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32-35절『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프로슠소마이) 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카디사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프쉬케)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프로슠소마이(προσεύξωμαι)는 문법적으로 아오리스트 중간 디포테를 사용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지성소 기도에 해당된다. 카디사테(καθίσατε)는 예수님은 기도하고 제자들은 앉아있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기도하라는 말이다. 프쉬케는 혼이다. 혼이 심히 고민되고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영인가 혼인가? 죽음 앞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혼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례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은 세가지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영(성령)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나가는 마음이다. 둘째, 육(사륵스)의 마음이다. 첫사람 아담의 흔적인 육적 자아(일곱가지 육적 속성)이다. 그리고 혼의 마음이다. 이는 육과 영이 결합되므로서 파생되는 마음이다. 혼은 옷과 같은 것으로서 영이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를 입고 있을 때는 불완전한 혼의 마음이지만, 육적 옷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옷(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을 입을 때는 온전한 혼의 마음이 된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서는 혼의 구원에 대해서 말을 한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프슈케)의 구원을 받음이라』영혼이라 번역되었는데, 혼이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영의 마음이 없으며, 오직 육과 혼의 마음만 존재한다. 육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노력으로 혼의 마음을 개선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선해도 불완전한 것이다. 타 종교의 예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혼을 개선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옷은 아무리 잘 빨아도 완전한 옷이 될 수 없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시므로 모든 것을 성령이 인도하신다. 그러나 육으로부터 오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혼이 예수와 함께 죽고(불에 태워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혼(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으로 갈아입을 때, 육체 속에 갇혀있던 영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영과 육과 혼을 정확히 이해하고 구분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게 된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갈 때 고민하고 슬퍼했다고 말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위대하신 이 분도 죽음 앞에서 혼이 심히 놀라고 슬퍼했다. 육에서 비롯되는 혼은 그렇게 반응한다. 위로받고 싶어서 제자들을 동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심지어는『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창세 전에 계획하신 분이 이런 발언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쉽게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혼은 그렇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혼은 자기(옷)라는 존재다. 혼은 불태워져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을 상징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바로 혼을 바꿔 입으라는 것이다. 이전의 혼을 부인하는 것이 곧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서『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아프 ἀπ’ 에모우 ἐμοῦ)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에고 ἐγὼ)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수 σύ)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여기서 문법적으로 에고(나는)는 주어이다. 에모우(나의)는 소유격이다. 아프는 ~으로부터 라는 전치사이다. 수는 주어(당신은)이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마시옵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의미상으로는 나로부터 옮기는 것이지만, 문법적으로는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는 것이다.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것은 육적자아(사륵스)를 의미한다. 잔을 받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사역을 바라보는 육적자아에서 영적자아로 옮겨 달라는 말이다. 영적자아는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41절에서『마음(프뉴마)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πνεῦμα πρόθυμον ἡ δὲ σὰρξ이 문장의 영어(kjv)로는 The spirit truly is ready, but the flesh is weak. niv는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마음이라고 번역된 것은 오류다. 프뉴마는 영(성령)이다. 성령(프뉴마)이 이끄시지만, 육신(사륵스)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말을 한다. 십자가의 사역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말이다.
헬라어 사륵스(σὰρξ)는 육체(body)가 아니라, 육신(fresh)이다. 육체는 살 덩어리이지만, 육신은 바로 육적자아를 의미한다. 육적자아는 육으로부터 비롯된 육적 몸(육신)을 의미한다. 이 육적 몸(육적자아)은 일곱가지의 형태로 등장한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육체의 본성(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고 그녀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도 육으로는 사륵스(육신)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은 영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육과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 범죄한 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 전에 여호와이셨으므로, 육에 들어간 영은 성령으로서 죄와는 상관없는 분이라는 말이다.
영과는 상관없이 육적 몸(사륵스:육적자아)은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육의 흔적으로서 누구나 다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죄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육적 몸이 죄성(탐욕)을 가지게 되지만, 예수님은 비록 육적 몸(사륵스)을 가지고 있어도 성령으로 태어난 분이므로 죄성 자체도 성립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육적자아로 인해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흔들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이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