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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3: 운문의 자기광명(自己光明)
운문은 대중에게 (20년 동안) 말했다. “사람마다 스스로에게 광명이 있다.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둡고 캄캄하다. 무엇이 모든 사람의 자기광명(自己光明)인가?” 스스로 대신 말했다. “주고삼문(廚庫三門)이다.” 또한 (대신) 말했다. “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 (雲門宗主)韶州雲門文偃禪師(嗣雪峰)示眾曰。人人自有光明在。看時不見暗昏昏。作麼生是諸人自己光明。自代云。廚庫三門。又云。好事不如無。
<화두3>에 부치다. 이 화두는 매우 까다롭다. 때문에 이것을 살펴고자 해도 첫문턱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무엇이 첫번째 난관인가? 바로 번역의 문제에서부터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운문선사는 어느날 법문을 하였다. “사람마다 스스로에게 광명이 있다.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둡고 캄캄하다. 무엇이 모든 사람의 자기광명(自己光明)인가?” 사람마다 저마다 귀하고 신령하고 참되다고 여기는 것이 있다. 그것을 자기광명이라고 이름붙여보자. 그렇다면 이제 그 자기광명이 참으로 영원불멸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반문해봐야 할 것이다. 사실 저마다는 자신의 참된 본성을 스스로가 알고 있고 영원불멸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스스로의 이해를 실험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용광로속에 넣어보지 않으면 어찌 참된 금인지를 판별할 것인가? 잡철이라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금이라면 틀림없이 황금빛으로 빛나며 용융상태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녹아서 그릇에 남을 것이다. 저마다는 스스로의 자기광명이가짜 금이나 은이 아닌지를 가려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것을 위해 선(禪)의 바른 안목이 절실한 것이다. 화두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절대적으로 꿰뚫어야 할 시금석인 것이다. 자 보자, 무엇을 주고삼문(廚庫三門)이라고 하는가? 번역에서부터 순탄치 않다. 벽암록 번역에서 가장 참고를 많이 하는 것이 바로 해인사 장경각에서 번역한 세권의 벽암록이다. 참고로 여기에서는 '부엌의 삼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옳은 번역일까? 만약 누군가가 잘못된 번역을 의지해서 참구한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성을쌓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부엌과 세 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취산이라면 그렇지 않다. 부엌, 창고, 그리고 세 개의 문이라고 하겠다. 저마다가 아는 자기광명은 반드시 운문이라는 용광로를 통해 참으로 진짜 금을 가려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 어찌 순수한 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저 운문선사께서 주고삼문과 자기광명을 말한 뜻이 무엇일까? 결국 저 운문선사가 이렇게 말한 뜻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면 각자는 스스로 손에 보배를 들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편 여기에 대해 설두중현선사는 송을 붙였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번역이 어지럽다. 참고로 장경각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다.
사람마다 있는 광명을 지혜로 비추어 보고, 그대를 위해 한 가닥 실마리를 터주었네. 꽃이 떨어지고 나무는 그림자가 없으니, 이렇게 볼 때에 누가 보지 못하는가? 보는가, 보지 못하는가? 소를 거꾸로 타고 불전으로 들어간다. (장경각) 그렇지만 나 취산이라면 이렇게 번역하겠다. 스스로 고명(孤明)을 나열하여 그대를 위해 한 가닥(의 길)을 통하였다. 꽃이 지고 나무에 그림자 없음을 보려고 하면 누가 보지 못하겠는가. 보든 보지 못하든 소를 거꾸로 타고 불전으로 들어간다. (설두 현) 自照列孤明。為君通一線。 花謝樹無影。看時誰不見。 見不見。倒騎牛兮入佛殿。(雪竇顯)。
여기에서 고명(孤明)이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고((孤)란 홀로 우뚝하다는 의미이고 명(明)이란 해와 달이 비추어서 산하대지가 밝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이 두 글자로 이미 주고삼문을 펼쳐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한가닥에 통하였다고 한 것이다. '꽃이 지고 나무에 그림자 없음을'이라고 한 것에 대해 어떤 이는 꽃이 떨어지고 어둠속에 나무가 묻혀 그림자가 사라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취산이라면 전혀 다르게 말하겠다. 즉 흔히 '정전백수자' 즉 ' 뜰앞의 잣나무'를 거론하는데, 조주선사께서 이것을 말한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이것을 안다면 이것도 알 것이다. '보든 보지 못하든'이라고 한 것은 밝음과 어둠 가운데에서는 이것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안목에서 이 일을 밝힐 수 있을까? 설두선사는 마지막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소를 거꾸로 타고 불전으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모두의 혓끝을 끊는 기개가 있고 안목이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보겠다.
물음을 던졌어도 20여년에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 스스로 두 차례 대신 대답했으니 흡사 물속에서 별을 건지는 듯하고 높고 높은 곳에서 그물을 펼치는 듯하다. 주고삼문이여 금까마귀도 비추지 못하고 옥토끼도 놀라 달아나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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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합장)
소를 거꾸로타고 불전으로 들어간다 ㆍ
ㅡ합장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