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
● 역사 앞에 오만한 박정희의 후손들
지난 2004년에 필자는《실록 군인 박정희》란 책을 펴낸 바 있다. 이 책은 전 직장에서 박정희 독재시대에 관한 장기연재물 취재팀에서 활동한 것을 계기로 그의 출생에서부터 5·16쿠데타 직후까지, 즉 박정희의 ‘군인시절’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다. 출간 후 이 책을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게 한 권 보내주었는데 쓰다 달다 별 반응은 없었다. 모르긴 해도 그 이유는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실록’으로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박정희 전 대통령 하면 그의 자녀들을 더러 생각하게 되는데 그들의 그간의 처신을 보면 늘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우선 형제들 간에도 이런저런 분쟁으로 그리 화목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차녀 박근혜 위원장은 정치인이니 그렇다고 쳐도 장남 박지만 EG 대표이사는 수차례 마약복용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육영재단 이사장을 지냈던 삼녀 박근령 한국재난구호협회 총재 역시 언니 박근혜 위원장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참고로 박 전 대통령의 장녀는 첫 부인 김호남 씨와의 사이에서 난 박재옥 씨임)
이들 자녀 가운데 장남 박지만 대표는 지난 2009년 10월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소송을 하나 낸 적이 있다. 내용인 즉,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 중이던《친일인명사전》에 자신의 부친(박정희)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는, 즉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이었다. 예상된 일이긴 햇지만 막상 소송 소식을 접하자 조금은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박지만 대표가 낸 ‘게재금지 가처분신청’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우선 골자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로는 부친이 “단순히 ‘일제강점기’에 ‘군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대한민국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한 것이고, 둘째로는 부친이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 소속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친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2004년 3월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 반민족행위자 선정기준으로 ‘적극적 행위’를 들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박지만 대표의 이런 주장은 모두 여지없는 반론을 피해 갈 수 없다.
아시다시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주로 건너가 군인이 되기 전에는 평범한 교사였다. 1937년 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문경보통학교로 발령받았는데, 거기서 몇 년간 교사로 근무하다가 돌연 만주로 건너가 군관학교에 입교했다. 조갑제 전《월간조선》편집국장이 쓴『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책에 따르면, 교사로 몇 년 근무한 탓에 입교 연령제한에 걸려 입교가 어렵게 되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혈서를 썼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이는 그 후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두어 번 강제 징집 즉 징병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군인이 된 과정인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이다. 그것도 당시로선 결코 낮은 지위가 아닌 교사를 그만두고서 군인이 된 것이다. 중국 최북단 목단강(牧丹江)시까지 가서 군관학교 시험을 본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교하여, 예과 2년 졸업 때도 우수한 성적을 거둬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의 특전을 얻었다. 그리고는 해방 1년 전인 1944년 7월 1일 황군(皇軍)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이듬해 8월 15일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일본 황제가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그는 ‘천황의 군대’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아시다시피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은 ‘군국주의(軍國主義)’였다. 군국주의란 군인들이 주축이 된 정치체제를 말한다. 그래서 일본 황제도 공식행사의 정장차림으로 늘 군복을 입었고, 당시 내각의 총리나 대신들은 모두 현역 군인(장성급)들이었다. 필자가 만나본 문경보통학교 제자들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미 생도시절에 군도(軍刀)를 차고 휴가를 나와서 문경 지역의 경찰관 등을 호통쳤다고 전한다. 그만큼 당시엔 군인(장교)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얘긴데 그런 그를 ‘단순한 일제강점기 군인’ 정도로만 볼 수 있을까?
십수년 전에 제작된『마지막 황제』라는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은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인 공종(恭宗) 애신각라(愛新覺羅) 부의(溥儀)다. 그는 1908년 3세 때 청나라의 열두번째 황제가 되었지만, 1912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쫓겨났다. 그 후 그는 1934년 만주국의 황제가 되어 일제의 패망 때까지 황제 자리를 지켰는데, 심양(瀋陽)에서 소련군에 체포된 그는 전범으로 한동안 하바로프스크에 억류되기도 했다. 1950년 8월초 중국으로 압송된 그는 무순(撫順)전범관리소에 수감돼 있었는데,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모택동(毛澤東)이 1959년 그를 특별사면령으로 풀어주었다.
그런데 ‘망국(亡國)의 황제’가 졸지에 만주국 황제가 된 것은 대체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이는 만주 주둔 일본군인 관동군(關東軍)이 ‘작업’을 한 결과였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하고는, 이듬해 3월 1일 만주국을 세워 공종을 최고권좌인 집정(執政) 자리에 앉혔다. 당시 만주국의 수도는 신경(新京), 연호는 대동(大同)으로 정하였는데, 최규하 전 대통령 등이 졸업한 대동학원의 ‘대동’이란 단어는 바로 여기서 따온 것이다.
당시 공종 황제 밑에 있던 총리와 각부 대신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는데, 이들은 일제가 만주 통치를 위해 내세운 관동군의 ‘꼭두각시’들이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의 최고통치권자는 바로 관동군 총사령관이었다. 만주국의 정규군이랄 수 있는 만주국군 역시 관동군의 휘하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기업으로 치자면 관동군은 본사, 만주국군은 계열사(혹은 지사)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박 전 대통령은 임관 후 중국 요녕성 흥융현(興隆縣) 반벽산(半壁山)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8단(연대급)에 배속돼 1년 1개월 동안 복무하다가 중위로 해방을 맞았는데, 그가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 소속이어서 친일과 무관하다면 이는 설득력이 있을까?
8·15해방 후 제헌국회에서는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법(反民法)’을 제정, ‘반민특위(反民特委)’를 발족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한 나라들의 경우 대부분 민족반역자 처단을 단행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들의 방해책동으로 중도에 와해되고 말았다. 결국 친일파 청산은 ‘미완의 숙제’로 남아오다가 지난 정권에서 다시 그 맥을 이었다. 당시 김희선 민주당 국회의원 등이 주축이 돼 관련 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제정했는데 이 법은 처리과정에서 누더기로 변질돼 시행되기도 전에 개정안이 발의되는 곡절을 겪었다.
당시 필자는 특별법 처리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지켜보았는데, 친일파 청산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로선 몹시도 답답한 심정이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필자가 보기엔 상식 이하의 주장을 더러 펴곤 했다. 지나치게 선정기준을 낮춰 잡거나 특정 분야를 조사 대상에서 배제시켰으며, 더러는 특정 정치인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으로 국민적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필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2년 반 가까이 근무했는데, 당시 필자의 직책은 조사 및 위원회 행정실무 책임자인 사무처장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특별법 조항을 보면 답답한 생각부터 든다. 특별법 제2조(정의)에서는 총 20개항에 걸쳐 ‘친일반민족행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법률용어로는 부적절하며 또 논란의 여지가 많은 표현이 적지 않다. ‘주도적으로 협력한 행위’·‘적극 협력한 행위’·‘적극 앞장선 행위’·‘현저히 협력한 행위’ 등등…….
이는 법 해석을 두고 논란이 됨은 물론 더러는 ‘빠져나갈 구멍’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일본군의 괴뢰국인 만주국군의 장교를 지냈는데도 ‘무혐의’ 운운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조사나 수사는 ‘증거제일주의’를 우선적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보며, 특히 범죄인 수사나 재판에서는 최종심까지 ‘무죄추정의 원칙’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이것이 본질의 발목을 잡아서는 곤란하다. 민족반역자의 부역 행적을 조사하면서 그의 명예만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증거자료 한둘이 부족하다고 해서 전체를 ‘무혐의’ 처리한다면 그게 과연 적절한 것일까?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청년 학생 대다수가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장준하·김준엽처럼 일본군을 탈영해서 광복군에 입대한 사람들은 항일투사가 됐고, 반면 일본군에 잔류했던 김수환 추기경·강영훈 전 국무총리 등은 ‘일본군 출신’이란 오명을 얻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때 뭘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도 대단히 중요하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린다. 흔히 말하듯이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면 될 일이다. 그걸 두고 책을 내라 마라 하는 것은 자녀라고 해도 주제넘은 일이다.
● 장준하 지사의 아들이 박지만에게 보낸 공개편지
박지만 EG 대표이사가 가처분 소송을 낸 직후 어느 날 내게 미국에서 이메일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는 미국 코네티컷의 작은 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은 장준하 지사의 삼남 장호준이라고 소개했다. 장 목사는 내 앞으로 보낸 편지글에서 “최근 박지만 씨가《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 및 배포금지 신청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첨부한 내용과 같은 서신을 작성했다”고 밝히고는 “졸필이나마《친일인명사전》을 통해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서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 선생님께 편지를 전한다”고 덧붙였다. 장 목사가 내게 보낸 편지글이다.
〃정 선생님
저는 고 장준하 선생님의 삼남으로서 현재 미국 코네티컷에서 유학생들과 함께하는 작은 교회를 돌보고 있는 장호준 목사입니다. 최근 박지만 씨가《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 및 배포금지 신청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첨부한 내용과 같은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졸필이나마《친일인명사전》을 총해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서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 선생님께 편지를 전합니다.
정 선생님의 귀한 글에 늘 감사를 드리며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올림〃
요즘 젊은 세대에겐 다소 낯선 이름일 수 있어, 장호준 목사의 부친 장준하(張俊河;1918년~1975년) 지사(志士)를 간단히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 땅에 체류 중이던 지사는 김준엽 등 동지들과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영하여 수천리 길을 걸어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머물고 있던 중경으로 가 광복군에 합류했다. 이는 자원하여 일본군 장교가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제치하 전력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랄 수 있다.
8·15해방 후 귀국한 지사(志士)는 전쟁 와중인 1953년《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해 정론을 펴나갔으며, 1967년 정계에 입문, 신민당 소속으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4년 뒤엔 탈당했다. 그 무렵 지사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누구도 하기 어려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74년엔〈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통렬히 비판했고, 나아가 야권과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진력하였으나 큰 성과를 이루진 못했다.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는데, 필자는 지사를 우리 현대사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라고 기록하고 싶다.
장 목사는 내 앞으로 보낸 편지글과는 별도로〈박지만 씨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편지를 첨부해 보내왔다. 이 편지는 1974년 장 지사가 쓴〈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연상시킨다. 참고로, 장 목사가 편지를 보내올 당시에는 법원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이었으나, 그 다음날 법원은 박지만 대표가 낸 ‘게재금지 가처분’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결국《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포함이 됐다. ‘공개편지’ 전문이다.
〃박지만 씨,
박지만 씨의 이름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버님의 의문사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낮에는 가게 점원으로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시절, 동창들의 입을 통해 중앙고등학교를 다니던 박지만 씨의 이름이 들리면서부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후 그리고 잔인했던 1980년 5월을 훈련소에서 보내고 전방에서 사병 생활을 하던 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는 박지만 씨의 소문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고, 한동안 듣지 못했던 박지만 씨의 이름을 내가 다시 듣게 되었던 것은 싱가포르에서 마약중독자 상담원으로 일을 하던 당시에 박지만 씨가 마약중독으로 치료감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박지만 씨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최근 박지만 씨가《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였습니다.
박지만 씨,
당신과 나는 너무도 다른 삶의 공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박지만 씨와는 스쳐 지나갈 기회조차도 없었고 또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박지만 씨가《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야 박지만 씨에게 이른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같은 역사 속을 헤치며 살아야만 했던 한 사람으로서 역사를 향해 다하지 못한 책임에 대한 고백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지만 씨,
나는 박지만 씨의 아버지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일본군이었고 내 아버지는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군이었다거나, 박지만 씨의 아버지는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목숨 바친 민족주의자였다는, 또는 박지만 씨의 아버지는 부정한 재산을 남겨 주었지만 내 아버지는 깨끗한 동전 한 닢 남겨준 것이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는 역사가 스스로 평가하도록 맡겨 두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있었던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혹자는 역사는 승자에 의한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인류의 역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신념뿐 아니라 부정한 권력에 의해 조작되었던 인혁당사건(人革黨事件)의 진실이 밝혀지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이《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지게 되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지만 씨가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또는 불리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역사를 지우고자 한다면 역사는 박지만 씨의 이와 같은 행동을 또 다른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박지만 씨,
내 아버님은 의문의 죽임을 당하시기 불과 수개월 전에 박지만 씨의 아버지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백억의 인간이 살다갔습니다. 그 중에 ‘가장’되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죽으면 내 집이 어찌 되겠는가’ 하는 걱정을 안고 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발전하여 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박지만 씨나 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는 기록되어 남겨져야 하며 또한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친일인명사전》은 역사입니다. 역사가 평가하도록 남겨두어야 할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를 지우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다시 당부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수용소의 소장으로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몬 게트(Amon Goeth)의 딸은 “내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미래를 위해 무언가는 해야 한다”라고 다짐하면서 생존자 중 한 사람을 만나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아버지의 과거를 듣고 용서를 빌게 됩니다.
박지만 씨,
이제 우리는 살아서 오십대 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짧지만 길었던 삶 속에서 또한 우리는 지나온 역사가 결코 우리의 손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지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되었다는 박지만 씨에게 내 아버님께서 평생 가슴에 품었었고 이제는 내 가슴 속에 품겨 있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전해 드립니다. 자식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취소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역사와 후손들 앞에서 박지만 씨의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 통일을 위해 박지만 씨의 삶이 쓰여지기를 빌어봅니다.
미국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 박정희 ‘혈서’, 친일 가요〈혈서 지원〉의 판박이
한편, 장호준 목사의 편지가 도착하기 직전인 11월 5일 박정희와 관련된 중요한 문건 하나가 공개됐다. 바로 ‘혈서’다.
그날 필자는 외부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는데《오마이뉴스》의 한 후배 기자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와 박정희와 관련한 중요한 자료를 하나 발굴했다며 검증을 부탁했다. 무슨 자료냐고 물었더니 만주국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혈서’를 썼다는 그 근거를 찾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찾은 셈이다. 그래서 그 후배더러 박정희의 혈서라는 근거가 뭐냐고 물었더니 당시 만주에서 발행된 신문기사에 그런 내용이 실렸다는 거였다. 사무실로 들어와 관련 기사를 살펴보니 아까 전화로 들은 대로였다. 1939년 3월 31일자《만주신문》에 박정희 ‘혈서’ 관련 기사가 실렸다. 그간 박정희 ‘혈서설’은 이야기로만 전해져와 사실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는데 이 자료 발굴로 그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박정희의 ‘혈서설’을 처음 공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보수논객 조갑제 전《월간조선》편집국장인데, 그런 내용은 그가 펴낸《박정희 평전》〈제1권 불만과 불운의 세월〉(까치, 1992)에 실려 있다. 조 전 국장은 박정희 관련 여러 권의 책을 펴냈는데, 내용이 알찬 책을 여럿 펴내기도 했다. 특히 박정희의 초기 행적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취재가 훌륭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혈서설’은 조 전 국장이 박정희의 문경보통학교 동료교사 유증선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으로, 그동안에도 이에 대한 심증은 충분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어서 논란만 돼 왔었다. 필자가 알기로는 박정희 관련 연구자들이 이걸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며 심지어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그런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안다. 물론 이번에 발견된 것이 ‘혈서’ 자체가 아니라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신문에 실린 혈서 내용만으로도 ‘혈서’ 자체를 찾은 것과 진배없어 보인다.
박정희의 ‘혈서’를 보면서 필자는 일제강점기 말기의 유행가 하나를 떠올렸다. 1943년 오케레코드사는 자사 전속가수이자 당대 최고 인기 가수였던 세 사람 즉 남인수·박향림·백년설이 함께 부른 히트 가요 하나를 선보였다. 그 노래의 제목이 바로「혈서지원(血書志願)」이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조명암, 작곡자는 당대 최고의 히트곡 제조기로 불린 박시춘이었다. 해방 후 이 노래는 대표적 ‘친일가요’로 평가됐는데, 작사가·작곡가·가수 등이 이 노래로 인해 친일음악인이란 오명을 써야만 했다. 이 노래의 가사를 한번 보자.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日章旗) 그려 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해군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이 소식
손꼽아 기다리던 이 소식은 꿈인가
감격에 못 이기어 손끝을 깨물어서
나라님의 병정 되기 지원합니다
나라님 허락하신 그 은혜를 잊으리
반도에 태어남을 자랑하여 울면서
바다로 가는 마음 물결에 뛰는 마음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반도의 핏줄거리 빛나거라 한 핏줄
한 나라 지붕 아래 은혜 깊이 자란 몸
이 때를 놓칠쏜가 목숨을 아낄쏜가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대동아(大東亞) 공영권(共榮圈)을 건설하는 새 아침
구름을 헤치고서 솟아 오는 저 햇발
기쁘고 반가워라 두 손을 합장하고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혈서’ 얘기는 제1절 첫 대목에 나온다. 아마 그래서 노래 제목도「혈서지원」으로 한 모양이다. 일장기·성수만세·나라님·은혜·대동아공영권 등등 가사 곳곳에 일본 황제와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대목이 넘쳐난다. 친일성이 짙은 이런 내용의 노래로 지어 뭇 대중에게 일본군 지원을 부추겼으나 작사가와 작곡가 그리고 가수들을 ‘친일음악인’으로 불러도 별 무리가 없겠다.(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지난 2006년 6월 국가보훈처가 호국보훈의 달을 기념해 발매한 기념음반에 일제강점기 친일가요가 버젓이 수록돼 논란이 인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바로 이「혈서지원」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혈서’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이 노래 가사가 겹쳐졌다. 시기적으로 박정희의 ‘혈서’가 먼저니「혈서지원」을 베꼈다고 할 순 없겠지만, 내용만을 놓고 보면 둘은 마치 판박이 같다. 참으로 놀랍다. 그러면 실지로 그런지 이번엔《만주신문》에 실린 박정희의 ‘혈서’ 내용을 한번 보자.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편집자)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우선 그는 군관학교 입학 자격이 안 되자 무리를 해서라도 입교를 자진 희망했으며,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자처하면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을 밝혔다. 나아가 이를 위해 ‘목숨을 다해’, ‘멸사봉공(滅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도 약속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를 ‘혈서’로 써서 각종 구비서류와 함께 군관학교로 보냈다고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친일파는 없을 것이며, 이보다 더한 충성 맹세도 없을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맹세가 일본 황제가 아닌 대한민국이었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그를 ‘애국자’로 기록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혈서’가 발굴되자 온-오프 라인 미디어 모두 뜨겁게 달아올랐다. 충분히 그럴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정희의 ‘혈서’가 유독 주목을 받은 것은 존재 여부를 놓고 그간 논란도 많았지만, 그 무렵이 좀 ‘특별한 때’여서가 아닌가 싶다. 마침 그 무렵은 민족문제연구소가《친일인명사전》출간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자 박정희의 유족들은 다급한 나머지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는데, 법원의 결정이 오늘내일 하던 때였다. 유사한 선례(장지연·장우성)를 볼 경우 법원이 기각할 가능성이 커보였는데, 예상대로 2009년 11월 6일에 가처분신청이 기각됐다. 즉《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를 실어도 좋다고 법원이 연구소 측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혈서’ 발굴소식을 전해 듣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제2의 반민특위’로 불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친일규명위)’가 바로 그곳이다. 지난 2005년 5월 출범한 친일규명위는 4년 반 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11월 말로 문을 닫을 예정이었는데, 그간의 조사결과를 묶어 종합보고서를 펴내기 직전이었다. 말하자면 이미 위원회 차원의 조사 및 심사 작업은 마무리됐다는 얘기다. 그러면 박정희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됐을까, 아니면 빠졌을까? 결론은 빠졌다. 이유는 근거자료 부족으로 결정을 유보했다고 한다. 그러면 친일규명위는 ‘박정희 혈서’를 심사 때 감안했을까? 필자가 당시 성대경 위원장에게 확인한 바로는 위원회도 미처 몰랐다고 했다. 박정희 관련 조사 및 결정에 이번에 발굴된 ‘혈서’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혈서’가 좀더 일찍 발굴되었더라면 박정희 심사 때 하나의 변수가 됐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친일규명위 심사가 끝난 후에 ‘혈서’가 발굴된 점은 참으로 아쉽다고 하겠다.
그럼 대체 이 ‘혈서’는 언제쯤 입수된 것일까? 그래서 ‘혈서’를 발굴·공개한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에게 물어보았다. 조 총장은 “이번 ‘혈서’ 관련 자료는 도쿄 지부에서 지난달 중순에 입수했다”고 했다. 그 시점이라면 친일규명위의 조사 및 선정 작업이 거의 끝난 시점이었다. 위원회에 문의한 결과, 제3기 조사 대상자 선정 작업은 지난 7월 6일 종료됐다고 했다. 위원회 특별법에 따르면, 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당사자(유족)는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데, 3기(1937년~1945년) 대상자 가운데 이의신청자 심사는 10월 21일 제104차 위원회에서 마무리됐다고 했다. 결국 10월 중순에 위원회의 조사업무는 사실상 종료된 셈이다. 비록 친일규명위의 보고서에는 ‘박정희’ 세 글자가 빠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혈서’를 쓴 사실조차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는 엄연히 만주국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고, 그의 일제치하 행적은 친일행위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에게 쏟아진 비판은 따지고 보면 모두 그가 ‘선택’한 결과다.
● 민망한 박정희기념관, 차라리 ‘박정희찬양관’이라 하지
필자가 사는 독립문네거리, 구 서대문형무소 뒤편 언덕에는 아담한 도서관이 하나 있다. 지난 2005년에 건립된 이 도서관의 이름은 ‘이진아기념도서관’이다. ‘이진아’가 누군지 잘 모를 것이다.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사도 아니니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 도서관이 그를 ‘기념하는’ 도서관이 됐을까?
1980년생인 이진아는 올해로 서른 두 살이 된다. 그런데 이진아는 지금 우리 곁에 없다. 미국 유학 중이던 2003년, 그곳에서 불의의 사고로 졸지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때 이진아의 나이는 꽃다운 스물세살. 딸의 돌연한 죽음 앞에 가족은 망연자실했다. 슬픔 가운데 가족을 잃은 슬픔만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이진아의 가족은 그 슬픔을 이겨내고는 이진아를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뭔가 뜻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업가인 이진아의 아버지는 이진아가 평소 책을 좋아했던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그런 딸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 도서관을 하나 세웟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서관 건립기금으로 40여억원을 선뜻 내놨다. 그러자 관할 서대문구청에서는 도서관 부지를 내놓았다. 그리하여 지난 2005년 9월, 이곳에 ‘이진아기념도서관’이 세워진 것이다. 최신식 시설에다 ‘주민친화형’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멀리서도 찾아오는 이용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근자에 바빠서 통 나들이를 못 하다가 지난 3월초 모처럼 가족과 함께 상암동 ‘박정희 기념·도서관’을 찾았다. 독립문에서 출발해 연세대-마포구청을 지나자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이 나타났다. 바로 그 건너편에 있는 ‘하늘공원’ 맞은편으로 새로 지은 ‘박정희 기념·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다 보슬비까지 뿌려 날씨가 좋지 않은 탓인지 일요일임에도 방문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웅장한 돌기둥 사이로 두 단계의 돌계단을 올라서자 제1전시실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왼편으로 안내데스크가 있고 정면 벽에 대형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의 모습으로 봐 1970년대 중후반, 그의 말기 사진 같았다. 잠시 구경하면서 보니 방문객 가운데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이 사진에 대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또 50대 후반 아주머니 한 분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일단 코스를 따라 전시물을 구경하면서 간간히 든 ‘소감’은 마지막에 붙일까 한다.
제1전시실 첫머리 오른쪽 벽에는 박정희 집권 18년의 연표가 1961년부터 79년까지 연도별로 정치·경제·외교·국토개발·사회문화·자주국방·교육 등의 항목에 걸쳐 자세히 적혀 있었다. 연표 아래에는 그에 해당하는 사진이 한두 점씩 붙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1979년도까지의 연표를 살펴본 결과 내용은 주로 대통령 재직시절의 각종 준공식 등 치적 중심으로 나열한 것이었다.
그런데 연표를 보던 중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박정희 정권 18년’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부터 시작하는데 왠지 그 내용은 언급돼 있지 않았다. 그 용어가 ‘군사혁명’이 됐든, ‘군사정변’이 됐든, 아니면 ‘군사쿠데타’가 됐든 이날을 뺄 수는 없을 텐데 왜 뺐는지 궁금했다. 1961년도 연표의 첫머리는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한 것이었으며, 그 아래에 그의 의장 취임식(7월 3일) 사진이 붙어 있었다.
연표가 적힌 벽을 따라 작은 통로를 지나면 왼편으로 작은 공간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곳에선 박정희 정권 18년간의 업적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맞은편 벽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민족중흥’·‘하면 된다’·‘근면 자조 협동’·‘새마을운동’ 등의 글귀와 함께 각종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예를 들면, 1인당 GNP가 89달러(1962년)에서 1000달러(1978년)가 됐으며, 수출은 4천만 달러(1962년)에서 1백억달러(1977년)로 증가한 사실 등이었다.
‘수출’ 코너로 가는 도중에 ‘5·16혁명’의 배경에 대해 언급한 곳이 있었는데 당시 박정희 군부가 내걸었던 명분 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안내판에는 민주당 정권의 무능으로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으며 그로 인한 ‘당시 정세와 환경이 혁명이 생길 수 있는 요인을 유발’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도 ‘군사쿠데타’ 기도와 그 이후의 처신에 대해 떳떳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표’ 부분에서 ‘5·16혁명’ 부분을 언급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런 ‘심증’을 굳힐 만한 대목 하나가 그 현장에서 발견됐다. 군복 차림의 박정희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사진 앞에 ‘혁명공약’ 액자가 걸려 있었다. 총 6개항으로 된 이 ‘혁명공약’ 제6항에는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고 돼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만약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이 없어서 그랬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궤변’이거나 아니면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5·16군사쿠데타’ 후 박정희는 1년마다 제 손으로 별을 하나씩 더 달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1963년 대통령선거에 육군 대장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출마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선거였지만 그는 마침내 그해 말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후 ‘3선 개헌’을 강행하면서까지 영구집권을 꿈꿨다. 그러나 그런 박정희도 집권 초기엔 ‘서민대통령’의 소박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혁명공약’ 바로 옆에는 그가 썼다는《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가 전시돼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대목을 발췌해 소개했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이어 그 시절 수출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코너가 나타났다. 입구에는 ‘파독 간호사’들로부터 구로공단 가발공장, 누에고치공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女工)’들의 작업 모습이 재현돼 있었다. 맞다. 바로 이들이 당시 진정한 ‘수출역군’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겪었던 고초나 그 무렵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오직 수출로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자랑밖에는 없었다.
이어 제2전시실로 가기 위해 제법 긴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연스럽게 ‘고속도로’와 마주쳤다. 입구에는 그가 손수 그렸다는 고속도로 계획도와 인터체인지 구상도 등이 전시돼 있었다. 50대 중반의 한 아주머니가 “고속도로에 차가 씽씽 달리고 얼마나 좋아?”라고 하자 고속도로 개통식 때 사용한 가위들을 구경하던 80대 할아버지 한 분은 “참 많은 일을 하셨지”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에 대해 이런 정서(평가)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새마을운동’ 코너는 그 다음에 이어져 있었다. 열린 사립문을 들어서니 초가집 방안에서는 세 식구가 무명옷 차림에 꽁보리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지붕개량을 한 집에서 세 식구가 깨끗한 복장에 조기가 오른 밥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새마을운동을 해서 지붕개량을 해 집도 좋아졌고 또 먹는 것도 좋아졌다는 얘기였다. 마당에는 우물 옆에 수도가 설치돼 있었다. 이런 식으로 차차 변해간 건 분명 맞다.
이 코너를 빠져나오자 ‘대한민국 국토의 종합 발전상’을 보여주는 대형 사각코너가 나타났다. 대형지도 위에 고속도로, 발전소, 댐, 공업단지 등을 표기한 후 그 위에 유리를 덮어 사람들이 유리 위에서 이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주위 네 면에는 치산·치수·보릿고개 극복·중화학공업·과학기술 인재양성·총력안보 등을 사진과 함께 육성해설로 소개해주었다. 명실공히 박정희 치적 찬양의 ‘종합판’ 같았다.
제1·2전시실이 치적 홍보 위주였다면 제3전시실은 ‘인간 박정희’가 주제였다.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이 입구부터 여럿 전시돼 있었고, 스크린에는 그의 어린 시절 등을 담은 영상물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 내용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하면,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지만 주눅 들지 않고 잘 견뎌냈다거나 몸집이 작았지만 야무져 ‘대추방망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구미초등학교 동창생 증언). 뭐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표현도 더러 있었다. 교사 시절 아이들을 따뜻함으로 가르쳤고, 장교가 돼서는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지도했다고 했다. 여기까진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대통령 시절 ‘국민의 아버지’라는 통치철학의 밑거름이 됐다고 하는 부분은 귀에 거슬렸다. 그가 어떤 이들에겐 ‘자애로운 아버지’였을지 몰라도 어떤 이들에겐 ‘폭군 중의 폭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인물 평가는 공정하지 못하다.
박정희·육영수 두 사람의 유품 전시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어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 체취가 묻어나는 소장품(예를 들면, 자필메모·도장·수첩·안경·훈장 등)이나 대통령 취임선서문, 대통령 전용지 메모 등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실지도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만 ‘참 검소한 대통령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만도 해보였다.
유품 전시물 중간 중간에 중앙일보에서 편찬했던《실록 박정희(中)》에서 인용했다며 문구 몇을 써 붙였는데 ‘러닝셔츠를 헤지도록 입었다’는 건 아니다 싶었다.
“박 대통령은 ‘자손을 위해 미전(美田)을 사두지 않는다’는 일본 한시를 자주 암송하곤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1남2녀의 자손을 위해 남긴 재산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살았던 서울 신당동 집 한 채뿐이다.”
‘신당동 집’은 그가 준장 때 전세살이를 끝내면서 장만한 것으로 현재 육영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 한 채가 그가 남긴 유산의 전부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육영재단·대구 영남대학·게다가 요즘 한창 언론에 오르내리는 정수장학회 등은 대체 뭐냐는 것이다. 비록 이것들이 유족의 명의로 돼 있지는 않다고 해도 사실상 그의 자녀들이 주인 노릇을 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박정희 기념·도서관’을 둘러본 소감을 두 가지만 정리해볼까 한다.
첫째,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치적 및 개인 홍보에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 ‘박정희기념관’ 수준을 넘어 ‘박정희찬양관’이 돼버린 꼴이다. 그의 지지자들이나 박정희 독재정권의 향수를 되살리고 싶은 사람들이 보기엔 흐뭇한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도 남는다고 생각된다. 그는 분명 공과(功過)가 교차되는 인물임에도 경제성장 주역으로서의 박정희는 곳곳에 사진으로, 영상으로 넘쳐나면서 ‘친일파·독재자 박정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흔히 역사적 인물을 기릴 목적으로 세운 기념관(또는 기념도서관)은 대상인물의 전 생애를 고루 조명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의 치적 홍보는 물론 그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비치해 그에 대한 연구와 이해를 돕는다. 참고로 미국의 경우 전직 대통령 기념관 및 도서관은 대학원과 통합돼 ‘대통령 스쿨’로 운영되고 있다. ‘박정희 기념·도서관’ 역시 흑백사진 복제품이나 유품 몇 점을 전시할 것이 아니라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입수해서 전시·열람토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 그도 사람일진대 ‘인간 박정희’ 특히 그의 정체성이랄 수 있는 ‘군인 박정희’의 모습은 좀체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직 ‘대통령 박정희’·‘영웅 박정희’만 넘쳐났다. 게다가 그에게 ‘흠’이 될 만한 행적이나 사건에 대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친일행적이나 좌익전력은 물론 집권기간 동안의 독재정치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없었다. 인터넷에 ‘박정희’ 석 자만 치면 주르륵 쏟아져 나오는 것들임에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은 곤란하지 않는가? 특히 국민의 혈세가 들어간 시설이라면 말이다.
☞출처:정운현 著 김이수 纂『친일·숭미에 살어리랏다』「배반의 역사 수구의 로망」책으로 보는 세상 版(2012년 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