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22일 무술 2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박연·김예몽·유성원을 불러 내약방에서 의학 서적을 7일간 상고하여 보게 하다
부윤(府尹) 박연(朴堧)·응교(應敎) 김예몽(金禮蒙)·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을 불러 내약방(內藥房)에서 의학에 관한 서적을 7일간 상고하여 보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61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의약(醫藥)
9.세종실록 163권, 부록 편수관 명단
부록 / 편수관 명단
○ 경태(景泰)001) 3년 임신(壬申) 3월에 춘추관(春秋館)이 어명(御命)을 받아 편찬(編纂)을 시작하여 경태 5년 갑술(甲戌) 3월에 이를 끝내었다.
찬수관(纂修官) 【전후관(前後官)을 아울러 기록한다. 】
감관사(監館事)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영집현전 경연사(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事)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신(臣) 정인지(鄭麟趾)
지관사(知館事)
자헌 대부 예조 판서 지경연사(資憲大夫禮曹判書知經筵事) 신(臣) 김조(金銚)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자헌 대부 병조 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경연사 겸 성균 대사성(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資憲大夫兵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事兼成均大司成) 한산군(韓山君) 신(臣) 이계전(李季甸)
자헌 대부 이조 판서 집현전 제학 동지경연사(資憲大夫吏曹判書集賢殿提學同知經筵事) 신(臣) 정창손(鄭昌孫)
동지관사(同知館事)
가선 대부 이조 참판 집현전 제학(嘉善大夫吏曹參判集賢殿提學) 신(臣) 신석조(辛碩祖)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가선 대부 이조 참판 집현전 제학(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嘉善大夫吏曹參判集賢殿提學) 영성군(寧城君) 신(臣) 최항(崔恒)
편수관(編修官)
통정 대부 집현전 부제학 지제교 경연 시강관(通政大夫集賢殿副提學知製敎經筵侍講官) 신(臣) 박팽년(朴彭年)
통정 대부 예조 참의(通政大夫禮曹參議) 신(臣) 어효첨(魚孝瞻)
통정 대부 집현전 부제학 지제교 경연 시강관(通政大夫集賢殿副提學知製敎經筵侍講官) 신(臣) 하위지(河緯地)
수충 정난 공신 사간원 좌사간 대부 지제교(輸忠靖難功臣司諫院左司諫大夫知製敎) 신(臣) 성삼문(成三問)
기주관(記注官)
통훈 대부 행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경연 시독관 겸 지승문원사(通訓大夫行集賢殿直提學知製敎經筵侍讀官兼知承文院事) 신(臣) 신숙주(申叔舟)
통훈 대부 행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경연 시독관(通訓大夫行集賢殿直提學知製敎經筵侍讀官) 신(臣) 조어(趙峿)
중직 대부 수 판전의감사(中直大夫守判典醫監事) 신(臣) 김맹헌(金孟獻)
중직 대부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경연 시독관(中直大夫集賢殿直提學知製敎經筵侍讀官) 신(臣) 이석형(李石亨)
중직 대부 지승문원사(中直大夫知承文院事) 신(臣) 김예몽(金禮蒙)
봉정 대부 수 예문관 직제학(奉正大夫守藝文館直提學) 신(臣) 신전(愼詮)
봉정 대부 직집현전 지제교 경연 검토관(奉正大夫直集賢殿知製敎經筵檢討官) 신(臣) 양성지(梁誠之)
봉정 대부 성균 사예(奉正大夫成均司藝) 신(臣) 원효연(元孝然)
봉렬 대부 수 예문관 직제학(奉列大夫守藝文館直提學) 신(臣) 김득례(金得禮)
봉렬 대부 수 제용감 정(奉列大夫守濟用監正) 신(臣) 윤사윤(尹士昀)
봉렬 대부 직예문관(奉列大夫直藝文館) 신(臣) 이보흠(李甫欽)
조산 대부 집현전 응교 지제교 경연 검토관(朝散大夫集賢殿應敎知製敎經筵檢討官) 신(臣) 이예(李芮)
선절 장군 용양 시위사 좌령 호군 겸 부지승문원사(宣節將軍龍驤侍衛司左領護軍兼副知承文院事) 신(臣) 김인민(金仁民)
조봉 대부 수 직집현전 지제교 경연 검토관(朝奉大夫守直集賢殿知製敎經筵檢討官) 신(臣) 유성원(柳誠源)
조봉 대부 수 성균 사예(朝奉大夫守成均司藝) 신(臣) 김지경(金之慶)
통덕랑 성균 직강 겸 동부 유학 교수관 승문원 교리(通德郞成均直講兼東部儒學敎授官承文院校理) 신(臣) 김한계(金漢啓)
통선랑 수 성균 사예(通善郞守成均司藝) 신(臣) 권효량(權孝良)
통선랑 집현전 교리 지제교 경연 부검토관(通善郞集賢殿校理知製敎經筵副檢討官) 신(臣) 이극감(李克堪)
통선랑 집현전 부교리 지제교 경연 부검토관(通善郞集賢殿副校理知製敎經筵副檢討官) 신(臣) 윤기견(尹起畎)
봉직랑 수 이조 정랑 겸 승문원 교리(奉直郞守吏曹正郞兼承文院校理) 신(臣) 조근(趙瑾)
봉직랑 수 사간원 우헌납 지제교(奉直郞守司諫院右獻納知製敎) 신(臣) 최사로(崔士老)
봉직랑 수 성균 직강(奉直郞守成均直講) 신(臣) 이함장(李諴長)
봉직랑 수 성균 직강(奉直郞守成均直講) 신(臣) 최한경(崔漢卿)
기사관(記事官)
통선랑 행 성균 주부 겸 중부유학 교수관(通善郞行成均注簿兼中部儒學敎授官) 신(臣) 김명중(金命中)
봉훈랑 집현전 부교리 지제교 경연 부검토관(奉訓郞集賢殿副校理知製敎經筵副檢討官) 신(臣) 서강(徐岡)
봉훈랑 교서 교리 겸 승문원 교리(奉訓郞校書校理兼承文院校理) 신(臣) 성희(成熺)
봉훈랑 행 이조 좌랑(奉訓郞行吏曹佐郞) 신(臣) 김필(金㻶)
봉훈랑 행 공조 좌랑(奉訓郞行工曹佐郞) 신(臣) 이익(李翊)
봉훈랑 행 승문원 부교리(奉訓郞行承文院副校理) 신(臣) 이효장(李孝長)
승의랑 승문원 부교리(承議郞承文院副校理) 신(臣) 홍약치(洪若治)
승의랑 승문원 부교리(承議郞承文院副校理) 신(臣) 강미수(姜眉壽)
승의랑 행 훈련 주부(承議郞行訓鍊注簿) 신(臣) 유자문(柳子文)
승훈랑 성균 주부 겸 중부유학 교수관(承訓郞成均注簿兼中部儒學敎授官) 신(臣) 이계전(李季專)
승훈랑 성균 주부 겸 서부유학 교수관(承訓郞成均注簿兼西部儒學敎授官) 신(臣) 이문경(李文炯)
진용 교위 우군 섭부사직 겸 승문원 부교리(進勇校尉右軍攝副司直兼承文院副校理) 신(臣) 이유의(李由義)
선교랑 수 성균 주부 겸 남부유학 교수관(宣敎郞守成均注簿兼南部儒學敎授官) 신(臣) 전효우(全孝宇)
선무랑 통례문 봉례랑(宣務郞通禮門奉禮郞) 신(臣) 이윤인(李尹仁)
선무랑 도관 주부(宣務郞導官注簿) 신(臣) 김용(金勇)
선무랑 행 예문 봉교(宣務郞行藝文奉敎) 신(臣) 한서봉(韓瑞鳳)
무공랑 예문 봉교(務功郞藝文奉敎) 신(臣) 박찬조(朴纘祖)
선무랑 행 예문 대교(宣務郞行藝文待敎) 신(臣) 윤자영(尹子濚)
계공랑 행 예문 대교(啓功郞行藝文待敎) 신(臣) 이제림(李悌林)
통사랑 예문 대교(通仕郞藝文待敎) 신(臣) 권윤(權綸)
계공랑 행 예문 검열(啓功郞行藝文檢閱) 신(臣) 민정(閔貞)
통사랑 행 예문 검열(通仕郞行藝文檢閱) 신(臣) 권이경(權以經)
통사랑 행 예문 검열(通仕郞行藝文檢閱) 신(臣) 김겸광(金謙光)
승사랑 행 예문 검열(承仕郞行藝文檢閱) 신(臣) 이문환(李文煥)
종사랑 예문 검열(從仕郞藝文檢閱) 신(臣) 최한보(崔漢輔)
【태백산사고본】 67책 16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14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註 001]
경태(景泰) :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조선 문종(文宗) 2년 곧 A.D.1452
10.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6일 무신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이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신미에게 승직을 제수하다
이채(李寀)를 흥록 대부(興祿大夫) 의성군(誼城君)으로, 박종우(朴從愚)를 성록 대부(成祿大夫)로, 정종(鄭悰)을 숭덕 대부(崇德大夫)로, 김종서(金宗瑞)를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정분(鄭苯)을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 판이조사(兼判吏曹事)로, 최사의(崔士儀)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이천(李蕆)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정인지(鄭麟趾)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권맹손(權孟孫)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선(李渲)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양(李穰)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황치신(黃致身)·김청(金聽)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이견기(李堅基)를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안진(安進)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이사철(李思哲)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기건(奇虔)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안완경(安完慶)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선제(李先齊)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이사순(李師純)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황수신(黃守身)·김자옹(金自雍)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조석강(趙石岡)·성승(成勝)·신자근(申自謹)·박호문(朴好問)·유익명(兪益明)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이심(李審)을 인순부 윤(仁順府尹)으로, 임효신(任孝信)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이계전(李季甸)을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김완지(金俒之)를 좌승지(左承旨)로, 정이한(鄭而漢)을 우승지(右承旨)로, 정창손(鄭昌孫)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김문기(金文起)를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숭지(李崇之)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윤은(尹殷)·이종목(李宗睦)·김원(金元)·박효함(朴孝諴)·성급(成扱)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이영구(李英耉)를 사헌 지평(司憲持平)으로, 조서안(趙瑞安)을 황해도 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로, 신숙청(辛俶晴)을 경상 우도 병마 절제사(慶尙右道兵馬節制使)로, 남우량(南佑良)을 경상좌도 수군 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로, 이사임(李思任)을 경상우도 수군 처치사(慶尙右道水軍處置使)로, 권맹경(權孟慶)을 전라도 수군 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로, 유강(柳江)을 회령 절제사(會寧節制使)로, 김유양(金有讓)을 판의주목사(判義州牧事)로, 김수연(金壽延)을 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事)로 삼고, 또 중[僧] 신미(信眉)를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 존자(慧覺尊者)로 삼고, 금란지(金鸞紙)에 관교(官敎)를 써서 자초폭(紫綃幅)으로 싸서 사람을 보내어 주었는데, 우리 국조(國朝) 이래로 이러한 승직(僧職)이 없었다. 임금이 이 직을 주고자 하여 일찍이 정부(政府)에 의논하고, 정부에서 순종하여 이의가 없으므로 마침내 봉작(封爵)하게 되었는데,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박종우(朴從愚)가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불사(佛事)를 의논할 때, 말이 매우 간절하고 정직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박종우가 무엇을 안다고 이같이 말하는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부의 직책을 파하고 정1품을 주었다. 정분(鄭苯)은 반차가 정인지(鄭麟趾)의 아래에 있었는데, 뛰어서 찬성(贊成)을 제수하니, 사론(士論)이 좋지 못하였다. 이천(李蕆)은 무예(武藝)로 일어나 성품이 매우 정밀 교묘하여, 오래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가 되었는데, 뇌물을 많이 받아들이므로 세종(世宗)께서 듣고 드디어 제조(提調)를 갈았으나 무릇 교묘한 일에 관계되는 것은 이천에게 명하여 감독 주장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우가 높았으며, 세종(世宗)과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산릉(山陵)을 쓸 때에 모두 제조가 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승진하여 1품에 제수되었다. 이사철(李思哲)은 오래 도승지(都承旨)로 있었는데, 뛰어서 가정(嘉靖)을 제수하였고, 김원(金元)은 신빈(愼嬪)의 아비인데, 특히 병조(兵曹)에 명하여 입직(入直)은 시키지 말고 순작(巡綽)으로 수반(隨班)하게 하였다. 박효함(朴孝諴)과 윤은(尹殷)은 불사(佛寺)를 영선(營繕)한 공로로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또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山陵) 세 도감(都監)과 수기(壽器)를 맡은 자에게 모두 한 자급(資級)씩 올려 주었다. 임금이 장차 세자(世子)를 봉하려고 하여 황보인(皇甫仁)을 사(師)로 삼고, 정갑손(鄭甲孫)·권맹손(權孟孫)·허후(許詡)·이선제(李先齊)를 빈객(賓客)으로 삼고, 또 박팽년(朴彭年)을 보덕(輔德)으로 삼고, 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을 필선(弼善)으로 삼고, 이개(李塏)·양성지(梁誠之)를 문학(文學)으로 삼고, 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을 사경(司經)으로 삼고, 서강(徐岡)·최선복(崔善復)을 정자(正字)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25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왕실-경연(經筵) / 인물(人物)
11.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15일 정사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직제학 박팽년이 신미 칭호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승지와 함께 불공한 문구를 따지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박팽년(朴彭年) 등이 상서하기를,
"신 등은 대간(臺諫)에서 신미(信眉)의 일을 논하여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듣고,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무릇 호(號)를 가하는 것은 존숭하기 때문입니다. 제왕의 공덕이 있으면 올리고, 장상(將相)이 공훈이 있으면 주는 것으로, 그 예가 대단히 성한 것입니다. 후세의 인주(人主)가 불법을 존숭하고 혹 망령되게 중에게 준 자가 있으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간흉 교활한 난신 적자의 무리가 남의 집과 나라를 패망시킨 것이 많습니다. 신미(信眉)는 간사한 중입니다. 일찍이 학당(學堂)에 입학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음란하고 방종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학도들이 사귀지 않고 무뢰한으로 지목하였습니다. 그 아비 김훈(金訓)이 죄를 입게 되자, 폐고(廢錮)517)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몰래 도망하여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 아비가 늙고 병든 몸으로 그의 속이고 유혹하는 말을 믿고 일찍이 술과 고기를 끊었다가, 하루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습니다. 때마침 여름으로 더운 날인데, 이 중이 그 아비에게 참회(懺悔)하고 백 번 절할 것을 권하여 마침내 이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만일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하면 이것이 진실로 아비를 죽인 자입니다. 대개 이 중은 참을성이 많고, 사람을 쉽게 유혹하며, 밖으로는 맑고 깨끗한 듯이 꾸미고, 속으로 교활하고 속이는 것을 감추어, 연줄을 타서 이럭저럭하여 궁금(宮禁)에 통달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인군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치는 큰 간인(姦人)입니다. 만일 큰 간인이 아니면, 어찌 선왕을 속이고 전하를 혹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겠습니까? 만일 이 거조가 선왕께서 나왔다고 한다면, 선왕이 이 중을 아신 것이 하루가 아닌데, 일찍이 이 의논을 내지 않으시었으니, 어찌 공의(公議)가 있는 일은 인주(人主)도 경솔히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어찌 감히 선왕도 경솔히 하지 못한 일을 단행하며 의심하지 않습니까? 비록 선왕이 이미 이 일을 하시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공의(公議)로 고치는 것이 대효(大孝)가 되는 데에 해롭지 않습니다. 하물며 선왕이 감히 미처 하지 못한 것을 갑자기 호를 주어 그 책임을 선왕에 돌리는 것이 가합니까? 인주는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껴야 하고, 우국 이세(祐國利世)란 칭호는 비록 장상(將相)과 대신(大臣)에게 주더라도 오히려 조정과 함께 의논하여 그 가부를 살핀 뒤에 주어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노간(老奸)이겠습니까? 그가 우국 이세(祐國利世)하지 못할 것은 사람마다 다 알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께서도 스스로 믿으실 것입니다. 어째서 감히 무익한 일을 하여 만대의 웃음거리를 만드십니까? 하물며 전하께서는 새로 보위(寶位)에 올라서 안팎이 촉망(屬望)하고 있으니, 마땅히 하루하루를 삼가서 한 호령을 내고 시행하는 것을 모두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오기를 기약하여, 조종(祖宗)의 사업을 빛내고 키워야 하는데, 어째서 간사한 말에 빠지고 간사한 중에 유혹되어, 지극히 높은 칭호를 주어 그 도(道)를 고취(鼓吹)하십니까?
옛부터 인군이 처음에는 정대하여 말할 만한 것이 없으나, 재위한 지 오래 되어 가다듬는 정신이 조금 풀리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틈을 타서 끝을 마치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지 겨우 두어 달이 넘었고, 산릉(山陵)이 겨우 끝나고 정사를 하는 처음에 제일 먼저 이 일을 거행하여서, 시초가 이미 크게 바르지 못하니 그 끝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민의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서 사라집니다. 이 칭호가 한 번 나오자 그 무리가 은총을 빙자하고 독수리처럼 떠벌리고 과장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이 또한 존자(尊者)로 봉한 것을 보고 이것이 진짜 부처라 하고 미연히 쏠려 가니, 얼마 안 가서 이적(夷狄)의 금수(禽獸)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정(邪正)의 소장(消長)과 풍속의 이역(移易)과 국가 존망의 기틀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으니, 일에 무엇이 이보다 더 크기에 조금도 경동(警動)하고 반성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지금 북쪽 오랑캐가 충만하여 중원(中原)이 어지럽고, 서북의 야인(野人)이 일찍부터 우리에게 감정이 있으면 지금 이미 연결되었으니, 하루아침에 앞잡이가 되어 크게 침입하면, 그 변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바로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가다듬고, 용도를 절약하고, 군량을 저축하기에 황황급급해야 하고,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을 날인데, 어찌 한가히 편안하게 놀며 허무(虛無)에 뜻을 둘 때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확연(廓然)히 강한 결단을 돌이키어 간사한 자를 버리기를 의심하지 말고, 급히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고, 먼 변방에 물리쳐 두어서 시초를 바루는 도를 삼가시고, 일국 신민의 여망에 부합하게 하소서."
하였다. 소(疏)가 올라오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상소 안에 말한 선왕을 속이고 전하를 미혹하게 하였다는 것은, 속인 것은 무슨 일이며, 미혹한 것은 또 무슨 일인가? 또 선왕을 속일 때에는 어째서 간하지 않고, 지금에야 이런 말을 하는가? 또 신미(信眉)가 아비를 죽였다는 말은 어디에서 들었는가? 이 무리를 불러서 딴 곳에 두고, 하나하나 추궁하여 물어서 아뢰어라."
하였다. 곧 불러 물으니, 박팽년(朴彭年)이 말하기를,
"이 중이 심히 간사합니다. 선왕으로 하여금 존숭하여 봉작(封爵)을 허락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선왕을 속인 것이요, 또 전하로 하여금 존숭하여 봉작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전하를 미혹한 것입니다. 선왕 때에는 비록 높이고 믿기는 하였으나 따로 봉숭(封崇)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일찍이 의논하여 아뢰지 않은 것이요, 전하에 이르러 첫 정사에 특별히 작호(爵號)를 주고 성대한 예를 거행하므로, 감히 천위(天威)를 무릅쓰고 아뢴 것입니다. 또 신미(信眉)의 아비 김훈(金訓)이 영동현(永同縣)에 살고 있었는데, 신미가 일찍이 김훈에게 권하여 술과 고기를 끊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김훈이 현령(縣令) 박여(朴旅)를 가서 보니, 박여가 말하기를, ‘늙은이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는다.’ 하고 김훈에게 고기를 권하였습니다. 김훈이 먹고 돌아와서 신미에게 말하니, 신미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거의 부처가 다 되었는데, 오늘 고기를 먹었으니 일은 다 틀렸습니다. 청컨대 참회하여 부처님께 백 번 절하소서.’ 하니, 김훈이 믿고 참회례를 행하여 팔뚝을 태우며 백 번 절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신이 이 말을 춘추관(春秋館) 여러 관원에게 들은 지가 오랩니다. 이개(李塏)·양성지(梁誠之)·이예(李芮)·허조(許慥) 등의 말이 같았고, 이승소(李承召)·송처검(宋處儉)·서거정(徐居正)·서강(徐岡) 등의 말도 또한 특히 같습니다. 다만 이 말을 근일에 유성원(柳誠源)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또한 같았습니다. 다만 이 말은 김윤복(金閏福)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이 이것을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여섯 승지(承旨)를 함원전(含元殿)에서 인견하고 소(疏) 중의 불공한 말을 일일이 지적하고, 또 우승지(右承旨) 정이한(鄭而漢)과 전명(傳命)하는 내시 김득상(金得祥)으로 하여금 이 소를 가지고 정부 당상(政府堂上)의 집에 가서 의논하여 오게 하였는데, 황보인(皇甫仁)이 의논하기를,
"소(疏)의 말 가운데 누(累)가 선왕에게 미친 것이 있어, 비록 불공한 데에 관계되었지만, 자고로 인신(人臣)이 감히 말하고 극진히 간하자면 박절(迫切)하지 아니할 수 없어 그러한 것이니, 비록 이보다 지나치더라도 또한 책할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간신(諫臣)의 벌을 논하는 것은 정치 체제에 어떠합니까?"
하였다. 나머지 여러 상신(相臣)의 의논도 대략 모두 같았다. 정이한 등이 돌아와 아뢰었다. 처음에 집현전(集賢殿)에서 상소하기를 의논할 때 직제학(直提學) 최항(崔恒)과 직전(直殿) 이석형(李石亨)·성 삼문(成三問) 등은 그 의논에 따르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6책 254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 인물(人物)
[註 517]
폐고(廢錮) :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함
12.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16일 무오 3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집현전 응교 이개 등 9인이 박팽년과 함께 벌받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이개(李塏) 등 9인이 상서하기를,
"어제의 일은 신 등과 박팽년(朴彭年)의 죄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박팽년의 고신만을 거두고 신 등은 직에 나오게 하시니, 신 등은 뻔뻔스럽게 직(職)에 나올 수 없습니다. 빌건대 신 등의 직을 파면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개(李塏)·이예(李芮)·이승소(李承召)가 또 상서하기를,
"신 등이 여러 번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여, 직을 면하기를 빌었으나, 아직 윤허를 얻지 못하고, 지금 또 천청을 더럽히니 황공 운월(隕越)하기 그지없습니다. 신 등이 반복하여 생각하니, 무릇 인신(人臣)이 임금에게 올리는 말은 반드시 중정(中情)에서 나오는 것이요, 본래부터 남의 말에 끌려서 구차히 같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 등이 처음에 박팽년과 더불어 상소문을 의논할 때 진실로 의견을 같이한 것인데, 다만 박팽년의 직차(職次)가 머리에 있기 때문에 홀로 그 책망을 받았으니, 직의 고하(高下)로 죄를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이 감히 천위(天威)를 무릅쓰고 두 번 세 번 말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박팽년이 죄를 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혐의스러운 것이 있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또 신 등은 생각건대, 인주(人主)가 그 사람의 말을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자리[位]에 있게 할 것이 아니고, 인신(人臣)도 그 말을 써주지 않으면 다시 그 직에 나아갈 것이 아닙니다.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사람으로 시종의 직에 있으면서 이미 그 직책에 합당하지 못하고, 또 박팽년과 더불어 죄가 같으므로, 부끄럽고 땀이 나서 감히 뻔뻔스럽게 종사(從事)하지 못하고, 구구하게 청하여 마지 않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 등의 직을 파하소서. 지극한 소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은 상서하기를,
"옛사람은 말을 올리다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즉시 물러났습니다. 대개 간하는 말을 들어주고 시행하면 임금과 신하가 다 칭찬을 받는 것이니, 이것은 사군자(士君子)가 평소에 품고 있는 생각입니다. 만일 그 말을 들어주지 아니하는데도 구차하게 직사에 나아가면 이것은 한갓 군상(君上)의 잘못을 드러내고, 자신은 작록(爵祿)을 누리는 것이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신과 박팽년은 실로 봉사(封事)를 함께 하였습니다. 당초에 발의할 때에 신과 박팽년 두 사람이 주장하였고, 소(疏)를 지은 것도 또한 두 사람이 하였고, 이제 전하께서 누가 먼저 기초(起草)하였느냐고 물으실 때에, 박팽년이, ‘신과 유원성이 함께 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죄를 논하면 참으로 털끝과 저울눈만한 차이도 없습니다. 신과 박팽년이 죄가 똑같은데, 신만 홀로 직사에 있으니, 사론(士論)에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실로 안으로 살피어 괴롭힘이 많습니다. 빌건대 신의 직책도 함께 거두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5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13.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17일 기미 4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집현전 수찬 유성원이 자신의 직첩을 거두어 주도록 상서하다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유성원(柳誠源)이 상서하기를,
"이달 7월 15일에 논한 일은 본래 열 사람이 함께 소(疏)를 올려 천위를 범하였는데, 중사(中使)521) 로 하여금 사람마다 힐문하고, 또 먼저 원고를 기초한 자를 물었으니, 대개 열 사람이 동시에 의논할 수 없고, 반드시 그 중에 먼저 의논을 주창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처음에 대관(臺官)이 신미(信眉)의 일을 논한 것을 듣고, 신이 박팽년에게 이르기를, ‘우리들도 또한 말이 없을 수 없지 않는가?’ 하니, 박팽년이 말하기를, ‘내 뜻도 역시 그렇다.’ 하고, 드디어 원고를 기초하여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창졸간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말 뜻을 고칠 곳이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 원고를 받아서 삭제하고 윤색한 것이 실로 박팽년의 초고보다 많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처음에 의논을 낸 자가 신이요, 원고를 기초한 자도 신입니다. 신과 박팽년은 구별할 수 없고, 그 죄를 논하면 실로 박팽년보다 많습니다. 신이 만일 마음으로 죄가 있는 것을 알면서 밖으로 작록(爵祿)에 연연하여 구차하게 직사에 종사한다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정상을 숨기고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이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입니다. 신은 끝까지 감히 자신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면서 외람되게 근신(近臣)의 열에 처하여, 성명(聖明)에 누(累)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이 말은 거짓으로 꾸미고 이론(異論)을 세워 이름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로 중정(中情)에서 나온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의 직(職)도 아울러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5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註 521]
중사(中使) : 임금이 보낸 환관(宦官) 신분의 사자(使者). 중(中)은 환관(宦官)을 뜻함
14.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7일 무신 3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공조 판서 정인지가 문과의 가액 선발 절목을 아뢰자 의정부 등과 의논하게 하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정인지(鄭麟趾)가 문과(文科)의 가액(加額)777) 과 시험보아 뽑는 절목(節目)을 아뢰니, 의정부(議政府)·예조(禮曹)·집현전(集賢殿)·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연(河演)·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詡)·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이선제(李先齊)·예조 참판(禮曹參判) 정척(鄭陟) 등이 의논하기를,
"문과(文科)의 수효는 33인인데도 문관(文官)의 참외(參外)778) 가 55인이므로, 해마다 자리에 결원(缺員)이 많이 있게 되니 메워 보충하지 못한다면 부득이해서 또 별시(別試)를 설치하여 뽑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자(士子)가 학업(學業)을 배양(培養)할 여가도 없으며, 마음도 또한 부동(浮動)하게 되어, 제배(儕輩)의 저술을 다투어 베껴서 요행을 바라는 풍습(風習)이 크게 일어납니다. 또 지방의 과거(科擧) 보는 선비들이 시험에 참여하지 못하여 선비를 뽑는 길이 넓지 못하니, 마땅히 시험보는 해에 50인을 뽑고, 별시(別試)는 없애고, 그들로 하여금 학업(學業)에 전심(專心)하도록 하소서. 또 주군(州郡)의 교관(敎官)이 결원(缺員)이 있으면 대개 교도(敎導)로써 임명하여 사유(師儒)가 많지 못한 것은 또한 그 폐단입니다."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정갑손(鄭甲孫)은 의논하기를,
"33인이 정원(定員)은 《육전(六典)》에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의 인재(人才)가 옛날보다 더 많지도 않고 또 관직을 비우고 결원(缺員)되는 폐단도 없으니, 마땅히 다시 성헌(成憲)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시학(視學)779) 하고 선비를 뽑는 것은 조종(祖宗)의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성대(盛大)한 행사이니, 50명의 정원을 뽑고서 시학까지 폐지하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는 의논하기를,
"신이 지난 해에 문과(文科)의 정원 수[額數]를 첨가(添加)하기를 청하니, 세종(世宗)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33인 안에서도 혹시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감히 많이 뽑을 수가 있는가?’ 하시므로, 신이 또 청하기를, ‘그렇다면 재능에 따라서 선비를 뽑되, 혹은 30명에서 그치기도 하고, 혹은 40명에서 그치기도 하고, 혹은 50명에서 그치기도 하면서, 50명에 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그렇다면 유사(有司)가 된 사람이 비록 혹시 재주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50명을 채워 뽑게 될 것이니, 선거(選擧)가 정도에 지나침이 장차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시므로, 신이 부끄러워 땀을 흘리면서 능히 대답하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성훈(聖訓)이 매우 간절하고 환하게 명백하므로 감히 경솔히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하연(河演)은 의논하기를,
"문과(文科)의 초장 의의(初場疑義)는 지금에 와서 익히는 것이 아니고, 또 추장(秋場)780) 은 해가 짧으니, 마땅히 표(表) 1장(場), 부(賦) 1장(場), 책(策) 1장(場)만 시험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김종서(金宗瑞)·정갑손(鄭甲孫)·허후(許詡) 등이 의논하기를,
"초장(初場)에는 경학(經學)을 시험하고, 중장(中場)에는 문사(文詞)를 시험하고, 종장(終場)에는 시무(時務)를 시험하게 되니, 과거(科擧)의 격례(格例)에 해가 짧고 긴 이유로써 경학(經學)을 시험보는 것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또 과거 보는 선비가 의의(疑義)를 처음 익히고 난 후에 생원시(生員試)에 나가고, 의의(疑義)를 익히지도 않고서 사부(詞賦)와 책문(策問)을 익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물며 경학(經學)을 밝히는 것은 어찌 반드시 상시로 이습(肄習)한 연후에야 능히 의의(疑義)를 제술할 수가 있겠습니까? 초장(初場)은 그전대로 따라 의의(疑義)로써 시험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선제(李先齊)는 의논하기를,
"추장(秋場)은 해가 짧으니, 초장(初場)의 의의(疑義) 내에서 오경(五經)의 경의(經義)를 각기 1개씩만 시험하고 의문(疑問)은 제외시키고, 중장(中場)의 부·표(賦表) 내에서 표(表)만 시험하고 부(賦)는 제외시키고, 종장(終場)은 그전대로 따라 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척(鄭陟)은 의논하기를,
"초장(初場)은 의의(疑義)를 시험하고, 중장(中場)은 부·표(賦表)를 시험하는 것은 《육전(六典)》에 기재된 바이니 다시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장(秋場)은 해가 짧으니, 초장(初場)은 의의(疑義)를 시험하고, 중장(中場)은 표(表)를 시험하고, 종장(終場)은 그전대로 따라 하소서."
하였다.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제학(直提學) 노숙동(盧叔仝), 직전(直殿) 이석형(李石亨), 응교(應敎) 김예몽(金禮蒙), 교리(校理) 이개(李塏), 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서거정(徐居正), 부수찬(副修撰) 윤기견(尹起畎)·윤자운(尹子雲)·허조(許慥), 박사(博士) 서강(徐岡)·한계희(韓繼禧)·최선복(崔善復),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 김순(金淳)·김지경(金之慶), 기사관(記事官) 김한계(金漢啓)·김명중(金命中) 등은 의논하기를,
"과목(科目)781) 의 정원[額]은 고려(高麗)에서부터 시작하여 시행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진실로 고칠 만한 폐단은 없겠습니다. 지금 시장(試場)의 일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다만 33인만 뽑더라도 정문(程文)782) 이 격식에 맞는 것은 1, 2편(篇)에 지나지 않으므로, 겨우 1, 2분(分)을 얻은 사람까지도 또한 모두 뽑아서 그 수효를 채우게 되니, 지금 만약 정원을 더 보탠다면 아마 취재(取才)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만약 문신(文臣) 참외(參外)의 자리에 결원을 보충할 수 없다는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삼관(三館)783) 의 사무는 바쁘지 않으므로 1식년(式年) 동안에 비록 결원(缺員)이 있더라도 특별히 폐단의 일은 없을 것이니 정원을 더 보탤 필요는 없습니다. 초장(初場)에서 의의(疑義)를 시험하는 것은 그들이 경서(經書)를 강습(講習)했는가를 보려고 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으로 경서(經書)를 강(講)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의의(疑義)로써 시험하게 되며, 또 삼장(三場)에는 부·표(賦表)와 책문(策問)으로써 시험하게 되니, 이장(二場)을 하는 것은 많고 적은 것을 참작하여 헤아려 제도를 만든 것인데, 지금 의의(疑義)를 없애고 부·표(賦表)를 가지고 나누어 초장(初場)·중장(中場)을 삼는다면 이는 경서(經書)는 폐지하고서 다만 이장(二場)으로써 선비를 뽑는 것입니다. 만약 추장(秋場)이 해가 짧다고 한다면 책문(策問)을 제술하는 공력(功力)도 부·표(賦表) 양편(兩篇)보다 아래가 되지는 않을 것인데, 책문(策問)을 이미 나눌 수 없는데도 어찌 부·표(賦表)를 나누어 이장(二場)으로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 중국의 해시(解試)784) 도 모두 가을에 하고, 삼장(三場)의 증감(增減)도 없는데, 하물며 부(賦)는 다만 사장(詞章)의 소기(小技)인데, 부(賦) 1편(篇)을 가지고 책문(策問)에 준하여 나누게 된다면 경중(輕重)이 균등(均等)하지 않으므로 실제로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으니, 다시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 두 법은 모두 《육전(六典)》에 기재되어 있으며, 정원을 첨가해야 한다는 일은 또한 세종조(世宗朝)에서도 헤아려 의논했는데도 마침내 시행되지 못했는데, 지금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처음에 갑자기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고치시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집현전 행 직제학(集賢殿行直提學)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이예(李芮)·이승소(李承召),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김윤복(金閏福)·박원정(朴元貞)·전효우(全孝宇)·금이영(琴以詠)·김용(金勇) 등은 의논하기를,
"우리 국조(國朝)의 식년(式年) 과목(科目)의 수효는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진실로 구습(舊習)에 따라 행해야 하겠지마는, 그러나 시대에 따라 손익(損益)이 된다면 법도 또한 변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역대(歷代)의 선비를 뽑는 정원[額]은 많고 적은 것이 정원이 없는데, 우리 국조(國朝)의 33인의 정원은 어디에 의거해서 정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선비를 뽑는 것은 관직에 보충하려고 하는 일인데, 지금에는 문관(文官)의 결원이 많으므로 반드시 변경하여 융통시켜서 그전의 정원보다 조금 증가시켜 관직에 결원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다만 50인으로써만 제한하여 그 얻은 바 정문(程文)에 따라서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할 것입니다. 초장(初場)의 의의(疑義)는 시험에 나가는 사람이 누구나 평소부터 이습(肄習)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종장(終場)의 대책(對策)이 초장(初場)의 의의(疑義)와 중장(中場)의 부·표(賦表)와 많고 적은 것이 서로 비등(比等)하니, 반드시 해가 짧은 이유로써 유독 초장과 중장만을 줄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경중(輕重)을 비교하여 그 폐해를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잗다랗고 번거로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삼장(三場)의 제술(製述)하는 법은 진실로 그전대로 따라 시행해야 할 것이며, 별시(別試)는 선비의 마음으로 하여금 경솔히 흔들리게 할 것이니 자주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양성지(梁誠之)는 의논하기를,
"문과(文科)의 별시(別試)는 본디는 좋은 뜻이었지마는, 그러나 인심(人心)이 부동(浮動)되어 능히 전심(專心)해서 학업을 익힐 수가 없으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지금부터는 별시는 없애고 식년(式年)에 이르러 50인만 뽑아서 일정한 정원[定額]으로 삼도록 하소서. 초장(初場)의 의의(疑義)는 본디는 사서(四書)의 의문(疑問)되는 점과 오경(五經)의 뜻[義]만 상고하였는데, 지금 임시로 강경(講經)을 폐지하고, 또 의의(疑義)까지 없애게 되니, 이는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모두 합쳐서 폐지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부·표(賦表)를 나누어 이장(二場)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모람(冒濫)될 폐단이 있을 것이니, 그전대로 따라 행하여 의의(疑義)로써 시험하게 하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79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註 777]
가액(加額) : 첨가한 정원.
[註 778]
참외(參外) : 7품 이하의 계급.
[註 779]
시학(視學) :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에 거둥하여 유생(儒生)들이 공부하는 상황을 돌아보던 일. 이때 석전(釋奠)을 행하고 유생을 시험하여 인재(人才)를 뽑는 것이 상례였음.
[註 780]
추장(秋場) : 가을의 과장(科場).
[註 781]
과목(科目) : 과거(科擧).
[註 782]
정문(程文) : 과거를 보일 때 독권관(讀券官)이 채점(採點)을 하기 위하여 만들던 모범 답안지(答案紙).
[註 783]
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예문관(藝文館).
[註 784]
해시(解試) : 중국의 향시(鄕試).
15.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17일 무오 5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왕세자가 처음으로 서연을 열다. 유성원과 이극감으로 세자의 시학을 삼다
왕세자(王世子)가 비로소 서연(書筵)을 열어 사부(師傅)·빈객(賓客)과 더불어 상회례(相會禮)를 행하고, 사부(師傅)인 하연(河演)·좌빈객(左賓客) 정갑손(鄭甲孫)·우빈객(右賓客) 권맹손(權孟孫)·좌부빈객(左副賓客) 허후(許詡)·우부빈객(右副賓客) 이선제(李先齊)·좌보덕(左輔德) 신석조(辛碩祖)·우보덕(右輔德) 노숙동(盧叔仝)·좌필선(左弼善) 이석형(李石亨)·우필선(右弼善) 김예몽(金禮蒙)·좌문학(左文學) 이개(李塏)·우문학(右文學) 양성지(梁誠之)·좌사경(左司經) 유성원(柳誠源)·우사경(右司經) 이극감(李克堪)·좌정자(左正字) 서강(徐岡)·우정자(右正字) 최선복(崔善復) 등이 앞에 나아가 《소학(小學)》을 강론(講論)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는 박중림(朴仲林)과 최만리(崔萬理)가 시학(侍學)이 되었으니 지금도 이 예(例)에 의하여 서연관(書筵官)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발하도록 하라."
하였더니, 승지(承旨) 등이 서연 당상관(書筵堂上官)으로 하여금 이를 선발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하연(河演)·정갑손(鄭甲孫)·허후(許詡) 등이 유성원(柳誠源)과 이극감(李克堪)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모두 신진(新進)으로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 하고는,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경연관(經筵官)과 서연관(書筵官)을 구애하지 말고 다시 의망(擬望)824) 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노숙동·김예몽·유성원·이극감을 의망(擬望)하여 아뢰므로, 임금이 마침내 유성원과 이극감으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명령하기를,
"이제 그대들을 세자(世子)의 시학(侍學)으로 삼아 세자에게는 붕우(朋友)의 예절로써 대하도록 할 것이니 그대들도 또한 붕우(朋友)처럼 대하여서 두려워하거나 기를 펴지 못하여 할말도 다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 경서(經書)의 의리(義理)와 고금(古今)의 격언(格言)에 있어서는 조용히 부드럽고 자세하게 설명하여 깨닫는 바가 있도록 하라."
하고는, 이어서 날마다 들어와서 시강(侍講)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82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註 824]
의망(擬望) : 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할 때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세 사람의 후보자[三望]를 추천하던 일. 비의(備擬).
16.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27일 무진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죽은 중추 이진이 첩의 아들을 과거에 내보내려고 적처를 버린 일을 의논하다
처음에 졸(卒)한 중추(中樞) 이진(李蓁)의 전처(前妻) 김씨(金氏)가 어리석고 또 계사(繼嗣)가 없는 이유로써 다시 최씨(崔氏)에게 장가들어 두 사람을 한 집 안에 거느리고 산 지가 몇 해나 지나게 되었다. 정묘년917) 가을에 이르러 최씨의 사위가 무과(武科)를 보러 가려고 했으나 훈련관(訓鍊觀)에서 과거 보러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진이 상언(上言)하여 사정을 호소하니 국가에서 논정(論定)하기를 김씨(金氏)를 적처(嫡妻)로 삼고 최씨(崔氏)를 첩(妾)으로 삼아 이를 이이(離異)918) 시켰는데, 그 후에 이진이 최씨(崔氏)와 이혼(離婚)하지 않으려는 뜻으로써 상언(上言)했더니 세종(世宗)께서 우대하여 이를 허가하여 최씨(崔氏)를 김씨(金氏)와 더불어 처음과 같이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진이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니, 김씨(金氏)의 외백고(外伯姑)인 홍인신(洪仁信)의 아내에게 서신(書信)을 보내기를, ‘저의 아내 김씨(金氏)는 대모(大母)를 전적으로 의뢰(依賴)하고 있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비록 병인(病人)이지만 기별(棄別)919) 한다는 글도 없으면서 거느리고 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므로, 이진이 마지못해서 기별(棄別)한다는 글을 만들고 노비(奴婢)의 문권(文券)까지 합하여 보내 주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이진은 죽었다. 이진의 뜻을 추구(推究)한다면 김씨(金氏)를 미워서 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고, 다만 최씨(崔氏)를 적처(嫡妻)로 삼아서 자손(子孫)을 쓰려고 한 계책일 뿐이었다. 김씨(金氏)의 조카 김상안(金尙安)이 그 귀종(歸宗)920) 의 설(說)을 인용(引用)하여 사헌부(司憲府)에 호소하니,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진(李蓁)이 첩의 소산(所産)으로 하여금 사로(仕路)에 통하려고 하여 조강지처(糟糠之妻)를 경솔히 버렸기에, 일찍이 다시 합가(合家)하도록 명령했는데도 거의 죽게 될 때에 다시 내쫓아 족친(族親)에게 호구(糊口)하도록 하였으니, 〈이진은〉 죽어도 또한 죄가 남게 됩니다. 마땅히 김씨(金氏)로 하여금 이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첩의 아들로 하여금 봉양(奉養)하도록 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진이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 합가(合家)시킬 길도 없으며, 의리가 끊어진 남편의 집에 다시 돌려보내는 것도 실로 적당치 못한 일입니다. 첩의 아들 이배인(李培仁)이 김씨(金氏)로써 수양(收養)한 적모(嫡母)로 삼아 아버지의 유언(遺言)을 핑계삼아 집에서 봉양하려고 했지마는, 그러나 김씨(金氏)는 수양(收養)한 아들이 아니라고 물리치고 있으며, 또 이진이 이미 버린 아내로써 아들에게 유언(遺言)하여 집에서 봉양하도록 하는 것이 정리(情理)에 합당하지도 않습니다. 김상안(金尙安)은 김씨(金氏)가 이진(李蓁)과 더불어 동거(同居)할 때에도 상시 진퇴(進退)하여 화목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미 내쫓김을 당하고 연로(年老)하여 후사(後嗣)도 없으면서 죽을 지경에 가까이 있는데, 효도로써 봉양한다고 핑계하고서 서로 송사를 하여 다투게 되어서 그 이익을 탐내어 부끄럼도 없이 노비(奴婢)와 재물을 차지하려는 계책이 환하게 되었으니, 비록 전례(前例)로는 마땅히 귀종(歸宗)시켜야 할 것이지만, 그 뜻대로 노비(奴婢)를 주어서 그 욕심을 이루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홍인신(洪仁信)의 아들 홍양(洪陽)은 김씨(金氏)에게 이성(異姓)의 소속(疎屬)이 되므로 평소부터 친목(親睦)하는 뜻도 없었는데, 밤을 이용하여 데리고 가서 농장(農場)에 두고서 스스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본부(本府)921) 에서 서울에 불러 와서 묻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사고(事故)를 핑계하고서 즐거이 거느리고 오지도 않으며, 노부(老婦)를 몰래 꾀이기를 어린애를 제어하듯이 하니, 그의 음휼(陰譎)한 것이 더할 수 없이 심합니다. 지금 본부(本府)에서 여의(女醫)를 보내어 김씨(金氏)에게 정원(情願)을 물으니, 무릇 일용 행사(日用行事)에 관한 일도 분명히 개설(開說)하지도 못하고, 이진(李蓁)의 성명(姓名)과 존몰(存沒)922) 도 또한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 일로써 미루어 본다면 그가 홍양(洪陽)의 집에 그대로 거처하고 있다는 말은 김씨(金氏)의 정원(情願)이 아니고, 실상은 홍양의 몰래 꾀인 데서 나온 것입니다. 신(臣) 등은 생각하기를, 이익을 탐내는 무리들이 전민(田民)923) 을 빼앗기를 꾀하여 벌떼처럼 일어나 다투어 송사하게 되니, 선비의 풍습(風習)이 아름답지 못하므로 인륜(人倫)과 풍속에 관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김씨(金氏)는 이미 노비(奴婢)와 토전(土田)이 있으니 족친(族親)의 집에 우거(寓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컨대 노비(奴婢)가 있는 상주(尙州)로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승정원(承政院)·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하기를,
"홍양(洪陽)은 소원(疎遠)한 족속(族屬)으로서 김씨(金氏)의 전민(田民)을 탐내어 몰래 숨겨서 맞이해 두었으니 지취(志趣)가 탐욕이 많습니다.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엄하게 징벌(懲罰)하여 귀종(歸宗)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윤형(尹炯)·참판(參判) 기건(奇虔)·참의(參議) 김연지(金連枝)는 의논하기를,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는 사람이 귀종(歸宗)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리인데, 그 족친(族親) 중에서 기탁(寄托)할 만한 사람을 골라 그로 하여금 봉양(奉養)하도록 하여 소재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일정한 때가 없이 고찰(考察)하여 그 살 곳을 잃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신(閔伸)과 참의(參議) 홍심(洪深)은 의논하기를,
"홍양(洪陽)이 소원(疎遠)한 족속(族屬)으로서 평소에는 불쌍히 여겨 돌보지 않고 있다가 이진(李蓁)이 죽은 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탐하여 맞이해 청하니 간휼(姦譎)한 것이 더할 수 없이 심합니다. 마땅히 귀종(歸宗)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안완경(安完慶)은 의논하기를,
"김상안(金尙安)이 본종(本宗)의 지친(至親)으로서 이익을 탐내어 고소(告訴)했으니 진실로 일컬을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여자(女子)가 돌아갈 곳이 없으면 귀종(歸宗)하는 것이 예절이니 본종(本宗)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정창손(鄭昌孫)과 김문기(金文起)는 의논하기를,
"만약 반드시 김상안(金尙安)을 따를 수 없다고 한다면 김씨(金氏)의 본종(本宗)의 친족(親族)이 또한 많이 있으니 그들이 자원하여 봉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최항(崔恒)·직전(直殿) 성삼문(成三問)·교리(校理) 이개(李塏)·부교리(副校理) 이승소(李承召)·부수찬(副修撰) 허조(許慥)·수박사(守博士) 한계희(韓繼禧)는 의논하기를,
"돌아갈 곳이 없으면 귀종(歸宗)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논입니다. 비록 김상안(金尙安)의 의도(意圖)가 완전히 이익을 탐내기 때문에 기탁(寄託)할 수가 없다고 하지마는, 그러나 귀종(歸宗)의 의리가 이미 중요하니 사람이 적당치 않다고 해서 법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돌아갈 만한 이가 있으면 김상안(金尙安)에게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맹손(權孟孫)은 의논하기를,
"홍양(洪陽)과 김상안(金尙安)이 김씨(金氏)를 서로 봉양하려고 다투는 것이 과연 모두가 효양(孝養)의 성심(誠心)에서 나왔겠습니까? 그렇다면 두 사람의 꾀 가운데 빠져서 김씨(金氏)를 쓸데없는 곳에 버리기보다는 다시 이진(李蓁)의 집으로 보내어 최씨(崔氏)의 아들로 하여금 생존할 때는 봉양하고 죽고 난 후에는 수빈(守殯)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혜(趙惠)는 의논하기를,
"김씨(金氏)가 버림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 이진(李蓁)의 첩자(妾子)인 이배인(李培仁)을 양육하여 자기 아들로 삼아서 전민(田民)을 나누어 주어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려고 했으니, 마땅히 이배인에게 부탁하여 이진(李蓁)의 적처(嫡妻)와 첩(妾)의 문란한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옳지 못하다고 한다면 김씨(金氏)를 공처(公處)에 불러 와서 그 정원(情願)을 들어 구처(區處)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승지(承旨) 이사순(李師純)·이계전(李季甸)·김완지(金俒之)·정이한(鄭而漢)은 의논하기를,
"국가의 대법(大法)은 한 사람의 몸이 생존하고 사망한 이유를 가지고 경솔히 버리거나 존치(存置)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진(李蓁)이 죽지 않았다고 해서 국가에서 이를 의논한다면 마땅히 이진이 이유도 없이 적처(嫡妻)를 버린 죄를 다스려 완취(完聚)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진이 죽은 이유로써 〈김씨(金氏)에게〉 귀종(歸宗)하기를 경솔히 허가하여 국가의 대법(大法)을 폐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 적처(嫡妻)와 첩의 구분을 명백히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 집안에서 같이 살도록 한 것은 세종(世宗)의 명령이고, 기별(棄別)하는 일은 이진(李蓁)의 본의(本意)가 아닌 것이겠습니까? 마땅히 그 명칭을 바로잡고 분수(分數)를 정하여 김씨(金氏)를 옛날의 거처에 돌려보내어 최씨(崔氏)의 아들로 하여금 적모(嫡母)로서 봉양하도록 하고, 김씨(金氏)가 죽고 난 후에는 이진(李蓁)의 가묘(家廟)에 합사(合祀)하도록 하는 것이 의리에 정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김씨(金氏)의 재물과 노비[蒼赤]는 일체 김씨(金氏)의 구처(區處)에 따르게 할 것인데, 만약 최씨(崔氏)의 아들이 정성을 다해서 봉양했는데도 김씨(金氏)가 마침내 구처(區處)함이 없다면 저절로 국가의 성법(成法)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상주(尙州)를 농토(農土)가 있는 곳이라 해서 김씨(金氏)의 의사를 어겨서 강제로 보낸다면 이것이 어찌 방출(放黜)과 다르겠습니까? 김상안(金尙安)의 송사(訟事)는 과연 대의(大義)를 생각해서 김씨(金氏)를 위한 일이겠습니까? 또한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재물을 탐내고 있다면 김씨(金氏)를 김상안(金尙安)이 거주하는 상주(尙州)의 땅으로 보내는 것은, 이것이 김상안의 꾀 가운데 빠져서 그의 이욕을 탐내는 마음만 이루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김씨가 어리석고 사람의 등류와 같지 않아서 지각(知覺)이 전연 없으므로, 노비[蒼赤]와 재물을 그로 하여금 구처(區處)시킬 수 없으니 상주(尙州)에 보내는 것을 어찌 그의 의사에 어긋난다고 하겠는가?’고 하지마는 이것도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여의(女醫)와 더불어 이야기한 말을 살펴보건대, 그 10분의 안에서 7분은 옳은 말이 되니 진실로 정신이 어두워 망령된 생각으로 인사(人事)를 살피지 못하여 지각(知覺)이 전연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자기의 재물을 그의 구처(區處)에 맡겨 두는 일이 어찌 옳지 못하겠습니까?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상주(尙州)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뜻의 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는데도 강제로 이를 보내는 것은 옳지 못함이 명백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진(李蓁)이 생존할 때에 내쫓은 아내를 죽은 후에 완취(完聚)시키는 것은 의리에 어긋남이 있으며, 또 최씨(崔氏)의 아들은 김씨(金氏)로 인하여 서자(庶子)가 되니 어찌 정성을 다해서 그를 받들겠습니까? 귀종(歸宗)시키는 일이 옳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고 하는데, 신(臣) 등은 생각하기를, 부인(婦人)을 내쫓아 귀종(歸宗)시키는 것이 비록 정론(正論)이라 하지만, 법에 의거하여 완취(完聚)시키는 것은 국가의 대전(大典)인데, 이진(李蓁)이 적처(嫡妻)를 내쫓은 것은 곧 임종시(臨終時)의 난명(亂命)924) 이므로 국가의 죄인(罪人)이 된 것이니 국가에서 그대로 두고 논죄(論罪)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논죄한다면 어찌 이진(李蓁)이 죽은 이유로써 그 난명(亂命)을 인정하고서 그 대전(大典)을 폐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꼭 의리에 합당하므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최씨(崔氏)의 아들이 능히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지 못한다는 의논이 유사하지만, 그러나 국가에서 이미 그 적서(嫡庶)를 분변하였으니 비록 김씨(金氏)가 떠났더라도 최씨(崔氏)의 아들이 마침내 적자(嫡子)가 될 이치가 없으니, 어찌 이로써 혐오(嫌惡)를 삼겠습니까? 또 이진(李蓁)의 아비 이민도(李敏道)는 태조(太祖)를 만나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여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중국(中國)에서 피란(避亂)해 왔기 때문에 이진(李蓁)이 오로지 김씨(金氏)의 노비를 등록하여 문호(門戶)를 세웠으니, 그런 까닭으로 비록 최씨(崔氏)에게 장가 들었지마는 능히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김씨(金氏)가 노인(路人)925) 이 된다면 이진(李蓁)의 문호(門戶)는 장차 떨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최씨(崔氏)의 아들이 김씨(金氏)를 봉양하고 제사를 받든다면 김씨(金氏)의 노비도 혹시 차지할 수 있는 이치가 있을 것인데 무엇이 싫고 꺼려서 봉양하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까? 김씨(金氏)로 하여금 다시 옛날의 거처로 돌아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하고, 최씨(崔氏)의 아들로 하여금 적모(嫡母)로서 받들고 몸이 죽고 난 후에는 사당(祠堂)에 합사(合祠)케 한다면 국가의 대법(大法)에도 어긋나지 않고 훈신(勳臣)의 가세(家世)도 잃지 않고, 세종(世宗)께서 동거(同居)하게 한 명령에도 어긋나지 않으며, 김씨(金氏)가 죽은 후에도 또한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는 귀신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詡)·참판(參判) 정척(鄭陟)·참의(參議) 민공(閔恭)은 의논하기를,
"김씨(金氏)가 전민(田民)이 많이 있으니 비록 거두어 봉양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또한 안심(安心)하고 생활할 수가 있는데, 어찌 강제로 모인(某人)으로 하여금 거두어 봉양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잠정적으로 다른 데에 의거하여 그만 내버려두고서 논하지 말고 김씨(金氏)로 하여금 서울이든지 지방이든지 갑(甲)에게든지 을(乙)에게든지 그 가는 데로 맡겨 두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직제학(直提學) 박팽년(朴彭年)·직집현전(直集賢殿) 이석형(李石亨)·교리(校理) 양성지(梁誠之)·부교리(副校理) 이예(李芮)·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서거정(徐居正)은 의논하기를,
"어떤 사람은 이성(異姓)으로서, 어떤 사람은 족속(族屬)으로서 수양(收養)926) 과 시양(侍養)927) 을 하는 일이 세상의 풍조(風潮)가 모두 이러한데, 어찌 유독 김씨(金氏)에게만 강제 귀종(歸宗)하도록 하겠습니까? 그만 내버려두고서 논하지 않는 것이 매우 정리(情理)에 합당하겠습니다. 만약 김씨(金氏)가 죽고 난 후에 족인(族人)이 전민(田民)을 다투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국법(國法)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정인지(鄭麟趾)와 참의(參議) 임효신(任孝信)은 의논하기를,
"그 전민(田民)이 스스로 봉양(奉養)할 만하면 그 재산이 넉넉한 종의 집에 부탁하여 그 몸을 마치도록 하고, 만약 몸이 죽은 후에 전민(田民)을 구처(區處)하는 것은 다른 날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가지고 위에 아뢰니, 임금이 허후(許詡)와 박팽년(朴彭年) 등의 의논에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90면
【분류】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윤리(倫理) / 사법-재판(裁判) / 풍속-예속(禮俗) / 신분(身分)
[註 917]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註 918]
이이(離異) : 서로 이별(離別)시킴.
[註 919]
기별(棄別) : 서로 별거시킴.
[註 920]
귀종(歸宗) : 사자(嗣子)가 그 본종(本宗)에 돌아감.
[註 921]
본부(本府) : 사헌부(司憲府).
[註 922]
존몰(存沒) : 생존과 사망.
[註 923]
전민(田民) : 논밭과 노비.
[註 924]
난명(亂命) : 숨이 질 때 정신없이 하는 유언.
[註 925]
노인(路人) : 타인.
[註 926]
수양(收養) : 다른 사람의 자식을 거두어서 자기의 성을 주어 길러 자기의 뒤를 잇게 하던 일.
[註 927]
시양(侍養) : 양사자(養嗣子)할 목적이 아니고 동성(同姓)·이성(異姓)을 가리지 않고 기르던 일
17.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2월 20일 갑신 6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김종서 등이 새로 찬술한 《고려사절요》를 바치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등이 새로 찬술(撰述)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바쳤으니, 전문(箋文)에 이르기를,
"신(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진실로 황공(惶恐)하면서 머리를 조아립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편년체(編年體)173) 는 좌씨(左氏)174) 에서 근본하였고, 기전체(紀傳體)175) 는 사마천(史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시작되었는데, 반고(班固) 이후에 역사를 쓰는 사람이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조술(祖述)176) 하여 어김이 없는 것은 그 규모(規模)가 굉박(宏博)하고 저술이 해비(該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쓸데없이 길어서 구명(究明)하기 어려운 걱정을 면할 수가 없으니, 이는 역사가(歷史家)의 서로가 장·단점(長短點)이 있어 한쪽만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려(高麗)는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나서, 웅무(雄武)177) 로써 많은 악인을 제거하고 관대함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마침내 대업(大業)을 세워 후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교사(郊社)178) 를 세우고, 장정(章程)을 정하고, 학교를 일으키고, 과거(科擧)를 설치하고, 중서성(中書省)을 두어 기무(機務)를 총령(總領)함으로써 체통(體統)이 매인 바가 있고,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주군(州郡)을 살핌으로써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감히 방사(放肆)하지 못하였으며, 부위(府衛)179) 의 제도로써 군대를 농민에게 소속시키는 법을 얻게 되고, 전시(田柴)의 등급[科]은 벼슬하는 사람에게 대대로 국록(國祿)을 주는 뜻이 있게 되어, 형벌과 정사가 시행되고 법식(法式)이 갖추어져서 중앙과 지방이 편안해지고 백성과 물질이 풍부해졌으니, 태평의 정치가 성대(盛大)하다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중대(中代) 이후에는 조선(祖先)의 유업(遺業)을 능히 계승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폐행(嬖幸)180) 에게 미혹(迷惑)되고, 밖으로는 권간(權姦)181) 에게 제어(制御)되었으며, 강적(强敵)이 번갈아 침범하여 전쟁이 많이 일어났으니, 점접 쇠퇴(衰頹)하여 가성(假姓)182) 이 왕위(王位)를 절취(竊取)하는 지경에 이르러 왕씨(王氏)의 제사를 이미 혈식(血食)183) 되지 못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이 반정(反正)했지마는 마침내 우매하고 나약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대개 하늘이 진주(眞主)184) 를 낳아서 우리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 것은 진실로 인력(人力)으로써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맨 먼저 보신(輔臣)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찬수(纂修)하도록 하셨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또 틀린 점을 교정(校正)하도록 명하셨으나 마침내 성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는 신성(神聖)한 자질로써 문명(文明)의 교화를 밝혀서 신(臣) 등에게 명하여 요속(僚屬)을 선발하여 사국(史局)을 열고 편찬하되 전사(全史)를 먼저 편수(編修)하고 그 다음에 편년(編年)185) 에 미치도록 하였으니, 신 등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명령을 받들어 감히 조금도 게으르지 못하였는데, 불행히도 글을 바치기도 전에 갑자기 군신(群臣)을 버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선왕(先王)의 뜻을 공손히 계승하여 신 등으로 하여금 일을 마치도록 하시니, 생각해 보건대 일찍이 선왕에게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거칠고 고루한 이유로써 굳이 사양할 수가 없습니다. 신미년186) 가을에 글이 완성되었는데, 이에 또 사적(事迹)이 세상의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것과 제도가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을 모아서 번잡한 것은 제거하고 간략한 것만 취하고 연월(年月)을 표준하여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여 고열(考閱)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니, 그런 후에 4백 75년의 32왕의 사실이 포괄(包括)되어 빠진 것이 없고 상세함과 간략함이 다 거론(擧論)됨으로써 역사가(歷史家)의 체재(體裁)가 비로소 대략 구비된 듯합니다. 비록 문사(文辭)가 비리(鄙俚)187) 하고 기차(紀次)188) 가 정밀(精密)하지 못하지마는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는 데에 있어서는 정치하는 방법에 조금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조촐한 연회의 여가에 때때로 살피고 관람하여서 옛것을 상고하는 성덕(盛德)에 힘쓰고, 세상을 다스리는 대유(大猷)를 넓혀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그 은혜를 받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찬술(撰述)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을 삼가 전문(箋文)에 따라 아룁니다."
하였다. 김종서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의 역사도 오히려 구해 보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의 역사이겠습니까? 대신(大臣)들이 자못 구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마땅히 빨리 인쇄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頒布)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본사(本史)가 비록 사적(事迹)은 상세하지 못하지마는, 이를 버리면 다른 데는 상고할 글이 없습니다. 혹시 빨리 인쇄하지 않는다면 벌레가 먹어 파손(破損)될까 두려우니, 또한 마땅히 빨리 인쇄하여 여러 사고(史庫)에 간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사란 것은 후세(後世)에 보여서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숨겨서는 안되니, 마땅히 인쇄하여 이를 반포(頒布)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하니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찬술(撰述)하도록 했는데, 정도전이 관장(管掌)하는 사무가 많아서 이 일은 요속(僚屬)에게 맡겼으나, 이로 말미암아 빠져나간 부분이 매우 많았었다. 태종(太宗)은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대조 교정(校正)하도록 했으며, 세종(世宗)은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쳐 찬술(撰述)하도록 했으니, 정도전의 초고(草藁)에 비하면 조금 상세한 편이었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김효정(金孝貞)이 말하기를,
"윤회(尹淮)가 찬술(撰述)한 것에 또한 빠지고 간략히 한 실수가 있으니 후세에 전해 보일 수 없습니다."
하니, 이에 권제(權踶)에게 명하여 이를 찬술(撰述)하도록 하였다. 권제(權踶)가 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과 더불어 찬록(撰錄)·부집(裒集)한 것은 이가(二家)189) 보다는 상세한 편이었지만, 그 좋아하고 미워함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필삭(筆削)190) 이 공정(公正)하지 못하였다. 일이 발각나게 되니,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정인지(鄭麟趾) 등과 더불어 이를 찬술(撰述)하도록 하였다. 김종서 등은 편년체(編年體)는 상세히 구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에 기전체(紀傳體)의 법에 의거하여 과(科)를 나누어 완성을 책임지워,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 등으로 하여금 열전(列傳)을 찬술(撰述)하도록 하고, 노숙동(盧叔仝)·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이예(李芮)·윤기견(尹起畎)·윤자운(尹子雲) 등으로 하여금 기(紀)·지(志)·연표(年表)를 나누어 찬술(撰述)하도록 하고는, 김종서가 정인지·허후(許詡)·김조(金銚)·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신석조(辛碩祖) 등과 더불어 이를 산삭(刪削) 윤색(潤色)하였다. 이때 권제(權踶)·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이 새로 중죄(重罪)를 얻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모두 몸을 움츠려서 산삭(刪削)하지 못했으므로, 자못 번란(煩亂)하고 용장(冗長)191) 한 곳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歷史家)의 체례(體例)가 비로소 구비되었으므로, 이때에 와서 그 간절하고 요긴한 것만 모아서 사략(史略)192) 을 찬술(撰述)하여 바치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67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註 173]
편년체(編年體) : 시대순(時代順)에 따라 사실(史實)을 서술하는 역사 편찬의 한 체재(體裁). 이 편년체는 중국의 《춘추(春秋)》에서 비롯되었음.
[註 174]
좌씨(左氏) : 좌구명(左丘明).
[註 175]
기전체(紀傳體) : 역사 현상의 총체를 본기(本紀:임금의 사적)·열전(列傳:중요 인물의 전기)·지(志:제도 관계)·표(表:연표와 인명표) 등으로 분류하여 기술한 역사 편찬의 한 체재. 중국의 《사기(史記)》에서 유래되었음.
[註 176]
조술(祖述) : 본받아 서술함.
[註 177]
웅무(雄武) : 뛰어난 무력(武力).
[註 178]
교사(郊社) : 천지(天地)의 제사.
[註 179]
부위(府衛) : 부병(府兵).
[註 180]
폐행(嬖幸) : 총애를 받는 총희(寵姬).
[註 181]
권간(權姦) : 권세 있는 간신(奸臣).
[註 182]
가성(假姓) :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은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이름.
[註 183]
혈식(血食) : 희생(犧牲)을 올려 제사를 지냄.
[註 184]
진주(眞主) : 진명지주(眞命之主).
[註 185]
편년(編年) : 편년체(編年體).
[註 186]
신미년 : 1451 문종 1년.
[註 187]
비리(鄙俚) : 상스러움.
[註 188]
기차(紀次) : 기술(紀述)한 순서.
[註 189]
이가(二家) : 정도전(鄭道傳)과 윤회(尹淮).
[註 190]
필삭(筆削) : 더 쓸 것은 쓰고 지울 것은 지워버림.
[註 191]
용장(冗長) : 글이나 말이 쓸데없이 긴 것.
[註 192]
사략(史略)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