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1863~1949)의 주요 약력
1886~1891년 : 육영 공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
1889년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 저술해 세계의 지리와 문화 소개
1893년 : 1891년 출국 후 입국
1895년 : 명성 황후 시해 사건 이후 언더우드와 함께 고종 황제 침소에서 불침번
1897년 : 제국 보통학교(오늘날 교육대학) 교장
1898년 : 교육 담당 총 책임자로 임명
1903~1905년 : 관립중학교(현 경기고 전신) 교사로 재직
1905년 : 고종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 면담 시도했으니 실패, 루스벨트에게 친서 전달
1906년 : 귀국해 <한국평론>을 저술해 일본의 야만적 행위와 의도를 폭로
1907년 :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가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자 세계언론에 반환 촉구 기사 기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 고종 황제에게 특사를 파견하도록 건의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서 이준, 이위종, 이상설과 함께 일본의 부당성과 한국의 국권 회복 활동
일본에 의해 한국 입국이 거부되어 미국에 정착
이후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신문 기고, 강연 활동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1949년 8월 5일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양화진 묘지에 안장
cf) 헐버트의 묘비명
"나는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헐버트(1863 ~ 1949)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에 오다
1883년 미국에서 돌아온 보빙사(報聘使) 일행은 근대화를 위해 몇 가지 건의를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근대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여 정부에서는 육영 공원을 설치하기로 하였고 근대 학문을 가르칠 교사는 미국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건의로 설치된 우정총국의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이 일어나 육영 공원의 개교는 늦춰지다가 미국에서 3명의 교사가 도착하면서 1886년 9월에 개교를 합니다.
이때 미국에서 조선에 보내온 3명의 교사는 선교사로, 길모어(Gilmore,G.W.), 번커(Bunker,D.A.), 그리고 헐버트(Hulbert,H.B.)였습니다. 그는 1886년 7월 4일(미국 독립 기념일) 제물포에 입국하면서 조선에 첫발을 내딪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23살이었어요.
육영공원 교사로 영어를 가르치면서, 한글도 열심히 배워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1889년에는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라는 세계지리 교과서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도 사용하였답니다.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헐버트
헐버트가 집필하였다고 하는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의 모습
한국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돕다.
1891년 출국하였다가 1893년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한 헐버트는 다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배재학당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신식 인쇄기를 들여와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고, 다수의 한국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한국을 서양에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어요.
그리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도역정)’을 출판하는 등 많은 서적을 번역하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18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본이 조선을 더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죠. 헐버트 박사는 이를 목격하고 한국의 정치와 사회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궁에서 거주하며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창구 역할을 합니니다. 이에 고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 당시 헐버트는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춘생문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답니다.
한글 발전에도 관심을 가지다
한편, 그는 대한민국의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일찍부터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 그는 독립신문 발행에도 참여하여 띄어쓰기를 도입했어요. 그리고 주시경 선생과 함께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연구소를 만들도록 했어요.
미국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다.
1905년 러·일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노골적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위협했다. 이에 고종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어 거중 조정 조항(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제3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시 이를 서로 돕는다는 조항)을 삽입하였던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헐버트에게 친서 전달의 임무를 맡깁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직전 미국의 시어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여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 의거 을사늑약을 저지해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악관과 국무성은 헐버트를 외면하다가 을사늑약이 국제적으로 발표 된 후에야 헐버트를 만나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일본과 카쓰라·태프트 밀약이라는 우호적인 관계의 밀약을 맺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조선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헐버트는 이러한 미국의 처사에 대해 뉴욕타임스 등에 기고를 통해 루스벨트 행정부를 맹비난하면서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신이 한국을 일본에게 넘기는데 동의했다고 고백하게 만들었죠.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친구의 나라, 한국을 배신한 사람이다.”
- 1915년 12월 12일 뉴욕타임스의 헐버트 기고문 중
헤이그 특사를 돕는 일에 앞장서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로 인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등이 유명하다.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를 위한 특사였을뿐만 아니라 헤이그 특사 파견의 중심 인물이었어요.
1906년 다시 한국에 입국한 헐버트는 다양한 활동을 폈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고종은 만국 평화 회의를 앞두고 헐버트를 대한제국의 특사로 임명하여 한국과 조약을 체결하였던 프랑스, 독일, 미국 등 9개 국가를 방문하여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당시 일본도 한국이 헤이그에 누군가를 보낸다면 그는 헐버트라고 믿어 헐버트를 밀착 감시하였습니다.
미국인 헐버트는 시종 우리의 대한 정책을 방해하는 자이다...(중략)...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을 위해 무언가 할 것이다.”
- 일본 기밀문서 중
그 사이 헤이그 특사로 임명된 이준 열사는 서울을 빠져나갔습니다.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이위종을 만나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동하였습니다.
헐버트도 1907년 5월 미국에 간다는 구실 하에 일본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파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하였는데, 중간에 한국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죠.
헤이그에 도착해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를 도우면서 그 자신도 헤이그 평화 클럽(Peace Club)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어요. 그러나 한국은 외교권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만국 평화 회의에 참가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만국 평화 회의보에 실린 헤이그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에 대한 기사
미국에서 한국을 돕는 일에 앞장서다.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된 헐버트는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서재필, 이승만 등의 활동을 돕고, 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어요. 그는 미국 전역과 전세계의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해 여운홍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 헐버트가 다트머스대학 졸업 후 신상기록부에 남긴 글 중
1942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 자유 대회’에 참석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 있는 헐버트(왼쪽). 오른쪽은 이승만
다시 찾은 한국에서 영원히 잠들다.
한국이 광복을 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된 후, 헐버트 박사는 1949년 광복절을 앞두고 국빈 자격으로 초빙되어 그토록 갈망한 독립된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87세였어요. 한달 여의 긴 항해를 거쳐 내한한 긴 여정의 고단함 때문인지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한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남겼기에 그의 바램대로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거행하였으며,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195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949년 국빈 자격으로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헐버트 박사(인천항 도착 사진)
양화진에 있는 헐버트 박사 묘
헐버트 묘비는 1949년 8월 11일 영결식 때 제막한 것이다.
서거 당시 세워진 그의 묘비(묘비 왼쪽 부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라는 그의 유언을 새겨져 있습니다. 원래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묘비명을 쓸 수 있도록 비석을 비워 두었는데, 국내의 여러 가지 사정상 성사시키지 못했고 그 후 50년 동안 그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서거 50주년을 맞아 1999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의 휘호를 받아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묘비명을 새겼답니다.
일생을 한국을 위해, 노심초사 했을 헐버트님..
이 나라의 자유와 행복은 헐버트님의 대한민국 사랑의 실천으로 시작되었네요.
머리숙여 존경의 예를 표합니다..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던 것이군요.
특히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감사한 일이네요.
우리나라 사람보다 우리나라를 위해 더 큰일을 하셨네요..
감동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진정 얼마나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있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우리 나라 사람이 중동 지역쯤에 가서 봉사하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겠지요. 감동적입니다.
꼭한번방문해봐야겠네요
존경스럽네요.. 잊지말아야할 외국인입니다.
헐버트와 언더우드가 고종황제 침소에서 불침번을 섰음에도
영화 덕혜옹주에서 본 바로는 고종황제가 독살로 시해를 당하셨으니
일본의 악랄함이 참.... 어쨌든 헐버트 박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마음저리게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사민필지..새로운 것을 알았네요.
다른곳에서는 볼수없었던 자료들이 있네요.
볼수있는것부터 천천히 알아가야겠어요.
마음이 져려오네요 존경스럽습니다 ^^*
감사합니다
외국인이 한국독립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이런분들의 노력이 있었네요..감사합니다..
존경스럽네요
멋있네요
감사합니다
멋진분이네요.. 외국인도 독립운동에 동참했는데.. ㅠㅠㅠ
친일로 부와 권력을 대대로 누리며 갑질하며 살아온 온 이들 그들은 부끄러움을 알런지..
대단하신분이네요. 대한민국을 위해 해주신 모든것에 감사드립니다
헐버트는 1910년 일제에게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것은 39년 후인 1949년 7월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초청으로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러 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헐버트는 내한 일주일 만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대한민국은 호머 헐버트 박사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그가 묻힌 곳은 서울 마포의 양화진외국인묘지다. ‘한국의 친구’라는 묘비명과 함께 ‘고종의 비밀자금’을 수수께끼로 남기고 영면한 것이다.
고종의 또 다른 밀사, 헐버트 비밀자금(?)에도 션샤인
정말 감사한 분이시네요. 또 한명의 독립군의 이름으로 기억해야겠어요^^
이분이 쓴 책이 있나 찾아봐야 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헐버트 선생님께서 한국을 위해 해주신 고마운 일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한국의 문화와 사람들을 사랑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애써주신 헐버트 박사님의 공로를 기억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