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대 메이저사로 꼽히던 삼천리연탄공장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
그러나, 숱한 냉대 속에서 이젠 아는 사람만 아는 곳.
하지만 오늘도 이문동 연탄공장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몸도 마음도 추운 서민들이 기댈 건 연탄 밑불의 온기에 쉼을 얻는다.
그러나 요즘은 뭐든지 휙휙 변하는 요즘 시대. 연탄이 뿜어내던 불꽃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던 달고나의 추억은 이미 저만치로 달아난 지 오래다.
20년 전만 해도 서울에만 19개 있었다던 연탄공장이 이제는 세월의 힘에 빗겨, ‘마지막’이라는 아쉬운 이름표를 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외된
사람들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이문동 연탄공장은 ‘사랑’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마음 따뜻한 공간이다.
한 때 400여개나 됐던 연탄공장
연탄이 이글대는 화로에 설탕을 살살 녹여 소다를 후루룩 넣으면 먹음직스럽게 부풀었던 달고나.
6, 70년대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연탄이 선사하던 그 시절의 추억 하나쯤 있음직하다.
연탄공장의 효시 평양연탄공장의 설립을 시작으로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한
연탄공장은 1963년 말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성공의 메카’로 손꼽히던 서울의 경우, 무려 400여개의 연탄공장이 서울거리를 장악했다.
하지만 불과 4년도 채 되지 않아, 연탄전성시대의 뜨거운 태양은 저물기
시작한다. 1966년 정부가 에너지 정책 중심을 석탄에서 석유로 옮기기 시작했기 때문. 순식간에 석유의 전체 에너지 소비량이 37.4%를 차지하면서 연탄의 입지가 좁아지자, 석탄을 캐던 광부들의 시름이 깊어져 갔다. 하지만 가격이 워낙
높았던 석유는 1973년 석유파동을 겪으며 다시 한 번 연탄 소비량에 박차를
가한다. 당시만 해도 한 장에 몇 십원 하던 저렴한 연탄이 석유와의 가격경쟁에서 승리한 셈. 그러나 이것도 잠시, 1980년대 후반 새롭게 등장한 도시가스의
입성은 1990년대 초 있었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과 더불어 연탄의 아듀를
고했다.
이제는 추억의 뒤꼍으로 사라진 연탄. 현대식 건물에 현대식 연료가 생활의
편리함을 더하는 요즘, 연탄을 가느라 새벽잠을 설치던 할머니의 모습은
이제 저 멀리 추억의 한 편이 되었지만, 제 몸 하나 모두 태워 살구빛 얼굴을
내밀던 연탄재에는 가족을 생각하며 새벽잠을 설치던 그 시절 할머니의
소소한 사랑이 서려있지 않았을까.
이젠 아는 이만 아는 곳, 이문동 연탄공장
“여기 연탄공장이 어디 있어요?” 하고 묻는다면 “요즘 세상에 연탄공장이 어디 있어요” 혹은 “이 양반이 어디 별나라에서 떨어졌나~ 연탄공장이야 벌써 사라졌지”라는 핀잔만 들을지 모른다.
하지만 때 빼고 광낸 아파트 사이, 서울의 이문동 연탄공장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를 비밀의 장소에 나지막이 자리 잡은 연탄공장 삼천리이앤이는 1960년대 3대 메이저사로 손꼽히던 삼천리 연탄공장의 맥을 이어오는 50년 정통의 장소다. 정확히 말하면 시흥의 고명산업과 함께 서울의 마지막 남은 두 연탄공장 중 하나라고 해야 맞겠지만, 삼천리 연탄공장이 시흥의 고명산업의 전신이었다는 점과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점, 그리고 연탄전성시대에서부터 줄곧 변하지 않는 족보를 써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곳만큼 제대로 된 연탄공장의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문동 연탄공장을 찾아가는 데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꽤 큰 공장규모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을 일러주는 푯말하나 없었던 것. 본의 아니게 비밀의 장소가
되어 버린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수 십 년째 같은 곳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어요. 연탄을 거래하는 업체들간의 인연도 공장수명과 비슷하고요. 집과 같은 공간이다 보니, 따로 이정표를 만들 필요가 없었죠.”
뜨거운 연탄불꽃 만큼이나 뜨거웠던 청춘을 고스란히 삼천리 연탄공장에 바쳤다는
김학수 공장장은 일터가 아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된 삼천리 연탄공장이 인생의 가장 큰
자부심이라고 고백한다.
“이 연탄공장에서 땀 흘려 번 돈으로 자식들을 길러냈어요. 아들 둘 다 대학도 보내고 장가도 보내고... 남들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노력하는 만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연탄공장이라고 믿어요.”
그러고 보니 삼천리 연탄공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이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사람들이다. 젊은 인력이 없어 앞으로 연탄공장의 존폐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김학수 공장장을 대면하며, 안도현 시인의 ‘너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글귀가 떠오르는 건 아마, 그의 뜨거운 온기와 노력이 연탄으로 전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밑불이 되어, 서민들의 겨울을 지키다
새벽 5시. 빵집의 빵 굽는 향기가 솔솔 피어오를 아침 6~7시가 되기도 훨씬 전, 시커먼 빵을 굽느라 연탄공장의 기계들이 굉음을 내며 속도전을 내기 시작한다. 연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재료가 석탄이라는 것만 빼면 빵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석탄과 물을 9대 1의 비율로 섞은 석탄반죽을 연탄의 모양을 잡아주는 윤전기에 넣는 것이 빵틀에 반죽을 넣어 구워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 약 140톤의 압력이 가해지면 석탄반죽은 1분도 채 되지 않아 따끈따끈한 연탄으로 모습을 달리한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레일 위, 연탄이 나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손놀림도 자연히 바빠진다. 팔, 다리, 상체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뭍은 연탄재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 연탄을 배달할 배달원들이다. 겨울을 앞둔 시점에도 연탄배달원들의 소매가 짧다. 짧은 소매는 땀에 흥건히 젖어 지금이 겨울을 앞둔 것인지, 한 여름인지 조차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새벽부터 연탄공장으로 모인 트럭들의 행렬 또한 오후가 될 때까지 끊이지 않는다.
이 때문일까. 트럭에 연탄을 싣는 그들의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인다.
삼천리 연탄공장에서 생성되는 연탄 생산량은 약 30만장 수준이다.
예전에 비하면 절반은 줄어든 수치이지만, 아직도 연탄을 필요로 하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특히 홀로 거주하는 독거노인의 경우, 정부에서 지원하는 연탄 없이는 한 겨울 혹독한
추위를 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연탄이 세상에 전하는 따뜻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연탄시인으로 잘 알려진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시인은 말한다. 조선팔도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득바득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연탄차라고. 오늘도 바득바득 연탄을 실어 나르고 있을 연탄배달원들의 열기에 올 겨울 한파도 조금은 수그러들길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우리 이웃들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힘차게 돌아가는 서울의 마지막 연탄공장의 ‘희망’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위 글은 서울지방우정청 사보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11월 그리고 12월>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