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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치료사
나치의 생체실험 중 최면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면을 걸기 전에 피실험자에게 지금 하는 실험은 동맥을 절단한 후 인간이 얼마 만에 죽는지 연구하는 것이라고 알렸다. 그리고 최면을 건 후 동맥을 잘랐다고 거짓말을 했고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물방울 소리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실제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당신 앞에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당신은 안으로 들어갑니다. 심호흡을 하고 공기를 맡아봅니다. 은은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가득 합니다.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엘리베이터의 1층 버튼을 누릅니다. 10층에서 1층으로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갑니다. 1층은 아주 따뜻한 곳입니다. 어둠은 구름처럼 당신을 포근하게 감싸줄 것입니다. 이제 불이 들어오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빨간 불이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몸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9층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8층을 지나고 있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점점 더 퍼지고 있습니다. 7층에 도착합니다. 긴장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온몸에 있는 근육은 완전히 이완되었습니다. 6층, 5층을 지나고 있습니다. 깊이, 더 깊이 가라앉습니다. 2층입니다. 이제 당신은 더 할 수 없이 편안합니다.
당신은 혼자이며 아무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당신에게 가장 평화로운 장소입니다. 따뜻한 물이 발밑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어깨 위에 놓인 당신의 짐을 내려놓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홀가분해서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10층에 올라오면 의식을 찾게 되고 당신은 편한 기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활력이 넘치고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 엘리베이터에 오릅니다.”
처음에 김씨는 천수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최면치료. 생소한 것이기도 했고 그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천수를 통해서 행해진다는 것이 도무지 신뢰가 가질 않았다. 천수가 굿 역시 일종의 최면요법이라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누구나 가능하다고 설명한 후에도 김씨는 미심쩍었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는 곧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말 그대로 넋이 나간 상태에서 무엇을 치료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 때문에 김씨는 눈감고 자신에게 집중해보라는 천수의 말에 그냥 웃기만 했다.
천수는 책에서 본 몇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실 끝에 동전을 매달고 움직이거나 촛불을 들여다보게 했지만 의심 많은 김씨에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이완최면유도를 시작했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오랫동안 말하자 김씨는 잠에 빠지듯 마침내 최면에 걸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완전히 10층에 도착하자 김씨는 아주 달콤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두 시간 만에 일어난다. 눈을 뜬 김씨는 너무 좋은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천수 자신도 조금 놀란다. 실험적으로 책에 나온 예문을 짜깁기하여 만들어낸 유도술이 어머니에게 나름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며칠 간, 단조롭지만 딱딱하지 않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기쁨과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천수를 들뜨게 한다.
“기분이 어때?”
“글쎄다. 아주 좋아. 뭔가 후련하기도 하고. 기억나진 않지만 너무 좋은 꿈이었다.”
“그건 꿈이 아니라 바로 최면이에요.”
천수는 신나 하며 말한다. 하지만 김씨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대신 천수의 밝은 모습이 나쁘지 않을 뿐이다.
천수는 김씨에게 조금 더 공부해서 지병인 관절염을 치료해주겠다고 말한다. 김씨는 별 기대는 없었지만 기특한 마음에 천수의 어깨를 쓰다듬어 준다. 낮에 너무 곤하게 잤던지 김씨는 밤이 되어도 좀체 잘 수가 없다.
김씨는 아홉 시 반에 맞춰 간신히 밖으로 나선다. 전날 초저녁에 깨어난 후로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뒤척였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이들 생각에 김씨의 걸음이 바쁘다. 겨울철엔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량이 많지 않아 김씨처럼 날품을 파는 사람들은 설 대목 전까지 실직상태나 다름없다. 할인매장이나 대형 슈퍼가 들어선 후로 철에 상관없이 깔끔하게 포장된 야채를 살 수 있어서 가게를 두고 도매를 겸하던 사람들도 한가하긴 마찬가지이다. 부쩍 추워진 탓에 늦은 오후 몇 시간만 반짝하고 말뿐이다. 김씨는 시장 여자들이 요즘 매일같이 모이는 나주 상회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긴다.
지난 밤 천수는 잠들지 못하는 김씨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김씨는 몇 번이고 주책없다며 이야기를 중단했다. 천수 역시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김씨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 왠지 낯설었다.
김씨가 나간 방에서 천수는 어제 밤 그녀에게 들은 자료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최면치료 암시문을 만든다. 김씨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가서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한 다음 은유적인 암시문을 주입하여 근본적인 고통의 뿌리는 캐내는 것이다. 천수는 문장을 한 줄 한 줄 완성하는 동안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최면은 사실 인간에게 매우 친숙한 상태이다. 지루한 연설을 들을 때에 느끼는 혼몽함이나 단조로운 길을 운전하면서 목적지를 잊는 것은 최면 상태의 무수한 예 중 하나이다. 나른한 몽환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최면치료란 그러한 몽환상태를 유도한 후 잠재의식 속에 강렬한 암시를 심어주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암시에 의해 행동을 제어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비흡연자다, 나는 적당한 양의 음식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따위다.
TV를 보다가 우연히 최면에 대해서 알게 된 천수는 서점에서 최면요법에 관한 책을 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의 패턴을 바꾸는 간단한 암시뿐 아니라 오래된 고통이나 과거로부터의 불합리한 고리를 끊는 치료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며칠째 그 책을 보며 치료법을 연구하는 중이다.
방에 누워 책을 보는데 현관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천수는 몸을 일으킨 후 부엌으로 간다. 층계참에서 신발을 벗는 김씨의 동작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낀다. 그게 뭐야, 하자 김씨가 뒤에 감추었던 상자를 내민다.
“안 사겠다고 맘먹고 가도 꼭 이렇게 사분다. 내일부턴 정말 안 가야 쓰것다.”
김씨는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며 염치없다는 듯 말한다. 천수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한번 더 뭐냐고 묻는다. 김씨는 부엌 좁은 틈에 앉아 상자를 푼다. 무뚝뚝하게 생긴 적외선치료기가 꺼내어진다.
중소기업이나 덤핑, 광고비 절약 운운하며 시장 입구에 있는 건물의 지하에서 선물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은 십일 월 말이었다. 김장이 끝나고 한가해진 시장 여자들이 오가면서 18개 들이 화장지나 원적외선 냄비 세트를 타 날랐다. 김씨도 지난 해 가게를 그만 둔 나주댁을 따라 그곳에서 몇 차례 조악한 물건들을 받아왔다. 나주댁은 김씨가 십 년 가까이 일해 온 나주 상회의 주인 여자였다. 예닐곱 살 위 연배인 그녀는 배추장사로 자식들 모두 여의고 이젠 골병들었다며 지난 여름 가게를 팔았다. 배추 냄새에 신물이 난다고 했지만 심심하면 시장에 나와 사람들과 노닥거리며 소일하는 중이었다. 그런 나주댁에게 중소기업 행사는 휘젓고 다니기 그만인 곳이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열댓 명의 여자들이 그곳을 드나들었고 김씨 역시 그 속에 포함되게 되었다. 처음에 김씨는 선물 나눠주면서 사람을 모으고, 시끄러운 음악에 맞춘 노래자랑 따위로 혼을 빼놓은 다음 달콤한 말로 물건을 파는 그곳의 풍경에 기가 찼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여. 그렇게 공짜로 준 것들은 어디선가 다 남겨 먹겠지.”
가루비누와 다시마 따위를 받아온 어느 날 김씨는 천수에게 들리도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며칠 동안 혼자 약수터에 다녔다. 몇 해 전부터 겨울이 되면 시장 여자들과 함께 산에 다녔었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일하는 탓에 모두들 무릎이 시원찮았고, 등산이 좋다는 말에 너도나도 산을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장 여자들 열 중 아홉은 중소기업 박람회에 드나들었으므로 김씨는 자꾸만 소외되어갔다. 이번엔 상품으로 무엇을 주었는지 매일같이 보고해주던 나주댁의 전화마저 뜸해지자 김씨는 속이 상했다. 며칠 후 김씨는 나주댁에게 돼지 뼈 싸게 사는 곳을 묻는다며 전화해놓고, 공짜나 좀 받고 말지, 했다.
김씨가 자신의 말대로 공짜에 대한 비용을 치른 것은 딱 보름 만이었다. 옥이 들어 있다는 베개 세트를 사 가지고 온 것이다. 천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잘했다고 했지만 김씨는 자꾸만 변명을 했다.
“우세스럽게 자꾸만 사라고 하잖아. 남 눈치도 있고 해서 제일 싼 걸로 샀다. 너도 목이 자주 아프잖니. 이거 베고 자면 싹 낫는다고 하더라.”
그리고 또 며칠 동안 김씨는 물건을 샀으니까 당분간 맘 놓고 상품을 받아와야 한다며 그곳으로 갔다. 그렇게 한 며칠 화장지나 섬유 유연제를 타오더니 이번엔 꽤 값나가는 물건을 사버린 것이다. 김씨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천수의 얼굴을 본다.
천수는 어머니가 당신 스스로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먹는 것 역시 언제나 천수를 위한 것일 뿐이다. 가끔씩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그때마다 순대국을 사먹었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약값이나 순대국처럼 언제나 최소의 양이었다. 천수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늘 김씨에게 미안해하는 것 역시 이것 때문이다. 징역살이를 하듯 세상을 살아가는 어머니 김씨가 불쌍하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가 죄스럽기도 하다. 때문에 천수는 적외선치료기 이상 되는 물건을 사왔다고 하더라도 어머니에게 잘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래서 자꾸 아들의 눈치를 살핀다. 천수가 박스 안쪽에 들어있던 설명서를 꺼낸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천수가 묻자 김씨는 그때서야 활기를 되찾는다. 삼단으로 움직이는 머리를 적당한 위치에 고정시킨 다음 세 개의 단추를 눌러 시간과 세기와 전원을 조절한다. B5 크기의 사용설명서 안에는 말 그대로 만병통치의 효과가 부위 별로 적혀있다.
“물리치료 받으러 가면 이거 20분 쬐어 주고 4천 원 씩 받아가잖니. 여름 되면 매일같이 치료받으러 가는데 그러면 그것보다 싸겠다 싶어서 샀다. 너도 가슴이랑 목 쬐어서 좋고 말야.”
천수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도 안다. 김씨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아플 때에야 겨우 한번씩 물리치료란 것을 받는다. 물리치료사는 꾸준히 치료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지만 김씨는 매번 치료를 중단했다. 시큰한 파스가 그런 김씨의 몸에서 떨어질 날이 없다. 천수의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씨는 목을 길게 빼 보이며 시범을 보인다. 적외선에 비친 김씨의 목과 가슴이 붉게 물든다.
“이제 당신의 목과 어깨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팔은 이제 움직이지 못합니다. 들어보려 해보세요.”
밤이 되었을 때 천수는 김씨를 편히 눕게 한 후 다시 최면을 건다. 천수의 주문에 팔을 움직이려 하는지 김씨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하지만 몸은 이미 천수의 최면에 의해 효과적으로 통제 당하는 중이다. 천수는 김씨의 얼굴을 본다. 몇 번의 심호흡 뒤로 숨이 얕아졌고 얼굴 근육은 모두 느슨하게 풀어졌다. 최면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제 잠재의식 속에 암시를 주입하면 된다.
“당신은 지금 어릴 적 뛰어 놀던 동산에 와있어요. 연이 날고 살이 흰 아이들이 뛰어다닙니다. 이곳에서는 배고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들 보송보송한 얼굴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 행복한 아이들 틈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김씨의 표정이 한없이 온화해진다. 천수는 목소리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달력 뒷면에 적어둔 암시어들을 힐끗거린다. 더듬거리거나 말이 막히면 최면에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가가자 아이들이 모여듭니다. 포근한 햇살이 당신의 이마 위로 엷게 퍼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새소리처럼 부드럽게 당신의 귀속으로 스며옵니다. 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당신은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땅은 푹신푹신해서 당신의 무릎에 어떠한 충격도 주질 않습니다. 당신은 건강한 스무 살 적 몸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천수는 잠시 멈칫 한다. 말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를 느리게 반복한다. 직접적인 암시의 내용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할 심상이 너무 산만해졌고, 결정적으로 기억한다, 따위는 너무나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수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스무 살 시절의 표현을 연결시킬 만한 암시어를 찾느라 뜸을 들인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김씨의 20년 전의 기억 중에서 행복이나 포근함으로 떠올릴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천수는 하는 수 없이 이 부분을 얼버무린다.
“그리고, 당신의 주위에 모여든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손에 쥐고 온 풍선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기다립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행복과 충만한 감사로 가득 차있습니다. 당신은 풍선을 하나씩 꺼내어 아이들 손에 쥐어줍니다. 풍선은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배추처럼 생긴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무처럼 희고 긴 풍선입니다. 헬륨 가스를 넣은 풍선은 너무나 가볍습니다. 하나씩 풍선을 쥔 아이들의 몸이 사뿐하게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얼굴 가득 자애로운 미소가 퍼집니다.”
김씨의 눈꺼풀이 REM 현상처럼 파르르 떨린다. 가장 순수한 의미로서의 행복이 그녀의 얼굴에서 떠오른다. 그런 김씨의 얼굴을 보며 천수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음식에 대한 암시로 옮겨갈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기로 한다. 원래는 신경성 소화불량도 함께 치료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김씨의 표정은 너무나 만족스런 것이어서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제 천천히 그곳을 나옵니다. 그곳으로 갔던 계단이 옆에 보입니다. 그 계단은 열 개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계단 끝에는 포근한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가볍게 발을 움직입니다. 계단에 다 오르면 당신은 곧장 침대에 누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깊고 달콤한 잠을 잘 것입니다. 자, 준비가 되었으면 첫 번째 계단부터 오르기 시작합니다. 되돌아옵니다. 아홉 번째 계단을 딛습니다. 한 칸씩 올라갈수록 당신은 고향에 다녀온 듯 행복한 피로감에 젖어들 것입니다. 여덟 번째 계단으로 올라섭니다.”
김씨는 잠에 빠진다. 천수는 두 번째에 불과했지만 오늘 것은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난 밤 조사한 것이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천수는 김씨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시골집 앞 신작로가 보이던 언덕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초등학생이 되기 전 천수 역시 김씨와 함께 가본 적이 있지만 기억나지 않는 곳이었다. 김씨는 사과나무가 있던 그 언덕을 말하는 동안 천수 아버지를 생각했다.
천수 아버지를 만난 건 김씨의 나이가 열아홉 되던 해였다. 중신 놓던 여자가 광주서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그의 본가는 김씨네 옆 마을이었고 그는 신작로를 걸어 김씨를 만나러 오곤 했다. 최저생계비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4만원 남짓한 돈이었지만 월급날이 되면 그는 륙색 가득 생과자나 과일을 담아왔다. 김씨의 어린 동생들은 사람들의 흡족한 미소 속에서 그를 자연스레 형부라고 불렀다. 그런 때면 그의 너벳벳한 얼굴이 붉게 상기되곤 했다. 79년 봄에 김씨는 혼인신고를 하고 그를 따라 광천공단 옆 월세 방에 자리를 잡았다. 투명한 하늘이 푸른 이마 위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김씨에게 허락된 행복은 1년에 불과했다. 벽돌공장에서 일하던 그와 이듬해 5월에 태어날 아기는 누렇게 익어 가는 들판처럼 김씨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조차 김씨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했다. 바깥세상에선 누군가가 죽고, 군인들이 위원회를 만들고, 젊은이들이 잡혀갔지만 김씨에겐 그저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더 갖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들렸을 뿐이었다. 자신처럼 애초부터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아니 어쩌면 신경 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일일지 몰랐다. 집 근처에 있던 어느 야학의 강학들이 심상치 않은 세상에 대해서 말하거나, 도청과 광주역에서의 함성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거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좁은 골목으로 지나갈 때에도 김씨와 그녀의 남편은 아기가 입게 될 배냇저고리를 보며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 김씨의 방문을 부수고 쳐들어온 것은 천수가 태어난 지 열흘만의 일이었다.
멀리서 가물가물하게 들리던 총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방향에 상관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끔씩 총알이 기왓장을 깨고 천장에 들어가 박히기도 했다. 공장에 가봐야 한다며 일어서는 남편을 잡아야 했다. 세상은 둔한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격류에 휘감기고 있었다. 주먹만한 크기의 우박이 쏟아지던 것 같던 이틀의 시간이 지나자 정적이 감돌았다. 수건을 동여맨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다녔다. 눈이 큰 사람들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주검을 수습하는 울음소리가 안개처럼 공기 중으로 떠다녔다. 다음 날 남편은 공장에 가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요란한 총소리가 도시 전체에서 울렸다.
천수는 곤하게 잠든 김씨의 얼굴을 본 후 일어나 문 쪽으로 간다. 안방 문을 열면 왼쪽으로 길게 싱크대와 가스렌지와 냉장고가 늘어서 있고, 좁은 통로 끝에 두 개의 낮은 계단 위로 철제문이 달려있다. 그리고 좁고 긴 부엌 맞은편에 화장실이 있다. 천수는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어 마신 후 층계를 오른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소매와 목둘레의 틈으로 사납게 파고든다. 차고 깨끗한 하늘엔 상현달이 외롭게 떠있다. 담배에 불을 붙인 천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연기를 내뿜는다. 어디선가 새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달동네의 밤을 차지한 고양이들이 영역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시궁쥐와 족제비, 고양이가 경쟁적으로 쓰레기봉투를 찢는 소리도 이곳에서는 낯설지가 않다. 거의가 이주한 윗동네는 내년 봄에 재개발이 시작된다고 했다. 천수는 깊이 연기를 빨고 고개를 든다. 천천히 연기를 내뱉는데 불룩한 가슴이 잠시 들썩인다.
천수는 방으로 들어와 잠 든 김씨 앞에 앉는다. 신음소리로 채워지곤 했던 김씨의 꿈이 오늘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다. 어머니에 대한 치료. 천수는 삼십여 년 동안 자신이 해온 일 중에 가장 보람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등학교 2학년 골수결핵으로 곱사등이가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이다. 목 바로 아래부터 시작된 골관절의 변형으로 인해 그의 키는 백삼십 센티미터에서 멈추었다. 나비의 날개처럼 연약한 가슴뼈는 앞으로 심하게 튀어나왔고 비정상적으로 길어져버린 팔은 쓸모없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김씨의 희망 없는 노동이 시작되었다.
천수는 노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오른 손으로 자신의 왼 팔을 만진다. 퇴화된 근육에 덮인 얇은 뼈가 잡힌다. 오른 손으로 힘껏 감싸본다. 하지만 왼쪽 팔에서는 그다지 압박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김씨의 뭉쳐진 어깨를 풀어주기에도 모자란 힘일 뿐이다. 팔을 뻗어 김씨의 굳은살로 채워진 손을 만진다. 천수는 김씨의 울퉁불퉁한 손을 만질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언젠가 김씨는 마늘을 싸게 넘겨받아 시장 입구에서 좌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하지가 되기 전에 마늘을 사서 저장해 놓았다가 그 해 김장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때를 맞춰 도매상으로부터 뗀 것이다. 하지만 김씨의 생각처럼 팔려주질 않았다. 비닐 천위에 쌓아둔 마늘이 썩어 가는 것을 애타게 지켜봐야 했다. 보다 못한 김씨는 마늘 대를 떼고 비닐에 싼 후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마늘을 다듬어서 김치공장에 싸게라도 넘겨야 했다. 그 날 천수는 김씨를 도와 하루 종일 마늘 껍질을 벗겼다. 김씨가 장갑을 끼라고 했지만 천수는 듣지 않았다. 어머니를 위해 이 정도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썩어 가는 마늘을 조금이라도 더 건지려면 둔한 장갑으로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되었다. 검은 비닐로 두 봉지 정도 다듬었을 때 천수는 엄지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했다. 해 놓은 것의 두 배는 족히 남았으므로 천수는 김씨에게 아프단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장갑을 끼었지만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눈치를 챈 김씨가 아플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쉬라고 했다. 천수는 끝까지 도와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이 되자 손가락 전체에 불이 붙는 듯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개의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졌으며 결국 살갗이 벗겨졌다. 일주일가량 천수는 오른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래 그런 거다.”
아파하는 천수를 보며 김씨가 귀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수는 그때 어머니가 한 이 말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원래 그래, 노동이란. 노동이란 제 몸을 변형시키지. 휘어지게 하고 불거지게 해. 그렇지만, 아프고 굳어지게 만드는 일이지만,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 그 빌어먹을 일을 해야 하는 것. 그게 바로 노동이야.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날 이 후 천수는 김씨의 손을 볼 때마다 부끄러웠다.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쥐는, 관절마다 불거져 나온 어머니의 거칠고 못생긴 손은 노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늘 괴롭혔다.
그때부터 천수의 가슴에 삶에 대한 두려움과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뜻이 너무 높아서 노여움을 샀다던 자신의 이름에 대한 원망과 함께였다.
天壽. 하늘처럼 귀한 목숨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아버지를 천수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로부터 두 살 되던 해, 그러니까 81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가끔 화순에 있는 외할머니나 작은 이모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아주 짧은 얘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 자꾸만 어디론가 숨었다는 것, 가끔씩 발가벗고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것, 그리고 그러다가 광주 공원에서 차에 치어 죽었다는 것이 천수가 들은 아버지의 전부였다.
손을 매만지는데 김씨가 몸을 뒤척인다. 천수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둔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김씨는 가뿐해진 기분으로 아침상을 차린다. 천수가 일어나 어때요, 하고 묻자 최면치룐가 뭔가 신통하다, 하고 대답한다. 김씨가 고통스러워하던 관절염은 실제적인 염증과 더불어 심리적인 지배를 받는다. 20년 동안 시장 바닥이나 길거리에 앉아 배추와 무를 다듬어왔던 그녀에게 무릎의 통증은 곧 지나온 삶에 대한 무의식적 환기이다. 운명에 대한 무기력한 인정이고 배설할 곳 없이 쌓아왔던 회한이기도 하다. 이런 김씨의 내면에 다른 방식의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것, 그러니까 삶의 지긋한 동반자였던 배추와 무에 가볍고 경쾌한 심상인 풍선을 매달아 잠재의식 속에 넣어주는 것, 그래서 더 이상 고통과 삶 자체를 연결시키지 않고 오히려 물리적인 통증까지 덜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최면치료인 것이다. 천수는 자신이 정말 근사한 최면치료사가 된 듯 흐뭇하다.
아침을 먹은 김씨는 오전 내내 지난 한 달간 받아온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화장지와 섬유 유연제, 감식초와 식용유 등속이 싱크대 선반과 장롱 위와 화장실 귀퉁이에서 나와 안방 한가운데에서 봉분처럼 쌓인다. 여러 차례 돌아보고도 빠트린 물건이 없나 한 바퀴 더 둘러본다. 그리고 노트를 꺼낸 후 영수증처럼 맨 왼쪽부터 물품과 수량과 추정가격을 적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화장대 서랍에서 계산기를 꺼낸 후 그것들을 모두 더한다. 여러 차례 검산을 해보지만 적외선치료기의 가격에 비해 턱없이 적은 액수다. 김씨는 자발없이 저지른 자신의 행위가 아무래도 마뜩찮다. 김씨의 마음을 알아챈 천수는 맨솔래담 로션을 가슴에 바르고 치료기 앞에 앉는다. 그리고 연해 시원하다고 말한다.
물건들을 치운 김씨는 약수를 뜨러 나간다. 이번엔 다행히도 김씨처럼 쓸모없는 물건을 들여놓고 후회하던 여자가 한 둘 생겼다. 김씨가 나가자 천수는 다시 달력을 꺼내어 뒷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천수는 놀이터에 나간다. 암시문은 다 썼고 늘 그렇듯 쌀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시간이 몸을 간지럽게 했다. 놀이터 구석에 앉아 햇볕을 쬐는 것은 천수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다.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지친 몸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다. 천수는 구부정한 어깨를 두꺼운 털외투 속에 감추고 놀이터 안쪽으로 걸어간다. 늘어뜨린 팔은 시계추처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 힘없이 흔들린다.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낸다. 노파가 겨우 굴러가는 유모차에 종이박스를 몇 장 싣고 놀이터 쓰레기통을 뒤진다. 노파가 사라지자 놀이터는 적요해진다. 이따금 유치원생을 태운 봉고차나 생선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면서 소리를 낼뿐이다. 천수는 거푸 두 대의 담배를 피우고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삼거리 언덕길을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2차선 도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천수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김씨가 일하는 재래시장이 있다. 시장을 지나쳐서 오른쪽 언덕을 넘으면 다시 출발했던 삼거리로 올 수 있다. 이것은 천수가 자주 걷는 길이다. 천수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린 후 언덕으로 내려간다.
초등학교 긴 담을 걷는데 맞은편에서 또래의 사내가 온다. 천수의 마지막 학력이 된 중학교의 동창생이다. 둘 사이의 거리가 긴장감 속에서 점점 좁혀지더니 허탈할 정도로 빨리 지나쳐버린다. 천수는 물론 그 사내 역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 천수는 언제부턴가 동네에서 마주치는 아는 얼굴은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적응한 것일 뿐이다. 불편한 과거를 대하는 듯 난감해하는 표정을 상대방의 얼굴에서 읽는 것은 언제나 씁쓸하다.
함께 어울려 다녔던 친구들은 그들 부모의 손에 의해 천수로부터 멀어졌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천수에 관련된 어떠한 이해도 구하지 못했다. 그들의 부모는 천수를 나쁜 병을 옮기는 벌레처럼 여기는 듯했다.
병신이라는 표현 속에서, 병신이라고 내뱉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천수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의 방식을 깨달았다. 이동권을 얻기 위해 버스와 휠체어에 쇠사슬을 감는 어떤 장애인에게 뭇사람이 던지는 냉소는 천수로 하여금 모든 희망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수는 자살을 시도했다.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담담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 몸에 난 눈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응급실에서 의식을 찾았던 천수는 손목에 감긴 두툼한 붕대와 잠든 어머니의 얼굴에 난 눈물 자국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귀한 게 목숨이다. 그렇게 함부로 버려선 안 돼. 너 죽으면 나도 죽는다.’ 종지 만한 그릇에 담겨있던 밥을 입에 넣어주며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며 천수는 죽지 않겠다고, 아니 적어도 수면제를 먹거나 손목을 긋는 방식으로 죽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씨는 일일 드라마가 끝나고 난 후 다시 천수의 목소리에 이끌려 고향 집 앞 신작로가 보이던 언덕으로 돌아간다. 천수는 이번에 치료 외에 다른 걸 묻는다.
“당신은 풍선을 나눠주고 빈손입니다. 몸이 가볍고 날아갈 듯합니다. 당신은 이제 혼자입니다. 어디든 당신의 의지로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당신의 미래는 천천히 번져오는 따뜻한 햇살처럼 그렇게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당신은 더욱 행복합니다. 옆에 누군가 보입니까?”
“응, 누가 서있구나. 날 내려 보고 있어.”
“누굽니까? 알아볼 수 있어요?”
“최씨야. 날 태우고 어디론가 가고 있어. 리어카에.”
김씨는 잠꼬대하듯 약간은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한다. 김씨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천수는 조금 놀라며 계속 묻는다.
“어디로 가나요?”
“몰라. 모르겠어. 하지만, 행복하구나.”
계단을 통해 최면에서 깨어난 김씨는 이번엔 곧바로 잠들지 않는다. 최면 중에 나눈 대화를 기억하는 김씨는 자신이 꺼내어 놓은 최씨 때문에 약간 당혹스럽다. 천수의 표정이 굳어진다. 언젠가 김씨에게 희망에 대해서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김씨는 그저 작은 가게 하나 얻어서 천수와 함께 늙어 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얼핏 최씨 얘기를 하다가 중단했다. 최씨네 같은 가게.
“엄마.”
“왜?”
“과일가게 절름발이 최씨 말한 거야?”
“으응...”
김씨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천수는 마음 한구석이 저리다. 짐짓 김씨에게 화를 내본다.
“엄만 나 보면서 질리지도 않았어? 왜 하필 그런 사람이야.”
“그런 소리 마라. 그 사람도 참 안됐더라.”
소방관으로 일하다 실족하여 다리를 잃었다던 그는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천수는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에 있는 그의 가게를 생각한다. 한때 김씨는 그 가게 앞에서 좌판을 벌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 서로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가장 편안하게 느꼈던 언덕이 시골이 아닌 최씨 집 앞일지 모른다. 길거리에 앉아 물건을 팔던 어머니에게 최씨의 가게에서 번져 나오던 불빛은 자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아늑함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김씨는 난데없이 꺼낸 최씨 이야기가 부끄럽다. 가엾은 남편과 천수를 생각하면 그것은 충분히 불경한 생각이었다. 김씨는 남편을 생각한다. 일주일만에 남편을 찾아낸 곳은 광주 교도소 앞이었다. 산송장이나 다름없던 그를 집으로 데려오는 동안 김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살아있어 준 남편이 서럽도록 고마웠다. 온전한 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남편은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갔다. 그리고 화창한 봄날 달리는 차에 뛰어들었다. 김씨가 원망할 수 있는 것은 신이나 운명 외에 없었다.
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망치듯 올라온 서울은 아이가 딸린 스물다섯의 그녀에게 약간의 호의도 보이질 않았다. 맡겨둘 곳이 마땅찮아서 아이는 늘 김씨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곱사등이인 양 취급했다. 어머니에게 맡기기도 하고, 말귀를 알아듣게 된 후부터는 방에 가두어 키웠다. 일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을 얻고 수시로 들락거리며 돌보았다. 고단한 삶 속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늘 모자랐을 뿐이다.
김씨는 천수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처럼 되진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가까이에서 돌보았다면 아이의 근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에 의심을 했을 것이다. 유난히 칭얼거리는 아이의 호소에 귀 기울였을 것이고, 무엇보다 영양이 풍부한 음식과 애정을 주었을 것이다.
김씨는 조심스레 한숨을 내쉰 후 눈을 감는다.
천수는 잠이 오질 않아 다시 밖으로 나간다. 이제 곧 서른셋이 된다. 최씨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옆에 어머니를 세워본다. 상상 속에서 어머니가 수줍어하고 최씨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후 그런 어머니를 바라본다. 고개를 돌린 탓에 그의 얼굴은 깨끗하고, 둘은 대체로 잘 어울린다. 천수는 자신의 모습을 그 사이에 끼우려 하다가 이내 그만 둔다.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천수는 자신이 김씨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 등에 달린 혹처럼 천수 자신은 어머니 등에 달린 그것이라는 생각이다. 자꾸 눈물이 나와 서있기가 힘들다. 천수는 조야한 차양 밑에 앉아 짐승처럼 울기 시작한다. 한 무리의 고양이가 다가와 그를 바라본다.
방으로 들어가 김씨 옆에 눕는다. 서늘한 바람 냄새에 김씨가 기척을 한다.
“울었니?”
“아니.”
“자거라.”
음울한 천수의 울음소리를 귀 밝은 김씨는 이미 들었다. 돌아누우며 김씨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걱정 마라. 난 아무 데도 안 간다...”
천수는 기쁘다. 과거는 물론 숨겨진 욕망까지 상대의 최면 속에서 꺼낼 수 있는 훌륭한 최면치료사가 되었다. 의지나 믿음처럼 정신적인 힘을 이용하여 태도나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개선시키는 것만으로도 삶은 많이 달라진다. 이것은 최면에 대해 천수가 내린 정의이다.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었지만 이젠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고, 또한 그 일을 제법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김씨가 약수를 뜨러 가자 천수는 다시 바빠진다. 오늘 해야 할 최면은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독창적인 것이다. 보고된 바는 있지만 형식면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영혼을 치료하는 최면치료사에게 가장 영광스런 일이다.
천수는 낡은 카세트를 꺼내고 화장실에서 양은 물동이와 PET병을 준비한다. 문구용 칼로 병 바닥에 틈새를 만든다. 그리고 물을 채워서 팔 높이로 들어본다. 링겔처럼 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바닥에 양은 물동이를 대자 제법 큰 소리가 난다. 천수는 시험 삼아 그 소리를 녹음해본다. 잡음에 섞여 분명하진 않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물소리란 걸 금세 알 수 있다. 끈으로 병을 묶어 문간에 달아매고 물동이를 밑에 댄다.
천수는 이제 암시문을 적기 시작한다.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한 탓에 어렵지 않게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상상력 또한 충분하다. 천수는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다. 이제 준비는 완벽하다. 물동이와 병을 깨끗이 치운 천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누워 긴장을 푼다. 카세트를 작동시키자 미세한 잡음과 함께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권위를 담은 채 흘러나온다. 말과 말 사이, 기계 음과 목소리 사이로 한 방울 한 방울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천수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집중한다.<박상혁. 200×86>
2012년 문학상 수상자(소설부문)
<약력>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무료한 학창시절을 거쳐 1992년 건국대학교 축산가공학과에 들어갔지만 뒤늦게 글쓰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뜨거워지는 것은 많았지만 어떤 회사에서 오래, 묵묵히 일했고 최근 그만두었다. 지금은 오리섬에 앉아 먹고 살 일을 고민하는 중이다.
수상자소감문
때때로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던 시절은 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너무 늙어버렸다.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는 나도 마흔 살.
전에는 원망이 많았다. 세상도 그랬고 부조리도 그랬고 폭력도 그랬다. 분노가 쌓일 때면 거리를 달렸고 돌을 던졌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날 원망하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도 이제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어르신들 죄송합니다) 살았지만 아직 부끄러운 것이 너무 많다. 어제 전화를 받고서도 수상소감을 적지 못한 이유다. 확인전화를 다시 받고서야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커서가 계속 깜박이며 무엇이든 뱉어낼 것을 강요하는 통에 등 떠밀리듯 글을 쓴다.
십년 넘게 다닌 회사를 때려치우고 후배가 와서 놀라던 사무실에서 처음 한 일은 모니터 옆에 노자의 글을 써 붙인 것이었다.
就能濁以靜之徐淸 누가 혼탁한 세상에서 고요에 처해 주변을 맑게 할 것인가.
탁한 물을 맑게 하는 일은 고요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글귀는 마흔을 넘겨 분분해진 마음을 적잖이 다스려주었다.
장사꾼이 권력을 잡으니 세상이 온통 돈 놀음이다. 욕망이나 이기심은 교환가치의 명목으로 떳떳하게 뒷짐을 진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했을 법한 일들을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게, 크게 웃으며, 보란 듯이 벌인다. 언론에 나오는 힘센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사회적이고 미시적인 문화가 된다. 인간관계의 인간화, 나눔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 공동체를 지향하는 삶. 이 돈 안 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끼리끼리 돈 안 되는 문학밖에 없다. 그래서 문학은 황홀하며 매력적이다.
늦게 글쓰기를 욕망한 나는 그래서 문학청년 시절이 없다. 한때 룸펜으로 살며 압축적인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인생에서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게 고작이었다. 삼십대 틈틈이 쓴 글들을 얼마 전에 쭉 읽어보았다. 대체로 무거운 결말이어서 그날 내내 우울했다. 그러고 보니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엔 글을 안 썼던 것 같다.
가슴을 치미는 것이 없어 강물을 봐도 돌을 집어 들지 않는 나이다. 하지만 아직 던지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둔 돌이 하나 있다. 오늘 그 돌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2012.5.17 박상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