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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조실록 13권, 정조 6년 6월 2일 정묘 2번째기사 1782년 청 건륭(乾隆) 47년
첨지중추부사 정술조(鄭述祚)가 상소하기를,
"제왕(帝王)이 정치를 하는 방법은 그 요점이 단지 잘 계술(繼述)해 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즉위하신 지 5년 기유년099) 에 이어 대제학 신(臣) 이덕수(李德壽)를 명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찬집하라고 명한 다음, 드디어 숙종 대왕(肅宗大王)을 존숭하여 세실(世室)에 들이고 세실로 들인 것에 대한 칭경(稱慶)으로 임헌(臨軒)하여 시사(試士)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찬수청(纂修廳)에서 선조(先朝)의 《보감(寶鑑)》을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인하여 부지런하고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선왕의 지극한 덕을 계술하고 선왕의 큰 공렬을 아름답게 드날렸다는 것으로 크게 선제(璇題)로 내어걸어서 도와주기를 바라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정령(政令)과 시조(施措)에 있어 번번이 선조(先朝)를 본받았는데, 성수(聖壽)가 이미 노년(老年)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주야로 겨를이 없어 미처 못다 할 듯이 걱정하였으니, 더할 수 없이 부지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학(聖學)이 이미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억시(抑詩)100)
그런데 우리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신 지 5년인 신축년101) 에 다시 장사신(掌史臣)에게 명하여 열조(列朝)의 《보감(寶鑑)》을 찬술하여 완성하라고 명하였으니, 여러 조정에서 겨를을 내지 못했던 법전이 이때에 이르러 크게 완비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선왕의 성대한 덕과 큰 공렬이 또한 장차 끝없는 장래에 그 빛이 전하여지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전하의 신축년은 또한 선대왕의 기유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대왕께서 ‘부지런하고 공경한다.[克勤克敬]’는 네 글자를 선왕의 뜻을 계술하는 요체로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 성조(聖朝)에서 전수(傳授)하는 심법(心法)인 것입니다. 대저 상천(上天)이 경계를 보여 하토(下土)에 재해(災害)가 발생할 경우에는 번번이 수성(修省)하는 하교를 내려 두렵고 조심스런 마음가짐으로 화목하게 해 나가는 방도를 극진히 힘썼으니, 이럴 때의 성심(聖心)은 공경스러웠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시일이 점점 오래 되어 세월만 보내는 마음이 습관으로 굳어짐에 이르러서는 이때의 성심(聖心)이 과연 전일에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했던 때와 같았습니까? 여민(黎民)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굶주려 죽은 시체가 잇따랐을 경우에는 부지런히 구휼하는 유지(有旨)를 자주 내려 돌보아 구제하는 방책을 끝까지 다하고 있으니, 이럴 때의 성심(聖心)은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진휼하는 정사를 막 끝마쳐 상처가 겨우 완쾌되고 나면 이럴 때의 성심이 과연 지난날 걱정하면서 부지런히 했던 때와 같았습니까? 《보감(寶鑑)》이 처음 완성됨에 선왕(先王)을 사모하는 마음이 바로 간절하고, 선열(先烈)이 영구히 전하게 됨에 선왕의 업적을 계승할 책임이 바야흐로 급하니, ‘부지런하고 공경한다.[克勤克敬]’라는 네 글자가 더욱 전하께서 마땅히 복응(服膺)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 전하께서 이렇게 가뭄이 드는 때를 당하여 상세하게 자신을 꾸짖는 하교와 간곡하게 간신(諫臣)을 나오게 하시는 덕은 곧 선대왕께서 가뭄을 안타깝게 여겨 한데서 기도하시던 정성과 더불어 씩씩하게도 차이가 없었으니, 신이 이미 마음에 쌓아오고 있던 것을 어찌 감히 명주(明主)의 앞에서 한번 진달(陳達)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제갈 양(諸葛亮)이 후주(後主)에게 고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일체(一體)입니다.’ 하였고, 주자(朱子)가 송(宋) 효종(孝宗)에게 고하기를, ‘옛 성왕(聖王)들은 음식(飮食)·차사(次舍)·기용(器用)·재유(財賄)에 대해 모두 유사(有司)의 법에 의거 통제하였으므로 털끝만큼의 사사로움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제 무릇 내수사(內需司)를 설치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이고 명석(名碩)들이 건의하여 파기시킬 것을 청한 것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닙니다. 참으로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저축이 없어도 부고(府庫)의 재물이 모두 임금의 재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야흐로 큰 일을 할 때를 당하여 불세(不世)의 치적(治績)을 이루려 한다면 오직 의당 신충(宸衷)으로 결단을 내려 혁연(赫然)히 파기시킴으로써 공평하고 광명한 덕을 밝히시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폐단을 제거시키소서. 그리하여 내간(內間)의 수용(需用)에 관계된 모든 것은 아울러 밖에서 진공(進供)하게 한다면 회탕(恢蕩)시키는 정치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수어(守禦)·총융(摠戎) 양청(兩廳)은 본래 외장(外將)이어서 사체(事體)가 경아문(京衙門)과는 다른 것으로 당초에는 다만 서리(胥吏)와 군관(軍官) 약간명만을 두어 부서(簿書)를 봉행하는 데 대비하게 했었습니다만, 중년(中年) 이후 지망(地望)이 높은 신하가 이 직위에 있는 경우가 많아지자 그 규모가 더욱 확장되어 엄연(儼然)히 경중(京中)의 큰 군문(軍門)으로 이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조그만 도성(都城)이 다섯 군문(軍門)으로 나누어져서 긴요하지 않은 병액(兵額)이 점점 불어나서 생령(生靈)들의 고혈이 더욱 고갈되고 있으니, 이것이 전하께서 지난번 변통시킬 마음을 품으시고 열심히 순자(詢咨)하시는 거조가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광주(廣州)·수원(水原)은 본래 사체가 중하지만 참으로 혁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전곡(錢穀)을 유사(有司)에게 붙여 흉년을 만나면 백성을 구제하는 자료로 쓰고 풍년을 당하면 병무(兵務)를 넉넉하게 하는 것으로 쓴다면 국가에서 회보(懷保)하는 도리와 미연에 대비하는 계책에 있어 둘 다 제대로 되어 손실이 없게 될 것입니다.
들[野]을 나누고 주(州)를 나누는 법은 이것이 바로 저쪽 경계와 이쪽 경계를 가지고 책임을 나누어 완성을 책임지우기 위한 방법인 것이니, 옛 선왕(先王)의 제치(制治)하는 법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지금 제도(諸道)에 혹 지방(地方)이 너무 넓어서 명령이 잘 선포(宣布)되지 않고 백성들이 관장(官長)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으며, 혹 지역이 너무 작아서 관부(官府)가 모양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물론 하민(下民)들이 치우치게 고통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곳에는 의당 손익(損益)하고 분합(分合)하는 방도를 두어 양쪽이 온편하게 되는 정사를 해야 합니다. 예컨대 강릉(江陵)은 지경이 대관령(大關嶺)에 가로막혀 있어서 동서가 현격하게 동떨어져 있는가 하면, 성주(星州)는 경계가 수백 리나 되어 남북이 너무 머니, 오직 의당 나누어 둘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왕래를 편리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또 기내(畿內)의 양천(陽川)과 호서(湖西)의 음성(陰城), 호남(湖南)의 용안(龍安), 영남(嶺南)의 언양(彦陽)은 가까운 데로 합치면 부역(賦役)도 점점 고르게 되고 백성들의 곤란도 조금은 펴질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절서(節序)가 이미 늦어서 초복(初伏)이 가까워오고 있고 큰 흉년임이 이미 판가름났으니, 앞으로의 민사(民事)는 떠돌다가 쓰러져 죽는 것이 사세상 반드시 이르게 되어 있으니, 대저 안집(安集)시키는 데 관계되는 방도에 대해 미리 두루 상세하게 강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영(御營)과 금위(禁衛)의 군졸에 대해 상번(上番)을 반으로 감하면 그 보인(保人)이 행장을 꾸려 보내는 것도 절로 견감하는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병조의 기병(騎兵)·보병(步兵)의 포(布)와 훈련 도감의 포보(砲保) 및 각 아문(衙門) 공장(工匠)의 요포(料布)와 각사(各司) 노비(奴婢)의 신역(身役)은 우선 똑같이 반을 정봉(停捧)하게 한다면 거의 곤궁한 백성들에게 일푼이나마 은혜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듣건대 조종조(祖宗朝)에서는 각 고을의 환곡(還穀)을 단지 호조(戶曹)의 원회부(元會付)만 두고 모곡(耗穀)은 아울러 본 고을에 돌려주었고 무릇 포흠(逋欠)과 유망(流亡)이 있으면 모두 이것으로 충당시키게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백여 년 전에 김응조(金應祖)의 상소에 의거하여 그 모곡을 빼앗아 상평청(常平廳)의 곡식을 만들었는데 모곡에 또 모곡이 생겨 그 숫자가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비록 평년(平年)일지라도 실로 생민(生民)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를 당하여 전수를 봉납하도록 독책하려 한다면 그 형세가 장차 인족(隣族)에게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류는 상평(常平) 회록(會錄)의 모조(耗條)와 아울러 그 숫자를 헤아려 감함으로써 인족에게까지 널리 징수하는 데 이르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이 또한 회보(懷保)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규모(規模) 가운데 변통시켜야 하는 데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전례를 말하고 있는데,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비록 털과 살이라도 아낌이 없어야 하고 의리에 해로운 것이면 종사(鍾駟)라도 취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경아문(京衙門)의 전포(錢布)를 반으로 감하는 것과 외읍(外邑)의 적곡(糴穀)을 옮겨서 충당하는 것은 어느 것인들 때에 따라 바로잡아야 할 계책이 아닌 것이 있겠으며, 어느 것인들 전례의 유무(有無)를 논하지 않을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조지(朝紙)를 얻어 보았는데 1천 석(石)을 내어 사사로이 사람을 진구(賑救)한 경우에는 법전에 의거 직책을 제수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조가(朝家)에서 은상(恩賞)을 반드시 미덥게 하면 부실(富實)의 격권(激勸)이 응당 많게 될 것이니, 이는 참으로 오늘날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하지만 1천 석 이하 1백 석 이상을 낸 사람은 애당초 거론한 일이 없는데, 이들은 직책을 제수하는 한계에는 차지 못하였더라도 공상(功賞)을 바라는 마음에는 반드시 다른점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내년에는 이런 등등의 권의(權宜)에 관한 정사가 또 반드시 전과 같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참으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지난해의 사람이 미처 상(賞)을 받지 못했는데 금년의 사람이 또 반복되어 곤란하게 된다.’는 것과 너무도 근사하게 됩니다. 의당 각도(各道)로 하여금 그 곡수(穀數)의 다과(多寡)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시상(施賞)한다면 또한 은혜를 베풀어 구제하게 하는 정사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소·술·소나무 이 세 가지에 대한 금법[三禁]은 바로 국가에 항상 있는 법인 것인데, 이렇게 곡식이 귀한 때를 당하여는 모든 미비(靡費)에 관계되는 폐단은 더욱 마땅히 엄히 방금해야 됩니다. 팔도(八道)에서 술을 빚는 데 허비되는 것을 통틀어 계산하여 보면 이를 백성의 식량에 견줄 경우 삼사분의 일은 될 것 같습니다만, 경성(京城)을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의당 반의 숫자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방금 만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 낱알 하나가 금(金) 같은 때를 당하여 어떻게 함부로 무익한 곳에다 곡식을 허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대소의 사향(祀饗)과 상장(喪葬)에 소용되는 것 이외에 몰래 술을 많이 빚어서 여러 점포에서 판매하는 부류들은 일체 아울러 엄금하게 되면 거의 폐단을 구제하는 데 일조(一助)가 되겠습니다.
과거 신해년102) ·임자년103)탕춘대(蕩春臺)이고 이소는 만리창(萬里倉)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때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받아먹는 사람이 근 3천 인이었는데 봄에서부터 여름까지 하였으며, 보리가 익고나서야 파하였습니다. 선조(先朝)께서는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이 잘 안집(安集)시키지 못하여 이렇게 이산(離散)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여겨 매양 흉년을 당하면 반드시 도신과 수령을 엄히 계칙하여 만일 한 명의 백성이라도 제 곳을 잃고 떠도는 사람이 있으면 도신과 수령에게 마땅히 중률을 시행하겠다고 하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령이 된 사람들은 거개가 모두 분주히 뛰면서 걱정하였으며 한 사람이라도 다른 곳으로 전입(轉入)할까 두려워하여 심지어는 자기가 먹을 것을 가져다가 먹이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진구(賑救)하여 구제하기에 급급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실상은 또한 죄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제도 미리 더 신칙(申飭)하여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 한 말 곡식 한 되 쌀이라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수합(收合)하여 저장하여 두었다가 내년에 접제(接濟)할 방도로 삼게 한다면 수령들이 각기 마음을 써서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여 힘써 준절(撙節)히 하는 것을 따르게 될 것이니, 이 또한 효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의당 몸소 절검(節儉)하는 것을 하후(夏后)가 검소한 옷과 거친 밥을 먹고 위(衛) 문공(文公)이 대포(大布)와 대백(大帛)을 입은 것처럼 하시어 표솔(表率)하는 방도로 삼으신다면 성교(聖敎)에서 이른바 부귀한 집의 반찬 비용이 만전(萬錢)이라는 것과 천례(賤隷)들이 초서(貂鼠)를 입는다는 것도 절로 금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사치하는 풍습이 너무 치성한 것 때문에 조정에 나아와서 탄식을 드러내니, 상신(相臣) 황희(黃喜)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청컨대 그것을 금단시키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뒤 며칠이 지나 거친 베로 공복(公服)을 만들어 입고 백료(百僚)의 위에 앉아서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바야흐로 사치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계시므로 수상(首相)이 이런 공복을 입었으니, 감히 공복을 이와 걸맞지 않게 할 경우에는 마땅히 무거운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니, 이에 백료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하루 안에 사치스런 풍조가 갑자기 변하여졌으므로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하여 오고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조화(造化)시킬 수 있는 권한을 쥐고서 도솔(導率)하는 책임을 맡고 계시니, 만일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이루려고만 하신다면 이는 단지 한번 전이(轉移)시키는 사이의 일인 것입니다. 지난 계미년104) ·갑신년105)
대저 우리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덕으로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나간다면 인(仁)을 이루 다 쓸 수 없는 것은 물론 정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방금 난역(亂逆)이 비록 제거되기는 했지만 거괴(巨魁)가 아직도 대부분 평안히 살아 숨쉬고 있고 조저(朝著)가 약간 평안하여지기는 했지만 백성들이 아직도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받고 있으니, 외면의 기상(氣象)은 편안하고 한가한 세계(世界)같을 뿐만이 아닙니다만, 실상은 아침 저녁도 보존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이때가 바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손발을 물에 적시고 모발(毛髮)을 불에 그을려 가면서 경황없이 서둘러 불에 타는 속에서 구해내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는 것처럼 할 때인데, 어떻게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 곁에 서서 구경만 하면서 앉아서 성패(成敗)가 판가름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인후(仁厚)함이 뛰어나시지만 분발하는 것이 조금 부족하고 온공(溫恭)함은 여유가 있으시지만 진작(振作)하는 것은 부족하시어 호령을 발하여 시행하는 즈음에 천둥이 치고 태풍이 불듯이 만회(挽回)하고 알선(斡旋)하는 거조가 없으시니, 신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장차 나태하여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데로 귀결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힘써 행하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방금 가뭄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때를 당하여 경근(敬勤)이란 두 글자를 제일의 의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비록 노생(老生)의 상담(常談) 같기는 합니다만 실상의 지극한 이치는 본디 이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정관(貞觀)106) 연간에는 쌀 한 말의 값이 3전(錢)이 되게 한 정치를 이룩했었습니다만 태종(太宗)은 이를 위징(魏徵)이 인의(仁義)를 행하도록 권면한 데서 온 공효로 돌렸습니다. 전하께서도 참으로 부지런하고 조심하는 마음가짐으로 오랫동안 연마하여 공을 이루신다면 뒷날 쌀 한 말의 값이 3전이 되는 아름다운 정치가 없을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함흥(咸興)의 본궁(本宮)은 곧 우리 성조(聖祖)께서 용잠(龍潛)하시던 구기(舊基)입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울 창창하여 아직도 당일의 수택(手澤)이 남아 있고 궁전(宮殿)이 엄숙하고 근엄하여 아직도 유민(遺民)들이 우러러 의지하고 있으니, 상재(桑榟)의 고향은 거의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풍산(豊山)·패수(沛水)와 같고 활과 삿갓을 보장(寶藏)한 것은 주(周)나라의 홍벽(弘壁)·완염(琬琰)과 같으니, 이것이 얼마나 지중(至重)하고도 지경(至敬)스러운 곳입니까? 그런데 삼가 듣건대 향사(享祀) 때에는 단지 내사(內司)의 소임(所任)으로 하여금 관천(祼薦)하는 예(禮)를 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신은 의당 전주(全州)에 있는 경기전(慶基殿)의 예(例)와 같이 인근에 있는 수령을 택차(擇差)하여 제향을 지내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치된다고 여겨집니다. 국가의 사전(祀典)은 오세(五世)가 되면 조천(祧遷)하게 되어 있는데 세자(世子)의 묘(廟)에 이르러서도 그 예(禮)는 이를 따른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 소현묘(昭顯廟)107) 는 이미 신위(神位)를 철거하고 묘향(廟享)을 파하기에 합당한 것인데 더구나 처지가 제향할 바가 아니고 또 불경(不經)스러운 것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순회 세자(順懷世子)108) 의 신위(神位)가 아직도 봉은사(奉恩寺)의 한 칸 방에 봉안되어 있는데, 매양 기일(忌日)이나 명절(名節)을 당하면 치곤(緇髡)들이 제향을 지낸다고 합니다. 당초 이 절에다 이 신위를 봉안하게 된 경로가 매우 의아스럽고도 괴이합니다. 세상에서는 혹 그 묘(墓)가 있는 것을 인하여 원당(願堂)109)
대저 원(園)의 뜻은 능(陵)의 버금이고 묘(墓)보다는 중한 것입니다. 삼가 한(漢)나라와 송(宋)나라의 고사(故事)를 상고하건대 모두 성인(聖人)을 낳으시어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주인이 되게 한 데 대한 공을 갚고 덕에 보답하기 위한 방도였던 것인데, 아조(我朝)에서 봉원(封園)하는 것도 또한 이를 모방하여 행하는 것으로 실로 조상에게 제사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명원(仁明園)을 창설한 데 이르러서는 끝내 고례(古例)가 아닙니다. 원과 묘가 다른 것은 단지 한 글자 사이를 다투는 것이지만 융쇄(隆殺)하는 즈음에 있어서의 예의(禮義)는 절연(截然)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비록 묘라고 일컫더라도 다른 빈어(嬪御)의 산(山)에 견주어 보면 이미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인명원(仁明園)의 원(園)자는 이를 그대로 보존시켜 후세에 보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모든 예제(禮制)에 관계된 것은 이전(彛典)을 따르시어 그 척도(尺度)를 어기지 않게 해야 하고 따라서 이렇게 예법에 없는 예(禮)는 의당 재처(裁處)가 있어야 합니다. 지난번 전하께서는 특별히 고(故) 충신(忠臣) 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 등의 절의(節義)를 생각하시어 증직(贈職)하고 사시(賜諡)하라는 명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백세(百世) 뒤에 지사(志士)들의 감동을 흥기시키고 충신(忠臣)의 눈물을 빚어내게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영월부(寧越府)에 대죄하고 있을 적에 그때의 사적(事蹟)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수립(樹立)이 더욱 우뚝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비추었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이미 공조 참의에 추증하였습니다만, 그의 우뚝하고 큰 충절(忠節)을 논한다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사람들과 백중(伯仲)이 된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네 신하에게 추증하고 사시하는 때를 당하여 오직 이 엄흥도만 누락되는 것은 실로 흠전(欠典)이 됩니다. 만일 네 사람의 예(例)에 의거 거행하는 은전을 받게 된다면 성조(聖朝)에서 표장(表章)하는 도리가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에 절실한 말이 많아 바야흐로 깊이 유념하려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품처(稟處)할 만한 것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복주(覆奏)하게 하겠다. 내수사를 혁파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그대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병신년110)
하였다.
장령 최경악(崔景岳)이 상소하기를,
"요즈음 걱정스러운 일이 일곱 가지입니다. 성상의 학문에 꾸준하고 빛나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첫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위와 아래가 서로 믿어주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두 번째로 걱정스러운 일이고, 여러 신하들이 일을 맡아 나서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세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인재를 찾아 등용하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네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민생(民生)을 보살펴주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다섯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언로(言路)가 트여 있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여섯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기강이 바로잡히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일곱 번째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오늘날 경연(經筵)의 관원들은 학문에 부족한 면이 많고 성의 또한 모자라서 이따금 책을 끼고 연석에 들어가도 성상의 마음에 필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강(進講)하는 날이 매우 드뭅니다. 이에 경연은 거의 폐지되다시피 되었고, 관직(館職)은 간혹 비어 있는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정사하는 요체와 당면한 폐단에 대하여 일찍이 자문(諮問)한 적이 없으니, 성상의 묻기 좋아하는 성의에 처음과 끝이 이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신하들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받들어 보좌하는 신하들이 더러는 성실함이 부족하여 믿음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애써 건의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나선다고 의심을 하시고,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과격하게 군다고 의심을 하십니다. 여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 그에게 패거리가 있는 것으로 의심을 하시고, 죄과에 대하여 논척하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으로 의심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신하들에 대한 통제가 정도에 지나치고 예우하는 대접이 꽤 무너졌습니다. 이 때문에 이름이 조적(朝籍)에 오른 사람은 항상 느긋하고 온화한 기상이 적고 늘 황급해 하고 두려운 생각을 지니다 보니, 임금의 도는 나날이 드세어지고 신하의 도는 나날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국가가 관청을 설치하여 직임을 나눈 바에는 각기 유사(攸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재상이라는 사람들은 묘당에서 토의한다는 것이 고작 자질구레한 사무에 불과하고, 백성과 나라의 이해(利害)에 관한 것은 한 번도 건의하거나 설행한 적이 없으며, 총재(冡宰)라는 자는 나라의 공기(公器)를 자기의 사사로운 물건처럼 보고 있는데도, 그의 큰 세력에 눌리어 누구 하나 감히 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리가 가까운 사람이면 기어코 발탁하여 올리려고 하고, 또 사람을 색목(色目)에 따라 배치하여 마치 보기좋게 구색을 맞추어놓는 듯이 합니다. 홍문관 관원에 선발된 사람은 단지 문지(門地)와 벌열(閥閱)의 고하만을 살피고 문학(文學)이 있고 없고에 대해서는 따져보지도 않으며, 사색(四色) 당파로 참작하여 구차하게 수효를 채울 따름입니다. 간관(諫官)으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임금의 결함과 부족한 면을 보충해주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자기와 의견이 같으면 패거리를 짜고 의견이 다르면 공박하여, 단지 자기의 사정(私情)만을 이룰 뿐입니다. 이외에 여러 관청의 관원들의 경우도 자기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른 채, 그저 날이 가고 달이 차서 더 높은 자리로 승진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감사(監司)라는 자는, 봄철과 가을철에 고을을 순찰하는 업무를, 유람하며 관광하는 기회로 여기고, 겨울과 여름에 수령들의 치적을 평가하는 일은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고을의 수령이란 사람들은 백성들에게 법도없이 수탈하여 자신을 살찌울 일만을 생각하고, 권세 있는 고관(高官)을 잘 섬겨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절도사로 말하면, 형벌을 엄하게 하는 것으로서 자기의 위신을 높이고, 백성들을 모질게 착취하여 자기 생활에 보태며, 진영(鎭營)의 장수(將帥)들은 먼저 군졸이 몇 명인가부터 물어가지고 군포(軍布)의 많고 적음을 가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안팎의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자리나 채우고 있을 따름이니, 이것이 세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수용(收用)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고 있으나, 시속에 맞추어 약삭빠르고 영리하게 구는 자는 항상 선발이 되고,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 벼슬길에 나오는 데 대해 소원하게 여기는 사람은 찾아내는 대상에서 빠집니다. 공경(公卿)의 자제들은 못하는 벼슬이 없는데, 시골의 선비들은 발탁될 길이 없습니다. 도(道)에서 천거한다는 것도 서로의 안면 관계에 따르고 무직(武職) 또한 이력(履歷)만을 따르니, 어떻게 모든 관원을 바로잡아 여러 정사를 빛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네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전하께서는 소민(小民)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까 염려하고 계시나,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탐오(貪汚)하는 기풍이 성행하다 보니, 암행 어사가 염탐을 하더라도 백성들의 고통을 수소문하여 아뢰는 바가 전혀 없고, 환곡에 대한 납부 기한을 물려주더라도 실질적인 혜택을 받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봄에 꾸어주어 겨울에 받아들임에 쭉정이가 태반이라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모두 시달리게 되고, 군포(軍布)와 신역(身役)을 딱히 받아낼 곳이 없어 이웃과 친족들이 그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궁차(宮差)를 없앤 것은 실로 훌륭한 조처였으나, 관청 하인들의 침탈은 여전합니다. 서울에 바칠 때 인정(人情)을 쓰는 것은 본래 금령(禁令)이 있는데도 관청 서리들의 수탈은 갈수록 심합니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장차 유망(流亡)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다섯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떤 일을 당하게 되어도 바른 말을 구하고, 재앙을 만나도 바른 말을 구합니다만, 올린 장소(章疏) 가운데 어쩌다가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조금도 가차없이 현저하게 거부하고 배척하며, 또 그런 글을 계속해서 올릴까봐 염려되면 즉시 정원을 시켜 물리치게 합니다. 이 때문에 언책(言責)을 맡고 있는 자는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고, 지방에 나가 있었다고 핑계대는 것을 묘책(妙策)으로 삼습니다. 바른말을 하려는 자에 대해서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 사람을 세상에서는 조심성있는 사람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하여 전하의 조정에 바른말이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임금 앞에서 따지거나 조정에서 간쟁하는 것은 바랄 수도 없게 된 지 오래이고,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일조차 구경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그저 무사 안일한 태도로 날짜만 보내고 말할 길이 막힌 것이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는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여섯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나라의 기강이 점차 해이하게 되어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간사한 아전들이 나랏돈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고, 사나운 군졸들이 조정 관원을 모욕합니다. 과장(科場)을 신칙하는 분부가 엄한데도 난잡한 일은 계속 발생하고,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는 데 대하여 여러 차례 자문을 구하였지만, 거행하는 것이 불성실합니다. 세력이 있고 없음만 살피다 보니 옥송(獄訟)은 억울한 판결이 많고, 잇속만 추구하다 보니 분경(奔競)이 날로 심해갑니다. 심지어 속임수가 유행처럼 되다시피 하여 명령이 시행되지 않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무릇 이 일곱 가지의 걱정거리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성상께서 위에서 애를 쓰고 아래에서 좋은 의견들이 수없이 올라가더라도, 실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전하는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서북 지방의 유민(流民)들을 살펴보면,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데 대해 뭇의논이 다들 그렇다고 말합니다. 장마와 가뭄의 피해를 상주(上奏)할 때에도 이미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기근을 구제하는 대책은 아예 설시(設施)하지도 않았습니다. 10월에 창고를 봉인(封印)하자 온 도민(道民)들이 모두 통곡하면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애를 이끌고 흩어져 사방으로 떠나갔습니다. 해서(海西) 지방과 같은 곳은 산골에 가까이 인접한 여러 고을이 바로 큰 흉년이 들었는데도, 방백(方伯)이라는 자는 이를 도외시한 채 그들이 떠나가는 대로 놔두었습니다. 양서(兩西) 도신(道臣)들에 대해 모두 유배시키는 법을 적용해야 마땅합니다.
죄인들을 서북(西北) 지방에만 귀양보내고 있는데, 이런 흉년을 당하여 주객(主客)이 다같이 쪼들리게 됩니다. 농사가 조금 잘 된 남쪽 고을에 이배(移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영남(嶺南)의 도신(道臣)은 자기 친척의 원수를 갚으려고 상주(尙州)의 유리(由吏)와 방기(房妓)에게 모두 엄한 형장을 가하여 한 해가 넘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연전에 암행 어사가 몰래 조사를 할 때에 상주 목사 심기태(沈基泰)의 허다한 잘못된 정사가 유리(由吏)로 인해 숨겨지지 않았고 방기(房妓)를 통하여 사실대로 공초(供招)되었습니다. 이일은 죄줄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사적인 청탁을 곡진히 따랐기에 이와 같이 중하게 다스렸던 것이니 이로부터 누군들 어사를 두려워하며 사실대로 말하려고 하겠습니까. 또 감영의 청사(廳舍)를 짓기 위하여 제창(濟倉)의 돈 3만 냥을 가져다가 쓰고도 결국은 백성들에게서 거두는 바람에 원성(怨聲)이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이상 두 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가 사정(私情)에 따르고 불법적인 일을 하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경상 감사 이조원(李祖源)에 대하여 속히 파직시키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욱(李煜)은 자기의 비장(裨將)을 시켜 연로(沿路)에서 소란을 피우게 하였는데 역졸을 잘 달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때려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인명(人命)이 얼마나 중대한 것입니까. 더구나 명령을 전달하는 자리는, 관계된 바가 더욱 어떠한 것입니까. 그런데 감히 이렇게 죽여버리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이욱에 대해 삭직(削職)하는 법을 어서 적용하고, 원범인(元犯人)은 기어코 목숨으로 보상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원택진(元宅鎭)이 환곡을 내다가 팔아먹은 일은 모든 사람들이 다 본 일이고, 양전(量田)을 하면서 돈을 거둔 일은 온 고을 사람들이 다들 원망합니다. 두 명의 첩(妾)이 뒤질세라 앞다투어 뇌물을 받아들이고, 세 건의 살인 옥사(獄事)를 끝내 판결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종래 사람들의 말이 실로 거짓말이 아니었는데 단지 그가 속여 공술(供述)하는 바람에 그냥 석방되어 제자리에 돌아가서는 도리어 의기양양하여 더욱 보란듯이 탐학(貪虐)을 부렸습니다. 또 본현(本縣)에 보관한 베를 팔아가지고 입본(立本)하여 모조리 자기 주머니에 넣었으며, 작년에 원(園)을 옮길 때 숙마(熟麻)·채품(菜品) 등의 물건들은 고을 수령들이 모두 관청에서 자비(自備)하였는데 오직 저 거창(居昌)만은 원을 옮길 때에 쓰는 물건이라고 하면서 돈으로 대신 인부(人夫)들에게서 받았는데, 그 수량이 거의 수백 냥이나 되었습니다. 또 군사 조련을 한 뒤에는 군사들을 호궤(犒饋)한다는 명목으로 여덟 사람을 내세워 쌀을 거둔 것이 자그마치 80여 석(石)이나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온 고을이 뒤숭숭하여 도탄에 빠진 듯하였습니다. 청컨대 원택진에 대하여 삶아 죽이는 법을 적용하소서.
함안(咸安) 전 군수 장제두(張齊斗)는 권세가를 잘 섬겨 실없이 헛된 명예를 얻었습니다. 일찍이 함안에 재임하면서 그의 친형을 장사치로 꾸며가지고 마포(馬浦)에 매복시켜 두고서 장삿배를 집결시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본 쌀 1천 5백 석과 밀 1천 5백 석을 전부 자기 집에 배로 실어갔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북방의 도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더구나 재작년에 잠깐 교체되었다가 금세 도로 유임되었을 때 새로 부임할 관원의 쇄마전(刷馬錢)이라고 핑계대고 강제로 5백 냥을 받아내었으니, 그의 탐욕스러움을 알 만합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가 잘 다스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또 북쪽 고을을 맡겼으니, 이것은 전적으로 즉묵 대부(卽墨大夫)와 아 대부(阿大夫)처럼 헐뜯는 말과 칭찬하는 말이 실제와 상반되는 데에 연유합니다. 장제두에게도 장률(贓律)을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태학(太學)이란 어진 선비들이 모인 곳이고, 나라의 원기(元氣)가 되는 셈입니다. 공의(公議)를 주장하여 올곧은 기운을 신장(伸張)하므로, 더러 관원에 대하여 벌을 적용함에 언론(言論)이 굽혀지지 않으며, 더러 임금에게 항장(抗章)함에 그 풍모가 볼 만하게 살아나곤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선비들의 풍습이 날로 나빠져서, 조정 관원에게 모욕을 받고 임금에서 경시당한 결과, 그들의 말은 성상의 마음에 들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공자(孔子)를 배우고 있고 그들의 마음은 나라에 쏠려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비답을 내려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올린 글을 불에 태워버리시니,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처럼 과도(過度)한 일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외방(外方)의 유생들 가운데 간혹 글을 올리는 이가 있으면 밖에서부터 손을 내저어 물리치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들은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도록 타고 온 말을 내팔고 입은 옷을 전당잡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태학에서 글을 올리면 반드시 비답을 내리고 불사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외방 유생들의 상소는 후원(喉院)에 분부하여 즉시 봉입(捧入)하도록 해야 합니다.
고(故)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충성과 절의(節義)는 세 재상과 여섯 신하들보다 밑돌지 않습니다.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할 데 대해서는,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이미 이러한 논의를 제기하였고, 고(故) 참판 박사정(朴師正)과 유신(儒臣) 신복(申馥) 또한 연석에서 품지(稟旨)하고 상소로 호소하여, 연이어 승전(承傳)이 있었지만 아직껏 조용(調用)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외람되고 잡된 무리들을 살펴보면 일찍이 조상의 음공(蔭功)도 없는 사람들인데, 이런 자들은 벼슬에 등용이 되는 가운데 저들은 등용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사(私)가 공(公)보다 우세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흥도의 후손을 특별한 규례로 수용(收用)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은 것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있었겠는가. 시정(時政)의 잘잘못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민생(民生)의 고락에 대해서조차 자세하게 진술하는 사람이 없으니, 바른말을 듣기 싫어했다는 책임을 내가 피할 수 없다고 하겠다. 너의 상소를 봄에 처음부터 끝까지의 천만 마디 말이 나라를 걱정하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맨 첫머리에 얘기한 문제는, 너의 말이 옳으니 마땅히 명심을 하겠다. 그 다음으로 얘기한 문제인 위 아래가 서로 믿지 않는다는 점도, 정말 네 말과 같으니 이 또한 유의하겠다. 그 다음에 얘기한 시정(時政)의 폐단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었다. 여러 신하들 가운데는 일을 맡아 나서는 자가 없고 인재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실제가 없다고 말한 두 가지는, 고질적인 병통에 대하여 잘 지적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언로(言路)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너의 말도 역시 좋다. 다만 근래에 이따금 파면, 삭직시키거나 쫓아내 귀양보내는 일이 있었던 것은 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이었겠는가. 그 허물을 보면 어진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인 ‘관과(觀過)’ 두 글자에 대하여 너도 부디 생각해 보도록 하라.
나라의 기강이 점차 해이하게 되고 조정이 존엄하지 못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첫번째로 유의할 점이다. 여러 가지 얘기한 바가 또한 모두 들어둘 만한 의견이었다. 특별히 형벌과 포상으로 권장하고 징계하는 일에 유의할 생각이다. 끝부분에 얘기한 일 가운데 양서(兩西) 도신을 귀양보내자는 일은, 마땅히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을 기다려 처분을 할 것이다.
북도의 백성들이 곤경에 빠져 있다는 말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거듭되는 흉년과 백성들의 사는 형편이 비록 양서(兩西)와는 차이가 있다고 치더라도, 어찌 모두 다 거론하지 않았는가. 서북 지방에 편배(編配)하는 것을 다른 곳에 옮겨 정하라는 일은, 마땅히 도류안(徒流案)을 가져다 보고 나서 구별하여 조처할 것이다.
이조원(李祖源)의 일은, 방백(方伯)은 체면이 중하고 뜬소문이란 아무래도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이다만, 사적(私的)인 청탁을 갖가지로 들어주었다는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제창(濟倉)의 돈을 멋대로 쓰고 백성들에게 근거없이 거둬들이기까지 한 한 가지 일은, 특히 애매하게 놔둘 수 없는 일이다. 마땅히 조사하여 처결하겠다.
이욱(李煜)의 일은, 얘기한 대로 시행을 하겠다. 그 군관(軍官)은 완백(完伯)으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하게 형신하도록 해서 과연 틀림이 없으면 법대로 처리하여 목숨으로 보상을 시키겠다.
원택진(元宅鎭)의 일은,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가. 네가 이른바 삶아 죽이자고 한 말은 혹시 지나친 말이 아닌가. 일개 택진을 아껴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풍속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조사해서 처리를 하겠다. 그런데 작년의 더없이 중요한 역사(役事) 때에 실·삼·채소·과일 이외에도 백성들의 부조(賻助)라는 명목 하에 공물(貢物)로 거둘 것에 대하여 특별히 모두 면제시켜주고 그 대신 내탕고(內帑庫)의 물건들을 썼으며, 이와 아울러 균역청(均役廳)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런데 거창(居昌) 한 고을에서 백성들로부터 받아냈다고 하니 매우 의아스럽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위반 사항이 있으면 그 죄가 더욱 어떻겠는가. 이 또한 조사를 하여 처결하겠다.
장제두(張齊斗)의 일은, 두 건의 범죄가 이미 조사하여 밝혀내기 어려운 일이 아닌만큼, 만일 비슷하기라도 하다면 그처럼 은덕을 저버린 자에게는 마땅히 갑절로 더한 형률을 적용할 것이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진정(賑政)이 끝나는대로 잡아다가 엄히 신문하도록 할 것이고, 우선 앞의 사건과 똑같이 조사하겠다.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일은, 어찌 좋아서 한 처분이겠는가. 그리고 외방에서 상소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신칙을 하였으니, 종전과 같은 폐단은 없어질 것이다.
엄흥도(嚴興道) 후손에 관한 문제는, 전조(銓曹)에 신칙하겠다."
하였다.
14.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장릉(莊陵)019)경기도 유생 황묵(黃默) 등이 상언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충효 대절(忠孝大節)은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다고 호소하고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했는데, 전교하기를,
"화의군을 그 위치와 그 사당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귀신의 이치로 보나 사람의 마음으로 보나 다 합당하다고 할 만하나 추배할 사람이 어찌 화의군 한 사람 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노량(露梁)을 지나다가 육신의 사당과 무덤 곁에서 한참 동안 행차를 멈추고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행전(行殿)에서 묵을 때 감회를 금치 못하여 60구의 제문을 촛불을 들여오게 하여 불러주어 쓰게 하였으니, 그처럼 깊은 감회로 그와 같은 정중한 예를 베풀었었다. 육신은 실로 혁혁하고 뛰어나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있지만 금성 대군(錦城大君)과 화의군의 그와 같은 절의가 종실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욱 특이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사육신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하는 것이 실로 절의를 권장하고 충성을 표창하는 조정의 정사에 부합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공사간에 상고할 수 있는 문헌들을 널리 상고하여 하나로 귀결시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고 정승 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의 시장(諡狀)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遜位)했을 때 공은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의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남쪽 지방의 인사들과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책을 꾸몄다. 하루는 보흠을 불러 격문을 초하게 하였는데, 관노(官奴)가 벽 사이에 숨어서 몰래 엿듣고 공의 시녀와 내통하여 격문의 초고를 훔쳐서 달아났다. 그런데 기천 현감(基川縣監)이란 자가 급히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가서 고변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보흠은 잡혀 사형을 당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기진(李箕鎭)이 지은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의 시장에는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이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공도 그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함양(咸陽)에 안치되었다가 귀양지에서 죽었다.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과 함께 가족은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하는 화를 입었다. 중종 갑오년에 비로소 선계(璿系)에 다시 포함시켰고, 명종 때 또 관작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先朝) 갑인년에 종부시가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손위할 때 시습은 마침 삼각산(三角山) 속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했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신흠(申欽)이 지은 산중독언(山中獨言)에는 ‘남효온(南孝溫)이 소릉(昭陵)020) 을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열경(悅卿)021)열경이 말하기를 「공은 나와 다른데 어째서 세도(世道)를 위해 벼슬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니, 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감사 최현(崔晛)이 지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는 ‘경태(景泰)022) 갑술년023)
고 판서 신 이재(李縡)가 지은 조여(趙旅)의 비명에는 ‘경태계유년024)숙종 기묘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공의 절의를 보고하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사당을 함안(咸安) 백이산(伯夷山) 밑에 세우고 김시습·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원호의 묘갈명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한 뒤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에 3년 상복을 입은 뒤 고향집으로 돌아가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무인년025)
선정신 성혼(成渾)이 지은 잡저(雜著)에는 ‘성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일찍이 서울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불러들여 잔치에 참여시켰는데, 유독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끝내는 유배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권자신(權自愼)은 상왕(上王)의 외숙인데, 육신과 함께 복위를 도모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장릉지(莊陵誌)에는 ‘송석동(宋石仝)은 육신과 함께 잡혀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는 ‘권절(權節)은 귀머거리 노릇을 하며 병들었다 핑계하고는 문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일생을 바쳤다.’ 하였습니다.
장릉지에는 ‘정보(鄭保)는 권세 있는 간신을 대놓고 꾸짖다가 거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뻔 했는데 세조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 줬다.’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조상치(曺尙治)의 묘지(墓誌)에는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일생 동안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비석에 글을 써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 하고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노산조라고 쓴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낸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며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무덤앞에 세우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시 제현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살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그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고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바친 의리에 있어서는 살았건 죽었건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금성 대군 이유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충성을 다해 의리에 죽었습니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종실의 친족으로는 금성 대군을 꼽고 조정의 경우는 육신을 꼽으니, 육신의 사당에 어찌 금성 대군의 제향을 빼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화의군·한남군·영풍군 세 사람도 각기 그 본분을 다했으니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성 대군에 비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김시습·남효온·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 등 6인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인데 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당에다 함께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뛰어난 자로서 김시습은 세종의 특별한 신임에 감격하여 미친 사람처럼 종적을 숨기고 절간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남효온은 소릉(昭陵)의 복위를 요청하고 육신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 내용을 완곡하게 쓰고 자기 뜻을 고수하였으니, 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에 ‘만약 매월당(梅月堂)과 남 추강(南秋江)을 여기에 제사지내고 또 사당 옆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에서처럼 한다면 일이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에 육신(六臣)을 한꺼번에 모두 제사지내는 것을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선정이 이미 정한 논의에 따라 김시습과 남효온 두 사람을 추향(追享)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보흠(李甫欽)과 권자신은 그 사적은 같지만 제단을 따로 설치하자는 선정의 논의로 볼 때 그 사이에 경중을 둔 것 같으며, 허후(許詡) 등 7인이 이룬 바는 비록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보흠과 권자신에 비교하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추배(追配)하는 문제는 신들이 감히 독단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사간의 문헌을 가져다가 절의가 가장 현저하고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가려낸 결과 육신과 금성 대군·화의군 이외에도 순절하거나 은둔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릉지에 보이는 자만도 거의 1백여 인이 넘지만 이름만 있고 행적은 없어 대부분 상고하기 어렵고 단지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묘조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은 모두 세종의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 세조의 변란 때 함께 죽어 그 곧은 충성과 큰 절의가 역사책에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은 곧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일찍이 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자년026)성승(成勝)은 곧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역시 충문공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상 두 집안의 부자가 이룩한 것이 이처럼 뛰어난데, 중림의 경우는 전하의 무신년027) 에 특별히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성승은 아직도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변란 때 황보인·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죄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영종 때에 이르러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와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은 장릉지를 살펴보면, 정축년 금성 대군이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을 때 종친부에서는 어는 유(瑜)028) 와 죄가 같으므로 혼자만 살려줄 수 없으니 안치·금고시키자고 아뢰었고, 종부시에서는 영(瓔)029) ·어·전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므로 왕실 계보에서 삭제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어·전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면, 어·전은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인데 양빈은 곧 단종을 젖먹여 기른 사람입니다.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어가 그 일에 참여하였다 하여 드디어 함양(咸陽)에 안치되었고, 정축년 금성 대군의 일이 발각되자 양빈이 내응하였다 하여 병자년에 모두 화를 당했습니다. 중종 때 명으로 왕실 계보에 다시 속하게 하였고 명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때 단종을 복위하면서 시호를 내려주고 예장(禮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종 갑인년에 종부시에서는,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었고, 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로 청하기를 ‘저 세 신하가 모두 왕실의 지친으로서 목숨을 바치면서도 절개를 바꾸지 않은 것은 실로 육신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심지어는 엄흥도(嚴興道)와 같이 미천한 자도 오히려 육신과 함께 제향을 받는데, 이 세 신하만은 그 높고 빛나는 충렬이 해와 달을 꿰뚫고 우주를 지탱할 만한데도 표창하는 은전은 도리어 엄 호장(嚴戶長)030)어와 전은 유와 영과 마찬가지인데, 금성 대군의 청안(淸安) 사당에 화의군만 배향하고 한남군과 영풍군을 배향하지 않은 것은 결국 결함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간공(淸簡公) 김시습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부식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 하였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단종 초년에 원주에 은퇴하여 살다가 단종이 승하하시자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냈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숙종 24년 무인년에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는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입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의 잡저(雜著)에 ‘희가 성삼문의 사건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파주(坡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하였을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유독 담수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갑진년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경태(景泰)갑술년031)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단종이 손위하게 되자 여러 유생들과 하직하고 함안군(咸安郡)으로 돌아가 은둔하여 소요 자적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숙종 28년 임오년에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고, 전하의 신축년에 이조 판서로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숙공(忠肅公) 권절(權節)은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거사하는 문제를 은밀히 말했으나 귀먹은 체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은둔하여 한평생을 마쳤다.’ 하였습니다. 숙종 임오년에 강원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육신의 사당에 사액(賜額)할 것과 권절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갑신년032)
고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는 《갱장록(羹墻錄)》 화속편(化俗篇)을 상고해 보니 ‘세조가 일찍이 박팽년 등을 논평하여 당대의 역적이고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다.’ 하였고, 그 아래에 ‘부제학 조상치가 상소하여 치사를 요청하니 백관에게 명하여 도성 문 밖에서 전별하도록 하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묘표에 ‘공은 성삼문·박팽년 제공과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았다.’ 하였고, 그 유사(遺事)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은 뒤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스스로 돌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지묘」라 하였고, 또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영천사당기(永川祠堂記)에 ‘육신은 죽었고 공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 자취가 드러나 쉽게 보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종을 복위한 뒤에도 육신과 함께 노량진의 사당에서 제향을 받지 못한 것은 후세의 공론을 기다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정숙공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희가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삼문 등이 죽자 희도 역시 엄한 국문을 받고 귀양갔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그 뒤 3년 만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정보(鄭保)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던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공은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으니 ‘죄인을 국문하느라 궁궐에 가 있다.’ 하자, 보가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명회가 즉시 상에게 아뢰어 세조가 친국을 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하다가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감해 유배하였습니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곧 문종의 부마입니다. 단종 을해년에 광주(光州)로 귀양갔다가 정축년 금성 대군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자, 종친부가 ‘정종·송현수(宋玹壽)·어(𤥽)·전(瑔)의 죄는 나라의 법으로 보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여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영조 무인년에 특명으로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는데, 영조 때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단종의 장인으로서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금성 대군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창절사(彰節祠)에 추배(追配)하는 일은 그 예법이 매우 중대합니다. 세 대신033) 의 뛰어난 절의나 박중림과 성승 부자가 보여준 특별한 절개는 마땅히 배향할 만하지만, 신주의 순위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안평 대군 및 한남군·영풍군은 금성 대군과 같은 형제이니, 다함께 죽계(竹溪)의 사당에 추배한다면 역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생육신을 사육신과 함께 제사지낸다 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만 선정신 송시열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를 상고하건대, ‘만약 매월당과 추강을 이곳에 배향하고, 또 사당 곁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대략 공주의 동학사(東鶴寺)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미 선정의 정론이 있어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지만, 나머지 네 신하의 똑같은 깨끗한 절의에 대해서는 역시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을 수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칭송할 만한 뛰어난 절의가 있긴 하나 이것은 사당의 규례에 관한 일이라 신들이 감히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달 경술일에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와 아뢰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자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육신의 일은 감히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세조의 하교에 ‘후세의 충신이다.’ 하셨고, 영양위(寧陽尉)의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 없다.’ 하셨다. 그 훌륭하신 훈계와 계책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 임시 방편에 통달하고 원칙을 부식한 성인의 깊은 뜻을 삼가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천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어찌 우리 후인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 행차할 때 민절사(愍節祠)034) 를 지나다가 옛날의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고 이어서 금성 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에 있는 사당에 추배하기 위해 사관에게 명산에 깊이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삼가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관이 복명하던 바로 그 날 강원 감사가 자규루(子規樓)의 옛터를 찾아낸 상황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도 한꺼번에 겹쳐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란 속일 수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이상하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이나 오종영(五宗英)035)
지난 숙종 무인년에 장릉(莊陵)을 복위했을 때 조정의 신하가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과 너무 가깝다는 말을 하자, 숙종께서 ‘무후의 사당이 길이 이웃에 가깝다[武侯祠屋長隣近]’는 두보(杜甫)의 싯귀를 인용하면서 헐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의론이 서로 엇갈려 끝내는 옮겨 세우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억울함을 되새기는 제사는 동학사의 실례를 취하고 제단을 만드는 제도는 달천(㺚川)의 실례를 모방하되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어, 본릉(本陵)036)
아, 예법이란 인정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신이나 인간이나 차이가 없다. 저 열렬한 영령들의 가시지 않는 울분이 길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장릉의 혼령도 오르내리면서 제물의 김과 향기가 물씬 풍길 때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이 일을 누가 근거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본도와 예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향하는 일에 대해 방금 전교를 내렸는데 내각(內閣)에 배식록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사판은 충신 사판이라 쓰고 제물은 밥은 큰 그릇에 한 그릇, 탕은 큰 주발에 한 주발, 나물과 과일은 각각 한 접시, 술은 한 잔으로 규례를 정하고 제관은 부근의 찰방으로 하며, 예관(禮官)이 내려가기 전에 제단을 만들고 사판을 만들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의례적으로 쓸 제문은 마땅히 지어서 내려보낼 예정인데, 이후에 본릉의 한식제에 쓸 향을 받아갈 때 함께 주어서 보낼 것이라는 것도 해도와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장릉의 일로 인해 생각해보니, 충정공(忠正公)037) 의 부친 박중림(朴仲林)은 시호가 있는데, 성승(成勝)은 충문공(忠文公)038) 의 부친으로 중림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홀로 빠져 있다. 이 어찌 더욱 큰 결함이 아니겠는가. 본관(本館)039)박계우(朴季愚)는 바로 대제학 박연(朴堧)의 아들인데, 연이 악(樂)을 제작한 것은 허 문경공(許文敬公)040)문경공의 아들 허후(許詡)는 계우와 동시에 순절했으나 후는 시호가 있고 계우만 유독 빠졌으니, 혹시 벼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독동(禿同)과 윤생(尹生)의 뛰어난 절의 또한 인멸시킬 수 없으니, 아울러 증직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단종조의 여러 신하가 절개를 지킨 것은 다 같지만 성과에 있어서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순위에도 귀천의 차이가 있다 하여, 장차 별단(別壇)을 설치하는 문제를 내각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도록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대신들 가운데 원임 각신에게 물으니, 원임 제학 이복원(李福源)은 말하기를 ‘배향하는 문제는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 이 명이 비록 묘정에 종향(從享)하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에 비하면 의미와 상황이 자연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에 벼슬한 적이 없거나 벼슬을 받지 않은 자는 비록 뚜렷이 기록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오직 엄흥도(嚴興道) 한 사람만은 육신의 반열에 나란히 세워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드문 은전은 간략한 것이 귀중하니, 간략하면 그 광명한 빛이 더욱 빛나고 확대하면 오히려 혹 근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드는 것은 표창하는 의리는 마찬가지이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로 인해 나온 조치이긴 하나 배식(配食)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인원수의 많고 적음에는 구애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원임 제학 채제공은 말하기를 ‘내리신 3책 가운데 있는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성상께서 직접 뽑아내신 것은 마치 저울 눈금을 가늠한 것처럼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 아래쪽에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물으신 일은 불쌍히 여기고 표창하시려는 성상의 마음을 삼가 이해할 수 있긴 하나 숫자는 많고 사적은 너무 소략하니, 만약 위의 항목에 든 뚜렷한 사람들와 똑같이 함께 제사지낸다면 혹시 예법이 번잡해질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신은 일찍이 영남 지방을 왕래한 적이 있으므로 선배들의 유적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금성 대군은 순흥(順興)에서 화를 당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 부근 고을에서는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서 북쪽 문을 막고 동쪽만 향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예전에 없었던 은전을 베푼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앞으로 행차하시는 길에 글을 올리는 자들이 더한층 많아져 이루 다 베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에 뽑아 기록한 자만으로 끊어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우리 성조(聖祖)041)
두 대신이 올린 의견에 혹은 ‘간편한 것이 귀중한 것이다.’ 하였고, 혹은 ‘이루 다 베풀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을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취사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절의를 지켜 죽어서 그 자취가 나라의 역사와 능지(陵誌)에 올려져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042) ·사의척(四懿戚)043) ·삼상신(三相臣)044) ·삼중신(三重臣)045) ·양운검(兩雲劒)046) 및 육신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과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 등 문경공(文敬公)047) ·문헌공(文獻公)048) 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상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과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자는 다시 신중히 참작해야 할 것이다.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는 대신들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충민단(忠愍壇) 등 여러 제단에 담장은 함께 하면서 제지(祭地)는 달리 한 전례가 바로 그것이다. 사적이 자세치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김승규(金承珪) 등 1백 90인은 별단에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049)김 문정(金文正)050) ·송 문정(宋文正)051)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또 고 처사(處士) 김시습과 태학생 남효온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변함이 없었으니, 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사에서 빠진 것은 미처 조처하지 못한 결함이다. 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에 추가로 제향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 배식하는 문제는 지금 수의한 것으로 인해 또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든다는 명을 내렸다. 32인의 제단에 지내는 제사에는 마땅히 축문이 있어야 하겠고, 제물은 처음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사판(祠版)은 ‘충신지위(忠臣之位)’라고 쓰되 감사에게 쓰도록 하라. 별단(別壇)의 경우는 사판 3개를 만들어 계유년·병자년·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각각 쓰도록 하라.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에다 성명을 죽 쓰되, 조사(朝士)를 한 판, 맹인·내시·군사·노비를 한 판, 여인(女人)을 한 판으로 해야 한다. 신위의 위치는 중신들의 왼쪽에 두되 조사의 경우는 약간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맹인·무당·내시·군사·노비의 자리는 약간 밑으로 내려야 한다. 제사지내는 의식에 축문을 쓰지 말고 제물은 각기 밥 한 그릇, 탕 한 그릇, 술 한 잔으로 하며, 헌관과 집사는 두 제단의 일을 겸하여 보게 해야 한다."
하였다.
정단(正壇)에 배식한 사람은 32인 【안평 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이용(李瑢), 금성 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이어(李𤥽), 영풍군(永豊君) 정렬공(貞烈公) 이전(李瑔), 판 중추원사 이양(李穰),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충민공(忠愍公) 송현수(宋玹壽),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돈령부 판관 권완(權完),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도총부 도총관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 병조 판서 행 별운검(行別雲劒) 충강공(忠强公) 박쟁(朴崝), 형조 판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증 이조 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증 이조 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증 이조 판서 행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증 이조 판서 행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증 병조 판서 행 도총부 부총관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 하백(河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집현전 수찬 허조(許慥),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순흥 부사(順興府使)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 도진무 정효전(鄭孝全), 증 공조 참판 영월부 호장 엄흥도(嚴興道).】 별단(別壇)에는 1백 인인데 사적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이 8인, 【평안 감사 조수량(趙遂良), 충청 감사 안완경(安完慶), 선공 감 부정 이명민(李命敏), 산릉 장무(山陵掌務) 이현로(李賢老), 형조 정랑 윤영손(尹鈴孫), 이조 좌랑 심신(沈愼), 안악 군사(安岳郡事) 황의헌(黃義軒), 고양 현감(高陽縣監) 고덕칭(高德稱).】 연좌되어 죽은 사람은 1백 90인이었다. 【지부(知部) 김승규(金承珪),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덕양군(德陽君) 이우량(李友諒), 참판 황보석(皇甫錫), 병사(兵使) 조숭문(趙崇文), 첨지중추원사 이석정(李石貞), 사간원 헌납 이승윤(李承胤), 진무(鎭撫) 원구(元矩),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경유(李耕㽥), 성균관 사예 조충손(趙衷孫), 군기 판사(軍器判事) 윤처공(尹處恭), 직장(直長) 김승벽(金承璧), 직장 황보흠(皇甫欽), 고양 현감 박하(朴夏), 군기 녹사(軍器錄事) 조번(趙藩)·이승효(李承孝)·민보창(閔甫昌)·민보해(閔甫諧)·민보석(閔甫釋)·윤경(尹涇)·윤위(尹渭)·윤탁(尹濯)·윤식(尹湜)·이건금(李乾金)·이건옥(李乾玉)·이건철(李乾鐵)·이백금(李白金)·이수동(李秀同)·조향동(趙香同)·조귀동(趙貴同)·김정(金晶)·하석(河石)·이보인(李保仁)·이차(李差)·김말생(金末生)·안막동(安莫同)·양옥(梁玉)·최노(崔老)·김상지(金尙志)·고염석(高廉石)·조석강(趙石岡)·박이녕(朴以寧)·황보가마(皇甫加麿)·황보경근(皇甫京斤)·김금목일(金金木壹)·김조동(金祖同)·김수동(金壽同)·이계조(李繼祖)·이소조(李紹祖)·이장군(李將軍)·이승로(李承老)·민석이(閔石伊)·윤개동(尹介同)·윤효동(尹孝同)·조계동(趙季同)·이해(李諧)·이심(李諶)·이사문(李沙門)·이주령(李住令)·이모(李謨)·이우경(李友敬)·김산호(金珊瑚)·김갯동(金㖋同)·김득천(金得千)·김복천(金卜千)·황경손(黃敬孫)·황장손(黃長孫)·황석동(黃石同)·이한산(李漢山)·최면(崔沔)·이수정(李守禎)·박수량(朴遂良)·임진성(任進誠)·김겸(金謙)·허축(許逐)·홍적(洪適)·홍구성(洪九成)·홍옥봉(洪玉峯)·최영손(崔泳孫)·최자척(崔自滌)·진유번(陳有蕃)·조유례(趙由禮)·성문치(成文治)·이문(李聞)·이숭례(李崇禮)·신경지(申敬之)·신맹지(申孟之)·신중지(申仲之)·신근지(申謹之)·김옥겸(金玉謙)·김광은(金匡殷), 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 고양 기관(高陽記官) 황중은(黃仲銀), 고양 기관 황식배(黃植培), 집현전 교리 박인년(朴引年), 집현전 수찬 박기년(朴耆年), 도진무(都鎭撫) 이유기(李裕基), 부사(府使) 성삼고(成三顧), 정랑 성삼성(成三省), 성균관 학유 하기지(河紀地), 박사(博士) 박대년(朴大年), 별시위(別侍衛) 이의영(李義英)·이정상(李禎祥), 중추원 녹사 이지영(李智英), 성균 생원 박헌(朴憲), 성균 생원 하소지(河紹地)·성맹첨(成孟瞻)·성맹평(成孟平)·성맹종(成孟終)·박순(朴珣)·박분(朴奮)·이공회(李公澮)·하호(河琥)·하연(河璉)·하반(河班)·유귀련(柳貴連)·유송련(柳松連)·유사수(兪思守)·박숭문(朴崇文)·송석동(宋石仝)·송창(宋昌)·송녕(宋寧)·최득지(崔得地)·최치지(崔致地)·김구지(金九知)·성삼빙(成三聘)·권서(權暑)·권저(權著)·최사우(崔斯友)·정관(鄭冠)·봉여해(奉汝諧)·김감(金堪)·김한지(金漢之)·김선지(金善之)·이호(李昊)·장귀남(張貴男)·이오(李午)·이말생(李末生)·심상좌(沈上佐)·박영년(朴永年)·황선보(黃善寶)·권구지(權九之)·김현석(金玄錫)·허연령(許延齡)·허구령(許九齡)·조청로(趙淸老)·이상손(李祥孫)·박양함(朴良諴), 관찰사 유귀산(庾龜山)·유오산(庾鰲山), 학생(學生) 심희철(沈希哲), 학생 박수명(朴守明), 순흥 품관(順興品官) 안순손(安順孫)·김유성(金由性)·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 순흥 기관(順興記官) 중재(仲才), 환관 김연(金衍)·김대정(金大丁)·한숭(韓崧)·지정(池爭)·이귀(李貴)·인평(印平)·유대(柳臺)·윤기(尹奇)·박윤(朴閏)·길유선(吉由善)·최찬(崔粲)·조희(曺熙)·서성대(徐盛代)·엄자치(嚴自治)·김득성(金得誠)·김득상(金得祥)·맹인 지화(池和)·나갈두(羅乫豆), 별감(別監) 돌중(乭中), 전농시(典農寺) 노비 목효지(睦孝智), 순흥(順興) 관노(官奴) 정유재(鄭有才)·범삼(凡三)·석정(石丁)·석구지(石仇知)·범윤(凡尹), 풍산(豊山) 관노 이동(李同), 순흥 군사 황치(黃緻)·신극장(辛克長), 여인으로는 궁녀 양씨(楊氏)·자개(者介), 이오(李午)의 아내 아가지(阿加之), 무녀(巫女) 용안(龍眼)·불덕(佛德)·내은덕(內隱德)·덕비(德非).】
사성(司成) 성종인(成種仁)이 상소하기를,
"신의 12대조 교리 성희(成熺)는 바로 충문공 성삼문(成三問)의 종숙(從叔)이며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의 부친입니다. 일찍이 삼문과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죽든 살든 마음을 바꾸지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병자년에 성삼문 등이 죽을 때 함께 국정(鞫庭)에 잡혀들어가 16차례나 형을 받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자 영남의 해변에 위리 안치되었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충분(忠憤)에 겨워 죽었는데, 이는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근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신의 할아버지가 사육신과는 생사를 비록 달리했으나 의리를 다하고 절개를 지킨 점에 있어서는 실로 차이가 없습니다. 요즘 베푼 은전은 천 년만에 한번 있는 기회로 홍문관과 내각에서 널리 상고한 것에 의거하여 모두 배향되는 특전을 입게 되었으나 신의 할아버지 희는 초계(抄啓) 속에 끼인 사람으로서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단지 제 자신에게 있어서만 불초한 자손이 될 뿐이겠습니까. 역시 거룩한 조정의 흠전(欠典)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할아버지 희의 충절이 매몰되어버리지 않도록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12대조인 고 교리 성희의 뛰어난 충성은 당시 순절한 여러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더구나 그 아들 담수는 이름이 생육신의 열에 있으니, 이 단에 이 사람을 제향한들 누가 지나치다고 하겠는가. 네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의 거취를 요량해온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 이외에 생육신처럼 그 이름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알려진 자로서 감찰 정보(鄭保), 교리 권절(權節), 부제학 조상치(曺尙治), 증 군자정(贈軍資正) 독동(禿同)·윤생(尹生), 판중추 기건(奇虔), 감찰 유자미(柳自湄), 예조 정랑 윤시(尹諰), 교리 구인문(具人文), 순검(巡檢) 송간(宋侃)과 너의 선조인 성희 및 성조(成炤) 등은 모두 배향할 만하지만 일을 근엄하게 하는 체통을 지키기 위하여, 그 사건에 죽은 사람이 아닌 경우는 제외시켜서 모두 다같이 신중히 하는 쪽으로 돌렸으니, 이 뜻을 네가 몰라서는 안된다."
하였다.
예조가 유학 이구상(李衢祥) 등의 상언으로 말미암아 아뢰기를,
"고 감찰 정보(鄭保)의 정충 대절(貞忠大節)은 생육신과 차이가 없지만, 증직하고 시호를 주는 것은 사체가 중대합니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에 이 손자를 한 사당에 함께 제사지내는 것은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고 감찰 정보의 충절은 죽지 않은 사육신이라 할 만하며 생육신에 비교해보면 김시습·남효온 등과 어깨를 겨룰 수 있고 나머지 네 사람은 도리어 이 사람에게 윗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감탄이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로서 가문의 명성을 계승해 지켰으니, 얼마나 뛰어난가. 그러나 증직이 하대부(下大夫)에 그쳤으니, 과연 부족한 듯하다. 지난번 배식(配食)하는 일로 의논을 수합할 때 어찌 함께 거행하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목숨을 바쳐 절의를 지킨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오직 엄 호장(嚴戶長)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략하기로 하였으므로 자연 취하고 버리는 원칙을 적용할 수 밖에 없었다. 벼슬을 올려 주고 시호를 추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일시에 순절한 성삼문과 박팽년 등 두 집의 여러 사람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시행하고 싶어도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의 사당에 추배하는 일이야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이 한 가지는 원하는 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명(明) 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조정에서 이 집안에 대해 배려하는 유래가 특별합니다. 듣자니 그의 사손(祀孫)인 출신(出身) 이인식(李寅植)은 아직 초사(初仕)가 되지 못하였다고 특별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선전관(宣傳官)을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공조 판서(贈工曹判書) 엄흥도(嚴興道)는 공로를 세웠으나 지금까지 혜택을 받지 못하여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개탄하고 있습니다.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좌기(坐起)를 명한 일이 마침 이 해에 있었으니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 통덕랑(通德郞) 윤현로(尹顯魯)의 처(妻) 신씨(申氏)는 평상시의 아름다운 행실이 노년에 이르러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거상(居喪) 기간이 끝난 이튿날 밤에 결연히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남다른 절개는 특별히 정문(旌門)을 세워 주는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병식(趙秉式)이 장계로 청하기를, ‘임천군(林川郡)에서 포락(浦落)되거나 모래에 뒤덮인 토지에서 억울하게 조세를 걷어 들이는 것이 99결(結) 37부(負) 1속(束)인데, 특별히 영영 재해지(災害地)로 잡아주도록 허락하였다가 다시 개간하는 대로 조세를 내게 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토지에 관한 정사가 중대한 만큼 갑자기 의논해서 재해지로 허락하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다만 빈궁한 마을에서 억울하게 징수하는 것은 마땅히 돌봐주어야 하는 만큼 특별히 5년을 한정하여 조세를 정지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공(正供)인 세미(稅米)는 일의 체모가 다른 것과는 더욱 다르니 신이 포흠(逋欠)한 곡식을 독촉해서 받아들이고 뱃꾼들에게 법조문을 적용할 것을 여러 번 연석(筵席)에서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세월만 끌면서 거두지 못한 채로 있어 곡식은 채워 넣을 날이 없고 법은 시행할 곳이 없습니다. 공곡(公穀)이 비록 중하다 해도 오히려 탕감(蕩減)할 수 있지만, 나라의 법은 지극히 엄하니 결코 용서해주기 어렵습니다. 먼저 그 석수(石數)가 제일 많은 사람부터 한 사람을 징벌하여 백사람을 힘쓰게 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주(公州)에 갇혀 있는 죄인 서자화(徐子華)는 해당 도신(道臣)이 군사와 백성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시키고, 그 다음 선주(船主) 이언화(李彦和)는 형조(刑曹)에서 세 차례 엄히 형신(刑訊)하여 한기신 정배(限己身定配)하여 문간사전(勿揀赦前)하며, 횡령한 곡식은 기한을 정하고 엄하게 독촉하여, 혹시라도 지체시키거나 허위로 기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을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및 각 해도(該道)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체로 크고 작은 공행(公行)에서는 원래 정해놓은 직로(直路)에 배정해 놓은 역참(驛站)이 있는데, 근래에는 왕왕 직로로 가지 않고 혹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돌아가며 혹은 유람을 위하여 우회하니, 이 때문에 공곡(公穀)을 토색질하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번에 아뢴 것을 가지고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고, 다시 규정을 어기면 특별히 파견한 관리건 외임(外任)이건 물론하고 발각되는 대로 치계(馳啓)하여 엄중히 감처(勘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라도 우수사(全羅道右水使) 김기혁(金基赫)은 이제야 임기가 찼다고 보고 되었습니다. 해당 수신(帥臣)은 이미 드러난 업적이 있을 뿐 아니라 흉년에 교체하는 것은 사실 답답한 일인 만큼 잠시 잉임(仍任)하여 끝까지 성과를 내도록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술을 금지하도록 신칙한 것이 요즘 어떠한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미 하교를 받았으니 어떻게 감히 숨기고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법사(法司)에서 성실히 금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반집과 궁가(宮家)에서 어렵지 않게 술잔을 돌리고 있으며 거리와 큰 길에도 술주정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전적으로 금령(禁令)이 서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이것을 만약 내버려두고 금지하지 않는다면 금령을 낸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가 지당합니다만, 신의 소견으로는 금지하기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며칠 전에 영의정(領議政)이 법사에 신칙하였는데, 어제와 오늘 잡힌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양반집과 궁가(宮家)에서 만약 혹시라도 발견되어 붙잡히면 마땅히 법사에서 초기(草記)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대부분 발견되는 자는 반드시 못 사는 집의 미천한 백성들일 것이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요즘 재상(宰相)들의 집에서는 연석에서 술잔을 돌리기에 한창이고 양반집들에서는 어렵잖게 술을 팝니다. 술이 있는 곳은 재상(宰相)들의 집과 양반집입니다."
하였다. 법사 당상에게 앞으로 나아오라고 명하였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서형순(徐衡淳)이 아뢰기를,
"신은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난날 어떻게 거행하였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이제부터는 각별히 신칙하여 철저히 금지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내용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게 전하여 함께 금지시키고 잡아내도록 하라. 만약 잘 집행하지 않으면, 법사의 당상은 신칙하지 못한 죄를 결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좌우포도대장(左右捕盜大將)에게도 함께 분부하라."
하였다.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에게는 순간(純簡), 판종정경(判宗正卿) 이도중(李䆃重)에게는 숙헌(肅獻), 순천군(順川君) 이관(李琯)에게는 효문(孝文),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석조(李奭祚)에게는 경헌(景憲),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 채성귀(蔡聖龜)에게는 충헌(忠憲), 증 영의정(贈領議政) 박난영(朴蘭英)에게는 충숙(忠肅),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시형(金始炯)에게는 효헌(孝獻),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시혁(金始㷜)에게는 경헌(景憲),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노익(李魯益)에게는 효정(孝靖), 판돈녕부사 김지묵(金持默)에게는 익헌(翼獻),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기후(金基厚)에게는 효헌(孝憲), 형조 판서(刑曹判書) 윤육(尹堉)에게는 효헌,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치성(尹敎成)에게는 효헌, 예조 판서 조성교(趙性敎)에게는 문헌(文憲), 공조 판서 정문승(鄭文升)에게는 효헌, 예조 판서 서대순(徐戴淳)에게는 효헌, 봉조하(奉朝賀) 유후조(柳厚祚)에게는 문헌, 이조 판서 이명적(李明迪)에게는 문정(文靖), 이조 판서 조득림(趙得林)에게는 문숙(文肅), 이조 판서 홍열모(洪說謨)에게는 문헌, 증 공조 판서(贈工曹判書) 엄흥도(嚴興道)에게는 충의(忠毅), 공조 판서 허계(許棨)에게는 효민(孝敏),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종현(趙宗鉉)에게는 효헌, 예조 판서 임긍수(林肯洙)에게는 문헌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가 아뢰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상한(沈相漢)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장례원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상소문을 가져다 보니, ‘고(故) 부제학(副提學)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粲)은 영조(英祖)께서 한창 정사를 빛낼 때 의리를 강조하여 밝힘으로써 거리낌 없이 모두 말하는 것을 하나의 규범으로 삼았으나 끝내 불순한 무리들에게 배척을 받아 흑도(黑島)에 두 번이나 귀양 갔었습니다. 석방되어 돌아와서는 당시의 형편에서 벼슬길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제수될 때마다 벼슬을 사양하고는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당시 김귀주(金龜柱)와 김한록(金漢祿)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내어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었을 때에 낯빛을 바로 하고 바른 말로 간악한 행위를 끝내 물리치니, 흉악한 무리들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아들과 조카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지금 죄에 연루되어 죽지만 너희들 중에 뒷날에 가서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있게 되면 나의 오늘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고(故) 판부사(判府事) 충숙공(忠肅公) 윤숙(尹塾)은 서연(書筵)에서 강론하고 예문관에서 붓을 잡았으며 그 당시 위급한 순간에서도 직분과 지조를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피눈물까지 흘리면서 끝없이 울부짖었습니다. 애타게 간할 때에는 부들 자리에 엎드려 간한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사단(史丹)보다도 더 충성스러웠고, 높은 관리를 꾸짖을 때에는 칼로 처단할 것을 청한한나라 성제(成帝) 때 주운(朱雲)의 의리보다도 더 엄격하였으나 처음에는 흑도로 귀양 갔다가 다음번은 제주도(濟州道)에 귀양 갔습니다. 정유년(1777)의 은혜로운 명령이 쏟아지는 비처럼 내렸으나 계묘년(1783)에 올린 글은 눈서리처럼 삼엄하여 큰 의리를 굳게 지킴으로써 은혜로운 대우가 지난 역사에 없었습니다.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소나무와 같고 서슬 퍼런 칼날 위에도 올라설 만하다.」라는 말은 이미 정조(正祖)께서 직접 지은 제문(祭文) 가운데에 실려 있습니다. 이 두 신하와 같은 사람은 기강을 부지하고 의리를 드러냈으므로 순결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는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대 후에 가서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개인 사당에서 영원히 제사지내게 하는 것은 덕을 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는 원칙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내려 보내서 널리 채택하고 재결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두 신하의 순결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에 대해서는 영구히 감동시키는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는 은전(恩典)은 본원(本院)에서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없으니, 상(上)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만교(李萬敎)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장례원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상소문을 가져다 보니, ‘옛날에 영조께서 임금 자리에 있고 장조(莊祖)께서 정사를 대리할 때에 고 영의정(領議政)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이 무인년(1758) 8월에 도승지(都承旨)로서 세자 폐위(廢位)에 관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傳敎)를 받고는 함인정(涵仁亭)에 입시(入侍)하여 임금의 옷자락을 끌면서 받은 전교를 도로 바쳤는데, 울음소리와 눈물이 뒤섞이고 말과 기색이 격렬하니 임금은 노여움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임오년(1762) 5월에 그는 모친상을 당했던 까닭에 상복 바람으로 대궐문 밖에서 열흘 동안이나 울부짖었으니,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신묘년(1771)에 또 도승지로서 비밀리에 명령을 받고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을 정성 왕후(貞聖王后) 신위(神位)의 요자리 밑에 감추었다가 정조 계축년(1793)에 영의정으로서 진정의 상소를 올림으로써 금등명간편이 비로소 반포되었습니다. 영조께서 일찍이 세손(世孫)에게 이르기를, 「채제공은 나에게는 진실한 신하이고 너에게는 충성스런 신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채제공이 죽자 정조께서 그의 뇌문(誄文)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도승지는 바로 내 앞에서 비 오듯 피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아무 해 의리의 핵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충성과 의리를 다한 데서 가장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 대사헌(大司憲) 충정공(忠正公) 이이장(李彛章)은 영조에게서 인정받은 사람으로서 장조가 정사를 대리하던 초기에 제일 먼저 강관(講官)으로 뽑혔습니다. 병자년(1756) 5월에 낙선당(樂善堂)에 불이 난 다음날 승지(承旨)로서 입시하여 임금이 깨닫도록 힘껏 아뢰었는데, 「아뢴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는 하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임오년에 나경언(羅景彦)이 세자를 무함(誣陷)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서 힘껏 구핵(鉤覈)헐 것을 청함으로써 끝내 법대로 처형하였습니다. 당일에 이르러서는 도승지로서 입시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간한 결과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군율(軍律)을 시행하라는 명까지 있게 하였습니다. 대궐 밖으로 물러나왔다가 급한 소식을 듣고는 다시 들어가서 어의(御醫)를 불러 청심원(淸心元)을 올리게 하고는, 「만약 이 일 때문에 죄가 된다면 내가 스스로 받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급기야 전지(傳旨)를 쓰라고 하자 울면서 아뢰기를, 「신의 손목을 자를지언정 신의 손으로는 차마 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임금의 마음이 좀 풀려서 이르기를, 「이와 같은 때에 이와 같은 신하가 있으니, 이이장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이이장이 빈청(賓廳)을 들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기를 쓰고 간한 것이 3가지 문제인데 세자의 위호(位號)를 즉시 회복하자는 것과 상사(喪事)를 유감없이 치르자는 것과 훌륭한 시호(諡號)를 올리자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이장이 충성과 절개를 다한 내용이 현륭원(顯隆園) 지문(誌文)에 명백히 실려 있는데, 이것이 그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이 두 신하의 순결한 충성과 곧은 절개는 응당 백 대를 내려가면서도 옮길 수 없는 공정한 의논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글을 유사(攸司)에게 내려 보내어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의정(擬定)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두 신하가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지킨 데 대해서는 영원토록 감동시키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겠는데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는 은전은 본원에서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주하(奏下)하신 경상북도(慶尙北道) 유학(幼學) 엄주호(嚴柱鎬) 등의 상언(上言)을 방금 보니, ‘신의 선조인 증 공조 판서(贈工曹判書)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는 단종(端宗) 때에 충성을 다하여 끝까지 섬긴 신하입니다. 단종 대왕(端宗大王)께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해인 병자년(1456)에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에 옮겨 갔을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습니다. 단종께서 근심에 싸여서 홀로 앉아 자규(子規) 시를 읊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육신(死六臣)이 꿈에 나타나서 마치 살았을 때와 같이 억울한 사정을 하소하였다고 합니다. 단종께서 문득 깨어나 울면서 매우 슬퍼할 때에 엄흥도가 산마루에서 바라보고 말하기를, 「청령포(淸泠浦)에 등불이 환하고 또 무슨 울음소리가 나므로 가봐야겠다.」하고는 옷을 벗고 강을 건너 곧바로 그 앞에 가서 엎드려서 기침을 하니, 울음을 그치고 묻기를, 「너는 누구이며 깊은 밤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엄흥도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군의 호장(戶長)인데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서 감히 이렇게 달려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종께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여기에 와서 묵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와서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기특하다. 이제서야 초야(草野)에도 선인(善人)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이때부터 밤마다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정축년(1457) 10월에 단종께서 세상을 떠나자 수령(守令)과 종자(從子)들은 두려워서 감히 염(斂)도 하지 못하였는데 엄흥도는 곧 바로 울부짖으면서 관(棺)과 이불을 자체로 마련해서 염을 해가지고 등에 지고 갔으며 선산 안의 산기슭에 자기 손으로 묻었으니, 이곳이 오늘의 장릉(莊陵)입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그의 충실한 절개를 가상히 여겨 추증(追贈)하고 정문(旌門)을 명하였으며, 창절사(彰節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충신단(忠臣壇)에서 제사를 함께 지내게 하였습니다. 우리 황상에 이르러서도 병자년(1876)에 와서는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시어 공로에 보답하는 성조(聖朝)의 융성함을 유감없이 펼치셨으나, 아직 미처 시행하지 못한 은전이 있습니다. 충성을 다하고 절개가 뛰어난 데서는 사육신과 동등하지만 사육신의 후손들은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도 성대한 은전을 입는데 신의 선조만은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옛 신하의 충성과 의리의 강직함을 생각하여 속히 신의 선조에게도 영구히 제사지내게 하는 은전을 베풀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는 중대한 은전은 본원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장례원(掌禮院)의 주본(奏本)으로 인하여 증 공조 판서(贈工曹判書)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를 영구히 제사지내는 문제를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칙령(勅令)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이 신하는 단종(端宗)께서 ‘자규(子規)’ 시를 읊을 때에 강물을 건너 단종에게 나아갔고 깊은 밤에 홀로 찾아가서 위로하였으며 마침내는 직접 염(斂)을 하고 업고 가서 자기 손으로 장사를 지냈으니, 충성을 다하여 끝까지 섬긴 신하라고 할 만합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그의 충직한 절개를 가상히 여겨 정문(旌門)을 세우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게 하는 등 극진히 대우하였지만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여 충성에 보답하지 못한 일은 참으로 수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미처 하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 다행히 장례원의 신하가 논주(論奏)하였으니, 구태여 본부(本府)에서 다시 번거롭게 자세히 진술하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특별히 영구히 제사지내는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례원의 주본으로 인하여 네 신하를 영구히 제사지내는 문제를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고 칙명을 내리셨습니다. 신하를 영구히 제사지내는 예법은 나랏법에 엄연히 있는 것입니다. 고(故) 대사헌(大司憲) 충정공(忠正公) 이이장(李彛章)은 당일(當日)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죽을 각오로 힘껏 간하였고 급한 소식을 듣고서는 의원을 불러 청심환(淸心丸)을 올리게 하였으며, 전지(傳旨)를 쓰라고 하였을 때는 자기의 팔을 자를지언정 차마 쓰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고 판부사(判府事) 충숙공(忠肅公) 윤숙(尹塾)은 직분과 지조를 다하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애타게 간한 충성은 부들 자리에 엎드려 간한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사단(史丹)보다도 더 지나쳤고 높은 관료를 꾸짖은 의리는 칼로 처단할 것을 청한한나라 성제(成帝)때 주운(朱雲)보다도 더 엄격하였으나 처음에는 흑도(黑島)에, 다음 번에는 제주도(濟州道)에 귀양 갔습니다.
고 영의정(領議政)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은 상복 차림으로 대궐문 밖에서 소리 내어 울면서 목숨이 끊어질 뻔하였고 임금의 위엄을 무릅쓰고 피를 토하는 상소를 올려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을 비로소 반포하게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副提學)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粲)은 의리를 지키고 바른 말을 하다가 흑도에 재차 귀양 갔으며 돌아와서는 문을 닫아 걸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 네 신하의 순결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는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할 것이 없으며 백대 후에 가서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다행히 재상이 상소를 올려 청하고 장례원의 신하가 논주하였으니, 구태여 본부에서 다시 번거롭게 자세히 진술할 것을 기다릴 것 없이 영구히 감동시키고 충성에 보답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제사 지낼 대수가 다하기 전이라도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명한 전례는 많이 있었습니다.
또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이종성(李宗城)의 높은 충성과 진심은 실로 임오년에 절개를 지킨 사람 중에 첫 번째 가는 사람으로서 이미 나라에서 제사지내도록 명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의 충성에 보답해 주는 때에 모두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함으로써 조정에서 특별히 베푸는 은전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다섯 신하가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한 것은 백 대를 내려가도 말할 것이 있을 것이다. 아뢴 대로 모두 영구히 제사지내는 은전을 베풀고 그 사손(祀孫)은 이름을 물어서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가 아뢰기를,
"효혜전(孝惠殿)에 졸곡(卒哭) 제사를 지낸 뒤, 경효전(景孝殿)에 큰 제사를 지낼 때 음악을 쓸지의 여부에 대하여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에게 품처(稟處)하도록 주하(奏下)가 있었습니다.
낭청(郎廳)을 파견하여 문의하여 보았는데, 봉조하(奉朝賀) 김병국(金炳國)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는 모두 병 때문에 의견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궁내부 특진관 윤용선(尹容善)은, ‘병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데다가 예학(禮學)에 어둡기까지 해서 감히 억측으로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만, 경효전에 제사를 지낼 때의 복색(服色)을 이미 전례대로 포단령(布團領)으로 마련한 이상 큰 제사 때에 음악을 쓰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널리 물어서 결재하여 처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李根命)은, ‘졸곡 제사 후의 큰 제사에는 음악을 써야 하는 것이지만, 경효전에 제사할 때 포단령으로 마련한 만큼 음악을 쓰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일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근거로 삼을 규례가 없는데다가 신은 워낙 예절에 어둡기까지 해서 감히 억측으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널리 물어서 결재하여 처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大臣)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폐하(陛下)께서 결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대신들의 의견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의 봉사(奉祀)를 해당 문중에서 의정(議定)한 후 다시 품처(稟處)하도록 이미 주하(奏下)가 있었습니다.
양주(楊州) 유학(幼學) 유진국(兪鎭國) 등이 올린 정단(呈單)을 보니, ‘순묘(純廟) 신미년(1811)에 방계 조상인 충목공 유응부의 양자를 세우는 문제를 가지고 경기(京畿) 유생 이유제(李維濟) 등이 상소를 올려 특별히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을유년(1825)에 여러 직계 가문의 친척들이 방계 자손인 유대근(兪大根)의 아들 유현문(兪顯文)을 사손(祀孫)으로 정하는 내용으로 상언(上言)한 것으로 인하여, 예조(禮曹)에서 주달(奏達)한 뒤 입안(立案)하여 성급(成給)하였습니다. 유현문이 지금 또 불행하게 아들이 없어서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중이 모여서 충분히 의논하여, 유현문의 5촌 조카인 유봉재(兪鳳在)의 아들 전 장령(前掌令) 유진삼(兪鎭三)으로 유현문의 뒤를 잇게 해서 충목공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감히 호소하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陛下)에게 주달하고 입안하여 성급해 주시고, 이어 정문을 세워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소청대로 유봉재의 아들 유진삼을 유현문의 양자(養子)로 세워 충목공 신(臣) 유응부의 봉사손으로 정하고, 입안하고 성급하는 동시에 정문을 세워 주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제는 여섯 신하의 사손(祀孫)이 모두 있게 되었으니, 멀리 지나간 옛일을 회고해 보건대 어찌 크나큰 감흥을 이길 수 있겠는가?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충목공 유응부의 신주에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라.
또 이로 인하여 개연한 생각이 떠오르니,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의 신주에도 똑같이 치제하라. 그 사손들은 모두 궁내부(宮內府)에서 초사(初仕)에 등용하되, 이미 사인(仕人)인 경우에는 수령(守令)으로 등용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