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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주제별 예화모음)
▣ 그리스도인의 중용
요즘 우리 사회는 천안함 침몰 이후 남·북, 여·야, 보·혁 등으로 첨예하게 갈린 가운데 대립과 반목을 계속하고 있다. 기독교계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가운데서 중용(中庸)의 도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신 5:32, 잠 4:27, 삼상 6:12)고 가르친다.
신학대학원 설교학 강의에서 들었던 정장복 교수님의 가르침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앞으로 설교를 준비할 때 가급적 주석을 많이 보십시오. 진보적, 보수적, 중도적인 주석을 두루 참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죄로 물든 인간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소문에 휩쓸리지 않으며,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요즘 성 오거스틴의 사역 원칙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본질적인 일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일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
/정성진 목사 (거룩한빛광성교회) <국민일보/겨자씨>
▣ 중용의 덕
사람의 관계란 멀리 하면 서운한 감정을 가진 채 소원해지고 너무 가까이 살다 보면 누구나 가깝게 지내던 친구나 동료가 하루아침에 실망하여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게 오해든 배신이든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충격은 더 큰 법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적당한 처세로 살아가기란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의 이치도 흔히 하는 말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알 맞는 상태가 바로 적당함이라 할 수 있다.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마라’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 역시 적당함의 덕목과 상통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적당한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용기(勇氣)란 무모하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는 상태라 했고, 절제(節制)란 방종도 아니요, 무감각하지도 않은 상태라 했다. 그리고 관대(寬大)함이란 낭비도 인색도 아닌 상태고, 긍지(矜指)란 오만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철칙으로 삼을 때 비로소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가까워질수록 기대 했던 존경과 사랑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실망을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았던가? 풍경도 그렇고, 사람의 마음도 그렇고 감동의 마음을 품었던 일 또한 가까이서 보면 멀리서 볼 때와 다른 경우가 많았다.
티베트의 존경 받는 수도승(修道僧) 이었던 ‘아나가리카 고빈다’ 는, ‘산(山)의 위대함은 거리를 두어야 보인다.’ ‘산(山)의 모습은 직접 돌아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가까이 하여 자신이 그 불꽃에 데이고 사랑이 두려워 너무 멀리 떨어져 얼음처럼 차갑고 외롭게 지내는 어리석은 인생도 또한 많다. 인생 총체적인 숲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찌그러진 일생을 보내고야 마는 사람도 너무 많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 불행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행복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한다.
▣ 믿음의 추
지난주 미주 연합집회에 갔었다. 한 장로님이 자기의 보트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너무 위험해 보여 타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이렇게 작은 보트를 타면 거센 파도에 뒤집어지지 않습니까?” 그러자 장로님은 빙그레 웃으며 염려할 필요 없다고 했다. “거센 파도가 일고 풍랑이 몰아쳐도 배의 중심 밑에 칼날과 같은 깊이 내려진 추가 있어서 절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람을 이용해 돛을 조정하면서 즐길 수 있는걸요.”
보트를 타면서 생각해봤다. 우리의 신앙도 기도와 말씀이라는 믿음의 추가 내 심령 가운데 깊이 내려져 있어야 한다. 깊이 내려진 믿음은 바람이 불어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다. 세상 시험 유혹이 흔들어도 믿음의 추가 깊이 내려져 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믿음의 추가 깊이 내려지지 않은 신앙은 작은 유혹과 시험에도 무너지고 만다. 믿음의 추를 깊이 내리자.
/양병희 목사 (영안장로교회) <국민일보/겨자씨>
▣ 편애하는 부모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편애하면서 가정을 갈등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부모의 이기심에서 생겨난 비뚤어진 자식 사랑법이지요.
어떤 부모는 재산을 가지고 자녀를 조정합니다. 소위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정도에 따라 재산을 차별해서 나누어 주는데 이 같은 잘못된 자녀 조정법은 부모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거짓 사랑, 그리고 형제 사이의 반목과 갈등만을 낳게 되겠지요.
또한 사랑 받는다는 자식은 우월감을 갖게 되고 학대 받는 자녀는 열등감의 노예로 전락된 채 비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고아 아닌 고아의 신세가 되어버린 자녀는 자연히 그의 형제를 원수로 여기면서 질시와 반목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합니다. 이것은 한 가정을 망치게 하는 사단의 전략이지요.
우리는 에서와 야곱, 쌍둥이 형제 중 유독 야곱만을 사랑했던 어머니 리브가의 잘못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가 자녀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자기 가정에 맡겨진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필요하겠지요. 그때 비로써 자녀들의 귀한 신분을 존중히 여기면서 그들을 차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으로 양육하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한 자식만을 편애하지 마십시오. 자식 편애는 온 가족을 망치는 사단의 무서운 전략입니다.
▣ 프랭클린의 스승
피뢰침을 발견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독실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교라고는 고작 1년밖에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독서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에게는 두 사람의 훌륭한 스승이 있었는데 그 스승은 어머니와 담임목사였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매일 잠언 22장 29절을 들려주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프랭클린에게 삶의 원리를 가르쳐준 또 한사람의 스승은 마트목사였다. 프랭클린은 소년시절부터 마트목사가 가르쳐준 13가지 생활덕목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이다.
프랭클린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 비결은 `13가지 생활덕목'과 청교도교육을 삶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스승은 많다. 다만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임한창
▣ 치우치지 않는 성숙함
보통 사람이 하룻밤 잠을 잘 때 50번 이상이나 뒤척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는데 어린아이는 종종 떨어지곤 합니다. 어른들은 뒤척일 때 한 번은 오른쪽, 다음엔 왼쪽으로 뒤척이지만 아이들은 한 방향으로 계속 뒤척여 침대에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해서 균형을 이루는데 비해 어린아이는 균형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 성숙해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균형감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보수와 진보 간의 대립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흑백 논리로 두 가지 입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중도파나 유보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균형 감각을 가지다보면 조금씩 성숙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야만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통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성숙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미성숙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가면 갈수록 균형감각으로 성숙해지기 위해 노력합시다.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고 배워서 알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데 다시 한 번 말씀생활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 기도: 주님, 균형 잡힌 삶을 살게 하소서.
/방선기 목사
▣ 치우침 없는 균형의 경건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고 악에서 네 발길을 끊어 버려라”(잠4:27)
지난 날의 인류의 역사는 좌우 극단의 대립으로 피를 흘려온 기억을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날의 지구촌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분쟁과 비극도 따지고 보면 소위 극단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려는 이들의 독선으로 말미암은 것들입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인권과 평등이 진보적 가치를 대표해 왔다면 복음과 자유는 보수적 가치를 대표해 왔습니다. 성경은 인권과 평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복음과 자유를 양보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한때 기독교 운동의 양 극단을 대표하던 이들은 둘 중 하나를 철저히 외면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최근세 역사도 이런 비극을 온 몸으로 겪어 왔고, 아직도 계속되는 남과 북의 분단이나 국민 통합을 저해하는 남남 갈등도 따지고 보면 극단적인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오늘 우리에게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진리도 균형이고, 경건도 결국은 균형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에 대한 통전적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좌우 어느 쪽으로든 우리의 시야가 굴절되는 것을 예방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의 어떤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우리가 마땅히 포옹해야 할 모든 가치를 예수 안에서 용해하는 자정능력을 갖습니다. 예수는 가장 보수적인 분이면서도 가장 래디칼한 진보적 시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비전이요, 희망입니다.
* 기도: 역사의 주인되신 주님, 우리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다만 예수를 바라보게 하소서. 아-멘
/이동원 목사
▣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
역사적인 거부 록펠러에 대한 이야기이다. 록펠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받았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 가지의 기적을 일으켰다. 첫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주었던 자라는 것이다. 세 번째 기적은 장수이다. 그는 98세까지 살았는데,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고 깨끗하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 예배에 출석했으며, 주일 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는 춤추는 곳에 가본 적이 없으며,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식사 때마다 감사 기도를 드렸고, 매일 성경을 읽었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 때는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날마다 말씀을 대면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늘 말했다.
그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그에게 있어서 순간순간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성실하며, 그분의 계명에 삼가 주의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 말씀의 징검다리 / 정장복 ·주승중 엮음
▣ 소금의 영성
소금은 말이 없고 소리도 없다. 소금은 냄새가 없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소금은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고 생명과 같다. 소금은 물처럼 자신을 감추고 모든 것을 소생시킨다. 빛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어둠을 밝히지만, 소금은 자신을 감춤으로써 어둠을 삼켜 버린다. 소금의 아름다움은 지나치지 않는 소박함에 있다. 소금은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적절한 균형에서 최고의 맛을 낸다. 소금의 영성은 균형에 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균형이다. 치우침이 없는 것이 정로(正路)이다. 정로를 걸어가는 것이 소금이다.
소금은 남을 변화시키며 세상을 변화시킨다. 바다는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소생시킨다. 품은 것에 동화되지 않고 변화시킨다. 변화시키는 바닷물의 능력은 그 속에 있는 소금에 있다. 또 소금은 신성하다.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에 소금을 쳤다. 소금은 언약의 말씀을 상징한다. 생명을 공급하는 가장 소중한 것들 속에 소금이 담겨 있다. 눈물에 소금이 담겨 있고, 땀에 소금이 담겨 있으며, 피에 소금이 담겨 있다. 따라서 소금은 생명이다.
소금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소금은 남을 위해 맛을 낸다. 소금은 자신을 녹여 맛을 낸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썩어 가는 세상을 썩지 않도록 도와주는 소금, 우울한 세상에 조용히 맛을 내는 소금 같은 사람이 되자.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생수의 은혜」/ 강준민
▣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이제 아침 큐티 시간은 식사 시간처럼 제게 자연스런 습관이 되었습니다.
아침 5시 20분 자명종이 울리면 무조건 일어나 세수로 정신을 차린 후, 식탁에 앉아 큐티를 합니다. 아침밥이 그렇듯이 때로는 꿀맛 같은 큐티 시간을 갖지만, 많은 경우 의무적인 식사 시간처럼 지나가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아침 큐티 시간에 주시는 말씀이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때로 한 번의 큐티로 잘 알아듣지 못할 때는 몇 번에 걸쳐 같은 메시지를 주십니다. 한동안 보직 해임 통보로 실망하고 힘들어할 때 하나님은 시편 61-66편에 걸쳐 계속해서 ‘저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직원들의 업무 평가를 앞두고 있을 때는 디모데전서 5장 21절 말씀을 통해 “편견과 편벽 없이 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흐트러져 있는 청년부의 부장을 맡게 되어 걱정과 염려가 생겼을 때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는 말씀으로 마음을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저에게 큐티 시간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귀하고 귀한 시간입니다.
내 맘에 그린 예수 / 방선오
▣ 균형 잡힌 신앙생활
체조경기 중 평균대는 높이 125㎝, 길이 5m, 폭 10㎝ 나무 위에서 펼쳐진다. 선수들은 90초간 그 좁은 평균대 위에서 뛰고 돌고 구르며 연기한다. 평균대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신앙생활에서도 균형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세상을 균형 있게 창조하셨다. 낮과 밤, 땅과 바다,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셨다. 사람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한 사람 안에도 육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을 두셨다.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은 육은 더럽고 악하며, 영은 깨끗하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균형 잡힌 신앙관이 아니라 잘못된 이원론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몸이 균형 잡힌 모습으로 보전되길 원하신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균형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고 인간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참된 신앙인은 교회 안에서도, 세상에서도 신실하다. 하나님께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치우침 없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임용택 목사 (안양감리교회) <국민일보/겨자씨>
▣ 영원을 향하는 걸음
아버지,
하늘을 쳐다보느라
제 발이 헛딛지 않게 하소서.
헛딛지나 않을까 조심하느라
하늘을 잊지 않게 하소서.
항상 하늘을 바라보되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해 걷게 하소서.
제 걸음 걸음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걸음이게 하시고
그렇게 함으로
천국의 땅을 걷고 있음을 알게 하소서.
제 눈을 뜨게 하시어,
이 땅이 천국이고 지금이 영원이며
이생이 영생임을 깨닫게 하소서.
-김영봉 목사, 신학자, 저술가
▣ 흑백논리를 넘어서
넬슨 만델라를 가리켜 화해와 관용의 정치가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화해와 관용으로 새로운 질서를 이룩할 수 있었던 그의 중요한 철학 중에 하나는 흑백 논리를 늘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는 다양한 원인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아는 현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든지 선이 아니면 악이라든지 단순화한 흑백논리를 넘어선 행동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만델라는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면 적과 함께 일해야 한다.
그러면 적은 당신의 동반자가 된다."는 믿음으로 정치를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좌익 아니면 우익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흑백논리가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원인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해결을 위한 이해와 조화를 만들어나가야 사회 전체의 힘을 결집시키고 난국을 헤쳐나가게 되지는 않을까 합니다.
/이주연 목사
▣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함의 은혜
성경을 보면서, 나이가 들면서 새록새록 느껴지는 정겨운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적당’입니다. 적당히, 적당하게, 적당한, 적절한……. 적당이란 단어가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혹은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적당히 하는 것을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강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적당이란 말이 양면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적당이 점점 더 가슴으로 정겹게 느껴집니다. 적당하게 사는 삶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적당하게’를 다른 말로 하면 ‘균형 있게’입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적당하게. 제 가슴에 머물러 있는 이 말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말(言)에 대해 교훈하면서 ‘적당’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적당한 말로 대답하는 것은 입맞춤과 같다고 했고,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말을 소금치듯 하라고 합니다. 이 역시 말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입니다. 적당은 입맞춤과 같고,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습니다. 입맞춤과 은쟁반에 금사과가 어떤 이미지인지는 아시지요? 소금은 많이 넣으면 짭니다. 적게 넣으면 싱겁습니다. 소금은 적당하게 넣어야 맛이 납니다. 적당한 것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지를 그리고 맛있는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비단 말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라. 우리 마음에 새겨 놓으면 좋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적당이란 모자라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어디까지가 적당한 것인가, 이것 참 어려운 일입니다. 지혜를 다른 말로 분별력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적당한 것인지를 잘 분별할 수 있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돈을 쓸 때도 적당하게 써야 합니다. 100만원을 써야 할 일에 10만원을 쓰면 인색한 것입니다. 100만원을 써야 할 일에 1000만원을 쓰면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경우 모두 돈을 쓰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들을 수 있습니다. 인색해서 욕을 먹는 사람이 있고, 낭비해서 욕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이 일에는 얼마를 쓰면 가장 적당할까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에 적당한 시간을 써야 합니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일도 적당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적당해야 합니다. 언젠가 자기 가정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봉사하러 다니는 한 가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목사에게 칭찬받을 줄 알고 이야기를 했는데 가서 식구들을 위해 일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가정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시간과 힘을 다 가정에만 쏟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 분이 나이 마흔이 넘어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았답니다. 그동안 모든 힘과 시간을 직장에 쏟던 그가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에 그가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모든 힘과 시간을 가정에 다 쏟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이것은 잘한 일 아닙니다. 그동안 가정에 쏟지 못했던 힘과 시간만 가정에 쏟는 것으로 했어야 합니다. 가정에 쏟는 힘과 시간, 사업이나 직장에 쏟는 힘과 시간이 적당해야 합니다. 직장과 사업에 모든 힘과 시간을 쏟고 가정에는 전혀 힘과 시간을 쓰지 않으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는 인생을 맞게 됩니다. 어느 것도 과하면 안 됩니다. 일을 하는 것과 쉬는 것, 집안일과 바깥 일, 사역과 취미활동, 잠자는 시간과 활동하는 시간, 수입과 지출, 소비와 절약……. 이 모든 것이 적당해야 합니다.
현대는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보다 과해서 생기는 부작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과식, 과욕, 과로, 과음, 과시, 과신…….
예수를 믿는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이레 되는 날은 안식해야 합니다. 낮에는 힘을 다해 일하고 밤에는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충성입니다. 적당함입니다.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과 적당히 일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목사로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해 마음에 소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이 적당함의 은혜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평생 누리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조현삼 목사
▣ 중용, 치우침에 관한 성경 말씀
0 (여호수아 23: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0 (신명기 2:27)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0 (신명기 5: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0 (신명기 28: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0 (여호수아 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0 (사무엘하 2:19)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0 (역대하 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0 (욥기 23: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0 (욥기 36:21)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0 (시편 14: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0 (잠언 4:27)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0 (잠언 7:25)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0 (전도서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0 (로마서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0 (요한2서 1: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0 (요한계시록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 중용에 관한 금언
0 군대가 행진하고 있었는데 길의 오른쪽은 눈이 내려 얼음이 얼어 있었다. 그리고 길의 왼쪽은 불바다였다. 이 군대가 길 오른쪽으로 가면 얼어죽고, 길 왼쪽으로 가면 불에 타 버린다. 하지만 가운데의 길은 적당히 따뜻함과 시원함에 조화된 길이었다.(탈무드)
0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이 만나고 있다. 수직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수평은 이웃과의 관계이다. 만약 이 중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이단이고 거짓이다.(完)
0 사람에게는 영, 혼, 육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 정, 의(知, 情, 意)가 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무시하거나 버릴 수 없다. 그런데 이단과 사이비 종교는 그 어느 한쪽만을 치우칠 것을 강조한다. 참 기독교 신앙은 전인적(全人的) 신앙임을 알아야 한다.(完)
0 사람에게는 한계(限界)가 있다. 이것을 무시하는 만용은 중용과 균형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또한 사람은 완전한 의인이 없다. 그런데 사람을 흑백논리로만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完)
/한태완 목사 360 주제별 예화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