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논쟁
마가복음 12장 18-23절『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여기에서 사두개인들이 생각하는 부활은 육체가 죽은(네크론) 후에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을 오해했다고 말씀하신다. 12장 25절에서『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ὅταν γὰρ ἐκ νεκρῶν ἀναστῶσιν οὔτε γαμοῦσιν οὔτε γαμίζονται, ἀλλ’ εἰσὶν ὡς ἄγγελοι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여기에서 헬라어 『ὅταν(~때에) γὰρ(전치사) ἐκ(~으로 부터) νεκρῶν(죽음) ἀναστῶσιν(일어나다)』를 다시 번역하면,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때』라고 번역된다.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때와 한글 개역개정의 “살아날 때”와는 다른 의미다. 살아난다 라고 번역을 하므로 마치 죽었던 육체가 소생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죽었던 사람의 몸이 소생되면 사람으로 있는 것이지,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죽었던 자는 사람이다. 죽은 육체가 부활하였다면 부활한 몸은 사람의 몸인가 천사인가? 예수님이『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을 하셨다. 죽었던 육체가 살아있는 육체로 부활하면 천사와 같이 되는 것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천사는 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죽은 육체가 살아난다고 믿는 자는 예수님의 하신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12장 26-27절에서『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죽은 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말을 하신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사두개인은 육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은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몸은 어떤 몸인가? 신비스럽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몸이라는 것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는 알고 있다. 변신이 가능하고, 시공간을 뚫고 나타나시는 영생의 몸이다. 이러한 영화로운 몸은 부모로 부터 받은 육체로부터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활은 하늘로부터 영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부활을 죽은 육체가 부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는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죽은 후에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당시의 사두개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로마서 6장 5절에서『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성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이 현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 부활하는 것이다. 비록 육체로 인해서 볼 수는 없지만, 부활의 몸으로 태어난 자라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육의 몸이 있은즉 영의 몸도 있다고 말을 한다. 이 영의 몸이 그리스도의 옷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육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살 덩어리(육체:bod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정체성(육신:fresh)을 의미한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옛사람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옛사람은 죽어야 할 첫사람 아담의 모습, 새사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의미하는데, 마지막 사람 아담의 모습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두개인의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심을 알고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계명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계명 중 첫째(프로테 πρώτη)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프로테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계명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그리고 이어서『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 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육적 자아와 영적 자아가 분리된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영적 자아에 있음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 자아와 싸워 이겨야 함을 깨닫는다. 육적 자아(육신)는 영적 자아(부활)의 대적인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육적 자아는 가라지에 비유되고, 영적 자아는 알곡에 비유된다. 가라지는 불세례로 태워 없애야 하는 우상인 것이다. 이 우상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 우상이 성도의 심령 속에 있다는 말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두 마음이 공존한다.
로마서 8장 5-8절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이 두 마음이 성도의 심령 속에서 공존하고 있으며 싸우게 된다. 그래서 육적 자아는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가 된다. 육적 자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나, 영적 자아는 성령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으로 표현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면, 어떤 감정을 떠올리기 쉬우나, 사랑은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이웃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반드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되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성도가 이웃(영적 형제)을 사랑하는데, 상대가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사랑을 하려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령세례(부활)가 없다면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신도가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으면, 성경이 그들 앞에 주어진다. 그들에게 성경은 레마가 되는 것이다. 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벗어나면 성경이 호-로고스로 다가오게 되는데, 이는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는 율법 속에 있는 자신을 깨달아야만 성령의 법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