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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長城)
만리장성(1시간) :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 총길이 6,000여 km에 달하는 성벽이다. 팔달령 장성은 명나라때 개수된 성벽으로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수많은 인부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진 축조물이다. 중국 역대 장성 중 명때의 장성이 기마병의 기습에 군사방어적 기능으로서 웅장하고 가장 완벽하고 견고하다.
중국사람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하지 않으며 장성(長城)이라고 한다. 장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유명한 말이있다.
만리장성(1987년 세계문화유산 등재)은 기원전 700여년 중국 봉건사회발전의 전 과정과 동반되었다. 세계역사상 가장 긴 하나의 도로로서 군사방어공정의로 그 것은 한 줄기 커다란 용의 모습으로 산과 령 강과 하천 호수와 바다로 중국 북방에 횡으로 걸쳐있다. 총 길이는 몇 차례의 변화되었던 전부를 다 더하면 5만여리가 된다.
오늘날의 장성은 중국의 상징으로 친절한 영접으로 세계각지의 친구들이 여행객으로 오지만 아마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발아래 이런 전돌과 같이 사실 매우 근년에 만들어진 것과, 정말 오래된 장성도 있어 완전히 같지 않은 면모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돌아오는 농경생활은 살고 쉬기를 지속하기를 최소한 3,000년 역사다.
기원전 9세기 이 곳은 농경이 본(本)이되었고 토지에 정착괸 하나의 새로운 신흥국가 서주(西周)가 세워졌다.
서주는 황하 유역에 건설된 중원국토의 사방에 분포하였다.
氐, 夷, 羌, 戎, 䒫 등 많은 수의 소수민족으로 부터 유효하게 국도 방어와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주군대가 부단이 축성하고 수리한 일종의 흙더미였다.
이 흙더미는 당시 하나의 형상으로서 이름 짓자면 봉화대였다. 봉화대는 흑을 구축하고 흙더미로 보이지만 실제상으로는 오히려 당시로서 선진적이고 실용적인 봉수대계통이다.
봉화대와 봉수대의 외관은 유사하지만 기능은 다르다. 낮에는 불을피워 연기로서 알려 보고했고, 밤에는 불로서 알렸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 유(幽)왕의 왕비 포사(褒娑)는 한 번도 웃지 웃지아니하였는데 어떤날 실수로 봉화가 피어올랐고 이를 보고 제후의 군대가 출동하자 깔깔 웃었다. 이를 본 유왕은 포사의 웃는 얼굴을 보기위하여 심심하면 거짓으로 봉화를 피웠고 이 때마다 제후의 군대가 달려왔으나 와 보면 포사의 웃음을 보기위하여 거짓으로 봉화를 올린 것임을 알고 불평불만으로 툴툴거리며 자신의 제후국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771년 견융(犬戎)이 처들어오자 유왕은 봉화를 피워올렸으나 제후국들은 거짓인 줄알고 아무도 출동하지 않아 왕은 살해되고 허망하게 서주(西周)는 멸망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 데 이 숙어의 유래가 되었다.
출토된 한(漢)대의 죽간기록상에는 당시 봉화(烽)계통의 분포는 규칙적으로 봉화대의 거리는 평균 40리에서 50리 였고, 수(燧)는 비교적 밀집적이어서 10리 정도의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불 붙여진 봉화는 거의 24시간 횡으로 1천리 최대한 짧은 시간내에 원병의 출병 경보 신호였다.
서주 최후의 황제 유왕(幽王)은 아름다운 사람의 한번짓는 미소를 얻기위하여 봉화를 장난물로 여기고 아무 연고도 없이 봉화불을 피워올렸다. 이로 인하여 사주(四周) 팔방(八方)의 구원병이 마치 뜨거운 솥위의 개미와 같이 혼란을 겪었다. 미인은 웃었고 주왕조의 운수도 막바지에 다다라 기원전 771년 서주는 멸망하고 말았다.
후세에 남아있는 봉화극에서와 같이 제후들의 웃스개가 되었지만, 당시 선진의 방어계통 봉화대는 역시 유전되어 내려왔다.
이것이 장성의 최초의 조형이 되었다. 주왕조가 멸망한 후 중국은 4분 5열의 제후 활극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들어섰다.
각각의 제후국은 거주하는 영지가 명확하게 분활되어있어, 자기나라 보호를 필요로하여 하나의 도로로서 높은 담장을 축성했다.
당시 중국북방거주자는 허다한 유목민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목초지를 따라 거주하며 농사경작을 하지 않았다. 유목민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말을 타고 신속히 중원으로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했다. 유목민들은 일정한 거주지 없이 행적이 일정치 않고 공격적이어서 늘 중원변방의 농민 심지어 군대도 속수무책의 괴로움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유목민의 진공을 막기위하여 중국 북부 각 제후는 담장을 이용하여 봉화대를 연접시킴으로서 보호대로서 초기 장성이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각제후국에서 수리되고 축성을 개시한 이래 장성은 위대한 군사방어체계와 부단히 중복되고 중건되고 허물어 지는 훼손의 역사였다.
장성은 실지 매우 오래되었고 기원전 5세기의 전국시대 중국 대지상 소리없는 무수한 왕조의 흥망성쇠를 격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중국 봉건역사상 최초로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봉건왕조를 열었다.
그는 자칭 시황제라는 뜻으로 진왕조가 장래 2세, 3세, 4세 만세영속의 쇠(철)로된 강산으로 여겼다. 진시황은 북방 초원민족이 제국존망의 최대 우환으로 여겼다. 기원전 214년 그의 명령으로 개시된 원래 제후국들간에 상호방범의 장성, 원래 연,조,진(燕趙秦)삼국의 내려왔던 유목민족의 오래된 장성에 진행되었던 수선을 북부 변강의 기타지방 수선 하고 신축하였다.
7년후 한 줄기 서쪽 용서 임조龍西 臨조)에서 동쪽 요동 까지 장장 5천리의 장성이 완성되어 실제적 만리장성이 되었다.
사서 기재에 의하면 장성건축에 참여한 군인은 약 40만명이며 이외에도 50만명이상의 민간인부와 죄수, 빈민의 여자 등 총 100만명이 동원되었다.
당시 진나라왕조시대에는 약 2,000만명정도의 인구가 있었는데 수치상으로 계산하면 약 20명 중 한사람이 장성축조에 동원되는 국가의 인력과 물력에 의하여 비로소 완성된 위대한 공정이다.
장성이 건축된 후 진시황은 20만명의 군대를 국경 수비를 위하여 파견했고 주둔군은 일부는 현지에서 직접 모집하였고, 또 다른 일부는 멀고 먼 중원지역에서 동원되어 변방 요새의 안전과 장성의 유지 보수가 주된 업무였다.
기원전 178년 일면 장성을 수호하면서 한편으로는 개간 및 경작도 해서 스스로의 호구를 해결해야하는 군수둔전제(軍守屯田制)를 시행하였다.
만리장성은 소멸된 6국 제후의 백성들이 주로 동원되어 적막과 고독속에 장성의 무릅아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아야 하는 백성의 불만과 분노는 진시황의 폭합과 폭정에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에 맹강녀의 묘(孟姜女廟)가 있는데 맹강녀의 남편은 관원에 의하여 만리장성축조에 끌려갔고 수년간 소식이 없어, 먹을 것과 겨울 옷을 준비하여 남편을 찾아 만리장성에 도착하였으나 남편은 이미 죽어 백골이 되었고, 맹강녀는 울었고 눈물은 강이되었다는 전설은 진시황의 폭정과 실정을 고하는 인심의 적확한 표현이다.
'하루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한 사내가 만리장성에 동원되어 몇 년이 흘렀고, 어느 날 그의 부인은 집안의 종에게 깨끗한 옷을 입히고 잘 먹인 뒤 하루밤을 동침하고, 글을 써주면서 가슴에 고이 품고 만리장성에 동원되어 있는 자신의 남편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종은 만리장성에 동원되어있는 자신의 주인을 만났고, 글을 전했는데 글의 내용은 내가 이 사내와 하루밤을 보냈는데 이 일을 용서하고 같이 잘 살고자한다면 이 종의 옷으로 바꿔 입고 탈출하라고 써져 있었다. 글을 본 남편은 걸레가 된 자신의 옷을 종에게 입히고, 종이 입고있던 깨끗한 옷으로 바꿔입고 면회하고 돌아가는 양 문지기를 속이고 유유히 도주했고, 종은 하루밤을 주인 마님과 보낸 댓가로 만리장성을 쌓게 되었다.
진시황은 왕조를 만세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사후 7년이 못되어 농민군이 봉기하여 二세 황제때 멸망하였다.
진나라 명망후 등장한 한왕조(漢)의 장성축조는 진나라와는 다른 팔달령(八達嶺)장성과 같이 오화팔문형식(五花八門)이다.
한왕조초기 북방 흉노(匈奴)는 틈틈이 중원을 침략하였는데 장성내 3-4백리를 부단히 침입 신생왕조를 위협하였다.
70년의 휴식기간으로 한왕조는 국력을 점차 회복하였고 한무제(漢武帝)때 대규모 흉노정벌을 개시하여 감숙(甘肅)에서 신강(新疆) 라포박(羅布泊)까지 봉수대를 정비 증축하였다.
한대의 만리장성은 옥문관(玉門關)에서 시작하여 라포박(羅布泊):루오포포), 압록강(鴨綠江)까지 역사상 가장 길고 광대한 만리장성을 만들었다.
중원으로부터 서역일대까지 장성의 보호를 받아 서역 내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까지 무역이 확대되어 날로 융성하게 되어 여러갈래의 길이 생겨나게 되어 서쪽으로 부터 오는 상인으로 부터 아름다운 옥과 향료, 종교음악 등 부단히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중원의 화약, 지남철 등을 이용하여 사통발방으로 확대되어 중원과 서역의 우호적 왕래가 확대융성되었다.
한왕조는 융노를 정벌 한 후 회유책으로 한왕조와 결혼정책을 맺었는데 기원전 36년 중국 4대 미녀중의 한사람인 왕소군(王昭君)을 흉노의 수령에게 시집보내 60여년간 융노와 한 왕조는 전쟁없이 쌍방 평안과 발전적인 우호적 관계를 이루었는데 힘없는 아름답고 선량하고 지혜로운 한 여자를 이용하여 전쟁을 막고 백성들의 화평과 안녕을 가져온 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았다.
기원 7세기 당왕조(唐)의 당태종 이세민은 당시 세계상 가장 문명이 융성한 국가였음으로 당왕조는 장성을 수선하거나 건축하지 않았다.
거용관(居庸關)
居庸의 뜻은 춘추전국시대에서 기재된 바 평범한 사람이 산다는 뜻으로 만리장성에 설치된 관문으로서 북경에서 약 50-60km 거리에 있으며 거용관의 성벽길이는 약 414m이여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천하제일의 웅장한 관문)이라하며 천하 9개의 요새(天下九塞)의 하나로서 만리장성 중 북경에 가장 가깝고 중요한 관문성으러 "京城北大門"으로 불린다.
명태조 주원장(明太祖 朱元璋)은 원(元)의 권토중래를 막기위해 거용관을 확대 재건하여 명대(明代)에 군사건축물로서 태항산(太行山)에 속하는 40리 낮은 도랑계곡의 중간부분에 양측 산을 끼고 자리하고 있다.
화북평원(華北平原)과 몽고초원(蒙古草原) 의 중간에 있는 호족(胡族)와 한족(漢族)이 서로 만나는 협곡지대에 위치하여 군사적략적 지휘가 용이한 지휘소였으며, 교통, 교역의 요충지의 옹성(瓮城)이다.
현재 거용관의 1993 수리 재건되었는데 전면 840m, 측면 840m 높이 약 21m 총 면적은 약 7,000㎡, 주둔병력이 23,000명에 달할 정도로 매우 웅장하다. 매년 100만명이상의 여행객이 방문한다.
● 노란색은 위, 조, 진, 연(魏,趙,秦,燕)때 . 주황색은 한(漢). 연보라 북위,북제,수(北魏,北齊,隨), 갈색 요, 금遼金) 검은색 명(明)나라때 각각의 왕조때 건설한 만리장성을 표시하고 당시에 건설한 길이(km)를 표시하였음.
고구려의 장성조차도 연, 한(燕,漢)때 건설한 것으로 표시해 놓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조동북공정(東北工程: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의 고대사를 빼앗아 중국 역사의 한부분으로 편입하려는 연구로 한반도를 역사적으로 중국화하고, 간도와 백두산을 중국영토화 하려는 의도의 정책이다)을 추진하는 중화사상과 중국몽(中國夢)을 우리는 결단코 벗어나야 한다.
거용관 장성
거용관 장성은 중국 만리장성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겹겹의 산봉우리, 흐르는 내물과 무성한 식물들은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어 청나라 시기부터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도 그 명성이 자자한 "연경8경 燕京八景"중의 하나이다. 거용관장성의 지세가 험준하여 고대에 "천하 제1옹관 (天下第一甕關)이라 불리었다. 거용관에는 남북 권성. 성루, 망대와 수문 등 다양한 거축들로 구성되어 완벽한 군사방어체계를 이루고 있다. 성내에 "운대(雲臺)라 불리는 원나라 시기의 과가라마탑(過街喇嚰塔) 기초가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아주 정교한 원나라 석조예술작품이다. "거용관-운대"는 1961년에 중국 중점문화재로 확정되었고 1987년 중국만리장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들록되었다. 2001년 거용관 장성은 중국 국가 관광국으로부터 AAAA급 관광지로 선정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28 몽염열전편을 보면 :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몽염에게 명하여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융적(戎狄)을 쫓아버리게 하였다. 또 황하의 남쪽지대를 평정케 했다. 그리고 장성(長城)을 쌓았다.
그 것은 지형을 따라 험난한 곳을 이용하여 요새를 만든 것으로 임조(臨조)에서 시작하여 요동(遙東)에 이르기까지 전 연장이 일만리에 이르렀다. 이에 몽염은 황하를 북쪽으로 건너 양산(陽山)에 의거하여, 구불구불 굴곡을 이루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이 공사를 위하여 군대를 통솔하여 외방에서 노숙시키기 10여년, 그간 몸염은 상군(上郡)을 근거지로 하여 주둔하고 있어 그 위엄은 흉노까지 떨게 하였다.
진시황이 죽고나서 간신 환관 조고가 몽염에게 반란의 죄목을 씌워 죽이려고 하자 몽염은 탄식하기를 장성을 일만여리를 쌓았으니 지맥을 끊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지맥 탓을 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대에는, 지맥을 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태사공 사마천(太史公 司馬遷)은 말한다.
"진나라가 제후를 멸망시킨 당초에는, 천하의 인심은 아직 안정되어 있지 않았고,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부상자는 아직 낫지 않았다. 성의 위급을 구제하고 늙은이를 잘 보살피며 고아를 불쌍히 여기고 모든 서민대중들의 인화(人和)를 닦는 일에 힘쓰지 않은채, 오직 시황제의 뜻에 영합하여 토목공사를 일으켰으니, 그들 형제가 주살(誅殺)당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찌 지맥을 끊은 것이 죽을 죄였다고 말했단 말인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수선한 흔적이 완연하다
중국 쪽 남쪽방향
성밖 흉노 등 북방영역 : 북방기마민족이 이 골짜기를 따라 남방으로 말을 달려내려 왔을 것이다.
계단이 3칸 또는 4칸으로 자연지형에 따라 블럭 계단 높이가 다르다.
북관옹성(北關甕城)
북관옹성은 직사각형 모양에 성문이 북촉을 향하고 있고 옹성의 남측에 성문이 있어 성내로 통한다. 직사각형 모양의 옹성은 성대에 포루가 설치되어 있고 명대의 대포가 진열되어 있으며 외벽에는 성가퀴가 있고 내벽은 높이가 낮아 성가퀴가 없다.
전투가 벌어지면 먼저 적들을 옹성안으로 유인하여 큰 성문을 닫아 적들이 성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막고 다시 옹성의 갑문을 내려 버리면 적들은 꼼짝없이 옹성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옹중착별(甕中捉鱉) 즉, "독안에서 자라 잡기"라는 말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옹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포(古炮)
신위대장군(神威大將軍)이라고도 불리는 고포(古炮)는 조준에 쓰이는 가늠구멍과 가늠쇠가 있고 사격거리가 500여 미터에 달한다. 명나라 시기는 중국 고대 대포 제작과 사용의 번영기로서 전문적으로 대포를 연구 제조하는 병장군기국(兵仗軍器局)이 있었다. 명성조는 방어를 위하여 장성 연선에 대포를 설치하도록 명을 내렸다.
不到長城非好漢 마오쩌둥의 친필이다(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다)
진무표(眞武廟)
명홍희 원년 (1425년)의 건축으로 1996년에 재건된 진무묘는 진무대제를 주신으로 모신다. 진무 즉 현무(玄武)는 중국 고대 신화 중 북방의 신이다. 묘에는 진무신, 8대원수(元帥), 6정(丁), 6갑(甲), 신장(神將), 수화(水火) 2장(將)과 청룡, 백호 등 신상들이 있다.
용경협은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협곡이다. 계곡의 모양이 "용:龍)과 같다고 하여 용경협이라고 이름붙였다. 1973년 중국 장쩌민주석이 용경협을 둘러본 뒤 특별지시를 내려 계곡에 댐을 쌓아 인공호수를 만들고 배를 띄워 관광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유람선을 타고 강의 상류에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온다. 아름다운 기암괴석과 풍경을 본다. 강물의 색은 짙은 녹색이다.
배가 아래로 지나갈 때 중간에 있는 쇠줄로 자전거를 탄다는 데
번지점퍼
배가 아래로 지나갈 때 장대로 중심을 잡고 쉬줄로 걸어간다고 한다
중국은 매년 세계콩 수출량의 60%에 해당하는 6,500만톤의 콩을 수입하며, 콩과 옥수수는 대부분 돼지 사료로 사용되는데 돼지고기 요리는 약 1,500여종이며, 1인당 소비량은 연 39㎏이며, 13억5천만명을 곱하면 약5,265만톤이다. 세계돼지 절반인 4억 7천만마리를 사육하는데, 돼지의 체중 1㎏은 곡물 3㎏이 소요된다. 중국에서는 돼지고기는 주식에 가깝다.
미국은 세계 제1의 콩 생산국이며 수출국인데 무역마찰로 관세를 25% 붙임으로 인하여 수입이 어렵고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부터 수입하는데 이들 나라의 추수기기 3-4월이고 미국은 9-10월이라 3-4월에 수입하여 창고에 보관하는 비용과 손실분에 대한 감당 등으로 곡물가격이 많이 오르고 수급이 잘 안맞고, 설상 가상으로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던 돼지고기를 무역마찰로 러시아로 바꾸는 바람에 아프리카돼지열병(ASF)가 흑룡강성으로 부터 발발하여 전 중국을 휩쓸고 있어 8월 현재 1억 4천여 마리의 돼지가 폐사했다. 이로 인하여 돼지고기 가격이 약 48%오르고 전체물가가 0.8% 오르고 다른 대체 식품의 가격도 많이 올라 주식으로서의 돼지고기 파동이 중국전체를 불안하게하고 있다.
식단 사진에서 보듯이 중국식단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흔한 돼지고기도 없다.
시내 2층 버스
이화원(頤和園)
베이징 서북부 자금성으로부터 대략 15km에 위치하며, 원,명나라 때 물을 저장하던 호수로서 수백년 동안 습지로서 베이징의 서북부에 있어서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여름궁전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황제의 가든 겸 행궁으로서 1750년부터 건륭황제가 어머니의 60세 생일을 축하하여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건축기간이 15년 동안 지속되었다. 공정은 건륭황제가 친히 주관하였는바 총체적인 설계는 중국 전통조경예술의 특징을 계승하였다.
건륭제가 정식명칭을 맑은 물결이라는 뜻의 청의원(淸漪園)이라고 불렀으며 베이징에서 가장규모가 크고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청나라 원림으로서 중국에서 유명한 황실원림이다.
서태후의 여름별장으로 유명하며 290㎢의 면적을 가진 베이징의 공언이며 1750년 건륭제 15년 좌산은 만수산(萬壽山), 산앞의 호수를 곤륜산(崑崙山), 사찰은 수대대보사(修建大報思) 보은의 뜻으로 연수사(延壽寺)라 이름지었고 누각, 전당, 다리, 긴 낭하들이 조화를 이룬 중국고전건축물의 정수를 한 몸에 집중시킨 정원문화의 극치이다.
이화원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886년 서태후에 의해서다. 이화원은 기능에 따라 세개 부분으로 구분된다.
인수전을 중심으로한 궁정지역. 이 구역은 대신들을 소견하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낙수당을 중심으로한 옥란당, 의운관, 및 덕화원 역극무대를 포함한 생활구역은 자희대후, 광서제와 비빈들의 침궁과 연극을 보던 곳이다.
만수산 불향각을 중심으로 한 구역은 관광풍경구 이다.
폐허가 된 원명원을 복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태후가 해군 창설을 위한 예산 중 2,400만냥을 유용해 자신의 여름별장을 조성했다. 이로 인하여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해군은 무력하게도 일본에 완패하고 말았다.
인수전(仁壽殿)
청의원 시기의 이름은 근정전(勤政殿)이었는데, 청나라 건륭 15년(1750)에 지어졌고, 함풍 10년(1860)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화재로 훼손되었으나 광서 12년(1886)에 재건되었다. 인수전의 명친은 논어에서 인자수(仁者壽)의 의미를 취하여 명명된 것이다. 이 곳은 자희태후와 광서제가 머물며 정무를 처리하면서 각종 행사를 거행하거나 위국사절을 접견하던 곳으로 이화원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건물이다.
당초 이 소나무는 용을 닮아 꾸불 꾸불했는데 서태후가 봉황과 용이 같이 살면 봉황의 기가 달아난다고 하자 하루밤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소나무 주간을 베어버렸다. 지금의 가지와 잎은 봉황이 앉아있는 모양이다.
청지수(靑芝岫)
패가석(敗家石)이라고 불렀는데 역사자료에 의하면 명나라 시기에 관료였던 만종(米万鐘)이 북경의 방산(房山)에서 색이 푸르며 표면이 윤택한 바위를 발견하였는데 그 형태가 영지와 같았다. 미만종은 이 바위를 미씨 정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그 이동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교외에 방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후에 건륭제가 거액을 지출하여 이곳에 옮겨와 이름을 "청지수"라고 이름지었다. 종국 고대 정원에서 가장 큰 바위이다.
장랑(長廊)
궁전구를 벗어나 호수구역으로 가는 길에 낙수당을 지나면 728m에 달하는 긴 복도가 나타난다. 양쪽이 훤히 트인 누각식 복도가 아름답다. 홍루몽(紅樓夢) 삼국지(三國志) 서유기(西遊記) 등 중국고전소설 속 유명 장면들을 화려하게 그렸는데 무려 14,000장에 달한다. 장랑 밖으로 곤명호(昆明湖)를 바라보는 것도 일품이다.
서유기의 손오공, 저팔계
삼국지 유비, 관우, 장비
스모그 때문에 잘 안보이는 북경 중앙텔레비젼 방송탑
베이징 서3환 중로에 있는 중앙 텔레비젼 방송탑은 텔레비젼프로그램 방송과 오락,관광,음식업 등 기능을 갖고 있는 베이징의 대표 건축물이다.
청안방(淸晏艕) 서태후를 위하여 돌로 만든 배
대리석으로 만든 배로서 길이가 36m에 달하며 배위에는 2층 누각이 있다. 영원히 권력을 갖고 싶었던 서태후는 서태후는 순자(荀子)의 "수칙재주 수칙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 물(백성)은 배(황제)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뒤집어 버릴 수도 있다"를 두려워 하여 어떤 풍랑이나 물결에도 뒤집어 지지 않는 배를 만든 것이다. 물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4개의 지지대 위에 얹혀 있는 것이다. 헛되이 이화원을 만들고 영원이 살 것처럼 호사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청나라를 멸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십칠공교(十七孔橋)
청나라 건륭 15년 (1750)에 지어졌는데, 동쪽으로는 동쪽 제방과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남호도(南湖島)와 연결되어 있다. 전체 길이는 150m이고 중국 황실 정원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긴 다리이며, 이름은 다리의 17개 교각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다. 다리의 상층부와 난간 기둥 위에는 다양한 형태의 500여 마리의 돌사자가 새겨져있다. 다리 난간의 양쪽 끝에는 용맹스러운 모습을 갖춘 기이한 짐승 4마리를 돌로 조각하였는데, 이는 청나라 석조 예술품 중의 걸작이다.
동우(銅牛)
건륭 20년(1755)에 주조한 것으로 "금우(金牛)라고 불리고 있다. 꽃을 새긴 석조 좌석에 누워있는 자태가 생동감이 있어 마치 진짜 소와 같으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소의 등에는 건륭제가 친히 작성한 80자 전서체(篆書體) 명문(銘文)인 "金牛銘)"이 새겨져 있다.
베이징대학 : 차창 밖으로 찍은 사진인데 본관 건물이 학사모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