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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궁궐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이다. 숙종대의 원본을 헌종 대에 증보한 것과 순종 대의 편찬본이 전하고 있다. 각 전각별 위치와 그곳에서 펼쳐진 중요한 정치·문화적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1759년(영조 35)에 영조가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면서 함께 수여한 옥인·죽책·교명이다. 옥인은 ‘왕세손인’이라 새긴 도장으로 왕세손의 지위를 상징한다. 죽책과 교명은 책봉 관련 문서로, 교명에는 왕세손에게 당부하는 훈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창덕궁 후원 옥류천 일대에서 정조와 규장각 관원들이 꽃구경과 낚시를 즐기면서 쓴 친필 시를 모아 연결한 시축詩軸 이다.
임금가마 / 輦
조선시대 왕이 탔던 대표적인 가마로 ‘연輦’이라고 한다. 주로 궁궐 밖의 먼 길을 행차할 때 사용되었다. 지붕 · 몸체 · 가마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가옥의 모양을 따랐다. 네 모서리에 용을 그린 둥근 기둥을 세우고 다시 둥근 기둥 사이에 각기둥을 세운 후 윗부분은 비워 두고 아랫부분에만 난간을 돌렸다. 몸체에 주칠을 한 후 난간부분에 금색으로 백택白澤, 기린麒麟 등 다양한 상상의 동물들을 그려 넣고 쇠에 입사入絲(은실 또는 금실을 장식으로 박는 것) 한 거멀장식으로 필요한 부분을 보강하였다. 몸체의 네 면에는 주렴을 드리우고 다시 휘장을 내려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지붕 네 모서리 봉황장식에 고리를 달아 유소流蘇를 고정시켜 내려뜨렸으며 가마채의 끝부분에는 도금한 용머리 장식을 끼워 마감하였다.
대한제국기에 새롭게 등장한 가마이다. 출입문을 비롯한 가마의 네 측면과 지붕 등을 봉황으로 장식하였고 지붕 네 모서리에 장식된 봉황의 부리에 긴 매듭인 유소를 매달아 내려뜨렸다 왕실여성가마 / 駕轎 조선시대 대비大妃 등 왕실의 여성 웃어른이 타던 가마이다. 여성용 가마이므로 ‘연’ 보다도 폐쇄적인 구도로 만들었다. 전체에 주칠을 하고 앞부분 출입문과 양 측면 창문 및 아래 난간 부분 등 모든 면에 꽃, 넝쿨과 박쥐, 칠보문, ‘수壽’자문 등을 부조로 장식하였다. 창은 겹창으로 만들었는데 미닫이형 내창은 덩굴문양을 투각하여 장식하였고 지붕에서부터 검정색 비단으로 휘장을 내려 창문을 막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한편 볕을 가릴 수 있게 하였다. 지붕은 각이 져서 위로 둥글게 솟아 있으며 꼭대기를 납작하고 둥근모양의 금속[보주寶珠]으로 마무리 하였다. 지붕 네 모서리의 봉황장식에는 붉은 유소를 달아 길게 내려뜨렸다. 가마채는 별도의 고리를 만들어 고정하였는데 끝부분은 용머리로장식하였다. 순종(재위 1907~1910년)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1894~1966년)가 탔던 어차이다. 순종황제의 어차는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사가, 순정효황후의 어차는 영국의 다임러(Daimler) 사가 제작하였다. 차체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황금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이 수놓인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 황실 어차로서 위엄과 화려함을 갖추었다. 차체는 목재이고 외부 도장은 칠漆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준다. 순종(재위 1907~1910년)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1894~1966년)가 탔던 어차이다. 순종황제의 어차는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사가, 순정효황후의 어차는 영국의 다임러(Daimler) 사가 제작하였다. 차체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황금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이 수놓인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 황실 어차로서 위엄과 화려함을 갖추었다. 차체는 목재이고 외부 도장은 칠漆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준
어좌 / 御座 어좌는 왕이 앉아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조회를 행하며 집무를 하는 좌석으로 옥좌玉座 또는 보좌寶座라고 한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정치를 행하였던 건물인 정전正殿(궁궐에서 왕이 신하들과 조회朝會를 하던 곳)과 편전便殿(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정사政事를 보는 곳) 중앙에 위치하였다. 이 어좌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가 금칠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현재 조선 초기 왕의 초상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전주 경기전 소장 태조 어진御眞에 그려진 어좌의 형태와 문양이 이것과 거의 동일하여 이러한 형태의 어좌가 조선 초기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이 위치하는 자리인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놓고, 어좌 위 건물 천장에는 보개寶蓋를 설치하여 하여 왕의 신성과 위엄을 갖추었다. 일월오봉도 병풍은 산봉오리, 해, 달, 시내, 소나무와 같은 영원성을 지닌 자연물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은 그림이며, 보개는 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을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한 천장 장식물이다. 이 상징물들은 조선왕조의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다. 평면해시계 / 地平日晷 그림자가 닿는 면이 수평면을 이루는 해시계이다. 큰 원을 문자판에 그리고, 그림자를 나타내기 위한 삼각형의 영표影標를 세웠다. 이 영표의 그림자가 원판 위에 드리워지면 그림자의 끝이 가리키는 점으로 시간을 읽을 수 있다. 오른쪽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해시계 제작자인 강윤이 1881년 6월 상순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왼쪽에는 ‘홍엽루의 주인이 취석옹을 위해 만들었다[紅葉少主人爲翠石翁試製]’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아래쪽에는 한양의 표준 위도인 ‘37도 39분 15초’를 새겨 놓았다.
오목해시계 / 仰釜日晷 청동으로 만든 반구형의 해시계로 ‘솥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으로 앙부일구라고 불렀다. 앙부일구는 해그림자를 받는 시반時盤과 해그림자를 나타내는 영침影針이라는 바늘로 이루어졌다. 안쪽 바닥 시반에는 은입사로 시각선을 그렸고, 영침은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시반의 왼편에는 동지부터 하지(겨울→여름), 오른편에는 하지부터 동지(여름→겨울)까지의 24절기가 13줄의 가로선으로 새겨져 있다. 동지에는 해그림자가 가장 길고 하지에는 가장 짧으므로 영침의 그림자는 동지에 가장 바깥쪽 계절선에, 하지에는 가장 안쪽 계절선에 위치한다. 시각선은 해가 뜨는 묘시卯時(5~7시)부터 해가 지는 유시酉時(17~19시)까지 7개가 있으며, 각 시각선 사이에는 1각(약 15분)을 뜻하는 8등분된 선이 그려져 있다. 세종대에 처음 만들어져 사람의 통행이 많은 서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거리에 설치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 12지신의 그림을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고 한다.
왕실에서만 사용된 접이용 의자로, 이동이 용이하여 행사 때에 주로 쓰였다. 표면에는 붉은 칠을 하였고 손잡이와 의자 등에 여러 가지 문양을 장식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붉은 칠을 황칠로 고쳐 사용하였다.
일월오봉도 / 日月五峯屛
궁궐 정전正殿의 어좌 뒤편이나 왕의 초상인 어진이 모셔지는 진전眞殿, 임금이 잠깐이라도 자리하는 장소에 펼쳐 왕권을 상징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흉례의식 및 진연進宴이나 진찬進饌과 같은 각종 연회에서 왕비나 왕자 뒤편에 설치하는 등 각종 궁중의식에서 포괄적으로 사용된 그림 병풍이다.
화면에는 『시경詩經』「소아小雅」 ‘천보天保’에서 왕의 덕을 기리고자 제시하는 산봉우리, 해, 달, 시내, 소나무와 같은 자연물을 파노라마처럼 펼치고 있다. 영원성을 지닌 소재들을 오채五彩(오방색五方色으로 청靑?적赤?황黃?백白?흑黑을 의미)를 사용하여 그리면서 보색과 명도의 대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왕실의 신성한 권위와 영원함을 더욱 직접적이고도 명확한 이미지로 나타내었다. 남북을 축으로 한 좌우대칭의 구성은 궁중장식화로서 안정감과 질서, 권위와 신성함을 부여해준다.
일월반도도 팔첩병 / 日月蟠桃圖八疊屛
2좌의 4첩병풍이 세트를 이루고 있는 일월반도도팔첩병(日月蟠桃圖八疊屛)이다. 십장생의 하나인 복숭아나무는 고사에 삼천 년에 한 번 꽃이 피고 삼천 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리는 것으로, 동방삭이 이것을 먹고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로 인해 반도도(蟠桃圖)는 불로장생하면서 이상적인 세계에서 살고자 하는 인간적 욕망이 신선 사상을 배경으로 펼쳐진 그림이다. 왕을 상징하는 붉은 해, 한 개만 먹어도 천수를 누린다는 천도와 청록의 바위산, 넘실거리는 물굽이, 억센 바위 등을 화려한 채색으로 그린 궁중장식화로 표현 기법이 탁월하며 구도, 화법 등이 모두 뛰어나다. 일월반도도팔첩병(日月蟠桃圖八疊屛)을 구성하는 2좌의 4첩병풍을 비교해 보면 두 그림이 서로 대칭을 이루는 형태로서 화면에 그려진 산봉우리와 복숭아 나무가 각각 좌측과 우측에 치우치게 배치되고 가운데에 각각 붉은 해와 흰색의 달이 떠 있다. 작가는 알 수 없으나 궁중용 장식화이기 때문에 궁중의 화사(畵事)를 담당했던 화원의 작품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월반도도 / 日月蟠桃圖
일월반도도는 넘실거리는 바다 저 너머로 해와 달이 떠오르고 탐스런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진한 채색과 단순한 형태로 그린 그림 병풍이다.
궁중의 혼례나 잔치 등 궁중행사 때 펼쳤던 십장생도 병풍에 등장하는 10가지 소재 가운데 일부를 택해서 꾸민 것이다. 소재들의 전체적 구도는 일월오봉도와 유사한데 다만 양옆에 소나무 대신 복숭아 나무가 자리하는 점이 다르다.
반도蟠桃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불사不死의 여왕 서왕모西王母의 정원에서 자란다는 과일로 왕실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01년(광무 5) 선원전을 수리하고 칠조七朝의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한 기록인 『영정모사도감의궤』(1901)에 4폭 해반도병海蟠桃屛 2좌를 제작한 내용과 이를 그린 화원 10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이 병풍과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영원한 소원인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해·구름·산·물·소나무·거북·사슴·학·복숭아·불로초(영지) 등 열 가지를 소재로 그린 십장생도 병풍이다. 왕실 가족의 무병장수와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궁중의 중요한 행사 때 왕비나 왕세자의 자리 뒤쪽에 펼치거나 국혼이나 회갑연 등 경사스런 잔치에 사용하였다
정조가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이 있는 경기도 화성에 참배한 후 개최한 행사 장면을 여덟 폭에 나누어 그린 병풍이다. 병풍의 내용은 명륜당 참배[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 과거시험[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혜경궁 환갑잔치[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경로잔치[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야간군사훈련[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활쏘기와 불꽃놀이[득중정어사도 得中亭御射圖], 한양으로 돌아오는 행렬[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환궁길 한강 배다리[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등 진행된 순서로 그림을 구성하였다.
시대 : 조선말기
고대부터 동아시아에서 사용해 온 황도와 천구의 적도 주변에 있는 28개의 별자리 중 14개의 별자리를, 그 다음에 원형의 천체 중심점을 왕좌성王座星인 북극성을 기준으로 12등분한 천문도를 그려 책으로 엮은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 국보 제228호
목판본 별자리 그림 / 木版本天象列次分野之圖
1571년(선조 4)에 제작된것으로 태조대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石에 새겨져 있는 천문도를 목판에 새겨 종이에 찍어 낸 것이다.지도 가운데에 지름 76cm의 삼중원이 그려져 있고, 우리나라에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그 가운데 위치해 있다. 점의 크기는 별빛에 따라 구별한것으로, 세계 최초의 천문도인 남송대의 <순우천문도>를 비롯한 전통적인 천문도들에서 별의 크기를다르게 그리지 않았던 것과 차이가 있다. 성도 주변에는 각종 천문 자료들이 적혀 있는데, 이는 당시 천문 역법의 중요한 표준 상수를제시하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이처럼 조선시대 국가의 표준 천문 자료를 총망라한 것으로, 중국의 하늘이 아닌 조선의 하늘을 담고 있는 수준 높은 천문도이다.이 목판본은 1687년(숙종 13)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보물 제837호)을 복각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한 옥인 / 世孫(正祖)冊封玉印
영조가 1759년(영조 35)에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면서 내린 옥인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이나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을 책봉할 때 어보, 어책, 교명을 함께 하사하였다. 어보는 왕?왕비?왕세자 등 왕실의 도장으로 재질에 따라 금으로 만들면 금보, 옥으로 만들면 옥보로도 불렀다. 지위에 따라 왕비의 경우 금보金寶, 왕세자 이하를 책봉할 때는 옥인玉印이 하사되었다.
정조는 조선 제 22대 왕으로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이다.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고, 25세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뒤에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이어 왕통을 이었다.
측우대 / 昌德宮測雨臺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이다. 측우기의 받침대인 측우대의 표면에는 제작과 설치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에 따르면 1782년(정조 6) 정조가 가뭄이 극심하자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 때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측우기의 제작 규정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측우기를 서운관書雲觀과 전국의 군현에 설치한 사실과 영조 때 창덕궁·경희궁을 비롯하여 전국에 설치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다.자격루를 제작한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441년 4월 29일《세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세종의 아들이었던 세자 문종이 구리로 그릇을 만들어 그릇에 고인 빗물의 양을 자로 재는 방법을 고안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441년 8월 18일 《세종실록》에는 당시에 불완전했던 강우량의 측정법을 개선하기 위해 원통형 철기를 주조하여 사용하였다는 측우기를 만든 목적과 방법 등을 잘 기록하고 있다. 원래의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졌고, 현재의 측우기는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측우기인 보물 제561호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를 복원한 것이다.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역할을 하였던 기구로 ‘혼천의渾天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왕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주로 해시계와 물시계를 이용하였는데 특히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기 때문에 24시간 작동이 가능하였다. 조선 세종 때 삼국시대부터 이용하던 물시계의 시각 알림 장치를 자동화하고 ‘스스로 치는 시계’라는 뜻인 자격루를 제작하였다. 세종 임금의 명으로 장영실이 완성하였으며, 1434년 경회루 남쪽 보루각報漏閣이라는 전각에 설치하여 국가의 표준시계로 삼았다. 이 시계는 도성의 성문을 열고 닫는 인정人定(통행금지 시각, 밤 10시경)과 파루罷漏(통금해제 시각, 새벽 4시경), 오정午正(낮 12시)을 알려주는 데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양 사람들에게 아침·점심·저녁 때를 알려 주어 생활의 리듬을 잡아 주는 등 조선시대 사람들의 표준 시계가 되었다.
물을 마시는데 사용하는 그릇으로, 복숭아 반쪽 형태의 몸체에 줄기와 잎사귀를 양각으로 붙이고 칠보 안료로 채색하였다. 가지 끝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제례를 마친 후 벌어지는 음복연飮福宴 때 제왕의 술을 담는 제기로 사용되었다. 항아리 모양이며 표면에는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4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 두 마리가 승천하는 모습을 돋을새김하였다
봄과 여름 제사에 술을 담기 위한 제기이다. 코끼리 모양 술동이는 앙제盎齊[흰술]와 명수明水[맑은 물]를, 소 모양 술동이는 예제醴齊[단술]와 명수明水[맑은물]를 담는 제기로 준소상 차림에 사용되었다.
편종 / 編鐘
크기는 같고 편종 / 編鐘종의 두께를 달리하도록 제작하였다. 종의 두께가 얇으면 소리가 낮고 두께가 두꺼우면 소리가 높다. 12율律(한 옥타브 안의 열두 가지 음계)과 한 옥타브 높은 4청성淸聲의 음역을 갖는다. 두 개의 사각대[방대方臺] 위에 종소리의 웅장함을 상징하는 사자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며, 이 위에 공작 다섯 마리를 조각하여 끼운다. 이 틀에 16개의 종을 위 아래 두 단으로 8개씩 나누어 매다는데, 마주보고 서서 뿔망치[각퇴角槌]로 종의 아랫부분 정면에 있는 둥근 부위[隧]를 쳐서 소리를 낸다. 오른쪽 아래부터가장 낮은 음인 황종으로 시작하여 오른쪽 위의 가장 높은 음인 청협종의 순서로 한다. 궁중음악의 이론부터 실제까지 자세하게담은 《악학궤범》(1493년)에 따르면 아악의 경우 아랫단의 황종부터 임종까지의 종은 오른손으로 치고 윗단의 이칙부터 청협종까지의 종은 왼쪽으로 친다.제례에 쓰는 편종은 그림 없이 검소하게 만들었으며, 잔치에 쓰는 편종은 화사하고 아름답게만들었다. 나무틀 양쪽 용머리에서 아래로 늘이는 유소 역시 제례에 쓰는 것은 무명실로 만들고, 잔치에 쓰는 것은 색실로 만들었다
특종 : 큰 종 한 개로 구성된 악기로 음악을 시작할 때 연주한다. 장식은 두 개의 사각대 위에 사자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나무틀 위에는 세 마리의 공작을 세웠다. 제례악에서 박을 치고 난 다음에 특종을 한 번 치고, 그 다음 축을 세 번, 북을 한 번 치는 것을 세 차례 반복하고 다시 특종을 한 번 치고 나면 음악이 시작된다.
특경 : 돌로 된 큰 경磬 한 개를 틀에 매단 악기로 음악을 그칠 때 연주한다. 두 개의 사각대 위에 흰 기러기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봉황머리를 장식하였다. 특종과 같이 나무틀 위에는 세 마리의 공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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