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와 소암 두 거목의 그길 위에서
강 병돈
나는 지난달 나는 우리지역에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 수필,서예,서화 등을 창작하는 문학동아리 모임인 성산포문학회에 무작정 노크를 하게 됐다.
문학은 심오한 세계 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나 자신 에게는 어울리지도 않거니 와 글 제주도 없어서 그냥 동경심 만 있었는데 불혹을 넘긴 이 시점에 뭔가 의미 있는 일들이 나에게 필요하겠다 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서 프로포즈 를 했다 .정기모임 에서 흔쾌히 받아 드려줘서 내심 고마웠다 .그 첫 모임에서 우리제주에 옛 문인들에 발자취를 가보는 문학기행이 예정돼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 보고 즐기는 여행은 많이 가봤지만 어떤 목적과 테마 를 가지고 떠나는 기행은 성인이 된 후로는 몇번 안 가본지라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같았다 7월21일 출발 이였다. 작은 메모장 하나 넣을 수 있는 쪽 가방 하나 메고 즐거운 일탈 을 기대하며 일행 들과 첫 도착지인 추사 적거지로 향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이라 한라산허리 인 산록도로를 타고 달렸다 차창밬으로 보이는 산남풍경은 한폭에 그림이었다 태평양과 맞닿은 서귀포칠십리 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언젠가 정상회담차 들렸던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전용 헬기로 제주를 돌면서 뷰티풀 뷰티풀 연거푸 찬사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추사적거지에 도착해보니 길게 이어진 돌담들이 고즈넉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추사김정희 라는 입구에 표지부터가 명필에 기운을 내뿜는 것 같았다,
우리문학회 고문과 자문역할 을 맡고 계시는 신풍마을에 한학과 향토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소농오문복 선생님이 전문가 적 입장에서 해설이 시작됐다
추사 김정희 그는 누구인가? 70평생 벼루10개를 구멍내게 하고 붓 천 자루를 닳게하고 추사체라는 경지에올랐던 서예에 대가. 책만권이 머리속에 있어야 비로서 제대로된 창작이 가능하다 라는 명언을 남기신그분 1786년 정조10년에 태어나서 1856년 철종7년에 돌아가셨다.영조가 지극히도 사랑한 화순옹주에 증손자 왕실에 내척.충남 예산군신암면 용궁리에 그가 태어나자 말랐던 샘물이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설화를 가졌다18세기 진경시대에 북학사상을 본궤도에 진입시킨 장본인 그러면 진경시대가 뭘까? 조선중기에 중국화보에 모사나 모방 단계에서 벗어나서 조선고유에 문화 예술을 부흥 시켯던 시대 그시대 변화의 물결에 이론적 바탕이된 북학사상 실학사상에 근본이었던 박지원에 제자인 박제가에 제자가 김정희였다 추사체로서 중화를 뛰어넘는 업적을 남긴 정치가이자 천부적인 서화가 가 바로그분이다 , 그런데 역사적으로 대단한 칭송을 받는 분이 왜 수천리 바다건너 대정현까지 유배되 왔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된다
그는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참의.설서.시강원등 잘나가던 젊은관료 였던그가 1830년 생부노경에 일로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에 휘말리게 된다.
그시대 악역 이였던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 조종혐의로 고금도에 유배가된다 순조의 특별배려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고 순조의 뒤를이어 헌종이 즉위하면서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 반대파의 끝없는 모략으로 10년전 윤상도의 옥사연류 9년간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갔지만 3년뒤 친구였던 영의정 권돈인에 일에 연류 되어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나 과천에서 학문에 정진하다 생애를 마친 인물이었다
그럼 추사에 인생 역정중 제주 대정현에 왔을 때 를 생각해보자 얼마나 참담했을까? 또 그를 맞는 대정현에 주민들은 그를 어떻게 봤을까? 9년 유배 되어 있는 동안 어떤 작품들을 남겼을까? 권세가 에 고대광실 기와집에서 보잘것없는 초가집과 관청에서 감시도 받았을 것이고 먹고 입는 것 또한 변변치 않았겠지? 그런 그를 보는 대정현 주민들 은 죄수로 봤을까 아니면 기품 있는 학자 그야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는 봤을 것이다. 예상해 보건데 유배신분으로 할수 있는 건 글을 읽고 쓰는 일 외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기에 학문에 깊이 는 한층 더 깊어 졌을 것이다
보통 천재 예술가 들은 이런 고달픈 기간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그 작품들 중에는 대작들도 나오지 않았던가. 추사도 이기간에 100여점 에 작품과 추사체 를 완성 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는 단연 새한도 가 유명하다 1844년 유배시절에 제주까지 찾아준 역관출신문인 이상적에 의리에 보답해준 그림이다 하얀 종이에 누가 봐도 춥고 가난해 보이는 둥그런 창이 있는 집에 소나무 와 잣나무 가 서 있는 그림 화려한 산수화 는 아니지 만 이 한 폭에는 지조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선비정신과 한 시대의 최고 경지에 오른 그림 과 글씨에 어우러짐이 있다. 일반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 가까이 하다가 권세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척하는 게 보통이다 내가 절해고도 에서 귀양살이 하는 처량한 신세 인데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귀중한 물건을 사서 부치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 할까 공자는 새한연휴( ) 지송백지후조( ) 라 하였으니 그대의 정이야말로 추운 겨울에 소나무와 잣나무에 절조가 아닐까 하는 뒤에 붙은 소서가 새한도에 모든 해석 이 될 것이다
돈과 권력이 사람과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현실에 추사와 이상적의 신의는 부럽고 멋있다 는 생각을 해본다 역시 천재는 천재성 알아주는 친구와 지인들과 남겨진 작품 그 다음은 역사가 평가해준다 는 이치를 떨쳐 버릴수 가 없었다,
다음 행선지 는 소암 현중화 기념관이다 장소를 옮기면서 우리는 서귀포시내에 있는 시비공원에 잠시 들렀다 제주를 사랑하고 노래했던 시인들에 시를 한곳에서 볼수 있었다 정한모 시인에 해녀 정완영 시인에 바람 양중해 시인에 마라도 등을 봤다, 모두 제주에 풍경 과 제주사람들에 일상을 은유한 시 들이였다. 제주가주는 이색적 환경은 이들에게 시적 영감을 주는데 충분했던 모양이다
소암 기념관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에는 소암 현중화선생에 제자들이 두 분이나 계시다 오문복 선생님 그리고 한용택씨 소암 선생에 대를 있는 실력자들이다 첫 입구부터 흰 수염 에 하얀 도포를 입고 붓을 들고 작품에 열중 하고 계시는 경지에 오른 도사 같은 흑백사진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소암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오문복 선생님이 해설을 해가기 시작했다, 기념관 여직원 두 명이 마치 밀착경호 하듯이 녹음기를 켜고 동행 했다, 선생님 말씀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라는 말이 와 닿았다 소암 현중화 선생에 알아보자 1907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일본에서 유학 와세다 대학 졸업 후 당대 일본 서예대가였던 마츠모토 호루스이 와 츠지모토 시유우 문하에서 11년간 사사를 받은 후 녹담서원 개설로 본격적인 활동을하시다 1955년 귀국 후 서귀포중학교재직 51세 국전입선 63세 국전국전심사위원 등을역임 했고 타이완 국립박물관 예술에전당 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89세때부터는 조범산방 에칩거작품 활동을 하시다 91세 1997년에 별세하셨다
한글은 물론 일본에서 터득한 육조체 와. 행초서 모든 서체에 능했고 소방정토로 돌아간다 라는 서귀소옹을 호로 삼아 먹고 자고 쓰고 라는 작품에 열정으로 70~80세 완숙기에 고품미 가 묻어 나오는 독특한 소암체를 완성 한국 서예계에 한 획을그으신 분이다
여전히 오문복 선생님을 비롯한 후학 들은 추모전 과 유물전 을 열고 있었다.그것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오늘 문학기행을 통해 추사 와 소암 두거장에 예술에 열정과 추사체 와 소암체에 탄생과정을 보면서 그 인생에 길이 얼마나 고독하고 험란했던 길이었나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 길은 한 인간에 생애주기에서 끝나지 않고 현재까지 그리고 다음세대까지 그길은 놓여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우리는 그리고 나는 어떻게 주어진 삶에 그길 위에서 나 만에 흔적을 남겨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