭國)과 백공(白公)으로 하여금 경수(涇水), 위수(渭水)를 개통하게 하고 서문표(西門豹)와 사기(史起)로 하여금 택로(澤鹵)를 경영하게 하더라도18662) 어떻게 가래[鍤]를 들자 구름이 일어나고 도랑[渠]을 파헤치자 비가 오듯이 할 수 있으랴!
이에 신농(神農)18663)이 비를 구하던 글을 고찰하고 무우(舞雩)18664)에서 비를 빌던 사례를 상고하여 단(壇)이나 선(墠)18665)에서 제사하지 않은 신(神)이 없고, 산림(山林),천택(川澤),구릉(丘陵),분연(墳衍)18666)에 이르기까지도 사방으로 다니며 두루 찾아, 이미 제사를 베풀고 이미 찾기를 마치었도다.
이토록 정성스럽게 비 오기를 빌었는데도 영험을 내리지않고 계속 음울(陰鬱)하기만하여, 바야흐로 장차 운한(雲漢)18667)을 원망하고 풍백(風伯)18668 )에게 책임을 돌리게 되었도다.
이에 무당[巫覡]을 불러 굿을 하며 석척(蜥蜴)18669)에게 호소하고 토룡(土龍)18670)에게도 술잔을 올리고 석우(石牛)18671)의 등에 진흙을 칠하였도다. 혹은 문(門)을 닫거나 길을 막기도 하고 혹은 저자를 옮기거나 도랑[溝]을 수축(修築)하거나 하기도 하였도다.
모두 말하기를,‘비가 오려나 비가 오려나’하면서 만백성이 입을 모아 갈망하기를 그치지 않았도다.
갑자기 팔풍(八風)18672)이 일지도 않고 육기(六氣)18673)가 고요하게 가라앉으며, 하늘빛이 혼돈(混沌)해지고 층이 진 그늘이 사방에서 어우러져 음침한 기운이 까맣게 덮여오더니 캄캄해지며 정적이 밀어닥쳤도다.
홀연히 천지[乾坤]가 뒤바뀌는 듯 상제(上帝)가 혁연(赫然)18674)한 위령(威靈)으로 육정(六丁)18675)을 호령하고 오성(五星)18676)을 불러들였으며 비렴(飛廉)18677)에게 명하여 풍륭(風隆)18678)을 모으게 하고 전모(電母)18679)를 꾸짖어 뇌공(雷公)18680)을 채찍질하게 하였도다.
귀신들을 때려 용거(龍車)18681)를 타고 철기(鐵騎)18682)를 몰아 금색(金索)을 날리어, 염발(炎魃)18683)을 서쪽들에서 베고 교양(驕陽)18684)을 남쪽 언덕에서 엄습(掩襲)하게 하였도다.
이리하여 빙이(憑夷)18685)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해약(海若)18686)을 불러들였도다. 이미 사독(四瀆)18687)에 영을 내리고 또한 오악(五嶽)18688)에 부명(符命)을 반포(頒布)하여 숙살(肅殺)하는 기운이 걷히자 무더워서 숨이 막히고 습기[滲液]가 새어나 널리 퍼지게 하였도다.
이미 우사(雨師)18689)를 출동시켜 진(陣)치기를 천일(天一)18690)에게 들어보아 주재(主宰)하도록 하여 지휘(指揮)분담이 이미 엄격하고 호령을 시행함이 절차가 있게 하였도다.
비가 장마지지도 않고 세차지도 않으며 더디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으며,
벼락을 치지도 않고 초목을 뽑지도 않으며 넘치게 오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도다.
빗방울로 스며 흐르다가 기름진 물로 적셔 주었고 처음에는 가랑비로 적시다가 나중에는 주룩주룩 내리어 흡족하게 되었도다. 이에 구부러져 있던 뿌리들이 뻗어나 자라게 되고 움츠리고 있던 싹이 피어나 꽃폈도다.
혹은 껍질을 트고 나온 것 혹은 구부러져 돋아난 것 혹은 희미하게 붉은 것 혹은 더부룩하게 흰 것들이, 더러는 무더기로 무성해지고 더러는 윤기있게 번식하였도다. 만물(萬物)이 싱싱하여 스스로 기뻐하고 온갖 곡식들은 우거져 더부룩해졌도다. 줄기가 무성하게 뻗어나고 꽃술은 촉촉하였으며 뒤얽히도록 드리워진 이삭은 껍질을 열었도다.
흰 술이 빽빽하게 휘날리고 붉은 잔털이 촘촘히 퍼지게 되었도다. 장차 벼 한 포기에 줄기가 열이 되고 줄기 하나에 이삭이 아홉이나 되리라.
검푸르게 우거지기도 하고 무성하게 야드르르하기도 하여, 이미 잇닿은 줄기들이 덕스러움을 나타내게 되었고 또한 어우러진 이삭들이 상서로움을 보이게 되었도다.
장차 주(周)나라 성대(盛代)의 특이했던 농사를 취할 것이 없게 되었는데, 또한 어찌 한(漢)나라 치세(治世)에 한 줄기에서 이삭이 여섯 난 것을 논하겠는가, 아아, 땅은 어머니와 같고 하늘은 아버지와 같아 만물을 길러내고 우리에게 단 젖을 주는도다.
하늘이 구릉(丘陵)이 되도록 금(金)을 내려 준다고 하더라도 싹들이 그것을 먹고 자라지는 못할 것이고, 하늘이 3일동안 옥(玉)을 내려준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그것으로 밥을 지어 먹을 수는 없을 것인데, 이처럼 은택(恩澤)이 두루 미친 것은 과연 누가 이렇게 내려 주었는지 모르겠도다’하였다.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림학사(翰林學士)가 크게 탄식하며 계단(階段)을 올라와 나아와서 말하기를,
‘그대는 한갖 비를 빌자 영험이 있었던 것만 알았지 비가 오게된 연유가 있음을 알지못하고, 한갓 하늘에 있는 하늘만 알았지 성인(聖人)께서 하늘과 함께 도모하신 것은 알지못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우리 성상(聖上)께서 하늘에 호응하기를 성실하게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일원(一元)18691)의 이치를 체득하여 구주(九疇)18692)를 펴고 일덕(一德)18693)을 지키면서 구경(九經)18694)을 행하며, 이기(二氣)18695)를 범위(範圍)에 맞게 운용(運用)하고 칠정(七政)18696)을 기형(璣衡)18697)으로 바로잡아, 그로써 천공(天工)18698)을 대행(代行)하고 천직(天職)18699)을 닦되, 삼가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정사(政事)에 임하기를 공경스럽게 하였으며, 이에 신농(神農)을 조술(祖述)18700)하고 후직(后稷)18701)을 조종(祖宗)으로 삼아 친히 적전(籍田)18702)에서 일을 하여 종묘(宗廟)에 바칠 자성(粢盛)18703)을 장만하기도 하고, 빈풍(豳風)18704)을 염두에 두어 경작하고 수확하는 데 따른 정령(政令)을 줄이기도 하였습니다.
농사를 짓기가 간난(艱難)함을 알고서 매양 농사일에 마음을 써오셨는데, 홀연히 철 맞추어 와야할 비가 시기를 어기게 되자 더욱 성덕(聖德)과 공경(恭敬)에 스스로 진념(軫念)하여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기에 황황(遑遑)하고 백성의 병폐를 바로잡기에 급급(汲汲)하였습니다.
드디어 감선(減膳)18705)하고 철악(撤樂)18706)하며 가뭄을 근심하는 비통한 분부를 내리어 기애(耆艾)와 훈구(勳舊)인 신하들에게 말을 해주기 바라며 강직하고 뛰어난 선비들에게 구언(求言)18707)하였으며, 서로가 수성(修省)하고 협찬(協贊)하여 자신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현명한 사람을 승진시키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내치어 실수를 바로잡고 폐단을 고치게 하였으며, 이어 죄가 무거운 죄수를 관대하게 처리하고 죄가 가벼운 죄수를 놓아주며, 밝혀지지 않은 죄는 묻어두고 원통하게 적체되어 있는 죄는 신원(伸冤)해 주었습니다.
포흠(逋欠)18708)을 감면(減免)해주고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여 돌봐주며,
사민(徙民)하는 법령을 개혁하고 백성을 부역(賦役)시키는 법을 간소화하여, 이미 감옥 죄수들을 살피는 은혜가 깊었고 또한 민생을 풍족해지게 하신 은덕이 흡족하셨습니다. 이에 인심(人心)이 서로들 기뻐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감통(感通)되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분명하게 응답하느라 단비를 내리어 깊은 은혜를 보임이 원만하였으니,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하여 듣는다는 것을 확신하겠고, 성상의 마음이 위로 하늘과 같음을 알겠습니다. 이것이 어찌 산천(山川)에 빌고 토룡(土龍)에게 빎으로써 하늘의 힘을 돌리게 되고 하늘의 기틀을 움직이게 된 것이겠습니까?
덕(德)이 마르고 인(仁)이 마르게 되거나 나라가 불타듯하고 정사가 후끈거리는 것과 같은 것은 곧 이른바 하늘도 가뭄이 들고 사람도 가뭄이 든 일이니, 또한 응보(應報)가 족함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아아! 우리 성상께서는 하늘 받들기를 진실로 성실하게 하였고 형식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하였다.
자묵객경(子墨客卿)이 재배(再拜)하고 소리높여 말하기를,
‘위대하신 성상의 덕이 하늘과 짝이 됨을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나는 이에 있어서 느끼는 바가 있으니 그대에게 질문하기를 청합니다.
예전에 요(堯)임금은 공경스럽게 하늘에 순응(順應)하였으나 어찌하여 9년의 홍수가 있었고, 성탕(成湯)18709)은 공경스럽게도 천도(天道)를 숭상하였으나 어찌하여 7년의 가뭄이 있었으며, 주(周)나라 선왕(宣王)처럼 하늘을 공경하는 분으로도 이미 운한(雲漢)18710)의 한탄을 면하지 못하였고, 우리 성상께서도 하늘을 받드셨지만 또한 을사년18711)의 근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덕이 하늘에 어그러지는 일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아마 시운[時數]을 맞출 수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진실로 천도(天道)는 그윽하고 아득한 것인데 어찌 사람이 하는 일로 구할 바가 있겠습니까?’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눈을 부릅뜨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깨우치기를,
‘그대는 하늘이 임금을 견책(譴責)하며 고하는 것은 또한 그 임금을 인자하게 사랑함이 지극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요(堯)임금을 견책하였을 적에는 순(舜)이 자신에게 경고(警告)하는 것이라 여기고서 스스로를 시험하게 되었었고18712), 하늘이 성탕(成湯)을 견책하였을 적에는 몸소 여섯가지 일을 가지고서 자책하였었으며18713), 하늘이 주(周)나라 선왕(宣王)을 견책하였을 적에는 몸가짐을 삼가며 두렵게 여겼었고, 우리 성상께서도 하늘의 견책을 공경스럽게 받드시면서 또한 오직 나의 죄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 연유한 바를 찾아보면 어찌 불러들인 원인의 발단이 없었겠습니까? 혹자는 조정에 사흉(四凶)18714)이 있는데도 제거하지 못했으니 사람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어서 유감이 없을 수 없었고, 혹자는 자신이 군신(君臣)의 변동기에 처하여 하늘의 벌을 대신 시행한 점에 있어서 참덕(慙德)이 없을 수 없었고, 혹자는 자신을 재삼 간절하게 경계하면서 하늘에 호소하였으니 어찌 여왕(厲王)18715)의 여독[餘烈]을 이어받게 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도 피전(避殿)18716)하며 잘못된 일들을 찾으셨으니,
또한 어찌 인사(人事)에 혹시라도 잘못된 것이 없겠습니까?
이에 하늘이 견책을 내려 깨닫게 되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임금들을 인자하게 사랑하는 음즐(陰騭)18717)에서 나온 일인 것입니다.
성인(聖人)들이 하늘을 감응시키게 된 것은 역시 수성(修省)함이 소격(昭假)18718)하게 된 것임을 알겠고, 임금들이 복을 이르게 하는 길은 인책(引責)하여 스스로 신칙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음을 알겠습니다.
마침내 하늘의 응보(應報)를 받아 드디어 철에 맞추어 만물을 육성(育成)하게 되었고, 지극히 높고 밝은 덕이 하늘의 짝이 되었으니 마땅히 하늘에 대응해야 합니다. 어찌 거만하게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여기면서 시운(時運)만 핑계하고 살피지 않겠습니까?
아아, 훌륭하셨습니다. 저 한(漢)무제(武帝)는 가뭄은 봉토(封土)18719)를 마르게 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노(魯)나라 목공(穆公)은 왕병(尫病)에 걸린 사람을 학대하고자 하다가18720) 단지 하늘의 노여움만 초래하게 되었었으니, 감히 천심(天心)을 돌릴 소망을 가졌겠습니까?
연운(年運)으로 책임을 돌리고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기에 이른다면 어찌 일찍이 국고(國庫)의 고갈과 백성의 흉년에 도움이 있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자묵객경(子墨客卿)이 두려운 표정으로 태도를 고치고 민망하게 여겨 마음에 감복하면서 자리를 피하여 물러앉아 드디어 한림학사(翰林學士)에게 송(頌)을 지으라고 양보하였다. 그 송에 이르기를,
‘아아, 혁혁하신 우리 임금은 덕이 하늘에 짝이 되어 한결같이 지성스러우셨도다. 지성은 쉼이 없고 감동되면 반드시 통하는 법이라 원령(圓靈)18721)을 감동시켰도다.
어그러진 기운 물러가고 화기(和氣)가 훈훈하여 기름진 비가 내렸도다.
신령(神靈)이 주는 것 융성하여 넉넉하고 흡족하니 만물이 자라게 되었도다. 비오고 볕나는 것 순조로와 시절이 고르고 연사가 풍년드니 오직 거룩한 임금의 덕이로다.
하늘과 인간의 감응이 통하고 상하가 호응하여 서로 기뻐하게 되었도다’하였다. 자묵객경(子墨客卿)이 흔연(欣然)히 붓을 들어 말을 더 잇대겠다고 청하여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태평한 시절에는 벼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네.
밤에는 반드시 단비가 내리고 낮에는 반드시 온화한 바람이 불되, 바람은 72차례 불고 비는 36차례 오는 법이로다.
올해의 날씨는 오직 싹들이 잘 자라게 했으니, 어찌 백성들의 노력뿐이겠는가? 진실로 하늘이 도운 것이로다.
예전에 국세(國稅)로 받는 벼가 두 번 익는 것이 있었고 향공(鄕貢)18722)하는 누에고치가 여덟차례 익는 적이 있었다지만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하고서
드디어 필묵(筆墨)을 치우고 사례(謝禮)하기를,‘부(賦)가 이미 이루어졌기에 삼가 정서[繕寫]하여 올리며 악부(樂府)에 올리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임금께서 다 보시더니 굳이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사농경(司農卿)을 돌아보며 이르기를,‘내가 장차 교외(郊外)에 나가 살펴보겠다’고 하셨다. 드디어 유사(有司)에게 법가(法駕)18723)를 갖추도록 명하여 동쪽 교외로 거둥하였다.
이에 사가(司稼)18724)를 불러 그 곳의 농부(農夫)를 나아오게 하여 위로하기를,‘아아, 우리 민생들이 항상 주리게 됨을 근심함은 그 허물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어찌 알지못하겠느냐? 하늘이 내려다보심이 매우 인자하여 진실로 너희들을 내버려두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가물다가 비가 내려 흙에 기름기가 바야흐로 흡족하니, 땅을 갈고 종자 심는데 그 시기를 놓치지 말고 김매주며 거름주어 각기 생업(生業)에 부지런히 하라.
이리하여 부모 섬기고 자녀를 길러가면 인생살이 족하게 될 것이다’하셨다. 이에 부로(父老)들이 모두 만세를 외치며 서로들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기를,
‘우리 동륙(穜稑)18725)을 저 원습(原隰)18726)에 심었네. 아비는 일구고 아들은 종자뿌려 먹고살기 바라도다.
바야흐로 비 내리지 않을 적엔 불타듯 했었는데 이미 비가 오게 되어서는 젖주어 기르듯 했도다. 무성하게 이삭이 빼어나고 싱싱하게 초목이 자라도다. 성상께서 하늘과 함께 도모하시는데 어찌 풍년들지 않으리’하였다.
또 보추가(報秋歌)를 부르기를,
‘한알을 심은 것이 만개의 낟알이나 열매맺고 벼 한알을 까면 쌀이 두톨이나 나오리라. 마당에 방에 쌓아 두고 밥지어 먹으리라.
우리 식량 남아돌아 이랑에 두고서 다 못거두고 나라 저축도 남아돌아 민간에 두고 거두지않으리라. 풍년든 경사 누군들 상농(上農) 아니랴!
임금인가 하늘인가 누구의 덕이 이리 많은가?’하였다.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훈훈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고 검은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여 신령의 증험과 같았다. 얼마 있지않아 찌는 더위가 깨끗이 없어지고 도로(道路)가 말끔해졌다. 드디어 복부(僕夫)에게 신칙하여 거가(車駕)가 떠나서 돌아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노고(路鼓)가 이미 울리고 악사(樂師)들이 줄지어 섰으며 노래부르는 자들이 번갈아 화답하고 덕화(德化)를 보려는 자들이 저자를 이룬 것 같았다. 서로들 동해(東海)의 물만큼이나 복받기를 축원하고 남산(南山)처럼 무궁하도록 장수(長壽)를 빌어, 송덕(頌德)하고 축수하니 그 소리가 온 세상에 진동하였다.
광대한 덕화는 마치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는 듯하며 은택은 마치 비가 내리고 바람이 퍼지는 듯하였다”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부(賦)의 뜻은 좋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러 두도록 하라.”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유양춘은 아첨하는 말을 올려 은총(恩寵)을 바라느라 재예(才藝)를 팔아서 임금을 속이려고 하므로 진신(縉紳)18727)들이 비웃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과연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다.” 하였다.
註18649]생생(生生): 만물이 생기어 퍼지게 하는 것. 註1865 0]성화(成化) 기원(紀元) 23년: 1487 성종 18년. 註18651]기망(旣望): 16일. 註18652]이기(二氣): 음(陰)과 양(陽)의 두 기운 註18653]정독(亭毒): 양육(養育). 註18654]유빈(蕤賓): 음력 5월의 별칭 註18655]동정(東井): 성좌(星座)의 이름. 註 18656]운예(雲霓): 구름과 무지개, 곧 비가 올 징조. 註1865 7]형혹(熒惑): 화신(火神)의 이름. 註18658]희화(羲和): 태양을 실은 마차를 부린다는 어자(馭者). 註18659]우연(虞淵): 황혼(黃昏). 註18660]몽범(濛氾): 해가 지는 곳. 註18661]구회(溝澮): 전답 사이의 봇도랑. 註18662]정국(鄭國)과 백공(白公) 으로 하여금 경수(涇水), 위수(渭水)를 개통하게 하고 서문표(西門豹)와 사기(史起)로 하여금 택로(澤鹵)를 경영하게 하더라도: 여기에서 말한 정국(鄭國)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한(韓)나라 사람이고, 백공(白公)은 한(漢)나라 사람이며, 서문표(西門豹)와 사기(史起)는 위(魏)나라 사람인데, 모두 치수(治水)를 잘하여 큰 업적을 남겼음. 택로는 염분이 있는 진펄을 말한다18663]신농(神農): 중국 전설 중의 제왕. 농경을 가르쳐 농업의 신으로도 숭앙됨. 註18664]무우(舞雩): 기우제를 지내는 곳. 註18665]선(墠): 제사터. 註18666]분연(墳衍): 평지와 물가. 註18667]운한(雲漢): 하늘. 註18668]풍백(風伯): 바람의 신(神). 註18669]석척(蜥蜴): 도마뱀. 註18670]토룡(土龍): 흙으로 만든 용. 비를 빌 때 사용하였음. 註18671]석우(石牛): 《광주기(廣州記)》에 보면, 중국 울림군(鬱林郡)의 산 동남쪽에 연못이 있고, 연못의 주위에 돌로 만든 소가 하나 있어 사람들이 제사지냈으니, 가뭄이 들면 백성들이 소를 죽여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음. 즉 소의 피를 진흙과 섞어서 이 석우(石牛)의 등에 바르고 예(禮)를 마치면 비가 오게 되는데, 큰비가 내려 소의 등을 씻게 되어서 진흙이 다 없어지면 날씨가 개었다고 함. 註18672]팔풍(八風): 팔방의 바람. 註18673]육기(六氣): 천지 사이의 여섯 가지 기운. 음(陰),양(陽),풍(風),우(雨),회(晦),명(明). 註18674]혁연(赫然): 기세가 대단한 모양. 註18675]육정(六丁): 둔갑술(遁甲術)을 할 때 부르는 신장(神將). 註18676]오성(五星): 목성(木星),화성(火星),금성(金星),수성(水星),토성(土星). 註18677]비렴(飛廉 ): 바람을 맡은 신(神). 註18678]풍륭(風隆): 비나 구름의 신. 註18679]전모(電母): 번개를 맡은 신. 註18680]뇌공(雷公): 천둥을 맡은 신 註18681]용거(龍車): 신선이 타는 수레. 註1 8682]철기(鐵騎): 무장한 군마(軍馬). 註18683]염발(炎魃): 가뭄을 맡은 신. 註18684]교양(驕陽): 강하게 내리 쪼이는 태양. 註18685]빙이(憑夷): 물을 맡아 보는 신. 註18686]해약(海若): 바다를 맡은 신. 註18687]사독(四瀆): 나라에서 받드는 네 강. 註18688]오악(五嶽): 나라에서 받드는 다섯 명산(名山). 註18689]우사(雨師): 비를 맡은 신. 註18690]천일(天一): 전투를 맡고 사람의 길흉을 아는 천제(天帝)의 신(神). 註18691]일원(一元): 만물의 근본 원리. 註18692]구주(九疇) :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가지 큰 법. 註18693]일덕(一德): 순일한 덕. 註18694]구경(九經):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도리. 註18695]이기(二氣): 음(陰)과 양(陽). 註18696]칠정( 七政): 일월(日月)과 오성(五星). 註18697]기형(璣衡): 혼천의(渾天儀). 註18698]천공(天工): 자연의 조화. 註18699]천직(天職): 임금의 직분 註18700]조술(祖述): 스승이나 조상의 도(道)를 이어받아서 밝힘. 註18701]후직(后稷): 주(周)나라 선조 기(棄)로서, 농업을 다스리는 신으로 숭배됨 註18702]적전(籍田): 임금이 친히 경작하던 토지 註18703]자성(粢盛) : 나라의 대제(大祭)에 쓰는 서직(黍稷). 註18704]빈풍(豳風) :《시경》국풍(國風)의 편명으로, 7월장에서 농업에 관해 읊었음. 註18705]감선(減膳): 천재지변이나 나라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뜻에서 수랏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던 일 註18706]철악(撤樂): 나라에 재이(災異)가 있거나 국상(國喪)이 있을 때 음악을 철폐하던 일. 註18707]구언(求言) : 나라에 재변(災變)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시정(時政)의 잘못과 민폐(民弊)에 대한 바른 말을 구하던 제도. 註18708]포흠(逋欠): 관물(官物)을 사사로이 써서 모자라는 물건. 담당 관원이 보상하여야 하였음. 註18709] 성탕(成湯) : 은(殷)나라를 창건한 임금. 註18710]운한(雲漢):《시경》의 한 편명. 가뭄을 한탄한 내용임. 註18711]을사년: 1485 성종16년. 註18712]하늘이 요(堯)임금을 견책하였을 적에는 순(舜)이 자신에게 경고(警告)하는 것이라 여기고서 스스로를 시험하게 되었었고: 요(堯)임금 때부터 홍수가 큰 피해를 끼치고 장마가 심하였는데, 순(舜)임금은 천자의 자리를 물려받자 우(禹)를 사공(司空)에 임명하여 홍수를 다스린 일을 말함註18713]하늘이 성탕(成湯) 을 견책하였을 적에는 몸소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서 자책하였었으며: 은(殷)나라의 성탕(成湯)이 7년 동안 큰 가뭄이 계속되었을 때 비를 빌기 위하여 삼림(森林)에서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스스로 책(責)하였던 일을 말함. 註18714]사흉(四凶): 요(堯)임금 때의 네 사람의 악인(惡人). 곧 공공(共工),환도(驩兜),삼묘(三苗),곤(鯀)을 말하며 후에 순(舜)임금이 모두 내쳤음 註18715]여왕(厲王): 주나라 선왕의 앞 임금으로서 포악했음 註18716]피전(避殿): 비상(非常)이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임금이 계구(戒懼)하는 뜻에서 정전(正殿)이 아닌 다른 곳에 거처하는 것. 註18717]음즐(陰騭): 하늘이 사람의 행위에 따라 화복을 내리는 것. 註 18718]소격(昭假): 하늘을 밝게 감동시킴 註18719]봉토(封土): 봉사(封祀)를 지내기 위해 산에 흙을 높이 쌓은 것. 註 18720]노(魯)나라 목공(穆公)은 왕병(尫病)에 걸린 사람을 학대하고자 하다가:《예기(禮記)》단궁(檀弓) 하(下)에 보면, 가뭄이 심하자 노(魯)나라 목공(穆公)이 현자(縣子)를 불러 묻기를,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니, 내가 왕병(尫病)에 걸린 사람을 학대하고자 한다.”고 하였음. 왕병에 걸린 사람은 하늘을 쳐다볼 뿐 아래를 굽어보지 못하므로 하늘이 그의 코에 물이 들어가는 것을 가엾게 여겨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임금이 그를 학대하면 하늘이 그를 가엾게 여겨 비를 내려 줄 것이라는 뜻임. 註18721]원령(圓靈): 하늘의 별칭. 註18722]향공(鄕貢): 그 지방의 공상(貢上). 註 18723]법가(法駕): 임금이 거둥할 때 타는 수레의 한 가지. 註18724]사가(司稼): 농사를 담당한 관원. 註18725]동륙(穜陸): 동은 일찍 심어 늦게 익은 벼이고 육은 늦게 심어 일찍 익는 벼. 註18726]원습(原隰): 높은 땅과 낮은 땅. 註 18727]진신(縉紳): 관직에 있는 사대부의 총칭
○刑曹正郞柳陽春進《喜雨賦》, 序曰:
臣伏覩前四月十八日, 議政府宣下敎旨及五月十三日, 本府飜錄御批, 皆出於至衷懇惻也。 臣竊自傳寫, 掛之私室, 晨夕跪讀, 感激之至。 反覆私念, 以謂聖上天縱眞主, 至仁至誠, 天之所以譴告者何事, 意天以仁愛之心, 益堅聖上之心也。 因天之譴, 求民之隱, 夙夜憂勞, 日與公卿大臣、臺諫、侍從, 悉令講討, 旣已踈滌無餘, 是天之所以益廑聖上之心也。 上自朝廷, 下及閭巷, 有識無識, 罔不感動, 皆知我聖上至仁至誠, 已動天聽, 其報應之至, 立俟無疑也。 未幾, 天果大霈, 三日不止, 朝野懽呼, 皆稱豐樂之祥, 以天實助之深也。 慶抃之至, 遂欲撰《喜雨賦》, 以對揚聖上博問之旨。 第念旱乾之末, 必有水溢之慮, 今日之雨, 苟至於澇損, 則謂之喜雨不可也, 若然則是豈天報答之意也, 徐觀雨之候賦之, 未爲不可也。 臣伏見天之行雨之令, 不驟不徐, 不暴不霪, 自五月下澣至七月之終, 斟酌施與, 以養禾苗爲節, 而萬寶已至於告成, 則田無漂麥之災也, 穀無生角之耗也, 家無産蛙之苦也, 野無涵潦之患也。 是眞所謂天之時雨, 而人皆喜之也。於此益信天之所以聽於我聖上, 而聖上之於應天, 皆出於生生之至德也。 敢不樂爲之賦, 以質諸天人相感之理乎, 遂以子墨客卿、翰林學士設爲問答, 以賦我聖代喜雨之慶。 臣極知謬妄之僭。 當伏典法, 只以誠出於至懇, 不能遂已。 謹拜手稽首獻賦。
其辭曰:
成化紀元二十三年夏五月旣望, 民方渴雨, 土生浮坱, 越七日辛酉乃雨, 丁卯大雨, 九陌周洽, 四澤盈注。 於是百姓相與抃于野, 群臣相與慶于庭, 咸曰: “豐登有期, 勃然生成, 是雨之功, 伊誰之力耶,” 皆呼萬歲之慶, 僉曰: “吾王之澤也。” 齊上手而陳賀, 遂登聞于王前。 敎曰不然, 歸之于天, 遂御南薰殿, 召司農卿講九農之政, 慶百苗之殖。 乃命子墨客卿, 按萬物之性情, 探二氣之亭毒, 揚雨之功, 贊天之德, 宜極鋪張, 爲予賦之。 子墨客卿拜手稽首, 對揚聖上之休命, 謹俯伏小退, 抽筆聯詞, 遂作賦曰: “月旅蕤賓, 日吊井, 蒼龍正中, 朱鶉方逞。 時伯勞之和鳴, 迎南郊兮脩景; 方長養之盛節, 期田功之上熟。 忽連月而悶雨, 望雲霓其如焱, 亢陽悍其酷烈, 炎氣鬱其四起。 馳火車兮驂熒惑, 使羲和兮搖赤幟。 勢炎炎而赫赫, 氣融融而滌滌, 火井沸兮焦谿竭, 虞淵烘兮濛汜赤。 巖竇絶乳, 陂池出閘, 堤塍爲陸, 溝澮成暵。 當此之時, 雖使鄭伯開其涇渭、豹起謀其澤鹵, 顧安所擧鍤而成雲、決渠而爲雨也哉, 於是按神農求雨之書, 稽舞雩禱雨之典, 靡神不擧, 于壇于墠, 至於山林川澤丘陵墳衍, 遍走遍求。 旣展旣卒, 是虔禱之至此, 猶靈貺之久鬱。 方將致怨乎雲漢, 歸訟乎風伯, 乃舞巫覡, 呼蜥蜴, 觴土龍, 泥石牛。或閉門而塞道, 或遷市而修溝, 皆曰其雨其雨兮, 萬口喁喁其未休。 俄而八風不翔, 六氣沈寂, 天色渾沌, 層陰四合, 昏昏漠漠, 暝暝默默。 忽乾旋而坤轉, 上帝赫其威靈, 叱詑六丁, 撽召五星, 命飛廉, 會豐隆, 呵電母, 鞭雷公。 擊鬼神兮騰龍車, 驅鐵騎兮飛金索, 誅炎魃於西郊, 襲驕陽於南陸。 於是詔馮夷, 徵海若, 旣行令於四瀆, 又布符於五嶽。 肅氣升兮蒸鬱, 滲液漏兮游揚。 旣而興雨師以作陳, 聽天一而主張, 分指揮兮旣嚴, 施號令兮有節。 不霪不劇,不徐不疾, 匪震匪拔, 匪溢匪洩。 演以潛沬, 灌以膏液。 始霂霢而浸潤, 終滂沱而優渥。 於是根之跼者秀發, 苗之遏者敷榮。 或甲而出者, 或乙而生者, 或瞢而赤者, 或(芑)〔苞〕而白者, 或軋軋而葐蒕, 或艶艶而生息。 萬物欣欣其自悅, 百穀稶稶其成苞。 蔚翹莖而瀵蘂, 紛擢穎而展胞。 揚皓毦兮䔿䔿, 敷紫茸兮穊穊。 將見一禾而十莖, 一莖而九穗, 懜懜黝黝, 芃芃穟穟, 旣連莖而著德, 亦合穎而呈瑞。 異畝將不取於周盛, 六穗又何論於漢治, 嗚呼! 坤稱母, 乾稱父, 鞠育萬物, 貽我甘乳。 使天而雨金成丘兮, 苗不得滋以生遂也; 使天而雨玉三日兮, 民不得飱以爲食也。 是膏澤之遍及兮, 果不知其誰之賜也,” 言未旣, 有翰林學土喟然而歎, 歷階而進曰: “子徒知禱雨之有徵, 不知致雨之有由也; 徒知在天之天, 不知聖人之與天爲謀也。 子不覩我聖上之所以應天之實乎, 體一元, 敍九疇, 守一德, 行九經, 運二氣於範圍, 齊七政於璣衡。 于以代天工、修天職, 小心兢兢, 臨政翼翼。 於是祖神農宗后稷。 親事籍田兮, 以供粢盛之薦; 留念《豳風》兮, 以省耕斂之令。 知稼穡之艱難, 每勞心於稼政。 忽値時雨之愆期, 益自軫乎聖敬, 遑遑乎畏天之威, 汲汲乎求民之病。 遂損膳而撤樂, 發憂旱之痛旨, 乞言於耆艾勳舊之臣, 求言於骨鯁魁壘之士, 冀交修而協贊, 以匡予之不逮。 特陞明而黜幽, 斯補遺而革弊, 乃至挺重囚,放輕繫, 埋幽伏, 伸冤滯。 蠲免逋欠, 賑恤困乏, 革徙民之令, 踈役民之式。 旣省獄之恩深, 又厚生之德洽, 是人心之胥悅, 盍天意之感通, 遂昭答以甘澍兮, 示湛恩之圓融, 信乎天聽之自我民兮, 知聖心之上與天同也。 是豈山川之祝、土龍之祈, 所以回天之力、動天之機也, 若乃德涸而仁枯, 邦燬而政薰, 是所謂天旱而人旱兮, 亦何疑於報應之足云也, 猗歟! 我聖上之奉天兮, 誠以實而不以文也。” 子墨客卿再拜而颺言曰: “大哉! 聖德之配天也, 誠如子之言乎! 然予於是有所感矣, 請質之於子。 昔堯之欽若昊天兮, 何有九年之水也, 成湯之欽崇天道兮, 何有七年之旱也, 以周宣之敬天兮, 旣不免《雲漢》之歎; 我聖上之奉天兮, 亦有乙巳之憂。 是豈德有違於天耶, 殆時數之不可讎也歟, 信天道之幽遠兮, 豈人事之有所求也,” 翰林學士乃盰衡而誥曰: “子不知天之所譴告於人君兮, 亦仁愛人君之至也, 天之譴告於堯兮, 舜以爲警予而自試; 天之譴告於湯兮, 躬自責以六事; 天之譴告於周宣兮, 乃側身以瞿瞿; 我聖上之祗承天譴兮, 亦曰惟予之辜。 我求其所由兮, 豈召因之無端,或朝有四凶而未之除兮, 不能無遺憾於知人之難; 或身處君臣之變兮, 不能無慙德於致天之罰; 或寧丁我躬而呼天兮, 豈以承厲王之餘烈也。 我聖上之避殿而求過擧兮, 又豈無人事之或失也, 是上天之所以譴告而使之覺悟兮, 信仁愛之出於陰騭也。 知聖人所以應於天兮, 亦修省之至於昭假也。 諒人君致福之道兮, 莫有大於引咎而自飭也。 竟蒙天之報應兮, 遂對時而育物也。 極高明之爲配兮, 宜與上天而對越也。 豈侈然自以爲無咎兮, 委時數而莫之察也。吁! 其盛矣哉! 彼漢武之意乾封、魯穆之欲暴尫, 祗速天之怒兮, 敢回天之有望, 至罪歲而終莫知其咎兮, 曾何補於國耗而民荒也哉,” 於是子墨客卿矍然改容, 懣然心服, 避席離坐, 遂讓于翰林學士撰頌。 頌曰: “於赫我王, 德配上玄。 一至誠兮, 至誠無息。 有感必通, 動圓靈兮。 乖氣屛伏, 和氣薰蒸。 降膏澤兮, 靈貺旣隆。 以優以渥, 萬物育兮。 雨暘時若, 時和歲豐。 惟皇之極兮, 天人參會。 上下相應, 于胥樂兮。” 子墨客卿欣然涉筆, 請續爲之說曰: “吾聞太平之時, 禾不爲䆍, 夜必甘雨, 晝必和風, 風七十二, 雨三十六, 是年之候, 惟苗之碩, 民豈勞力, 實天之勖, 古有國稅再熟之稻, 鄕貢八蠶之緜, 此其時乎! 何以加焉,” 遂輟墨而謝曰: “賦已就矣, 謹繕寫以進, 請播樂府。” 上覽畢, 牢讓不居, 顧謂司農卿曰: “吾將觀省于郊。” 遂命有司備法駕, 幸東郊, 召司稼, 乃登進厥農而勞之曰: “嗟! 爾有生, 常患阻飢, 厥咎在予, 予豈不知, 天鑑孔仁, 實不汝遺。 始旱而雨, 土膏方滋, 耕犂種蒔, 毋失其時, 耘耨培糞, 各勤乃業。 于以事育, 於生爲足。” 於是父老皆呼千歲, 相與爲《擊壤歌》曰: “我植種稑, 于彼原隰。 父菑子播, 仰以爲食。 方其未雨, 如火之熇, 及其已雨, 如乳之養, 蔪然秀盛,茁爾壯長。 聖與天謀, 何不豐穰,” 又爲《報秋歌》曰: “一粒種兮, 萬顆垂實; 單稃拆兮, 雙米抱出。 于場于室, 乃積乃餾。 我有餘糧, 棲于畝而不收; 國有餘儲, 藏於民而不封。豐年之慶, 誰爲上農, 王耶天耶, 何德之隆!” 歌未卒, 薰風南來, 陰雲西興, 須臾雨乃復作, 若神之徵。 未幾, 炎蒸消洗, 道路淸澄, 遂戒僕夫, 車駕啓還。 於是路鼓旣擊, 樂師行班。 歌謠者迭和, 觀德者如闤。 相與輸東海、獻南山, 頌德祝壽, 聲振人寰。 蕩蕩乎! 若天覆而地載, 渢渢乎!
若雨施而風頒。
傳曰: “此賦意則善矣, 然非吾之所及也。 留政院。”
【史臣曰:“陽春獻諛希寵, 欲衒才藝, 以欺人主, 縉紳嗤之。 未幾, 果被憲府之論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