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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교부 시대 의 성경해석 2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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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학파
안디옥 학파(Antioch School)는 소아시아의 안디옥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로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 해석과 사색적 기풍에 반발하여 문자적이며 역사적인 해석과 실제적인 신앙을 주장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당시 교회로부터는 널리 환영받지 못했지만, 성경을 편파적으로 왜곡하는 풍토에 경종을 울리고 본문 자체의 의미를 중시한 태도는 높이 사야할 것이다. 안디옥 학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쌍벽을 이루며 발전하여갔는데, 결국 나중에는 라틴 교부인 제롬을 통해 그 맥을 이어갈 정도로 그 영향력은 잠재되어 있었다.
안디옥 학파의 시초는 흔히 크리소스톰(350~410년경)부터라고 보는데, 그보다 약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테오필로스와 이레니우스를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테오필로스는 안디옥 학파의 기풍과는 거리가 멀고, 이레니우스는 서머나 출신으로 소아시아 신앙 풍토에 영향을 주기는 했어도 주로 프랑스 리용의 감독으로 활약한 사람이므로 크리소스톰을 안디옥 학파의 최초 인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크리소스톰)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안디옥 출신으로 처음에는 정치가나 법률가가 되려고 수사학을 공부하다가 만족치 못하고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한때 은둔자들과 수도원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과 콘스탄티노플 교구장이 되었다. 그는 많은 설교를 행하여 능력있는 설교자로 인정받았는데, 이때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으며,『로마서 강해』를 비롯해서 많은 설교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그는 강직하고 시비판단이 밝아 그릇된 것을 그냥 보고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황실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그의 솔직담백한 성격은 사람들이 좋아하였다.
그의 성격을 반영하듯이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풍유적인 성경해석을 반대하였다. 성경 저자가 말하는 바를 그대로 전하지 않고 해석자의 자의적인 주장만을 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저자의 의미가 무시되는 우의적(풍유적) 해석은 지양되어야 하며,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즉, 본문의 최초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는 성경 어디에나 비유로 표현되었을 경우에는 그 비유에 대하여 성경 자신이 해설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비유로 표현되지 않은 본문에서 억지로 비유를 찾으려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였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융통성 없는 문자주의를 말하지는 않았고, 대신에 본문의 원의미를 발견하는 역사적인 해석을 말하였다. 지나치게 여자적(如字的) 해석을 하는 문자주의로는 성경 저자의 원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성경을 기록하면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표현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성경에 나타난 비유들을 풍유법 대신 모형론(Typology)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양자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진 해석방법들이다. 즉 풍유법이 제시하는 비유적 상관관계가 해석자의 개인적 신앙과 상상력에 의하여 의루어진다면, 모형론은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어떤 상관관계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려는 태도이다.
아무튼 풍유적 해석이 압도적으로 유행하던 시대에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성경 본문의 최초 의미를 찾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역사적 해석과 모형론으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한 크리소스톰의 공로는 크다고 하겠다.
(데오도르)
데오도르(Theodor)는 크리소스톰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안디옥 학파의 대표적인 교부로 활동하면서 나중에 길리기아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성경 전체에 대한 주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소예언서와 바울 서신 뿐이다. 그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종래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적 해석방법을 비판하면서, 역사적이고 언어학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그는 성경 본문에서 중요한 재료와 부적당한 재료를 구분하고, 구약 예언에 있어서도 가치 평가를 함으로써,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가 성경을 보통 사람의 책처럼 취급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풍유법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던 시대에 그는 크리소스톰과 함께 본문이 말하는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역사적 해석의 중요성을 부각함으로써 근대적 성경해석방법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데오도레트)
데오도레트(Theodoret)는 380년경 안디옥에서 태어난 약간 후대의 교부로서 크리소스톰과 데오도르를 계승하여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 역사적 성경해석방법을 확립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자기 시대를 포함한 약 100년 간의 교회사를 저술하면서 기독교에 '헬라적인 병'이 들어왔다고 말하였다. 물론 사색적으로 교리를 연구하고 풍유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는 성경 주석을 많이 썼는데, 역사적이고 언어학적인 방법으로 하였음은 물론이다.
라틴 교부 시대
터툴리안으로 대표되는 라틴 교부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헬라파 교부들이 지나치게 철학적 사고를 통하여 신학 연구를 하는 것에 반발하면서 전통 중심의 라틴 신학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신학에서 헬라 철학을 배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철학이었으며, 기독교의 가르침에 간단하고 명료한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깊이있는 신학연구를 위해 때로는 철학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과 신앙을 분리시키고자 노력했음은 틀림없다.
라틴 교부들은 헬라 교부들이 헬라어로 기록한 것에 비하여 라틴어로 저술하였으며, 이들에 의해서 주도된 학풍은 북아프리카를 본거지로 하였기 때문에 북아프리카 학파(North-Africa School)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나중에 서방 교회의 신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리적으로는 동방 교회와 입장을 달리하지만, 성경해석방법에서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터툴리안)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동시대 인물로서 라틴 신학의 원조이며 서방 교회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160년경 북아프리카의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원래는 법률을 공부했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고 엄격한 신앙 규율을 만드는데 일생을 바쳤는데, 특히 기독교와 헬라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신학 풍조를 가장 반대하여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불합리하기 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하면서 신앙은 합리적 이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레니우스가 교회 전통과 전승을 중요시 한 것에 공감하면서, 신앙적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도적 전승으로 후대에 계속 전해져 왔다는 전통주의적 신앙을 강조했다. 또한 전통(Tradition)이 바르게 계승되었다면 이후부터 그것은 정통(Orthodoxy)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이 라틴 신학의 일관된 특질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주의적, 정통주의적인 신학 풍토는 점차 변질되어 가면서 나중에는 교회의 전승을 진리의 말씀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데까지 가게 되었다. 그래서 정통주의는 점차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카톨릭주의와 교황주의, 그리고 로마주의의 기이한 형태로 변하여 간 것이다.
터툴리안은 라틴 문화권에 속하여 법률을 전공한 사람답게 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헬라 철학의 형이상학적 방법이 아니라, 법률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강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구원에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이레니우스가 신비하게 보는데 비해, 그는 계약과 법개념으로 해석하였다.
그의 중요한 신학 사상은 삼위일체론과 신인(神人)양성의 기독론, 원죄유전설 등인데, 특히 삼위일체(Trinitate)라는 용어를 기독교 사상 처음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대하여 정의하였다. 또한 그는 마르키온 이단(구약을 믿지 않음)을 정죄하였다. 한편 그가 헬라 철학을 배격하였다고는 하지만, 철학의 이성적 능력이 기독교의 진리와 일치한다고 믿는 한에서는 철학을 인정하였으므로 철학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신학에서도 많은 철학적 표현이 눈에 띄인다.
그는 한때 몬타누스 이단(재림설과 금욕주의)에 빠지기도 했으며, 또한 형체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토아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영혼과 하나님도 유형적 존재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고, 영혼이 조상의 영으로부터 파생되어 온다는 영혼유전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키프리안)
키프리안(Cyprian)은 터툴리안의 제자로서 역시 부유한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늦은 나이에 회심하였지만 열성적 신앙을 가지고 나중에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잠시 피하기도 했으나,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 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서방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교회일치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감독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는 다원주의적 신학적 사고를 봉쇄한 것인데, 이를 오해한 카톨릭 교회는 베드로가 제 1대 감독이자 교황으로서 곧 교회이며, 후에 감독들과 교황으로 계승되었으므로 교황 역시 교회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무오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유형적인 교회 밖에 구원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카톨릭 교회 안에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힐라리우스)
힐라리우스(Hilarius)는 315년경 프랑스 프와티에의 이교적 환경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나,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고 나중에 그곳의 감독이 된 라틴 교부이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바질, 그리고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 등과 동시대 인물로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를 꺽는데 활약하였다. 당시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단호하게 반대하여 헬라 교부들과 함께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니케아 신조를 사수하며 평생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싸웠으므로 '서방의 아타니시우스'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저술로는『대회의사』,『삼위일체론』,『시편주해』 등이 있는데 그가 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암브로시우스)
황제를 굴복시킨 것으로 유명한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340년경 로마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처음엔 법률을 공부하여 관리가 되고 나중에 집정관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출세의 길을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인생 진로가 바뀌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밀라노 감독의 사망으로 후임자 결정을 위해 중재에 나서던 중 회중들이 그를 감독으로 뽑으라고 외침으로써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는 평신도였지만 의원들이 그의 집정관으로서의 능력과 공평무사한 성격을 높이 사서 결국 그를 밀라노의 감독으로 선임하게 되었다. 그는 곧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여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교회를 위하여 진력하여 훌륭한 업적들을 남겼다.
그는 밀라노의 감독으로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정립하여 교회와 국가의 영역을 분명히 하고 황제가 교회 일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제도 신자의 한 사람에 불과하므로 교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으로 교권을 국권 위에 놓게 한 것은 그의 공로가 컸다. 그의 재임 중 특기할 만한 사건은 380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기독교에 기여한 바가 있는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가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반란의 무리 7천명을 학살한 데 격분하여 그를 성찬에 참여치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황제가 8개월 동안 참회하고 나서야 성찬을 베풀 정도로 교권의 위엄을 보인 일이다.
그는 철학에 대하여 전형적으로 로마인의 태도를 취하여 형이상학적인 사색보다는 주로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그를 비롯하여 라틴 교부들 중에는 로마의 사상가이며 정치가였던 키케로(Cicero, BC 106~43)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의무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덕(德)에 대해 서술할 때 기독교 정신으로 충만하게 기록하면서도 라틴 사상을 엿보게 한다.
또한 그의 설교는 실천적이고 감화력이 있어서 어거스틴이 듣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고후 3:6에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풍유적 해석을 선호하였고, 이 역시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주어 라틴 신학의 경향을 만드는데 한 몫을 하였다. 그만큼 그는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본문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이해 위주의 주해보다는 적용 위주의 강해를 하기 위한 해석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롬)
제롬(Jerome)은 347년경 달마티아(현재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imus)이다. 젊은 날 로마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키케로 등 라틴 정신에 사로잡혀 살다가,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고나서 철처히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지나친 독신주의로 공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나중에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많은 성경 번역 작업을 하게 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인 니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제자였으나 라틴 교부의 맥을 잇는다.
그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가타(Vulgata) 라틴어 번역인데,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정통한 그가 심혈을 기울여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27권 성경 목록을 그대로 따라 자신의 라틴 역본에서 제시하고, 정경과 외경을 명백히 분리하여야 할 것을 주장하여 얼마 후에 히포(393년)와 카르타고(397년) 공의회에서 현재와 같은 27권의 정경의 목록을 확정하는데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는 성경 번역 뿐 아니라, 오리겐과 유세비우스 같은 헬라 교부들의 책들도 라틴어로 옮겨서 보급하는데 힘을 썼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스승인 그레고리우스의 영향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 해석에 어느 정도 영향 받았으나, 실제로는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초창기에는 풍유적 해석을 하였으나 점차 역사적인 해석으로 바뀌어갔으며, 이는 그의 성경 번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다중적 의미를 찾는 풍유적 해석을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수는 없고, 문자주의와 풍유적 해석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
어거스틴(Augustine)은 라틴 교부의 전통의 맥락 속에서 서방 교회 신학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으로 확립시킨 중요한 교부이다. 그의 라틴식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인데, 354년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교도였으나, 모친 모니카는 경건과 부덕(婦德)이 뛰어난 여인으로 어거스틴을 위해 항상 눈물로 기도하였기 때문에 그가 마침내 회심하고 위대한 교부가 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일찍부터 라틴 문학에 관심을 가져 호머 등을 탐독하였고, 키케로의 저작에 심취하는 등 자질을 쌓아갔다. 청년기에는 수사학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는데, 정치 중심지였던 카르타고에 유학하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얼마 후 카르타고에서 제일 유명한 웅변가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로마에 속한 대도시 문화의 자유분방함에 오염되어 방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모친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회심한 것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듣고 나서였다. 그 후 철저히 회개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성경 연구만 하다가, 나중에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무려 100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는데,『참회록(Confessiones)』과『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은 불후의 명작으로 후대에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특히 하나님의 도성은 당시 410년경에 로마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지만(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가 멸망의 위기를 당하는 데 대한 이교도들의 비난을 변증하기 위해서 22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쓴 책이다.
그밖에도 주석집과 강해서, 설교와 편지 등 그의 작품은 매우 많은데, 모두 라틴어로 기록하였다. 그는 히브리어는 전혀 몰랐고 헬라어도 매우 빈약하였으므로 헬라 교부들의 자료를 많이 참고하지 못하고, 라틴 교부들의 자료에 주로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상상과 집중력으로 서방 교부들의 신학을 체계화시키고 확립하여 중세로 넘겨주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중세 신학의 방향과 중세 교회의 틀이 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 한편 그는 펠라기우스(원죄설 거부한 이일랜드 수도사)와 싸우는 등 실천적 사상가이기도 했다.
성경해석에 관한 그의 입장을 보면 제롬과는 정반대로 문자적 해석을 거부하고 풍유적 해석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방 교회 오리겐의 삼중적 의미가 서방 교회에서도 그 영향력을 크게 행사한 것이다. 또한 그는 한때 마니교(3세기경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된 이원론주의)에 빠졌었는데, 비록 청산하였다고는 하나 그 사상의 영향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신학적 논문들이 신선하다고 할지라도 그 사상의 기저에는 자의적이고, 풍유적인 해석에서 나온 오류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빛과 어둠의 나눔을 선하고 악한 천사 창조에 비유하는 견해라든지, 간혹 드러나는 이원론적 사고 등은 납득할 수 없는 실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튼 어거스틴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그가 선호한 풍유법은 이후에도 계속 유행되었다. 성경 본문의 의미보다 독특한 다중적 의미를 찾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풍조는 시대를 넘어 중세에 가서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기승을 부리기까지 하게 된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힘을 얻은 풍유법은 서방 교회의 성경해석의 전통이 되어 이후 종교개혁 시대까지 그 영향력이 줄곧 계속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