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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성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안유섭 목사 (아르케아카데미 원장)
아르케 아카데미 홈페이지 : www.arche.or.kr
아르케 아카데미 다음 카페 : http://cafe.daum.net/archeacademy
(번역본 해석의 한계)
문맥과 배경을 파악하고 어법적인 관찰을 통하여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잘 해석이 되지 않는다면 번역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의심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읽고 있는 번역성경은 원문에서 직접 초역(初譯)한 것도 아니고, 수없이 다른 언어로 중역(重譯)된 것을 또 다른 언어인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렇게 수천년동안 번역에 번역을 거듭해오는 가운데 오류가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또 만일 초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고대 언어로 된 원어성경을 현대어로 옮기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다. 고대와 현대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사고방식의
차이는 곧 표현방식의 차이로 나타나는데, 이 갭(Gap)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어와 현대어간에는 단어끼리 서로 정확한 대응을 찾기 어려우며, 화법과 시제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고대어와 현대어는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들이 서로 다르다. 현대어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인칭은 고대어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많이 혼용하지만, 반면에 성(性)과 수(數)의 구별은 고대어일수록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게다가 시적인 표현이 많은 구약을 옮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감동까지 전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정확하게 번역하였다고 하더라도 2천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인해서 이해하지 못할 부분도 많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번역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라틴 속담에는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까지 있다.
사실 영어로 된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완전한 번역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시(詩) 같은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원어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과정을 보면 초역(初譯)이 아닌 중역(重譯)인 것이다. 이는 한
단계를 더 거친 번역이므로 원래의 의미와 그만큼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을 때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읽는 것보다 영어로 된 원문을 읽을 때 훨씬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더라도 해독이 가능하다면 한문으로 된 것을 읽는 편이
나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을 때도 가능하다면 원어성경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계속 연구하다보면 결국 원어성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번역 오류의 예는 수없이 많지만, 하나만 들어보면, 행 7:46-47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야곱의 집이 무엇이며, 야곱의 집을 위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이는 원문을 보더라도 네슬레-알란트 사본으로는 알 수 없고, TR사본(표준 원문)을 보아야 한다. 원어성경을 번역할 때는 한 가지만 보면 안되고, 반드시 두 가지 사본 이상을 동시에 참고하여야 한다.
TR사본에는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라는 말이 스케노마 토 데오 야콥(σκ?νωμα τ? θε? ?ακ?β)으로 되어 있다. 즉, 야곱의 하나님을 위한 처소라는 뜻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깨닫고 야곱의 하나님을 위한 성전(처소) 볼 것을 간구하였으나, 오히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게 되었다이다.
이 구절은 스데반이 대제사장과 유대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 중에서 교회의모형인 성막과 성전에 대하여 언급(행 7:38-50)한 내용 중의 일부이다. 다윗시대까지 이동하여 다니던 성막이 앞으로 성전으로 지어지리라는 하나님의말씀을 들은 다윗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을 하나님의 큰 은혜로 깨닫고자신의 당대에 그 역사(役事)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된 것을보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소원하던 다윗은 성전 건축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성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번역 성경에 나타난 오류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더 구체적인 예는 안유섭 목사 저『원어로 여는 성경』에 많이 나오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원어문법의 종류와 범위)
만일 번역성경이 원문을 100 퍼센트 정확하게 번역할 수만 있다면, 원문을모르는 사람도 번역성경만 가지고 잘 연구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번역을 잘한다 해도 원문의 의미를 완벽하게 옮길 수는 없다. 따라서 원어성경을보아야 하며, 원어지식은 필요하다. 그러면 원문을 어느 정도 참고하고, 원어문법은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가?
번역 성경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려면 가급적 원어성경을 많이 보는 것이 좋다.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이 있는 서구와 미국의 훌륭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신구약 원어성경을 줄줄 읽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 목회자들은 원어성경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편이다. 그러면서 번역성경에만 매달려 그것이 전부인양 평생 부정확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은가?
누구라도 원문을 보지 않고 성경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적어도 번역성경의 본문을 해석하고 나서 석연치 않을 때만이라도 반드시 원어성경을 보아야 한다. 이때 사본은 반드시 두 가지 이상을 참고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원어문법에 관한 지식은 꼭 필요하며, 고대어의 구문론(Syntax)도 연구해야 한다.
원어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언어에 대한 문법을 공부하여야 한다. 먼저, 구약성경의 기록 언어인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매우 유사한 언어로서 품사의 변화 형태만 약간 다를 뿐이다. 따라서 별도의 문법이라기보다는 히브리어를 공부하면서 약간만 시간을 더 투자하면 된다.
다음,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라틴어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된 원본은 사라졌고, 오랜 세월 라틴어 역본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 만들어진 헬라어 필사본들은 발견된 사본과 함께 당시의 라틴어 역본을 많이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라틴어는 또 신학과 교회사를 알기 위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따라서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를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굴절어(屈折語)이다. 굴절어(Inflected Language)란 단어 자체가 어형변화를 많이 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품사의 형태 변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기본적인 원리를
빨리 이해하고 나서 되도록 많이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음운론)
문법의 내용은 어느 나라말이든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발음에 관련된 음운론과 품사의 형태를 파악하는 형태론(품사론) 그리고 단어의 관계를 연구하는 문장론(구문론)이다. 음운론부터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음운론은 발음과 관련된 말의 규칙을 뜻하는데, 히브리어와 아람어 문법에서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굴절어는 품사의 형태변화가 복잡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들 언어에 있어서 굴절(Inflection)의 발생요인은 형태 자체의 다양성보다는 발음상에서 비롯된 것이 훨씬 많다는 특징이 있다. 품사로 말하자면, 명사 군(群)은 변화가 간단하지만 동사 군(群)은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데, 사실 동사는 7가지 기본적인 형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후음과 약자음 등 불규칙 음운현상으로 말미암는 동사의 변화는 매우 복잡하다.
또 이들 언어는 단어끼리 서로 잘 결합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를 교착성(膠着性)이라고 하는데, 여러 개의 단어가 마치 아교처럼 서로 달라붙어서 한 단어를 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럴 때 복잡한 음운 형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문법규칙은 대부분 음운 현상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이들 언어는 현대인이 발음하기에 까다로운 고대어의 흔적을 그대로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이점도 극복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반면에 헬라어와 라틴어는 발음이 매우 간단하다. 발음과 액센트에 관하여 거의 규칙적이며, 예외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언어는 형태 자체의 변화가 극심하다. 명사 군(群)과 동사 군(群)의 변화 모두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음을 다루는 음운론은 성경해석과 관련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표현법에는 언어의 유희(Pun)라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원어를 모르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암 8:2에서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아모스의 대화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여주시면서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다고 하시는 말씀이 금방 이해가 되는가? 이는 원어를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유희인 것이다. 여름 실과는 히브리어로 카이츠이고, 끝이라는 말은 케츠라고 한다. 두 단어는 발음은 약간 다르지만 자음만 보면 서로 같다.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이 없었으므로 카이츠에서 모음인 요드를 제거하면 케츠가 되어 자음으로는 서로 같은 셈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여름 실과 한 광주리는 풍요로운 수확이나 축복 같은 의미로 잘못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여주신다면 우리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히브리인들만이 알 수 있는 언어 속에 담겨 있는 비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알려면 결국엔 원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 렘 1:11-12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려하신다고 하였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역시 언어의 유희인 것이다. 히브리어로 살구나무는 솨케드(???)이며, 말씀을 지켜 그대로 이룬다고 할 때 지킨다는 말은 쇼케드(???)이다. 여기서는 발음은 다르지만 글자는 서로 똑같다. 이러한 것을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예들은 히브리어의 음운을 모르면 그 의미를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음운론과 관련된 해석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 것이다.
(형태론)
형태론은 품사가 어떤 형태로 변화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품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변화사와 불변화사(不變化詞)의 두 종류로 구분한다.
변화사는 표현하고자 하는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변하는 품사이며, 불변화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형태에 변함이 없는 품사를 뜻한다. 굴절이라는 명칭은 변화사 때문에 붙여진 것이므로 굴절어 문법에서는 변화사가 중요하다.
변화사는 다시 명사 군(群)과 동사 군(群)으로 분류한다. 명사 군(群)이란 명사와 명사 상당어귀를 말하는데, 명사를 비롯하여 대명사, 형용사, 관사, 수사의 일부가 포함된다. 그런데 명사 군에 속한 모든 품사들은 명사의 기본적인 변화를 그대로 적용한다. 따라서 명사변화만 잘 알고 있으면 명사 군에 속하는 나머지 품사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명사 군의 특징 중에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성(Sex)의 구분인데, 단지 암수의 대비 관점을 초월하여 특별한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남성은 대표성 또는
실체가 있는 존재를 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 주님은 남성명사인데, 여성주의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남성신(男性神)이라는 뜻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실체를 느낄 수 있는 신(神)이시기 때문이다. 또 여성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한다. 따라서 사랑이라든지 진리, 영광, 나라 등은 모두 여성명사이다. 이는 개념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체가 만져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계통에 있어서는 성의 구분이 더 철저한데, 심지어 2인칭대명사(You)까지 남녀를 구분하기 때문에 현대 회화에서도 남성과 여성에 대하여 각각 사용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에 유의하지 않으면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리고 히브리어 계통은 명사 군의 단어 형태가 성과 수의 변화는 있지만, 격(Case)에 따른 변화를 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우리말의 격조사 비슷한 전치사를 보거나 문맥적으로 격을 파악해하므로 다소 혼동이 된다.
그러나 헬라어 계통은 격의 구분을 철저히 하는데, 격의 개념이 보통 언어와 다른 점이 많다. 주격은 보통 언어와 비슷하지만, 다른 격들은 전치사 등과 결합하면 아주 특별한 의미를 나타낸다. 소유격(Genitive)은 소유뿐 아니라 분리의 개념까지 표현한다. 이를 탈격(奪格, Ablative)이라고 하며 라틴어에서는 별도의 격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또 여격(Dative)은 장소(˜에게)를 나타내는 처격(處格, Locative)과 수단이나 방법(˜에 의하여)을 표현하는 조격(調格, Instrument) 그리고 이익이나 관심(˜을 위하여, ˜에 반대하여)을 나타내는 여격(Dativus Commodi)으로 구분한다.
목적격(Accusative)은 주로 대상을 표현하지만, 운동성과 방향을 나타내기도 하며, 이유나 원인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 호격(Vocative)은 누구를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동사 군(群)에는 동사와 부정사, 분사가 포함된다. 헬라어 계통의 동사는 법(Mood), 시상(Tense), 태(Voice), 수(Number), 인칭(Personal) 별로 변화하므로 변화형태가 매우 복잡해 보인다. 그렇지만 원문을 해석할 때는 변화형태에 따라 무슨 뜻인지 한 눈에 들어오므로 크게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히브리어 계통은 시상을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동작의 완료여부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완료시제와 미완료시제의 두 가지 형태만 나타나므로 단순하다. 물론 태(Voice)를 비롯하여 강조나 사역 여부에 따라 7 가지 형태의 기본적인 동사의 종류가 있기는 하지만 시제변화는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막상 원문을 해석할 때는 히브리어 계통이 더 애를 먹게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제가 분화되어있지 않으므로 다양한 시간의 개념 중에서 어디에 해당하는지 한 눈에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부정사(Infinitive)는 동사가 명사적 성질을 가지는 것인데, 헬라어 계통과 히브리어 계통 모두 어형변화가 간단하다. 또 분사(Participle)는 동사가 형용사적 성질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헬라어 계통에서는 모든 변화 중에서 분사변화가 제일 복잡하다. 이미 동사로서 복잡하게 변화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형용사의 변화요소인 성(Sex), 수(Number), 격(Case)에 따른 변화까지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계통은 거의 형용사처럼 사용되므로 변화가 단순하다.
한편, 불변화사는 접속사, 전치사, 부사, 감탄사 등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어형이 변하지 않는 품사들이다. 해석할 때 불변화사에 대해서는 흔히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생각이다. 이들은 주로 기능어로서 해석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주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히브리어 계통에는 불분리사(不分離詞)라는 특이한 품사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관사와 몇 개의 전치사, 그리고 한 개의 접속사가 포함되는데, 이들 품사는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반드시 다른 품사와 결합된 상태에서 활용하여야 한다. 그래서 다른 품사와 분리되지 않으므로 불분리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교착성이 강한 셈-함어의 특성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장론)
고대 성경언어는 현대어에서와 같은 비교적 정확한 문법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특히 문장에 있어서는 어순이 무시되며, 어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매우 자유롭게 구사할 수가 있었다. 그 까닭은 굴절어의 특징상 단어마다 고유한 변화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각 동사는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의 고유한 법과 시제와 태와 인칭과 수를 가지고 있고, 명사 군은 각각 고유한 인칭과 성, 수, 격에 따라 변화된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포스톨로스 레게이 로곤(?π?στολο? λ??ει λ??ον)은 사도가 말을 한다라는 뜻의 헬라어인데, 문장 속에 있는 각 단어의 위치가 아무리 뒤바뀌어도 똑같이 해석된다. 즉, 사도라는 뜻의 아포스톨로스(?π?στολο?)는 주격으로서 맨 뒤로 가도 주격이며, 말씀을이라는 로곤(λ??ον)은 맨 앞으로 오더라도 목적격인 것이다. 레게이(λ??ει)는 그가 말하다라는 뜻의 3인칭단수 현재시제 동사로서 어느 위치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이는 영어에서 어순이 바뀌면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비교된다.
또 동사에 있어서 특이한 것은 히브리어 계통과 헬라어 계통을 막론하고 동사는 그 자체에 이미 인칭주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내적주어(內的主語)라고 하는데, 그래서 단 한 개의 동사만으로 문장을 이룰 수 있다. 특히
교착성이 매우 강한 히브리어 계통은 인칭목적어 역할을 하는 접미대명사와 동사가 결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한 단어가 주어, 동사, 목적어를 모두 가지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케탈람(????)이라는 말은 한 단어에 불과하지만 그가 그들을 죽였다라는 완전한 문장이 된다.
그리고 이들 계통의 언어는 동사 없이 명사와 명사 상당어귀만으로 문장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명사문장이라고 한다. 보통의 언어는 동사 없이는 말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주어와 보어를 연결해주는 불완전자동사로서 Be 동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명사문장은 연결동사가 전혀 없이도 충분히 문장이 성립한다. 그런데 헬라어 계통은 명사가 보어인 경우에는 연결동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히브리어 계통은 주어와 보어가 모두 명사일 때도 동사 없이 그대로 문장이 된다.
이상에서 원어문법 중에서 비교적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점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사실 원어문법은 선입관만 버리면 생각보다 훨씬쉽다는 것을 첨언해 둔다.
(인명과 지명의 유래)
원어공부의 유익은 많지만, 그 중의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명과 지명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어준다는데 있다. 성경을 많이 읽었으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인명이나 지명에 대해 낯설고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살아보지 않고 심지어 가보지도 않은 팔레스타인 땅을 비롯하여 고대 근동의 여러 지명은 더욱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원어를 알면 인명과 지명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그것은 인명과 지명이 대부분 합성어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름 중에는 야나 여 또는 요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이름이 많은데, 이는 여호와(????)의 준말이다. 즉, 여호와와 합성된 이름들이다. 이사야, 예사으야)는 구원하다라는 뜻의 야솨와 여호와가 합성되어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이름이 된 것이다.
여호수아, 예호슈아으)는 이사야와 똑같은 뜻을 가진 이름인데, 다만 순서가 바뀌어 합성되었다. 즉, 여호와와 야솨가 합성되어 역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 되었다.
또 미가서의 저자 미가라는 이름은 미크야의 준말인데, 누가라는 뜻의 미와 ˜처럼이라는 뜻의 케와 여호와의 준말인 야가 합성되어, 여호와 같으신 분이 누구신가?라는 뜻의 이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요엘 같은 이름은 여호와와 엘이 합성되었다. 엘은 하나님의 뜻인 엘로힘의 준말이므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또 사무엘은 듣다라는 솨마와 하나님의 뜻의 엘이 합하여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의 이름인 것이다.
한편 헬라어는 데오 또는 데 등이 붙으면 하나님이라는 뜻의 데오스(θε??)의 준말과 합성된 이름이다. 예를 들어 눅 1:3에 나오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은 데오스와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필로스(φ?λο?)가 합성된 이름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이 되었다. 또 바울 사도의 양아들이자 제자인 디모데는 가치라는 뜻의 티메(τιμ?)와 데오스가 합성되어 하나님의 존귀함을 아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Σ?μον)이었다. 이는 히브리어 쉬므온을 음역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그에게 붙여주신 아람어식 별명인 게바를 헬라식으로 바꾸어 부른 것이다. 헬라어의 정확한 발음은 페트로스(π?τρο?)이며, 남성명사로서 바윗돌이라는 뜻이다.
흔히 마 16:18에서 주님께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즉, 베드로라는 사람을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하여 결국 중세를 무너뜨리게 한 원흉인 베드로성당을 로마에 건축하기 전에 실제로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발견하여 그 위에다 세웠다고 한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반석이란 페트라(π?τρα)라는 여성명사인데, 이는 추상적인 의미로서 견고함을 가리킨다. 즉, 반석은 베드로가 바로 앞에서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믿음의 반석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바윗돌과 같은 믿음의 견고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이다. 이상은 원어문법을 알면 오류를 막을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다음 지명(地名)도 합성어가 많다. 예루살렘, 예루솰라임)은 하나님이 놓으셨다라는 뜻인 예루엘과 평화라는 뜻의 솰람이 합성되었다. 예루엘은 다시 놓다라는 뜻의 야라와 하나님이라는 엘이 합쳐진 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평화의 터전을 삼으셨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또 다윗이 사울왕을 피하여 숨었던 엔게디 같은 지명은 눈동자 또는 샘(Spring)이라는 뜻의 에인과 염소새끼를 뜻하는 게디가 합성되어 염소의 샘이라는 뜻이다. 그밖에도 엔세메스(태양의 샘), 엔학고레(부르짖은 자의 샘), 엔간님(동산의 샘) 등 엔이 붙은 지명은 매우 많이 나온다.
또 아벨이 합성된 지명은 ˜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아벨싯딤은 싯딤나무가 많은 언덕이라는 뜻이고, 아벨미스라임은 애굽인들(미스라임)이 와서 곡하던 언덕이라는 뜻이다. 아벨마임은 바다(마임)나 강을 끼고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며, 아벨므홀라는 춤(므홀라)추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벧이 붙는 지명은 모두 ˜의 집이라는 뜻인데, 아마 제일 많을 것이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고, 벧세메스는 태양(태양)의 집이며, 베들레헴은 떡(레헴)의 집이라는 뜻이다. 벧아웬은 악(아웬)의 집이라는 뜻인데, 벧엘 근처에 있던 땅으로 이방신을 숭배하는 곳이었으므로 벧엘과 대조하여 그런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신약에 많이 나오는 베다니(βηθαν?α)는 벧아니라는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인데, 직역하면 괴롬의 집 또는 고통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예수님 당시에 주로 문둥이들이 몰려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온갖 병자들과 거지들 그리고 고통받고 신음하는 자들만이 모였는데, 주님께서는 거기에서 나환자들을 고치시고 또 문둥이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이름을 보면 베다니라는 이름이 눈에 많이 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지만, 교회는 단순히 고통과 눈물을 치료하는 집이 아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였으므로 본질적으로는 고통이 없는 자들이다. 이제 교회는 오직 주님의 몸 된 거룩한 공동체가 천상(天上)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곳이다. 따라서 고통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는 교회 이름으로는 적절치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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