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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스크랩 위서와 진서의 판단
솔롱고 추천 0 조회 100 11.07.14 23:4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위서와 진서의 판단

- 《규원사화》와 《부도지》



 본 페이지에서는 《규원사화》와 《부도지》를 검토합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부도지》와 진위논란이 있는 《규원사화》에는
소박한

진실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 역사를 대하는 태도

 모든 것에 앞서, 역사를 대하는 태도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듯 싶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지나온 발자취를 의미합니다.

 역사는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출발했으며,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 그 중간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논평하고, 증명합니다.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우리가 처한 상황, 우리 모습의 시작점을 찾아가 보다 자세히 살펴보려는 것이 역사의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알아가는 데에는 현재와 미래의 예측을 위한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현재 이루어진 문물과 제도들의 시초의 모습을 알아보고자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규원사화》와, 고대사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책인 《부도지》를 잠시 살펴봅니다.


 《규원사화》는 그 속에서 《조대기》라는 또 하나의 책을 설명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규원사화》의 진위가

《조대기》의 진위를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홈페이지의 내용은 《규원사화》보다는 《조대기》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조대기》가 아닌 《규원사화》를 다루기로 합니다. (《조대기》의 내용은 별도로 정리)

 


《규원사화》와 《부도지》의 진위

▣ 유래의 문제 =======================================================================================

 (1) 소개된 연대


 《규원사화》

 《규원사화》는 이 책을 연구한 이상시 변호사가 붙인 ‘단군실사(檀君實史)’라는 명칭도 있습니다.

 《규원사화》는 그 정식 인용이 1925년 7월에 출간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단전요의》는 출간 당시 가격이

79전(錢), 추운 김용기(秋雲 金容起)라는 분이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고, 종두법으로 유명한 송촌 지석영이 서문을 썼습니다. (하지만,

김용기의 서문은 없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참조하면, 김용기는 경성대종교 남도본사에 속했던 듯합니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그는

1924년 1월말에 만주 영고탑에 김교헌의 장례식을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김용기씨에 대한 기사가 동아일보의 것만 남아있는 것은

특이합니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지만, 동일한 이름의, 다리를 놓기도 하고 고향에 학교를 세우기도 하는 재력가가 있었던 듯한데, 어쩌면

《단전요의》도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대종교 인사로서 이름만 빌려주거나 출간 자금을 대어주었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저자는 지석영이 될 수 있습니다. 《규원사화》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 지석영이라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규원사화》와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단전요의》는 본래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의 要義’는 그러한 의미이며,

서문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옮겨 적을 때 오류가 있었던 듯, 단군조선 47대 임금의 명칭이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이 내용은

《대동사강》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규원사화》의 전체 원문이 공개된 것은 1940년 양주동이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이 알려진 것입니다.


[우측] 고서 인증을 거친 《규원사화》 필사본. 감정 당시 제작 시기를 조선 중기 ~ 후기로 추정 ▒▒▒▒▒▒

▒ [좌측] 양주동이 기증한 듯한 《규원사화》 필사본. 그의 호인 ‘无涯’ 도장이 찍혀 있다. ▒▒▒▒▒▒▒▒▒▒▒▒▒▒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필사본은 1945 ~ 1946년에 도서관측에서 구입한 것이며, 1972년에

고서 심의위원 3인의 검증을 거쳐 귀중본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현재는 전자문서로 화면을 통하여 그 원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규원사화》는 당대를 대표하는 전문가 3인의 검증을 거치기는 했지만, 탄소연대측정 같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어서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부도지〉

 《부도지》는, 본래 신라 시대의 박제상이 지었다는 《징심록》의 일부로, 1952년 여름 ~ 1953년 여름, 전 동아일보사 기자였던

박금씨(1868 ~ ?)에 의해 복원, 프린트본으로 일반에 공개되면서 알려졌다고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필사하여 전해져 왔다는

원본은 함경도 문천(文川)에 있었으며, 박금씨가 피난하면서 두고 왔기 때문에 이전에 연구했던 내용을 기억하여 복원했다는 것이 그

설명입니다.

 《징심록》은 3교 12지(三敎十二誌)로 되어 있는데, 〈부도지〉는 그 중 3교에 속하며, 《징심록》의 전체 내용은 4절 크기의 30장의

종이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고 합니다.

 덧붙인 「요정징심록연의후기」에 의하면, 「부도지」는 《징심록》 중 일부이며,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 등

나머지 부분도 일부 복원되었다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습니다.

 1986년에 한문 원본을 번역한 김은수의 《부도지》 서문에 의하면, 정시화라는 분이 부도지의 프린트 본을 갖고 있다가 멸실될 것을

우려하여 김은수 씨에게 복사본을 넘겼다고 합니다. 복사본의 실물 사진이라도 있으면 참조가 되겠지만, 현재 공개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부도지》의 경우, 유적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어 《환단고기》처럼 굳이 1953년에 출간된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실물이 있다고 해도 50여년 전의 것이라는 것을 판별해낼 방법도 없고요.

  박금씨는 필명이며, 본명은 박재익입니다. 동아일보 기자 시절

(1925 ~ 1934년) 만보산 사건을 취재하여 만주의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충돌 보도가 일제의 조작이었음을 알려 사태(국내외의 화교 박해)수습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로 인해 후일 장개석 총통으로부터의 표창과 직접 입었던

중산복(전투복)을 받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글씨와 글 솜씨와 대처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사진은 동아일보에 게재(1931.7.18)되었던 전달식 광경으로, 배경에

중화민국의 국기가 보입니다.

 만보산 사건이 있은 수 년 후인 1930년대 후반에는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전까지 민족역량 육성에 힘썼던 국내의 신문 또한

그들의 선전 도구로서 이용되었습니다. 박금씨는 이 시기에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2) 원저자 관련

 《규원사화》

 서문에 의하면, 《규원사화》는 숙종 초 원년(2년차)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북애자가 삼각산 기슭에서 청평산에 살았던 도인(道人)

청평 이명이 고려 후기에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우연히 얻어 참조하여 저술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진역유기》는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명은 고려 때의 사람(高者麗時人)으로 설명되었고, 일부 인용된 청평의 주장은

원나라의 《요서》를 인용하고 있어서 그 저술 연대를 《요서》가 완성된 1344년 이후부터 조선이 건국된 1392년 전까지의 약 50년 간

이내의 시기로 추정할 수 있게 합니다.

 《조대기》라는 책이름은 《세조실록》에도 등장하는데, 실록에서는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규원사화》의 설명으로는,

《조대기》는 발해의 고대 역사서이며, 발해 왕자 대광현이 고려에 투항할 때에 바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황으로 볼 때에 《요서》와 《조대기》는 의당 고려 왕실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었을 것이므로, 청평은 아마도 당시 높은 관직에

있었거나 그러한 이와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高者麗時人’이, ‘고려 때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을 의미한다면, ‘행촌 이암’이 가장 적격자가 됩니다. 이암은 마침 공민왕 즉위년을

전후하여 3년 간 청평산에서 ‘은거’하면서 독서·저술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최소한, 같은 시기에 같은 산에 은거한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암이 이명에게 이들 서적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닐까요 ... 하지만, 이암에 대한 기록에는 청평산에서 도인을 만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북애자가 참고한 《진역유기》가 실재했다면, 이암은 《요서》와 《조대기》를 갖고 청평산에 은거하였고, 이들을 근거로 하여

《진역유기》를 저술하였으며, 홍건적의 난을 피해 산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을 것이라 추측하게 합니다.

 

 〈부도지〉

 박제상은 초기 신라의 고대 사서를 토대로 《징심록》의 내용을 정리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 김시습이 고대어를 읽기 쉽게

옮겨 적었다고 합니다. 그 전해진 경로는 영해 박씨의 가문의 내력과 부합한다는 국어학자(김재수, 아마도 《부도지》를 번역한 김은수의

동생인 듯)의 고증이 있습니다.

 

▣ 내용상의 문제점 검토 ==============================================================================


《규원사화》의 내용 검토

 《규원사화》는 《조대기》를 저본으로 3권의 《진역유기》가 씌여졌고 후일 북애노인이 산 속에서 이 책을 얻어 《규원사화》를

저술하였다고 《규원사화》의 내용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규원사화》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위작의 의심이 있었고, 이와 관련하여 1980년대말의 교과서파동 당시 여러 논문을 통하여 문제점이

지적되었는데, 이들은 또한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반론이 제시된 바 있습니다. (이상시의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참조) - 그럼에도,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부 내용이 덧붙여졌을 의혹은 여전히 있습니다.

 다음은 《규원사화》의 진위와 관련된 의문에 대한 내용입니다.

 1) 고조선의 유적과 문자

 평양에서는 단군조선 시대의 왕궁 유물이 발굴되지 않습니다. 1998년 8월에 평양 일대에서 고대 제단과 성곽을, 최근에는

함경북도 길주에서 돌로 쌓은 대형 제단이 발굴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요서 지방에서는 문자로 추정되는 형상이 그려진 토기가 발굴되었고, 요동에서는 신석기 초기에 ‘초기 문자’를 사용했을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유물(석탄 가공품)이 발굴되었습니다. 다른 곳의 토기들도 다양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한자와는 다를 수는

있어도 그 이전부터 문자의 체계는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문자는 1만여 년 전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됩니다. 문자의 필요성은

물물교환의 시대부터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한 시대에는 중국과 교역을 했고, 고인돌 형태의 무덤이 발견된 절강성 부근에도 진출 또는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상하게도

중국에는 넘쳐나는 듯한 갑골문자가 요하 동쪽으로는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반도 안쪽에서도 발견된 갑골은 모두 상형문자가 아닌

점으로 표시된 것들이었습니다.

 고고학상으로 기자(또는 은나라 후예)의 동래 흔적이 있음에도 비파형동검은 전파된 반면 ‘갑골문이 새겨진 갑골’은 동방에서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중국의 각 유적지에서 많은 수의 갑골이 발굴되었고, 대체적으로 은(상)나라의 유적이라 인정받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역사의 비밀》


 2) 조선 후기 추정 필사본이 존재

 《규원사화》는,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 3인이 인증한 필사본이 존재하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도서관측에서 해방

직후 구입한 《규원사화》는 전문가의 감정에 의해 조선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3) 규원사화와 민족정신의 제고

 《규원사화》(1675년)가 저술된 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본의 복각(1687년), 마니산 참성단의 보수(1700년)가 있었음은 책이 필사에

의해 퍼져나가면서 여론에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4) 후대의 내용 인용

 북애노인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허목은 그 저서 《동사(東史)》에서 환웅 대신 ‘신시씨(神市氏)’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이는 이전에는

전혀 언급된 적이 없으며, 《규원사화》에 처음 등장하는 명칭입니다.


 
정조 때에는 다른 책에는 없는 《규원사화》의 내용이 인용되기도 합니다.

 단군은 우리 동방의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서 역사에 편발 개수(編髮盖首)의 제도를 제정하였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군신 상하의

분수와 음식과 거처의 예절을 모두 단군이 창시하였다면 단군은 동방에 있어서 사실 세상이 끝나도록 잊지 못할 은택이 있는 것입니다.

... 정조 10년, 승지 서형수

 治人間三百六十六事, 男女·父子·君臣·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次第成俗, 普天之下, 悉化其沾. 制治漸敷

... 《규원사화》〈태시기〉

 이후로 단군조선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과 고증의 풍조가 계속되었음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정영훈 교수(한국학 중앙

연구원)는 2006년 발표된 논문(「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환단고기·규원사화 등 仙家계 사학에 대한 남북공동연구》)에서

실학자들이나 사학자들이 상상으로 역사를 조작하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5) 유적과의 일치 또는 부합

 신시의 역년은 ‘1만 1천 년(궐천년/궐백년)’으로 되어 있는데, 최근 ‘소로리 볍씨’ 의 발견으로 실제로 단군조선 전의 1만 1천 년의 역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던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이므로 미리 조작되어 반영될 수 없습니다.


 

《부도지》에 대한 검토

 사학계에서는 부도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며, 위서론 조차 없습니다. 1986년본에는, 1953년 프린트본을 보관했던 정시화의 글,

영해박씨 대종회장 50세손 박영두의 글이 있습니다. (박제상, 박금씨 모두 영해박씨입니다.)

 「부도지」는 그 내용이 매우 독창적입니다. 「부도지」는 우리나라에만 전해지는 마고할머니의 이야기와 우주와 그 법칙의 탄생을

짜임새 있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생겨나 널리 흩어지고 다시 나라를 이루어 신라에까지 이르는 내용이

《규원사화》나 《삼국사기》「신라본기」의 내용과 부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순·우임금은 흔히 알려진 ‘성군’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도지〉에서는 단군임금이 부도의 위치를 선택할 때, 당시의 자북이 동북방(東北之磁方)이라고 했습니다.

 현재의 자북은 캐나다의 국경 부근에 있으며, 평균 5년에 1˚ 정도의 빠른 속도(세차운동은 72년에 1도)로 이동하고 있는데, 그 속도와

방향이 불규칙하며, 고대 유적에 남겨진 자기장의 흔적으로 과거의 자북의 기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4300년 전의

자북은 알려져 있지 않는데, 일본에서는 유물의 지자기 측정을 통하여 그 결과가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 값은 아직 얻지 못했지만, 이는

특별한 연대측정법이 개발되지 않은 「부도지」의 출간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국 시대에는 오로라의 관측 기록이 많았고, 자북이 동북방, 우리 나라 근방에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자북 이동 경로를 보면,

자북은 수천 년 사이에 수시로 북극 주변을 이동했을 듯합니다. 그 방향과 속도도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기록된 자북의 방향은 신라

초기의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단군조선의 시기와 신라 초기 모두 조사해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부도지」의 내용에 덧붙여 저자인 박금씨의 해명과 ‘징심록 추기’에서 책이 저술되고 전해진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징심록 추기」는 김시습이 적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부도지」가 포함된 《징심록》이 전해지게 된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5백 년 전인 당시에도 나름대로 1천 년을 넘어 전달되었다는 《징심록》의 진위에 대한 판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소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만일 저자인 박금씨가 정말로 영해 박씨였다면, 자신의 기자로서의 명예, 조상과 문중의 이름을 걸고

위서를 출간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1986년 판본의 영해박씨 대종회장의 축사문(祝辭文)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줍니다.


 《부도지》와 《규원사화》는 서로 다른 천지창조와 환웅의 신시, 단군조선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서로 상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두 권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우리의 역사서가 됩니다. 이들은 또한 동방 문명의 기원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 《규원사화》와 《부도지》의 문제점 검토

 《규원사화》와 《부도지》의 문제점과 관련 논의는 별도의 문서로 다루기로 합니다. 《규원사화》에는 분명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단, 그러한 문제가 전체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 내용 정리

 《규원사화》와 《부도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현재까지는 남·북한 학계에서는 《규원사화》의 진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부도지》는 복원본이어서 원본과 다소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저자가 밝힌 상태입니다.


 이 사이트에서 《규원사화》와 《부도지》를 중심으로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은 이러한 판단에서입니다. 100%
정확한 역사서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대로 우리 조상들은 성실하고 꼼꼼하게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 이는 조선 시대의 기록문화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 대동사강(大東史綱)

 《대동사강》은 1920년대 말에 《규원사화》를 비롯, 여러 출처 불명의 사서들을 인용하여 하나의 역사로 엮은 것인데, 관련 설명은

링크로 대체합니다.


▣ 진위판별의 기준

 위서는 저술의 경위가 실제와 다를 때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사서의 진위 판별을 위한 통상의 기준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 책에 대한 설명

 족보와 같은 1차적인 판단의 근거입니다.

 * 보유자와 원저자의 주장 - 서문, 발간사, 추천의 글, 기존의 감정 내용 등 포함. 진실성이 우선적으로 고려됨


 2. 물리적인 판별

 원본이 존재하는 경우, 이를 근거로 제작된 연도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1) 종이의 지질, 제책의 형태

 (2) 종이, 잉크, 먹의 탄소측정 연대 - 가장 확실한 방법

 (3) 글자체 - 당시 사용하던 글자체인지 여부 감정

 (4) 판본의 유형


 3. 내용상의 판별

 관점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1) 사용된 용어의 시대성

 (2) 인용된 내용의 시대성

 (3) 내용의 실재 여부 및 가치

 (4) 아직 진위가 밝혀지지 않은 내용의 다른 사서와의 상호 비교

 (5) 내용의 진실성 - 내용적인 모순의 유무와 정도


 서지학 관련, 참조할 만한 사이트를 소개합니다. 서지학 개론 (이화여대)

 

 

last updated: 2008/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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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http://user.chollian.net/~jtm71/Atropos/rightboo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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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1.13 11:28

    첫댓글 잘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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